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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최하림 崔夏林
1939년 전남 목포 출생. 196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우리들을 위하여』 『작은 마을에서』 『굴참나무 숲에서 아이들이 온다』 『풍경 뒤의 풍경』 등이 있음.
메아리
오래된 우물에 갔었지요 갈대숲에 가려 수시간을 헤맨 끝에 간신히 바위 아래 숨은 우물을 발견했습니다 마을 장로들의 말씀으로는 성호 이익 선생께서 파셨다고도 하고 성호 문하에서 파셨다고도 하고 그보다 오래 전 사람들이 파셨다고도 했습니다. 아무려면 어떻겠습니까마는 좌우지간 예사 우물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숙이고 벌컥벌컥 물을 마신 다음 우리가 살아야 할 근사한 이유라도 있는 것이냐*고 가만히 물어보았습니다
우리가 살아야 할 근사한 이유라도…… 이유라도……
하고 메아리가 일었습니다 그와 함께 수면이 산산조각 깨어지고 얼굴이 달아났습니다 나는 놀래어 일어났지만 수면은 계속 파장을 일으키며 공중으로 퍼져가고 있었습니다
✽한 편의 시도 발표하지 않은 채 외롭게 스스로의 생을 마감한 여림의 유작시 한 구절. 나는 그를 가르친 적이 있다.
북한강
겨울강이여
그대 허리에 걸린
다리에 있으면 허파는 벌떡이고
울퉁불퉁한 길을 돌아 마른 억새들이
떼지어 온다 물오리 새끼들도 따라온다
하지만 나는 무엇인가에 발목이
잡혀 옴짝달싹 못한다 나는 올라가지도
내려가지도 못한다 네거리에서는
일톤 트럭과 자가용들이 씽씽 달리고
깃을 세우고 사람들이 좌로 우로 간다
어느 지점에선가 분명 다른 강이
시작되고 다른 바다가 흘러가고
있다 다른 사람들이 사기치고
횡령하고 행패부리고 시위하며
가고 있다 눈덩이 같은 카드빚을
탄식하며 여인들이 가고 있다
나는 넘어가는 해를 보고 있다
나는 나무를 보고 있다
새들을 보고 있다
북한강에는 어스름이 내리고
물이 흐르고 시간의 소리
높게 울린다
지리산 너머 수십만 되새들이
지리산 너머 수십만 되새들이 까맣게 포물선을 그리며 돌고 돌다가 대숲으로 들어간다 순간 대숲은 일망무제와 같이 흔들리고, 흔들리면서 일어서고 소리지른다
아아 숲속에는
숲의 집 속에는
피 흘리던 날들이 있다
이한열과 박종철이 있다 김상진이
있다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돌아보고
돌아보라 대숲에는 아직도 십일월의 햇빛이 새금파리처럼 부서지면서 반짝이고 아침에는 무서리 내리고 지평선이 더욱 멀고 수십만 되새들이 지리산을 넘고 또 넘어간다 십일월에는 모든 것들이 물에도 젖지 않고 흘러내려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