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87년체제의 극복을 위하여
분단체제와 87년체제
김종엽 金鍾曄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저서로 『연대와 열광』 『시대유감』 『에밀 뒤르켐을 위하여』 등이 있음. jykim@hs.ac.kr
1. 해방 60년, 대한민국과 한반도
개인사에 대한 동양적 시간감각이 투사되어 기념된 해방 ‘60주년’도 이제 저물어가고 있다. 연대기적 시간이 그 자체로 의미있는 것은 아니지만, 새롭게 출발하기 위해서도 그리고 시대감각을 획득하기 위해서도 시간의 매듭이 필요한 법이고 그런 일을 하는 계기로 삼기에 60년이라는 시간은 적절한 것 같다. 요컨대 시대감각 또는 방향감각의 획득을 위해서 자기서술을 시도해볼 때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 이 자기서술 자체가 그리 간단치 않다. 해방 60주년은 대한민국의 관점에서 서술될 수도 있고, 한반도적인 관점에서 기술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정부가 따르고 있고 사회적으로도 공식적인 입장인 전자의 관점이라면 지난 60년은 분단국가로서 출발한 대한민국이 경제성장과 민주화라는 두 가지 성과를 이룩하며 하나의 국가로서 꼴을 갖추어온 과정으로 인식될 것이다. 그러나 후자의 관점에서 본다면 해방 60주년은 분단시대로 기술될 것이며,그런 관점은 전자의 관점을 즉각 상대화한다. 왜냐하면 분단시대론은 남북한 각각의 정통성에 대한 물음을 끊임없이 제기하기 때문이다. 입장에 따라서는 분단 속에서도 한반도에서 적지 않은 성취가 일어났으며 분단과 사회발전 간의 간단치 않은 관계를 조명하기도 하지만,그 성취 자체가 분단으로 인한 근본제약 아래의 것이기에 지난 60년은 단절로 인한 고통(이산가족이 가장 전형적인 예일 것이다), 외세의존과 그로 인한 민족적 자존의 망실, 민족내 적대를 빌미로 한 민주주의의 탄압과 사회적 발전의 지체 그리고 사유지평의 심층적 제약 등으로 얼룩진 긴 시간으로 여겨진다. 심지어 근본부터 어긋나버렸고 그래서 되돌아가 다시 시작하고 싶은 그런 역사로 분단시대를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현대사에 대한 이 두 가지 관점 가운데 어느 하나를 배타적으로 강조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 두 가지 관점을 공유하고 있고 또 이 두 가지 관점 사이에서 동요하고 있는 것이 우리 사회성원들 대부분의 모습일 텐데, 나는 이런 평균적 감각에 어떤 직관적 진실이 자리잡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양자를 적극적으로 교직하여 사고하려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1 그럴 때에만 어느 관점에 속박됨으로써 생기는 심리적 경향, 자부심과 자괴감이 병존하고 영광과 상처의 제스처가 자리바꿈을 거듭하는 현상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며, 사고의 지평을 남한사회로 제한하고 그것에 몰입하는 경향과 남한사회 내부의 복잡성에 대한 신중한 고려를 잃은 열정이나 분노의 표출로 치닫는 경향 모두에서 벗어나 현재의 가능성을 침착하게 찾아나갈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어떤 입장을 취하든 거기엔 각각 만만치 않은 논쟁 그리고 그것이 함축하고 있는 사회적 갈등과 대립 들이 기다리고 있다. 남한사회의 관점에서 볼 때, 두 가지 성과라고 하지만 경제성장은 성장대로 분배적 정의의 문제를 수반하며, 민주화 또한 어떤 수준으로까지 심화되어야 하는가에 대해 논쟁과 갈등이 있다. 또 양자는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로부터 여러 문제들이 제기된다. 경제성장과 민주주의 간의 관계가 인과적으로 어떻게 설정될 수 있는지, 또 현싯점에서 양자는 어떤 규범적 연관을 맺어야 하는지에 대해 많은 논쟁과 대립이 존재한다. 게다가 이 두 가지 성취 모두가 현싯점에서 그리 만만치 않은 난관에 처해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기존의 성과를 보존하고 개혁하고 확장해가야 한다는 점에는 사회적 합의가 존재하지만, 어떤 방안이 그런 것인지에 대해서는 심각한 입장차이와 갈등이 존재한다.
또한 이런 문제들에 한반도적 관점을 겹쳐놓으면 경제성장과 민주화가 남북분단과 맺고 있는 관계는 무엇인지가 해명되어야 할 어려운 문제로 떠오른다. 그리고 이 문제는 단순히 과거에 대한 인과적 해명의 문제를 넘어 현재 우리 사회의 민주화와 발전의 비전을 가다듬는 문제와도 연관된다. 그러니까 한반도적 관점을 회고적 전망에서 현재와 미래에 대한 전망으로 끌어오면, 탈냉전 이후 동아시아에 지정학적 질서뿐 아니라 지경학적(geo-economic) 질서까지 포함하는 새로운 역내질서를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당면하게 된다. 이 새로운 역내질서의 성격과 형성경로에서 남북관계의 행로는 매우 핵심적인 고리라고 할 수 있다.
자기서술과 그것을 통한 시대감각 획득의 매트릭스로 제기되는 이런 문제들의 복잡성을 다루기 위해서 이 글은 분단체제론과 87년체제라는 개념을 중심에 놓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한반도적 현실과 남한사회 문제를 교직해서 사고하려는 분단체제론의 기본 통찰들을 활용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분단체제론 자체가 충분히 확보하고 있지 못한 남한의 사회체제 분석을 87년체제 개념을 통해 보충하기 위해서이다. 이것은 분단이라는 좀더 장기적인 국면과 남한사회의 구조변화라는 중단기적인 국면을 겹쳐 보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사실 한 사회의 구조는 상이한 역사적 시간의 중첩으로 구성된다. 사회구조란 청산되지 않은 과제들 위에 새로운 과제를 쌓아가며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 그리고 새롭게 시도된 실천들이 과거의 영향력을 제거하고 변형하는 복잡한 과정의 단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간지평을 달리하는 단위를 함께 놓고 분석해보는 것이 유용하다. 그런 의미에서 분단체제론과 87년체제를 연계해서 우리 사회를 고찰하는 것은 역사적 원근감과 현재의 실천적 과제를 명확히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2. 87년체제란 무엇인가
분단체제와 87년체제의 연관을 살핌으로써 우리의 과거를 서술하고 현재를 규명하기 위해서는 87년체제라는 개념부터 좀더 상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분단체제론은 이미 어느정도 알려진 논의인 데 비해 87년체제는 아직 제대로 정의된 적이 없는 개념이기 때문이다.2 아마 87년체제라는 말이 사용의 폭을 조금씩 넓혀가는 일차적인 이유는 그것이 87년 민주화 이행 이후부터 현재에 이르는 우리 사회의 양상을 총괄적으로 ‘지칭’하기에 편리해서일 것이다. 어쩌면 이 편의성은 그만큼 이 개념의 명료화에 방해가 될지도 모른다. 어떤 이는 87년체제를 부정적인 의미로 쓸 것이고 어떤 이는 긍정적인 의미로 쓸 것이며, 그것을 느슨하게 사용하려는 시도와 엄격히 정의하려는 시도가 병존할 것이다.3 그런만큼 이 개념에 대한 어떤 확정적인 정의를 제공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나는 87년체제를 엄밀히 정의하기보다는 그런 용어의 출현에 작용하고 있는 어떤 시대인식과 통찰을 표면으로 끌어올려보고 싶다.
