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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지속불가능한 발전의 지속인가 생태적 전환인가
이필렬 李必烈
한국방송통신대 교수, 과학사. 에너지대안센터 대표. 저서로 『에너지 대안을 찾아서』 『석유시대, 언제까지 갈 것인가』 등이 있음. prlee@energyvision.org
1. 원자력발전, 끈질긴 근대적 욕망
작년 12월, 정부의 핵폐기장 건설계획을 좌절시킨 부안주민들이 그동안의 운동을 마무리하는 성격의 토론회를 열었다. 여기서 부안을 에너지 전환의 중심으로 만들자는 발표를 하던 나에게 뜻밖의 질문이 던져졌다. 원자력발전에 대한 나의 ‘모호한’ 입장에 대해 해명하라는 것이었다. 이는 그해 11월 원자력노조 대의원대회에서 행한 강연을 겨냥한 것으로, 질문에서 문제삼은 내용은 현재 건설중이거나 건설계획이 확정된 원자력발전소까지는 완공하자는 것이었다. 물론 이 제안의 무게중심은 원자력발전소의 확대가 아니라 숫자를 명확하게 하자는 데 있었다. 그럼으로써 마지막에 완공된 원자력발전소의 수명이 끝나는 2050년경에는 원자력발전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질문자에게 이 점은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원자력발전은 악한 것이고 우리 영혼을 상하게 하는 것이므로 무조건 반대해야 하는데 어떻게 원자력발전 확대에 동의하는 식의 말을 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과학기술을 나쁜 것과 좋은 것으로 구분할 때, 원자력발전이 나쁜 쪽에 속하는 것은 분명하다.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에서 가공할 파괴력을 보여준 원자폭탄의 후속 발명품으로서, 현세대뿐 아니라 수백 수천년 후의 후손에게까지 방사능의 해를 끼칠 수 있는 원자력발전이 좋은 과학기술에 속할 리는 없다. 그렇다면 원자력발전에 대해 반대입장을 견지하는 것이 마땅할 터인데, 현실은 무조건의 반대만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데 문제의 복잡성이 있다. 그것은 원자력발전이 이미 우리 일상생활에 너무 깊숙이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전기의 거의 절반이 원자력발전에서 생산되는 상황, 당장 원자력발전이 사라지면 우리 생활이 대부분 마비되는 이 상황이 문제를 대단히 어렵게 만드는 것이다. 물론 생태적 감수성이 강한 사람이라면 지금도 계속 쏟아지는 핵폐기물과 먼 훗날 그것을 감당해야 할 우리 후손을 생각할 때, 아니 그렇게 멀리 갈 필요 없이 체르노빌 사고로 각종 암에 걸려 고통받는 우끄라이나와 벨로루시의 어린이들만 생각해도 가슴속에 커다란 고통을 느낄 것이고, 원자력발전을 당장 없애야 한다는 마음이 들 것이다.
원자력발전소 옆에 있으면 영혼이 상한다는 생각은 원전 주변에서 사는 사람들과 후손에 대한 깊은 연민이 담긴 것으로서 경청할 만하다. 그렇다고 이러한 생각으로 반대만 한다고 해서 원자력발전을 없앨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스트리아나 덴마크와 같이 원자력발전을 시작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전국민적인 논쟁이 벌어지는 경우에는 그러한 견해가 호소력을 가질 수 있다. 이딸리아나 네덜란드처럼 원자력발전소가 서너 개 정도 돌아가는 경우에도 그러한 믿음에 기반한 반대운동이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이들 국가에서는 원자력발전이 일상생활에 깊이 침투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들 나라는 국민투표를 거쳐 원자력발전을 하지 않거나 폐쇄하기로 결정했다. 반면에 원자력발전이 전체 전기의 상당부분을 공급하고 국가경제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스웨덴과 독일에서는 오랜 논쟁을 통해 상세한 점진적 원자력 포기계획이 수립되고 이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짐으로써 원자력발전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었다.
