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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평
야스꾸니 신사와 사까모또 료오마
시바 료오따로오 『료오마가 간다』의 경우
김응교 金應敎
시인 eungsil@hanmail.net
박물관 이야기
야스꾸니 신사(靖國神社)는 하나의 거대한 정신적 박물관이다. 야스꾸니 신사라는 말에서, 사무라이의 투구를 연상시키는 둔중한 곡선 지붕과 그 앞에 고개 숙인 검은 정장의 일본인 정치가를 떠올릴 이도 있겠다. 야스꾸니 신사에 가면 꼭 들러야 할 곳이 있다.“고결한 인물을 앉히고 즐기며 배운다”는 의미의 유우슈우깐(遊就館)이라는 전시관이다. 전함에 돌진하여 자폭하는 ‘인간어뢰’, 쥐고 흔들면 날개가 흔들릴 정도로 가벼운 자살폭격기, 전사자의 일기·유품·혈서 등을 보고 ‘광적인 군국주의’를 회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우익적인 일본인이 이곳에서 느끼는 것은 부정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종교적인 성스러움이다. 일본인에게 이곳은,1853년 개항 이후 태평양전쟁까지 전쟁에서 숨진 246만명의 전몰자가 주신(主神)으로 ‘모셔져’ 있고, 이 신들을 찬미하는 ‘영혼의 축제(みたま祭り)’가 벌어지는 성소(聖所)1인 것이다. 더욱이 야스꾸니 신사는 메이지 신궁(明治神宮), 노기 신사(乃木神社)와 더불어 국가가 공인하는 ‘국가주의 성전’이다. 그만치 야스꾸니 신사는 일본정신의 핵심부에 있다.
유우슈우깐은 노인들이나 방문하는 추억의 역사관이라는 것은 이제 옛말이다. 이곳은 요즘 젊은이들의 데이트 장소이며, 부모와 아이들이 역사 공부하는 장소가 되었다.2002년 7월 13일, 개관 120주년을 기념해서, 거대한 대리석 입구가 이제는 토오꾜오(東京) 번화가의 까페 같은 통유리 입구로 바뀌었고, 전시상태도 세련된 방식으로 변했다. 홈페이지(www.yasukuni.or.jp/yusyukan) 역시 세련된 디자인과 전자음악으로 젊은층의 호감을 사고 있다. 새로운 입구로 들어가면 까페떼리아, 서점과 기념품 판매소가 있다. 시원스레 만들어진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면 영화실이 있는데,50분짜리 다큐멘터리 영화 「우리는 잊지 않는다(私たちは忘れない)」를 볼 수 있다. 전시관에 들어가면 메이지 시대를 연 요시다 쇼오인(吉田松陰) 같은 인물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전시물의 중심에 놓여 있는 것은 사까모또 료오마(坂本龍馬,1835~67;이하 ‘료오마’로 줄인다)의 초상화다. 료오마는 1883년(메이지 16년)5월에 야스꾸니 신사에 합사(合祀)되었다. 하지만 증축되기 2년 전의 유우슈우깐에서는 료오마의 사진이 이렇게 눈에 띄지 않았다. 유우슈우깐 안의 서점에 가도 전에 없던 료오마 특설코너가 자리잡고 있어, 그에 관한 동화책·전기물·평전·만화책·연구서 등을 구할 수 있다. 어떤 이유로 그가 야스꾸니 신사에 놓이게 되었을까.
료오마는 일본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영웅이 되어가고 있다. 시바 료오따로오(司馬遼太郞,1923~96)의 『료오마가 간다(龍馬がゆく)』는 이미 오래전에 ‘제국의 아침’이란 이름으로 번역되어 스테디쎌러가 되었다. 야마모또 소오하찌(山本莊八)의 『사까모또 료오마』도 소개되었다. 또한 도오몬 후유지(童門冬二)의 『사까모또 료오마』와 미조우에 유끼노부(溝上幸伸)의 『사까모또 료오마와 손정의의 발상의 힘』은 료오마를 ‘성공한 CEO’로 소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김무곤 교수는 『NQ로 살아라』에서, 그를 자신의 공을 타인에게 돌리고 다른 사람의 능력을 먼저 인정해준 인물, 높은 공존지수를 보여준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 또한 청와대 도서관의 경우,2003년 9월 말 『료오마가 간다』가 국내서적을 제치고 문학베스트쎌러를 차지했다고 한다.“료오마가 구체제인 막부체제를 무너뜨리려 했다는 점이 개혁정권을 자처하는 청와대 사람들의 감성과 맞아떨어진 것으로 보인다”2고 한다. 웹에도 료오마를 사랑하는 까페가 여럿 있다. 료오마는 왜 일본과 한국에서 영웅이 되었을까. 그를 소설로 살려낸 시바 료오따로오는 야스꾸니 신사와 어떤 관계가 있을까.
