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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점토론 │ 시민운동의 현주소를 묻는다

 

시민단체의 공익성과 이념

 

 

김석준 金錫俊

한국NGO학회 고문, 한국행정학회 회장, 비전@한국 공동대표, 바른사회를 위한 시민회의 공동대표, 이화여대 행정학 교수. 저서로 『거버넌스의 정치학』 『한국산업화 국가론』 『경제민주화의 정치경제』 『열린사회 열린정보』 등 다수. ksj@ewha.ac.kr

 

진중권 陳重權

평론가. 『아웃사이더』 편집위원. 저서로 『미학 오디세이』 『춤추는 죽음』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 『폭력과 상스러움』 등이 있음. mkyoko@chollian.net

 

 

발제 1: 김석준

 

1. 머리말

한국의 시민단체는 지난 15년 동안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공고화 그리고 시민사회 성숙에 큰 공헌을 했다. 그러나 짧은 기간에 큰 성과를 이룬 부작용으로 여러가지 문제들도 내포하고 있다. ‘시민 없는 시민운동’ ‘백화점식 운동’ ‘쎈쎄이셔널리즘’ ‘지나친 연대활동’ ‘소수 시민단체의 독과점체제’라는 비판 외에 ‘시민단체의 지나친 정치화’가 ‘홍위병’ ‘포퓰리즘’ 및 ‘운동정권’ 논쟁의 빌미를 제공했다. 이 때문에 ‘시민사회 실패’를 우려하기까지 한다. 특히 ‘노사모’나 ‘국민의 힘’과 같이 특정 정치세력과 밀접하거나 ‘재야운동권’의 후예 및 특정 이익세력과 구분되지 않는 조직들마저 시민단체를 표방하면서 시민단체의 공공성과 책임성이 크게 훼손되고 있다. 일부 시민단체는 지역이기주의나 집단이기주의를 조직화하여 국가적인 국책사업을 방해하고 공공성을 해치면서도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다. 권력이나 자본과의 관계에서도 공적으로는 비판적이나 실제로는 유착하는 이중적인 관계를 유지하기도 한다. 게다가 남남갈등이나 국내 정책이슈에 대한 단체별 이념적 접근이 달라지면서 서구 선진국들이 20세기에 겪은 이념적 분화과정이 탈이데올로기의 21세기 한국사회에서 때늦게 진행되어 심지어 시민단체가 사회통합보다는 사회갈등의 요인이 되는 경우도 있다.

 

2. 한국 시민사회의 전개와 이념적 분화과정

한국의 시민단체는 100여년의 역사를 지닌 YMCA, YWCA, 흥사단 등과 같은 합리적 중도보수단체들이 뿌린 씨앗 위에 출발했다. 그러나 1960~87년의 산업화 과정에 등장한 개발독재체제에 저항하는 ‘반독재’와 ‘반체제’ 운동이 학생운동, 노동운동 및 민주화운동과 연계되면서 ‘좌파운동권 단체’들은 권력과 자본에 대해 ‘불법반체제운동’을 중심으로 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다가 중산층 시민이 주도한 1987년 6월 민주항쟁이 개발독재체제를 붕괴시키면서 중도시민단체의 활동여지를 마련했다. 이에 1989년 중도좌파와 중도우파를 포괄하는 경실련이 창립되면서 본격적인 중도시민운동이 시작되었다.