지금은 정보통신기술이나 생명공학에 가려서 그 특징이 부각되지 않지만, 원자력발전은 근대의 양면을 아주 잘 드러내는 기술이다. 그것은 상대성이론과 핵분열 발견이라는 근대의 뛰어난 과학이론과 실험의 산물이자 자연에서 끊임없이 노다지를 캐내서 (또는 자연의 한계로부터 해방되어)유토피아를 만들겠다는 근대적 욕망의 산물이다.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가 『희망의 원리』에서 이제 인류가 원자력으로 시베리아와 사하라사막을 옥토로 만들 수 있게 되었다고 열광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에게 원자력발전은 근대를 완수할 수 있는 아주 적합한 도구로 여겨졌던 것이다. 원자력은 무한의 에너지를 공급할 것처럼 보였고, 자연의 한계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었다. 실제로 원자력발전은 전세계에서 막대한 양의 에너지를 생산하고 있고, 프랑스에서는 거의 모든 전기를 공급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원자력발전은 체르노빌이라는 인류역사상 최악의 사고와 처치불능의 핵폐기물도 쏟아냈다. 밝은 면에 가려져 있던 짙은 어둠이 드러난 것이다. 이렇게 근대 완수의 희망이 헛된 것임이 드러났지만 아직도 블로흐 식의 열광은 식지 않았다. 대상이 원자력이 아니라 다른 것으로 옮겨갔을 뿐이다. 원자력에 대한 블로흐의 기대가 헛된 것임이 판명되었는데도 인간배아복제, 생명공학, 유비쿼터스, 나노기술에 대해 많은 사람이 열광하는 것은 근대적 욕망이 얼마나 끈질긴 것인지를 보여준다.
2. 지속가능한 발전과 생태적 전환
전형적인 근대의 산물인 원자력발전은 근대가 극복되어야 하듯 극복되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경우 원자력발전에 너무 깊이 적응해버렸기 때문에 그것이 단순하게 폐쇄를 통해 극복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자칫 커다란 혼돈이 닥칠 수 있기 때문이다. 혼돈이란 전기공급의 혼란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원자력발전과 자신을 일치시키는 많은 사람들의 정신적 혼란, 방황, 원망도 포함하고, 원자력발전에 직간접적으로 영향받는 모든 사람과 체제를 포함한다. 그러므로 이들에 대한 배려와 기술적인 대안을 담은 비전을 제시하고 이 비전의 현실성을 증명하면서 원자력발전을 밀어내야만 극복이 이루어질 수 있다. 물론 원자력발전이 영혼을 병들게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바로 지금 모든 원자력발전소를 폐쇄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아닐지 모른다. 입장을 선명하게 밝히자는 표현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은 당장 원자력발전소를 폐쇄하자는 주장으로 들릴 위험이 있고, 사람들에 대한 설득을 더 어렵게 만듦으로써 원자력발전의 극복을 더 멀리 밀어놓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입장을 선명하게 밝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의 실현에 대한 고민은 더 중요한 것이다. 이 이야기는 물론 원자력발전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근대가 몰고 온 모든 어둠뿐만 아니라 근대 자체의 극복이 그러한 방식으로 추구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지향의 변혁을 통해 근대의 어둠에서 벗어나려 하든 생태주의를 통해 근대를 극복하려 하든 비전과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세심한 전략이 필요한 것이다.