영웅 이야기, 사까모또 료오마
『료오마가 간다』는 료오마를 가장 아끼던 누이 오또메(乙女)와 대화 나누는 장면부터 시작된다. 어릴 때는 공부도 못하고 늘 ‘울보 료오마’로 불리며 바보 취급받았고, 어디에서나 쫓겨나기 일쑤였으며, 선생이 그를 포기해버릴 정도였던 료오마. 그가 열두살 때 죽은 어머니를 대신해 세살 위의 오또메는 료오마의 성장에 큰 역할을 했다.1852년, 열아홉살 때 그는 에도(江戶,토오꾜오의 옛이름)로 올라가 본격적으로 검술수업을 쌓기 시작한다. 다음해인 1853년, 미국의 페리 제독이 군함 네 척을 이끌고 개항을 요구하는 ‘쿠로후네(黑船) 사건’이 일어난다. 이에 자극받은 료오마는 ‘존왕양이(尊王攘夷)’파와 사귀며 그들의 영향을 받게 된다. 존왕양이파 료오마는, 서양을 모방만 하려는 문제의 원인이 서양의 영향을 받은 카쯔 카이슈우(勝海舟)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그를 죽이러 간다. 그런데 “일본은 외국의 발달한 지식과 기술을 배워야 한다”는 카이슈우의 말에 되레 감동받은 료오마는 그의 제자가 되는데, 그의 ‘영웅 이야기’는 이때부터 시작된다.
첫째, 카이슈우의 영향을 받은 료오마는 카이슈우를 도와 코오베(神戶) 해군조련소 설립에 참여하고, 지금의 종합상사라 할 수 있는 해운무역회사 ‘카이엔따이(海援隊)’를 결성한다. 일종의 군사상사를 설립했던 것이다. 이것은 일본이 나아가야 할 길을 보여준 첫걸음이었다. 둘째, 료오마는 원수지간이던 사쯔마 번(薩摩藩,현재 카고시마 현)과 쬬오슈우 번(長州藩,현재 야마구찌 현)을 화해시킨다. 그는 일본의 미래를 위해 이들 양자를 맺어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카이엔따이를 통해 바꾸후(幕府)에 의해 무기수입이 금지된 쬬오슈우에는 사쯔마에서 무기를, 쌀이 부족하던 사쯔마에는 쬬오슈우에서 쌀을 들여오게 하는 것으로 ‘삿쬬오(薩長)’ 동맹을 이끌어냈다. 이 삿쬬오 동맹의 체결은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되는데 그 중심에 바로 료오마가 있었다.
셋째, 료오마는 메이지 정권의 국가적 틀을 만들어낸다. 그는 삿쬬오 동맹 이후 바꾸후와 각 번을 하나로 하기 위해 정권을 바꾸후에서 천황으로 반환하는 ‘타이세이 봉환(大政奉還)’을 추진했다. 당시 일본의 어느 누구도 바꾸후 타도 후의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다. 이때 그는 배 안에서 구상한 여덟 가지 방책, 곧 선중팔책(船中八策)을 제안하는데, 이는 근대 일본의 국가적 기틀 마련에 기본적인 역할을 했다. 료오마의 큰 특징 중 하나는 양이파·개국파에 관계없이 많은 사람들과 접한 것이다. 그가 일본을 하나의 국가로 만들어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하지만 ‘타이세이 봉환’ 한달 뒤인 1867년 11월15일, 그는 친구인 나까오까 신따로오(中岡愼太郞)와 함께 쿄오또(京都)에 있는 오오미야(近江屋)에서 암살당한다. 그의 희생의 결실인 양 그후 일본은 메이지유신을 맞이한다.
