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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주강현 『제국의 바다 식민의 바다』, 웅진지식하우스 2005

바다를 향한 웅변을 위하여

 

 

강봉룡 姜鳳龍

목포대 역사문화학부 교수 kangbr@mokpo.ac.kr

 

 

제국의바다식민의바다

“바다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 근현대세계사는 이 말을 그대로 증명한 역사였다.15,16세기 이후 바다로 몰려나와 대항해시대를 열어젖힌 유럽 열강들은 탐욕스런 제국주의의 이빨을 드러내며 세계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웠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그랬고, 네덜란드와 프랑스와 영국이 그랬다. 독일과 러시아와 미국도 그 뒤를 따랐으며, 일본도 뒤늦게 제국주의의 전염병에 감염되어 바다로 뛰쳐나와 그 광기의 대열에 동참했다.

주강현(朱剛玄)의 『제국의 바다 식민의 바다』는 그들이 바다 패권을 둘러싸고 광란의 다툼을 벌인 저 제국주의 시대에 바다는 우리에게 무엇이었나를 묻고 있다. 우리는 어이없게도 해양활동을 금기시하는 ‘해금정책(海禁政策)’을 조선 500년 내내 고수하여 저들이 우리를 향해 돌진해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그 결과 우리의 바다는 ‘제국의 바다 식민의 바다’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 광기는 오늘날에도 완전히 치유되지 못하고 이따금씩 재발하고 있으며, 그 중심에 일본이 자리하고 있다고 판단한다.

독도문제를 일일이 비평하면서 본격화된 저자의 이야기는, ‘안에서 바깥을 바라보는 관행적 시각에서 벗어나서 바다 건너 타자들을 주체로 인식하고 반대편에서 들여다보는 새로운 시각’에 따라 일본 해양사 여행으로 나아간다(6면). 큐우슈우의 최남단 카고시마의 남쪽 바다에 자리잡은 타네가시마에서 시작한 저자의 해양사 여행은 카고시마로 상륙하고, 시모노세끼와 나가사끼로, 그리고 태평양의 팔라우섬으로 이어지면서 일본이 해양 침략세력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추적한다(5장~9장). 결국 그 이야기는 대조선 침략사로 귀결한다. 임진왜란이 근대 식민지배로까지 반복되어 이어진 식민사의 기구한 장기지속성을 진해와 거문도의 사례에서 들추어내고, 우리의 바다가 ‘제국의 바다 식민의 바다’로 전락해간 과정을 고발한다(10~11장).

저자는 이 책을 식민의 바다에서 명멸한 수많은 희생자들에게 바치는 ‘감로탱(甘露幀)’이자 진혼굿으로 규정하고 있다(15면). 그런만큼 이 책은 충분히 감동적이다. 또한 우리 역사를 바다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연구가 아직 생소한만큼 충분히 참신하기도 하다. 외부의 시각에서 우리를 들여다보려 했다는 점도 그렇다. 적절한 사진자료들을 풍부하게 제시하고, 때론 현장르뽀 형식을 빌려 역사를 실감나게 그리고 있어 읽는이의 흥미를 유발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는 점도 평가하고 싶다. 하지만 아쉬운 점도 있다.

문득 독도문제에서 출발하여 ‘일본 탓’ ‘미국 탓’에 집착한 것은 자칫 역사감상주의로 흐를 우려가 있다. 근현대 우리의 바다가 식민의 바다로 전락해간 과정을 격정적으로 토로하면서, 대마도가 우리 땅이 될 뻔한 이야기와 이끼(壹岐)섬이 한반도에서 일본열도로 문화가 전파되는 징검다리였다는 이야기를 굳이 끄집어내어 위안을 삼고자 한 것도 다분히 감상적이다. 이러한 저자의 감상은 ‘동해’와 ‘일본해’의 바다 이름을 둘러싼 한일간 논란을 ‘역사전쟁’으로 규정하고 양양의 동해신묘와 삼척의 척주동해비를 찾아 ‘동해’의 이름을 확인한 후 동해신에게 역사전쟁에서의 승리를 기원하는 대목에서 더욱 두드러진다(12~14장).