1990년대부터 근대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비전의 하나로서 자주 언급되는 것이 지속가능한 발전이다. 지속가능한 발전이란 비전은 일종의 타협의 산물로 비판받기도 하지만, 타협이 반드시 바람직하지 않은 것만은 아니다. 타협이 불가피할 경우가 있고, 당사자들을 모두 배려하는 세심함의 표현으로서 나타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속가능한 발전 개념에는 남의 빈국과 북의 부국, 이들 국가 안의 빈자와 부자, 그리고 현세대와 후속세대를 모두 만족시키려는 의도가 들어 있다. 물론 당사자를 모두 만족시키기 위한 타협은 아무도 희생시키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자칫 어떤 실제적 결과도 낳지 못할 수 있다. 지속가능한 발전 개념이 비판받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고, 그런 까닭에 이 개념에 대해 여러 해석이 나오고, 발전이란 말을 제외하고 사용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1 그렇다고 지속가능한 발전이란 개념을 말장난 정도로 폄훼하거나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뒷받침하는 이데올로기 또는 발전에 방점이 찍힌 근대적 발전론의 변종일 뿐이라고 비판하는 것도 바람직하지는 않다.2 국제사회가 이 개념에 합의하고 지속가능성에 주목한 것 자체가 성취라면 성취라 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이 성취를 기반으로 좀더 분명한 비전을 퍼뜨리는 일도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지속가능한 발전이란 개념은 독일의 임업에서 비롯되었다. 이 개념은 산업혁명 초기 독일에서 철강제련을 위한 나무 사용이 크게 늘어나 숲이 줄어들자 숲을 유지하기 위해 지속가능한 삼림경제가 도입된 것에서 유래했다. 이러한 삼림경제로서 유명한 사례가 독일 지걸란트의 하우베르크 삼림경제(Sigerländer Haubergswirtschaft)인데, 여기서 채택한 방식은 새로 자라나는 만큼의 나무만 잘라내는 것이었다. 이곳에서의 지속가능성이란 아주 쉽게 눈에 잡히는 것으로, 이 원칙을 지키지 않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파탄이 오리라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다. 반면에 지속가능한 발전은 당대가 아니라 후손들에게 파탄이 닥칠 것이라는 전제에 기초한 것이기 때문에 피부에 호소하는 절박성이 없다. 그렇다 해도 지속가능한 발전이란 개념이 막연하게나마, 이대로 계속 가는 것은 불가능하거나 안된다는 생각을 널리 퍼뜨린 공은 인정해야 한다. 개념 자체를 통째로 비판함으로써 이 점까지 무시해서는 곤란한 것이다.
지속가능한 발전(개발)이란 아무래도 발전(개발)에 방점이 찍히는 것처럼 보이기 쉽다. 발전(개발)에 의해서 더이상 지속되기 어려운 현재의 위기상황에 도달했는데, 발전(개발)을 통해서 이 위기를 넘어설 수 있다는 모순의 희망을 퍼뜨리는 것이다.3 그러므로 지속가능한 발전은 근대극복의 비전으로는 적합하지 않다―이 개념을 처음 도입한 사람들이 근대극복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었는지에 상관없이. 그렇다고 발전이란 말이 제외된 지속가능성이나 지속가능한 사회라는 용어가 분명한 미래상을 제시하는 것도 아니다. 발전이 빠짐으로써 모순이 해결될 바탕이 마련되기는 했지만 지속가능성이 무엇이고 어떤 지속가능성인가 하는 의문은 해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근대극복의 비전으로서 지속가능한 사회의 성취보다 더 분명한 상을 제시하는 것은 ‘생태적 전환’이다. 현재의 경제성장과 소비주의에 기초한 세계 자본주의체제를 전환해야 한다는 점을 명확히하면서, 그 방향으로서 생태주의를 제시하기 때문이다. 세부 내용이 아직 제대로 모습을 갖추지 못했고 생태적 전환의 동조자들 사이에서도 내용에 대해 의견차이가 발생할 가능성이 많지만, 함축하는 바는 지속가능한 발전보다 훨씬 분명하다.
우리 사회에서 생태적 전환에 어느정도 동조하는 사람들의 성향은 대체로 세 가지로 분류될 수 있다. 하나는 주로 환경위기 현상에 주목하면서 위기를 일으키는 기업이나 정부 같은 행위자들을 비판하고 반대운동을 전개하는 데 힘을 쏟는 것이다. 또 하나는 자본주의 세계체제 속에서 끝없이 팽창하는 산업문명을 부정하고 소농중심의 평등사회를 실현하려는 것이다. 마지막은 근대의 성취를 일부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가운데 근대의 식량·에너지 수급방식과 주거·이동방식을 생태적이고 지속가능하게 만들려는 것이다. 이러한 세 가지 성향은 모두 생태적 전환이 근대극복의 담론과 실천전략으로 자리잡는 데 기여할 수 있다. 그러나 근대의 기획에 대항하여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으려면 대안적인 기획이 존재해야 하는데, 이에 비추어보면 첫번째 성향은 이러한 기획을 가지고 있지 않고, 두번째 성향은 전체의 변화에 대한 전망은 잘 드러나지 않는 작은 실천기획에 머무르고 있고, 세번째 성향은 전체에 대한 조망을 유지하면서 세부적인 실천을 추구하는 면을 보여주고 있다.
