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문학상
제5회 백석문학상 발표
백석문학상의 제5회 수상자가 심사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다음과 같이 선정되었습니다. 백석문학상은 백석(白石) 선생의 뛰어난 시적 업적을 기리고 그 순정한 문학정신을 오늘에 이어받기 위해 자야(子夜, 본명 金英韓) 여사가 출연한 2억원의 기금으로 1997년 10월에 제정되었으며, 상금은 1000만원입니다. 시상식은 만해문학상·신동엽창작기금·창비신인문학상 시상식과 함께 11월 26일(수) 오후 6시 한국프레스쎈터 20층 국제회의장에서 열릴 예정입니다.
제5회 백석문학상 수상작
박영근(朴永根) 시집 『저 꽃이 불편하다』
심사위원
본심: 신경림 염무웅 황지우 예심: 장석남 나희덕
2003년 10월
백석문학기념사업 운영위원회
◼ 수상자 약력
1958년 전북 부안 출생. 1981년 『反詩』 6집에 「수유리에서」 등을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시집 『취업공고판 앞에서』 『대열』 『김미순傳』 『지금도 그 별은 눈뜨는가』 등이 있음. 1994년 제12회 신동엽창작기금 수혜.
심사경위
백석문학기념사업 운영위원회는 2003년 9월 4일 모임에서 제5회 백석문학상 심사위원으로 신경림·염무웅·황지우 3인을 위촉하고, 예심위원 선정은 예년과 같이 운영위원 중 문단인사에게 위임하였다. 이에 따라 중견시인 중 수상대상 시집이 없는 인사로 장석남·나희덕 2인을 예심위원으로 위촉하고, 각자가 6,7권의 후보작을 추천토록 의뢰했다. 예심을 거쳐 추천된 시집은 모두 13권에 이르러 문단 안팎의 우려를 불식할 만한 시단의 풍성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본심대상 시집은 다음과 같다.
김광규 『처음 만나던 때』, 김상미 『잡히지 않는 나비』, 박영근 『저 꽃이 불편하다』, 백무산 『初心』, 손택수 『호랑이 발자국』, 이성복 『아, 입이 없는 것들』, 이영광 『직선 위에서 떨다』, 이윤학 『꽃 막대기와 꽃뱀과 소녀와』, 이재무 『위대한 식사』, 이홍섭 『숨결』, 장옥관 『하늘 우물』, 전동균 『함허동천에서 서성이다』, 최두석 『꽃에게 길을 묻는다』(가나다순).
본심은 황지우 시인이 개인사정으로 불참한 가운데 신경림·염무웅 두 사람이 10월 9일 작가회의 사무실에서 진행했고, 추후 황지우 시인의 의견을 더했다.13권에 대한 심사위원 각자의 견해를 밝히면서 대상시집은 자연스럽게 압축되었고, 다시 『저 꽃이 불편하다』와 『아, 입이 없는 것들』 『하늘 우물』 『호랑이 발자국』 등에 대해 토론을 벌였다. 『호랑이 발자국』이 가진 뛰어난 가능성, 『하늘 우물』의 농익은 기량과 화사한 이미지, 『아, 입이 없는 것들』이 도달한 예술적 성취에 공감하는 바 컸으나, 지난 연대의 역경을 진실한 고투로 넘어서 이룩한 『저 꽃이 불편하다』의 성숙한 아름다움을 기리자는 데 전원이 합의하였다.
심사평
申庚林 시인
작년 올 사이 좋은 시집이 유난히 많았던 모양, 예심을 거쳐 올라온 시집이 열 권이 넘었다. 그중에는 이미 읽은 시집이 여러 권 있었지만, 모두를 다시 곰곰이 읽고 나니, 좋은 시집이 너무 많은 것이 오히려 부담스러웠다. 그중에서도 장옥관의 『하늘 우물』, 손택수의 『호랑이 발자국』, 박영근의 『저 꽃이 불편하다』를 놓고는 어느 것을 수상작으로 정해야 할지 쉽게 판단이 서지 않았다.