87년체제라는 용어가 쓰이는 일차적인 이유는 현재의 우리의 직접적 뿌리가 87년에 닿아 있다는 인식 때문이다. 이는 87년이 우리 사회에서 전환점인 동시에 그 전환의 형태가 이후의 사회상황에 대해 구조형성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전환점으로서의 87년은 정치·경제·사회문화적으로 확인된다. 정치적으로 87년은 권위주의체제의 종식과 형식적 민주주의의 제도화를 의미하며, 나아가서는 이런 수준의 민주화로부터의 정치적 후퇴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 사회적 합의로 자리잡았다. 경제적으로 우리 사회는 박정희(朴正熙)식의 발전체제에서 벗어났다. 박정희체제의 경제발전에는 국가―은행―대자본의 연합과 민중부문의 배제라는 두 측면이 있는데, 이런 발전체제에서 국가는 금융을 통해 재벌(독점자본)을 통제하고 억압을 통해 노동을 통제했다. 그런데 대자본과 민중 부문 양자가 국가의 통제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87년 이후 본격적으로 진행된 ‘자유화조치’로 금융을 통한 재벌통제는 쇠퇴하다가, IMF위기를 겪으며 결정적으로 해체되었다. 더불어 노동자와 농민의 억압에 기초했던 발전체제 또한 더이상 가능하지 않게 되었다.4 민중부문의 이해가 충분히 사회적으로 포섭된 것은 아니고 다양한 배제가 계속되었지만 그것은 더이상 물리적 억압에 기초한 통제는 아니었다. 사회문화적인 영역의 경우 정치나 경제 영역처럼 명확한 지표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몇가지 사례를 통해 근본적인 전환을 확인할 수 있다. 87년 이후 실질소득의 증가로 인한 대중소비사회로의 진입이 한 예이다. 이런 전환은 매우 급속해서 그로 인한 생활양식의 변화가 이미 90년대 중반에 문화담론의 폭증을 유발했다.5 또한 90년대 이후 계속되는 다양한 정체성의 탐구, 상징적 투쟁들, 역사적 기억의 투쟁들 또한 변화된 문화적 지형도를 보여준다.6
87년은 이렇게 전환을 표시하는 동시에 그후의 사회적 전개의 구조적 특질을 규정하는 측면도 가지고 있다. 87년 민주화 이행은 주지하다시피 구체제를 청산하는 이행이 아니라 구체제와의 타협에 기초한 이행이었다. 이 타협은 두 가지 국면으로 나누어볼 수 있는데, 이 두 가지 국면이 각각 특유한 패턴과 구조를 창출했고 그것이 서로 겹치며 나타나는 것이 이후의 정치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첫번째 국면은 6월항쟁에서 6·29선언까지이며, 그 핵심은 6월항쟁의 열기가 6·29선언에 의해 일단 식혀졌다는 사실이다. 이런 패턴은 87년 이후 반복되었다. 6월항쟁은 노태우의 집권으로 후퇴했고, 그후 야당의 총선 승리로 다시 한걸음 진전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3당합당으로 한걸음 물러섰다. 주기와 진폭이 가변적이긴 하지만 민주화세력과 구권위주의세력 간에 정치적 수를 주고받는 투쟁과 타협의 지속이 87년체제의 한 특징을 이룬다.
다음 국면은 6월항쟁과 6·29선언이라는 두 사건이 만들어낸 정치지형 아래서 이뤄진 정치적 거래와 타협의 국면이다. 이 타협의 장면은 6월항쟁의 장면과 많이 다르다.6월항쟁이 독재에 대항하는 모든 세력이 결집된 최대도전연합에 의해서 수행되었다면, 6·29선언 이후 정치적 타협의 장면은 구권위주의세력과 이 최대도전연합의 작은 분파인 야당세력에 의해서 수행되었다.7 이로 인해 87년체제는 두 가지 특징을 가지게 된다. 하나는 정당사를 볼 때 늘 사회적 기반이 협애했던 야당과 구권위주의 세력의 정당이 정치를 주도함으로써 사회적 균열구조가 정당에 의해 대변되지 못하고 지역주의로 대치되거나 그것에 의해 대리 표상되었다는 점이다.8 다른 하나는 이런 세력들간의 타협의 산물로 87년 헌법이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헌법은 사회의 관점에서 보면 사회가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구속하는 행위의 산물이며, 헌법 제정 및 개정에 참여하는 분파들의 관점에서 보면 각기 다른 분파의 행위를 사전 구속하는 행위의 산물이다. 87년 헌법을 만드는 데 참여한 야당세력과 구권위주의세력은 대통령직선제라는 사회적 합의를 헌법개정의 핵심내용으로 수용하면서도, 대통령의 권력이 누구의 손에 들어갈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적어도 자신들에게 일정한 지분이 확보될 의회의 권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헌법을 개정했다. 이런 헌법적 상호구속의 논리는 정치적 영역을 개방하기보다는 사법적 기능을 강화하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그 전형적 예가 민주적 정당성은 매우 취약하면서도 권한은 엄청나게 비대해진 헌법재판소 관련 조항들이다.9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지난해 3월 12일 대통령 탄핵사태에서 명료하게 드러났다. 그것은 87년체제가 “입법부와 행정부 간의 상호견제에 의한 갈등으로 인하여 정치와 정부 기능이 교착과 마비상태로 빠져들” 수 있는 상황에서, 선출되지 않은 권력인 헌법재판관들이 제왕적으로 사회에 군림할 수 있는 체제임을 보여주었다.10 87년체제에는 헌정주의(constitutionalism)가 민주주의를 지나치게 통제하고 압도할 가능성이 항존하고 있는 셈이다.11
경제적인 수준에서도 87년체제는 전환점을 이루는 동시에 구조형성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다. 권위주의체제에서 국가의 통제 아래 있는 발전 파트너였던 재벌과, 억압적 통제 아래 있던 민중부문이 국가의 통제에서 벗어남으로써 이전의 발전체제가 해체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형태의 새로운 경제체제로 나아갈 것인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는 없었다. 아마도 새로운 발전체제의 구상은 다음 세 가지를 고려했어야 할 것이다. 첫째, 금융을 통한 독점자본의 통제가 더이상 가능하지 않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것을 대신할 통제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필요했다. 박정희시대와 5공화국 시기를 통해 방대한 사회적 자산과 생산력을 자신의 것으로 흡수함으로써 지나치게 비대해져버린 재벌이 전체 사회의 발전과 민주화를 방해하고 제약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던만큼 그것을 통제하는 동시에 그 안에 축적된 생산성을 발전시켜나갈 대안이 필요했다. 둘째, 민중부문의 재분배 요구를 피하기 어려워졌으며, 그런 요구를 미래의 시간으로 지연하는 담론과 성장전략으로 대처하는 것도 효력을 상실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새로운 분배구조를 창출하려는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했다. 셋째, 남한경제는 국제분업적 질서에 깊이 연루되어 있기 때문에 신중하게 고안된 개방전략이 필요했다. 경제규모의 확대로 인해 그리고 WTO의 수립 등 세계경제의 변화로 인해 점점 더 경제적 개방이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된다면 개방경제로의 통제된 이행이라는 스케줄이 있어야 했다.