3. 실천담론으로서의 생태적 전환론
생태적 전환론은 아직 형성중인 담론이다. 생태적 전환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내용이 정교해질 터이지만, 그러는 가운데 근대의 성취에 대한 인정이나 실천전략을 둘러싸고 여러 갈래로 갈라질 수 있다. 그렇다 해도 생태적 전환은 파국을 향해 달려가는 근대를 극복할 수 있는 중요한 담론으로 자리잡을 것이다. 생태적 전환을 고려하지 않는 사회변혁 담론은 근대 비판이나 교정의 기능을 할 수는 있겠지만, 근대극복의 담론이 되기는 어렵다. 지금까지 세계체제나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인해 나타난 문제들, 특히 양극화에 대한 비판과 우려의 소리는 많이 나왔다. 세계화에 대항하는 포럼이 결성되고 이것을 중심으로 커다란 대항세력이 형성되기도 했다. 이경해(李京海)씨를 비롯하여 세계 곳곳에서 여러 사람이 장렬히 산화해가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대항은 대체로 사회주의적인 지향을 바탕으로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극복하자는 운동으로 나타날 뿐 근대의 과학기술에 기반한 산업생산체제의 극복에는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생태계 파괴와 에너지 고갈로 인해 머지않아 닥치게 될 파국에 대해서는 눈을 감아버리거나, 과학기술이라는 근대의 성취를 이용해서 파국을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근대가 초래한 생태위기와 에너지위기는 근대를 어느정도 교정한다고 해서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석유라는 현대문명의 혈액이 사라져가고 전지구적인 기후변화가 점점 더 큰 재난을 가져오는 이 상황은 현상유지(BAU, Business As Usual)에서 약간 방향을 튼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는다. 이들 위기는 현재의 생산과 소비 씨스템을 생태적으로 전환함으로써만 극복될 수 있다. 근대 세계체제가 가져올 결과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는 여기저기에서 꽤 크게 들린다. 월러스틴(I. Wallerstein)은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생지옥 상태’ 같은 종말기에 이미 접어들었다고 진단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우려는 그저 우려로 머무를 뿐 어떻게 하면 ‘생지옥’을 면할 수 있는가에 대한 답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답을 찾아내는 것이 대단히 어렵기 때문일 터인데, 우려와 경고도 ‘생지옥’에 대한 대비태세를 갖추도록 촉구하는 효과가 있다는 점에서 의미는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이 분석도구로서 아무리 탁월하다 해도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희망을 지닌 구체적 실천을 촉발할 수 없으므로 그 한계는 분명하다. 이는 분단체제극복에 대해서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분단체제론은 한반도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나 사태를 한반도 전체의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해주는 뛰어난 이론틀이다. 이 이론을 통해 세계체제의 주변에 속하는 한반도에서의 분단체제극복이 민중주도의 방식으로 이루어질 때 세계체제 변혁에 돌파구가 열릴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전망이 월러스틴 식의 암울한 미래로 달려가는 세계체제를 바꾸려 하는 개개인에게 구체적인 실천방향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이러한 전망은 분단체제극복이 세계사적으로도 상당히 의미있는 것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한반도 통일에 대한 의지를 고양시킬 수는 있을 것이다. 그렇다 해도 구체적인 실천을 추동하는 힘으로 작용하기는 어렵다. 우리가 분단체제론을 구체적 현실에 적용해서 실천의 돌파구를 찾으려 할 때 막막한 심정이 드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생태적 전환 담론은 사회과학적인 분석도구로서의 유용성은 거의 없다. 이 점에서는 세계체제론이 월등하게 앞서 있다. 반면에 근대극복의 실천담론으로서는 생태적 전환론이 세계체제론보다 우위에 있다. 지역의 재생가능에너지에 기반한 에너지 수급체제 전환, 지역중심의 식량생산, 에너지와 자원 소비를 가능한 한 적게 유지하는 주거와 이동 씨스템으로의 전환은 이미 실천의 구체적인 상을 제시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실천은 한 지역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실천의 단위는 개인이나 지역공동체지만 그 범위는 남한이라는 국가를 넘어 한반도, 동북아, 전세계로 확대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반도에서의 생태적 전환 또한 단순히 개인의 생태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을 뛰어넘어 남북한을 아우르는 분단체제극복의 실천담론이 될 수 있다.
