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의 목소리
박정희시대에서 벗어나기 위한 조건
지난호 백낙청 교수의 「박정희시대를 어떻게 생각할까」는 ‘옛 것은 죽어가고 있는데 새로운 것은 태어나지 않은’ 위기상황을 돌파하고자 하는 고민이 절실히 느껴지는 글이었다. 하지만 방향제시가 모호하고 우려스러운 감도 없지 않았다. 특히 이 글이 경제에 관해서 최근 『창비』나 다른 지면에서 볼 수 있는 일부 지식인들의 입장―외환위기 이후 시장규율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진행된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에 대한 반발로 ‘국가의 재활성화를 통해 선진국을 따라잡자’는 제안―과도 연관되는 것이 아닌가 했기 때문이다.
박정희를 ‘유공자’라고 재평가한 것에는 그 시대에 이룩한 경제발전의 성과를 어떻게 평가할지에 대해서 진보적 지식인이 느끼는 당혹스러움이 엿보인다. 한국전쟁 후 절대빈곤의 실상을 경험했고 또 1997년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공동체가 송두리째 흔들리는 모습을 지켜본 그의 처지에서 박정희시대의 경제성장과 그것에 기반한 지금의 경쟁력을 부정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지금은 최소한의 경쟁력을 확보하지 않으면 한순간에 온나라가 결딴날 수도 있는 세계화시대가 아닌가. 하지만 그 경쟁력의 실체를 살펴보면 참담할 따름이다. 경쟁력을 주도하는 일부 대기업의 눈부신 실적 뒤에 대다수 서민들은 계층·고용·산업·기업 등 전부문에서 양극화의 덫에 걸려 신음하고 있다. 최근 우리나라 빈곤인구가 6백만명에 달한다는 충격적인 실태조사는 이런 양극화의 결과로 중산층이 몰락하고 있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빈곤의 나락에 빠지지 않기 위해 극소수를 제외한 대다수가 돈벌레가 되어 인간성을 갉아먹으며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는 현실이다. 이런 상황이 계속될 때 분단체제를 극복할 잠재력이 소진되는 것은 물론이고 분단체제가 해체된다 한들 남과 북 민중이 모두 불행의 구렁텅이에서 헤어나올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세계체제에 어느 나라보다도 강하게 결박당해 있는 한국이 나아가야 할 길을 무엇일까? 언제까지 주가변동에 따라서 ‘더 나은 삶을 살 권리’를 유예해야 하는가? 이제는 평범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실감으로 현실을 냉정하게 직시할 필요가 있다. 경제성장이 필요충분조건이 아니라는 게 확실하다면 도대체 행복을 위해 필요한 경제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냉철하게 따져보는 사회적 공론화가 필요하다. 만약 그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먼저 이뤄진다면, 그래서 ‘전환의 계곡’에서 겪어야 할 고통을 사회가 감내할 각오가 되어 있다면, 더이상 재벌을 비롯한 기득권층의 눈치를 보지 않고도 ‘대전환’을 시도하는 게 가능해지지 않을까? 지금 우리는 극악한 세계체제에 끌려다니다 100년 전처럼 또 한차례 희생양이 될지, 아니면 세계체제 안으로부터 돌파구를 마련해 더 나은 세계를 향한 움직임을 선도하는 역할을 하게 될지 갈림길에 서 있다. 이미 1990년대 중반부터 이런 문제의식을 제시해왔던 백낙청 교수와 『창비』가 다시 한번 그 방향에 대한 혜안을 제시해야 할 때이다.
강양구 tyio@chollian.net
대범한 평가를 통한 극복을
박정희는 인물의 경력으로 보나 그 시대의 성격으로 보나 한국현대사에서 뜨거운 감자이다. 용공과 반공, 친미와 반미, 근대화와 병영화, 경제발전과 민주압살…… 한 인간의 내면에 이렇게 모순적이고 복합적인 요소들이 뒤엉켜 대립하는 경우도 드물 것이다. 그를 평가하는 데서도 극명하게 분열의 양상이 존재한다. 지난 국회의원 총선 때도 그랬지만, 온나라가 한 정치인을 중심으로 박정희의 적이나 편이냐에 따라 둘로 나뉘었다. 마치 다른 나라 사람들인 양 서로를 비방하고 야유했다. 박정희는 이미 사반세기 전에 죽은 인물인데도 이렇게 국가의 중대사가 있을 때마다 출몰하는 것을 보면 그는 여전히 현재적 쟁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 사회에 공유되는 박정희에 대한 ‘보편타당한’ 평가가 없다는 점을 반증하는 것이다. 이는 우리 지식사회가 시와 비를 분별하여 가려내는 매우 초보적이고 상식적인 대응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점을 말한다. 물론 박정희에 대한 은원(恩怨)의 골이 너무 깊고 또 시혜와 억압의 대상이 너무 차이가 있다는 점도 작용을 하리라고 본다. 하지만 이제는 좀더 성숙한 자세로 객관적으로 사태를 통찰할 필요가 있다.
