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아시아인에 의한 동북아 평화는 가능한가
중국―타이완과 한국, 평화의 연동구조
난팡숴 南方朔
1957년생. 타이완에서 야당 정치활동이 금지되었던 시기에 타이완 민주화운동에 적극 참여했던 문화·정치평론가. 『中國時報』 기자, 논설위원 등 역임. 현재 『新新聞』 주필로 활동중. 저서로 『憤怒之愛』 『文化啓示錄』 『自由主義的反思』 등이 있다. editor@new7.com.tw
ⓒ 南方朔 2005/한국어판 ⓒ (주)창비 2005
*본고는 타이완의 시사지 『新新聞』 2005년 946호에 실린 글을 본지의 요청에 의해 필자가 수정·보완한 것으로, 원제는 「阿扁求救: 山姆大叔左右爲難」이다. 본문의 각주는 모두 한국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 옮긴이 주이다.
타이완과 중국의 새로운 모색
제2차 세계대전 후 냉전체제의 양안(兩岸) 대결구도로 인해 타이완은 자신의 안보를 위하여 미국과 일본의 동아시아 정책에 절대적인 지지를 보내왔다. 비록 미국과 일본이 중국과 정식 외교관계를 맺고 심지어 유엔에서 중화민국의 명의가 중화인민공화국으로 대체된 후에도 타이완의 외교정책은 여전히 미국과 일본의 정책에 순응하는 태도를 보여왔다. 이러한 정책은 민진당(民進黨)이 집권한 후에도 여전한데, 그것은 민진당이 내걸고 있는 타이완 독립이라는 지상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이며, 때문에 민진당은 미국과 일본의 지지를 끌어내려고 더욱 극단적인 친미·친일 노선을 걷기 시작했다. 미국과 일본이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옳으며 미국과 일본이 행하는 어떠한 정책도―심지어 타이완과는 전혀 상관없는 테러와의 전쟁에서도 늘 가장 먼저 미국에 지지를 보내는 성명을 내는 등―조금의 동요도 없이 지지하는 상황을 연출하곤 했다. 민진당에 있어서 타이완의 자주의식은 오직 뻬이징을 적대시하는 데 유효했으며 미국과 일본의 요구에 순응하는 것이 국익에 부합한다고 여기는 것 같다. 이러한 면에서 민진당은 그들의 타도대상이었던 전체주의적인 국민당 쟝 졔스(蔣介石), 쟝 징꿔(蔣經國)정권보다 훨씬 더 친미적이며 더욱 극단적인 냉전체제의 옹호자로 보인다. 이에 반해서 동남아시아 국가들과는 단순한 경제 및 무역관계 외에는 별다른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있지 않다. 어떻게 보면 너무 극단적인 친미·친일 외교정책으로 인하여 오히려 아시아 신흥 경제발전의 한 주역으로서 해야 할 적극적 외교노력을 포기하고 있다고 해도 무방할 듯한데, 이것은 상당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에 반해 현단계에서 중국은 경제발전을 위한 평화적 환경조성을 최우선 목표로 하여, 그 경제력을 바탕으로 점차 지역의 강대국 위치를 공고히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중국은 동남아시아 문제에서도 ‘평화흥기〔和平崛起〕’ ‘평화발전〔和平發展〕’을 토대로 한 ‘연성(軟性)권력’의 구축에 힘을 들이고 있으며, ‘중국과 동아시아 국가 간의 자유무역협정’ ‘뽀아오포럼(博鰲論壇)’ 등을 통해 그 이념을 추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1 또한 중국은 남북한과 모두 우호적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동아시아에서 타이완문제를 미일 공동방위계획의 ‘요주의’ 상황으로 주시한다는 등의 ‘중국위협론’의 조성을 견제하는 한편, 미국 극우 매파의 득세에 따라 동아시아에서 당분간 미국과 일본의 대응에 대해 더욱 조심스러운 행보를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동아시아 국제정세의 변화 속에서 최근에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이 바로 타이완 야당 수뇌부의 중국대륙 방문이다. 국민당 부주석 쟝 삥쿤(江丙坤)의 중국방문 후, 국민당 주석 롄 쟌(連戰)과 친민당 주석 쑹 츄위(宋楚瑜) 등의 중국행이 이어졌다. 이런 양안의 진정한 ‘선의방문(善意訪問)’은 이미 역사적 행보로 기록되었으며, 여러 사람들이 예측했듯이 민진당은 적절한 대응책을 찾지 못하자 급기야는 막후 실력자인 미국의 우익 매파에 도움을 요청하게 되었다. 그들의 요구는 미국이 전면에 나서 압력을 가하여 타이완 스스로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새로운 사태로 발전하는 것을 막아달라는 것이었다.
