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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점토론 │ 시민운동의 현주소를 묻는다
풀뿌리 운동과 전국적 운동
유종순 劉鍾淳
열린사회시민연합 공동대표, 반부패국민연대 이사, 시인. 민주언론운동협의회 사무국장, 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 사무처장, 자주평화통일민족회의 사무총장, 서울민주시민연합 부의장, 언론개혁시민연대 공동대표 역임. che-yoo@nate.com
차병직 車炳直
변호사, 참여연대 집행위원장, 남녀차별개선위원회 위원, 인권운동연구소 운영위원, 오마이뉴스 논설위원. 저서로 『NGO와 법』 『인권의 역사적 맥락과 오늘의 의미』 『사람답게 아름답게』 등이 있음. bjcha@hklaw.co.kr
발제 1: 유종순
1. 한국 시민·사회운동의 현황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성과를 바탕으로 한국의 시민·사회운동은 급격한 성장을 이뤄냈다. 6월 민주항쟁을 통해 한국사회는 ‘폭압적인 국가권력의 민주화’라는 과제를 넘어 ‘시민사회의 민주화’라는 새로운 사회발전의 과제를 안게 되었으며, 시민·사회운동 진영은 김영삼정권과 김대중정권을 거쳐 오늘의 노무현정권에 이르기까지 점진적으로 사회의 민주화를 진전시키며 양적으로 성장하였다. 내용도 통일·반전평화·재벌개혁·정치개혁 등의 이슈에서부터 청소년·노인문제·화장실문화·장묘문화 등 생활영역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해졌고, 아울러 국내외를 막론하고 영역별·사안별 연대운동도 매우 활발해졌다.
그러나 이러한 양적인 성장에도 불구하고 사상성의 빈곤과 이에 따른 사회발전의 전망 부재, 인적·물적 재생산 구조의 취약성, 그리고 전문성·조직역량·실무역량 등의 부실로 인해 전체적인 운동역량은 미약한 수준에 놓여 있는 것이 우리 시민·사회운동의 현실이다. 2003년을 기준으로 한국의 시민·사회운동 단체는 2만여개(시민운동정보센터 『한국민간단체총람』)에 달하지만, 극소수의 메이저급 단체를 제외한 대부분의 단체는 그 활동이 매우 부실하다. 활동에 필요한 인력의 부족은 물론 활동조건이 매우 열악하기 때문이다. 1998년 수도권주민자치연구모임에서 서울·인천·경기 지역의 단체 403개를 실태 조사한 결과(「수도권 지역운동단체 현황조사」)를 보면 대부분의 단체에 상근자가 한두 명에 불과하고(43%), 상근인력 없이 간판만 있는 단체도 전체의 16%나 된다. 이러한 열악한 상황은 5,6년이나 지난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시민·사회운동의 불균형적 성장이 주원인이다. 여론을 환기하는 선전과 폭로 위주의 활동이 주요한 운동방법으로 정착되면서, 운동의 주체인 사람(시민)의 변화, 발전보다는 법과 제도의 개혁에 자연스럽게 촛점이 맞춰진 결과다. 따라서 메이저급 시민·사회운동단체에는 언론의 적극적인 관심 아래 풍부한 물적·인적 역량과 프로젝트들이 몰리는 반면, 사람과 지역 중심의 풀뿌리 시민단체들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 눈물겨운 생존을 위한 투쟁을 벌이고 있는 상황이다. 이른바 시민·사회운동 진영의 ‘큰손’들이 돈과 사람을 싹쓸이하고, 심지어 각종 민간위원회의 위원과 기업의 사외이사마저 독식하는 사이에 시민·사회운동 진영은 빈익빈부익부 현상이 고착화되고 말았다. 어쨌든 언론의 상업주의에 기대어 소위 ‘언론플레이’에 주로 의존하는 사업방식이 문제제기와 그 해결에 어느정도 도움은 되겠지만, 시민·사회운동이 대중과 결합하여 밑에서부터의 착실한 발전과정을 밟고 시민 속에 뿌리를 내리는 데 비효율적일 수 있으며, 시민·사회운동이 ‘밑에서부터’의 힘을 갖지 못하게 하는 이유가 될 수 있다. 시민·사회운동 진영의 취약한 재생산구조도 바로 이러한 토대의 취약성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다.
