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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강문숙 姜文淑
1955년 경북 안동 출생. 1991년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 1993년 『작가세계』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잠그는 것들의 방향은?』이 있음. mugu1225@hanmail.net
청동우물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그의 아내와 지나간다.
댕기머리 아들이 천자문을 끼고 지나간다.
헛기침하며 교자 탄 나으리가 지나가고
농사꾼 방물장수 유기전의 사내들이 떠들며 지나간다.
쪽찐 머리의 그의 아낙들 젖통을 흔들며 지나간 뒤
소와 말, 돼지와 홰를 치던 닭들이, 쥐새끼들이 지나갔으리.
천체박물관 전시실 안, 仰釜日晷 청동의 육중한 원을 따라 하염없이 감겼다가 풀리는 소리들이 있다. 웅웅거리며, 무수한 결을 따라 돌다가 전시실을 가득 채운다. 그 소리는 푸르다.
기록되지 않은 역사란 때로, 소리가 되어 떠돌기라도 하는 것인지, 저 깊은 시간의 우물 속을 들여다보노라니 머리끝이 쭈뼛해진다. 사소한 기억까지도 담고 있는 청동우물.
손바닥을 대어보니, 사라진 것들이 속속 돌아와 울음 섞인 노래를 풀어놓는다. 자꾸 슬픔 쪽으로 기울어지며, 무중력의 그 속으로 빨려들어가던 나는 문득, 어디서 왔는지 한점 서러운 꽃잎이 떨어지는 걸 본다.
비와 바람과 햇빛들이 일렁이는 심연에서, 이윽고 아득하고도 맑은 종소리 울려나온다.
어느 사원인들 저토록 깊을 수 있을까.
✽仰釜日晷(앙부일구): 저잣거리에 두고 지나가는 사람마다 볼 수 있게 한, 세종 때 만든 해시계.
그녀들
마뜨료쉬까, 할머니 거기 계셨군요.
둥그런 통치마 마름 펼쳐놓고
반짇고리 꺼내어 바느질하다가
잠깐, 배아파 니 엄니를 낳았니라.
한 사흘 베틀 위에 앉을 일 면해서
편할 줄 알았는데, 한밤중에도
철커덕, 탁, 탁, 베틀소리 잠깨셨다지요.
삼십촉 알전구가 하품을 해대는 새벽녘
어렴풋한 잠결 머리맡에, 물레를 돌리시는
할머니와 처녀 엄마,
사각사각 목소리도 닮으신 당신들은
밤을 새우실 요량이시군요.
무명 흰 치마 입으시고 할머니,
광화문에 계시는군요.
아침이면 마이니찌신문에 전송되는
사진 속에서, 소리없는 울음 혼자 우시겠지요.
밤새워 돌리시던 물레로 짠 그 치마
아직도 입고 계시는군요.
오늘은 행진하는 촛불 속에서
소녀들이 울고 있네요.
학교에서 배운 대로 할머니를 열고
어머니를 꺼내니, 어쩌면 좋아요.
그 속에 또 한다발의 할머니가
꾸역꾸역
✽마뜨료쉬까: 몸통을 열면 겹겹이 같은 인형이 들어 있는 러시아 전통 목각인형.
동점역에서
눈꽃열차
문득, 나를 반올림하고 싶어진다.
얼어붙은 입도 모자라
눈꽃 보러 떠난다 하니, 누군가
헛웃음 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시큰거리는 발목을 이고 떠나는 여행이란
겨울나무처럼 제 속으로 내는 길일 터.
긴 여행의 쉼표처럼
동점,
태백선의 행간 속에 숨어 있구나.
가끔, 가만히 엎드려 기다리다
마른 김 다발처럼 사라지는 화물차 서너 칸.
눈나라에서 추방당한 대역죄인처럼
뜨거운 팥죽에 코를 박는 사람들.
잿빛 새 한마리, 끝내
저 적막의 간이역을 통과하지 못하고
날개를 접는다.
여전히 동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