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독자의 목소리

 

좌담 「탈중심의 동북아와 한국의 ‘균형자’ 역할」에 대해

 

 

지난호에서는 그동안 창비가 진행해온 동북아 담론의 연장선상에 있는 특집이 좋은 읽을거리였다. 그 기획은 미국을 비롯한 서구의 영향을 염두에 두는 한편 동북아질서의 지형변화를 가늠하고, 그 안에서 취할 우리의 행보를 숙고하자는 논의로 읽힌다. 특집에서 이 주제를 정면돌파하는 것은 역시 좌담이다. 특히 이번 좌담은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현실적인 이슈들을 논의해주어서 구체적으로 도움받은 바가 컸고, 적당한 의제로 논의 수준을 유지해줘서 공허한 느낌이 없었다. 그런데 그동안 창비를 읽으면서 계속 느끼던 경향이 이번 좌담에서 다시 한번 두드러지는 것 같다.

동북아질서의 재편에 따른 우리의 ‘균형자’ 역할에 대해 숙고하는 것은 좋으나, 최근 창비의 경향은 주로 ‘행위자’(actor) 중심의 시각에 치우쳐서 비가역적인 ‘과정’(process)에 관한 측면에는 소홀한 감이 있다. 국민국가를 기본 행위자로 상정하고 우리 자신 역시 장기판 위의 말로 생각하고 판을 짜는 것은, ‘현실적’일 수는 있어도 변혁을 위한 ‘상상력’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본다. 나와 무관하게 흘러가는 커다란 과정에는 무심하면서도 내가 ‘장악’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작은 것들에 집착하는 건 아닌지 생각해봐야 한다. 동북아통합 논의에서 미국의 외교정책과 중국의 발흥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동북아를 포괄하는 미디어망일 수도 있고 공통의 문화감각과 문화정체성을 창출하는 일일 수도 있다. 미국과 중국의 시소 위에서 쓰러지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위험한 게임에서 어떻게 벗어날 것인지, 정치와 외교의 장(場)이 아닌 다른 결정적 장은 어떤 것들이 있을지, ‘선진국’들이 물려준 이 ‘사고법’에서 어떻게 탈출할 수 있을지 ‘현실적으로’ 더 상상해주길 바란다. 독자로서 창비에 가장 기대하는 바다.

구일해 rudra47@paran.com

 

박민규의 장편연재를 읽다가

『창비』에 박민규가 장편소설을 연재한다고 했을 때 놀랍고 반가워서 무릎을 쳤다. 그래서 서점까지 쏜살같이 달려가 사서 읽었다. 기대에 부응하듯 “여성지에 연재하는 걸로 여기겠습니다” 하는 박민규의 출사표와 “그거면 됐다” 하는 창비의 배짱은 요 몇년 사이 만난 어떤 글보다 나를 낄낄거리게 만들었다. 그뿐인가. 부모나 선생 따위는 보이지 않는 벌판의 두 아이, 정원에 들어온 자판기, “인간은 누구나 다수인 척하면서 평생을 살아간다”는 식의 구라잠언은 점입가경이었다. 하지만 두 쎄트째 접어든 게임을 관전한 뒤 슬며시 어떤 혐의가 느껴졌다. 박민규는 기교와 형식에서 완전한 새로움을 보여주지만 그것이 내재하고 있는 세계관은 자못 퇴행적일 수 있다. 비주류에 대한 연민과 온정은 가장 ‘창비스러운’ 세계관이 아닌가. 그러니 새로울 것도 없네, 파격인 줄 알았는데 초록은 동색이었군…… 그것은 마치 모나코왕국 공주의 정원이 이런 것이겠거니, 하는 화려한 포장지를 뜯어 먹어보니 “아니, 이건 옛날 그 오십원짜리 고소미 아냐” 하는 낭패감과 닮은 것이었다. 창비에서 배수아의 소설을 읽는 것도, 김연수, 구효서의 소설을 만나는 것도 창비 안에서는 새로운 것이지만, 그것은 이미 적게든 많게든 검증된 것이고, 완숙한 뒤의 일이었다. 단지 창비 속에서만 새로웠을 따름. 이러한 불편함은 기대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나의 환호나 달뜸이 처음부터 끝까지 맑은 것이었으면 좋겠다는 바람. 새로움이든 뒷북이든 나는 독서 후에 얼쩡거리는 창비의 그림자를 괜스레 재단하지 않고 다만 박민규의 게임을 끝까지 관전하고 싶다. 창비도 어떤 강박이나 재단 없이 창비만의 눈으로 순수하고 맑은 혁신과 실험을 해나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임수현 nimsen@naver.com

 

