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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점토론 │ 시민운동의 현주소를 묻는다

 

여성운동의 세대갈등

 

 

정현백 鄭鉉栢

한국여성단체연합 상임대표,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저서로 『노동운동과 노동자문화』 『통일교육과 평화교육의 만남』 『민족과 페미니즘』 등이 있음. hyunback@skku.ac.kr

 

김신현경 金辛鉉卿

영 페미니스트 출판기획집단 ‘달과 입술’ 멤버. 공저 『나는 페미니스트이다』와 논문 「프로젝트로서의 연애와 여성주체성에 관한 연구」 「성적 주체로서의 여성, 욕망과 폭력‘사이’」 등이 있음. todamo20@hotmail.com

 

 

발제 1: 정현백

 

1. 내부민주주의는 여성운동의 생명력이다

지난 15년 사이에 한국 여성운동은 많은 성과를 거두었고, 여성의 지위는 현저하게 발전했다. 이런 결실의 배경에는 객관적 조건에 못지않게, 여성운동의 역량강화가 중요한 동력이 되었다.

한국여성단체연합·정신대대책협의회·한국교회여성연합회 등 진보적 여성운동단체는 대체로 연합체로 구성되어 있다. 여연(한국여성단체연합)의 소속단체이지만 한국여성민우회·한국여성의전화연합·한국여성노동자협의회 등은 그 자체가 지역조직을 포함하고 있다. 이들의 동력은 내부민주주의에서 나온다. 운동의 주요사안은 해당 위원회나 특별위원회의 수차례에 걸친 회의, 회원단체와 지역조직 대표로 구성된 이사회(2개월에 1회 개최), 1년에 1회 열리는 정기총회에 참석하는 대의원에 의한 의결과정을 거친다. 월 60~80만원의 급여수준,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는 활동가에게 내부민주주의마저 실현되지 않는다면, 진보적 여성운동은 가동될 수 없었을 것이다.

진보적 여성운동의 내부민주주의 실현을 위한 노력에는 늘 한계가 따를 수밖에 없었는데, 이는 내부민주주의와 전문성의 마찰이었다. 많은 지역단체나 소규모 조직의 경우 지리적인 거리 때문에 회의 참석이 어렵거나 정보에 대한 접근권이 낮아서, 운동방향을 결정하거나 주요핵심사업을 선정하는 과정에 실질적으로 결합하기가 쉽지 않다. 결국 중요한 사안에 대해 주로 중앙의 몇개 큰 단체 중심으로 논의하는 경우가 많은 현실을 극복하는 방안이 모색되어야 할 것이다.

호주제 폐지, 파병반대와 같은 개개 사안에 대해 어떻게 내부민주주의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회원단체의 요구를 조율할 것인가, 다양한 여성단체나 진보적 시민사회단체와의 합의를 어떻게 찾아가느냐 하는 것이 덩치가 큰 여성조직이 지니는 고민이다. 법이나 제도개혁이 여전히 중요한 한국사회에서 운동 내부의 의견분열은 국회나 행정부에 대한 압력행사에 장애를 초래한다. 연대활동은 때로는 타협을 통해 합의에 도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초래할 뿐 아니라 진보적 여성운동의 인력과 시간을 축내는 힘겨운 사업이어서, 운동의 무게중심과 관련해 늘 뜨거운 감자일 수밖에 없다.

 

2. 여성의 정치세력화, 오해와 해명

여성의 정치세력화는 여성운동이 오랫동안 해결하지 못한 사업이다. 그래서 여성단체들은 기존의 정치문화를 바꾸고 여성의 정치참여를 확대할 수 있도록 정치제도를 개선하는 일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기로 하였다. 그 일환으로 321개 단체로 구성된 ‘총선여성연대’ 조직을 통해 선거법과 관련된 정치개혁안을 작성하고, ‘맑은정치여성네트워크’를 통해 여성신인 102명을 발굴하여 여성후보 리스트를 제출하였다.4월 총선까지 비례직 50% 여성할당과 여성의 지역구 공천 확대를 위해 각 정당에 압력을 가할 뿐 아니라 여성후보의 지지·당선운동을 벌일 예정이다.

