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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평

 

부산이 꿈꾸는 아시아 영화도시

부산국제영화제 10년

 

 

심영섭

영화평론가 chinablue9@hanmail.net

 

 

제10회를 맞은 부산국제영화제(PIFF)가 양적인 면에서나 질적인 면에서 역대 최대의 영화제였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73개국 307편의 영화가 상영된 올 부산영화제에서 흔히 영화제의 위상을 알 수 있는 월드 프리미어(세계에서 최초로 선을보이는영화)가 60편을 넘었고, 인기절정의 미남배우 쯔마부끼 사또시(妻夫木聰)와 성룡, 김희선, 장동건, 전지현, 양 꾸이메이(楊貴媚), 쟝 젼(張震) 등 수많은 국내외 스타들이 참석해 명실상부한 국제영화제의 위상을 느끼게 해주었다.

돌이켜보면 1996년 9월 13일 시작한 부산영화제는 아시아영화의 오늘을 세계에 알리겠다는 취지의 국제영화제였으나 실상은 당시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던 일본문화 개방 논의 속에 아시아영화, 그중에서도 일본영화에 대한 폭발적인 관심과 함께 개막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후 부산영화제는 90년대부터 한국에서 나타난 영상문화의 다원화 현상, 즉 전세계의 다양한 미개봉 작품을 접하고 싶다는 관객들의 욕구를 수용하는 동시에 외국에는 한국영화를 소개하는 창구로, 무엇보다도 아시아영화의 범연대성을 이루어내는 목표를 가지고 아시아를 대표하는 영화축제로 성장해왔다.

여기에 바로 부산영화제의 고민과 역설이 함께 들어 있다. 부산영화제의 정체성, 즉 서구의 기준에서 벗어나 아시아영화를 지향한다는 그간의 뚜렷한 소신에도 불구하고, 사실 부산영화제는 국내 관객과 해외영화제 관계자들 그리고 부산시민들의 입맛이라는 세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점차 그 폭과 다양성을 넓히는 방향으로 진행되어왔던 것이다. 한마디로 아시아의 깐느 같은 백화점식 전람회라는 원심력과 아시아 영화축제라는 구심력이 팽팽히 맞서온 10년 세월이었다. 게다가 2007년에는 부산영화제 전용관이 문을 열 것이고, 주최측은 올해부터 깐느나 토론토 영화제처럼 각국의 바이어들이 영화를 사고파는 마켓 기능을 강화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아시아의 간문화적(間文化的) 정체성을 튼튼히하고 탈식민을 지향한다는 명분으로 시작된 영화제가 아시아의 중심과 주류영화제의 대열에 진입하면서, 세계영화제로의 승인을 추구하고 아시아의 영화 아이디어와 서구의 자본을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함으로써 자본주의 논리에 충실한 모순된 행보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10년간 1960년대 이후 다시 한번 도래한 한국영화의 황금기에 부산영화제가 일정한 역할을 담당했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사실이다. 개인적으로 필자는 부산영화제의 지난 10년이 이 땅의 영화청년에게 심어준 가장 큰 공은 ‘영화란 신나는 것, 그러니 영화일은 특별한 사람만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라는 영화와 영상매체에 대한 개념 자체를 변화시킨 데 있다고 본다. 깐느나 베니스 등 유수의 유럽영화제에 가보면 늘 전세계에서 모여든 기자들로 북새통을 이룰 뿐 사실 어떤 활기가 부족함을 느낀다. 바로 지역주민들을 배제하는 영화제의 엘리뜨적 특성 때문인데, 부산영화제는 전세계에서 가장 활기찬 관객들과 영화청년으로 넘쳐나고 그 영화청년들이 이제는 감독과 평론가와 영사기사가 되어 다시 관객을 불러모으는 순기능을 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부산영화제는 독립영화와 충무로로 양분된 한국영화계의 가교 역할을 하면서 많은 감독지망생들에게 충무로 도제생활이나 유학 같은 기회비용을 줄이면서 손쉽게 감독으로 ‘입봉’할 수 있는 우회로를 열어주고 있다. 예컨대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국제영화평론가협회상을 비롯하여 4관왕에 오른 윤종빈 감독의 「용서받지 못한 자」는 이 영화제의 수혜를 받은 전형적인 경우라 할 만하다. 이 작품은 두 명의 중학교 동창이 군대에서 병장과 이등병으로 재회하며 군대조직이 남기는 상처와 후유증을 세심하게 그려낸 영화로, 군대문화가 남성들을 변화시키는 모습을 가감없이 다루어 관객과 평론가들 모두에게 큰 호응을 받았다. 감독 윤종빈은 이 작품을 연극영화과 졸업작품으로 만들었으나 부산영화제에 상영되고 영진위의 배급지원을 받으면서 졸업작품 단 하나로 충무로가 가장 주목하는 신인감독으로 급부상할 수 있었다. 그런가 하면 ‘비평가주간’에 상영된 신연신 감독의 「좋은 배우」는 감독이 충무로의 어떤 단체에도 소속된 적이 없는 가운데 단돈 삼백만원으로 만들어낸 세 시간짜리 장편영화, 그러면서도 완벽히 개인적인 방식으로 만들어낸 디지털영화라는 희귀한 예를 남겼다. 이밖에도 「여자, 정혜」로 호평을 받은 이윤기 감독의 「러브 토크」, 최하동하 감독의 「택시블루스」, 조창호 감독의 「피터팬의 공식」 등 ‘한국영화 파노라마’ 兒션은 총 19편 중 8편이 미공개작이었으며, 그중 5편은 어디서도 소개된 적 없는 ‘완전한’ 신작으로 채워졌다. 충무로와 연계되지 않은 신인감독들을 발굴하고 충무로의 입김에서 벗어나 자신의 영화를 만들고 싶은 감독에게 부산영화제는 최적의 기회를 제공하는 셈이다.