그러나 87년체제는 이런 점들을 충분히 고려한 개방―혁신―연대의 새로운 경제체제를 구상하고 실행하지 못한 체제였다.12 박정희체제의 성과와 한계에 대한 냉정한 성찰에 근거하여 새로운 발전모델을 모색하기보다는 박정희체제를 관치경제라는 이름으로 청산하고자 했으며, 이 청산을 지도한 이념은 ‘국가 아니면 시장’이라는 단순하고 지적으로 빈곤한 이분법이었다. 이런 이분법에 기초한 국가의 정책이 어떤 재앙을 불러왔는지는 외환위기가 잘 보여준다.13 역설적인 것은 외환위기가 명백히 시장 실패의 산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것이 정부 실패의 산물인 양 시장의 힘을 오히려 더 확대하고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다.14 그 결과 경제체제의 수준에서 87년체제는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그전의 불확정적인 상태에서부터 신자유주의적 체제로의 이행경로 위에 서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경제체제가 이룩하지 못한 소유관계와 생산의 혁신 그리고 사회적 연대의 과제는 사회적 투쟁에 맡겨졌다.
하지만 이런 사회적 투쟁에서 민중부문, 그중에서도 핵심역량인 노동운동이 내보인 능력은 매우 낮은 수준이었다. 87년 노동의 대공세에 이어진 길고 힘겨운 그리고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 자본과 노동의 진지전, 그리고 그 속에서 노동운동이 보인 열정적인 투쟁을 여기서 상세히 기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 노동운동의 심각한 위기, 예컨대 최근 지도부의 총사퇴에서 보듯이 민주노총이 자신의 존재를 선언한 지 10년이 된 지금 드러내고 있는 지극히 참담한 모습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압력에만 원인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미 90년대 초부터 노조 조직률이 답보상태로 들어갔으며 같은 시기에 시작된 자본의 신경영전략에 의해 핵심세력인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이 경제적·문화적으로 자본에 깊숙이 포섭되어 협소한 조합적 이익을 탐닉하기 시작했다. 핵심집단의 노동자들 가운데 일부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서 자신의 미래를 보고 연대의식을 강화하기보다는 그들을 자신의 직업 안전성의 범퍼로 인식하는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으며, 핵심집단 노동자와 나머지 노동자집단 간의 격차도 계속해서 벌어졌다.15 사회적 연대의 필요성이 커지는 만큼 연대의 자원은 잠식되고 있는 상황이어서 노동운동의 힘으로 경제체제의 방향을 조정하기는커녕 노동운동이 자력으로 위기에서 탈출하는 것조차 버거운 상황이다.
지금까지 간략히 논의된 정치와 경제라는 두 축을 겹쳐서 87년체제의 성격을 규정해본다면, 정치적인 수준에서는 민주화가 난항을 겪으면서도 꾸준히 진전되어왔지만 경제적으로는 답보와 정체 그리고 보수적 헤게모니의 확립이 이루어졌으며, 그로 인해 권위주의적 산업화를 추진했던 세력과 민주화세력 사이에 일정정도 힘의 균형이 형성된 체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힘의 균형이란 갈등하고 투쟁하는 두 세력간의 현상태를 관찰자 시점에서 평가한 것일 뿐,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매우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참호전 양상이다. 그리고 이런 교착의 지속은 어느 쪽도 상대를 완전히 굴복시키기 어렵다는 사실을 함축하지만, 그런 사실에 대한 학습에 근거한 타협, 그리고 창의력있는 해결책이 모색되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이 교착이 서로에 대한 적대감을 강화하여 상징적인 영역에서의 갈등이 더욱 중요해지는 것이 현재의 국면이다.
한국현대사의 복잡성으로 인해 생겨난 사회적 상처의 위무와 억압된 과거의 복원 같은 문제들은 매우 중요하며, 그중에는 상징적 투쟁이나 갈등을 피할 수 없는 것들도 있다. 그러나 상징적 영역은 설령 그것이 그렇게 자랑스러운 것이 아니고 오점에 속하는 것일 때조차 각 집단의 정체성의 뿌리와 관련이 있기 때문에 매우 신중하게 접근해야 할 문제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화의 진전이 답보에 이르자 처음부터 타협과 조정이 쉽지 않은 상징적인 영역이 더욱 예민하고 첨예한 문제가 되었다. 사회경제적 대안을 구체화하고 실천해나가지 못한 민주화의 에너지가 상징적 영역에서 자기정당성을 확보하려 하고 그것이 야기한 갈등에 골몰하는 것이다. 이로 인해 어느 진영에서나 상징적 급진주의가 득세하고 이로 인해 사회적 대안 모색이 지연되는 악순환이 생겨나고 있다. 현재의 관점을 회고적으로 투사하는 위험을 무릅쓴다면, 87년 6월항쟁에서 87년 헌법이 구성되어 대통령선거를 향해 가기까지의 시간 속에서 이루어진 여러 사회세력간의 타협과 조정 그리고 그때 형성된 제도적 매트릭스가 정치·경제·사회·문화의 각 영역에서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긴 교착, 나쁜 균형의 상태로 우리 사회를 몰아넣었다고 할 수 있다.16
3. 분단체제와 87년체제
이제 87년체제에 대한 논의를 분단체제론과 연관시킴으로써 시간지평을 확대하는 동시에 분석의 단위들을 더 추가해볼 것인데, 이를 위해서 먼저 분단체제론의 기본구도를 살펴보자. 87년체제가 우리의 현재를 민주화의 국면 속에서 파악한다면, 분단체제론은 45년 이후의 시간 속에서 우리의 현재를 고찰한다. 분단체제론은 해방 60주년이 곧 분단 60주년에 다름아니라고 보며, 한반도에서 사람다운 사회를 건설하는 데 최고의 질곡이 분단이라고 파악한다. 이 점에서 분단체제론은 여타 분단시대론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분단체제론은 거기에 더해 분단이 하나의 체제로서의 속성을 가진다고 보는데, 이렇게 체제로서의 속성에 주목하는 것은 몇가지 중요한 인식상의 변화를 수반한다.