시민사회는 내부적으로 경실련 중심의 시민단체협의회(시민협)가 주도하던 시기(1989~97)에서 참여연대·환경운동연합 중심의 총선연대·개혁연대 주도 시기(2000~2003) 및 다원화 시기(2003~현재)로 전환하게 되었다. 이러한 시민단체 내부의 헤게모니 이동은 시민단체의 공공성과 책임성의 측면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첫째, 우리나라 시민운동의 꽃을 피운 경실련은 1989년 창립 이후 적어도 세 가지 기본원칙에 충실했다. 그들은 합법운동, 합리적 대안 제시 및 이해당사자의 자발적인 수용이다. 첫째로 아무리 민주주의가 중요하더라도 법질서의 테두리에서 ‘악법도 법’인만큼 합법운동을 준수했다. 이것은 과거 반체제운동과 다른 점이다. 둘째로 일방적인 비판이나 파괴적인 부정이 아니라 그 문제에 대해 전문가들의 건설적인 대안을 제시하고자 했으며, 셋째로 아무리 좋은 대안이라도 이해당사자들이 중재자를 불신하거나 일방이 도저히 현실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면 중재를 강제로 압박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이런 원칙에 따른 경실련 운동은 서울지하철파업, 한·양약 분쟁 등 정부나 국회 및 정당이 할 수 없었던 합의를 도출해 공익 창출에 기여했고 많은 국민의 지지를 얻었다. 이 때문에 경실련은 좌파운동권으로부터는 ‘개량주의’라는 비판을, 우파로부터는 ‘급진개혁주의’라는 비판을 동시에 받았다. 그럼에도 많은 국민들이 지지한 이 중도개혁주의 운동은 초기에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경실련이 당초의 정치권력 및 자본과의 중립성을 유지하지 못하고 금융실명제나 정부개혁작업에 지나치게 참여하면서 형성된 권력유착이 시민사회 내부에서 비판대상이 되고 도덕성 문제가 국민들의 비판을 받았으며 스스로의 기반이 훼손되었다.

둘째, 참여연대와 환경운동연합 주도의 연대 시기는 경실련 주도기와 달리 ‘악법은 지키지 않는다’는 방법론적 차이와 권력 및 자본 비판에서도 급진적·중도좌파적이어서 내용의 차이가 있다. 그것이 언론파동 때 김대중 대통령의 ‘악법은 지킬 필요가 없다’는 ‘언론개혁촉구’ 발언과 맥을 같이하면서 총선연대, 의약분쟁·언론정국을 주도하는 개혁연대 운동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들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경실련이 김영삼정부와 가까웠다면 참여연대는 결과적으로 김대중정부와 유착한 것으로 국민들에게는 비치게 되었다.

셋째, 시민단체의 다원화와 시련기이다. 노무현정부의 출범을 전후하여 노사모가 촛불시위를 위시한 반미주의운동을 조직화하고 정치운동으로 전환하면서 한국 시민사회에는 이념갈등이 첨예하게 전개되었다. 남남갈등을 상징하는 대규모 집회가 서울 시청앞 광장에서 빈번하게 개최되었고 노사모가 ‘국민의 힘’으로 바뀌어 정치활동을 노골화하면서 이들 단체는 공공성이나 책임성보다는 정치적 목적을 표방하게 되었다. 여기에 대항하여 보수우익단체의 행동도 조직화되어 시민단체간의 세력대결이라기보다는 정치운동세력간의 이념갈등으로 확대되고 있다. 이 때문에 15년 동안 어렵게 성장해온 시민사회의 기반은 균열되고 ‘시민사회 실패’의 우려를 현실화하고 있다. 한국의 대표적인 시민단체인 경실련, 참여연대 및 환경운동연합이 번갈아 유발한 ‘시민사회 위기론’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의 과제가 시민단체들에게 주어져 있다. 심지어 노대통령이 당선 1주년 기념식을 강추위 속에 길거리에서 ‘노사모’와 ‘국민의 힘’ 회원들을 중심으로 가지면서 이들에게 ‘시민혁명’을 계속 주도해달라는 요구를 하고, 또 시민단체들이 4월 총선에 ‘당선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하겠다고 한 점은 시민단체와 권력의 유착을 심화시키는 위험한 계기가 될 우려가 크다. 더구나 4월 총선을 계기로 ‘권력-자본-언론의 지배구조를 바꾸겠다’고 ‘올인’하는 정부하에서는 합리적 중도시민단체의 역할이 더욱 중요하고 시민단체는 원칙에 충실할 필요가 있다.

