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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박형준 朴瑩浚
1966년 전북 정읍 출생. 199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 『물속까지 잎사귀가 피어 있다』 등이 있음. agbai@korea.com
흔적
입을 벌리고 그는 잠을 잔다
난쟁이들이 들락거리는 꿈이라도 꾸는가
썩어버린 이가 동굴 천장에 매달린 石筍이다
꽃 한송이를 밀어넣으면
금세 흉곽까지 내려가리라
그의 잠은 배고픈 블랙홀이다
그러다가 간혹 휘파람 소리를 내보낸다
사방이 빌딩으로 막힌 작은 공원,
한껏 벌어진 그의 입속에 겨울빛이 동면을 서두른다
더 어두워지기 전에 빛이, 石筍에 부딪히며
아래로 아래로 꺼져간다
간밤에 큰눈이 내렸다
그의 한껏 벌어진 입속에도
따뜻한 잎들이 두껍게 깔려 있을 것이다
하지만 눈밭 속에서 내가 도착했을 때
아침 햇살을 받으며 그가 누워 있던 곳은
자리만 찍혀 있고,
길게 발자국이 흔적에서 뻗어나가고 있는 것이었다
九官鳥
안.녕.하.세.요. 여.기.서.는.속.도.가.느.껴.지.지.않.는.답.니.다.
홍은동 295번지와 연희동의 교차로 한 귀퉁이의 연희 지하차도 위는 풀밭으로 되어 있다. 풀밭 다리를 건너면 아파트가 보이고, 다리 아래 굴로 차들이 빠르게 빠져나가지만, 여기서는 시간이 방아깨비 발처럼 끄덕끄덕 제자리를 맴돌 뿐 흘러가지 않는다
먼저 밤이면 뿌리가 달빛에 젖는가
풀밭 다리에 서서
나는 희끄무레하게 빛나는 九官鳥를 쳐다본다
구관조는 죽어서야 비로소 새장 밖으로 나온 모양이다
버려진 속은 달빛을 받아 흰 날개들이 무수히 태어나는 것처럼 보인다
내장을 둥글게 파먹고 있는 구더기떼가
구관조에게는 빛이다
끼익끼익 차들이 아스팔트에 기스를 내며
때로는 종주먹을 날리며 운전사들이 멱살을 붙잡고 싸우는 동안에도
구관조는 다리 위에서 꾸물꾸물 구더기를 낳고 있다
천천히 알을 까며 밤의 기슭으로 흩날린다
화관처럼 생긴 머리 위에 누가
시계꽃을 엮어 장식해놓았다
소녀 하나가 아파트에서 나와
풀밭 다리를 건너오는데
바랜 구관조의 깃털이 머리핀처럼
불어온 바람에 흔들린다
죽어서야 날개를 낳는 구관조가
그 순간 명랑하게 내게 인사를 건넸는지
다리 아래로 시간이 빠르게 흘러간다
활공
뱀이 날아간다
나무를 기어오르며
비늘에 반짝이던 빛으로
머리를 한껏 내밀어
공중으로 뛰어오른다
단 한번 날개를 원한 적 없다
백미터 이백미터 상공에서
저 너머의 빛을 향해 날아간다
창문 너머로 마른 덩굴식물이
눈을 맞으며 난간을 기어오른다
대낮을 졸음으로 보내고
밤중에 창문을 초조하게 어슬렁거리는
내 그림자처럼 잎들은 간신히 난간을 기어오른다
뱀이 날아간다
直立을 꿈꾼 적 없다
죄의식으로 일생을 구부리며
덩굴식물 위 눈발처럼 뱀이
허공에 찍혀 있다 아프리카 밀림을
방바닥에 펼쳐놓고
물끄러미 창문을 바라본다
초조하게 빛들이 허공에서
창문을 비집고 들어온다
날개 없이 들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