2. 한국 시민·사회운동의 과제
21세기를 맞이한 한국의 시민·사회운동은 이제 지난 활동을 돌아보고 새로운 모색을 해야 할 시기에 이르렀다. 시민·사회운동이 진정으로 역사와 사회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인류와 한국사회의 미래에 대한 고민과 당면한 현실 세계의 과제에 대해 냉정히 분석하고, 그것을 근거로 한 진정한 진보의 전략과 전술을 찾아야 한다. 현재 한국 시민·사회운동의 당면과제는 권위주의시대 이후의 새로운 사회발전 상을 제시하는 것과 함께 사회발전의 주체인 시민을 시민사회의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시킬 방도를 찾아내는 일이라 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는 다음의 과제가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첫째는 사회발전의 종합적인 패러다임에 대한 논의와 이를 위한 사상문화운동의 활성화다. 급속한 사회변화 속에서 현재 시민·사회운동의 세계관과 가치, 21세기의 새로운 사회발전 상, 이전의 민주화운동과 현재의 시민·사회운동 사이에 존재하는 연속성과 차이점, 시민·사회운동의 방향 및 그에 따른 전략과 전술 등등 앞으로의 시민·사회운동을 향도할 사상문화적인 내용 마련이 시급히 요청된다. 이러한 사상문화운동은 풍부한 토론과 실험, 실천을 통할 때 앞으로의 운동에 가장 중요한 자산이 될 것이다. 이 과제가 제기될 수밖에 없는 것은 이전의 재야운동에 대한 심도있는 평가를 회피하면서 진보운동의 연속성과 혁신 간의 균형점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국 시민·사회운동의 담론은 수입품 이상의 독창적인 토착화를 이루지 못하고 유행을 좇으면서, 6월항쟁 이후의 한국사회 고유의 역사적 격동을 반영한 풍부한 사상문화적 논의로 발전하지 못했다. 지금까지는 단지 재야운동 전술에 대한 비판과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대만이 유일한 사상문화운동의 주제였다.
둘째는 ‘시민 없는 시민운동’ 현상을 극복하는 것이다. 현재 시민·사회운동의 활동양상은 소수 명망가 중심으로, 장군들만이 전투하는 기형적인 모습이다. 정상적인 사회발전은 다수의 시민이 자신들의 미래를 설계하고, 적극적인 사회참여를 통해 현실을 변화시켜갈 때 가능하다. 따라서 시민의 힘이 밑받침되지 않으면 정상적인 사회발전과 시민·사회운동의 미래는 기약할 수 없다. 모든 시민·사회운동은 시민사회의 각 분야와 영역에서 민주주의적 가치를 확대, 발전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런데 민주주의적 가치의 실현은 법과 제도에서 절차적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다. 그것은 바로 시민의 사회적 책임감과 규범의식의 성장이다. 이슈 중심의 활동, 사안에 대한 기능주의적 접근 등으로 문제를 어느정도 해결한다 하더라도, 시민이 사회운영의 주체가 되었다는 보증이 될 수는 없다. 법과 제도가 아무리 민주적이라 해도 그것을 운영할 시민들이 준비되고 훈련되지 않으면 민주주의는 제대로 실현될 수 없다. 시민의 참여는 어떤 특정한 사안이나 활동에 시민 의견이 반영되느냐, 안되느냐라는 단순한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참여는 민주주의 교육과 훈련을 통해 민주사회의 운영능력을 갖춘 시민층이 시민사회 내에 튼튼히 형성될 때 가능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현재와 같은 활동방식 및 국가와 중앙부처들을 대상으로 하는 이슈 중심의 활동방식을 지양해야 한다. 그러한 방식으로는 시민들의 참여는 물론 시민의식의 성장과 발전도 기대할 수 없다. 건강한 시민층을 확대하고 그 힘으로 사회의 발전을 추동하려면, 먼저 시민들의 1차적 삶의 터전인 지역사회 속에서의 다양한 시민적 활동(생활문화, 지방자치와 주민자치 등)으로 토대를 구축해야 한다. 한국사회는 수많은 지역사회를 기본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역사회는 한국사회를 지탱하는 토대이자 뿌리다. 토대가 튼튼하고 뿌리가 건강해야 몸체도 건강한 법이다.