나는 무수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지난호의 백낙청 교수의 문제제기가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물을 볼 때는 입체적으로 봐야 한다. 동전에도 앞뒷면이 있다. 인물에게도 여러 요소와 측면들이 혼재되어 있다. 문제는 무엇이 본질적인 요소인가이다. 그의 경제발전의 공을 평가한다고 해서 독재와 구악을 덮어주고 그것을 정당화하자는 게 아닌 다음에야 문제될 것이 없다. 오히려 그러한 평가를 고리로 해서, 시시때때로 발호하는 독재자의 망령을 잠재울 수 있다면 그것은 의미있는 문제제기라고 본다.강도를 잡기 위해서는 길을 터주는 것도 한가지 방법이다. 아니 거기까지는 아니더라도, 온오프라인을 막론하고 어떤 문제에 대해 자신과 생각이 다르면 사리를 분별하기보다는 상대를 박멸하고야 말겠다는 오늘날 우리 사회의 이상열기를 식히기 위해서도 필요한 발언이라고 생각한다. 흑백논리로 빠지기 쉬운 문제일수록 여러모로 곱씹어보는 자세가 필요하다. 다음 대선 때까지 박정희를 두고 내 편 네 편으로 갈라져 싸우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 그것은 분명히 역사의 퇴행이며 민주발전의 후퇴로 귀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를 위해서는 민주화세력이 크고 대범하게 포용할 필요가 있다.
윤무연 knight_r@hanmail.net
토오꾜오 스기나미에서 온 소식
2005년 8월 4일 심상치 않은 전화가 왔다. “안녕하세요! 코지마인데요. 스기나미구 교육위원회의 역사교과서 채택이 연기되었습니다!” 오늘은 스기나미구 교과서 채택심의가 있는 날이다. 후소오샤 교과서 채택반대 캠페인차 직접 방문했던 지역이라 어느 곳보다 결과가 궁금했던 터였다. 그런데 두 명의 찬성과 두 명의 반대,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인 교육장의 판단유보로 결정이 연기되었다고 한다. 이날은 20명 남짓 참관할 수 있는 구청에 500여명의 사람들로 북새통이었다고 한다. 이시하라 신따로오(石原愼太郞) 도지사와 그에 못지않은 야마다 히로시(山田宏) 구청장 같은 극우인물이 포진한 토오꾜오도 스기나미구에는 하지만 그들보다 더 치열하게 일본의 민주화와 평화를 외치는 시민들이 있다.
스기나미구 방문시 만난 활동가와 대화하면서 그들이 단지 역사왜곡에 대한 일본인으로서의 죄책감이 아닌 일본이 진심으로 평화를 지향하는 나라가 될 수 있기를 기원하는 염원에서 평화운동을 하고 있음을 느꼈다. 스기나미구에서 학부모운동을 하며 창비 지난호에 「토오꾜오의 학교에 자유의 바람을!」이란 글을 기고했던 마루하마 에리꼬(丸浜江里子)씨가 한중일 공동역사교과서 『미래를 여는 역사』의 집필위원으로 4년 가까이 분투한 것 또한 그러한 염원에서였으리라. 이 글에서도 드러나지만 일본 우익의 공세에 맞서는 학부모를 비롯한 일본 시민들의 운동은 특별한 몇몇 사람들에 그치지 않는다.
지난 6월 후소오샤 교과서 채택반대운동을 하는 일본의 활동가들이 한국을 방문해 각 자매도시 지자체를 방문했을 때의 일이 생각난다. “이런 일을 하시다니 정말 대단합니다. 감사합니다.” 한 지자체장의 ‘칭찬’에 잠시 침묵이 흐른 뒤 나온 대답은 이랬다. “저는 평범한 일본인의 한명에 불과합니다.” 실제로 사회 전체가 우경화되었다는 일본에서 후소오샤 교과서 채택반대 활동가의 대부분은 학부모, 교사, 직장인 등 지극히 평범한 일반인들이다. 일본 정부와 시민들을 동일시하며 분노했던 한국인들의 시선은 그들을 소수의 특별한 사람들로 만들려 했지만 그들은 극구 부정한다. 역사왜곡을 제대로 알 기회가 없었을 뿐 기회가 생기면 일본인 누구라도 자신들과 같은 생각을 할 거라 믿고 있었다.
