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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손세실리아
1963년 전북 정읍 출생. 2001년 『사람의 문학』으로 등단. soncecil@hanmail.net
초경
포도 두 근 샀더니
맛이나 보라며 덤으로 준 천도복숭아를
단숨에 먹어치운 딸아이가
화살나무 종아리처럼 붉은 깡치를 들고
버릴 데를 찾아 두리번거리기에
아파트 화단에 던지라 했더니
길가에 침 뱉는 무식한 사람쯤으로
나를 빤히 올려다본다
씨앗은 생명이라고
집 안에 들이면 귀신 내쫓는다는
키 작은 개복숭아나무도 거기 살고
모시나비의 집도 바람자락도
거기서 함께 키를 키운다고
저 혼자 헉헉 숨 몰아쉬다가
어떤 놈은 말라죽고
어떤 놈은 썩어 나자빠지고
또 어떤 놈은 흙에 뒤섞여
꼼지락꼼지락 발아(發芽)하는 거라고
최후까지 기를 쓴 놈들이 살아남아
참외도 되고 호박도 되고
사과나무 한그루 그늘이 되는 거라고
엄마의 몸이라고
그제서야 안심하고
낙엽 수북한 화단 거름진 흙에
천도복숭아 씨를 내려놓고 돌아오던 날 밤
열세살 딸아이 홑청에 꽃물이 배었다
기차를 놓치다
골판지 깔고 입주한 지 얼마 안되는
말수 적고 어깨 심히 휜 사내를 향해
눈곱이 다층으로 따개비를 이룬
맛이 살짝 간
나 어린 계집의 수작이 한창 물올랐다
농익은 구애가 사내의 귓불에 가닿자
속없는 물건은 불끈 일어서고
새벽, 영등포역
지하도에 내몰린 딱한 사내와
쫓겨난 비렁뱅이 계집이 눈맞았는데
기어들어 녹슨 나사 조였다 풀
지상의 쪽방 한칸 없구나
달뜨고 애태우다
제풀에 지쳐 잠든 사내 품에
갈라지고 엉킨 염색모 파묻은
계집도 따라 잠이 들고
살 한점 섞지 않고도
이불이 되어 포개지는
완벽한 체위를 훔쳐보다가
첫 기차를 놓치고 말았다
고단한 이마를 짚고 일어서는
희붐한 빛,
저 철없는 아침
저문 산에 꽃燈 하나 내걸다
산을 내려오다 그만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늙은 나무의 휜 뼈와
바람에 쪼여 깡치만 남은 샛길이
세상으로 난 출구를 닫아걸고 있습니다
아직은 사위가 침침하지만
곧 사방 칠흑 같은 어둠이 밀려들겠지요
그렇다고 산에 갇힐까 염려는 마세요
설마 그러기야 할라구요
또 그런들 어쩌겠어요
혹시 보이시는지
점자를 더듬는 소경처럼
빛이 아물어야만 판독 가능한
저 내밀한 것들의 아우성 말입니다
밤하늘을 저공 비행하는
반딧불이의 뜨거운 몸통과
흐르지 못하고 서성이는 시린 산그늘,
팥배나무 잎맥에 파인 바람의 지문과
억겁을 휘돌아 식물의 육신을 빌려
짓무른 환부를 째고 해산한
꽃잎 끝 눈물 같은 사리 한알
내 안의 오래된 상처도
푸르고 곱게 부식되어
다음 생엔 부디
이마 말간 꽃으로 환생하시기를
삼가 합장 또 합장하며
저문 산에 꽃燈 하나 내걸고 내려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