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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이재무 李載武
1958년 충남 부여 출생. 1983년 『삶의 문학』으로 등단. 시집 『섣달 그믐』 『몸에 피는 꽃』 『시간의 그물』 『위대한 식사』 『푸른 고집』 등이 있음. poet8635@dreamwiz.com
신발을 잃다
소음 자욱한 술집에서 먹고 마시고 웃고 떠들고
한참을 즐기다 나오는데 신발이 없다
눈 까뒤집고 찾아도 도망간 신발 돌아오지 않는다
돈 들여 장만한 새 신 아직 길도 들이지 않았는데
감쪽같이 모습 감춘 것이다 타는 장작불처럼
혈색 좋은 주인 넉살 좋게 허허허 웃으며 건네는
누군가 버리고 간 다 해진 것 대충 걸쳐
문밖 나서려는데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찬바람,
그러잖아도 흥분으로 얼얼해진 뺨
사정없이 갈겨버린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구멍난 양심에 있는 악담 없는 저주 퍼부어대도
맺혔던 분 쉬이 풀리지 않는데
어느만큼 걷다보니 문수 맞아 만만한 신
거짓말처럼 발에 가볍다
투덜대는 마음 읽어내고는 발이 시키는 대로
다소곳한 게 여간 신통방통하지가 않다
그래 생각을 고치자
본래부터 내 것 어디 있으며 네 것이라고 영원할까
잠시 빌려쓰다가 제자리에 놓고 가는 것
우리네 짧고 설운 일생인 것을.
새 신 신고 갔으니 구린 곳 밟지 말고
새 마음으로 새 길 걸어 정직하게 이력 쌓기 바란다
나는 갑자기 새로워진 헌 신발로, 스스로의 언약을
때마침 내리기 시작한 새 눈
인주 삼아 도장 꾹꾹 내려찍으며
영하의 날씨 대취했으나 반듯하게 걸어 집으로 간다
관상용 대나무
도회지 공원이나 술집 한구석
장식품으로 살아가는 저 홀로 대나무
제 뜻과 상관없이 이주되어
실향을 사는
움직일 줄 모르는 자존과 비애
저 나무에서 나는
옛 소련시절 강제분할의 고통을 겪은
사할린 동포를 겹쳐 읽는다
아메리카 원주민 인디오의 눈물을,
죽어 상품이 된 체 게바라의 혁명을 본다
한 시대 양심의 본이었으나
자본의 데릴사위가 되어 웃음 파는
쓸쓸한 선비의 초상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