 

3. 합리적 중도시민단체의 역할과 과제

합리적 중도시민단체 또는 합리적 보수단체는 이념이나 정치적 대결보다는 정책대안세력을 표방한다. 세계화·정보화·탈이데올로기 시대인 21세기는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정책대안과 집행이 중요하고 자유민주의와 자유시장경제가 중심질서가 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1996년 중도지식인 네트워크조직으로 ‘안민포럼’(당시에는 신자유포럼)이 시작된 후, 2001년 지식인단체인 ‘비전@한국’이 출범하고 2002년 3월 ‘바른사회를 위한 시민회의’가 합리적 중도보수시민단체로 등장한 이후 권력과 자본은 물론 기존 시민단체에 대한 보완세력으로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역사가 일천하여 합리적 보수층을 얼마나 잘 조직화할 수 있을지에 대한 평가는 시간이 필요하다. 만일 합리적 보수시민단체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기존의 수구보수단체들의 역할이 유지되고 보수층의 시민들을 대변하는 새로운 시민단체가 필요할 것이다.

이것은 보수시민단체나 보수층만의 문제가 아니라 시민사회 전체의 문제로서 ‘시민사회 실패’를 치유할 수 있느냐의 문제와 직결된다. 이념적 분화과정에 있는 한국의 시민단체가 다양성을 유지하면서도 시민단체 본연의 역할과 기능을 수행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일부 지도층 인사들에 의해 정치적으로 악용되거나 특정 정치세력의 이익정치나 이익집단 활동과 구분되지 못한다면 시민사회 실패를 가속화할 뿐이다.

시민단체는 공공성을 유지하면서 사회통합이나 시민사회 성숙에 기여해야 한다. 보수와 진보 또는 좌파와 우파의 이념적 다양성을 인정하면서 각 시민단체가 그 정체성을 유지함으로써 시민사회를 성숙시켜가야 한다. 이제 연대화나 획일화로 개별 단체의 특성을 무시한 몰개성적인 범시민운동이 시민사회를 지배하는 시대를 끝내야 한다. 권력이나 자본과 유착한 시민단체도 자율성을 되찾아야 한다. 도덕성·자율성·공공성·책임성을 시민단체들이 확보함으로 ‘시민단체의 실패’를 사전에 막아야 한다. 이를 통해 국가-시장-시민사회가 바른 관계를 구축하고 성숙한 시민사회가 주도하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의 새로운 거버넌스(governance)를 구축해야 하겠다.

 

 

발제 2: 진중권

 

1. 시민단체란 무엇보다도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단체를 말할 게다. 그런 의미에서 똑같은 시민들로 이루어져 있어도 과거 군사독재정권 시절에 결성된 수많은 관변단체나 어용단체를 우리는 ‘시민단체’라 부르지 않는다. ‘문민정부’‘국민의 정부’를 거치면서도 비슷한 부류의 단체들이 만들어졌다가 사라진 것으로 기억한다. 위에서부터 조직된 그런 단체들을 우리는 ‘시민단체’라 부르지 않는다. 최근에 참여정부가 들어서면서 이와는 좀 다른 단체들이 만들어졌다. 대통령선거의 바람을 타고 등장한 ‘노사모’니 ‘국민의 힘’과 같은 단체들이다. 비록 자발적으로 구성되었으나 이들을 ‘시민단체’라 부르지는 않는다. 그럼 시민단체는 무엇인가?

시민단체는 보수와 진보의 차이를 뛰어넘어 ‘공공선’의 영역에서 활동하는 시민들의 자발적 결사다. “계급과 계층을 초월한 ‘공공선’의 영역이 있을 수 있는가” 하는 철학적 차원의 물음을 제기할 필요는 없다. 이미 우리 사회가 합의하는 가치들이 있다. 반전평화, 인권수호, 경제정의, 부패척결, 언론감시, 생태계의 보존, 사회적 약자의 보호, 모든 차별에 대한 반대 등이 그것이다. 이런 가치들은 정치적·이념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쉽게 보편적 동의에 도달할 수 있는 것으로, 바로 이 가치들의 총합이 사회적 ‘공공선’의 영역을 이룬다. 여러 시민단체들은 바로 이 ‘공공선’을 이루는 부분적 가치들의 실현을 위해 자발적으로 조직된 시민들의 모임이라고 할 수 있다.