후소오샤 교과서 채택반대를 위한 한일시민연대 활동은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공존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다시금 깨달게 해준 소중한 기회였다. 게다가 교과서 채택이 무산되었다는 소식까지 들려온다면 한여름의 더위가 싹 가실 것만 같다.
아시아평화와역사교육연대 김세영 japantext@hanmail.net
미국과 중국의 미래에 대한 통찰
굳이 폴 케네디의 견해를 따르지 않더라도 세계경제의 중심축이 동진을 거듭하여 중국(나아가 인도)에 이르렀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리고 현재 세계 유일의 최강대국 미국이 중국을 군사·외교·경제적 경쟁자로 인식하고 있음은 최근 미·중간에 일어난 갈등들에서 잘 나타난다. 이런 싯점에서 찰머스 존슨의 「미국, 중국과의 대결에 나서다」는 초미의 관심사라 할 수 있는 미중관계를 심층적으로 고찰하는 좋은 글이다. 이 글은 중국이 신흥강대국으로 부상하면서 중국에 대한 미국(나아가 서유럽과 일본)의 대응이 향후 국제관계를 좌우할 키포인트라고 예견한다. 이러한 전제하에 중일관계, 미중관계, 양안관계를 분석하고, 미국의 대중(對中)정책을 비판한다. 이 글의 분석이 신선하면서도 설득력있는 것은 바로 중일관계나 양안관계와 연관지어 미중관계를 분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쉬운 부분이 없지는 않다. 어떻게 보면 제목을 넘어서는 내용일 수도 있겠으나, 미중관계에 영향을 미칠 다른 요인들도 고려했으면 향후 세계의 구도를 예견하는 데 더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이를테면 미중 양국과 유럽연합의 관계, 나아가 러시아나 인도 등과의 관계 말이다. 미국과 중국이 앞으로 국제사회의 양극이 될 것이라는 사실만으로, 그리고 동아시아에서의 양국관계를 고찰하는 것만으로 두 나라 관계의 미래를 예견하기에 충분치 않기 때문이다.
현재 일본이 처한 사회적·경제적 처지는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시사한다. 비록 일본만큼 경제강국은 아니어서 그 정도가 덜할지라도, 본질적으로 우리나라의 내부 상황은 일본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이 글에서 지적하는 인구 감소문제가 특히 그러하다. 지정학적 위치나 미국과의 관계, 미중 양국과의 경제관계 모두를 따지더라도 일본이 고민하고 있는 문제들이 형태는 다르지만 조만간 우리에게 닥쳐올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국제관계 전문가가 아닌 나로서는 각론이나 구체적인 사례에 대한 해답을 제시할 능력은 없다. 단지 총론 내지는 대원칙만을 이야기할 수 있을 뿐인데, 그것은 군사·외교 분야에서는 동북아 나아가 전지구의 평화와 인류의 공존, 경제분야에서는 지속가능한 발전 정도다. 이 두 가지 원칙에 근거해서 동아시아의 한국–중국–일본–미국 관계를 재정립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안상일 prizone@hanmail.net
여름호 소설을 읽는 재미
지난호 소설들을 만나본 느낌은 신선하고 흥미로웠다. 모든 작가가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이제 작가들의 관심은 거대하고 깊이있는 서사보다는 당대성을 감각적으로 포획해내는 단편적인 코드들에 있는 것 같다. 지극히 일상적인 풍경이나 디테일이 새로운 형식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김영하의 「아이스크림」은 익살스럽고 가벼운 문체로 그려낸 소시민의 일상과 군것질거리로 인해 일어난 해프닝을 이야기하고 있다. 작은 아파트와 그 주변을 둘러싼 풍경은 꽤 친숙한 것이지만 그다지 편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 속에서 소비의 세계에 잠식당한 무력한 인간의 모습이 마치 꼭두각시처럼 휘청거린다. 하지만 의미심장한 메씨지나 심각한 병리현상을 담고 있지 않아서인지 이전의 소설들에 비해 가벼운 마음으로 읽힌다.
