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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손홍규 소설집 『사람의 신화』, 문학동네 2005
리얼리즘 미학의 새로운 가능성
최강민 崔康民
문학평론가 c4134@chol.com
1975년생 작가 손홍규(孫弘奎)의 첫 창작집 『사람의 신화』는 80년대 민족민중문학이라는 아버지와 90년대 후일담문학과 환상문학이라는 어머니 사이에서 새롭게 태어난 자식이다. 양쪽에서 피를 이어받은 손홍규는 『사람의 신화』에서 전통적 리얼리즘 수법 대신 역사와 현실을 후경(後景)에, 비현실적 환상이나 신화를 전경(前景)에 배치한다. 이러한 다소 파격적인 모험은 주변으로 내몰린 역사와 현실을 중심에 복귀시키려는 새로운 전략의 반영이다. 이때 ‘현실/비현실’이라는 이항대립체계는 서로의 육체를 비추어주는 일종의 거울로 작용한다. 현실은 비현실을, 비현실은 현실을 추동하면서 상호의 경계선을 해체한다. 『사람의 신화』는 낯설게하기를 통해 2000년대 리얼리즘 미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다.
표제작 「사람의 신화」에는 손홍규 소설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소설의 전경에 배치된 것은 반신불수의 주인공인 ‘나’가 비인간이라는 종족으로서 겪는 비현실적 환상의 서사이다. 특히 단군신화를 패러디한 곰과 호랑이의 이야기는 주인공이 비인간임을 증명하는 신화로 작용하면서 서사를 낯설게 만든다. 이 소설에서 작가가 정작 말하고 싶었던 풍경인 군대에서 지뢰를 밟아 두 다리를 잃고 자살한 둘째형, 야간고등학교를 다니다 광주사태 때 암매장된 셋째형, 강간당해 실성해버린 여섯째 정희 누나, 강간범 광태를 죽이려다가 살인미수로 체포된 넷째형 등의 힘겨운 삶과 고통은 대개 후경으로 잠시 등장한다. 소설은 서사의 진행 속에 비현실적인 전경이 현실적인 후경을 호출하면서 소설적 긴장감을 획득한다. 정희 누나가 잠든 아버지의 생식기를 자르려고 하다가 자살하는 폭력의 악순환 속에서 비인간이었던 ‘나’는 인간세계로 복귀한다. 이 지점에서 경계선을 넘나들던 비현실과 현실의 세계는 하나로 겹쳐지면서 작중인물의 진한 아픔이 독자에게 전달된다. 인간으로의 복귀는 반신불수로 상징되는 무기력과 절망에서 벗어나 현실변혁에 동참하겠다는 작가의 굳건한 의지를 대변한다. 비인간의 모티프는 가계부채로 인해 집단자살하는 가족이 등장하는 「거미」에서도 나타난다. 카프카의 『변신』을 떠올리게 하는 주인공 여학생은 인간에서 거미로 탈피하는 비현실적 환상을 통해 고통스러운 현실을 고발한다. 작가는 일가족의 자살사건을 통해 IMF 구제금융 이후 사회 전반에 드리워진 대량실업과 부도, 그리고 궁핍이라는 시대적 자화상을 우회적으로 드러낸다.