세째는 한국사회 발전의 수준을 제시하고 사회적 통합에 기여하는 일이다. 오늘날 한국사회의 과제는 민주주의의 완성을 향한 사회개혁과 21세기 새로운 미래의 사회상을 설계하고 실현하는 일이다. 이 두 가지 과제는 현상적으로는 달라 보이지만 정상적인 사회발전을 위해서는 반드시 해결해야 할 동시적 과제다. 그런데 시민·사회운동 진영에서는 오늘의 문제인 사회개혁의 과제 해결에만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내일의 문제인 사회발전 상을 제시하고 실현하는 과제가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그러나 이에 대한 고민이 없이는 사회의 진보를 추동할 수 없다.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모르는 상태에서 무엇이 진보이고 무엇이 수구인지 어떻게 구별하겠는가?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한국사회의 발전수준에 대한 냉정한 판단이 필요하다. 이미 세계는 좌파와 우파 양자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사회발전의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는 아직도 냉전질서의 유산인 흑백논리와 낡은 가치에 근거한 논쟁이 반복되고 있으며, 우리 사회발전의 현수준을 파악하지 못한 근본주의적 주장들이 사회개혁의 이름 아래 존재한다. 한국사회의 발전수준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한 과제들을 도출해낼 수 있고, 나아가 정상적인 사회발전의 정책과 대안을 제시하고 시민사회의 힘을 모아낼 수 있을 것이다.
네째는 종합적인 전문성의 강화다. 하나의 사안에 대한 전문성도 중요하지만 앞으로는 전체 사회를 보는 전문성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현실 시민운동에서 문제제기식 운동, 일회성 운동의 극복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과거의 폭압적 귄위주의 잔재의 청산 차원에서는 문제제기식 운동이 어느정도 유효하고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지만, 미래의 사회발전을 추동하려는 관점에서 생각하면 분명 한계가 있다. 따라서 전사회적 차원과 관계 속에서 문제를 파악하고 해결하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이러한 과제들은 21세기의 엄청난 현실변화 속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내지 못한 데서 초래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제 21세기의 인류의 문제, 진정한 진보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할 때가 되었다.
발제 2: 차병직
1. 시민의 자발적 참여를 확보하면서 시민단체의 적절한 인적·물적 재생산 구조를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 이런 과제는 얼핏 총론적이고 일반적으로 보일지 모르나 실제로는 상당히 구체적인 문제다. 우리 사회에서 시민운동이 본격화됨과 동시에 제기된 문제이기도 하면서, 현실에서는 거의 모든 시민단체가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문제다.
이런 문제를 논의하기에 앞서, 우리 사회의 시민운동이 처한 특수한 상황을 먼저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 사회의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는 정치적 불안정성이다. 군사독재에서 형식적 민주화를 이루고, 거기서 다시 실질적 민주화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정치는 여전히 새로운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불안정한 상태에서 벗어나지도 못하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정치적 불안정성은 시민의 모든 생활영역에서 정치적 의존도를 더 높인다. 사회·경제·문화 등의 다른 모든 영역은 안정되지 못한 정치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따라서 주요한 시민단체들은 정치운동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참여민주주의를 통해 실질적 법치주의와 민주주의의 실현을 도모하고 시민생활의 몇가지 제도화된 영역을 운동의 대상으로 선택할 때, 정치운동을 빠뜨릴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영향력있는 시민단체는 정치운동을 포함한 종합적 시민운동단체가 될 수밖에 없는데, 흔히 이를 ‘백화점식 시민운동’이라 부르기도 한다. 정치운동을 포함한 시민운동은 중앙정치에 대한 영향력 행사와 그로 인한 제도개편의 성과를 기대하기 때문에 전문성을 요구한다. 그리고 주장의 공론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유효한 홍보수단을 확보하고자 노력한다. 그래서 소수 전문가의 지원과 지명도 있는 리더에 의해 운동을 전개하고, 중앙집중적으로 움직이고, 효과를 제고하기 위해 언론에 의존하기도 한다.