진보든 보수든 특정한 이념을 전제하는 단체도 ‘시민단체’로 볼 수 없다. 이념은 객관적 ‘공공선’이라기보다는 자신이 ‘공공선’임을 주장하는 당파적 견해이므로, 사회의 보편적 동의를 얻기 힘들다. 이념은 정당의 기초다. 우리 사회의 정당들은 워낙 이념이나 정책보다는 지역에 존재근거를 두고 있어 이런 주장조차 과격하게 들린다. 최근에는 ‘이념의 퇴조’ 운운하며, 이념정당을 마치 낡은 발상인 양 치부하는 경향도 있으나, 정당의 본질은 어디까지나 특정 계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특정 이념을 대변하는 데에 있다. 정당의 그런 편파적 성격은 ‘party’라는 명칭 자체 속에 이미 들어 있다. 따라서 특정 이념을 전제하는 단체는 시민단체라기보다는 ‘이념단체’라 불러야 할 것이다.

정당이 특정 계층이나 이념을 대변하기 때문에, 정치권에서는 특정 사안에 대한 결정이 논리보다는 힘에 의해 좌우되는 경우가 많다. 그 역관계(力關係)에서 내려지는 정치적 결정은 종종 특정 당파의 이익을 강하게 대변하기에, 그것이 늘 사회적 ‘공공선’과 일치하지는 않는다. 이런 편파성은 특정 사안에 대한 결정과정에서만 나타나는 게 아니라, 그 이전의 의제화 단계에서 벌써 나타나기 시작한다. 말하자면 사회적으로 의미가 있는 사안들이 아예 정치권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다. 시민단체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이렇게 이 사회의 어떤 문제들이 정당정치의 틀에 받아들여지지 않고, 또 받아들여져도 그 해결이 정치적으로 왜곡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2. 시민단체가 벌이는 여러 활동이 단순히 자선사업 수준이 아닌 이상, 그 활동이 대변하는 사회보편의 이익은 궁극적으로 국가의 법적·제도적 장치 안에 받아들여져 실현되는 것을 지향할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시민단체가 어떤 식으로든 정치권과 관계를 맺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아니, 불가피한 정도가 아니라 외려 적극적으로 시민단체는 자신들이 지향하는 가치를 담은 정책을 제도화·법제화하기 위해 정치권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압력단체의 역할을 해야 한다. 필요하다면 때로는 각 정당에서 정책이나 법안을 수립하는 과정에 참여하여 자신들의 견해를 관철해야 한다.

과거의 경실련이 보여주었듯이 정치권과 관계를 맺고 그 지원을 받는 가운데, 국가권력이나 특정정당으로부터 독립성을 잃어버리는 일도 생길 수 있다. 특히 재정이 열악한 시민단체는 국가로부터 지원을 받고, 여러가지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가운데에 모종의 유혹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시민단체가 국가의 지원을 받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시민단체에서 하는 일의 공익성을 생각한다면, 마땅히 시민단체는 국가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아야 한다. 다만 그것이 이 ‘정권’ 차원의 것, 즉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달라지는 성격의 것이 아니라, 정권의 교체와 상관없는 ‘국가’ 차원의 지원이어야 한다.

시민단체라 하면 떠오르는 또다른 문제들이 있다. 대표적인 것은 시민단체에서 활동하던 이들이 그 경력을 가지고 정치권에 영입되어 들어가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은 참정권을 갖고 있으므로 이 자체를 나무랄 수는 없다. 문제는 이들이 정치권에 들어가서 과연 자신들이 지향하던 가치를 실현하는 데에 기여하느냐 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에 이들은 자기가 속한 당파의 논리에 휘말려 다른 정치인들과 똑같은 수준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 경우 시민운동가는 시민단체의 이미지와 상징자본을 활용하여 개인적 출세를 했을 뿐, 이를 시민운동의 정치적 진출이라 불러서는 안될 것이다.

