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신인문학상
제6회 창비신인소설상 발표
우리 문단을 이끌어갈 참신하고 역량있는 신인을 발굴하기 위해 창비가 제정한 ‘제6회 창비신인소설상’의 당선작이 아래와 같이 결정되었습니다. 시상식은 만해문학상·백석문학상·신동엽창작기금·창비신인시인상과 함께 11월 26일(수) 오후 6시 프레스쎈터 20층 국제회의장에서 열릴 예정입니다.
제6회 창비신인소설상 당선작
김주희 「소꿉놀이」
심사위원
예심: 정지아 이만교 전성태 천운영 백지연
본심: 최원식 성석제
2003년 10월
(주)창비
심사평
창비신인소설상에 투고하는 작품이라면, 그것도 본심에 올라올 만한 수준의 작품이라면, 작품과 작품에 들인 공이 아까워서라도 맞춤법 오류와 비문을 가려내 고치는 기본적인 교정은 거치는 게 당연하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상당수의 작품에서 그런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이로 미루어보면 투고 작품 전체에서도 다른 사람의 손을 빌리든 자신의 손으로 하든 흔해 빠진 말이나마 ‘장인정신’으로 정성껏 매만지는 경우가 드물 듯싶다. 신인이라면 빼어난 문장력과 능란한 구성 같은 건 몰라도 기본적인 성실성과 애착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른바 창비신인소설상 응모작 특유의, 리얼리즘과 70~80년대, 농어촌, 사회적 약자를 주제재로 삼는 작품들에서는 나름대로의 진지함과 열의는 느껴졌지만 대체로 작품의 완성도가 떨어지면서 기성화된 감성과 문법(文法)을 보여주고 있을 뿐 눈에 확 띄는 것을 찾기 어려웠다.
김성아의 「두 권 혹은 세 권」은 교통사고로 죽은 첫번째 남편의 묘에 재혼한 남편의 첫번째 부인의 봉분에 입힐 떼를 입히면서 벌어지는 사단을 다루고 있다. 이런 소재는 쉽게 얻어질 수 있는 게 아니며 한번 보면 쉽게 잊히지 않을 작품이다. 그런데 다른 사람과 공유하기 힘든 넋두리나 한풀이에 가까운 느낌을 준다는 게 문제였고 신인상에서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다음 작품에 대한 가능성’이라는 측면에서 논의에서 제외되었다.
김병순의 「자전거」는 어린 소년의 시선으로 70년대의 농촌 풍경을 손에 잡힐 듯 세밀하게, 고향을 떠나지 않을 수 없는 정황으로 씨줄을 삼고 묵은 장과 같은 사투리로 날줄을 삼아 잘 그려낸 작품이다. 그러나 추억 속 선한 사람들의 황금 같은 시절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라 할 수 있다.
김연상의 「불량소년 공중부양하다」는 아까운 작품이다. 이야기의 틀이 잡혀 있고 문제의식도 두드러진다. 그런데 철거민촌 소년의 말과 행동이 지나치게 과장된 느낌이고 시각과 어법이 기성작가의 작품과 너무 비슷하다는 게 지적되었다. 같이 투고한 다른 작품을 읽어가며 가능성을 검토했지만 그 작품 역시 어디서 본 듯한 스타일이라는 지적이 나오면서 밀려나고 말았다.
그리하여 마지막으로 남은 작품이 김주희의 「소꿉놀이」였다. 이 소설 역시 어린 소녀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고 말한다. 여러번 공들여 매만진 흔적이 있고 자신이 잘 아는 이야기를, 자신이 잘 쓸 수 있는 문장과 스타일로 안정되게 이야기하고 있다는 게 미덕이다. ‘흙언덕 우리동네’에 대한 묘사, 소설 속 인물들의 움직임도 생기가 있다. 크게 뛰거나 시끄럽게 소리지르는 작품이 아니므로 결말도 자연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피동적인 처지에 있는 소녀로서는 시야가, 어법이 한정될 수밖에 없다는 한계가 있다. 조금 더 활달하고 넓어질 ‘다음 작품’에 대한 기대가 이 작품을 당선작으로 미는 데 상당한 역할을 했다. 정진을 바란다.