이런 현상을 부정적으로만 볼 수 없다. 대의제도가 근본적 한계를 안고 있고 부패하고 형식화한 현실 의회정치가 안정되지 않는 한, 시민단체의 정치운동은 과도기적으로 불가피하다.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유난히 시민단체의 영향력이 큰 것도 우리 정치의 특수성 때문이다. 정치가 안정되면 종합적 시민단체도 점점 분화되어 지금보다 집중적 시민운동에 몰두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정치적 불안정이란 환경에서 참여민주주의의 실현형태로 벌이는 시민운동은 사회운동의 하나인 것이다. 사회 내부의 모순과 갈등을 해소하고 제도적 대안을 제시하는 이 운동은 지역적 생활운동과는 거리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부각되지 않아서 그렇지, 우리 사회에 시민의 자발적 생활운동은 따로 존재하고 있다. 따라서 시민단체의 다양한 성격을 고려하지 않고 일률적으로 풀뿌리 시민운동을 요구하는 식의 비판은 곤란하다.
2. 정치적 환경의 특수성을 고려하더라도, 종합적 시민운동단체가 ‘시민 없는 시민운동’이란 비판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는 ‘시민적 정당성’이란 개념으로 판단하고 싶다. 시민적 정당성은 학문적으로 확립된 개념은 아니지만, 시민운동의 가치평가와 문제제기에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다. 시민운동은 시민의 자발적 의사에 근거해야 하고 시민의 일정한 동의와 지지를 확보해야 한다. 그러므로 시민적 정당성이란,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시민의 현재적 또는 잠재적 동의와 지지를 바탕으로 시민단체의 조직과 활동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원리다. 헌법학의 민주적 정당성 개념을 원용하면, 특정 시민단체의 조직과 활동은 일차적으로 그 소속 회원에게 귀착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민적 정당성은 시민단체의 존재와 활동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그 정당성은 시민사회 내에서 형성된 다음 국가적 범위로까지 확대되어 의미를 갖는다. 시민적 정당성을 가질 때 시민단체의 존재와 활동은 사회적 신뢰를 얻게 되고, 그 힘으로 국가 내에서 참여민주주의 실현에 기여한다. 시민적 정당성이 없거나 현저히 결여된 시민단체의 활동은 국가나 시민사회 내에서 기반을 잃을 수밖에 없다.
시민적 정당성은 그 크기에 따라 일정한 기능을 한다. 충분한 시민적 정당성을 토대로 한 시민단체의 주장은 제도화를 통해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 그에 못 미치는 정도의 시민적 정당성을 확보한 경우, 시민단체의 주장은 제도화에는 이르지 못하더라도 공론경쟁력을 가지는만큼 사회적 과제로 남을 수 있다. 시민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특정 시민단체의 회원이다. 따라서 시민적 정당성의 크기를 가늠하는 기준은 참여하는 회원의 수, 시민단체의 활동에 대한 회원의 동의나 지지 또는 회비납부 실적 등이다. 시민적 정당성의 형성은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특정 시민단체는 그 조직과 활동에 따라 회원이 아닌 시민을 새로이 회원으로 받아들이는 것에 의해 시민적 정당성을 강화한다. 그러한 이차적 정당성은 소속회원들이 부여하는 일차적 정당성을 바탕으로 확산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일차적·이차적 정당성은 특정 시민단체 내에서 시민적 정당성의 신진대사를 가능하게 한다.
