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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권인숙 『대한민국은 군대다』, 청년사 2005
애국의 열정과 군사주의의 함정
신윤동욱 申尹東旭
『한겨레21』 기자 syuk@hani.co.kr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기억이 있다. 대학 신입생이었던 91년, 가두투쟁에서 화염병을 쓸 것이냐 말 것이냐 하는 논란이 뜨거웠다. 소심한 신입생은 심정적으로는 화염병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지만, 화염병을 쓰지 말아야 한다고 ‘감히’ 이야기하기 어려웠다. 그 기억은 10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가끔 떠오를 만큼 강렬하다. 또 하나는 2001년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주제로 한 국제회의에 참가했을 때의 곤혹스러운 기억이다. 서구의 평화운동가들은 파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그렇게 치열했던 80년대 한국 학생운동에서 어떻게 병역거부자가 한명도 나오지 않았느냐?” 나는 진땀을 흘리며 설명했지만 그들을 이해시키기가 어려웠다.(우리에겐 당연시되었지만) 한국의 학생운동이 얼마나 ‘애국의 열정’으로 들떠 있었는지, 학생운동의 풍토가 얼마나 집단주의적이었는지를 설명하기란 쉽지 않았다. 너무나 당연해서 논리로 구성해보지 않은 이야기를 논리적으로 납득시켜야 하는 난처한 상황이었다. 권인숙(權仁淑)의 『대한민국은 군대다』는 내가 느꼈던 두 개의 답답증에 대한 나름의 설명을 담고 있다.
이 책은 90년대 중후반부터 말문이 터지기 시작한 학생운동의 군사주의와 한국사회의 국가주의에 대한 비판의 ‘종합판’이라고 할 만하다. 『대한민국은 군대다』는 한국의 군사주의가 형성되는 과정을 설명하고(1장), 군사주의가 어떻게 저항운동(특히 학생운동)에 스며들었는지를 살펴보고(2~3장), 징병제의 성별화 문제까지 다루고 있다(4~5장). 학생운동, 징병제 등은 서로 다른 주제처럼 보이지만 군사주의에 바탕을 두고, 성별화된 권력을 중심으로 작동했다는 점에서 동일한 맥락을 지닌다. 어쩌면 이 책은 여성의 눈으로 80년대 학생운동의 국가주의를 돌아보고, 여성의 목소리로 징병제를 비판하는 최초의 저서라는 의미를 가질 것이다.
사실 80년대 학생운동이 국가주의의 틀 안에서 자유롭지 못했다는 비판이 아주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미 90년대부터 이런 비판은 제기되어왔다. 하지만 80년대 학생운동이 구체적으로 어떤 과정을 거쳐서 군사주의화되었는지를 분석하는 글은 거의 없었다. 『대한민국은 군대다』는 드물게 학생운동에 군사주의가 이식되는 과정에 대한 소묘를 담고 있다. 그 방식은 80년대 학생운동가들이 70년대 중고교 시절의 국가주의 교육과 군사주의 경험을 어떻게 학생운동 과정에서 반복했는지를 그리는 것이다. 예컨대 여성을 가정에서 사회로 끌어내면서도 그들을 전통적 가부장제의 틀 안에 가두어두었던 새마을운동의 여성지도자상이 학생운동을 하는 여성들에게 어떻게 ‘강요’되었는지를 짚어낸다. 또 선전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정당한 폭력으로 당연시된 ‘대항폭력’이 어떻게 물리력에서 열세인 여성운동가들을 ‘2등 운동가’로 만들었는지도 당시 ‘전설’처럼 여겨진 (남성들만의) 투쟁조직 ‘오월대’ ‘녹두대’ 등의 사례를 통해 보여준다. 또 ‘비합조직’의 여성에 대한 배타성, 운동논리에 팽배했던 흑백논리를 통해 여성들이 학생운동의 핵심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었던 과정을 복원한다.