가을호에서 읽은 시 몇편

오랜만에 시 읽는 즐거움을 누렸다. 우선 이홍섭의 시 「두고 온 소반」은 1연과 2연 공간의 거리가 실감있게 느껴졌다. 3행짜리 1연과 2행짜리 2연이 빚어내는 저 아스라한 거리. 이것만 가지고도 나는 절간 외진 방에 가 있는 나를 생각할 수 있었다. 두고 온 것은 ‘낡은 소반’이지만 그 소반은 소반 하나가 전부였던 절간 외진 방을 생각나게 하는 것이고, 거기 다녀간 나같이 지치고 병든 인생 동료들을 떠올리게 하는 어떤 것이며, 어둠속에서 잠시나마 스스로를 반딧불처럼 여기도록 만드는 어떤 것이다. 그것은 제법 힘있는 어떤 것이며 황홀함 그 자체다. 그러나 내가 사는 곳의 속세 동무들에게 그것을 온전히 보여줄 수는 없는 일. 그래서 시적 화자는 말한다.나는 단지 낡은 소반 하나를 거기 두고 왔을 뿐이라고. 우리는 어쩌면 절간 외진 방에 두고 온 그런 낡은 소반 하나의 힘으로 근근이 삶을 지탱해가는지도 모른다. 누구에게도 그 실물을 가져와 보여줄 수 없는 낡은 개다리소반!

문태준의 「오오 이런!」은 선명한 그림이 그려져 좋았다. 눈초리로 늪물(눈물과 흡사한 발음이면서 눈물이 아닌)이 흘러내리고 알을 많이 낳아 뒤가 청동주발 같은(아 얼마나 벌어졌겠는가) 오리를, 곁말 거는 척 도리반거리다(두리번거리다가 아니고) 오리 곁으로 바싹 기어와 흡사 싸구려 종이를 쏠듯 오리의 옆구리를 갉아대는 쥐의 형상. 거기 그 쥐가 부양하는, 익사한 몸처럼 부푼 쥐와 눈망울이 또랑또랑한 새끼쥐. 그 목숨들의 처연한 삶의 현장을 한컷의 사진으로 뽑아올리는 솜씨라니. 이 시인의 또다른 작품 「번져라 번져라 病이여」를 읽노라니 왠지 멀리서 백석의 냄새가 얼찐 풍겨왔다. ‘뜨거운 환장할 대낮의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한 여인’의 형상이 꼭 그래서만은 아니고 그 무엇을 죽죽 나열하는 말투가 그랬다. 김수열의 「연변 여자」같이 직설에 가까운 절규에서 느껴지는 진정성도 좋지만 나는 「번져라 번져라 病이여」가 내부에 은은히 품고 있는 치열함도 좋았다. 그 시는 내가 ‘살아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이창기의 「세상에서 가장 부지런했던」에 등장하는 인물은 시인의 관념이 아니라 생활 속에 우러나온 인물 같다. 그래서인가 수다쟁이 이 시가 나는 제법 인상깊었다. 이런 우리 주변의 인생들을 우리는 또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기나긴 생애의 한 터널을 지나왔으나, 이제는 문득 생의 허무와 마주친 나의 아버지여.

아동문학평론가, 인천 개흥초등학교 교사 김제곤

 

넓은 시각으로 역사를 보기 위해서

『미래를 여는 역사』는 종종 들르는 도서관 사서의 권유로 얼마 전 읽어보게 되었다. 기존의 역사 관련 책들과는 확연한 차이점을 느낄 수가 있었다. 특히 눈에 띈 것은 ‘한중일 3국’이 공동으로 엮었다는 사실이다. 지난호 촌평에서 평자 백영서 교수도 예상했듯, 가슴 아픈 한국사를 다시 한번 읽을 무렵에는 울분도 터져나오고, 자국민의 입장에서 보면 당연하고 담담한 서술일 수도 있지만 일본사 부분을 읽을 때는 감정이 격해지기도 했다. 기존의 우리 역사교과서에서 중요한 사건의 원인과 동기를 보면 너무나도 억울하고 침통했으며, 우리가 힘이 없다는 것에 대한 원망을 한두번쯤은 하게 된다. 그러면서도 일본이나 중국에 관한 역사적 사건의 진실이나 원인은 대부분 잘 알지 못한 채 사건 발발연도나 한두줄로 압축정리된 내용들만 암기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런 이유에서 『미래를 여는 역사』는 나의 오랜 이 고정관념을 일깨워주는 발판이 되었다. 평자의 말대로 이런 신선한 충격을 자국민의 협소한 민족적 입장이 아닌 객관적인 입장에서 재평가하고 역사적 배경의 진실을 드러내야 한다. 한정된 시각과 사건에 얽매이지 않고 역사적 인식의 지평을 넓히는 것이 중요하다. 이 책의 장점을 살리고 문제점을 보완하여 현재의 중고등학교 역사교과서로 채택되기를 기대해본다.

전북 익산시 함열읍 남당리 임지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