여연의 경우, 17대 총선이 정치개혁과 여성의 정치참여 확대에서 중요한 기회가 될 것이라 판단하고, 여러 단계의 의견수렴을 거쳐서 2003년 9월 “대표가 임기중에 정치 및 공직에 진출할 수 없다”는 내부규정을 “이사회의 의결을 거쳐 3개월 전에 사퇴하고 정치에 진출할 수 있다”로 바꾸었다. 여연이 이렇게 내부규제를 풀게 된 데에는 몇가지 동기가 있다. 첫째로, 여성운동이 정치세력화를 주장한다면 스스로 몸을 던져 정치에 참여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입장이 지속적으로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여성운동에도 정치적 지도력의 분화가 필요하다는 고려도 추가되었다. 둘째로, 2003년 하반기에 지역을 중심으로 시민운동의 정치세력화 논의가 제기되고 중앙으로 그 압력이 가해지면서, 2004년 총선이 정치개혁의 중요한 기회가 될 것이라는 판단을 했고, 그렇다면 여성운동도 여기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함께 작용했다. 또한 정치참여 불가의 내규가 실제로 지켜지지 않을 경우 발생할 내규의 무력화에 대한 우려도 있었다.

여성운동 대표의 공직 진출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은 이제 막 여성부와 여성정책담당관제가 신설되면서, 성평등을 위한 제도적 장치의 토대가 구축되고 있는 싯점이다. 성인지(性認知)적 관점을 갖춘 공무원이 부족한 상황에서 여성주의 관료(Femocrats)의 참여는 불가피하고, 다양한 여성관련 쟁점을 총괄하는 연합체 조직의 대표가 그 적임자로 떠오른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쟁점이 있다. 우선 여성주의 관료가 스스로의 역할을 온전히 수행하고 있는가에 대한 평가이다. 아직은 평가가 이른 것 같아서 이는 후일의 과제로 남겨야 할 것이다. 단, 서구에서는 이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가 나오고 있다. 둘째로는 여성단체 대표의 공직, 정치권 진출이 지도력의 훼손을 초래한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찬반이 나뉜다. 단체에 따라서는 지도력의 훼손이 있을 수 있으나 그 반대도 있다. 진보적 여성단체의 경우, `민주적 운영을 위해 대표의 임기는 대체로 3년이고, 1회에 한해 연임이 가능하다. 따라서 조직은 일정 싯점에서 대표를 방출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는 대학교수나 변호사 같은 전문직 참가자와는 다른 현실이 놓여 있다. 순수한 활동가 출신일 경우 단체를 떠난 이후 운동의 기반 혹은 생활근거를 확보하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공직이나 정치진출을 통한 활동은 크게 보면 여성운동의 외연 확장이라 할 수도 있다.

정치권 및 공직진출의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다른 시민단체에 비해 진보적 여성운동이 비난의 표적이 되는 이유는 ‘간판급 스타’가 자리를 옮겨갔고, 이것이 더 자극적으로 비쳤기 때문일 것이다. 정당과 시민단체의 이중 멤버십이 자유로운 서구와는 달리 정치엘리뜨에 대한 불신이 팽배한 한국사회에서는 진보적 여성운동이 더 신중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자성적인 비판이 필요하다.

 

3. 영 페미니스트를 향한 부탁

지난 몇년 사이 영 페미니스트(young feminist)의 소모임 운동이나 네티즌 운동이 활성화된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젊은이의 활발한 의견개진, 특히 일상문화나 운동문화에 대한 비판은 덩치가 큰 조직의 무게에 눌려 발언을 조심할 수밖에 없던 조직내 활동가의 부러움을 살 만하다. 진보적 여성운동은 이런 다양한 영 페미니스트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이들과 대화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2004년 여연은 다양한 여성주의 집단과의 만남, 특히 영 페미니스트와의 대화를 마련하려는 사업계획을 잡았다. 앞으로 진보적 여성운동은 세대간 대화를 모색하고, 운동방식의 차이는 서로간의 역할 분업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영 페미니스트에게 몇가지 부탁을 하고 싶다. 첫째로, 영 페미니스트들의 도발적인 비판이 엄격한 사실 확인에 근거해서 제기되면 좋겠다. 매체에 실린 진보적 여성운동에 대한 비판의 상당부분에서 사실 자체가 왜곡되었을 때 느끼는 당혹감이 작지 않았다. 언론에 실린 사소한 사례들을 여기에서 일일이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 같고, 대표적으로 진보적 여성운동이 관료화, 제도화되었다는 비판만 하더라도 조목조목 따져볼 만한 사안이다. 어떤 부분에서, 어떻게 그러하다는 것인지에 대한 엄격한 평가가 있었으면 좋겠다. 정확하지 않은 예단은 열악한 조건하에서 묵묵히 일하는 수백명의 활동가들을 낙담케 한다. 최소한 사실을 확인하는 성실성을 가져주기 바란다. 둘째로, 어떤 사안을 평가할 때에는 그에 대한 맥락적(contextual) 이해에서 출발하기 바란다. 다시 말하면 사적인 영역에서 느끼는 성차별을 사회구조의 개혁을 위한 총체적 고민 속에서 사고하고, 실천하기를 기대한다. 사회의 구조적 변화 없이는 진정한 여성해방은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셋째로, 비판에는 현실적 대안을 함께 제시하는 ‘책임감’이 필요하다. 운동은 원칙만으로 굴러가지 않으며, 또한 원칙을 떠난 운동은 생명력이 없다. 그래서 여성운동은 이 양면을 아우르면서, 오늘보다 나아진 내일을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4. 대안사회를 향한 꿈

