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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세대를 바라보는 ‘단절’과 ‘봉합’의 수사
송호근 『한국,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나』, 삼성경제연구소 2003
이동연 李東淵
문화평론가, 성공회대 연구교수. sangyeun@hitel.net
이 저자의 주장은 무엇인가? 송호근(宋虎根) 교수의 『한국,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나: 세대, 그 갈등과 조화의 미학』을 읽고 난 소감이다. 이 질문의 함의는 역설적이다. 세대문제를 바라보는 저자의 진단과 대안이 논리적으로 분열되어 있지만, 그 분열의 맥락 속에서 오히려 분명한 정치적 서사를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비교적 명료한 세대적 단절을 조목조목 설명하는 서론과는 달리 결론으로 갈수록 세대적 충돌이 그다지 심각하지 않은 현상으로 진단하는 데에는 세대문제를 바라보는 저자의 ‘정치적’ 입장이 결정적이지 않았나 하는 게 말 그대로의 촌평에 값하는 솔직한 생각이다.
물론 서두부터 성급하다면 성급한 이러한 비판이 이 책이 갖는 학술적 의미를 온전히 무효화할 수는 없다. 이 책은 최근 우리 사회의 화두로 등장한 세대문제를 본격적으로 파헤치고자 노력하고 있으며 그 세대문제가 한국사회의 정치적·경제적·문화적 지형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나름대로 꼼꼼하고 발빠르게 진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세대문제가 한국사회를 진단하는 주요한 화두임을 역설하면서 그 근거로 지난해 한국사회를 들끓게 했던 ‘월드컵’과 ‘대선’이란 사건을 들고 있다. 이 두 사건을 통해 저자가 말하는 소위 ‘2002세대’가 탄생했고, 언론에서 ‘고통 없이’ 애용한 ‘2030세대’가 출현했다. 사회변화의 새로운 주체로 등장한 2030은 사회의 지배세력이자 기성세대인 5060과 짝패를 이루어 변화와 개혁을 표상하는 하나의 상징적 기표가 되었다. 2030에게 월드컵과 대선은 이들의 정치적 힘을 확인시켜주고, 사회적 발언력을 강화시켜준 기념비적 사건이었지만, 반대로 5060세대에게 월드컵은 ‘문화적 소외’를, 대선은 ‘정치적 충격’을 준 사건이었다.
이러한 진단은 사실 비판적이든 우호적이든 모든 지식인들이 한마디쯤은 거들었던 것이고, 저자 역시 이에 대해 별다른 이견을 보이지는 않아 보인다. 그러나 저자의 관점에서 한가지 독특한 것이 있다면, 새로운 세대적 힘의 형성근원을 ‘민주화’와 ‘세계화’의 패러다임으로 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민주화는 그들에게 집단우위적인 사고를 거부하는 탈주의 이념인 ‘개인주의’를 선물했고, 세계화는 국가중심적, 권력개입적 규율과 대척점에 서 있는 ‘시장합리주의적 성향’을 내면화하도록 가르쳤다”(64면)는 게 저자의 분석인데, 이 분석에는 두 가지 편향이 발견된다. 하나는 2030이 ‘민주화의 결실’과 ‘세계화의 효과’를 독점할 만큼 그 사회적 성격이 분명하지 않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이들에게 민주화의 선물이 개인주의이며, 세계화의 성향이 시장합리주의라고 단정할 수 없다는 점이다.
1980년 광주의 봄과 1987년 민주항쟁의 역사적 유산을 의식적으로나 경험적으로 갖고 있는 소위 386세대에 비해, 그 유산을 흔적으로, 타자의 주술로 대리경험하고 있는 297세대는 민주화세대와는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오히려 정치적 민주화 이후 다양하게 분화된 소비주체이자 문화적 세대이며, 정치적 386세대의 문화적 사생아에 해당된다. 물론 297세대가 민주화의 효과를 승계하여 권위주의적인 기성세대에 맞서 386세대와 연대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러한 민주화의 효과는 비단 297세대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세대에 해당될 수 있다. 20대와 30대는 그 물적 토대가 분명 다르며 그들의 주체형성 역시 다르다. 이들 세대가 별나고도 유일하게 묶일 수 있는 것은 ‘민주화’라는 담론보다는 특정한 사건에 특정하게 개입된 느슨한 ‘감성적 연대의식’뿐이다.