우선 체제라는 말이 함축하듯이 분단체제론은 남한사회와 북한사회가 서로 분단되어 따로 떨어진 자족성을 가지면서 단지 역사적 기억과 문화적 전통 속에서 통일을 바라는 두 체제가 아니라, 각자의 재생산이 상대를 매개로 해서 이루어지는 상호의존성을 가지고 있다고 파악한다. 이런 적대적 의존관계에 기초한 남한사회와 북한사회의 재생산을 현실 파악의 중심에 놓게 되면, 그런 체제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하는 문제도 새롭게 사고된다. 분단현실이 단지 분단을 강요한 냉전과 외세의 영향 때문만이 아니라 내부적인 요인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분단의 극복이 대단히 어려운 과제임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이 어려움에 대한 인식은 별것 아닌 것처럼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그 어려움을 철저하게 인식할 때에만 급진적 통일운동이야말로 운동이 의도한 정반대 결과를 야기할 수 있다는 것을 명료히 드러낼 수 있다. 요컨대 분단체제론은 간과되기 쉬운 제약을 강조함으로써 민족적 열정의 급진적 분출을 제어하는 브레이크 역할을 하는 동시에 그런 열정을 저강도의 지속적인 에너지로 내연시킬 방도를 찾고자 한다.
또한 분단체제는 남북한 각각의 지배층의 이익에 기여하고 있기 때문에 분단체제의 극복은 그런 남북한 각각의 내적 개혁과 변혁 없이는 불가능한 과제임을 지적한다. 즉 민주화와 통일이 내적으로 연관된 작업이라는 것이 분단체제론의 핵심 메씨지이며, 이는 분단체제론 형성의 이론적 동기이기도 하다. 분단체제론은 80년대 사회구성체논쟁의 두 진영인 NL과 PD 각각의 약점을 극복하려는 시도에서 출발했으며, 전자에 대해서는 한반도에서의 사회변혁의 과제를 외세 극복으로 단순화하여 남북한이 분단 속에서 살아오며 적대적 상호의존관계를 형성해온 점을 무시하는 것에 대해 비판하고, 후자에 대해서는 남한사회의 민주화에 집중하여 분단이 민주화에 가하는 제약을 무시하고 분단체제극복이라는 의제를 연기하는 것을 비판했다. 다시 말해 분단체제론은 80년대 변혁운동의 세 가지 이념이자 의제였던 민족―민주―민중을 서로 매개하는 전망을 열고자 한 것이다.
끝으로 분단이 체제의 속성을 가지는 한, 분단체제의 극복 또한 그 체제의 모순 그리고 그 체제와 그것이 속한 환경 간의 복합적 관련 속에서 모색되어야 한다고 본다. 따라서 분단을 극복하는 경로와 형태가 어떤 것이 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근본적으로 열려 있는 문제이다. 분단체제론은 분단의 형성을 단일한 민족국가 수립의 좌절이라는 안타까움으로 바라본다는 점에서는 민족주의적 역사의식을 공유하지만, 분단의 극복과 통일이 해방과 더불어 의당 그 싯점에서 이루어져야 했던 단일민족국가라는 미완의 과제 완수라는 목적론에는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분단의 극복은 분단체제의 현재 조건에서 그 모순에 저항하는 유효하고 실용적이며 창의력있는 실천을 통해 모색되어야 하며 그것은 어떤 목적지를 미리 설정하지 않는다. 사실 분단극복의 노력 끝에 도달하게 될 체제가 어떤 국가 형태를 갖출지는 그리 본질적인 문제도 아니다. 애초에 분단극복의 목적 자체가 한반도에서 사람다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것이지 어떤 형태의 국가를 수립하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17
이런 분단체제론의 입장에서 볼 때, 현재는 6,70년대를 통해서 강고한 형태로 그 체제하의 모든 사람들을 억압하던 분단체제가 크게 흔들리고 해체의 조짐까지 보이고 있는 시대이다. 분단체제를 동요하게 만든 요인은 크게 보아 남한사회의 민주화와 냉전의 해체 두 가지이다.
이 가운데 앞의 요인, 그러니까 87년체제의 수립이야말로 분단체제의 동요를 야기한 제일의 요인이다. 민주화 이행은 한편으로는 통일담론과 통일운동의 에너지를 해방시켰고, 다른 한편으로는 분단을 하나의 체제로 고착시킨 핵심요인인 남북한 지배층의 적대적 상호의존을 무너뜨린 계기가 되었기 때문인데, 더 중요한 요인은 후자였다. 전자의 경우는 언제나 제어되지 않은 급진적 열정과 냉전적 가치관 사이의 갈등을 유발할 위험이 있으며 정세에 따라서 긍정적인 효과 못지않게 부정적인 효과를 발생시켰고 운동의 성과를 자기 힘으로 안정적으로 재생산하기 어려웠던 데 비해, 후자의 경우는 이런 에너지가 활동할 공간의 폭을 결정하는 요인이기 때문이다.
앞서 87년체제는 민주화를 가능케 하는 동시에 그것을 제약하는 체제이며, 다양한 영역에서 민주화의 효과는 불균등하게 관철된 체제임을 지적했다. 이 불균등에 주목한다면 87년체제는 여타 영역보다 남북관계에서 진보적 성과를 유발했다고 할 수 있다. 87년체제는 형식적이고 절차적인 민주주의를 확립했고, 이는 선거경쟁의 결과에 국가권력이 종속되었음을 뜻한다. 선거경쟁의 제도화는 경쟁규칙의 공정화로 나타나고,실제로 정권교체라는 문턱을 넘게 되어 적어도 김대중정부에 이르러서는 절차적 민주주의가 민주적 정부의 탄생이라는 실질적 결실로 이어졌다. 이런 국가의 민주화는 냉전적인 보수세력을 국가조직에서 상당정도 밀어낼 수 있었으며, 더불어 국가권력을 매개로 한 남북한 지배계급간의 적대적 의존관계를 깨뜨렸다. 이로 인해 분단체제 아래서 처음으로 국가가 분단체제 관리뿐 아니라 그것의 극복의지를 실질적인 정책의 한축으로 삼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분단체제론은 애초에 분단체제하의 민주화와 분단체제극복을 통해 이루어지는 민주화의 수준이 다름을 지적했다. 전자는 분단체제로 인해 제약된 민주화인 반면, 후자는 훨씬 더 높은 수준의 민주화 가능성을 연다. 그런데 이런 분단체제극복은 바로 분단체제하의 낮은 수준의 민주화에서 시작될 수밖에 없으며, 그것이야말로 분단체제극복의 가장 중요한 내적 동력인 셈이다.