진보적 여성운동은 계속되는 세계화, 빈곤의 여성화에 대한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못했다는 자괴감을 가지고 있다. 또한 현실의 두꺼운 벽에 절망해, 여성의 비정규직화 방지나 비정규직의 처우개선에 대한 싸움을 최우선으로 배치하지 못했다. 이제 여연은 2004년 주요핵심사업의 하나로 ‘여성의 빈곤화 방지와 일자리 창출’을 선정했다. 이는 ‘작고 소외된 여성’의 문제를 해결하고 ‘대안적 세계화운동’을 전개하려는 의지의 표현이다. 최저임금제나 여성 자활사업 등의 미시적 접근만이 아니라, 지속가능한 발전, 대안적 경제체제, 대안적 삶의 방식 개발 등을 위해 사회적 담론을 확산하는 데에 적극적으로 나서고자 한다. 여연이 늘 표방해온 ‘끼어들기’와 ‘새판짜기’ 사이에서, 후자에 더 적극적이어야 한다는 무거운 과제를 안으면서, 올해에는 다른 진보적 시민사회단체와 함께 이 꿈의 실현에 매진하고자 한다.

 

 

발제 2: 김신현경

 

1. 누가 지금 ‘여성주의’를 말하고 있는가

‘세대간 차이와 단절’이라는 테제를 최근 몇년간 한국의 여성주의판 주위를 배회하는 유령으로 지목하는 것은 과연 수사학적인 만용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관찰 가능한 듯하지만 언어로 구체화하기에는 무언가 물증이 부족한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그만큼의 현실. ‘지상토론’이라는 타이틀을 건 이 기획이 다소 부담스러운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유령과도 같이 잡히지 않는 현실의 어느 한쪽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그만큼의 대답을 하라는 주문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차라리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 주문에 다시 주문을 걸어 현실을 현실이게 하는 유령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 아닐까?

유령의 정체를 좀더 소상히 밝히자면 이렇다. ‘기존 여성운동단체의 제도화/영 페미니스트의 게토화’라는 이분법에 의해 그려지는 어떤 대립적 상황, 어떤 분열과 갈등. 현재 한국사회 여성주의 진영에 대한 이같은 진단은 상세한 정황설명과 증거 없이 ‘현재 한국사회 여성주의는 이렇다’라는 현실을 창조하는 준거틀이 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현실이 존재하게끔 만드는 소위 ‘현실진단’이 어떤 담론적 주체-권력에 의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는가일 터이다.

