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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유전자―문화의 공진화
에드워드 윌슨 『통섭: 지식의 대통합』, 사이언스북스 2005
소광섭 蘇光燮
서울대 물리학부 교수 kssoh@phya.snu.ac.kr
“대다수의 과학자는 장인(匠人)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오늘날에는 더욱 그러하다. 그들은 전문분야에만 집중한다”(88면)라고 이 책 『통섭』(Consilience, 최재천·장대익 옮김)이 지적했듯이 오늘날 대부분의 지식인은 학문체계 전체를 조감할 정도로 지성적이지 못하다. 에드워드 윌슨(Edward O. Wilson)은 ‘사회생물학’이란 분야를 개척한 대생물학자일 뿐만 아니라, 이 책의 부제인 ‘지식의 대통합’(the unity of knowledge)을 논할 만큼 시대의 걸출한 지성인이라 하겠다. 책 제목인 ‘통섭(統攝)’이 매우 낯설게 느껴질 수 있는데, 글자 그대로의 뜻은 ‘큰 줄기를 잡다’로서 모든 학문체계를 아우르는 큰 줄기를 잡는다는 의미로 보면 무난하겠다.
‘통섭’은 자연과학자로선 드물게 문장력이 뛰어난 최재천(崔在天) 교수가 일년이 넘게 애써 찾아낸 어휘이다. 제목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면 이 책의 핵심주장을 파악할 수 있을 만큼 이 어휘에는 특별한 의미가 부여되어 있다. 역자가 제시한 비슷한 단어로 통일(unification)이 있는데, 통일은 ‘진시황이 전국시대 제국을 병합하여 천하통일을 이루었다’ 또는 ‘아인슈타인이 중력과 전기력의 통일을 시도했다’고 하는 예들처럼 위계가 없이 병렬적인 존재들을 종합하는 의미로 쓰인다. 이 책의 경우 과학과 예술, 자연과학과 인문학을 통일하자고 한다면 남북이 한 국가로 합쳐지듯이 어떤 하나의 학문을 만들자는 것이 되겠다. 통섭으로 번역된 윌슨의 생각은 이런 통합이 아니다.
윌슨은 학문의 집합에는 위계가 있다는 점을 전제한다. 예를 들어 사회학, 인류학, 경제학 등 사회과학 계열의 학문은 인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할 때 합리적이고 발전이 가능한 분야가 될 수 있다. 따라서 심리학은 사회과학의 기본이 된다. 그런데 심리학은 인간의 두뇌와 그 활동을 모른 채 연구한다면, 사실과 거리가 먼 상상의 허구로 떨어지고 말 가능성이 있다. 한편 인간 두뇌의 구조와 기능은 신경생물학의 일부이고, 당연히 생물학적 지식의 바탕 위에 서 있다. 이러한 일련의 고찰을 보면 사회과학 분야는 생물학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정도를 넘어서 ‘하나의 확대된 생물학 지식체계’의 상층부 또는 표층부에 해당한다. 따라서 사회학 인류학 문화학 심리학 뇌과학 진화학 생물학 등 다양한 학문의 가지들은 생물의 계통수처럼 위계적 체계에 의해 하나로 파악될 수 있다. 이를 학문들의 통섭이라 하겠다.
사회과학과 생물학의 통섭적 체계화를 간략하게 예시했지만, 통섭은 ‘세계는 질서정연하여 몇개의 자연법칙들로 설명될 수 있다’는 ‘통합과학’에 대한 과학자들의 신념에 근거를 둔다. 이를 저자는 제1장에서 ‘이오니아의 마법’(Ionian Enchantment)이라 하고, 이러한 신념의 뿌리는 멀리 그리스의 탈레스와 아리스토텔레스에서부터 현대의 아인슈타인에 이르는 깊고 심원한 것이라고 말하며 학문통섭의 대장정을 시작한다.
제3장 「계몽사상」은 이 책 전체의 사상적 바탕이라 할 수 있다. 이 장의 첫 문단은 다음과 같다. “지적인 통일이라는 꿈은 계몽운동이 일어난 17, 18세기에 처음으로 꽃을 활짝 피웠다. 이때는 마음의 이카로스가 하늘로 날아오른 시기라고 볼 수 있다. 세속적인 지식이 인류의 권리와 진보에 기여한다는 비전은 서양이 인류문명에 남긴 가장 위대한 공헌이다. 이 비전이 근대를 출발시켰으며 우리 모두는 그 유산을 물려받았다. 하지만 그 비전은 실패했다.” 역사적 현실로서 계몽운동은 실패했으나, 그 사상은 면면히 흘러 학문의 발전을 통해 되살아났다는 것이 저자의 판단이다. 그래서 이 장은 자연과학의 발전으로 우주와 인간 모두를 이성에 의해서 파악할 수 있다는 강한 긍정으로 끝맺는다. “그리고 계몽사상 최고의 정신에서 다시 시작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위대한 수학자 다비트 힐베르트가 계몽사상으로 표출된 인간 정신의 일부를 잘 포착해 말했듯이, ‘우리는 반드시 알아야 하고, 우리는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제4장 「자연과학」에서 설파하듯이 윌슨의 계몽사상적 신념인 ‘우리는 알게 될 것이다’의 근거는 자연과학의 발전에 있다. 그는 낭만주의,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의 반(反)이성적 또는 초이성적 사조와 신과학운동의 전일성(holism) 등에 대하여 환원주의적 과학의 탄탄한 성과들을 들어 조목조목 반박한다. 그래서 이러한 이성적·환원주의적 자연과학의 성과에 바탕하여 마음, 문화, 인간본성, 예술, 인문학, 윤리와 종교에까지 통섭적 이해의 지평을 펼쳐 보인다.