민주적 정부의 수립과 국가의 민주화가 결정적인 이유는 남북관계에서는 정부가 민간부문보다 더 많은 정보와 접촉경로를 가지고 있으며, 북한을 둘러싼 여러 의제가 국제정치적인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따라서 김대중정부 이후 남북관계에서는 6·15 남북정상회담이나 지금은 육로로도 가능한 금강산관광 그리고 개성공단 같은 진보적 성과가 축적되었다. 특히 그중에서도 6·15 남북정상회담은 87년체제가 분단체제극복에 기여한 최량의 성과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회담방식, 채택된 선언의 내용,남북한 주민들에게 미친 문화적·정치적 효과 모든 면에서 남북관계에 어떤 불회귀점을 형성했다고 할 수 있으며, 동요하는 분단체제를 그 해체기로 밀어넣는 분기점이었다고 평가할 만하다.
분단체제를 흔든 다른 요인은 냉전의 해체이다. 분단체제의 형성과 유지에 내적 요인이 있긴 하지만, 분단체제 자체의 형성을 추동한 것 자체가 세계사적 냉전이었던만큼 탈냉전이 분단체제에 미친 영향은 엄청난 것이다. 그러나 냉전의 해체는 분단체제를 동요시키되 남한사회의 민주화처럼 그것을 극복하는 긍정적 비전을 함축하고 있지는 않다. 그것은 한반도에 더 민주적이고 평등한 사회를 건설할 기회일 수도 있고 재앙을 안겨다줄 위험요소일 수도 있다. 남한사회만을 두고 보더라도 그런 양가성은 여실히 드러난다. 탈냉전은 오랫동안 사유의 지평을 제약하던 레드콤플렉스를 떨어낼 수 있게 해주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냉전을 종식시킨 요인인 현실사회주의의 몰락은 자본주의적 근대에 대한 모색의 정신적 지평을 축소했다. 또한 탈냉전이 동북아시아 지역질서의 재편을 요구하기 때문에 그것에 우리가 주체적으로 개입할 여지를 열어주는 한편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의 압박을 가중시키는 요인도 되었다. 남한사회의 눈부신 경제성장은 냉전의 최전선이라는 위치에 힘입은 바가 컸는데 이제 그런 조건이 사라진 셈이다.18 또한 냉전의 해체가 신자유주의적 지구화를 더욱 가속화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것은 갓 출발한 87년체제의 민주화 행로에 심대한 장애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북한의 경우 사정은 더욱 좋지 않았다. 이미 세계경제에서 고립된 채 이룩한 발전의 잠재력이 소진해 있던 북한사회는 탈냉전으로 더 큰 어려움에 처했다. 사회주의적 국제교역체제가 붕괴하고 그로 인해 체제위기로까지 번진 심각한 식량위기와 에너지위기를 맞았기 때문이다. 북한의 체제위기는 남북관계의 관점에서 본다면, 북한이 남한의 민주적 정부와 이전보다 긴밀하고 공식적으로 협조하게 했고, 그로 인해 6·15 남북정상회담을 비롯한 여러 교류와 협력의 성과가 축적될 수 있게 한 측면도 있다. 하지만 북한이 위기타개를 위해서 꺼내든 두 가지 카드인 경제 개방과 개혁 그리고 핵위기 조성 어느 쪽도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한 채 답보상태를 거듭하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위기타개를 위한 가장 핵심적인 타협대상 미국이 9·11사태 이후 ‘글로벌 리바이어더니즘’을 외교기조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4차 6자회담이 일정한 성과를 거둠으로써 위기의 강도는 누그러졌지만, 이 문제가 가까운 장래에 일괄타결될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아무튼 분단체제는 남한사회의 민주화로 인해 내부에서부터 그리고 냉전의 해체로 인해 외부에서부터 침식되고 있으며, 이제는 해체의 길로 들어서고 있다는 점은 분명한데, 그 해체기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안정적인 역내질서를 아직 갖추지 못한 불안정하고 복잡한 동북아시아의 정세이다.그런 질서 잡히지 않은 상황에서는 늘 그렇듯이 구조적 제약요인보다 개별 행위자들의 선택과 행위의 중요성이 커진다. 요컨대 동북아시아에 어떤 역내질서가 수립되는가는 동북아시아 각국과 미국의 행동 그리고 각국의 행동을 규정하는 내부집단들의 행동들의 총합에 의존하게 되었으며, 그 귀결의 진폭도 커졌다. 그런 질서형성에서 핵심고리는 역시 한반도이다. 중국과 미일동맹 간의 역내 헤게모니 경쟁이 어떤 국제정치적 해결에 도달할 수 있을지는 한반도 문제와 긴밀히 연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분단체제를 허물고 한반도에 어떤 체제를 건설하는가 하는 문제가 세계체제의 행로에 중대한 계기가 되는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관건인 것은 남한사회 내부의 개혁역량이다. 참여정부 외교능력의 시험무대였던 제4차 6자회담은 이 점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냉전적 태도와 미국의존적 외교에서 벗어나는 데 과도한 자임과 잘못된 상징 남용의 오류가 있었다고 해도 자주적 외교의 길을 모색하고 일정한 성과를 도출해낸 힘은 바로 민주적 정부의 존재에서 비롯한다는 것을 잘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다른 사정을 고려하더라도 남한사회의 민주화 역량은 중요하다. 비록 제4차 6자회담이 말 대 말, 행동 대 행동이라는 원칙을 세웠다고 하더라도 북한이 강요된 농성체제의 터널을 간단히 빠져나오지는 못할 것이다. 따라서 북한이 여전히 터널 속을 걷고 있는 동안 필요한 것은 북한이 일정한 경제적 능력을 확보해나가는 것이며, 그렇게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이 6·15선언에서도 이미 제시한 바 있는 ‘민족경제의 균형적 발전’이라는 과제이다. 남북간에는 지난 몇십년의 산업화과정을 통해서 엄청난 경제력 차이가 생겨났고 이로 인해 이제 민족경제의 균형적 발전을 향도하는 힘은 남한사회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그런 과제를 스스로 짊어지고 일관성있는 정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민주적 정부가 필수적이다.19
따라서 분단체제극복은 87년체제의 진보적 극복이라는 과제와 내적으로 연관된다. 아직은 교착상태에 있는 87년체제가 사회경제적 양극화의 심화라는 덫에 빠져 더이상의 민주주의의 추진력을 잃고 보수적이고 절차적인 민주화에 머무르게 될 경우 그것은 그 자체로 매우 고통스러운 일일 뿐 아니라 그로 인해 분단체제극복의 작업은 더뎌질 것이고 분단체제가 해체된 자리에서 만나게 될 새로운 체제 또한 지금보다 더 나은 체제일지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87년체제에서 가능했던 민주화가 민족적 의제에서는 우여곡절 속에서도 일정한 성과를 쌓아가는 데 비해, 민중적 의제에서 보인 성과는 나날이 빛이 바래가고 있다. 민주화가 민중적 의제를 담지하고 확장해나가지 못한다면, 방기된 민중적 의제가 민주주의의 잠재력을 잠식하고 그에 따라 민족적 의제 해결의 힘도 크게 약화될 수 있다. 따라서 분단체제론 또한 민족―민주―민중의 세 가지 이념 및 의제를 민중적 의제의 견지에서 조명하고 매개하는 작업에 더욱 집중해야 할 때이다. 이는 분단극복이라는 의제 자체를 민중적 의제의 희석으로 받아들이고 회피하려는 경향을 극복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4. 87년체제를 넘어서기 위하여