1990년대 이후 대학가를 중심으로 한 일군의 젊은 여성주의자들이 스스로를 ‘영 페미니스트’로 명명하며 여성주의 내 세대의 정치와 차이를 이야기하기 시작한 것은 단순한 세대교체론의 문제설정이 아니었다. 한국사회가 급속한 소비자본주의 사회로 진입하면서 일상과 인간관계는 다르게 조직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시대적 변화 속에서 성장해온 젊은 여성주의자들은 스스로를 둘러싼 일상을 드러내면서 기존의 진보적 여성운동단체들이 대중 여성운동을 지향하며 설정한 ‘한국사회 보편적 대중여성’이라는 운동의 주체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이는 우리의 일상을 대중여성의 일상에 포함해달라는 요구거나 각자의 일상을 알아서 해결하자는 개인주의적 발상이 아니었다. 시대의 흐름 속에서 어떤 여성문제를 누가, 어떻게 제기할 수 있을까를 더욱 고려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문화는 오히려 정치경제적 현실과 분리되지 않는 권력의 문제인 것이다. 문화를 정치경제적 권력의 관점에서 사고하면서 설정한 ‘반(反)성폭력’ 의제는 인간관계, 의사소통 방식, 일상적 폭력이 발생하는 공간의 성별성1 그리고 여성인권의 이슈와 개념2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총체적인 문화 권력의 성별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영 페미니스트라는 명명에 대해서 이견이 없지는 않다. 누가 영 페미니스트라고 스스로를 명명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0년대 초반부터 대학가를 중심으로 활동해온 젊은 여성주의자들의 게릴라적 조직운용방식, 일상적인 문화를 문제삼는 다양한 의제설정 등은 단체 중심의 여성운동에 일정한 충격을 주었다. 대학가 중심의 영 페미니즘 운동이 최근 대학사회의 변화와 더불어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 사실이나 온라인 공간에서의 활동3과 탈학교 십대들의 여성주의 그룹활동4 등 새로운 실험은 계속되고 있다. 때문에 특정 그룹을 영 페미니스트로 지목하고 이들의 스타일과 의제설정에 대해 과도하게 폄훼하는 것은 생산적이지 않다고 생각된다. 지금 한국사회에서 영 페미니즘은 세대의 문제가 아니라, 스스로를 ‘보편’의 위치에 놓지 않고 자신의 일상에서 자신의 문제를 발언하며 이를 페미니즘적 의제로 접근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2. 여성정치세력화 의제설정의 현주소: 여성운동의 제도화 우려

현재 한국사회 여성주의의 ‘세대간 차이와 단절’을 여성주의 내 업무분담 정도로 위치짓는 것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다. 세대간 차이는 시대의 흐름을 어떻게 파악하는가에 차이가 있다는 것이며, 이는 지금 여기서 무엇을 의제로 만들 것인가에 대한 입장차이로 이어진다. 한국사회의 여성주의에 지금 필요한 것은 주어진 상황에 자신을 짜맞추는 것이 아닌 새로운 주문을 거는 상상력과 용기라고 생각한다. 여성정치세력화란 의제설정 또한 기존 여성운동단체들의 영역이라고 역할분담 차원에서 넘어갈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문제는 현재 여성운동단체(정확히 말해 단체의 지도급 인사)들이 보여주는 여성정치세력화란 의제설정과 실제 사이의 괴리다. 여성정치세력화가 한두 해 얘기되어온 것도 아닐 텐데 단체의 조직적 성과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보이는 것은 그러한 성과와는 별개로 단체 이름과 인맥을 개인의 것으로 전용해버리는 방식의 정치진입뿐이다. 그러한 정치진입이 여성정치세력화와 동일시되는 것을 코미디가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권위주의적 개인주의로 불릴 만한 희비극이 여기서도 ‘보편 대중여성의 이익’으로 용인된다.

지난 대선에서 갑작스럽게도 ‘박근혜’가 여성정치세력화에 관한 가장 중요한 사유의 대상으로 떠올랐던 것을 기억하는가. 우리 사회 여성정치참여의 일천함을 감안하더라도 “그녀가 어떤 배경을 가졌다 할지라도 여성이라면 일단 찍어줘야 한다”는 것으로 압축될 수 있는 저널리즘적 주장이 문제인 것인 무엇 때문인가. 박근혜가 박정희의 딸이라는 것이 문제점의 전부인가. 그보다는 이런 주장이 가지는 여성주의에 대한 무지, 다시 말해 여성주의세력이 어떤 정치적 과정을 거쳐 ‘여성’을 정치적 주체로 만들어왔는가를 알지 못하고 생물학적 여성이면 누구나 생물학적 여성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오만함 때문은 아닌가. 그런데 최근 1,2년간 여성운동세력의 지도급 인사들이 보여준 갑작스러운 정치적 행보가 이와 다른 점이 도대체 무엇인지 나는 잘 알지 못한다. 물론 더 많은 여성들이 국회에 진출하여 여성의 현실을 정치적인 의제와 정책으로 풀어내야 한다는 데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이들이 자신의 지지집단과 권력원천을 어디에서 구할 것인가이다. 조직과 운동의 성과 위에서 기존 정치판에서 실현해야 할 여성주의적인 목표를 가지는 과정, 그것을 자신의 지지집단에서 설득하는 과정이 없다는 것은 그들이 어떤 권력에 대해 더 민감한지를 보여주는 예가 아닌가 생각한다.