이렇게 볼 때 시민 없는 시민운동은 시민적 정당성의 문제로 귀착된다. 시민 없는 시민운동이란 비판도 시민적 정당성과 관련될 때 의미가 있다. 시민의 저조한 참여가 시민적 정당성의 결여로 나타날 때 비판은 유효하다. 그러나 다른 방식으로 시민적 정당성을 갖출 수 있는 경우에는, 시민의 의사를 직접 반영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비난할 수 없다. 왜냐하면 시민단체는 모든 경우에 전체 회원의 의사를 물어 정책을 결정하고 집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엄연히 시민단체의 조직과 활동에도 대의제 원리가 작동하는 것이다. 그리고 시민단체 회원으로 가입하는 상당수의 시민은 회비를 내고 회원자격을 유지하는 정도로 그 단체에 시민적 정당성을 부여하려 한다. 현재로서 회원의 직접참여는 시민단체의 필수적 요건이라기보다는 시민적 정당성의 크기에 영향을 미치는 하나의 요소로 보아야 합리적이다.
3. 시민적 정당성 확보를 위한 방안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재정의 자립성과 투명성 확보, 민주적 절차에 의한 임원 선출, 상근활동가와 활동기구의 자율성 보장, 민주적 의사소통 과정을 거친 정책 결정과 집행 등이다. 재정문제는 시민적 정당성 획득의 수단일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시민단체가 물리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조건이나 다름없다. 재정운영이 회원들이 납부하는 회부로 충당될 때 두 가지의 문제가 다 해결될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 시민단체의 재정자립도는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 20~30%에 머물고 있다. 재정난은 외국의 시민단체도 똑같이 겪고 있는 문제다. 이 문제 해결은 두 가지 방식으로 접근이 가능하다.
우선, 시민단체 스스로 운동목적을 단일화하고 집중적으로 정하여 지지회원을 확보해야 한다. 그리고 국가는 시민단체의 법인격 취득절차를 쉽게 하고, 일반적 모금이 용이하도록 비현실적인 기부금품모집규제법 등을 폐지하고, 기부문화가 활발히 형성되도록 세제를 개편하고, 우편요금이나 전화요금 등의 할인 폭을 넓혀 간접적 지원이 가능하도록 법과 제도의 개선에 노력해야 한다. 국가의 직접 지원에 해당하는 사업비 지원도 가능한 규모를 확대해야 한다. 정부의 지원이 수혜 시민단체의 시민적 정당성을 약화시킬 수는 있지만, 부정적으로만 평가해선 안된다. 참여민주주의의 실현은 헌법과 국가의 의무이기도 하기 때문에, 열악한 시민단체의 재정을 국고로 보조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의미가 있다.
상근활동가의 전문성과 직업성 확보는 시민단체 내부의 민주성에 기여하는 요소다. 필요한 상근활동가의 수급을 원활히 하기 위해서는 역시 재정의 안정이 전제돼야 한다. 그리고 반드시 필요한 것은 상근활동가의 재교육 제도이다. 시민운동가의 재교육을 위해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물론 각 사립교육기관도 교육시설과 수단을 지원할 수 있는 구체적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 만약 상근활동가 재교육을 통한 전문화와 직업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다수의 시민단체는 비상근자 중심으로 체제의 변화를 시도해야 할지도 모른다. 어쨌든 지금으로서는, 시민단체와 관련한 근본적 문제해결을 위해 국가의 관심과 배려가 너무도 부족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토론: 차병직
우리 시민단체의 조직과 운영에 대한 비판은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긍정적으로 보자면, 지금까지 시민운동의 약점과 허점을 반복해 지적함으로써 일반 시민들로 하여금 시민단체를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게 하고 시민단체 스스로 성찰의 계기로 삼게 한다. 그러나 반대로 부정적 측면도 상당하다. 우선 그 비판이란 그야말로 정형적이며 똑같은 이야기만 되풀이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민단체는 여전히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자기반성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그리고 상투적으로 제기되는 문제는 외국의 시민단체도 사정이 비슷할 뿐만 아니라, 근본적 해결이 어려운 시민단체의 한계일 가능성도 있다.
시민단체의 종합적 전문성의 강화 요구는 당연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전문성 강화는 기실 NGO만의 문제가 아니다. 정부와 제도권 내의 기구도 마찬가지다. 시민단체가 한국사회 발전의 수준을 제시하고 사회적 통합에 기여해야 한다는 지적은 정확하다. 그런데 과거에는 상상하기 어렵던 다양성을 포괄하는 사회적 통합이어야 하기 때문에 쉽지는 않을 것이다.
