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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김도언 金度言

1972년 충남 금산 출생. 1998년 대전일보 신춘문예, 199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 소설집 『철제계단이 있는 천변 풍경』이 있음. drybook@hanmail.net

 

 

 

고통의 관리

악취미들8

 

 

다음은 14년 전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후 네 권의 소설집과 다섯 권의 장편소설을 펴낸 올해 39세의 중견소설가 박성호가 고등학교 동창을 만나 술을 마시고 집에 돌아온 직후 주변 지인들과 가진 전화통화의 내역이다. 그는 서울 신촌 연대 앞의 돼지껍데기집에서 저녁 일곱시쯤 근 20년 만에 연락이 닿은 고등학교 동창을 만나, 함께 삼겹살 3인분을 시켜 소주 세 병과 맥주 세 병을 나눠 마시고는 열시 반쯤 헤어져 집에 들어왔다. 그는 집에 들어오는 길에 동네 편의점 미니스탑에 들러 참이슬 소주 두 병과 레종 담배 한 갑을 샀다―작가 주.

 

첫번째 전화, 발신 23:06

아, 저 성호예요. 네, 잘 지내시죠? 네네, 선배, 술 한잔 먹었어요. 많이는 안 마시고 정말 딱 한잔 마셨어요. 아유, 왜긴요, 선배 목소리 듣고 싶어 전화한 거죠. 선배 본 지도 꽤 됐고요. 그래 선배 어떻게 지내세요? 네, 다행이다. 그래도 다들 안녕하다니까. 선배 하는 일도 잘된다니까 참 기쁘네요. 요즘처럼 어려울 때는 뭐, 안정적인 직장, 안정적인 수입이 최고인 것 같아요. 별일은 없죠? 아, 그런데 난 선배 생각만 하면 너무 속이 상해요. 선배가 시를 놓지 않고 계속 썼으면 좋은 시인이 됐을 텐데…… (소주 한잔을 비운다.) 아휴, 괜히 하는 소리가 아니에요. 저는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제가 요즘 시인들 시를 가끔 보지만 그게 어디 시예요? 선배가 예전에 시를 쓰던 때에 비하면 요즘 애들은 진정성도 없고…… 지금 술 마시고 있냐구요? 네, 그냥 밖에서 마시다가 집에 와서 가볍게 한잔 더 하고 있어요. 걱정 마세요. 취하도록 마시지는 않을게요. 네? 네, 누구요? 휘연 어미요? 아유 그 사람 얘긴 하지 말아요. 이미 깨끗이 정리가 됐어요. 정말 그렇다니까요. 전화 같은 것도 안해요. 아까 하던 얘길 하자면…… 저 말이에요, 선배 시 참 좋아했어요. 하하, 그럼요. 지금도 외울 수 있는 시도 있어요. 그거 있잖아요. 침묵을 인양하는 어둠의 영혼아, 어쩌고 하는 시. 그 시 제목이 ‘옐로 써브머린 까페’던가. 아, 아니구나. 아아, 맞어 맞어.‘고통의 관리’였어. 햐, 고통의 관리라는 말은 지금 생각해도 너무 근사해요. 정말 내가 지금 고통의 관리가 필요한데. 크큭 아무튼, 네네, 아무튼 저 선배 시 참 좋아했어요. 네네, 네 아 그래요, 다른 전화 왔으면 그것부터 받으세요. 네네, 전화 받으세요. 통화 끝나면 전화 좀 주세요.(소주 한잔을 비운다.)

 

두번째 전화, 발신 23:15

성규야, 형이다. 그래, 그동안 잘 지냈니? 응 그래, 술 한잔 먹었다. 응 날씨 엄청 더워졌지? 휴, 오늘도 너무 더워서 가만히 앉아 있어도 땀이 흐르더라. 네 얼굴 본 지도 꽤 됐네. 같은 서울 하늘 아래 살면서 정말 얼굴 보기 힘드네. 어머니한테는 전화 자주 드리니? 양평동 누나한테도? 응? 그래 전화 자주 드려. 형은 그렇게 못하지만 너라도 자주 드리라고, 알겠지? (소주 한잔을 비운다.) 응? 응 글 계속 쓰고 있어. 형이 하는 일이 글쓰는 일인데 그럼…… 응? 술? 그래 술 줄여야지. 응 술 줄여야 해. 그래 줄여야지. 그런 건 걱정하지 마. 난 아버지처럼 되지는 않을 거야. 자식, 그래 그래, 네가 내 걱정 해주는 건 고맙지. 응, 그래 네가 내 걱정을 다 하고. 흐흐. 이렇게 늦은 시간에…… 음 벌써 열한시가 넘었네. 아무튼 늦은 시간에 전화해서 정말 미안해. 너 내일 출근해야 할 텐데. 그래도 니 목소리 한번 듣고 싶어서 전화한 거야. 그래 잘 지내고 응 또 연락하마, 참참, 성규야…… 아직 끊지 마. 응응. 성규야, 내가 이런 얘기 하는 게 좀 뜬금없겠지만…… 나 말야,(소주 한잔을 비운다.) 널 정말로 좋아해. 내 동생 성규를 말이야. 너도 내 마음 알지? 널 참 좋아해. 성규야, 제수씨한테도 안부 꼭 전하고. 무엇보다 제수씨한테 잘해야 돼 인마. 알았지? 그리고 어려운 일 있으면 형한테 전화해서 알리고 말야. 그래, 잘 지내. 이만 끊자. 그래그래, 술은 더 안 마실게.

 

세번째 전화, 발신 23:20

어머니, 네 성호예요. 네 잘 지내시죠? 주무셨어요? 어디 편찮으신 데는 없고요? 교회는 잘 다니시죠? 아, 저도 잘 나가요. 일요일 아니 주일마다 꼭 가요. 목사님한테도 종종 인사하고요. 걱정 마세요. 네네, 어머니 죄송해요. 제가 전화도 자주 못 드리고. 네 술도 줄여야죠. 성규도 그 말을 하던데, 하하, 어머니도 내 걱정을 하고 성규도 내 걱정을 하고, 이제 제 나이도 서른하고도 아홉인데, 하하 저는 계속 걱정만 끼쳐드리네요. 네 어머니,네네, 주무셔야죠. 네, 참 어머니, 제가 매달 50만원씩 용돈 부쳐드리고 있잖아요. 그거 통장으로 잘 들어가고 있죠? 네, 그거요. 어머니께 용돈 드리는 거요. 나 정말 생색내고 싶지 않은데, 그거 결코 쉬운 일 아니에요. 어머니도 아시죠? 네, 저도 최선을 다하고 있는 거라고요. 아버지 돌아가시고, 어머니 적적하신데…… 아무튼 제가 정말 죄송해요. 네, 성미누나도 성규도 다 잘 있어요. 제가 한번 다 데리고 뵈러 갈게요. 네네, 이번 주말에라도 한번 내려갈까요? 난 내려갈 수 있는데, 성규랑 성미누나가 워낙 바쁘니 네네, 술 많이 안 마실 거라니까요. 네 어머니 죄송해요. 하지만 걱정 마세요. 모든 게 다 잘될 거예요. 성미누나도 괜찮아질 거예요. 그래요,어머니, 얼른 주무세요. 네? 알았어요. 저도 지금 잘게요. 아휴, 걱정 마세요.