미국 매파의 기본적 양안정책의 핵심은, 지속적으로 타이완 독립을 지지하는 것이 소극적인 면에서는 자신들의 중국봉쇄정책에 부합될 뿐 아니라, 적극적인 면에서는 타이완해협의 긴장을 확대하여 중국을 공략할 구실을 찾을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다. 부시정부가 2001년 취임한 지 석달도 채 안된 상황에서 19면에 달하는 군비확대방안을 통해 항공모함과 항모전투기를 포함한 전투단위의 증편과 소형 전술핵무기의 확충을 계획의 중점으로 삼은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들의 군비확대계획은 중국봉쇄정책에 가장 적합한 군사적 대비를 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예상 못한 9·11사태를 맞이하여 동아시아 정치질서의 재정비 시간표는 뒤로 늦추어지고 대신 중동이 주요 목표로 선정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부시는 가까운 장래에 중동과 동아시아 문제를 일거에 해결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집권 1기를 마쳐가는 상황에서도 미국 군비를 4800억 달러까지 확충했는바 그 주된 원인도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이러한 계획들이 가까운 장래를 대비한 것이라고 하지만, 현단계에서 미국의 기본 양안정책은 여전히 ‘하나의 중국 원칙〔一個中國原則〕’을 지지하고 타이완 독립을 반대하며 양안은 평화적 대화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민진당의 ‘구조신호’는 미국을 진퇴양난에 빠지게 했는데, 미국이 만약 선의를 토대로 한 이번 양안간 방문을 공개적으로 반대한다면 바로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공개하는 상황이 된다는 뜻이다. 미국이 사실 민진당을 지지하고 있으며 타이완 정국을 암묵적으로 좌지우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폭로된다면, 이것은 자국의 기본정책에 어긋날 뿐 아니라 중국과 서로 직접적인 대립을 하게 됨을 의미한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로 말미암아 타이완 민의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반독립’ 세력과 결별하여 이들이 ‘반미’로 전환할 구실을 만들어주게 되면 한국에서처럼 결국 타이완에서 미국의 영향력이 실질적으로 감퇴할 수도 있다는 우려였다. 한국의 경우에서 보듯이 이것은 결코 미국의 이익에 부합되지 않는 것이었다.
타이완정부의 구조신호와 미국의 화답
따라서 미국은 공개적으로 국민당과 친민당의 방문을 반대할 수도 없는데, 섣불리 반대를 표명했다가는 자신을 곤경에 빠뜨릴 뿐 아니라 헤아릴 수 없는 댓가를 지불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표면적으로는 반대를 언급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아마도 미국은 개별적인 혹은 비공식적인 채널을 통한 압력으로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타이완 총통선거 기간중 민진당과 쳔 슈이酸(陳水扁)의 ‘두 개의 총알’2 조작사건과 민진당이 연이어 자행한 위법사태에서 국민당과 친민당은 미국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게 되었기 때문에 미국 역시 이러한 개별적 압력이 더이상 큰 효과를 거둘 수 없다는 것을 어느정도 인지하고 있다. 그러나 그외에는 달리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던 것 같다.