『하늘 우물』의 시들은 무척 화려하고 아름답다. 그 화려함과 아름다움은 성적 상상력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생명과 풍요의 이미지와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가령 「다시 살구꽃 필 때」에서 “그 불씨 이어지고 이어져/둥그스름 달집 내 딸아이의 몸 속으로/벌건 숯불 다시 타올라/봄밤의 구들 뜨겁게 달구어낸다”처럼 연둣빛, 분홍빛으로 살아 있는 것의 아름다움과 살아 있음의 기쁨을 표현한 예는 우리 시에서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것들이다. 그러나 이 시인은 시를 사는[生] 것 같지는 않다. 치열하게 시를 쓰지 않는다는 얘기가 아니라, 대상 속에 들어가지 않고 그 밖에서 관찰하고 사유하는 느낌을 준다는 얘기다. 그러면서 그는 사물의 결과 삶의 리듬을 잡아내는 데 능숙한 솜씨를 보이고 있다. 전편이 다 명편이라 말하기는 어렵지만 거의 흠을 찾아볼 수 없는 시집이다.
『호랑이 발자국』은 우선 집요하고 치열한 한편 자유롭고 분방한 상상과 표현으로 독자를 사로잡는다. 어찌 보면 시의 내용은 평생 일만 하면서 산 아버지, 그 아버지 밑에서 큰소리 한번 못 치고 산 어머니 등 아주 낯선 것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상상력의 폭이 넓고 깊을뿐더러 문법이 아주 새로워서, 시 한편 한편이 엄청난 탄력을 가지고 압도한다. 아버지와 옻닭을 먹으면서 옻닭의 모습과 아버지의 일생 그리고 나의 삶을 연결시키거나(「옻닭」), 당나귀를 가지고 시와 사람 사는 일을 통틀어 야유하는(「당나귀는 시를 쓴다」) 일은 아무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못될 터이다. 또한 이 시집에서 간과해서는 안될 것은 활력에 넘치는 언어로서, 말에 대한 시인의 빼어난 감각이 그의 시를 활기차게 만드는 또 하나의 동력이 되고 있다.
『저 꽃이 불편하다』의 시들은 일견 표현이 소박하고 꾸밈이 없는 것 같다. 그러나 더 깊이 들여다보면 이 시집의 시들에서는 말을 극도로 아끼고, 깎고 다듬는 장인의 손길이 느껴진다. 화려한 수사도 현란한 재주도 애당초 거부하고 있는 것이 그의 시들이다. 불필요한 말은 결코 하지 않으니, 말장난 또는 관념의 유희 따위 끼어들 여지가 없다. 어쩌면 이 시인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고도의 테크니션인지도 모른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시집의 시들이 삶과 한치의 간격도 없이 일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고백하건대 나는 「어머니」 「흰 빛」 「길」 「눈이 내린다」 등을 읽으면서 몇번이고 속으로 울었다. 과연 최상의 시란 어떤 것인가, 가장 작은 말을 가지고 가장 큰 감동을 주는 것이 가장 좋은 시가 아닐까!
이 세 권의 시집 중 그 어느 것이 수상작이 되어도 좋을 것 같았으나, 마침내 박영근을 수상자로 선택한 데에는 다른 두 사람에게는 앞으로 기회가 더 있으리라는 점이 조금은 참작이 되었다.
廉武雄 문학평론가
예심을 거쳐 13권의 시집 목록이 건네졌을 때 나는 그것이 50여권 가운데서 뽑힌 것임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내심 더 압축되었더라면 하는 소망을 가졌었다. 그런데 막상 시집을 읽기 시작하자 13권 모두가 그 나름의 빛깔과 목소리를 내면서 자기주장을 하는 상황에 나 자신이 빠지게 되었다. 지난날 1960년대에 김수영(金洙暎) 선생이 한국시의 낙후성과 우리 문단의 몽매상태를 질타했던 때에 비하면, 그리고 오늘날 이 나라의 정치현실을 비롯한 여타 분야의 난맥상에 비하면 지금 우리 문학은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유례없는 전성기를 맞고 있는 듯하다.
