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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홍윤숙 洪允淑
1925년 평북 정주 출생. 1947년 『문예신보』, 48년 『신천지』 『예술평론』으로 등단. 시집 『장식론』 『하지제(夏至祭)』 『타관의 햇살』 『사는 법』 『마지막 공부』 등이 있음.
빈 항아리
비어 있는 항아리를 보면
무엇이든 그 속에 담아두고 싶어진다
꽃이 아니라도 두루마리 종이든 막대기든
긴 항아리는 긴 모습의
둥근 항아리는 둥근 모습의
모없이 부드럽고 향기로운
생각 하나씩을 담아두고 싶어진다
바람 불고 가랑잎 지는 가을이 오니
빈 항아리는 비어 있는 속이 더욱 출렁거려
담아둘 꽃 한송이 그리다가
스스로 한묶음의 꽃이 된다
누군가 저처럼 비어서 출렁거리는
이 세상 어둡고 깊은 가슴을 찾아
그 가슴의 심장이 되고 싶어진다
빈 항아리는 비어서 충만한
샘이 된다
그 집 2
후박나무 몇그루 하늘을 가리고
담쟁이덩굴 촘촘히 창틀을 짜는,
삼월에 산수유 사월에 목련이
우물같이 깊은 뜰에 잠시 춘화도를 그리기도 하는,
사철 황량한 빈 뜰에 부서진 의자 하나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그 집은 사방 창과 문뿐인 헛간이다
가끔 그 집에 장신의 우람한 장년남자 하나 찾아오지만
매번 먹구름과 빗발과 드센 바람 풀어놓고
어디론가 말없이 사라져버린다
그럼에도 캄캄하게 돌아선 그의
산처럼 어두운 뒷모습이
남몰래 검붉은 피 들끓게 한다
황량한 뜰 부서진 의자엔
그 사이 거인의 손바닥 같은 후박나무 잎새
굵은 빗발치듯 떨어져 쌓이고
한세상 빈집 지키기에 백발이 된 주인의 등뒤에
그는 불현듯 기척없이 돌아와 선다
서서 후박나무 가지 같은 두팔을 얹고
지그시 지구의 무게로 내리누른다
그 무게 숨막혀 황망히 일어서 돌아보면
그는 이미 저만치 뒷모습만 남기고
그림자 길게 어둠으로 지워져간다
그는 누구일까
한평생 숨바꼭질하다가 끝나가는 그는……
나는 알 수 없는 그를 향해
날마다 버선발로 지상을 걸어 그에게로 가고
어느날 황홀한 포옹 꿈꾸게도 하는
그는 나의 무엇일까
그 알 수 없는 빈객을 기다리느라 그 집은
반세기 창과 문 열어놓고 부서져가고 있다
적막 2
숲속엔 중생대의 공룡 몇마리 잠들어 있나보다 땅은 아름다운 생각으로 청청한 나무와 풀과 꽃 들을 지어 잠든 공룡의 등을 부드럽게 덮어주고 서늘한 바람 풀어 이마를 씻어내며 쾌적한 수면을 위한 깊은 고요를 한올 한올 면밀하게 짜고 있다
나는 그 숲의 생각과 고요에 이끌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한편의 서사시 같은 숲을 읽으러 비경(秘境)의 숲속으로 숲속으로 잠입해간다 그러다 허리를 잡는 잡초 덤불에 빠져 들꽃들의 가슴을 마구 짓밟고 허약한 풀대궁을 사정없이 꺾는다 그 순간 꿈틀꿈틀 무엇인가 땅밑이 열리는 기척 들리는 것 같고 수억년 잠들었던 공룡이 부시시 눈뜨고 일어서는 것 같은 오싹한 두려움이 엄습해온다 나는 가던 길 멈추고 뒤도 보지 않고 달아나온다. 달아나오는 등뒤에서 완전히 잠깬 공룡의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포효(咆哮)하며 천둥치고 지동치며 덮쳐올 것 같아 숨 멎도록, 숨죽이고 달아나와서 비로소 돌아다본다 숲은 아무 일 없이 그저 그 모습 그대로 의연하고 잠잠하다
그제서야 나는 풀숲에 신발을 빠트리고 온 것을 깨닫는다 그 신발 찾으러 다시 숲으로 간다 늘 같은 반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