서른세살에 암살되기까지 일본 근대화에서 중추적 역할을 했던 영웅 료오마가 당시 사무라이들과 다른 점은, 해외로 눈을 돌렸다는 점과 철저한 행동력을 갖췄다는 것이다. 매년 11월 15일 쿄오또에서 열리는 료오마 위령제에는 전국에서 몰려온 많은 팬들이 참여한다.
일본판 오리엔탈리즘, 시바 료오따로오의 사까모또 료오마
1962년 6월부터 4년간 『산께이신문』에 연재된 8000매 분량의 장편소설 『료오마가 간다』는 출판되자마자 밀리언쎌러가 됐고, 현재까지 1억부 이상 팔리면서 이른바 ‘료오마 전설’이 확산되었다.1968년 국영 NHK에서 이 작품을 대하드라마로 만들어 방영한 이래 몇번씩이나 드라마 혹은 영화로 제작되었다. 또한 2000년을 맞아 『아사히신문』에서 기획한 특집 설문조사 ‘지난 천년간 최고의 정치지도자’에서 료오마가 1위에 올랐다. 일개 하급무사가 토꾸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나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같은 영웅들보다 더 존경과 사랑을 받은 것이다. 컴퓨터게임도 발매되어 씨뮬레이션 롤플레잉게임 「유신의 폭풍」에서는 료오마를 주인공으로 한 유신지사파와 히지까따 토시조오(土方歲三,1835~69)를 주인공으로 한 신센꾸미(新撰組) 둘 중 하나를 골라 대결시키게 한다.
작가 시바 료오따로오도 일본인에게 영웅이 되었다.2000년 6월 29일자 『아사히신문』에 나온 ‘천년의 문학자’라는 인기투표에서, 천년 동안의 일본 작가 중 그가 3위를 차지한 것이다.3과연 그가 일본인에게 무엇을 주었기에 이리도 높게 평가받을까. 답은 간단하다. 그가 일본인에게 ‘잃었던 민족적 자존심’을 회복시켜주었기 때문이다.
전쟁으로 얻어맞아 찌부러진, 민족적 자긍심을 빼앗긴 일본인.‘민족적 자긍심’이라는 말 자체가 일종의 터부가 되어 전쟁중 군국주의를 연상시키는 말로 규탄되는 환경에 처했던 일본인. 그 일본인이 마침내 간신히 자신감을 회복하기 시작했던 고도경제성장기에, 『료오마가 간다』를 비롯한 일군의 시바 료오따로오의 작품이 등장했다. 이러한 작품은, 고도성장에 의해 만들어진 ‘대량의 실무가적(實務家的) 생활자층’을 중심으로 압도적 지지를 받게 된다.(…) 나 자신도, 일본의 근현대사를 보는 시각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밖에 없었던 최초의 계기를 부여해준 것은, 다름아닌 시바 료오따로오의 작품이다.4
이른바 ‘자유주의 사관’을 주장하여 문제의 『새로운 역사교과서』(2001)를 만들었던 토오꾜오대학의 후지오까 노부까쯔(藤岡信勝) 교수의 말이다. 이 소설은 ‘메이지유신 이후의 근대국민국가 완성’이라는 자랑스러운 성공담을 ‘국민적’ 층위에서 윤색한 최대의 성공작이다. 료오마는 고도성장기에 기업가들이 배워야 할 영웅이 되었고, 작가 시바 료오따로오는 근대 일본을 ‘성공 이야기’로 자신있게 내놓아, 패전 후의 일본인들에게 거대한 자신감을 불어넣은 이른바 ‘국민작가’가 되었다.