남북한의 정부나 민간차원 교류와 각종 북한 지원사업은 북한의 파국적인 붕괴를 방지하고 북한을 대화상대로 변화시킴으로써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에 기여하고, 더 나아가서는 한반도의 분단체제 해소와 동북아의 평화구축에 기여하는 면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교류와 지원을 통해 한반도 통일이 조금씩 가까이 다가오고 한반도 평화의 기반이 단단해질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변화와 통일이 “민중의 참여가 최대한으로 실현되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는 데에도 이견이 있을 수 없다.4 민중의 참여가 커질수록 이 힘에 의해 당국자간의 합의나 정책집행자의 선의가 왜곡되거나 훼손될 가능성이 적어질 것이고, 이러한 광범위한 민중의 참여를 통해 이루어지는 변화만이 궁극적으로 동북아와 나아가서는 세계의 평화를 이끌어내는 기반으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민중의 참여가 최대로 실현된다 해도 그것이 어떤 목표를 지향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지금까지의 대북 민간지원은 단순히 식량이나 의약품 등을 지원하는 형태로 진행되어왔다. 어떤 뚜렷한 기획 아래에서 이루어지지 못한 채, 헐벗고 굶주리기 때문에 도와야 한다는 인도적 차원의 지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숲 조성사업이나 건축 지원, 공장건설처럼 지속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주는 사업도 한반도의 미래상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지 않다. 박정희시대의 조림사업과 마찬가지로 산이 헐벗었기 때문에 나무로 덮는다든가 탁아소 건물이 부실하므로 건축자재를 지원한다든가 지원받은 식량을 먹기 쉽게 가공하기 위해 빵공장이나 국수공장을 건설해준다는 수준을 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결과는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다. 공장은 전기공급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 수시로 멈추고, 건물은 비바람은 막아주지만 추운 겨울 난방문제는 해결해주지 못한다. 남한에서 공장을 짓고 건물을 세우듯이 문제에 접근하기 때문인데, 이때 생태적 전환에 대해 조금이라도 고려한다면 사정은 달라질 것이다. 외국에서 에너지가 공급되지 않아도 전력을 자급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공장이 설계될 것이고, 겉모습이 아니라 단열이 최우선으로 고려된 건물이 지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북한 지원, 특히 민간차원의 지원은 한반도의 생태적 전환이라는 기획 속에서 진행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이는 또한 북한과 사정이 비슷했던 꾸바의 현상황을 고려할 때 현실성있는 것이기도 하다. 북한과 꾸바는 1990년대초 소련 붕괴 후 비슷한 위기를 맞았다. 가장 중요한 에너지원인 석유의 공급이 끊기다시피 한 것인데, 이로 인한 위기는 중국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던 북한보다 꾸바의 경우가 더 심했다. 물론 꾸바가 북한보다 훨씬 따뜻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추위에 떨다 죽는 일은 없었지만, 석유종속형이던 꾸바의 식량 생산과 수입은 절반 수준으로 떨어졌고, 일인당 칼로리 섭취도 소련 붕괴 전의 2900칼로리에서 1850칼로리로 줄어들었다. 그러나 꾸바는 미국의 경제제재가 더 강화된 상황에서도 세계은행이나 국제통화기금을 비롯한 외부의 도움을 받지 않고, 그리고 이들 기구가 흔히 제시하는 처방과는 정반대의 생태적 전환 기획을 통해 이 위기를 극복했다. 석유종속에서 벗어나 유기농으로 전환하면서 식량생산도 위기 이전의 90% 수준을 회복했다.5
