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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평
21세기에 되돌아본 수묵화의 의미
‘장우성·리커란’전
이주현 李周玹
홍익대 강사·미술사학 Kirchelee@yahoo.com
리 커란(李可染,1907~89)의 화풍을 처음 접한 것은 우연하게도 중국에 체류하던 90년대 초반,TV에 방영된 애니메이션을 통해서였다. 소를 잃은 목동이 시내를 건너고 계곡을 지나 소를 다시 찾는다는 단순한 줄거리를, 한마디의 대사도 없이 나직한 피리소리와 물소리만을 배경으로 10여분 동안 방영했던 것 같다. 마치 한폭의 수묵화를 보는 듯 절제된 먹선으로 그려진 소와 목동, 담채로 묘사된 산수풍경은 일본만화의 현란한 색채와 날카로운 효과음에 길들여진 눈과 귀에는 신선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후에 이 단편 애니메이션의 화풍이 중국의 대표적 수묵화가로서 수많은 제자를 길러낸 리 커란의 ‘목우도(牧牛圖)’ 연작에서 차용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그의 화집을 사고 그에 관한 자료를 구해서 보았던 것이 기억난다.
이같이 화집으로나 접할 수 있던 리 커란의 작품들이 대거 뻬이징(北京)으로부터 나들이하여 지난해 11월부터 덕수궁 현대미술관에서 전시되고 있다. 전시중인 80여점의 수묵화는 그의 후손들이 조직한 ‘리커란예술기금회’의 소장품들로, 리 커란의 작품세계를 대표하는 완성도 높은 산수·인물·화조화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그의 작품은 올해로 미수(米壽)를 맞은 한국화단의 거장 장우성(張遇聖,1912~ ) 화백의 작품과 함께 전시되고 있어 미술계의 주목을 끌고 있다. 한국적 모더니즘의 창출자로 평가되는 장우성은 알려진 바와 같이 해방 이후 전통화단을 선도한 동양화 2세대의 대표작가로서 ‘시서화 삼절(詩書畵三絶)’의 문인화 경지를 능숙히 구사할 줄 아는 보기 드문 화가 중의 한사람이다.
리 커란과 장우성은 ‘근대화’의 이름 아래 범람했던 일본화풍과 서양화풍의 위세 속에서도 ‘필(筆)’과 ‘묵(墨)’이 갖는 고유의 미감을 깊이 천착해 이를 새로운 시대감각에 맞게 재창조함으로써 침체된 전통화단에 활력을 부여한 화가로 평가된다. 이번 전시회는 두 화가의 다양한 작품들을 통해 이들의 작품세계를 총괄적으로 제시함으로써 양국 수묵화의 흐름을 변별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하겠다.
중국의 경우 20세기 수묵화의 역사는 ‘위기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근대 이전까지는 절대적 우위를 차지하던 수묵화의 가치가 진보적 지식인들에 의해 구시대의 산물로 평가절하되면서 ‘양화(洋畵)’와 ‘중국화(中國畵)’의 우위를 가리는 치열한 논쟁이 촉발되었고, 전통회화는 ‘서양화 우위론’의 지속적 공격대상이 되었다.1949년 사회주의정부의 출범 이후에도 “예술은 인민의 생활상을 반영하고 인민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마오 쩌뚱(毛澤東)의 절대명제 아래, 소련식 ‘사회주의 사실주의’ 양식을 적극 받아들인 유화와 수채화에 우위를 내어주면서, 수묵화는 다시 한번 지식계급의 정신적 유희로 폄훼되는 위기를 맞게 되었다.
그리하여 중국의 전통화단은, 먹이 가진 ‘추상성’을 당이 요구하는 ‘사실성’과 어떻게 성공적으로 접목할 것인가, 나아가 수묵화의 정치적 효용성을 어떻게 입증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중대한 과제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당시 뻬이징 중앙미술학원의 교수로 재직중이던 리 커란은 폭넓은 스케치 여행을 통해 중국의 산하를 직접 체험하고, 직접 본 실경을 서양화법을 참조해 소묘하여 ‘수묵사생산수(水墨寫生山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함으로써 위기에 처한 전통화단의 새로운 활로를 개척했다.