이번 심사에서 내가 주목한 시집은 『아, 입이 없는 것들』 『꽃에게 길을 묻는다』 『初心』 『저 꽃이 불편하다』 『호랑이 발자국』 등 다섯 권이었다. 이 중 『初心』은 몇편의 수작을 포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준이 고르지 않고 방향이 갈라져 있어 먼저 제외하였다. 『호랑이 발자국』은 신예시인의 첫시집답지 않게 사색의 원숙함과 표현의 견고성을 갖추고 있지만, 그런만큼 패기가 부족하고 내성적이다. 나머지 세 시집은 어느 것이 수상작으로 결정되더라도 그럴 만하다는 평판을 들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데, 나는 고심 끝에 박영근의 『저 꽃이 불편하다』를 지목하였다.
알다시피 박영근은 지난 20년의 시작(詩作)생활을 통해 꾸준히 민중현실과 노동자의 처지에 관심을 기울여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가 단순히 시대적 조류에 따라 혀끝으로만 민중시를 노래한 시인이 아니라 가슴으로, 온몸으로 억압받는 자의 편에 서 있으려 했다는 사실이다. 이번 시집은 그런 기조를 유지하면서도 시선이 자신의 내부를 향한다. 「흰 빛」 「北斗」 「물결」 「카타콤」 같은 걸작들은 그러나 단순히 내부응시라고만도 할 수 없는, 고통받는 영혼의 가장 깊은 떨림을 담고 있다. 백석 선생의 이름으로 주어지는 문학상에 박영근을 뽑게 된 것을 나는 자랑으로 여긴다.
黃芝雨 시인
예심을 거쳐 나에게 전해진 13권의 시집들 가운데, 김광규의 『처음 만나던 때』, 이성복의 『아, 입이 없는 것들』, 박영근의 『저 꽃이 불편하다』, 장옥관의 『하늘 우물』을 ‘간신히’ 골라냈다. 이 일이 지난했음은 지난 한해 우리 시의 작황이 근래 없이 풍작임을 뜻하며, 또한 나 자신이 이런 종류의 직무에 적합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다만 너무 많은 빛깔과 때깔과 꿀에 현혹된 벌처럼 갈피를 못 잡는 독자로서 이들 시집이 보여준 각각의 개성과 드높은 경지를 구경하면서 숨차하며 날아다녔다 하겠다.
나는 어떤 것이 아름답다고 할 때 거기에는 “만인의 동의를 요구할 수 있는 취미의 주관적 보편성”이 있다는 어느 철학자의 오래된 명제를 아직까지 믿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다. 특히 어떤 작품들을 심사할 때면 ‘취미의 기준’이 수면 위의 부표처럼 떠오르는데, 그럴 때마다 오르락내리락하는 부표의 눈금들 앞에서 나는 ‘내 안의 보편성’을 신뢰하며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사실 위의 시인들 가운데는 이미 상을 넘어선 분들도 있고 상에 의해 새롭게 격려될 시인도 있다고 느꼈다. 하지만 박영근의 『저 꽃이 불편하다』를 제5회 백석문학상 수상작으로 결정하는 데 내가 주저하지 않은 까닭은 다른 사람과도 동의가 되는 시적 취미의 보편성이 나에게 미쳤기 때문이며, 무엇보다도 박영근 시인의 시 자체가 그렇게 하도록 작용했기 때문이다.
대체로 박영근 시인이 우리 시의 지도에 차지하고 있는 자리가 저 80년대 노동문학 테제로 중무장된 어떤 주의주의(主意主義)적인 시학의 대표자로 매김되어왔다는 게 그의 시를 읽는 데 상당히 방해가 되지 않나, 그렇게 나는 느낀다. 그의 시와 그가 살아온 행로가 그런 맥락을 그의 시집 둘레에 만들었겠지만, 특히 이번 그의 시집은 그런 맥락을 끌고 들어오면서 동시에 그것에 대한, 이른바 인식론적 단절을 요하는 시 자체의 힘, 시가 산문적 지상으로부터 스스로를 띄우는 부력(浮力)을 강력하게 발휘하고 있다. 아, 나는 그의 시들을 읽으면서 물방울처럼 붕 뜨는 이 시적 부력에 황홀한 바 있다. 그 부력은 아마 그가 시를 의지로 쓰지 않고 몸으로, 김수영의 유명한 격언대로 “온몸으로” 쓰고 있기 때문이리라.