 

네번째 전화, 발신 23:25

선배, 네, 저 또 성호예요. 아 전화통화 끝나셨나보구나. 에이 그럼 전활 좀 해주시지. 네, 선배 전화 기다리다 못해 제가 한 거예요. 아까 무슨 말 하다 끊어졌죠? 네네, 아, 선배 시 얘기했었구나. 고통의 관리,하하, 난 정말 고통의 관리라는 말이 너무 마음에 들어요. 네네, 아 정말 선배 시는 대단했어요. 술요. 지금도 마시고 있죠.(소주 한잔을 마신다.) 네? 에이 선배 걱정 말아요. 아유 안 죽어요. 안 죽어. 선배도 나이 들었구나. 우리 예전에 어땠어요. 선배도 잘 알잖아요. 내가 누구예요. 박성호 아니에요, 박성호. 아 아, 선배 생각나죠? 우리 왜 거기 후문 쪽 야산에서 막걸리를 밤새 마시고 그대로 잠들었다가 다음날 깼을 때 벚꽃이 서럽도록 환하게 피어 있었잖아, 눈앞에. 그때 기억 안 나요? 하하, 선배 그때도 벚꽃잎에 취해서 무언가를 노트에 썼던 것 같은데, 그런데 그런 선배가 지금, 구청 과장님이라니. 하하, 선배 그때가 참 좋았죠? 그죠? 아, 씨팔 그런데 어느새 이렇게 나이를 먹다니. 정말, 정말 믿기지가 않아. 아 씨팔. 그땐 나 정말 순수했는데 말이에요. 나 말이에요. 참 순수했어요. 그죠? 참, 선배 내 동기 정태 알죠? 걔가 이번에 ○○대학 전임 된 거 아시죠? 아 선배도 아시는구나. 그래 그 소식을 모르는 사람이 없겠지. 네네, 뭐, 축하할 일이죠. 정태 착실한 친구니까요. 하지만 선배 그 새끼가, 교수된 그 새끼가 행복할까요? 선배 그렇게 사는 게 행복한 일이에요? 씨발, 네네, 그래요. 축하할 일이긴 하죠. 그래요 정태도 고생했겠죠. 네네 교수들 밑구멍 빨아대느라 열라 고생했겠죠. 네네, 미안해요. 하지만 사실이 그렇잖아요. 어떻게 그런 이기적이고 약삭빠른 새끼들이 그렇게 출세를 하느냐구요. 네? 네네 그래요. 술 그만 마시고 잘게요. 그래요 선배도 주무세요. 그래요, 내일 출근하셔야 하는데 제가 공연히. 선배 그거 알죠? 제가 선배 정말로 좋아하고 있다는 거, 정말 좋아한다는 거…… 아시죠? 선배가 그거 모르면 정말 섭섭해요. 선배 그래요, 자요. 고마워요. 아 정태 그 새끼 씨발……

 

다섯번째 전화, 발신 23:42

여보세요. 희수씨? 응, 나 누군지 알겠어? 나 박성호야. 그래 박성호. 좀 놀랐지? 전화하기엔 너무 늦은 시간인가. 응응 그래. 아, 무슨 일이냐고? 다른 게 아니고, 희수씨가 이번에 『○○문학』에 발표한 소설 봤어. 응 참 좋더라. 등단하고 2년밖에 안된 신인작가가 어떻게 그렇게 명민한 소설, 완성도 높은 소설을 쓸 수 있지? 응응, 그래 그 말 해주려고 전화한 거야. 흐흐 언제지, ○○출판사 망년회에서 만났을 때였나? 그래 맞지? 그래 내가 기억력은 괜찮은 편이야. 내가 그날 희수씨한테 말했지? 신인은 모든 걸 다 갈아엎겠다는 패기만 있으면 된다고. 그런데 이번 소설에서는 그런 패기가 느껴지더라고. 고맙긴 뭘. 별소릴 다 하네. 그런데, 말야. 희수씨는 생긴 거는 참 고운데 어디서 그런 강렬한 이미지들이 나올까. 정말 신기해. 난 그날 희수씨를 처음 보던 날 사실, 음, 처음 하는 얘긴데, 정갈한 매화나무를 계속 떠올렸어. 눈 속에서도 도도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는 매화나무. 에유 부끄러워하긴. 그런데, 참 결혼은 안했다고 했지? 남자친구는 있어? 내가 지금 사생활을 너무 궁금해하고 있는 건가. 하하 미안 미안, 이거 실수가 이만저만이 아닌데, 하하 미안 미안, 나 그렇게 더티한 사람 아니야, 문단 사람에게 물어봐. 박성호 하면 다들 인간성 하나는 알아준다고.(소주 한잔을 마신다.) 아휴, 그래, 그래 또 들켰네. 내가 지금 술을 좀 먹었어. 그래, 『○○문학』에 희수씨가 발표한 소설이 생각나서 전화한 거야. 응 내가 말했잖아. 신인은 모든 걸 다 갈아엎어야 한다니까. 응, 지금 스물일곱인가? 그래, 열심히 써. 그리고 말야, 언제 한번 만났으면 싶은데, 내가 빌려주고 싶은 책도 있고. 또 전해줄 말도 있고 말야. 그리고 희수씨, 이건 내가 특별히 당부하는 건데, 만나자고 하는 사람 아무나 만나지 마. 문단에서는 사람을 잘 만나야 해. 사람을 가리면서 만나야 한다고. 내 말 명심하고. 그래 잘 자. 미안해 희수씨. 응, 선배로서 그냥 전화 한통 한 거야. 괜찮은 거지? 그래 내가 계속 지켜보고 도울 수 있는 일 있으면 도울게. 응, 희수씨도 이제 슬슬 작품집 낼 준비해야 하잖아. 내가 문예지 편집장들도 많이 알거든. 그러니, 걱정은 하지 마. 그냥 소설만 열심히 써. 응응. 그래 잘 자.(소주 한잔을 마신다.)