이와같은 민진당 정부의 미국에 대한 ‘구조신호’와 미국의 태도 등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바로 타이완 독립을 반대하고 양안간의 평화유지를 바라는 절반의 타이완인들이 드디어 새로운 길을 찾았다는 것이다. 이들은 타이완 독립을 주장하며 맹목적 냉전체제를 지지하고 미국에 의지하는 현 민진당 정부와 달리, 타이완의 평화 실현이라는 입장에서 양안의 화해를 통해 자신의 길을 찾으려는 역사적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타이완의 사회적 상황으로 볼 때, 양안간의 진정한 이해와 교류의 시작은 단순히 좋은 말로 어르고 속으로는 악의적 행위를 일삼는 것과는 다르며, 끊임없이 충돌을 야기하고 ‘매국―애국’ ‘통일―독립’ ‘중국인―타이완인’의 대립구도를 통해 서로 분열시키고 자극하여 그 속에서 정치적 이익을 얻으려는 얄팍한 수단이 더는 통하지 않게 된 것을 의미한다. 과거 민진당은 모든 수단을 동원하고도 타이완인 대다수의 지지를 이끌어내지 못했는데, 이것은 타이완인이 독립의 댓가인 전쟁을 두려워해서라기보다 사람들을 서로 갈라놓고 증오와 적대적 감정을 정치적 자본으로 삼으려는 행태에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타이완인의 마음 역시 인류의 근본인 인성에 기초하므로 이렇게 타락하는 것을 지지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급진적 타이완 독립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절대 다수인 현재, 이것이 진정으로 의미하는 것은 우리 모두 언젠가 진정한 선의를 기초로 한 양안간의 교류와 협력이 지금의 각종 위기를 해결할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 서로를 받아들이는 평화적 토대를 구축할 수 있다고 믿는다는 점이다. 롄 쟌과 쑹 츄위의 역사적 행보가 국민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것은 결국 이러한 기대를 적절히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민진당이 이들의 중국 방문에 히스테리적 반응을 보이고 미국에 ‘구조신호’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결국 민진당도 이러한 평화적이고 건설적인 방문과 이로 인해 열리게 될 양안간 교류가 자신의 지지기반을 와해하고 과거의 선거전에서 사용했던 흑색모략들이 더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상호 선의에 기초한 양안협력의 새 역사
양안관계를 자세히 들여다볼 때 20여년에 이르는 현재 중국의 지속적인 경제발전은 이제 더욱 새로운, 그렇지만 힘겨운 전환기에 다다랐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따라 뻬이징은 이미 새로운 지위와 역량에 맞는 장기적 전략구축에 촛점을 맞추어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뻬이징당국은 ‘난하이행위준칙(南海行爲準則)’3에 서명한 후, 동남아국가와 협력관계를 구축했으며 이와 더불어 평화적으로 국경문제를 처리하겠다고 선언함과 동시에 인도와 새로운 전략적 협력관계를 구축했다. 또한 남한의 지지 속에서 미국이 북한에 군사적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저지하는 데 성공하기도 했다. 이러한 행동들은 결국 지속적인 경제성장에 필요한 평화적 환경 조성을 위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이러한 시기에 중국한테는 타이완의 협력과 협조가 가장 중요한 문제이기에, 타이완으로서는 작은 것으로 뻬이징의 커다란 선의를 얻어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할 수 있겠다. 국민당의 롄 쟌 및 친민당의 쑹 츄위 주석은 모두 거시적 국제정치관을 가진 정치계의 지도자들이므로 이러한 시기에 먼저 선의적 첫발을 과감히 내딛음으로써 뻬이징의 더 큰 호의를 얻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선의로 선의를 도출함으로써 악의와 계책이 난무하는 양안관계를 종식시키고 화해와 평화를 이끌어낼 기회를 마련할 수 있었다. 이러한 방문으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먼저 중국이라는 새로운 시장의 적극적 개발로 타이완의 새로운 경제활로를 개척할 수 있는 경제적 이익이다. 이와 더불어 더욱 긴밀하고 정상적인 정치·경제 교류는 타이완 내부의 통일 대 독립이라는 극단화된 이데올로기적 사회분열과 난맥상을 평화라는 새로운 이념으로 해결하는 토대를 마련할 수 있고, 또한 뻬이징의 협조 아래 국제사회에서 고립에서 참여로 전환할 수 있는 기회이자, 나아가 타이완의 안전보장을 더욱 공고히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양안간의 대립을 종식시킬 수 있는 새로운 토대를 마련하려는 양안의 낙관적 기대를 가능케 하고 서로에게 희망을 줄 수 있다는 점이다. 더욱이 뻬이징이 타이완을 아주 필요로 하는 시기에 타이완이 먼저 진솔한 선의를 통해 중요한 촉매제 역할을 하게 되었기에 당연히 중국인들의 더욱 폭넓은 이해와 감사를 받게 될 것이며 이로 인한 교류는 양안이 함께 협력하여 써가는 새로운 역사를 좀더 건설적인 방향으로 이끌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국민당과 친민당이 내딛은 첫걸음은 양안에 유익한 결과를 가져올 뿐만 아니라, 타이완 내부로서도 다시 편을 가르고 미워하고 적대시하지 않아도 되는 인성회복의 첫걸음이기도 하다. 역사적 관점에서 돌이켜보면 양안이 피동적으로 덧씌워진 역사적 굴레를 벗어나 자주적인 선택을 통해 협력의 역사를 열어가는 시대를 만난 것이다. 이것은 진정한 주체성의 회복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주체성의 회복은 타이완에 유리할 뿐 아니라, 양안에 서로 도움이 되고, 더욱 중요하게는 전체 아시아에서, 심지어 세계적으로도 상당히 심대한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현대사의 궤적을 돌이켜보았을 때 양안에 덧씌워진 굴레의 본질 역시 결국은 역사서술의 권력을 장악한 세계 초강대국이 도덕과 문명이라는 고상한 수사어로 우세한 군사력과 무기를 이용해 세계정복에 나선 자신들의 야만적 행위를 문명의 합목적성이라고 포장해온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은 결국 허구와 허상의 도덕으로 포장된 역사극에 지나지 않으며, 후발국의 피맺힌 고난과 절망의 역사가 초강대국이 써내려간 역사 속에 매몰되고 심지어 조작된 것에 다름아니다.