『대한민국은 군대다』에 담긴 학생운동의 이미지 분석은 기존의 담론을 넘어선다. 학생운동에서 자주 활용되던 강인한 전사와 희생적인 어머니의 이미지가 어떻게 군사주의 논리를 반복하고 있는지를 분석하는 부분 등이 그렇다. 무엇보다 이 책은 80년대 학생운동에 팽배했던 군사주의(혹은 국가주의) 논리를 당시 학생운동에 몸담은 여성들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복원한다. 인터뷰는 여성운동가들에게도 일종의 자가치료인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인터뷰를 하면서 때때로 지금껏 묻어둔 성차별의 기억을 아프게 꺼내보고, 스스로 깨달아가기도 한다. 그런 과정이 책의 곳곳에 묻어 있다. 특히 3장에는 김상인씨의 40여년 생애에 걸친 회상이 담겨 있다.70년대 박정희시대의 모범적인 어린이에서 80년대 이상적인 여성운동가로 변해가는 그의 모습을 쫓아가다보면 박정희의 군사주의가 80년대 학생운동에 어떻게 ‘무의식적으로’ 스며들게 되는지를 아프게 이해하게 된다. 그의 고백을 통해 당당한 여성활동가에 자애로운 어머니, 헌신적인 누이 역할까지 떠맡아야 했던 80년대 여성운동가들의 ‘성별화된’ 고통이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다만 “나는 우리 써클 남자아이들의 팬티와 양말을 다 빨아주었어요”(177면)라는 진술은 지나치게 극단적인 경우를 드러낸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 책에 다른 사람의 경험도 있었더라면, 가령 노동계급 출신인 김상인이 탐탁지 않게 여겼다는 중산층 출신 여성활동가들의 이야기도 함께 담았더라면 좀더 다양한 측면의 분석과 일반화된 이야기로 나아갈 수 있지 않았을까.
이 책의 또다른 핵심은 징병제에 대한 비판이다.90년대 후반부터 한국사회에서 불거진 징병제 관련 논란을 대부분 담고 있는데, 개별사건을 따로 분석하는 방식이 아니라 여러 사건을 통해 징병제가 어떻게 ‘젠더화’해서 존재하는지를 살펴본다. 여성주의 싸이트를 초토화시킨 ‘싸이버 마초’라는 신조어를 낳은 군가산점 논란은 두말할 바 없는 사례가 된다. 징병을 통해 여성을 배제하는 젠더화는 징병제의 신성시에 기반을 둔다. 국가를 위해 희생하는 (징집된) 남성이라는 이미지는 징병을 회피하는 자들에 대한 분노로 강화된다. 그래서 이회창 후보 아들의 병역비리 문제, 가수 유승준에 대한 입국불허,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등은 서로 전혀 다른 논란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징병에 응하지 않은 자들에 대한 분노로 모아지고, ‘징병제의 신성시’와 이어질 수 있다. 이제 네티즌이 앞장서고 온 국민이 공감하는 ‘징병제 캠페인’은 징병제의 위기에 대응하는 새로운 양식으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언론은 징집 기피자들에 대한 비판에만 주목할 뿐 그것이 가져오는 징병제 강화 효과에는 무감했다. 이 책은 징병제의 젠더화라는 주제를 다루면서 이렇게 감추어진 ‘징병제 캠페인’의 효과에 주목한다. 하지만 이러한 부분이 징병제의 젠더화를 설명하는 논리과정의 일부분으로만 다루어지고 있어서 아쉬움이 남는다. 대중의 공분에 기초한 21세기형 징병제 강화 캠페인에 대한 세밀한 분석이 더해졌다면 징병제를 둘러싼 우리 사회의 풍경도 세밀하게 그릴 수 있지 않았을까.
징병제의 또다른 상처인 남성간 성폭력 문제는 지금껏 몇몇 국가기관의 여론조사를 제외하면 어둠에 싸인 주제였다.저자는 남성간 성폭력 문제가 성정체성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의 문제이며, 사회로 확장되면 여성에 대한 폭력으로 이어질 위험이 있다고 지적한다. 군대 안의 남성간 성폭력이 ‘남성들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군대다』는 한국의 군사주의에 대한 종합판이자 개론서처럼 보인다. 징병제의 효과부터 학생운동의 군사주의까지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하지만 다양한 주제가 서로 다른 방법론으로 다루어져서, 한권의 책으로서 통일성이 부족하다는 느낌이다. 가끔 논리적 공백도 엿보인다. 저자의 설명처럼, 대중이 군사주의에 단순히 동원됐을 뿐 아니라 자발적으로 참여를 했다면, 그 자발성의 양상과 사례가 무엇이었고, 그 흔적이 어떻게 남아 있는지에 대한 좀더 촘촘한 근거 제시가 필요하지 않았나 싶다. 또 입말을 살리고, 맥락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려는 의도로 보이지만, 인터뷰 대상자의 말을 거의 그대로 활자로 옮기다보니 오히려 입말의 뜻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한국에서 징병제는 여전히 미개척 연구분야다. 한국사회를 현실적으로만 아니라 정서적으로도 휘어잡고 있는 징병제에 대한 심화된 고민을 저자의 다른 책으로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