그렇다면 시바 료오따로오가 일본이 아닌 아시아 다른 나라를 보는 시각은 어떠할까. 그가 일본을 ‘성공 이야기’로 소개하는 방법은 중국과 한국을 비교하는 이른바 ‘시바사관(司馬史觀)’을 통해서다. 그는 중국을 점점 유교주의로 퇴보하는 나라로, 김대중 납치사건(1973)이 일어났던 한국을 조선시대로 퇴보하는 나라로 묘사하면서 ‘앞서가는 일본’을 내세운다. 이성시 교수는 ‘시바사관’의 한 단면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시바가 그려낸 성공 이야기의 골격이 확실해질 것이다. 즉 법가의 나라 → 문명 → 합리적 → 상품경제 → 자유·개인 → 근대자본주의라는 흐름 속에서 근대 일본의 성공 이야기가 자리잡고 있으며, 이에 대해 중국·한국은 유교의 나라 → 문화 → 불합리 → 억상(抑商) 정책 → 가족주의 → 대정체라는 대칭 항목으로서 묘사, 일본과는 근본적으로 구별하는 작업이 시도되고 있다.5
법가(法家)의 나라 일본은 성공했고, 유교의 나라 중국과 한국은 대정체를 겪고 있다는 생각, 이른바 ‘시바사관’은 ‘일본판 오리엔탈리즘’에 지나지 않는다고 이성시 교수는 비판한다. 왜곡된 교과서를 만드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후지오까 노부까쯔는 시바 료오따로오의 역사적 시각을 ① ‘토오꾜오재판사관’에 반대되는 건강한 내셔널리즘 ② 높은 정신을 되살려낸 리얼리즘 ③ 좌우 이데올로기로부터의 자유 ④ 관료주의 비판을 특징으로 한다고 소개하면서,“시바사관이 ‘자유주의 사관’이라고 불리기에 어울리는 내실을 담고 있다는 것을 명확히 한다”6고 말한다. 여기에서 ‘자유주의 사관’은 탄생했고, 『새로운 역사교과서』가 등장했던 것이다. 료오마에서부터 시작된 이 사관은 러일전쟁이나 태평양전쟁에 대한 논리도 바꾸어놓는다.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보자.
① 러시아가 만주에 병력을 증강하고, 조선 북부에 군사기지를 건설했다. 그대로 말없이 보기만 한다면, 러시아의 극동 군사력은 일본이 도저히 맞겨룰 수 없을 정도로 증강될 것이 명확해졌다. 정부는 때가 늦어질 것을 염려하여 러시아와 전쟁할 결의를 다졌다.7
② 일본정부는 이 전쟁을 ‘대동아전쟁’으로 명명했다.(전후에는 아메리카 측이 이 명칭을 금지하기 위해 사용한 ‘태평양전쟁’이라는 용어가 일반화되었다.) 일본은 이 전쟁목적이 자존자위(自存自衛)와, 아시아를 구미의 지배에서 해방해 ‘대동아공영권’을 건설하는 것에 있음을 선언했다.8
①은 러일전쟁이 ‘조국방위전쟁’이었다는 설명이고 ②는 태평양전쟁이 아시아를 백인 식민주의에서 해방하기 위한 전쟁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든 극우들이 시바 료오따로오를 일본 우익정신의 근본으로 보고 있음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이러한 ‘시바사관’의 인큐베이터에서 료오마는 다시 태어났으며, 『새로운 역사교과서』의 우익사상이 더해져 그의 초상화가 유우슈우깐의 입구에 놓이게 된 것이다. 그것은 다큐멘터리 영화 「우리는 잊지 않는다」를 통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이 영화는 『새로운 역사교과서』의 내용을 영상화한 것이었다. 러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은 모두 아시아 민중을 백인 식민주의에서 해방하기 위한 전쟁이었다고 한다.‘ABCD 동맹’(A는 아메리카,B는 브리티시 즉 영국,C는 차이나,D는 오란다 즉 네덜란드)으로부터 아시아를 지키기 위한 “자위자존(自衛自存)의 전쟁이었다”는 말이 몇번이고 반복된다. 토오꾜오재판은 잘못된 재판이라는 설명은 『새로운 역사교과서』의 내용 그대로이다. 이 영화가 시작될 때, 전쟁 장면과 겹쳐지며 흘러나오는 음악은 젊은이들의 감수성을 흔든다.“영원한 사랑 영원한 꿈/이대로 함께 있어줘/새벽엔 흔들리는 마음을 안아줘/내 곁에 있어줘”(Forever Love Forever Dream/このままそばにいて/夜明けに震える心を抱きしめて/Oh Stay with me)―코이즈미 쥰이찌로오(小泉純一郞) 일본 총리가 가장 좋아하여 선거용 방송에도 쓰곤 했던 X-Japan의 「Forever Love」라는 곡이다. 로커의 찢어지는 듯한 날카로운 고성은 50년 전의 비극적 현장을 숭고한 경의(敬意)로 받아들이게 만든다.