주체성의 회복 추세와 남한의 선행적 의의
20세기 중반 이후 전세계 후발국들의 ‘주체성 회복’은 결코 막을 수 없는 새로운 시대적 요구가 되어 분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러한 요구 자체가 초강대국의 의지와 이익에 위배되었기에 그 발전은 상당한 고난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간고하더라도 이 길이야말로 결코 꺾여서는 안될 우리의 목표이자 분투의 대상인 것이다.
이런 시대적 요구 속에서 동아시아, 특히 현재 타이완이 시도하는 이 새로운 선택은, 동아시아의 자주화 발전이라는 맥락에서 다른 나라보다 진일보한 발전을 이루고 있는 남한의 뒤를 따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지역에서 남한의 첫걸음이 있었고, 그 선행(先行)적 의미가 너무나도 중대하기에 먼저 이에 대한 회고가 있어야 한다. 남한은 제2차 세계대전에 이어 일어난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어쩔 수 없이 동아시아 냉전체제의 전초기지가 되었다. 남한은 장기간 미일에 의존하게 되었으며 또한 이들의 교두보로서 역할을 담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였다. 하지만 남한이 이러한 냉전체제에서 서서히 경제성장과 민주발전을 이루어가게 된 것은 기적이라고밖에 할 수 없겠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은, 1997년 미국발 금융공격에 의한 아시아 금융위기가 발생하고, 1998년 미국이 남한의 경제가 허약한 틈을 이용해 한반도 긴장을 고조시켜서 자국의 이익을 실현하는 것을 목도한 당시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이 이를 통해 근본적인 동아시아 특히 남북한 관계에 대한 사고의 전환을 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김대중은 동서독이 선의와 화해를 기반으로 하여 결국 독일의 통일을 가져왔을 뿐 아니라 유럽의 중립화라는 성과를 이룩한 경험을 교훈삼아 드디어 동아시아에서 냉전체제를 벗어나 한반도와 아시아를 위한 새로운 노선을 채택하게 된다. 그래서 그는 취임 초 발표한 ‘양광정책(陽光政策, 햇볕정책)’이라는 원칙을 좀더 과감히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그는 먼저 미국의 TMD(전역미사일방어체제) 구축 참여에 반대하였는데, 이것은 남한이 미국중심의 동아시아 냉전체제에서 벗어나겠다는 중대한 선언이었을 뿐 아니라 세계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한 정치적 시도였다. 뒤이어 김대중 대통령은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 위원장과 ‘양김 회동’을 성사시켰는데, 이를 위해 남북한은 세 차례의 뻬이징 사전회의와 한 차례의 평양회담을 갖고 준비를 진행했다. 김대중 대통령의 방문을 계기로 남북한은 텔레비전을 통해 서로간의 선의를 확인할 수 있었고 심지어 눈물을 흘려가며 이 역사적 사건이 남북관계의 새로운 전기가 되기를 기원했다. 김대중은 이렇게 역사적 첫걸음을 내딛었으며, 2000년초에 방문한 독일 국회에서 행한 연설에서 ‘대화해’와 ‘대담판’의 이념이 어떻게 독일의 경험에서 도움을 받았는지를 역설하기도 했다. 