1960년대 중국이 소련의 정치·경제적 영향력에서 벗어나 독자노선을 택하면서 자국의 전통미술을 수호하자는 목소리가 중국 내에서 높아지자, 수묵화의 효용이 다시 긍적적으로 고려되었다. 당시 리 커란은 먹의 다양한 조형적 가능성을 실험하기 위해 묵법 위주의 화풍을 구사했는데, 채색이 배제된 리 커란의 ‘검은’ 화면은 사회주의를 상징하는 ‘붉은색’과 대치되는 것으로 인식되면서 혁명성이 결여된 ‘흑화(黑畵)’로 비판받기에 이른다. 미술의 암흑기라 할 문화혁명기에는 ‘우익지식분자’로 몰려 창작을 금지당한 것은 물론 장기간의 강제노역에 따른 심적 고충으로 실어증에 시달리기도 했다. 리 커란에게 본격적인 표현의 자유가 주어진 것은 1979년 떵 샤오핑(鄧小平)의 개방정책 이후라 할 수 있다. 문화혁명기의 공백으로 인해 피폐해진 미술계에서, 리 커란은 전통 수묵화의 마지막 계승자로 추앙되면서 생애 최고의 영예를 누렸다. 목가적이고 서민적인 정취의 ‘목우도’와 전통 수묵기법에 빛의 효과를 결합한 ‘이강산수(냥江山水)’는 전통적 기법을 현대적 미감과 성공적으로 결합한 작품으로 각광을 받았으며, 그의 작품세계와 작품 제작과정을 담은 기록영화가 여러 편 제작되었다. 현재 뻬이징의 중앙미술학원을 중심으로 길러낸 그의 제자들이 ‘리커란화파’ 산수의 맥을 이으며, 현대 수묵화의 흐름을 주도하고 있다.
중국과 달리 장기간의 일제 식민통치를 경험해야 했던 한국의 근대미술은 사뭇 다른 양상으로 발전했다. 일제 강점기에 행해진 강압적 미술정책의 여파로, 미술계를 자주적으로 이끌어갈 정신적 뿌리를 갖지 못했던 한국화단은 1945년 해방을 맞으며 일제화풍의 불식, 민족미술의 건립이라는 두 가지 과제에 직면해 있었다. 해방 이전 김은호(金殷鎬,1892~1979)의 영향 아래 채색인물화가로 자리잡아가던 장우성은 해방 후 서울대 동양화과 교수, 대한민국 미술전람회 동양화부 심사위원을 역임하면서 화풍에 일대 변혁을 단행했다. 그는 장식적 채색과 도안적 구도로 대표되는 일본화풍과 과감히 결별하고, 간결한 선묘(線描) 위주의 수묵담채화에 몰입함으로써 일본적 감성에서 탈출하는 데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6·25전쟁이 끝나고 미국을 통해 유입된 추상표현주의가 동양화단에도 막강한 영향을 미치며 수묵화의 추상화화를 가속화하자 장우성은 동양의 정신주의로 회귀할 것을 주장하며 서양의 조형논리에 의해 동양화의 본질이 왜곡되는 것을 강도높게 비판했다.5·16군사쿠데타 이후의 정세 변화로 교수직과 심사위원직을 사퇴한 후에는 관변성에서 벗어나 재야화가의 입장에서 새롭게 ‘전통정신과 시대성’을 결합한 문인화 세계를 구축했으며,1979년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환경문제, 급격한 산업화에 따른 인간성의 훼손, 분단문제 등 사회성있는 소재를 다루기도 했다. 대상에 고도의 표현력을 부여하는 장우성 특유의 응축된 서예적 필선과 담백한 색채는 서울미대 출신의 신진세대로 이어지면서, 한국화단의 주요한 흐름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세련되고 간결한 선묘 위주의 장우성의 문인화와 거칠고 투박한 듯하나 먹의 무한한 생명력을 느끼게 하는 리 커란의 수묵화를 보면서, 우리는 20세기 근현대사의 질곡을 몸으로 겪은 두 대가가 일구어낸 양국 전통회화의 현주소를 접하게 된다. 관람객의 발길로 성황을 이루던 최근의 서양미술전시회에 비해 한산하기만 한 덕수궁 석조전의 전시장이 쓸쓸하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지만,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생명력을 갖는 수묵화의 매력을, 쉽고 빠른 것에 길들여져 있는 우리의 감각이 오래 인내하며 음미하고 감상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