 

여섯번째 전화, 발신 23:56

성규야, 형이야. 자냐? 응 그래, 내가 또 전화를 했네. 미안해. 응 다른 게 아니고 말야. 응? 술은 다 마셨어. 응. 지금은 안 마셔. 조금 전에 어머니랑 통화했어. 응 잘 계시더라. 걱정하지 마. 내가 통화했으니까, 너 어머니 걱정하지 말고 편히 자. 응 어머니랑 통화했다니까. 내가 했단 말야. 응 잘 계셔. 걱정하지 마. 그리고 꼭 제수씨에게 안부 전하고. 알았지? 그리고 우리 한번 보자. 응응? 형젠데 만난 지가 너무 오래됐잖아. 지난번 아버지 기일에 본 게 마지막이었던가? 응? 그래 그래야지. 내 걱정은 하지 마. 내 걱정은 하지 말라니까. 난 소설가야. 그래도 제법 알아주는 소설가라고. 그래, 성규야, 일 착실히 잘하고, 제수씨한테도 잘해주고. 꼭 안부 전해. 그리고 곧 태어날 조카한테도 잘해. 알았지? 넌 나처럼 살면 안돼. 응 술? 정말 다 마셨어. 지금은 안 마신다니까. 그래, 술 줄일게. 그래, 걱정하지 마, 내가 조금 전에 어머니랑 통화했어. 응, 어머니 괜찮으셔, 잘 지내셔. 그래, 응응 끊을게. 잘 자. 그래.(소주 한잔을 마신다.)

 

일곱번째 전화, 발신 00:11

선생님 안녕하세요. 아 선생님께서 직접 전화를 받으시네요. 선생님, 저, 성호예요. 소설 쓰는 박성호요. 박성호, 네? 박성호라니까요. 박, 성,호. 네 아 이제야 알아들으셨네요. 네, 너무 늦은 시간에 전화를 드렸죠. 선생님, 죄송해요. 네네, 그냥, 선생님께 간곡하게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네, 아, 그냥 뭐 심각한 건 아니고요. 저는 요즘 문학판이 너무 어수선하고, 네네, 다들 문학의 미래가 어렵다 어렵다 하고, 소설가들이 써내는 소설은 맛이 간 지 오래고, 네 그래서 너무 답답해서, 네네, 그래서 전화를 드렸어요. 죄송해요. 시간이 너무 늦었는데 선생님 괴롭히는 것 같아서. 그래도 선생님께 전화를 드리면 뭔가 좀 답답한 마음이 풀릴 것 같아서…… 선생님 제 마음 아시죠? 네네. 아유, 선생님은 왜 저를 늘 혼내기만 하세요. 선생님은 저를 당선시켜서 문단에 내보내주신 분이잖아요. 선생님 아니었으면 제가 어떻게 작가라는 이름을 얻었겠어요. 저는 단 한순간도 선생님의 은혜를 잊은 적이 없어요. 네 선생님, 선생님께서 저를 조금만 더 도와주셨더라면 저도 더 좋은 작가가 됐을 텐데요. 네네, 아뇨. 섭섭하다는 말이 아니고요. 네네, 아무튼 저는 선생님, 선생님 같은 분이 계시니까, 아직 우리 한국문학에 희망을 가지고 있어요. 선생님은 정말 어른이시니까, 어수선한 분위기를 바로잡아주셔야 하는데요. 선생님 같은 문단의 어른들께서 해주실 수 있는 일이 그런 거잖아요. 하하, 네 선생님, 술이야 뭐 먹을 때도 있고 안 먹을 때도 있죠. 연전에 제가 선생님이 쓰신 평론으로 호되게 매를 맞은 뒤부터는 참, 선생님께 전화 한통 드리는 것도 어렵고, 네 어렵다기보다는 송구스럽구 뭐 그래서요. 네네, 술 몇잔 마시고 용기내서 전화드리는 거예요. 선생님, 저를 포기하지 마시고요. 꼭 좀 지켜봐주세요. 저, 정말 괜찮은 작가예요. 네네, 아, 정말이에요. 네 선생님, 그래요. 네, 그래요, 알겠습니다. 그럼 주무시고요. 제가요, 다음주에 선생님 꼭 한번 찾아뵐게요. 꼭요. 아셨죠? 선생님 꼭 건강하셔야 해요.(소주 한잔을 마신다.)

 

여덟번째 전화, 발신 00:34

종규야, 나야, 성호, 응 잘 들어왔어. 그래 너무 늦었지? 응, 그래 오늘 말야, 너 만나서 너무 반가웠어. 응 지갑을 펴보았다가 네 명함이 있길래, 전화번호가 맞는지 안 맞는지 전화 한번 해본 거야. 하하 그래, 나 너 못 믿거든. 하하하.(소주 한잔을 마신다.) 그런데 어떻게 20년 만에 연락이 닿냐. 그러게, 나도 아까 낮에 네 전화 받고 놀랐어. 응, 그래 내가 뭐 신문에도 가끔 글을 쓰고 그러니까, 그동안 연락이 없던 동창들한테서 간혹 전화가 오기는 해. 응, 그래 고맙지, 참 신기해. 동창들을 그렇게 만나면, 나만 다른 세계에 들어와 있는 것 같고, 너희들은 하나도 변한 게 없는데 말야. 아무튼 종규 오늘 너무 반가웠어. 내가 술값을 냈어야 하는데, 미안해. 다음엔 내가 꼭 살게. 그럼, 정말이지. 그런데 너 말야, 소설가라는 게 얼마나 힘든 직업인지 알고 있어? 넌 짐작도 못할 거야. 뭐 어딜 가나 선생님 선생님, 이런 소릴 들으니까, 제법 폼나는 직업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소설가들한테는 이 세계에 대한, 이 시대에 대한 막중한 책무가 있단 말야. 현실이 은폐하고 있는 진실을 캐내서 보여줘야 하는 게 소설가라는 존재란 말야. 너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아듣겠냐? 응, 그래, 글쓰는 일이 보통 힘든 게 아니지. 응, 보통사람은 정말 상상하기 힘든 정신적, 지적 노동을 하는 거란 말야. 소설은 결코 아무나 쓰는 게 아냐. 그런데 말야. 종규야. 니가 내 친구라서 하는 말인데, 응? 아냐, 술은 아까 거기서 너랑 먹은 게 다야. 응응, 아무튼 종규야. 니가 내 친구라서 하는 말인데, 응. 소설가라고 다 같은 소설가가 아니다. 무슨 말이냐고? 어떤 소설가들은 작가랍시고 하는 일이 여자랑 오입하는 게 전부인 새끼가 있고, 어떤 새끼는 돈 많은 출판사 사장이랑 평론가들한테 알랑방귀 뀌어서 책 팔아먹는 데 혈안이 되어 있는 새끼도 있어. 그런 타락한 소설가들도 있다는 거야. 그런데 난 말야, 소설가는, 작가는 그 시대의 마지막 양심이라고 생각해. 씨팔, 그런데 정말 근본도 되어먹지 않은 새끼들이 너무 많아. 난 이날 이때까지 평론가니 선생이니 하는 사람들한테 전화 한통 한 적이 없어.(비분강개한 표정으로 소주 한잔을 마신다.) 종규야, 씨팔, 아무튼 소설가는 정신적으로 순결하고 고독해야 하는 거야. 알겠니? 아 미안해. 내가 너무 흥분을 했지. 그래, 이해해줘서 고맙다. 응, 그래, 고마워. 응, 네 말 들으니까 힘이 난다. 그래, 나 말야. 너의 자랑스러운 친구가 될게. 응, 그래 잘 자라, 종규야.