결국 김대중은 이러한 이념과 국제정치 무대에서의 실천으로 2000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할 수 있었던 것이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듯이, 어느 후발국이든 자주의 길을 찾는 경우 그 본질이 강대국의 의지와 이익에 배치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대부분 강력한 반발과 압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김대중의 노력들이 냉전체제를 종식시키는 데 일조했지만, 2001년 초 러시아 뿌찐(Putin) 대통령의 서울 방문을 맞아 한국이 보여준 태도4에 의구심을 가진 부시 대통령이 김대중 대통령을 초청하여 3월 7일 백악관에서 직접적으로 이에 대해 추궁하기도 하였으니, 이러한 고충이 어떠한 것인지 알 수 있겠다. 하지만 이튿날 김대중은 미국의 기업연구소(AEI)와 외교협회(CFR)의 간담회에서 행한 연설에서 이에 정면으로 맞받아치는 대응을 하였다. 강연에서 그는 미국측에 “우리는 북한을 도와 우리에 대한 의존을 강화하고 한반도의 평화협력의 길에 이를 수 있도록 더욱더 재촉하여 국제사회에서 책임있는 일원이 되게 해야 합니다. 나는 북한에 대한 이러한 노력이 그들이 다시금 구시대적 행태로 돌아가지 않게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라고 진심으로 믿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5
김대중은 당연히 부시를 설득시키지는 못했지만 그러나 부시의 압력이 김대중의 굴복을 끌어내지도 못했다. 반대로 김대중의 이러한 탈냉전 시도를 통해 한국은 미국과 일본의 이익을 뒤로하고 북한, 러시아 그리고 중국을 향한 새로운 방향에 눈을 뜨게 되었으며, 이것은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의 정책에서도 존속하게 되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자신의 선거기간 중에 공개적으로 “한반도의 긴장은 미국의 이익이지 결코 한민족의 이익이 될 수 없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김대중에서 노무현으로 이어지는 남한의 ‘탈미국’과 ‘반일’은 어떻게 보면 결국 남한이 자신의 자주적인 길을 찾으려는 필연적 행보였던 것이다.
이를 증명하는 것이 최근 노무현 대통령이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에 뒤이어 제출한 진일보한 ‘동북아균형자론’이라고 할 수 있다. 노무현은 “가능한 모든 노력을 기울여 북한에 대한 무력 사용을 반대”하여 동북아의 평화구축을 실현한다는 ‘동북아균형자론’을 제시했다. 이것은 바로 남한이 미국과의 관계에서 과거의 대리인이나 혹은 동조자에서 벗어나 대등한 관계를 토대로 서로 존중하는 관계로 전환해나가고자 하는 것으로, 한국은 이미 ‘탈미국화’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새로운 자주의식을 발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일본과의 새로운 관계 설정과 의견 교환 및 협조를 통하여 미국의 일방적인 정책결정 과정에 변화를 촉구하며 이를 토대로 동북아시아의 평화 구축과 평화적 수단에 의한 남북문제 해결의 새로운 기회를 창출한 것이다. 이러한 남한의 자주의식의 형성은 사실 남한의 동아시아 시각과 의식의 성장을 대변하며 전체 동아시아 평화체제 구축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고 볼 수 있겠다.
남한의 이러한 자주의식 고양과 동아시아 의식의 제고는 당연히 자신의 역사경험과 역사적 고통을 기초로 폭넓은 반성의 토대에서 나온 것으로, 역사적 속박과 굴레에서 벗어나 자주적 사고를 전개할 수 있는 동아시아의 새로운 평화체제에 지대한 공헌을 할 수 있으리라 여겨진다. 남한의 자주화 덕분에 이미 남한은 올해 타이완을 제치고 중국의 제일 큰 무역수입국이 되었으며, 2003년 한 해에만 남한의 유학생이 2만5천여명에 달하여 중국에 가장 많은 유학생을 보낸 나라가 되었다.