87년체제의 수준에서든 분단체제의 수준에서든 우리 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는 불확실한 상황이다. 앞서 지적했듯이 외교적 현안이나 북핵문제와 관련하여 진보적 자세를 견지하고 있는 참여정부가 국내정치에서는 ‘대연정’을 운운하는 등 자기정체성이 크게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매우 징후적이다. 민주적 정부를 자임하는 정부들이 일련의 정책 선택과 실행에서 보인 난맥상의 뿌리에는 신자유주의적 엘리뜨 합의를 깨뜨릴 만한 사회경제적 비전의 부재라는 심각한 문제가 자리잡고 있다. 이런 비전의 부재로 인해 민주적 정부가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실천하고 그로 말미암아 지지층과 괴리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다시 정책능력에 대한 자신감 상실로 이어지며, 그럴 때마다 관계·학계·언론계에 폭넓게 포진한 보수적 엘리뜨들의 발언이 힘을 얻어간다. 종종 약화된 지지기반을 민족주의적 상징 내지 과거사에 대한 상징정치를 통해 결집하려고 하지만 그것이 일관성있는 지지기반의 확장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이런 정책적 동요와 표류, 그로 인한 민주적 정부에 대한 실망 그리고 사회경제적 양극화는 계속해서 민주주의 심화를 위한 사회적 자산을 잠식하고 있다. 87년 이후 여러 우여곡절 속에서도 일정한 헤게모니적 힘을 행사해온 민주적 개혁담론이 그렇게 쉽게 얻어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유신시대와 제5공화국을 통해 적어도 한 세대 이상이 희생을 치르며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에 헌신함으로써 얻어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두 차례의 민주적 정부의 집권 아래서 빠른 속도로 약화되어 이제는 공공연한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 그러니까 87년체제의 한계를 민주주의의 심화를 통해 극복하고 그 에너지를 분단체제극복의 에너지로 삼기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해 선명하고 일관된 청사진을 제공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다소 두서없더라도 내게 직관적으로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몇가지 방향을 제시하는 일은 가능하겠다.
우선 국가의 민주화를 유지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강화하는 것이 여전히 중요하다. 동아시아의 복잡한 정세와 북한문제를 염두에 둔다면 난관이 있더라도 민족적 의제를 일관성있게 자주적으로 해결하려는 민주적 정부의 존재는 매우 중요하며, 그간 민주적 정부들이 보여온 남북관계에서의 민족공조는 이 점을 잘 보여준다. 하지만 국내정책에서는 민족적 성격을 약화시켜왔던 점은 유감스러운 일이었으며 이는 극복되어야 한다. 흔히 얘기되듯이 신자유주의적 지구화로 인해 국민에 의한 정부가 국민을 위한 정부로 활동하는 것이 제약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는 여전히 조세·관세·산업·노동·복지 정책을 통해서 민족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여지를 가지고 있고, 바로 그런 활동을 통해서 민중적일 수 있으며, 그것이 민주주의의 토대를 강화시킨다. 이런 정부의 활동은 주택·의료·교육 같은 영역에서 공공성을 높이는 것으로 이어져야 한다. 사실 한국의 국가는 박정희체제는 물론이고 현재까지도 시민에게 별달리 해준 것이 없다. 오직 경제성장을 지속하고 그 과실(果實)이 일반시민들에게 트리클다운(trickle down)되게 함으로써 시민의 삶을 개선하고자 했을 뿐이다. 그것이 큰 성과를 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제 국가가 주도하는 경제성장은 그리 큰 가능성을 지니고 있지 않으며 성장의 트리클다운도 불확실해졌다. 따라서 국가는 이제 경제성장의 향도자가 아니라 개방과 혁신과 연대, 세 가지 프로그램의 지원자이자 조정자로 행동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중에서 개방과 혁신이라는 의제는 국가의 기존 행동패턴과 쉽게 유화할 수 있는 것들이지만 연대의 영역은 정책구상과 실행에서 발상의 전환을 요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국가정책 형성과 실행 과정에 더 많은 민주적 요구를 투입할 것을 요청하며 그것을 수용할 수 있는 것은 역시 더 강화된 민주적 정부이다.
다음으로 새로운 사회적 협약 또는 타협을 이룩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논의되는 사회적 대화 내지 타협은 대개 노동과 사회 간의 타협을 의미하며 은연중에 노동의 양보를 이끌어내려는 시도를 함축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노동문제를 둘러싼 사회적 협약보다 더 시급할 뿐 아니라 노동에 대한 사회적 협약 자체가 성공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것은 재벌을 둘러싼 사회적 대화와 타협이다. 사실 독점재벌과 독점부문의 조직노동은 87년체제의 쌍생아이다. 87년체제는 국가의 금융을 통한 독점자본 통제의 후퇴와 노동에 대한 억압적 통제의 후퇴를 의미하며 이는 양자가 동일한 억압자에게서 해방되었음을 말한다. 또한 자본의 핵심인 독점재벌과 독점부문의 정규직 노동자는 우리 사회 생산력의 중심에 있는 동시에 너무 적은 지분으로 너무 많은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점에서도 닮은꼴이다. 그리고 그런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전체 사회에 대한 연대의식을 결여하고 있다는 점 또한 다르지 않다. 글로벌기업으로 성장한 재벌기업들은 그 자체가 국민적 노력의 소산임에도 불구하고 자유로운 정리해고와 내부하청을 통한 노동 통제와 분할, 하청 중소기업에 대한 착취, 그리고 취약한 지배구조와 변칙적 상속과 증여라는 어두운 그늘이 있다. 노동의 경우에는 조직된 노동과 미조직된 비정규직 노동의 분열상황이 노동 전체의 위기로 심화되고 있지만 스스로의 힘으로 그런 연대를 창출하고 혁신을 이룩할 능력은 크게 떨어져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전체 사회의 이익과 화합하고 유대감을 확립할 수 있는 사회적 협약이 필요하며, 그것을 위해서 개혁지향적인 다양한 사회집단이 참여하는 것이 정당한 상황이다.
마지막으로 좀더 긴 시간지평 속에서 87년체제와 분단체제를 넘어선 우리 사회가 어떤 체제를 향해 가야 할지를 우리 안에 존재하는 문화적 자원과 관련해 생각해보고 싶다. 지난 60여년간 우리 사회가 높은 수준의 역동성을 지닌 사회였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근대화를 향한 돌진이라고까지도 불리는 우리 사회의 역동성의 근원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논의가 있을 수 있지만, 나는 그 중요한 뿌리가 높은 수준의 평등주의 에토스라고 생각한다. 식민지 해방과 농지개혁은 계급으로서의 지배층을 일소했고 전쟁은 미소한 차이를 남기고 모두를 동일한 출발선으로 끌어내렸다.
