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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평
게임이 이야기하는 전쟁
박상우 朴商友
게임평론가. sugy@madordead.com
전쟁은 현실의 무게를 느껴 보기도 전에 이미 이야기가 된다. 전쟁과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 온라인 혹은 오프라인에서 열렬히 그 참혹함을 말하지만, 그저 이야기일 뿐이다. 다리가 잘린 어린아이와 지붕도 벽도 없어진 집이 현장에서 도려내어져 긴 이야기의 적당한 구역에 배치된다. 전쟁은, 이웃한 사건들과 인과적 관계를 맺고 내러티브의 앞과 뒤에 덧붙여진 의미에 종속된다. 경험되기보다는 줄줄이 늘어선 내러티브 속에서의 의미로만 이해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내러티브에 대한 믿음에 사로잡힌 게 먼저인지, 모든 미디어가 가장 매력적인 내러티브를 만들어내기 위해 매달리기 시작한 게 먼저인지는 알 수 없다.
경험의 무게가 크면 클수록 이야기의 유혹 역시 커지고 전쟁 이야기에 열 올리는 미디어사이의 경쟁은 더욱 치열해진다. 걸프전에서 영광의 자리를 차지한 건 물론 CNN이었다. 이번 이라크전쟁에서는 ‘알자지라’가 CNN에 강력한 도전장을 내밀었다. 하지만 게임이라는 신출내기 미디어가 등장했다. 더 매력적이다. 더 강한 힘을 가졌다.
바그다드를 폭격하기 위한 미군기가 날아오르자마자 게임 「C&C 제너럴」(Command & Conquer Generals, EA Games 2003)이 화제를 일으켰다. 이 게임은 「스타크래프트」와 같은 장르인 실시간 전략 시뮬레이션이다. 가까운 미래 지구에서 갈등이 벌어지는데, 세력구조가 제법 현실적이다. 지금까지 붙잡고 있던 패권을 절대 놓지 않으려는 미국, 새롭게 강대국으로 성장한 중국, 거기에 미국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려는 중동 지역 테러리스트 집단인 ‘지구해방군’이 전쟁을 벌인다. 현실을 너무 적나라하게 빗대다보니 중국이나 독일에서는 판매에 제한이 가해지는 일까지 벌어졌다.
셋 중 어느 세력이든 마음대로 선택해 플레이할 수 있다. 지구해방군이 되어 제국주의자의 기지를 공격하다가도 다음 판에서는 성조기를 든 미군이 되어 제 3세계에 폭탄세례를 퍼붓는다. 각 세력의 무기체계는 상이하다. 그렇기 때문에 게임을 더 잘 이해하고 더 효과적인 전략을 짜기 위해서는 진영을 계속 바꿔가면서 플레이해볼 필요가 있다. 놀라운 것은, 어느 쪽을 플레이해도 거부감을 느끼지 않고 기꺼이 각자의 이야기에 빠져들 수 있다는 것이다. 어느 한편에게는 감동적인 이야기이면서 상대편에게는 분노가 터지는, 혹은 속보이는 거짓말에 역겨워지는 이야기일 수밖에 없는 현실과는 많이 다르다.
게임 속 이야기에 게이머는 정당성을 요구하지 않는다. 굳이 현실이 아닌 것에도, 소설이나 영화에서는 이야기의 개연성을 찾고 밑바닥에 깔려 있는 입장을 구분해내는 예민한 독자라도 게임에 들어가서는 정당성을 따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플레이를 시작하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이 들어간 세계를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세계가 왜 그렇게 생겨먹었는지, 또 그것이 과연 정당한지는 중요하지 않다. 따지기 전에 먼저 움직여야 한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우선 나를 가로막고 선 적들을 없애야 한다.
2차대전을 배경으로 한 「메달 오브 아너」(Medal of Honor)에서 독일군에게 맞서 총을 겨누던 게이머가 숨돌릴 틈 없이 「레인보우 식스」로 들어가서는 인질을 붙잡고 있는 중동 테러리스트들을 죽인다. 죽여야 할 적이 독일군인지 테러리스트인지를 따지기 전에, 게이머는 죽인다(주어진 게임상황을 무조건으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구조가 게임의 내러티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졸고 「스펙타클로서의 게임과 판타지의 경험」, 디자인문화실험실 『디자인문화비평』 6호, 안그라픽스 2002 참조).
행위의 결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 스테이지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어떻게 그 난관을 벗어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만 소리 높여 이야기한다. 스토리 자체는 침묵한다. 중동 게릴라 스테이지와 미국군 스테이지 사이의 차이점은 스테이지의 난이도 차이로만 이해된다. 자신에게 던져진 난관과 극복을 뒷받침해줄 정도이기만 하면, 그 이야기가 어떤 것이라도 개의치 않는다. 게임 속 이야기는 무게가 없다.
그러나 게임이 종료되면 그때부터 이야기는 무게를 갖기 시작한다. 게이머는 자신이 플레이한 게임에 대해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고 싶어한다. 자신의 활약이 크면 클수록 전하고 싶은 이야기는 많아진다. 이야기가 무게를 가지기 시작하는 건 정확히 이 지점에서다. 자신의 영웅담을 펼치기 위해, 플레이 중에는 무의식 수준에서 무시했던 이야기들을 다시 끌어낸다. 하지만 정당성은 여전히 필요없다. 이미 게이머는 영웅이고, 이야기는 스스로의 영웅됨을 치장해주기 위한 수단일 뿐이기 때문이다.
자신은 그저 게임을 즐기기 위한 배경일 뿐이라고 게임 속 이야기는 중얼거린다. 어떤 미디어보다도 쉽게 사람들 속에 스며들어갈 수 있는 건 그 겸손의 미덕 때문이다. 영화나 다른 미디어들은 관객에게 오만하게 이야기를 던져준다. 반면 게이머는 플레이의 결과로서 스스로 만들어낸 영웅담을 얻는다. 주어진 이야기를 스스로가 극복한 난관의 결과라고 착각하게 된다. 게이머는 더이상 이야기를 듣는 이도, 보는 이도 아니다. 그는 스스로 말하는 자다.
그렇기 때문에 전쟁게임은 전쟁 영화나 노래, 소설보다 훨씬 강한 힘을 가진다. 다른 이의 눈으로 전쟁을 보고 듣는 게 아니라 스스로의 경험에 기반해 자기 입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물론 착각이다. 환상이다. 하지만 자기 자신이 주인공인 이야기를 자기 입으로 하면서, 그 정당성이나 리얼리티를 만들어내는 것 역시 마땅히 자신이 해야 할 것같이 느낀다.
게임을 통해 전쟁 이야기는 진화했다. 이전에는 전쟁 이야기가 단지 현실에서 떼어져 하나의 내러티브에 종속되는 것에 머물렀다. 날것으로서의 현실은 중요하지 않다. 알 수도 없고,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대신 미디어가 만들어내는 극장이나 TV 스크린 위의 내러티브를 수동적으로 수용한다. 하지만 게이머는 적극적으로 내러티브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정당성을 타인에게 역설하기까지 한다. 게임은 의사체험으로 만들어지는 하나의 가동된 현실을 구성하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