역사의 감상을 보완하는 장치는 역사 흐름의 체계화를 위한 노력이다. 우리 해양사의 체계화 노력은 우리의 바다가 ‘제국의 바다 식민의 바다’로 전락하게 된 내부 원인에 대한 분석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몇가지 문제를 들어보자. 우선 조선이 국초부터 멸망할 때까지 500여년간 해금정책을 줄기차게 유지해간 역사현상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해금정책으로 시작하여 쇄국정책으로 고착화되어간 조선의 폐쇄주의 정책은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초장기 지속성을 특징으로 한다. 그렇게 된 원인과 맥락은 도대체 무엇일까?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문제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무관심 그 자체였다. 저자는 이에 대한 관심을 분명히 표명하고는 있지만 분석으로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 다음은 시대를 거슬러올라가 고려시대까지의 해양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 역시 그간 관심의 불모지였다. 만약 저자가 고려시대까지는 진취적인 해양활동이 전개된 ‘해양의 시대’였다는 것을 주목했다면, ‘조선으로 넘어가면서 왜 해금정책으로 급선회하게 되었는가’의 문제를 자연스럽게 제기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근현대의 문제를 집중 서술한 이 책의 범위를 넘어선다고 생각했는지, 저자 역시 이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다.

이 책의 시간적 범위는 근현대에, 공간적 범위는 동해에 주로 묶여 있고, 여기에 간간이 남해와 몇몇 섬을 언급하는 것에 그치고 있다. 저자는 동남해 바다를 ‘제국의 바다 식민의 바다’로 규정하면서, 일본을 바다 침탈의 주범으로, 미국을 공범으로 지목한다. 그리고 ‘제국의 바다 식민의 바다’에서 탈출할 방안으로 ‘독도는 우리 땅’ ‘동해바다 이름의 정당성’ 등을 제시한다. 이를 ‘역사전쟁’으로 규정하는 데 이르러서는 비장하기까지 하다.

여기에서 문득 ‘해(海)에게서 소년에게’를 외쳤던 식민시기 어느 선각자의 웅변적 시 구절을 떠올려본다. 그 웅변이 반향 없는 메아리에 그쳐버리고 그 자신은 변절의 벼랑으로 떨어지고 만 비극적 결말이 생각난다. 이 책이 다시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외치는 웅변으로 느껴지는 것은 평자만의 지나친 상상일까? 그렇지만 바다를 향한 이번 웅변만큼은 웅장한 반향을 얻어 바다에 대한 관심을 일으켜세우는 계기로 작용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바다에 대한 우리의 관심을 고려시대 이전으로 확대해보자. 서해와 남해가 역사의 전면으로 떠오르고,한반도와 중국대륙과 일본열도의 사람들이 서남해에서 만난다. 서남해에 동북아 삼국의 배가 떠다니고, 이를 통해 사람과 물자가 교류된다. 한반도 사람들은 이 바다의 주인공이었고, 한반도는 동북아 물류의 중심기지였다. 이처럼 바다를 통해 고려 이전의 역사를 바라보면 짐짓 행복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그간 우리는 바다의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보려는 시도를 하지 못했다.9세기에 동아시아 해상무역을 주름잡았던 ‘해양 진출의 영웅’ 장보고에 대한 관심이 아예 없었고, ‘해양 수호의 영웅’ 이순신에 대한 관심은 해양에 대한 관심보다는 독재시대에 호국〓반공이데올로기를 뒷받침하기 위한, 영웅을 넘어선 성웅으로 추앙하는 것으로 흘러버렸다. 최근 미미하게나마 해양사에 대한 관심이 일어나고 있고, 이와 함께 소설이나 드라마를 통해서 장보고와 이순신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싹트고 있는 것은 그나마 다행스런 일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동남해를 무대로 전개된 근현대의 ‘제국의 바다 식민의 바다’를 주목할 것인가, 서남해를 중심으로 전개된 고려 이전 ‘우리가 주도한 바다’를 주목할 것인가? 하나는 비극의 바다, 하나는 가능성의 바다이다. 둘 다 버려서는 안되는 우리의 소중한 역사 바다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 끼여 있는 조선시대의 ‘우리가 버린 바다’도 버려서는 안될 우리의 역사 바다이다. 이 세 바다를 하나로 묶어 체계를 잡고, 새로운 ‘미래의 바다’의 가능성을 창출해내는 것이 진정 우리가 추구해야 할 해양사의 비전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그만한 의미를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