 

아홉번째 전화, 발신 00:52

누나, 응 성미누나 핸드폰 맞지? 흐흐, 나 성호야. 누나 동생 성호. 난 이게 좋다니까. 이렇게 몇개월 만에 전화를 해도 누나가 전화를 받으니까 정말 좋네. 정말 누나는 언제나 한결같아서 너무 좋아. 무슨 일이냐고? 그냥 했어. 그냥 했어. 그냥 전화한 거야. 누나 생각나서 그냥 전화한 거라고. 아직 가게 문은 안 닫았지? 응? 손님 지금도 있어? 그래, 응, 없는 손님 기다리지 말고 그냥 문 닫고 일찍 자. 그래 누나, 얼마나 피곤할까. 미안해. 누나 사는 걸 보면 내가 정말 미안해. 난 가끔 생각해. 누나가 지금까지 튀겨낸 닭이 전부 몇마리나 될까. 후후, 끔찍한 얘기라고? 한 5천 마리 될까. 응, 그래 술 한잔 먹었어. 씨팔 소설가가 술 한잔 먹을 수도 있지 뭘 그래. 응응, 아니야, 뭐 별다른 일이 있는 건 아니고, 응응. 에이 누나까지 잔소리를 하면 내가 정말 슬프지. 그냥 마셨어. 응, 오늘 말야, 성규랑도 통화하고, 어머니랑도 통화했어. 응 다들 잘 있어. 응 어머니는 뭐 워낙 말수가 없는 양반이니까. 응 그래도 아무 일 없이 건강하신 것 같았어. 그런데 말야, 엄마는 아직도 교회 타령이야. 오늘도 나보고는 대뜸 하시는 말씀이 교회에 잘 다니고 있느냐는 거야. 아휴, 그냥 그 양반 신경 쓰이게 하기 싫어서 거짓말했지. 일요일마다 빠짐없이 나간다고. 후후, 그러게 말야.(소주 한잔을 마신다.) 누나, 그런데 매형은 지금도 집에 안 들어왔어? 6개월도 더 되지 않았어? 나쁜 새끼, 도대체 누구래? 응 매형의 좆을 안달나게 한 년이 도대체 누구래? 응, 왜 누나가, 씨팔 누나가 왜 그렇게 살아야 해.

응. 내가 이 두 연놈을 가만 안 놔둘 거야. 누나, 매형한테 꼭 전해. 씨팔 내 눈에 뜨이기만 하면 아주 그날이 제삿날이 될 줄 알라고. 누나 누나, 씨팔, 그 개새끼가, 어떻게 누나한테 그럴 수가 있어? 응? 누나 지금 우는 거야? 씨팔 그러게 빨리 가겟문 닫고 잠이나 자란 말야. 아이 씨팔, 그 매형 어떻게 좀 안될까. 응, 매형한테 누나랑 내가 같이 가서 매달려볼까. 응, 매형 지금 도대체 어디에 있대? 아이들이 불쌍하잖아. 응응 누나, 누나 미안해. 내가 누나한테 전화하는 게 아닌데, 미안해. 매형 욕하지 않을게. 그래 맞아, 아이들 아버진데, 응응 울지 마 누나 미안해 울지 마. 나 이만 전화 끊을게. 그래 미안해. 누나 응응. 정말 미안해.(눈가에 살짝 맺힌 눈물을 훔치며 소주 한잔을 마신다.)

 

열번째 전화, 발신 01:14

야, 규창아, 그래 나, 성호다. 그래. 늦은 시간에 미안해, 너 빨리 핸드폰 뒤져서 정태 번호 찾아서 불러줘라. 그래 정태 말야, 강정태 몰라? 바뀐 번호 좀 빨리 찾아봐. 그래 찾았어? 응 잠깐만, 볼펜 좀 찾고. 응응 불러, 그래 ○○○에 ○○○○에 ○○○○이라고? 내가 다시 불러볼게.○○○에 ○○○○에 ○○○○. 오케이 고마워. 그래 우리 다음에 술 한잔 하자. 응 잘 지내라.

 

열한번째 전화, 발신 01:18

정태야, 나 성호다. 그래 오랜만이다, 응, 정태야, 너무 늦었네 응, 잘 지냈어? 네 소식 들었어. 그래, 정말 축하해. 고생했다. 그래도 ○○대학이면 괜찮은 곳이잖아. 네가 교수라니 정말 대단하다, 응 정말 너 대단해. 우리 앞학번 선배 중에도 아직 교수가 안 나왔는데 말야. 그지? 그래 정말 대단해. 응, 나, 나야 뭐. 소설 쓰느라 바쁘지 뭐. 그런데 너 말야. 핸드폰 전화번호 바뀐 거 내가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하지 않아? 응, 네가 교수로 있는 학교에 전화해서 물어봤어. 응. 새끼야 정말이야. 내가 왜 거짓말을 해. 전화하니까, 숙직을 서는 직원이 있더라고. 그 직원한테 물었어. 국어국문학과 강정태 교수님 전화번호를 좀 알려달라고. 그랬더니 뭐 곧바로 알려주던데. 멋지더라, 정말 대단해. 정말이라니까. 아이 씨팔, 넌 왜 내 말을 안 믿는 거야. 너 내게 무슨 악감정 있어? 응. 난 너 교수 된 거 축하해주려고 일부러 전화까지 했는데, 그래, 술은 좀 먹었지.(소주 한잔을 마신다.) 뭐 내가 술 먹는 게 하루이틀 일이냐. 강정태, 그래 대학교수 되니까 좋냐? 응, 전화번호 바뀌었으면 네가 나한테 전화해서 알려줘야 하는 거 아냐? 아무튼 뭐, 넌 처음부터 날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넌 내가 소설가로 등단하고 책을 낼 때도 늘 시큰둥했지. 새끼야, 응, 뭐 오해라고. 웃기고 있네. 넌 새끼야 원래 내게 열등감을 가지고, 내가 작가로 등단했을 때도 졸렬하게 질투하고 시기했잖아. 내 말이 틀려? 야, 강정태, 대학교수 된 거 축하해. 축하한다고. 그래 인마, 난 너처럼 치사하게 동기 잘되는 거 시기하지는 않아. 그래, 그래 새끼야. 잘 먹고 잘 살아. 이 새끼야, 난 소설 쓰면서, 고독하게 밥도 먹지 않고 소설 쓰면서 이 썩은 세계를 갈아엎을 테니까. 알았어? 이 나쁜 새끼, 비열한 새끼, 교수들 똥구멍이나 빨면서 근엄한 척하기는. 야 강정태, 강정태, 어라, 이 새끼 전화 끊은 거야? 야, 이 비열한 새끼, 강정태! (황당한 표정으로 소주 한잔을 마신다.)