냉전체제를 벗어나려는 남한의 시도는 상대적으로 전체 동북아시아의 새로운 정치변동을 가져오기도 했다. 첫번째는 과거 일본이 동북아시아의 ‘제2전선’, 한국이 ‘제1전선’으로 한반도의 긴장과 충돌은 한반도의 재난이었을 뿐 일본에는 언제나 안전을 보장해주는 체제였던 데 비해, 남한의 냉전체제 이탈과 더는 미국과 일본의 허수아비로 남지 않겠다는 자주노선은 일본으로 하여금 동북아의 첫번째 교두보가 되어야 함을 의미하게 된 것이다. 일본은 이러한 사태의 추이에 상당히 불만을 가지고 있으며 이를 계기로 남한을 대신할 새로운 ‘제1전선’의 필요성이 절실해졌는데 일본의 극우 매파세력이 점점 노골적으로 타이완 독립을 지지하게 된 근본적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새로운 아시아를 위한 타이완의 역할
두번째로 주의를 기울여야 할 점은 남한의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의 탈냉전체제 정책 이후로 미국 역시 한반도에서 자신들이 긴장과 충돌을 조장하면 남한 민중의 반감만을 가져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때문에 이러한 동북아의 긴장과 충돌점을 타이완으로 옮기려는 시도를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올해 2월 미국과 일본이 안보협의회에서 타이완을 ‘요주의’ 범위에 넣은 이유 역시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일본의 방위청이 공개적으로 인정했듯이, 2004년 쌘프란씨스코에서 개최된 안보사무회담부터 미국의 강력한 요청으로 일본이 타이완문제에 ‘개입’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이는 결국 미국이 일본을 지지하고, 일본은 타이완 독립운동을 지지하여 타이완으로 하여금 남한이 이미 거부한 동아시아에서의 미국과 일본의 대리인 역할을 하게 하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최근 중국과 한국에서의 강력한 반일운동은―중국과 일본 그리고 한국 모두 잘 알고 있듯이―일본의 동아시아에서의 ‘대리인’ 역할에 항의하는 것이다. 중국과 한국이 일관되게 주장하듯이―남한의 냉전체제 탈피 시도 후에―일본이 만약 여전히 미국에 의존하여 냉전체제를 유지하려고 한다면, 일본의 미래 경제와 안전체제가 아시아에서 점차 고립되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최근 일본 우익의 매파가 타이완의 전임 총통 리 떵후이(李登輝)가 조직한 타이완 독립운동의 결집체인 타이완단결연합(臺灣團結聯合)이라는 소수 정당의 당수를 초청하여 야스꾸니 신사에 참배하게 한 행위는 결국 중국과 한국 심지어 타이완의 상당수 지식인들에게 일본 우익의 지나친 행동에 대한 우려만을 높인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특히 독일의 슈뢰더(Schröder) 총리마저 일본의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우려를 표시한 것처럼 일본 우익의 과도한 팽창주의적 사고는 일본의 고립만을 가져온다는 사실 또한 잊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시기에 타이완의 절반을 대표하는 국민당 롄 쟌 주석과 친민당 쑹 츄위 주석의 역사적 행보는,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역사적 첫걸음을 내딛은 것처럼 최소한 타이완의 절대다수 민중 역시 남한의 민중처럼 전쟁과 충돌의 대리인 역할을 거절한다는 뜻을 분명히한다는 역사적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이것은 바로 양안의 건설적 상호관계가 개통됨을 의미할 뿐 아니라, 타이완 독립이라는 대립과 충돌의 구도 그리고 일반민중을 애국자와 배신자로 나누는 책략이 더는 쓸모없게 됨을 의미하고, 결과적으로 양안의 평화적 관계를 위기와 충돌로 만들려는 미국과 일본의 시도가 힘을 쓸 수 없게 됨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이것은 결국 미국의 극우 매파에 의존하고 있는 일본의 고립을 의미하며 곧 일본의 생존에 커다란 위협이 될 수도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일본이 자신의 식민지시대의 죄행에 대해 반성하고 현재 국가방향에 대해 검토하는 일은 어쩌면 이러한 고립을 겪은 후에나 가능할지 모른다.
이처럼 세계정세의 변화는 마치 바둑돌을 놓는 것처럼 한걸음 한걸음마다 중대한 의의가 있으며 또한 그 행보마다 새로운 변화를 내포하는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때문에 타이완이 양안문제에서 역사적인 발걸음을 내딛은 것은 가까운 장래에 일본의 이러한 반성을 이끌어낼지도 모른다.