‘세계화’라는 근거 역시 마찬가지이다. 저자는 세계화가 2030에게 ‘민족중흥’이라는 5060의 시대소명과는 다르게 국민-국가의 틀에 얽매이지 않고, 시장의 자율성으로 향하도록 했다고 주장하는데, 우선 자본과 시장의 독점을 야기한 세계화가 어떤 근거로 시장합리주의와 연결될 수 있는지가 의문스럽고, 과연 2030이 시장합리주의를 자신들의 포지티브한 가치관으로 인식하게끔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그리고 그로 인해 야기된 1997년의 IMF사태가 일조했는지 의문스럽다. 오히려 세계화는 시장합리주의를 파괴했으며, 세계화의 재앙을 견뎌내려는 청년들의 어떤 희망이 월드컵과 대선의 결과라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2030에 대한 분석적 이해 혹은 잠재적 가능성에 대한 저자의 긍정이 그것대로의 급진적인 진보의 의미를 읽어내는 방향으로 연계되지 못하고, 항상 5060과의 낡은 이항대립에서 극단의 항으로 설명되거나 혹은 이들의 모험주의를 경계하는 쪽으로 귀결되는 것은 이 책의 여러 대목에서 나타난다. 2030의 내면의 덕목으로 개인주의·시장합리주의·평등주의를 거론하면서도 이러한 성향이 사회적 모순에 대한 ‘개인적 책무’의 부재를 야기한다고 보는 것은 2030에 대한 적절한 비판이라기보다는 5060세대들과의 ‘필연적’ 조화를 염두에 둔 이분법적 구실로 여겨진다. 예컨대 “개인은 집단에 대한 대립항이고, 시장은 권력적 개입과 그에 따른 특혜의 대립항”(65면)이라는 언급 역시 2030을 5060과 이항대립화하면서 갖게 된 일종의 편견이 작용한다.
저자의 진단과 대안의 논리적 모순은 궁극적으로는 세대문제를 바라보는 ‘정치적 절충주의’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세대를 지나치게 이항대립적으로 단절하고, 이를 사회적 주체의 이념적 이분법으로 단정하면서, 결론에 가서는 ‘세대간의 조화’라는 수사로 이러한 이념적 이분법의 절충을 주장하는 것은 현재 한국사회의 정치적·경제적·문화적 ‘모순과 중층결정’을 쉽게 봉합하려는 기획으로 읽힌다. 저자는 이러한 봉합의 논리적 근거를 찾기 위해 ‘한국인의 마음의 행로(I)’이라는 3장의 긴 분석을 통해 소위 고도성장 시기의 부정적인 사회심리의 10가지 특성(평등주의, 의사사회주의, 낙관주의, 권위주의, 이기적 자조주의, 가족주의, 독단주의, 연고주의, 엘리뜨주의, 국가중심주의)를 거론하는데, 이 10가지 특성은 2030이나 5060이 모두 안고 있는 폐해로 지적된다.
저자는 결론적으로 2030의 행동을 5060이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세계관이 충돌되었다고 말할 수 없으며, 이들이 세계명작보다는 애니메이션에 더 감동받는다고 해서 2030과 5060의 단절을 돌이킬 수 없다고 보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저자의 말대로라면 세대간의 단절이 대단히 큰 줄 알았는데, 분석을 해보니 그 ‘결별의 항목들’이 예상보다 크지 않으며, 그렇기 때문에 세대간의 갈등은 있을지언정 충돌은 없다는 것이다.‘세대갈등’과 ‘세대충돌’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함의하는 개념인지 이 책에서 구체적으로 설명하지는 않으나, 어쨌든 저자는 세대갈등은 있지만 세대충돌은 없다고 결론을 맺는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공동선과 공동체성이 중시되는 ‘생활세계’임을 역설하는데, 아마도 이것이 세대가 서로 조화될 수 있는 타당한 이유로 제시되는 듯하다.
개인적으로는 근거없는 ‘세대충돌론’이 한국사회의 복합성을 이해하는 데 별다른 도움을 주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저자가 대안으로 언급한 ‘공익’ ‘공동의 선’ ‘생활세계’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그 자체로 공감한다. 더불어 이러한 대안을 모색하기 위해 5060세대의 권위주의와 2030의 특정한 개인주의적 성향을 비판하는 것에도 공감한다. 그러나 이 책은 여전히 세대의 문제를 이분법적인 시각에서 출발하고 있고, 세대문제의 단절을 설명하기 위한 한국사회의 성격규명이 실증적인 데이터의 제시와 같은 나름의 성실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자의적인 면이 발견된다. 세대문제는 한국사회의 성격을 읽는 결정적인 심급이 아니며, 단절과 봉합의 문제도 아니다. 그것은 말 그대로 한국사회 구조의 복합적인 층위에서 비롯된 사회적 차이와 모순을 읽게 하는 한 시각으로 한정할 필요가 있다. 작년 월드컵과 대선은 세대문제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거울과도 같은 것이 아니며, 다만 세대문제를 통해 한국사회의 변화된 구조를 말하게 하는 우발적인 사건에 불과하다. 세대의 정치적 급진적 힘은 세대 내 문제 그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세대가 야기한 ‘사건의 효과’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이 사건의 효과를 정치적으로 절충하거나 봉합하는 시각보다는 오히려 심각한 청년실업과 분단체제, 자본의 세계화를 극복하는 정치적 기획으로 급진화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