꾸바는 소농과 도시농업으로 농업을 재편하고 유기농으로 전환함으로써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반면에 북한은 기존의 식량·에너지 수급체제를 고수함으로써 파국을 맞았다. 그러나 꾸바의 사례는 북한에서도 생태적인 전환이 가능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꾸바의 사례는 또한 남한의 대북지원도 인도적 차원의 지원을 넘어서 북한의 생태적 전환을 염두에 둔 기획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을 보여준다.이러한 기획 속에서 동북아의 생태적인 지속가능성까지 바라보면서 민중의 참여를 북돋을 수 있는 방법으로 민중주도의 에너지전환운동을 생각할 수 있다. 동북아에서 정부간 협력을 통해 에너지전환이 일어나는 것은 기대하기 어렵다. 동북아 에너지의 현주소는 중국의 급증하는 석유소비, 아프리카·남미·중앙아시아 등지에서의 동북아 국가들의 석유개발, 시베리아 가스와 석유를 차지하려는 경쟁, 원자력발전의 확대라 할 수 있다. 협력보다는 갈등으로 갈 가능성이 큰데, 설혹 국가간 에너지 협력이 요행히 이루어진다 해도 이 협력은 화석에너지와 원자력의 차원을 넘지 못할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북한에 대한 민간 재생가능에너지 지원이 큰 의미를 지닌다. 민중의 참여에 의해 북한에서 민간 재생가능에너지가 꽃피게 되면, 이것이 한반도와 동북아의 생태적 전환의 싹으로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6
4. 생태적 전환과 박정희 패러다임
현재 우리 사회에서 생태적 전환이 필요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가능하다고 보는 사람은 더욱 적을 것이다. 그것은 박정희시대의 경제성장 이데올로기가 아직도 기승을 부리고 있기 때문일 터인데, 이 점에서도 박정희시대는 철저하게 해부되고 비판될 필요가 있다. 박정희시대는 독재와 경제성장의 시대였다. 이 시기의 독재에 대한 평가는 부정적인 것이 대부분이다. 반면에 경제성장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가 우세하다. 만일 이미 오래전에 이런 식의 평가를 통해 박정희시대가 정리되었다면, 지금 우리 사회에서 박정희시대가 큰 쟁점이 될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 개발과 경제성장에 대한 요구는 다른 어떤 것보다 우선하며, 따라서 높은 성장이 지속되었던 박정희시대에 대한 향수도 클 수밖에 없고 평가의 중심도 그 시기의 경제성장에 놓일 수밖에 없다. 박정희 독재뿐 아니라 민주화운동까지 경제성장과의 연관 속에서 평가하려는 시도가 나오는 것도 그 때문이다.
박정희시대는 독재를 통한 ‘지속불가능한 발전’의 시대였다.7민주화운동은 독재에는 종지부를 찍었지만 ‘지속불가능한 발전’에는 마침표를 찍지 않았다. 만일 우리 사회가 민주화 이후에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갔다면 박정희시대에 대한 평가도 다른 방향에서 이루어졌을 것이다. 우리가 그 시대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어느정도라도 방향전환을 한 상태라면, 박정희시대에 대한 평가는 단지 그후의 전개에 어떤 면에서 해가 되고 어떤 면에서 도움이 되는지를 중심으로 이루어질 것이다.‘지속불가능한 발전’은 민주화 후에도 계속되고 있다. 독재가 무너진 지 20년이 된 지금도 여전히 국가의 주요목표는 도달 불가능한 ‘지속가능한 성장’이다. 박정희 독재를 극복한 민주화운동세력도 대부분 ‘지속불가능한 발전’의 일꾼으로 편입되어 그 일에 매진하고 있고, 이로 인해 다시 박정희의 그늘 속으로 점점 더 빨려들어가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성장률의 폭에서 박정희를 결코 따라잡을 수 없기 때문에 점점 왜소해져가고 있고, 그 결과 박정희시대와의 섣부른 화해 시도도 종종 나타나고 있다.
‘지속불가능한 발전’이 지속불가능하다는 것이 드러난다면 당연히 지속가능한 쪽으로 방향전환을 해야 한다. 그리고 ‘지속불가능한 발전’이 전환 이후의 전개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를 놓고 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 생태적 전환 쪽으로 방향이 잡힌다면 그것이 전환의 전제로서 작용하는지 단지 장애물로 존재하는 것인지 따져야 하는 것이다. 지속가능한 쪽으로의 방향전환과 관련하여 권력을 쥔 민주화운동세력은 지금 무엇 하나 제대로 내세울 수 있는 것이 없다. 난개발, 골프장, 원자력발전 확대, 대규모 간척, 대형댐 건설, 자동차만을 위한 도로건설, 농업의 경시 등 모두 박정희시대의 ‘지속불가능한 발전’을 지속시킨 것뿐이다. 박정희시대와 다른 점이라면 독재를 통한 ‘지속불가능한 발전’이 민주주의 속에서의 ‘지속불가능한 발전’으로 바뀐 것이다.