[崔元植 成碩濟]
당선소감
김주희
1973년 서울 출생.
명지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동대학원 재학중.
30이라는 숫자에 빨간 싸인펜으로 여러 겹 동그라미를 쳐놓았다. 그것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나는 한숨을 쉬었다. 지난 8월, 내 생의 전환점에서.
8월 30일 창비신인소설상 마감일, 8월 31일 결혼식.
서른이 넘도록 시집가지 않는 딸을 걱정하시는 부모님에겐 더없이 기쁜 8월이었지만, 어쩐지 내겐 부담스럽고 혼란스런 때였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가계부를 정리하다 남편과 싸우고 베개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하나 둘 떼면서 늙어가겠지, 하고.
기뻐도, 슬퍼도, 화가 나도, 억울해도, 그냥 그럴 수도 있지…… 무심하게 세월을 보내는 내게 그나마의 열정이란 게 있었다면, 그것은 감히 소설을 쓰는 일이라 할 수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것은 열정이라기보다 무심하게 보내야 하는 세월에 대한 방패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견고하게 창을 막는 그런 방패가 아니라 그저 막는 시늉을 하는. 한번도 방패가 내 손을 떠난 적 없었고, 그 방패를 뚫을 만한 창들은 운명처럼 나를 비껴갔다. 그래서 삶이란, 번개 맞을 확률보다 안 맞을 확률로 무사태평 살아가나보다 생각했다.
8월 31일, 멀리 동해 망상해수욕장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나의 그 낡은 방패마저도 이제는 저 바다에 버리리라, 거짓말 같은 다짐을 하면서.
나는 아이를 가졌고 입덧중이다. 남편은 직장동료를 초대하겠노라고 하며 출근했다. 나는 입덧을 참으며 음식을 만들고 있었다. 한 단만 사도 될 시금치를 두 단이나 샀다. 두 단을 사면 한 단은 반값에 준다기에 덥석 집어든 것이다. 시금치를 다듬는데 전화가 걸려왔다. 당선소식이었다.
바람, 멀리 혹은 가까이에서 버티면 흔들렸고, 흔들리면 버티게 했다. 한 주먹 움켜쥐면 언제나 남는 건 빈 손바닥뿐이었다. 바람(望)은 바람(風)처럼 동경이었으며 유혹이었고, 절망이었으며 안타까움이었다.
내 빈 손바닥 위엔 시금치가 놓여 있다. 이것은 이제 내 소설을 지탱해줄 무심한 세월의 편린인 것이다.
당선소식을 전화로 전해들었을 때는 아무런 실감이 나지 않았다. 전화를 끊고 나니 눈물이 났고, 너무나 고마운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동안 아무렇지 않게 나를 지켜본 많은 사람들 또한 나처럼 마음속으로 조바심이 났으리라. 부모님, 형제들, 그리고 문학의 끈을 놓지 않게 해주신 명지대 교수님, 친우들…… 모두에게 고맙고 이 축하를 함께 받고 싶다.
특히, 양말 한짝도 기꺼이 벗어주시는 박범신 선생님과 당선되지 않아도 글쓰는 나를 평생 지켜주겠다는 진형씨와 나보다 더 기뻐해주며 더 열심히 글쓰는 현진과 아직 만나지 못한 뱃속의 아기와 그동안의 무심한 세월에게 깊은 감사를 전한다.
본선에 오른 작품 중에는 같이 소설 공부를 하는 사람의 글도 올라왔다. 내가 더 잘 썼다기보다는 부족함을 좀더 채워야 한다는 묵언의 충고가 담겨 있는 결과인 것 같다. 기회를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