더불어 이러한 일들은 여성운동단체들의 조직운영방식과 의사결정방식, 리더십이 어떤 방식이었을지를 미루어 짐작케 한다. 조직적 성과를 개인의 자원으로 쉽게 전용할 수 있는 조직이 여성주의적 조직과 의사소통을 충분히 고민해왔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조직적 운동에 대한 강조가 실은 권위주의적인 리더십에 기대고 있다고 한다면 이제부터라도 이에 대한 구체적이고도 급진적인 상상력과 실천이 있어야 할 것이다.

 

3. 전략과 비전을 동시에 가져야 하는 여성주의

여성정치세력화란 의제가 여성주의세력의 제도화라는 우려를 동반하는 것은 이 문제가 어느새 비전을 상실한 전략적 수준에서만 논의되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현실을 반영하는 구체적인 전략은 때로 더 큰 목표와 상충되는 지점을 어쩔 수 없이 노출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그럴수록 여성주의에 대한 기본적인 질문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더 많은 이슈를 발굴하고, 새로운 운동방식과 문화정치적 의제설정을 포용하는 것으로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우리 사회에서 여성주의를 주류화하겠다는 것은, 국민국가 내 협소한 의미의 정치적 영역에서 될 수 있는 한 자원과 네트워크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략은 더 폭넓은 맥락에서 논의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미 근대가 시작되던 시기에 성별적 공/사 영역의 틀을 문제삼지 않고 사적 영역의 어머니로서 권리를 주장하던 여성주의의 전략이 패권적 중심주의를 넘어서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예는 많다. 따라서 여성정치세력화 전략은 공/사 영역의 구분을 전제로 한 근대적 국민국가에 대한 문제의식과 더불어 국민국가의 퇴장과 과잉이 동시에 진행되는 글로벌 시대에 대한 이해 속에서만 그 급진성과 구체성을 잃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럴 때 하나의 틀에 포괄될 수 없는 다양한 피억압 주체들과의 연대 가능성을 함께 고민할 수 있고, 국제적인 여성주의 흐름에 개입하고 연대할 지점을 제대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토론: 김신현경

정현백 선생의 영 페미니스트를 향한 몇가지 부탁에 대해 드는 생각을 덧붙이고자 한다.‘사적인 영역에서 느끼는 성차별’을 사회구조적 총체성 안에서 사고하고 실천하기를 기대한다는 부탁은, ‘사적인 것’은 무엇이며 사회구조적 총체성은 무엇인지를 물었던 여성주의의 고전적인 명제를 떠올리게 한다. 앞의 글에서 나는 ‘문화정치적 문제설정’이 왜 정치·경제·문화의 3분법 속에서의 문화가 아니라 정치경제적인 구조 속에서의 문화정치인가를 얘기했는데, 이러한 상황판단의 차이가 결정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영 페미니스트들에게 가해져야 할 비판은 사적 영역의 성차별을 사회구조적 총체성 안에서 사고하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문제설정과 실천이 ‘사적 영역/사회 구조적 총체성’이라는 이분법을 효과적으로 깰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성차별은 사적 영역의 문제가 아니라 공/사 영역이 얼마나 젠더화되어 있는가를 보여주는 문제가 아닌가?

이런 시각에서 보면 여성운동단체의 세계화에 대한 문제제기도 그야말로 총체적인 시각에서 더 생각해야 할 부분이 있다고 생각된다. 여성주의의 시각에서 대안적인 사회체제에 대한 시각을 제시하는 것은 미시적인 접근과 구분되는 것이 아니다. 소위 ‘미시적인 접근’은 대안적인 사회체제에 대한 시각으로 섬세하게 하나하나 따져가며 만들어야 할 구체적인 실천방안이며, 역으로 이러한 실천방안으로부터 총체적인 대안적 시각이 무엇인지를 사람들이 느낄 수 있고 알 수 있도록 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앞의 글에서 나는 여성운동단체들과 영 페미니즘의 문제설정의 차이를 이야기하며 역할 분담으로 이해할 문제가 아니라고 했으나, 정현백 선생의 글을 읽으면서는 현재 단체 중심의 여성운동이 그 나름의 중요한 역할을 계속해나가되 영 페미니즘이 제기하는 문제설정의 지점을 정확하게 짚으면서 상상력을 확장해나갈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동시에 여성운동단체에서 헌신하며, 또다른 자리에서 운동을 일구어나가는 많은 영 페미니스트들이 이러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가져본다.