 

열두번째 전화, 발신 01:27

선배 저 성호예요. 네, 정말 죄송해요. 그런데 선배한테 꼭 할 말이 있어서 또 전화를 드렸네요. 아이 이걸 어쩌나. 네,선배는 우리 과에서 그래도 제일 잘났던 사람이잖아요. 시도 잘 썼고, 뭐 또 워낙 똑똑했으니까. 그런데, 선배는 구청 공무원이 되어 있는데, 그 쓰레기 같은 정태는 교수가 됐단 말이에요. 이게 현실이에요. 아아, 구청 공무원이 뭐 어떻다는 건 아니구요. 아이, 선배 듣기 싫어도 제 얘길 들으세요. 이게 엿같은 현실이라구요. 그 좆같은 강정태가 대학교수 된 것, 이게 현실이라구요. 선배, 그래요 미안해요. 저도 전화하기 싫은데, 너무 억울하고 답답해서 전화 드렸다구요. 선배, 제발 선배만이라도 내 얘길 들어줘요. 이 세상에서 다들 나보고 미쳤대. 아무튼 선배, 내가 조금 전에 정태에게 전활 했어요. 네, 했어요. 난 순수하게 이 새끼 교수 된 거 축하하려고, 그동안 고생했다는 말 하려고 했어요. 정말이야. 그런데 이 새끼가, 글쎄 지가 교수라고 내가 하는 말을 고깝게 듣는 거예요. 날 술주정뱅이 취급하더라고요. 이 나쁜 새끼가,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선배. 선배? 선배, 내 목소리 안 들려요? 선배, 선배도 전화 끊은 거야? 응? 선배! (소주 한잔을 마신다.)

 

열세번째 전화, 발신 01:38

미경아, 나야, 응 미안해, 응 술 먹었어. 그래 술 먹었어. 그래 휘연이는 자? 그렇지, 자겠지 지금이 몇신데. 그래 잘살고 있어? 응? 나랑 헤어지니까 나 같은 놈 얼굴 안 보니까 이제 살 만해? 마음이 편하냐고? 그래, 너 힘든 거 알아. 그래, 미안해, 우리가 헤어지게 된 건 다 내 책임이야. 내가 좆같은 놈이기 때문이야. 그래 내가 알지. 내가 좆같은 인간이란 걸. 아니 아니 내가 인간이 아니었기 때문이야. 그래, 미안해, 그래 그래 우린 결혼하지 말았어야 했어. 아니 아니 아예 서로 모르고 지냈으면 좋을 사이였어. 그래, 내가 정말로 서글픈 건, 아이 씨팔, 지금 내 이 좆같이 외로운 처지가 슬픈 게 아니야. 씨팔 내 인생이 어쩌다 이렇게 꼬였는지 말야. 애비가 자식새끼 얼굴을 보고 싶어도 못 보고, 젠장 휘연이가 보고 싶은데 벌써 자고 있단 말야? 그래 술 먹었어. 술 안 먹고 어떻게 이놈의 세상을 살아가냔 말야. 그래, 그래, 미안해 전화해서 미안해. 당신이 더이상 날 신뢰하지 않는다는 거 잘 알아. 응, 그래, 나 너한테 아무런 할 말이 없어. 응 미안해. 그래, 내가 짐승이고, 내가 인간이 아니야. 하지만, 휘연 엄마야, 하지만 내게도 진실이 있어. 내게도 사람답게 행복하게 살고 싶은 욕심이 있다고, 그게 내 진실이라고. 그래, 미안해. 그래 알아. 내가 너에게 참으로 못된 짓 많이 했다는 거, 그래 알아. 네 친구 윤희씨랑 그런 일이 있었던 건 뭐, 내가 입이 백 개, 아니 천 개라도 할 말이 없어. 그래, 정말 죽을죄를 지었어. 그래 난 죽어야 해. 하지만, 그건 진실한 거였어. 서로 진실한 마음이 있었기에 일어난 일이었어.정말 미안해. 그래 내가 잘했다는 건 아냐. 그래, 비열해, 난 비열한 인간이야. 하지만 휘연 엄마, 아니, 미경아, 난 작가잖아. 소설가잖아. 난 소설을 쓰잖아. 응응. 너도 알잖아. 난 소설가잖아. 그래, 난, 섬세하고 자유로운 영혼을 가지고 있어, 단지 섬세하고 자유롭고자 하는 영혼을 가진 나약한 존재에 불과해. 응, 난 소설가야. 미경아, 난 내 힘으로 세상을 바꿔보고 싶었어. 내 문장으로, 내 글로, 내 소설로. 응. 너도 알잖아. 그래, 그런데 난 세상은 바꾸지도 못하고, 혁명도 하지 못하고, 다만 타락만 했을 뿐야.그 절망 때문에, 그 좆같은 절망 때문에 난 망가져버린 거야. 미경아, 우리 연애할 때 생각나? 그때 얼마나 행복했어. 넌 내게 참 많은 힘이 되어주었어. 미경아, 그래, 미안해, 늦은 시간에 전화해서 미안해. 응, 전화 안하려고 했는데, 어쩌다가 또 이렇게 됐어. 응응, 그래 나 지금 술에 취해서, 아니아니, 자꾸 슬퍼서, 눈물이 나오려고 해. 응, 미안해. 난 소설가야. 정말로 세상을 위해서, 나를 위해서 무언가 의미있는 일을 하고 싶어. 난 소설가니까 말야. 미경아, 나 말야 이제 이렇게 안 살 거야. 이제 정신차리고 똑바로 살 거야. 그리고 불후의 명작을 쓸 거야. 아무도 흉내내지 못할 그런 불후의 명작을 쓸 거란 말야. 그래, 미안해. 미안해. 내가 주정을 늘어놓는구나. 나도 이런 나의 위선이 지겹고 내가 지겨워. 나를 견디는 게 너무나 힘들어. 그래, 알아, 응 알고말고, 네가 나 때문에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알아. 응, 응? 다시 합치길 원하는 거냐고? 아, 모르겠어. 난 사실 아무것도 몰라, 난 아무것도 알 수가 없어. 내가 무엇을 원하는 건지. 여전히 내가 비겁하다고? 아냐! 난 비겁하지 않아. 난 작가야. 너도 알잖아. 내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응? 내가 여자들이랑 술 마시고, 출판쟁이들이랑 어울려 술 마시고, 작가들이랑 여행 다니고 그랬어도, 아무튼, 난 언제나 진실한 글을 쓰고 싶었어. 소설을 생각했단 말야. 자유, 그래 자유롭고 싶었어. 미경아, 난 자유롭고 싶었어. 그런데 미경이 넌 내 자유를 계속 침해했어.자유롭고자 하는 나를 모독했단 말야. 아냐 아냐. 그래 그래 미안 아니, 아니, 난 그다지 잘못한 게 없어. 하나도 안 미안해. 그래, 씨팔, 너와 나는 어차피 인연이 아니었어.(소주 한잔을 급하게 마신다.) 그래, 더이상 뭘 더 서로에게 바라겠어. 응? 그래, 이혼 잘한 거야.그래 전화, 응, 전화 안할게. 그래, 깨끗하게 사라져줄게. 아니, 죽어버릴게. 죽어버릴 거야. 내가 죽으면 다들 시원해하겠지. 그래, 전화 끊어!