우리가 아시아의 지도를 펼쳐놓고 보면 알 수 있듯이 베트남전의 재난을 거쳐, 1997년 금융위기의 세례를 거쳐 아시아는 점차 ‘아시아인의 아시아’를 일구어가게 되었으며 이러한 시도는 장족의 발전을 이루었다. 이러한 발전과정에서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Mahathir), 싱가포르의 리 콴유(李光耀), 남한의 김대중, 중국의 쟝 쩌민(江澤民) 등이 모두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러한 노력이 아시아의 위기를 완화하고 외부에서 이 위기를 이용해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시도를 줄이는 데 커다란 기여를 했다. 오늘날 심지어 아시아의 가장 남쪽에 위치한 오스트레일리아 역시 더이상 미국의 부시 대통령이 말한 ‘부(副)경찰장’의 역할을 마다하고 아시아의 일원이 되려 하고 있다. 아시아에 비록 발전의 정도가 다른 문제가 남아 있고 역사적 은원(恩怨)도 남아 있지만, 아시아에는 적어도 강력한 군대를 배경으로 지역 전체를 자신의 지배 범위에 두려는 패권의 문제는 존재하지 않음을 상기해야 한다. 아시아 자주의식의 발전과정 중 현재 타이완 야당의 중국과의 평화적 상호관계 유지를 위한 노력은 상당히 큰 의미가 있다. 이는 바로 타이완이 남한의 뒤를 이어 동아시아의 ‘탈미국화’를 이룰 수 있음을 의미하여 일본이 어쩔 수 없이 동아시아의 ‘탈미국화’ 행보에 동조할 수밖에 없는 요건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동아시아, 나아가 아시아의 자주화는 결국 세계에서 칭송받는 유럽처럼 미국을 두려워하지 않는 진정한 ‘아시아인의 아시아’ 탄생을 지켜볼 수도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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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가 이러한 연동성에 기초하기 때문에 타이완은 결코 자괴감에 빠질 필요가 없다. 심지어 자신을 비하하고 다른 사람의 뒤에서 혀나 내밀고 얼굴이나 찡그리는, 자기 사회를 분열시켜가며 왜곡된 현실 속에서 생존하려고만 해서는 결코 안된다. 타이완은 사실 실질적인 선의의 교류를 통하여 자기 영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야당 지도자들의 방중이라는 역사적 전환을 계기로 이러한 교류의 깊이와 위상을 높여 그 평화적·도덕적 의의를, 나아가 아시아와 세계적 의미를 더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만 한다. 사상적 기초가 없는 행동은 결코 감동을 줄 수 없으며 감동을 줄 수 없다면 결코 멀리 갈 수 없다. 더욱이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은 이러한 새로운 시도가 타이완의 진정한 자주의식의 구체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계략이나 책략이 아니며 어느 나라 혹은 어느 정부를 돕거나 의지하는 것도 아니다. 때문에 한층 견실히 첫발을 내딛어야 할 뿐 아니라 더욱더 먼 미래를 내다볼 줄도 알아야 한다. 같은 타이완 내의 서로 다른 의견들, 심지어 일본, 유럽, 미국의 민중들에게서 더욱더 올바른 변화를 이끌어내도록 촉구할 수 있어야 한다. 타이완인으로서 우리는 결코 자신을 낮출 필요가 없다. 우리는 아시아의 일원으로서 더 많은 일을 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梁台根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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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의 새로운 외교방침으로 주목을 받은 것이 ‘평화적 흥기론’이다. 이는 공산당 중앙당교 부교장인 졍 삐젠(鄭必堅)이 2003년 10월 중국이 주관하는 아시아 뽀아오포럼에서 최초로 주장한 것이다. 이후 2003년 12월 미국 하바드대 강연에서 원 쟈빠오(溫家寶) 총리가, 12월 마오 쩌뚱 탄생 110주년 기념대회에서 후 진타오(胡錦濤) 총서기가 강조하면서 주목을 받았다. 중국은 ‘평화적인 흥기’를 추구하며 중국의 부상은 아시아 및 세계의 평화와 발전에 기여한다는 것이 이 주장의 핵심 내용이다. 