그런 상황은 한편으로는 “동료 중에 나은 자”가 그것을 넘어서 동료에 대한 지배자가 되는 것을 막으려고 하는 경향을, 다른 한편으로는 “나도 저 꼭대기로 올라갈 수 있다”는 지위상승 욕망을 낳는다. 전자의 승화된 형태가 바로 우리가 지난 몇십년 동안 이룩한 민주화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다. 후자는 제법 복잡한 경로를 밟았다고 생각되는데, 정리해보면 이렇다. 지위상승의 열망은 집합적인 수준에서는 박정희체제를 경유하며 ‘잘살아보세’라는 성장 프로젝트의 형태를 취했다. 이는 분단국가의 수립과 반공주의에 의해 사회운동을 통한 집합적 지위상승이 차단됨으로써 억압되어 있던 에너지에 출로를 마련해주었다. 개인적인 수준에서는 교육경쟁의 형태로 나타난 개인적 지위상승의 길이 있었다. 집합적인 성장 프로젝트가 사회성원의 에너지를 동원하고 체제를 안정화하는 데 일정한 성과를 거두자, 그것을 주도한 박정희체제조차 그에 따른 압박을 면할 수 없었다. 박정희체제 또한 “경제성장이 둔화되면 어김없이 헤게모니 위기에 직면해야 했다.”20 정치적 정당성과 수행성이 연계되는 문화는 87년체제에서도 지속되었다. 그 결과 민주화된 정부도 이런 대중적 열망의 압력에 시달려야 했고, 경기후퇴와 자본의 투자 스트라이크 그리고 보수언론의 공세 앞에서 민주적 정부는 심층적인 구조개혁보다 경기부양책을 동원하고 보수층과 화해하려는 제스처를 내보였다. 그리고 그것은 결과적으로 보수세력의 헤게모니를 유지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런 집합적 프로젝트는 이제 그 시효를 다해가고 있다. 외환위기 이후로 더욱 가속화된 신자유주의적 재편 속에서 우리 사회 성원들은 재빠르게 신자유주의적 규범을 받아들였는데, 신자유주의적 제도재편의 정당성과 그것에 수반되는 생활양식과 가치관이 엘리뜨 합의를 넘어 대중적으로 확산되어간 것은 그것이 강제된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발적으로 수용된 면도 있다. 우리 사회에서 집합적 희망은 약화되었고 오래전부터 그것과 병행되어온 개인주의적 지위상승(이제는 지위실추 방어) 프로젝트만이 남게 되었는데, 이런 집합적 기대의 약화와 개인화는 문화적인 측면에서 신자유주의와 아주 쉽게 공명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더욱더 극심해진 교육경쟁이 가장 전형적인 증좌이다.
하지만 평등주의 에토스가 집합적이든 개인적이든 지위상승 프로젝트로 전환되고 그중에 집합적인 프로젝트가 힘을 잃고 개인적 프로젝트만이 기승을 부리는 형태가 되는 것은 평등주의적 에너지가 특수한 경로로 소진되어왔음을 의미할 뿐이다. 평등주의적 에너지에서부터 힘을 길어오지만 대단히 불평등하고 위계적인 사회로 귀착되는 역설을 가진 이런 프로젝트는 이제 더는 유효성을 가질 수 없다. 우리는 평등주의적 에너지의 새로운 경로를 마련해야 하며 아직도 그럴 수 있는 에너지가 우리들 안에 내연하고 있다. 그 새로운 방향은 평등주의 에토스를 보편적 가치와 매개하고 제도화해온 민주화 프로젝트를 심화하여 정의와 연대 규범과 철저하게 연계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우리 사회는 더 평등한 체제를 지향하는 방향으로의 집합적 프로젝트를 구상해야 한다. 그것만이 전체 사회의 문화적 저류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평등주의 에토스는 질투심과 경쟁심, 사회적 권위에 대한 우상파괴적 태도, 문화적 전통에 대한 무시 등 온갖 병리적인 형태로 전환될 것이며 우리는 이미 그런 병리적 양상을 심심치 않게 발견하고 있다.
87년체제의 개혁을 위해서는 여기서 제시된 몇가지 제안 이상의 다양한 방안과 정책적 구체화가 모색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 더 많은 사회적 토의가 조직화되어야 할 것이다. 이미 강조했듯이 지금은 세계체제, 동아시아, 분단체제 그리고 남북한사회 각각의 수준에서 변동의 폭이 커져가는 시대이다. 그리고 그런만큼 위험과 기회가 다같이 커져가는 시대이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행동의 몫도 커지고 있다. 커다란 변화에 직면하여 빠져들기 쉬운 체념의 태도를 떨쳐낸다면 공동의 꿈을 꾸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함께 나아가는 길이 막혀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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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장집은 해방 60주년을 회고하며 우리 사회의 현재적 과제를 논하는 최근의 글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오늘의 남한사회는 분단시대라는 정의가 함의하듯 불안정하고 불완전한 반쪽의 정치체제가 아니라, 근대화되고 자족적으로 완성된 사회이자 국가이며, 체제라고 할 수 있다”(「해방 60년에 대한 하나의 해석: 민주주의자의 퍼스펙티브에서」, 참여사회연구소 『해방 60주년 기념 심포지엄 자료집』, 21면). 나는 그의 글의 다른 많은 논지들에 대해 찬성하지만, 이런 주장은 분단시대론 전반을 자기 방식으로 정리한 다음 그것을 비판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설령 그의 이해방식을 따른다고 해도 그의 주장은 분단시대라는 역사인식이 야기할 수 있는 난점과 위험을 지적하는 것을 넘어서 그것에 내포된 정당한 통찰조차 회피할 위험을 가지고 있다.↩
- 내 경우 ‘87년체제’라는 개념은 노중기가 처음 제시하여 노동연구자들 사이에서 쓰이게 된 ‘87년노동체제’ 개념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그가 주장하는 87년노동체제는 그것을 포함하고 있는 한국사회 전체의 특징을 통해서 해명되어야 하며, 그런 한국사회의 구조적 특징을 ‘87년체제’라고 명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개념은 『당대비평』 2003년 겨울호에서도 쓰였던 개념임을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당대비평』에서는 이 개념이 그리 분명하게 정의되지는 않았다. 유철규와 조석곤 등은 ‘87년이후체제’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는데, 개념의 의도는 유사하지만 ‘87년체제’라는 표현이 더 명확하다고 생각된다.↩
- 이런 상황이 개념 사용자들에게는 어려움을 야기하겠지만 개념의 확산과 사회적 착지라는 관점에서 보면 그렇게 나쁜 것만도 아니다. 어떤 개념의 사회적 착지는 그 개념이 매우 쓸모있고 정확히 정의되어 있을 때 가능하지만, 서로 모순적인 의미로 사용하는 사람들까지 끌어들일 만큼 충분히 모호할 때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 유철규 「1980년대 후반 경제구조 변화와 외연적 산업화의 종결」, 유철규 엮음 『박정희 모델과 신자유주의 사이에서』, 함께읽는책 2004; 유철규 「1987년 이후 경제체제의 한계와 경제위기」, 『당대비평』 2003년 겨울호 참조.↩