지식의 대통합을 위한 통섭적 시도와 그 의의를 구체적으로 설명한 곳이 이 책의 핵심인 제7장 「유전자에서 문화까지」이다. 보편적이고 합리적인 통섭의 원리가 모든 자연과학을 관통하고 있음을 정당화하는 논거들을 제시할 뿐만 아니라, 두 문화, 즉 과학적 문화와 인문학적 문화를 이어주고 통섭시키는 핵심으로 유전자와 문화의 관계를 들어 상세히 고찰한다. 생물학과 문화가 어떻게 상호작용하는가를 밝힘으로써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분리된 양극화현상을 종식시키고 학문의 대통합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아직 이 과제의 해답은 주어지지 않았지만, 생물학 심리학 인류학 등의 다양한 관점들로부터 ‘유전자―문화 공진화’(gene-culture coevolution)라는 과정을 상정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인류가 유전적 진화에 병행하여 문화적 진화를 덧붙였으며 이 두 진화는 상호작용으로 연결됐다는 견해이다.
유전자가 인간의 본성과 문화에 어떤 방식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지는 간단하게 설명되는 것이 아니다. 피아노를 잘 치게 하는 유전자라든가, 인간 행동에 일대일로 대응하는 유전자 지도 같은 것으로 파악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유전자와 문화의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인간행동유전학’이나 ‘인간사회생물학’ 또는 ‘진화심리학’ 같은 전문분야의 연구를 어느정도 알고 있어야 하고, 한두 개의 과학적 용어를 배우지 않으면 안된다. 예컨대 ‘유전도’(heritability)는 ‘피아노를 잘 치게 하는 유전자’라는 소박하고 틀린 생각을 과학적이고 측정 가능한 개념으로 끌어올린 것이라 하겠다. 한편 ‘후성규칙’(後成規則, epigenetic rules)은 유전자와 문화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개념이다. 유전자 자체에 들어 있는 규칙이 아니고, 문화에 의해 영향을 받는 인지적 신경회로와 함께 만들어지는 규칙이라고 하겠다. 이것이 유전자―문화 공진화의 핵심기전이다. 윌슨이 강조하여 설명한 부분이다.“어떤 이들은 주변문화와 환경에 더 잘 생존하고 번식하도록 해주는 후성규칙들을 대물림한다. 그리고 그런 규칙을 전혀 갖지 않은 사람이나 있어도 약한 규칙을 가진 이들은 생존과 번식에서 밀려난다. 바로 이런 방식으로 좀더 성공적인 후성규칙들은 많은 세대를 거치면서 그 규칙들을 규정하는 유전자들과 함께 개체군 내에서 널리 퍼지게 된다. 결과적으로 인간두뇌의 해부·생리적 구조가 진화해왔듯이 행동도 자연선택에 의해 유전적으로 진화해왔다.”(233면) 이 문단은 사실상 이 책 전체의 핵심이라 할 만하다. 인류의 문화 또는 인간의 본성이 유전자에 의해서 어떻게 상호작용하며 형성되는가를 과학적 방법을 통해서 밝힐 수 있으며, 이러한 과정이 다양한 학문의 통섭으로 이어진다는 생각이다.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대통합을 시도하는 이 책을 통해 근대 지식체계를 조감하고 한 줄기로 꿰뚫는 윌슨의 광대한 학문세계는 감탄할 만하다. 그는 진정한 현대 계몽사상가라 할 수 있다. 그는 “계몽사상의 유산은 우리는 우리 자신의 힘으로 알 수 있고, 앎으로써 이해할 수 있으며, 이해함으로써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506면)라는 신념을 현대과학 특히 생물학의 발전에 근거하여 제시한다.
여기서 ‘현명한 선택’이라는 문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책의 논지는 학문의 종합이라는, 상아탑의 세계에만 국한된 일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 반대이다. 저자가 주장하는 학문의 통섭이 전문연구가들에게 미칠 영향이 얼마나 될지는 미지수인 반면, 이 책의 논지가 함의하는 정치·사회적 영향은 계몽사상만큼이나 지대하다. 종교 문화 사회 교육 정치 등 거의 모든 분야에 직접적이고 강력한 방향제시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독자는 종교와 윤리 문제까지도 자연과학적 지식에 바탕해 판단해야 한다는 윌슨의 주장과, 자연과학을 포함한 모든 지식체계가 상대적이라는 포스트모더니스트의 관점 사이에서 그야말로 현명한 고찰을 해야 한다. 이에 덧붙여 그가 튼튼한 밑받침이라고 생각하는 시간·공간·물질의 자연은 그 기원이 무엇인가를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이것들이 근대과학자들의 생각처럼 그렇게 확실히 객관적이고 실재하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들이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을 주의해서 읽는다면, 거대한 지성의 주장에 휩쓸림 없이 현대 학문체계 전반에 대해 조감하고 그것의 인문·사회적 함의를 내다볼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