그런데 2004년 4, 5월 무렵부터 중국은 ‘평화적 흥기론’ 대신 ‘평화적 발전’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예컨대 2004년 4월에 개최된 아시아 뽀아오포럼 강연에서 후 진타오는 ‘평화적 발전’으로 중국의 대외정책을 설명했다. 2004년 8월 떵 샤오핑 탄생 100주년 기념대회에서 행한 후 진타오 연설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평화적 흥기론’이 패권화를 추구한다는 우려를 일으키는 것에 대한 대응책으로 보이며 이러한 개념 변화는 주변국들과 평화적 관계를 유지하며 함께 발전을 도모한다는 ‘평화적 발전론’이 사실상 중국 외교정책의 새로운 지도이념으로 채택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 타이완의 2004년 총통선거 기간중 국민당 롄 쟌 총통후보와 친민당 쑹 츄위 부총통후보는 여론조사에서 일관되게 약 47%의 지지율을 확보하였으며 당시 총통이던 민진당 쳔 슈이酸은 약 42%의 지지율로 단 한번도 야당을 앞지르지 못했으나 선거 하루 전인 3월 19일 총통과 부총통이 각각 한 발의 총격을 받았다며 병원에 입원하게 된 사건을 계기로 전세가 역전되어 2만여 표 차이로 민진당이 승리했다. 하지만 총격사건이 자작극이고 당시의 정부와 선거관리위원회는 이 사실을 확대 보도하고 진실을 은폐하는 등 불법을 자행했다며 야당은 즉각 당선무효와 선거무효소송을 냈다. 선거일인 3월 20일부터 약 7일간 50만 명에 이르는 대규모 항의시위가 열렸다. 이에 대해 중국정부가 (미국과의 외교관계 정상화시에 체결한 비망록에 근거하여) 만약 타이완에서 중대한 정치적 내부 동란이 생기면 타이완문제에 개입하겠다는 의사를 재천명하기에 이르자, 다급해진 미국은 여야간의 중재에 나섰다. 국민당과 친민당은 미국의 중재하에 총격사건의 즉각적인 진상조사, 투표인명부의 철저한 검사를 비롯한 재개표, 총격사건 진상이 밝혀지기 전에 미국은 현 정부의 정당성을 승인하지 않는다는 세 가지 조건을 받아들여 총통부 앞에서 벌어진 항위시위를 중단했다. 그러나 미국과 민진당 정부는 합의사항을 이행치 않았으며 결국 선거공판에서 국민당과 친민당은 패소판결을 받게 되었다. 당시 타이완에서는 이 사건을 우크라이나 사건과 비교하며 두 사건 모두 미국의 개입에 의하여 미국이 지지하는 정당이 결국 승리한 것으로 여기기도 했다. 야당은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이 민진당을 실질적으로 지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었다고 한다.↩
- ‘난하이행위준칙’은 난샤군도(南沙群島)를 둘러싼 중국과 동남아 여러 이해당사국간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10여년간 협상의 결과물로, 주 내용은 이러한 문제들을 “비폭력 수단, 현상태 유지라는 기본 명제하에 각국간의 공동개발과 협조를 촉진한다”는 것이다.↩
- 러시아 뿌찐 대통령은 2000년 7월 평양을 방문하여 김정일 위원장에게 경원선 연결에 대해 긍정적 반응을 얻은 후 2000년 9월 유엔정상회담에서 김대중 대통령에게 TSR(시베리아횡단철도)―TKR(남북종단철도) 연결프로젝트를 제안하여 기본적 동의를 이끌어냈고, 한국정부는 같은 달 남북한간 철도복구에 착수했다. 2001년 2월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한 뿌찐 대통령은 김대중 대통령과 동북아지역 전체의 물동량 증대를 도모할 한러교통협력위원회를 설치키로 합의했다. 또한 공동성명을 통해 “ABM(탄도탄요격미사일)조약의 유지 및 강화가 전략적 안정의 초석”이라고 밝히고 이행되지 않고 있는 군축조약과 협정을 거론함으로써, 결과적으로 ABM조약을 파기하고 NMD(국가미사일방어)체제를 구축하려는 미국을 긴장시키게 되었다.↩
- 김대중 대통령은 간담회에 참석한 여러 학자들의 질문에 답변했는데, 첫번째 질의자 J. 씨스코가 “왜 한국은 러시아 쪽으로 기울어졌는가?”라고 추궁하자,“논란을 일으키게 한 데 대해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그 논란은 한러공동성명에 대한 잘못된 이해, 잘못된 해석에서 나온 것이다. ABM 제한조약에 대한 언급은 러시아 지지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NMD 문제에 대한 우리의 의견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신동아』 홈페이지 참조(www.donga.com/docs/magazine/new_donga/200104/nd200104015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