여기서 『새로운 역사교과서』가 박물관이라는 거대한 교과서를 논리와 감성으로 빈틈없이 다시 세우고 있음을 보게 된다. 동시에 우리는 ‘료오마 ⇒ 시바 료오따로오 ⇒ 자유주의 사관 ⇒ 『새로운 역사교과서』 ⇒ 유우슈우깐’으로 연결되는 고리를 명확히 보게 된다. 야스꾸니 신사가 『새로운 역사교과서』에 의해 체계화되고 있는 것이다. 아닌게아니라, 유우슈우깐의 서점에는 자유주의 사관의 필자들이 쓴 『전쟁론』 『국민의 역사』 등을 모아놓은 서가가 그 중심에 놓여 있다.2차대전 이후 처음으로 자위대를 외국에 파병하는 2004년, 코이즈미 총리가 지난 1월 1일 키모노를 입고, 야스꾸니 신사에 참배했다. 이들은 이렇게 민족 이야기(nation narrative)를 나라 한쪽에서 체계적으로 만들어가고 있다.
사실과 공생의 자존심
만약 료오마에서 유우슈우깐으로 연결되는 고리를 감동적으로 받아들인 사람이 료오마의 초상화를 뒤로 하고 관람을 시작했다고 하자.2층에 있는, 전쟁 때 사용되던 칼과 무장(武裝)들로 장식된 전시실 ‘무인의 마음’, 그리고 메이지 유신, 서남전쟁, 일청전쟁에서 만주사변, 지나사변,1층에 있는 대동아전쟁실, 세 개의 방으로 연결된 신(神)들의 방, 탱크와 대포,550킬로그램의 폭약을 장착한 채 자살충돌을 감행했던 인간어뢰 ‘회천(回天)’ 등과 만나면, 그 사람은 성스러운 ‘성지순례’(Pilgrimage)9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그 사람은 러시아로부터 일본을 지킨 ‘조국방위전쟁’과 백인의 식민주의로부터 아시아를 독립시키려 했던 ‘대동아전쟁’ 정신에 감동하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미군의 화생방 공격으로 타버린 건빵이나 철모와 수통 등을 보면, 그때 옥쇄(玉碎)한 일본인 병사를 위해 자기도 모르게 묵도하기에 이를 것이다.
민족 이야기의 힘은 이렇게 강하다. 사람에게 울림을 주고, 사람을 변화시킨다. 입구에 놓인 별로 크지 않은 초상화는 이토록 ‘유우슈우깐 이야기’의 중요한 흐름을 형성한다. 그것은 일본이 아시아를 위해 존재한다는 선민의식과 ‘일본판 오리엔탈리즘’의 표현이다. 이 안에 들어오면,2차대전 당시 일본이 사용했던 팔굉일우(八紘一宇), 곧 전세계가 일본을 중심으로 하나가 된다는 민족주의가 작용하고 있음을 본다. 그 민족주의는 일본인에게는 ‘민족적 자존심’이지만, 타자에게는 배타주의 혹은 선민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나로서는 그 배타주의를 만날 때, 감동보다는 허탈한 웃음이 나오게 된다.
유우슈우깐에 갈 때마다 나는 작은 소년유격대원 동상 앞에서 말없이 한참 서 있곤 한다.15세에서 19세가량의 소년들로 이루어진 이 유격대는 태평양전쟁 말기에 잠수복을 입고, 적함 밑바닥을 기뢰(機雷)가 달린 창으로 박아 폭파시키면서 장렬하게 전사했다고 한다. 이 소년병을 ‘복동(伏童)’이라고 부른다. 특별한 훈련 없이 적을 죽이고 야스꾸니의 신이 될 수 있었던 소년병. 그러나 사실 많은 소년병들은 익사해 죽었다고 한다. 이것을 비극(悲劇)이라 해야 할까, 희극(喜劇)이라 해야 할까. 숙연해지기보다 쓴웃음이 나온다. 물론 어느 나라가 ‘민족적 자존심’을 내세우는 것에 대해 비난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첫째 사실에 근거한 ‘사실적인 자존심’이냐, 둘째 그것이 이웃나라와 더불어 역사의 미래를 위한 ‘공생(共生)의 자존심’이냐를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야스꾸니 신사의 민족적 자존심은 두 가지 모두에서 비켜나 있다.