시민단체의 균형적 발전과 시민의 자발적 참여는 일률적으로 평가해 그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단체의 종류와 성격에 따라 구체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다. 풀뿌리 시민운동은 지역적 소규모 생활운동으로 가능할 뿐이다. 따라서 애당초 중앙정치나 매스컴과는 무관하다. 오히려 지역운동단체들이 구체적 문제해결을 중앙단체에 의존하려는 경향이 더 문제다. 사회발전의 종합적 패러다임 마련을 위한 사상문화운동은 신중히 검토해야 한다. 지금 우리 사회는 그러한 운동이 가능할 수 있도록 선결해야 할 문제에 봉착해 있다. 그리고 계몽적 운동은 자칫 시대착오적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지금까지 정치운동을 포함한 종합적 시민운동단체는 나름대로 지속적인 사회발전의 상을 제시해왔다. 정치개혁, 반부패의 맑은 사회 건설, 작은 권리가 존중되는 사회, 계급화 완화와 빈부격차 해소를 통한 경제정의 실현 등이 그것이다. 어쨌든 시민단체와 시민운동의 문제해결을 위해 기존 시민단체의 재생산구조 개선도 필요해야겠지만, 본질적으로는 그 목적을 위한 새 단체의 새 운동이 더 효율적일 수 있다고 본다.
토론: 유종순
참여연대 차병직 집행위원장의 말처럼 필자도 광의로든 협의로든 ‘정치’의 영역은 시민운동과 매우 밀접하며, 실제로 한국사회에서 정치운동적 활동이 사회발전에 기여해온 성과는 매우 크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본다면 시민의식과 시민사회의 미성숙이 정치개혁과 제도적 발전의 장애가 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예컨대 지역감정의 경우 정치인이 이를 조장한 측면도 있지만, 뒤떨어진 시민의식이 이의 극복을 어렵게 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시민사회의 성숙을 위한 활동과 정치운동적 활동은 상호대립적인 것이 아니다. 또 둘 중 하나만 선택해야 하는 문제도 아니며, 더구나 어느 것이 우선이라는 단계론적인 문제는 더더욱 아니다. 문제는 두 활동의 심각한 불균형이다. 시민의식과 시민사회의 성숙을 주 의제로 하는 활동이 지나치게 취약한 오늘의 현실은 분명하게 ‘기형’적이다. 한국사회의 외상에 대한 치료도 중요하지만 내상에 대한 치료를 더 미뤄둘 수는 없다. 내상을 방치하면 암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
시민과 회원의 참여문제에 대해 차병직 집행위원장은 현실적으로 다수의 참여가 어려우므로 ‘시민적 정당성’ 확보를 주장하고 있으나, 필자는 이 개념이 민주주의 일반원리에 다름아니며, 따라서 문제에 대한 답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특히 시민 또는 회원의 참여를 ‘시민적 정당성’의 크기를 규정하는 하나의 요소 정도로 생각하는 점은 꼭 지적하고 싶다. 누구를 위한, 누구의 단체이고 시민운동인가. 지금 당장 눈앞에 보이는 과제 해결을 위해 시민운동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과제일 뿐이다. 시민운동의 궁극적 목적은 인류의 진보와 인류의 행복이다. 그 과정에서 해결해야 할 하나하나의 과제보다도 그 과제의 해결에 사람들이 어떻게 참여하고 어떻게 성장하고 발전하는가가 더 중요하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정치운동이든 시민사회 자체의 성숙을 위한 활동이든 시민의 직접적인 참여가 더욱 활성화될 필요가 있다. 시민의 참여가 주로 회비를 납부하거나 단체를 지지하는 수준에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시민운동과 시민사회의 정상적인 발전을 위해서는 이를 넘어서 단체의 활동에 직접적으로 참여해야만 한다. 이를 통해 시민 자신이 시민단체와 이 사회의 책임있는 주체라는 인식을 갖고 시민사회의 여러 영역에서 사회운영의 주체로서 설 때야 비로소 시민운동은 정상적인 발전을 기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