 

열네번째 전화, 발신 01:59

미경아, 미경아, 그래 나야, 나 너의 남편, 아니 전남편 박성호야. 그래 미안해. 미안해. 내가 죽일 놈이야. 구제불능이야. 내가 무슨 자격으로 너에게 큰소릴 치겠니, 응응 미안해. 난 인간쓰레기일 뿐인데, 소설가는 무슨. 난 더이상 소설 따위는 안 쓸 거야. 그래, 소설 쓰는 동안 구린내나는 쓰레기가 되었어. 미안해. 미경아, 아 어지러워. 목도 마르고. 술, 그래 술부터 끊어야지. 응 미안해. 미안해. 세상에 어떤 새끼가 이혼한 아내에게 전화해서 이렇게 추잡하게 매달릴까. 아무튼 정말 미안해. 미안해. 그래 잘 자. 그래 피곤하겠다. 얼른 자. 미경아. 얼른 자.

 

열다섯번째 전화, 발신 02:09

윤희씨, 자요? 나예요. 나 성호, 오랜만이죠? 미안해요. 꾹 참고 전화 안하려고 했는데, 아무튼, 미안해요 미안. 너무나 윤희씨가 궁금해서요.(소주 한잔을 마신다.) 잘 지내고 있어요? 늦은 시간인데 전화 받아줘서 고마워요. 그래요, 내 전화를 받는 일이 당신에게는 무척 괴로운 일이라는 거 잘 알아요. 그래요, 그래서 고맙다는 말을 한 거예요. 네 알아요. 긴 얘기 하지 않을 테니, 조금만 견뎌줘요. 난 쓰레기니까, 당신 삶에 들러붙어 고약한 냄새를 피우는 쓰레기니까 빨리 하고 싶은 말만 하고 끊을게요. 그래요, 난 아내의 친구인 당신을 유혹해서 파멸시켰어요. 아, 파멸, 파멸이라는 말은 내가 한 말이 아니고, 언젠가 당신이 내게 한 말이죠. 하지만, 정말 윤희씨, 나 때문에 윤희씨가 파멸했다고 생각해요? 네?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내가 그렇게 나쁜 놈이에요? 윤희씨를 파멸시킬 정도로 내가 나빴어요? 제발 대답 좀 해봐요! 윤희씨, 우린 서로가 원한다는 걸 알고, 그 욕망에 충실했을 뿐이야. 윤희씨 난 지금도 말할 수 있어요. 난 지금도 당신 너무나 절실하게 원해요. 네? 속지 않는다구요? 그래요. 하지만 난 진실이에요. 진실을 진실이 아닌 척 표현할 수는 없어요. 진실은 진실에 맞는 형식으로 표현되어야 해요. 네, 윤희씨, 사랑이라는 말은 하지 않을게요. 그래요 나도 마찬가지예요. 나를 가장 행복하게 한다고 믿었던 사랑이 지금은 가장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 되었으니까요. 그 알량한 사랑 덕분에 난 이혼을 했고, 윤희씨도 이혼을 했죠. 그런데, 우리는 왜 이렇게 떨어져 있어야 하죠? 왜 그렇죠? 네? 몰라서 묻냐고요. 아, 윤희씨,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내가 사랑한 여자는 이 세상에서 윤희씨 하나였어요. 아, 내가 사랑이라는 말을 했네요. 미안, 아, 그래요. 미경이한테는 내가 죽을죄를 졌어요. 네, 알아요. 자신이 가장 믿었던 남편을 자신이 가장 믿었던 친구에게 빼앗겼을 때 미경이가 느꼈을 고통을 어찌 상상인들 하겠어요. 하지만, 윤희씨를 본 순간 난 윤희씨에게 참을 수 없이 끌리는 걸 느꼈어요.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구요. 네, 네, 기억하고 싶지 않으시겠죠. 네네, 알아요. 그래요. 다 지난 일들인데, 제가 공연한 말을 하고 있어요. 미안해요. 윤희씨, 씨팔 정말 미안해요. 정말, 정말 미안해요. 네 제가 죽을게요. 제가 죽어버리면 모든 사람들이 속시원해하겠죠. 네네 죽을게요.(핸드폰 액정에서 배터리 잔여량 표시를 확인하고는 핸드폰을 충전기에 연결한다.)

