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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문성해 文成海
1963년 경북 문경 출생. 199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200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chaein00@hanmail.net
가뭄
맞은편에서
등 굽은 할멈이 물통을 수레에 끌고 온다
겨우내 날랐을 물통이
물 흠뻑 먹어 번들거린다
물통에서 떨어진 물이 시멘트 바닥을 기어간다
멀어지는 할멈을 기를 쓰고 따라간다
길 위에서 바짝 타들어가던 목숨들
그 물 받아먹고 목숨을 키운다
지나가던 개도 혓바닥으로 척척 물을 발라먹는다
땅에 떨어진 물의 눈동자들이 빠르게 감겨진다
마른날이 계속될 거라고 한다
낮은 대문 아래 弔燈이 내걸렸다
나도 모르게 키워오던 목숨들이 과연 있었나
봄이 오면
한 목숨 대신하여 흩날릴 것들이 눈에 선하다
유모차에 장거리를 매달고 돌아오는 길,
할멈이 적셔놓은 길
채 밟아보기도 전에
물의 징검다리가 사라진다
우럭
횟집에서 집어온 바싹 마른 우럭 한 마리
반으로 가른 뱃속과 등짝이 화석처럼 단단하다
두 마리 우럭이 맞붙어 있는 꼴이다
뻐끔거리던 입이 두 개로 갈라져 있다
끊임없이 두리번거리던 눈알도 두 개
서로 다른 곳을 보고 있다
이쪽 갈비뼈가 저쪽 갈비뼈 자리를 무심히 본다
한 개씩 지느러미 바삐 저으며
두 마리 우럭이 떨어지기 위해 몸부림친다
내가 기우뚱, 넘어지는 것도
뱃가죽이 맞붙은 두 개의 내가
문득 서로 배반해서가 아닐까
내 몸이 두 개의 나로 갈라져 눕는 날,
한쪽의 내가 한쪽의 나 속에
선명히 남은 갈비뼈 자국 짚어보며
참 그래도 열심히 살았던 세월이야,
말하는 날 오지 않을까
바로 옆에는 나처럼 두 개로 갈라져 누운 사람들이
바닷바람에 착실히 말라가다가
홑이불처럼 가볍게 후, 웃는 날 오지 않을까
꿰맨 자리 하나 없는 저 바다도
실은, 날마다 갈라져왔던 거나 아닐까
더 깊은 곳으로 가려는 물과
뭍으로 가려는 물이
몸살로 뒤척이다
어느새 합쳐진 푸른 등짝을
해풍에 천연덕스레 말리고 있는 거나 아닐까
족제비 목도리
지하철 안에서
할머니 목에 두른 족제비 목도리
할머니는 점잖게 눈감고 계시고
족제비도 머리와 꼬리 동그랗게 맞댄 채
점잖게 눈감고 있다
두 손 무릎에 포개 얹고
가벼운 요동을
지그시 즐기고 계시는 할머니
목을 한겹 결코 조르지는 않게 감고서
무슨 포근한 꿈 꾸듯 또아리 틀고 있는 족제비는
글쎄 죽은 것 같지 않은 표정이다
어느 밤거리, 뒷골목이라도
한탕 멋지게 털고 다니는 꿈이라도 꾸는 걸까
입가엔 천복을 타고난다는 미소가 떠나지 않고 있다
지하철 안으로 추위에 절은 몸들이 꾸역꾸역 밀려든다
하루하루 내장을 채우기에도 급급한 몸들
체온을 나누려고 서로 밀착시켜온다
내장을 다 들어내고서야
불씨 하나를 품게 된 족제비
닭모가지 같은 껍질만 남은 목을
내장인 양 든든히 감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