소비주의로 얼룩진 현대를 바라보는 김경욱의 시선 또한 감각적이며 날카롭게 느껴졌다. 「맥도널드 사수 대작전」은 세계와 인간이 어떤 방식으로 상품과 소비에 익숙해지는지, 즉 어떤 방식으로 ‘구조’화되어가는지 그리고 그 ‘구조’를 얼마나 두려워하는지를 말해준다. 우스꽝스럽기도 한 삽화들이 마냥 우습게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이런 까닭이다. 하지만 그렇게 상품화된 세계를 그려내기 위해 등장하는 인물들에게서 작위적인 냄새가 나는 것 같아 조금 아쉬움이 남는다. 흔히 생각해낼 수 있는 캐릭터들이지만 흔히 볼 수는 없는 캐릭터들라는 점을 떠올려보면 더욱 그렇다.
이제 우리의 소설은 예전의 한국문학이 무겁게 쓰고 있던 엄숙함이라는 탈을 벗어던진 것 같아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매우 반갑다. 그것은 엄숙함으로부터 해방되어서라기보다는 예전에 비해 더욱 다양한 소설적 사유들을 만나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다크 allyhabie@nate.com
관계, 그 어쩔 수 없는 거리
독서를 하기 좋은 계절은 오히려 여름이 아닌가 싶다. 마케팅의 일환일지라도 곳곳마다 간이쉼터를 마련하고,쉼없이 에어컨을 가동하며 한낮에도 할로겐 등으로 창밖의 세상과 완벽히 분리된 대형서점의 등장이 색다른 독서문화를 형성하는 것도 같다. 진열되어 있다기보다, 그냥 거기 그곳에 쌓여 있는 수많은 책들을 보면 책과 공간, 그리고 사람의 존재가 한없이 의심스럽다. 역사의 오랜 노동들이 남겨놓은 생산물이 축척되어도 우리는 여전히 세상을 거칠고 건조하게 몰아가고 있지 않은가.
서점 한 귀퉁이에서 『창비』 여름호에 실린 시들을 보면서 작품에서 느껴지는 관계와 그 한계에 대한 의문이 어느 때보다 강하게 밀려왔다. 인간의 언어로 규정되어버린 타인과 사물들에 대한 거리에서 그것을 극복하려는 시어들은, 그러나 마치 화단을 벗어나 시멘트바닥에 말라붙은 지렁이의 사체처럼 다가왔다. 이제는 신과의 관계에서도 이기적인 주체가 되고 마는 인간(신경림 「용서」)과, 거대한 자연의 움직임에서 객체일 수밖에 없는 자아의 고독을 보는 주체(허만하 「폭포는 물길을 거슬러 오른다」 「흉노의 지평선」), 타국이라는 공간과 소통될 수 없는 외국어라는 언어, 그 속에서 하루의 삶을 위해 위법의 타자가 되어야 하는 그들을 지켜보는 우리는(하종오 「컨테이너 신혼방」) 그것이 규정하는 관계 속에서 너무나 무력한 존재를 인식할 뿐이었다.
우리 사회가 한시절 병통을 앓았던, 여전히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 많은 문제는 이제 자본의 문제에서 환경의 문제로, 종교의 문제로, 생명의 문제로 파생되고 있다. 그러한 문제들과 결코 타협하지 않는 자아가 그것과 맞서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관계의 문제를 시어는 과연 어떠한 소통의 방법으로 풀어낼 것인가. 이제는 나의 언어마저도 타자가 되어버리는(김기택 「어느 날, 혀는」) 이 모순된 상황에서 역사의 언어들은(박경원 「충고」), 자연이 만들어놓은 언어들은(김언 「돌의 탄생」) 이제 어떠한 방법으로 그 소통의 한계를 극복할 것인가. 시어와 현실 사이의 간극을 어떻게 좁혀나갈 것인가.
수많은 책들이 사라져가고 그 빈 공간을 다시 메우기 위해 수많은 책들이 나오고 있다. 처세술과 웰빙에 관한 책들은 언제나 그렇듯 베스트쎌러 수위를 차지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사람들은 소통을 거부하고 자연은 문명의 이기 속에서 숨통이 막히고 있다. 현명한 이기주의가 각광을 받고 있는 요즘, 존재의 의미와 소통을 고민하는 것마저 무의미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책을 덮고 바깥으로 나오자 거친 소음과 진득한 매연으로 이글거리는 여름 한낮의 열기가 내 정수리를 짓눌렀다. 나는 문득, 여전히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의 어깨가 그리웠다. 어깨를 뜨겁게 부딪는 일조차 낯선 과거가 되었으니, 바로 곁에서 같은 방향을 향해 걷고 있는 그들과 나의 거리가 한없이 멀게만 느껴졌다.
이재호 prepilogue@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