 

열여섯번째 전화, 발신 02:38

이규찬 선생님 댁이죠? 정말 늦은 시간에 죄송한데, 선생님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아주 급한 일이 있어서 그래요. 저는 소설 쓰는 박성호라고 합니다. 아주 급한 일이어서 그래요. 꼭 좀 부탁드릴게요. 네네, 감사합니다.(소주 한잔을 마신다.) 아, 이선생님, 네네 저 성호예요. 네네, 소설 쓰는 박성호라구요. 주무시는데, 제가 깨웠군요. 정말 실례가 많습니다. 선생님 목소리가 잘 안 들리네요. 선생님, 제가 선생님께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서 이렇게 전화를 드렸어요. 네네 사모님께 급한 일이 있다고 말씀드린 건 꼭 선생님이랑 통화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선생님, 제가 선생님께 간절한 심정으로 말씀드리는 것이니 잘 들어주세요. 선생님, 저 지금 열심히 소설 쓰고 있어요. 술도 거의 안 마시구요. 네네, 아니요. 지금 제발 지금 제 말씀을 들어주세요. 저 지금 주정을 하려는 게 아니에요. 지난번 술자리에서 버릇없이 군 것 정말 죄송해요. 깊이 반성하고 있어요. 그러니 선생님 제발 끊지 마세요. 네네 선생님 잠시면 돼요. 용건만 말씀드릴 테니까요. 네네, 선생님, 고맙습니다. 선생님 저 지금 정말로 죽도록 열심히 소설 쓰고 있어요. 그러니 저에게 가을에 지면을 좀 주세요. 정말 마음 다잡고 좋은 작품 하나 만들고 있거든요. 잡지의 품격을 결코 해치지 않을 좋은 작품이에요. 선생님 꼭 좀 기회를 주세요. 그동안 사실 선생님 저에게 너무 박정하셨잖아요. 그래도 예전에는 가끔 전화도 주시고, 제가 소설 발표하면 조언도 해주고 그러셨는데, 선생님, 저에게 꼭 전화 한번 주세요. 선생님 전화 기다릴게요. 그 말씀을 드리고 싶었어요. 네 선생님 저, 정말 열심히 쓰고 싶어요. 좋은 작가가 되고 싶어요. 선생님은 아시잖아요. 제가 가지고 있는 열정과 재능을요. 선생님 네, 네 너무 늦었죠. 그럼 편히 주무세요. 네네. 꼭 한번 연락주세요. 네네 안녕히 계세요.(소주 한잔을 마신다.)

 

열일곱번째 전화, 발신 02:51

희수씨, 나 성호야. 후후, 내가 또 전화를 했지 미안해. 응 시간이 많이 늦었네, 그런데 아직 안 자고 뭐하고 있어? 소설 쓰고 있는 거야? 응, 그래. 그냥 아까 전화할 때 못한 말이 있어서 말야. 응 그래 내가 아까 정작 하고 싶은 말을 못했어. 희수씨, 내가 볼 때 희수씨는 우리나라를 대표할 수 있는 여성작가가 될 수 있는 재능과 감각이 있어. 응 충분해. 내가 아무한테도 이런 말을 한 적이 없어. 그래 정말이야. 내가 말야 희수씨한테 해주고 싶은 말은, 아무튼 문단에서는 사람 만나는 일이 능사라는 거야. 소설만 잘 쓰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않아. 인사를 하고 눈도장을 찍어야, 그쪽에서도 한번 더 생각해주는 인심이 나오는 거라고. 희수씨, 내가 문단에 나와서 글을 써보니까 알겠더라고. 신인한테는 길을 가르쳐주고 이끌어줄 선배가 필요해. 응 정말 그런 선배가 필요해. 씨팔, 그런데 난 그런 선배가 없었지. 그래서 하는 말인데 내가 희수씨한테 선배가 되어줄게. 응응. 그래, 희수씨는 나만 믿고 소설 열심히 써. 그런데 희수씨 이번 토요일에 시간이 어떤지 모르겠네. 내가 취재 때문에 경포대에 갈 일이 있거든. 아무 일 없으면 같이 가지 않을래? 응응. 그래, 당장 대답하기 힘들겠지. 응응, 내가 너무 갑작스레 말을 꺼냈지? 아무튼 난 같이 갔으면 좋겠다. 아무 부담 갖지 말고 말야. 응 그래, 생각해보고 내게 전화 줘. 전화번호 거기 찍혔지? 그래, 전화 기다릴게, 희수씨. 잘 자.

 

열여덟번째 전화, 발신 03:08

김형, 나 소설 쓰는 성호요. 아, 뜻밖이지? 으흐 그래 나 지금 집이고 술 몇잔 먹었어요. 술 몇잔 먹으니 김형 얼굴이 떠올라 전화를 했지. 오랜만이네. 김형은 어디요? 아아, 그렇지, 지금이 시간이 몇신데, 당연히 집이겠지. 요즘도 바쁜가보네. 원고 쓸 게 많나봐요. 아, 몸살기가 좀 있다고? 저런, 그래요, 쉬면서 해요. 몸들 아껴야지. 뭐 요즘 신인들 보면, 술도 안 마시고 담배들도 안 피더라고. 다들 나약해 빠져가지고 말이에요. 아, 그래요 미안해, 미안하다고. 하지만 말야, 내 얘길 좀 들어요. 내가 오랜만에 전화했는데, 내 얘길 좀 들어주란 말야. 김형, 얼마 전에 나온 장편은 잘 나가죠? 아주 반응이 좋던데. 음, 그래요. 그런데 김형, 그거 말이야. 내가 이런 소릴 한다고 섭섭해하지 말고, 내가 그거 죄 읽어봤거든. 김형이 책을 안 보내줬길래, 서점에 가서 내 돈을 주고 직접 사서 읽어봤거든. 왜 독일 작가 있잖아. 김형도 알겠지, 피터 하인이라는 작가 말야. 피터 하인. 아니 아니 페터 하인인가. 아무튼 김형이 말야, 이번 소설에서 그 사람 소설을 흉내낸 것 같더라구. 그건 뭐 누가 봐도 알겠던데. 흐흐 사람이 어찌 그럴 수 있어.뭐? 허허, 내가 허튼소리 하는 거 봤어? 흥분하지 말고, 김형, 뭐, 어디서 뭐, 빨리 등단했다고 선배 행세를 하려는 거냐고? 뭐뭐 근거를 대보라고, 내가 근거 못 댈 줄 알아? 그래, 근거 물론 대지. 명색이 작가라는 인간이, 남의 작품을 베껴놓고. 비열한 자식, 내 말 책임질 수 있느냐고? 물론이지, 내가 내일 아침에 신문사 기자들한테 전화해서 다 밝혀버릴 거야. 그럼 넌 끝장이야. 그러니 기다려. 이 파렴치한 인간아. 뭐뭐, 이 자식이 욕을 해. 야, 씨팔놈아 소설이나 똑바로 써. 니가 좀 팔린다고, 그리고 상 좀 받았다고 최고인 줄 아는 모양인데, 거지발싸개 같은 새끼가, 남창처럼 술집에서 애교나 부리면서. 새끼야 내가 너랑 같은 모국어로 소설을 쓴다는 게 수치스럽다. 니가 내 앞에 있으면 침이라도 뱉고 싶다. 이만 끊자 이 상종 못할 인간아! (소주 한잔을 마신다.)