 

토론: 정현백

앞에서 밝힌 대로 영 페미니스트에게 사실에 대한 엄격한 검증 외에도, 용어 사용의 신중성을 부탁하고 싶다. 흔히 여성운동의 제도화나 관료화를 언급하고 있는데, 현재 여성운동에서 일어나고 있는 운동가의 관직·정계 진출은 제도화가 아니다. 그것은 여성주의 관료(femocrats)의 양산이라 말할 수 있다. 제도화란 독일·스웨덴·오스트레일리아 등지에서 일어나는 현상으로 여성운동이 국가의 광범한 지원을 받으면서, 여성단체 자체가 유사 사회복지기관으로 전락하거나 활동가가 복지관련 전문가에 의해 충원되고, 여성운동이 자신의 비판력과 동력을 상실한 경우를 지칭한다. 이런 언어의 오용은 도처에서 찾을 수 있다.

진보적 여성운동단체들이 비슷한 상황이지만, 여연의 경우 정부의 여러 부처로부터 받는 프로젝트는 총괄하여 1년 예산의 40% 이내로 제한한다는 내규를 가지고 있다. 그밖의 예산은 광고협찬이나 만원씩 내는 후원회원 모집을 통해서 충당하고 있다. 1년 예산의 확보는 여성운동단체에는 피눈물 나는 노력을 요한다. 쥐꼬리만한 급여도 제때 지급 못할 경우가 있는 여성단체의 대표가 ‘운동의 제도화’라는 힐난을 들을 때 느끼는 당혹감을 상상해본 적이 있는가?

또한 명망가의 정치진출 문제는 시기나 방법 등과 관련해 비판이 필요하지만, 이는 전체 운동의 부분적 현상이다. 자신을 희생하면서 열악한 경제적 상황에서 묵묵히 일하는 수만의 활동가는 우리의 힘이며 자부심이다. 따라서 부분적인 현상을 보고, 전체 운동을 제도화로 폄훼하는 것은 겸허한 자세가 아니다.

진보적 여성운동의 운동방식과 관련하여 몇마디 언급하고자 한다. 최근 국제사회에서 반세계화운동이나 제3세계 여성운동에서 풀뿌리(grassroots) 운동방식으로 제안되고 있는 것으로 1시위와 같은 집단행동을 통한 민중운동 2로비를 통한 설득과 압력행사의 방식이 있다. 특히 과거의 거리집회가 대단히 어려워지고 싸이버 세대가 부상하면서 온라인 운동이 활성화되고 있고, 또다른 새로운 방식이 로비활동이다. 진보적 여성운동의 방식이 과거의 대중적 성격, 민중적 성격을 상실했다는 비난 역시 신중하게 검토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여성운동에 참여한 우리 모두가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면서, 나의 운동방식만이 최선의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운동의 일부를 들추어 그것이 전부인 양 폄훼하는 태도를 지양하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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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2년간 이화여대 대동제에서 난동을 부리며 이를 ‘낭만적인 대학인의 놀이문화’로 미화했던 일부 고려대 학생들의 집단난동을 ‘성폭력’으로 규정한 것은 공간의 성별성과 폭력의 연관성을 문제화한 것이다(이화여자대학교 고대생 집단 성폭력 근절을 위한 대책위원회 「당신이 고대생 집단 성폭력에 대해 알고 싶은 모든 것」, 1997).
  2. 우리 사회에서는 여성에 대한 폭력조차 여성인권을 중심으로 논의되지 않았다. 이 문제는 언제나 피해여성 개인의 고통보다 그 여성이 속한 집단의 명예와 관련되어 논의되어왔다. 그러므로 여성에 대한 폭력이 인권문제로 인식되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의 기본 질서와 남성 중심적 인권개념에 대한 문제제기가 필요하다(정희진 「인권과 평화의 관점에서 본 여성에 대한 폭력」, 『성폭력을 다시 쓴다』, 한울 2003).
  3. 웹진으로 출발하여 커뮤니티로 발전한 언니네(www.unninet.co.kr)와 온라인의 여성주의 저널로 자리를 굳혀가는 일다(www.ildaro.com)는 그 대표적인 예다.
  4. 서울시청소년직업체험센터 ‘하자’의 소녀들이 결성한 ‘소녀들의 페미니즘’ 그룹이 이에 해당한다. 이들은 故 고정희 시인에 대한 페미니즘적 추모의례를 만들면서 페미니즘 그룹의 세대 차이를 갈등이 아니라 영감을 주는 언어로 풀어내고자 하였다(www.gohjunghee.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