이런 개별적 진출에 한계를 느꼈던지 최근 몇몇 시민운동가들이 아예 시민단체를 정당으로 만들어 집단적으로 정치권에 진출하려는 시도를 한 바 있다. 결국 이 움직임은 여러 단체들의 반대에 부딪혀 좌초하고 말았지만, 이런 시도 역시 시민단체의 본령에서는 벗어난 일이다. 시민단체라 함은 특정한 공공선을 위해 좌·우, 보수·진보의 대립을넘어 결합한 사람들의 모임인데, 녹색당과 같이 하나의 가치를 내세운 정당이라면 몰라도, 각자 이념과 가치도 다르고 서로 하는 일이 다른 사람들이 단지 시민단체라는 공통성만으로 하나의 정당으로 결합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3. 지난번 총선에서 시민단체들은 낙선운동을 벌였다. 이렇게 시민단체가 바깥에서 정치권에 압력을 행사하는 것은 정당하며 또 필요한 일이다. 정당의 낡은 관행을 개혁하는 것은 사회보편의 가치에 부합했기에, 이 운동은 시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하지만 최근에 등장한 ‘당선운동’은 경우가 다르다. 되어서는 안될 후보를 가리는 데에는 비교적 뚜렷한 기준이 있다. 하지만 이념과 정책이 다른 후보들 중 당선시킬 대상자를 가리는 데에 사용할 통약가능(通約可能)한 기준은 없다. 따라서 이것은 시민단체의 몫이 아니라, 유권자의 선택의 영역으로 남겨놔야 한다. 낙선시킬 대상자의 선정과 달리, 당선시킬 대상자의 선정은 이념적·정치적 판단을 포함할 수밖에 없다. 이는 불필요한 공정성 시비만 낳을 뿐이다.

2000년 총선은 우리에게 또 하나의 문제를 남겼다. 시민운동이 언제나 ‘실정법’의 틀 내에서 움직여야 하느냐 하는 것이다. 시민운동은 가능한 한 실정법을 준수해야 한다. 하지만 법 역시 신의 절대적 계율을 명문화한 게 아니라, 종종 특정 인간집단의 상대적 이해의 표현이다. 가령 국가보안법처럼 시민적 권리를 제약하는 악법에 대해 우리는 ‘시민불복종’의 권리를 행사해야 한다. 또다른 민주주의 국가에서 유권자들이 누리는 권리가 이곳에서만 불법이라면, 시민적 권리를 확대한다는 의미에서 시민은 사회적 통념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거기에 불복종할 수도 있다. 시민단체는 외려 ‘법비판’으로까지 활동영역을 넓혀야 한다.

 

토론: 진중권

김석준 교수의 글에서 결여된 것은 ‘시민단체’의 성격에 대한 명확한 규정이다.‘시민단체’의 외연에서 보수든 진보든, 특정 이념이나 정치적 입장을 전제한 단체들은 마땅히 제외되어야 한다. 시민들이 만들었다고 모두 시민단체로 인정할 경우, 시청앞 광장에서 성조기를 흔들고 인공기를 불태우던 광신적 집단들도 졸지에 ‘시민단체’로 분류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의 활동이 사회적 공공선의 실현을 위한 것이라 볼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것은 최근에 특정 당의 선거운동을 위해 결합한 몇몇 친여단체들을 ‘시민단체’라 부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시민단체는 이념의 실현이 아니라 널리 사회적 공공선으로 인정되는 구체적인 과제의 실현을 지향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극단적인 경우는 아니더라도 ‘바른사회를 위한 시민회의’처럼 지향하는 가치나 해결해야 할 과제가 너무 포괄적으로 규정되어서 성격이 불분명하고, 실천활동에서는 비교적 뚜렷한 정치색을 드러내는 단체를 과연 ‘시민단체’라 부를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아마도 이 단체는 그 정체성이 이념단체와 시민단체의 중간에 있다고 하는 게 옳을 것이다. 이렇게 이념과 시민적 가치 사이에서 정체성이 흔들릴 경우, 그 혼란에서 때로 위험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가령 이 단체는 ‘반전과 평화’라는 인류보편의 가치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이라크전 파병을 주장하고 나선 것으로 안다. 이라크 전쟁에 아무 명분이 없고, 설사 명분이 있어도 외교적 문제를 전쟁이라는 폭력적 수단으로 해결하려 드는 것은 분명히 시민사회가 지향해야 할 가치에서 많이 벗어난다. 따라서 파병 찬성은 객관적 공공선이 아니라 주관적 이념의 표현이라고 봐야 하다. 이 노골적인 이념성의 표출은 그 단체가 겉으로 표방하는 시민적 가치, 즉 ‘바른 사회’라는 가치마저도 정면으로 부정하게 된다.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이 없는데도, 조작된 정보에 바탕해 전쟁이라는 수단으로 타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것은 결코 바르게 사는 자세가 아니기 때문이다.