(…) 매미들이
온통 살아 제 몸을 운다
한낮이 쟁쟁할수록 맹렬하게
지쳐가는 내 몸을 흔들어대고
숲의 여름빛 전체를 들어올린다,
그늘의 허기까지
–「절정」 부분
이처럼 단연 “그늘의 허기”를 느낄 수 있는 사람이 시를 아는 사람 가운데 몇이나 될까? 또한 그의 절창 가운데 하나인 「낙화」에서 “내 몸 어디//캄캄한 가지 속에서//햇잎이 저를 밀어올리는 것인가//백목련 건너 모과나무 한 그루//마주 선 채 아침놀 받고//밤 사이 누가 왔나 보다//온몸이 흥건하다”는 이 도저한 육감(肉感) 앞에 나는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아프다.
박영근의 낱말 하나하나에 시의 신경이 살아 있어서겠지만, 결코 자기연민에 빠지지 않은 그의 내성(內省)의 진정성이야말로 세기의 전환기에 우리 삶이 지불했던 역경과 도정의 쓸쓸함까지를 시적 성숙과 감동으로 이끌어낸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그의 시집을 읽고 난 한밤 마당에 나가 잠시 담배를 피우면서 그가 실제로 어디 아픈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었다.
꼿꼿한 시정신의 한 극치였던 백석의 이름이 그대를 축하한다.
수상소감
빈방의 기록
박영근
시에 대해서 그토록 많은 말들을 하면서 살아왔건만, 지금은 적막입니다. 나를 이루고 있는 숱한 문학적 과장과 허사들이 내 안을 빠져나간 뒤의, 앙상한 몸의 실체. 부끄러움 때문입니다. 이제는 있는 그대로,마음이 다 보아버린 삶과 문학의 진상 그대로 땅에 내려놓고 다시 애써 길을 떠나고자 하는 또다른 열망 때문이기도 하겠습니다. 수상소식을 듣고 거의 하루 동안 내가 사는 곳의 온갖 거리를 혼자서 걷고 또 걸었던, 그때의 내 모습이 새삼스럽게 생생합니다.
몇번의 겨울이 가는 동안 문득, 문득 찾아들던 ‘빈방’의 무수한 형상들이 지금 또 고개를 내밀고 나를 찾아오는 듯합니다. 때로 어떤 망상과 환영들은 도리어 내 육신과 생활을 제 것인 양 부리고 지워내며 그 방에서 갈피없는 시들을 써갈기곤 했습니다. 스스로를 어딘가로 가뭇없이 떠나보내고, 술 취한 행려병자를 좇던 나의 또다른 모습은 분명 마음이 지어낸 허구이겠지만, 그러나 온전히 나의 현실이기도 했습니다. 돌아보건대 그 무렵 어느 어름에서는 백석의 시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南新義州柳洞朴時逢方)」의 슬픈 서사를 절박하게 읽기도 했습니다. 봄이 오고, 달력 속에서 애틋한 봄빛을 바라보던 누렁개 한 마리의 눈망울을 나는 지금도 선연히 기억합니다.
이 세계를 제대로 살아가는 일의 고통을 쓰는 일이 언제부턴가 주변부의 언어가 되어 변방의 문학을 이루고 있는 듯합니다. 문학이 세계에 대한 어떤 윤리적 요청으로 씌어지거나 혹은 비판적 사유로서 현실을 드러내는 것은 이제 설득력이 없는 낡은 명제라는 말이 어느덧 중심부의 상식으로 행세하고 있는 것도 사실일 것입니다. 아마도 우리의 시와 문학이 현실의 새로운 국면 앞에서 하강기의 해체와 혼돈을 자신의 몸으로 감당하며 성찰의 시간대를 가질 수 있었다면 사정은 상당히 달라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경우 절망의 밑바닥이 환할 수 있는 것은 고통을 마다하지 않는 해체의 진정성 때문이 아닐는지요. 시를 쓰는 내내 그 질문이 내 곁을 떠나지 않고 생생한 전망으로 길을 틔워주었습니다.
이 시집을 주목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과 창비 여러 분들께 누추한 옷깃을 여며 절을 올립니다. 고형렬 시형(詩兄)과 인천의 한 사람을 나는 오래 기억할 것입니다. 그리고 80년대로부터 지금에 이르도록 함께 글을 써온 벗들에게 수상의 자리를 빌려 뜨거운 손을 내밀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