박정희의 ‘지속불가능한 발전’을 생태적 전환의 걸림돌로 봐야 할지 전환으로 나아가기 위해 거쳐야 할 단계로 봐야 할지 판단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다른 나라의 사례를 살펴보면서 어느정도 참고할 만한 것을 얻어낼 수밖에 없는데, 참고사례로는 에너지저소비 유기농 소농사회로 전환한 꾸바나 유기농 재생가능에너지 사회로 전환중인 오스트리아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두 나라 모두 에너지다소비의 ‘지속불가능한 발전’ 단계를 거친 셈인데, 이 점을 고려하면 박정희시대의 ‘지속불가능한 발전’도 생태적 전환으로 가기 위해 거쳐야 할 단계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제대로 된 판단은 다양한 역사적 사례와 현상황에 대한 세심한 분석을 통해서나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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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적 전환이란 비전을 사람들이 앞으로 얼마나 받아들일 것인지, 한반도에서 생태적 전환에 대한 희망을 가져도 되는지 나는 섣불리 예감할 수가 없다. 『희망의 한반도 프로젝트』(창비 2005)를 저술한 김석철(金錫澈) 교수처럼 한반도와 중국을 놓고 대규모 공간재편 계획을 통해 변화를 추구하는 경우는 정부의 태도가 모든 것을 좌우한다. 정부에서 받아들이기만 하면 계획은 성사된다. 정부를 설득하는 데 모든 희망을 걸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생태적 전환은 민중 대다수가 그것의 중요성을 깨닫고 실천에 나서야만 성취될 수 있다. 위에서 내려오는 커다란 구상보다 훨씬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만 하는 것이다. 현재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정서를 생각하면 생태적 전환이 불가능할 것 같다는 회의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그래도 희망을 잃지 않으려면 작은 실천이나마 계속하는 수밖에 없는데, 희망이란 독일의 음유시인 볼프 비어만(Wolf Biermann)이 「멜랑콜리」(Melancholie)에서 노래하듯 아슬아슬한 것이기 때문이다.
희망을 떠드는 자는 거짓말쟁이, 하지만 희망을 죽이는 자는 개자식.
(Wer Hoffnung predigt, der lügt, doch wer Hoffnung tötet, ist ein Schweinehu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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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부 차원에서 지속가능한 발전 대신 지속가능성이란 개념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는데, 독일의 수상 직속 위원회의 이름은 지속가능성위원회(Nachhaltigkeitsrat)이다. 이러한 이름이 붙여진 것은 바로 지속가능한 발전이란 개념의 모호성 때문이다.↩
- 지속가능한 발전의 이데올로기적 성격에 대해서는, 강국주 「‘발전·개발’ 논리에 대한 의문」, 『녹색평론』 2005년 7·8월호 참조.↩
- 지속가능한 발전의 모순에 대한 가장 적절한 표현은 엘마 알트파터(Elma Altvater)의 ‘영구운동기관을 만들기 위한 시도’일 것이다.↩
- 백낙청 「한반도의 2002년」, 『창작과비평』 2002년 봄호.↩
- Dale Allen Pfeiffer, “Drawing Lessons from Experience; The Agricultural Crises in North Korea and Cuba,” Part 2, www.fromthewilderness.com.↩
- 미국과 남한 정부 주도의 북한 에너지 지원사업체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에 지원 예정이던 돈과 전력망 복구에 들어갈 돈은 10조원이 넘는다. 이 돈을 풍력발전기 건설에 투입하면 5천개 이상의 발전기를 세울 수 있고, 여기서 생산되는 전력의 양도 KEDO를 통해 건설 예정이던 원전 두 개에서 생산될 전력의 양과 같다. 이 사실은 동일한 비용을 가지고도 우리가 어떤 기획을 가지고 접근하느냐에 따라 크게 다른 구조가 만들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5천개 이상의 풍력발전기 건설은 민간부문이 적극 참여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는 사업이다.↩
- 백낙청 「박정희시대를 어떻게 생각할까」, 『창작과비평』 2005년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