 

열아홉번째 전화, 발신 03:11

씨팔,박사장이요? 나 소설 쓰는 박성호요. 마침, 이 시간에 안 주무시고 계셨네요. 아, 음악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어디 좋은 데 계신가보네. 즐거운 시간 보내고 계실 텐데 전화드려 미안해요. 아무튼 통화가 된 건 나로선 다행이네요. 그래요 난 이렇게 시뻘개진 눈으로 잠을 못 이루고 있는데, 당신이 자고 있으면 안되지. (소주 한잔을 마신다.) 이봐요 박사장, 내가 오늘은 당신에게 할 말을 꼭 하려고 전화를 했어요. 저기 말이야. 내가 말이야. 뭐요? 낮에 만나서 얘길 하자고? 웃기지 말고, 내 말 들어, 지금, 난 지금 얘기할 거야. 지금 얘기해야 해, 지금 말야. 지금 이 전화로, 전화로, 알겠어. 이봐 박사장, 그래, 술 한잔 했어. 그래, 뭐 내 돈으로 내가 술 사서 마셨는데, 뭐가 문제야. 응? 이봐 박사장, 나 말요, 당신한테 서운한 게 너무 많아. 그거 어떻게 보상해줄래? 응? 어떻게 날 위로해줄래? 당신이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난 말이야. 박사장 당신만 믿고, 거기서 책 두 권을 냈어. 아시죠? 내 책을 내고 싶은 출판사들이 많았다는 거. 저기 ○○출판사의 정선배도 원고를 달라고 했었고,○○사의 고사장도 내 원고 보고 싶어했다고. 당신도 알지, 박사장 당신도 알지? 그런데 어쨌건, 평론 쓰는 박순구 형이 내게 당신 얘기를 좋게 하길래 내가 당신 만났던 거야. 그러고는 정말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 책을 두 권씩이나 계약했고 말야. 난 그냥 당신을 그냥 무조건 믿었던 거야. 그런데, 정말로 지금은 화가 나. 내가 병신이었지. 좆같은 출판사에서 책을 내다니. 뭐, 말이 심한 거 아니냐고? 씨팔, 내가 혼신의 힘으로 쓴 책을 의붓자식처럼 취급해놓고 심한 게 아니냐고. 광고도 전혀 안해주고, 이벤트도 없고, 어떻게 그렇게 한여름 연탄창고에 쑤셔박아놓은 불쏘시개마냥 방치를 할 수 있느냐고.씨발, 박사장, 내가 그렇게 만만해 보여. 어? 인세도 말야, 하나도 믿을 수가 없어. 개새끼들, 난 당신네들이 내 통장에 입금하는 그 좆같은 돈을 전혀 신뢰하지 않아. 내 책이 그렇게밖에 팔리지 않을 리가 없는데, 뭐뭐, 진정하라고? 오해가 있는 것 같다고? 씨팔 박사장, 뭘 진정하라는 거야. 뭘 뭘, 내가 지금 어떤 처지인데, 뭘 진정하란 거야. 씨팔, 자존심이고 나발이고 다 버리고 지금 당신한테 전화를 해서 구걸을 하고 있는 거잖아. 아냐 아냐, 구걸이라니, 난 작가고 당신은 돈만 밝히는 속물일 뿐인데. 내가 품위를 지켜야지. 이봐요 박사장, 내일 당장, 내 책 서점에서 빼내. 서점에 깔려 있는 내 책들 다 회수하라고, 다 회수해서 내게 보내, 만약에 회수해서 내게 보내지 않으면 난 내일 콱 죽어버릴 거야. 알겠어? 당신을 고발해놓고 죽어버릴 거야. 나 더이상은 당신이랑 거래 안해. 알겠어? 씨팔 박사장아.전화 끊어!

 

스무번째 전화, 발신 03:20

어머니, 뭐해요? 주무세요. 전화를 안 받으시네요. 아무튼 어머닌 내 목소리, 큰아들 목소리, 내가 지금 하는 말 들으실 거라 믿고 얘기할게요. 네 흐흑, 저 큰아들 성호예요. 어머니 큰아들 성호라구요. 네네 죄송해요. 어머니. 저 말이에요. 사실대로 말할 게 있어요. 사실은 교회에 안 나간 지 벌써 여러해 됐어요. 네네, 죄송해요. 아 어머니, 전 어머니가 싫어요. 어머니가 무서워요. 아니 아니, 어머니를 사랑해요. 아아, 난 어머니, 어머니가 두려워요. 어머니를 사랑해요. 아, 네네, 네 주무세요. 나도 잘게요. 네 잘게요. 저도 이제 자요.(옆으로 슬그머니 쓰러진다. 잠에 빠져든다.)

 

스물한번째 전화, 음성메씨지 도착 04:52

죄송한데요. 박성호 선생님 핸드폰 맞죠? 네, 전화를 해도 받지 않으셔서 이렇게 음성을 남기네요. 저는 선생님을 몹시 존경하는 한사람의 독자예요. 저 역시 소설을 쓰고 있구요. 이름은 유리라고 하고 나이는 스물아홉이에요. 네, 단지 선생님 소설을 너무 좋아하고 선생님을 흠모해서 이렇게 인사를 드리는 거예요. 네 저는 지금 이 시간까지 홀로 깨어 선생님 소설을 읽었어요. 벌써 세번째 읽은 셈이지요. 소설을 읽을 때마다, 저는 선생님을 상상하곤 해요. 제가 의도하지 않아도 저절로 그렇게 돼요. 선생님은 책 속의 사진에서 소년처럼 해맑게 웃고 계시지요. 저는 선생님의 영혼이 첫눈처럼 시리도록 맑을 거라고 생각해요. 선생님 소설을 보면 그걸 알 수 있어요. 선생님의 소설은 영혼이 맑지 않은 사람은 도저히 발견해낼 수 없는 세계를 그려내고 있거든요. 그래서 꼭 한번 전화드리고 싶었어요. 그냥 우연히 문예지를 보다가 선생님 연락처를 알게 됐어요. 선생님, 외롭고 힘드시더라도 힘내세요. 저는 선생님처럼 맑고 섬세하신 분이 쉽게 상처받으실까봐 두려워요. 이미 세상은 너무나 거칠고 험난해져 있으니까요. 선생님, 저 열심히 선생님 생각하고 응원할 거예요. 그러니 선생님도 절대 지치지 마시고 지금처럼 아름다운 소설 계속 써주세요. 그리고 연락처를 남길 테니 제 음성 확인하시고 전화 한번 주세요. 선생님한테서 갖는 이 존경심에 대한 확신이 선생님을 한번 뵙고 싶다는 용기를 갖게 하네요. 선생님 연락 기다리고 있을게요. 선생님을 깊이 존경해요. 그럼 편히 주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