 

토론: 김석준

시민단체가 사회적 공공선을 실현해야 한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그러나 공공선의 내용은 보편적인 이념이나 가치를 중심으로 평가되어야 하기 때문에 시민단체가 ‘이념이나 정치적 가치’를 배제해야 한다는 것은 개념정의나 실체 평가에서 잘못된 것이다. 주지하듯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헌법의 기본질서로 선포하고 있는 한국사회에서는 공공선의 기준이 이런 가치를 중심으로 설정될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질서를 거부하는 가치와 이념을 지향하는 단체들은 아무리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만들었더라도 시민단체로서 인정하기 곤란하다.

한국에서는 아직 시민사회가 충분히 성숙되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에 대표적인 시민단체들도 겉으로는 정치중립적인 공공선을 내세우면서도 실제로는 정치적인 활동을 하는 경우가 많다. 총선시민연대의 낙선운동이나 일부 친북단체들의 활동이 순수한 시민단체의 활동범위를 벗어나 ‘시민사회의 실패’를 가져올 부작용을 낳고 있는 것도 이들 운동의 ‘정치편향성’ 때문이다. 이는 공공선을 자의적인 기준으로 해석하여 인류보편의 가치이고 헌법의 기본질서인 공공선의 핵심을 위협하고 위법활동을 조장함으로 법치주의라는 공공선의 기초를 허무는 자기모순을 낳고 있다. 자의적 기준에 따라 정치적 중립과 이념을 배제한다고 하더라도 객관적·보편적 기준에 따르면 또다른 정치편향성과 이념지향성으로 나타날 위험이 있다.

시민단체의 형성과정도 일반조직의 성장이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조직목적의 발전·세분화·승계·전환 등이 일반조직의 발전과정에서 나타나듯이 시민단체도 좁은 활동에서 넓은 활동으로 범위가 확장되기도 하고 넓은 목적에서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구체적이고 세분화된 활동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경실련과 참여연대의 사례가 이것을 증명한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창립 2년이 채 되지 않은 ‘바른사회를 위한 시민회의’의 지향가치나 활동과제가 포괄적이라는 이유로 시민단체가 아니라는 평가는 지나친 것이다.

또한 ‘반전과 평화’라는 것이 인류보편의 가치이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다. 그렇더라도 그것을 실현하는 방법에 대한 평가는 정책평가의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기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 파병과 파병반대는 하나의 정책적 수단의 선택결과일 뿐이다.‘파병반대는 선’이고 ‘파병은 악’이라는 평가는 지극히 주관적이고 편견에 사로잡힌 판단이다. 이것은 선악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이고 수단의 문제이다. 더구나 파병문제를 남한사회나 국제사회 질서와 관련해 종합적으로 판단하는 대신 남북한문제나 북한핵문제를 중심으로 편향되게만 평가하는 것도 경계해야 할 일이다. 북한핵문제가 현안이 되면서 국제적인 ‘반전반핵 평화운동’이 국내에서 ‘정치적 이유’로 ‘반전평화운동’으로 탈바꿈한 것이 ‘시민단체들’의 전술적 결정의 결과가 아닌가?

21세기 세계화와 지식정보화 사회에서의 공공선은 폐쇄사회의 민족주의 우선의 가치가 아니라 민족주의와 세계주의를 조화시키는 균형된 가치를 추구할 때 더욱 크게 실현된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도덕성과 전문성을 지니고 정치권력과 유착하지 않는 균형된 시민단체들이 자발적으로 다양하게 뿌리내려 성숙한 시민사회를 꽃피울 때 한국사회는 자유민주주의와 자유 시장경제라는 인류보편의 선진사회를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