올해 부산영화제는 처음으로 아시아필름아카데미(AFA)를 개교해 교장 허우 샤오셴(侯孝賢) 감독을 필두로 한 우수한 감독들이 아시아 영화계 기대주들을 직접 지도하게 된다. 한마디로 부산영화제가 미래의 아시아 영화인들을 양성한다는 의미와 포부를 밝힌 셈인데, 영화제 기간에 인터뷰를 위해 만난 필자와 김동호 부산국제영화제 위원장은 서로 아시아필름아카데미에 지원하겠다는 농을 주고받았을 정도였다. 아시아필름아카데미가 내실있는 교육기관으로 자리잡는다면 한국영화계는 영상원과 함께 또 하나의 중대한 영화교육의 토대를 갖게 될 것이다.

부산은 이제 영화의 관람이나 감독과 관객의 만남을 주선하는 역할에서 벗어나 한국영화 더 나아가 아시아 영화인들을 양성하고(AFA), 그렇게 양성된 영화인들이 투자자를 구하고(PPP, 감독과 투자자를 연결시키는 부산 프로모션 플랜 프로젝트), 완성된 영화를 필름마켓에서 판매하는, 한마디로 영화의 시작과 끝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엄청난 규모의 영상산업도시를 꿈꾸고 있다. 이러한 원대한 계획이 성공한다면 부산영화제는 단지 성공한 영화제에서 벗어나, 아시아 영화문화의 뿌리로 한국영화의 역량을 국제화하는 데 단단한 영향력을 지니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낙관만 할 수는 없다. 일단 한국영화계 자체가 안고 있는 산업적인 역량(지난해 한국영화는 한편당 약 4억원의 적자를 보았다)과 정치문화적인 변수, 난립하는 연극영화과(그러나 학생수는 줄어들고 있다) 등 산적한 변수가 이러한 계획에 영향을 줄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한국영화의 운명과 부산영화제의 운명이 매우 긴밀하다는 점을 상기해볼 때, 최악의 경우 장차 한류열풍이 사그라들고 한국영화의 규모가 축소될 경우, 우리 관객들이 예전처럼 한국영화에 등을 돌릴 경우 부산영화제가 모처럼 투자한 인프라는 자산이 아니라 부채로 돌아올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변화하는 한국영화의 환경과 부산영화제의 위상으로 보아 이제 10회를 치러낸 부산영화제는 메이저 제작사의 입김이 들어가는 상업주의의 영향을 최소화하고 규모에 대한 강박을 떨쳐야 하는 지점에 이르렀다고 생각한다. 더이상 세계영화제로의 승인에서 권위를 구할 것이 아니라 조직과 효율성이라는 내실에 대해서 생각해봐야 하는 싯점인 것이다. 이것은 김지석 프로그래머의 말대로 제100회 부산영화제를 맞이하기 위해 당장 제11회부터 심각하게 따져봐야 할 한국영화와 부산영화제의 운명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