- 아마도 우리의 영화산업은 이런 문화적 변화가 얼마나 급속하고 강력한 것이었는지 잘 보여주는 예일 것이다. 유신시대에는 한해에 외화 20편이라는 수입제한으로 인해 영화적 교양의 심각한 실추를 겪었던 사회가 87년 이후 비디오플레이어와 비디오숍의 확산을 통해 전국민적으로 영화적 교양을 만회할 수 있었고, 그것에 기초한 영화산업이 90년대 중반에 이미 할리우드와 경쟁할 수 있는 상당한 자생력을 갖추었으니 말이다.↩
- 이런 사회문화적 변화 또한 역전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박정희 씬드롬에서 보듯이 오늘날 젊은 세대 중에도 박정희를 좋아하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그들의 육체와 사유는 박정희체제 아래서의 삶을 단 하루도 견딜 수 없을 것이다.↩
- 이 점은 구체제 아래서 야당이 완전히 파괴되지 않고 존속하면서 민주화 투쟁을 통해 사회적 정당성을 축적해온 과정이 민주화 이행기에 매우 중요한 변수로 작용함을 보여준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윤상철 『1980년대 한국의 민주화 이행과정』, 서울대출판부 1997 참조.↩
- 이런 대표성의 위기에 대한 사회의 반응이 바로 낙천·낙선운동인 동시에 참여연대처럼 독특하고 강력한 시민운동단체가 출현할 수 있는 배경이었다고 할 수 있다.↩
- 87년 헌정체제에 대해서는 최장집 「한국어판 서문―민주주의와 헌정주의: 미국과 한국」, 로버트 달 『미국헌법과 민주주의』, 박상훈·박수형 옮김, 후마니타스 2005를 참조할 것.↩
- 같은 글 52면.↩
- 헌정주의와 민주주의의 관계는 매우 복잡하다. 전자는 후자를 가능하게 하는 측면과 통제하고 억제하는 측면을 모두 가지고 있다. 여기서 상론할 수는 없지만 나는 87년 헌법이 우리 사회의 민주화의 진전에 일정한 족쇄가 되는 지점에 이르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문제가 더 좋은 헌법을 마련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다거나 그럴 수 있는 조건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함축하는 것은 아니다. 논의가 심도를 지니기 위해서는 어디까지를 헌정주의의 영역으로 포괄하는 것이 우리에게 적합한가 하는 근원적인 문제를 다뤄야 할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좀더 상세한 논의는 Elster, Jon & Slagstad, R. eds. Constitutionalism and Democracy, Cambridge Univ. Press 1988; Elster, Jon, Ulysses Unbound, Cambridge Univ. Press2000, Part 2를 참조할 것.↩
- 개방―혁신―연대의 새로운 경제체제를 구상에 대해서는 이일영·이남주·이건범·전병유 「한국형 신진보주의 경제이념: 개방―혁신―연대의 한반도 경제」, 『동향과 전망』 2005년 여름호 참조.↩
- 혹자는 외환위기 이전의 자본자유화가 매우 한정된 것이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아무리 제한적이고 부분적인 것이었다고 해도 이행경제의 내적 능력과 필요를 넘어서 진행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부작용에 대한 대책도 허술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조영철 「위기 이후 구조재편의 문제점과 대안적인 정책방안」, 전창환·김진방 엮음 『위기 이후 한국 자본주의』, 풀빛 2004 참조.↩
- 시장 메커니즘과 정부 메커니즘 사이의 정책적 선택에서 시장을 택하는 것 자체가 정부의 행위이다. 외환위기 이전의 자본자유화는 그런 의미에서 정부의 잘못된 선택이기는 하다. 하지만 정책적으로 선택된 시장 메커니즘의 실패도 정부의 실패라면 모든 실패가 정부의 실패일 것이다.↩
- 이런 사태는 물론 객관적 강제와 압력이 주관적 위기로까지 심화되는 현상이라고 진단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이 노동계 내부에서 등장하는 현상과 관련해서는 두 가지가 지적되어야 한다. 하나는 주관적 위기의 원인을 외부로만 돌릴 수 없는 주체의 탐닉, 그러니까 이 경우 핵심부문 노동자들의 연대를 망각한 자족적 생활양식의 차원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그런 위기에 처한 주체 자신이 그 원인을 분석한다는 점에서 성찰적이지만 그 성찰이 자기혁신을 유도하기보다는 외부의 책임으로 전가한다는 점에서 병리적 성찰성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소년원에 끌려온 비행청소년이 상담가에게 자신의 비행의 원인을 근대화된 사회의 가치혼란, 가족해체, 병리적인 학교문화 등으로 제시하며 ‘사회학자’의 관점을 취하는 것과 유사한 현상이다.↩
- 이 글이 거의 다 씌어졌을 무렵 조희연의 「‘87년체제’의 전환적 위기와 민주개혁」(참여사회연구소 『해방 60주년 기념 심포지엄 자료집』)을 읽었다. 나는 그의 정세판단과 방향모색에서 많은 일치점을 찾을 수 있었다. 다만 그가 53년체제라는 개념으로 분단체제에 해당하는 현실이 87년체제와 상호작용하는 측면을 논의하면서도 문제의 지평을 한반도 수준으로 확장하지 않는 점에 대해서는 입장을 달리한다.↩
- 자세한 것은 백낙청 『분단체제 변혁의 공부길』,창작과비평사 1994; 『흔들리는 분단체제』, 창작과비평사 1998 그리고 그후 그의 여러 글들을 참조할 것.↩
- 월러스틴(I. Wallerstein)은 1970년대 이래 세계경제 하강기에 동아시아에서 발전이 가능했던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동아시아가 브라질이나 남아시아와 가장 다른 점은 냉전과 관련된 지리적 위치였다. 동아시아는 전방에 있었고 나머지 둘은 그렇지 않았다.”(이매뉴얼 월러스틴 『우리가 아는 세계의 종언』, 백승욱 옮김, 창작과비평사 2001, 59면)↩
- 경제적 구상에서 한반도적 관점을 지향하는 것은 비단 북한에만 필요한 일이 아니라 부상하는 중국경제와 일본경제 사이에서 그리고 국제분업적 질서 속에서 남한경제의 활로를 모색하는 데에도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남한사회의 이런 자기이익 추구적인 행위에서조차도 민족적 관점을 견지하는 정치적 리더십이 요구된다.↩
- 전창환 「1980년대 발전국가의 재편, 구조조정, 그리고 금융자유화」, 유철규 엮음 『박정희 모델과 신자유주의 사이에서』, 함께읽는책 2004, 89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