손홍규 소설의 또다른 특징은 현실과 비현실이라는 이중적 구조에 현재와 과거라는 이중적 구조가 겹쳐 있다는 점이다. 「갈 수 없는 여름」 「폭우로 걸어들어가다」 「바람 속에 눕다」는 80년대의 삶이나 광주민주항쟁을 은연중에 상기시킨다. 친구나 연인으로 형상화되는 80년대는 순수와 열정이 지배하던 긍정적 시기로 기억된다. 이에 비해 현재의 세계는 후기자본주의에 의해 삶의 순수성과 진정성이 훼손된 불모의 시대이다. 손홍규는 과거의 기억을 통해 현재의 삶을 비판한다는 점에서 90년대 후일담소설과 연결되지만, 자기연민의 감상주의와 결별해 있다는 점에서 차별성을 보인다. 그의 소설에서 문제적 개인들은 현실에서 승리하기보다는 패배하는 유형에 가깝다. 「바람 속에 눕다」 「폭우 속으로 걸어들어가다」 「지옥으로 간 사나이」에 등장하는 유산(流産) 모티프는 바로 이러한 현실을 상기시켜준다. 그러나 “불확실한 희망이, 우리가 지닌 유일한 희망”(184면)이라고생각하는 작가에게 현실의 패배는, 절망은 오히려 더 나은 세계와 삶을 채찍질하는 자극제일 뿐이다. 작가는 지옥으로 대표되는 타락한 현실세계에서 도피하거나 절망하기보다 스스로 그 속으로 뛰어드는 적극적 전략을 선택한다. 이처럼 2001년 문단에 등장한 그의 소설에는 80년대 작가가 90년대에 직면해 느꼈던 환멸, 패배주의, 냉소주의가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90년대에 진보진영이 받은 상처를 70년대생 젊은 작가들이 일정부분 극복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 주목할 부분은 손홍규의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는 ‘간다’라는 동사형이다. 「아이는 가끔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난다」 「바람 속에 눕다」 「지옥으로 간 사나이」 「장마, 정읍에서」 「너에게 가는 길」에서 작중인물들은 좀더 나은 세계를 향해 길을 떠난다.‘허물, 고치, 탈피’라는 변신 모티프가 자주 등장하는 것도 이것과 무관하지 않다.‘이곳’의 세계에서 ‘저곳’의 세계로 ‘가는’ 작중인물의 모습은 정체된 삶에 대한 거부와 역동적인 삶에 대한 지향을 보여준다. 작중인물이 동사형의 이데올로기를 표출하는 것은 타락한 현실에 대한 분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세계를 꿈꾸고 건설하려는 낭만주의적 정신의 발현이기도 하다. 그의 소설이 지닌 낭만성은 환상성과 결합하여 이전 세대가 상실해버린 유토피아적 전망을 소생시킨다.
『사람의 신화』는 새로운 소설의 가능성을 제시한 것이 사실이지만 아쉬움도 있다. 우선 비현실과 현실의 이중적 구조가 긴밀하게 연결되지 못한 채 때때로 어긋나고 있다는 점이다. 단적인 예로 「갈 수 없는 여름」에서 본능적인 살해와 적의에 시달린 한 남자의 비현실적인 서사를 80년대 국가폭력의 서사와 연결시키는 부분이다.80년대 국가폭력을 비판하려는 의도였다면 주인공이 체험한 폭력도 사회학적 측면에서 유사성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할 때, 작가는 견강부회(牽强附會)의 오류에 빠질 수 있다. 신화, 환상, 알레고리 등을 통해 현실의 모순을 새롭게 전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깊이있게, 그리고 집요하게 파헤치는 것도 못지않게 중요하다. 낭만주의에 침윤된 그의 작중인물은 타락한 현실에 대한 저항이 대부분 선언으로 그칠 뿐 구체화되어 나타나지 않는다. 그의 소설에서 당대 현실의 환부는 대개 추상적이거나 관념적 형태로 등장한다. 물론 손홍규는 환경미화원의 열악한 노동현실을 고발한 「장마, 정읍에서」처럼 당대 현실의 구조적 모순과 노동자의 아픔을 진솔하게 형상화하는 당찬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환경미화원 최씨의 아들 상우가 갑자기 교통사고로 중상을 당해 병원에 실려오는 결말 부분은 개연성보다 우연성이 강한 한계를 노출한다. 또한 다양한 세계의 중층적 층위를 보여주기 위해 1인칭에서 3인칭 시점의 세계로 도약하는 것도 필요하다.
‘어떻게’와 ‘무엇’이, 거대서사와 미시서사가 팽팽하게 긴장하는 손홍규의 소설미학. 나는 작가가 첫 창작집에서 보여준 당찬 패기와 도전을 꿋꿋하게 이어나가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