그렇다면 한국인에게는 사실적이며 공생의 자존심에 기초한 박물관이 있을까? 독립기념관의 ‘박물관 이야기’라면 야스꾸니 신사의 배타주의를 자신있게 나무랄 수 있을까? 1987년 8월 15일 개관한 이 건물이 군사정부가 그 정통성을 과시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것을 꼬집는 것은 아니다. 그 공간은 첫째, ‘이승만 사상’을 근간으로 한 우익의 이야기가 중심이다. 북만주 빨치산의 항일투쟁은 어디에 전시되어 있는지.그래서 밀랍인형의 중심에는 이승만이 앉아 있고, 김구나 다른 인물은 주변에 배치되어 있다. 둘째, ‘공생(共生)의 상상력’이 사라진 배타주의는 야스꾸니 신사와 마찬가지가 아닐까. 조선을 사랑했던 일본인이나 외국인에 대한 전시는 찾아보기 어렵다. 셋째, 씨뮬레이션과 모조 전시물이 너무 많아, 디즈니랜드 같은 놀이동산에 다녀온 느낌이 있다는 보고서10도 있다. 고문실이나 씨뮬레이션 등을 보았을 때 감동보다는 무언가 허탈했다는 외국인의 말을 비아냥으로만 들어야 할까. 더욱이 한나절 데이트 코스로도 이용되는 야스꾸니 신사의 유우슈우깐에 비해, 거대한 독립기념관은 종일 걷고 나면 다리가 아프고 피곤하다. 박물관의 적절한 크기나 전시형태에서 야스꾸니 신사가 훨씬 낫다고 한다면 친일적 발설일까. 독립기념관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임시정부의 밀랍인형들 앞에 앉아 자위적(自慰的) 멘트를 듣다보면,1947년에 “오직 사랑의 문화, 평화의 문화로 우리 스스로 잘살고 인류 전체가 의좋게 즐겁게 살도록 하는 일을 하자”11라고 한 김구의 소박함이 그리워진다.
일본의 영웅 ‘료오마’라는 표상(表象)은 일본의 근대사를 이해하는 길목일 뿐만 아니라, 오늘의 일본을 이해하는 심층에 놓여 있다. 그러나 그는 일본이 살아남기 위한 방법만을 생각했을 뿐, 그것이 이웃나라들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에 대해서는 완전히 무관심했다. 프랑스와 미국을 구별할 수 없었던 시대의 인물에게서 인류가 함께 사는 ‘공생(共生)의 길’을 찾지 않았다고 비난하는 것은 물론 지나친 일일 것이다. 일본만을 사랑한 그의 순박한 열정이 일본의 우경화에 이용되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 더욱 아쉬운 것은 일본의 정치사회학적 배경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도 모르게 상대방의 역사인식을 그대로 수용하는 한국 지식인들의 기묘한 편식(偏食)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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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靖國神社事務所 『靖國神社:祭典と行事のすべて』(1986)3면.↩
- 「‘책 읽는 청와대’도 심란?…최근 사회과학 대출 늘어」, 『굿데이』 2003년 10월 29일자.↩
- 1위는 나쯔메 소오세끼(夏目漱石),2위는 무라사끼 시끼부(紫式部)이고,4위는 미야자와 켄지(宮澤賢治),5위는 아꾸따가와 류우노스께(芥川龍之介)였다(『朝日新聞』 2002년 6월 29일자 22면).↩
- 藤岡信勝 「‘司馬史觀’から見た日本近現代史」, 『近現代史敎育の改革:善玉·惡玉史觀を超えて』,明治圖書1996,93면.↩
- 이성시 「각인된 오리엔탈리즘: 일본·한국·중국과 시바 료타로」,『만들어진 고대』, 삼인 2001,236면.↩
- 藤岡信勝, 앞의 책 110~12면; 藤岡信勝 「司馬史觀と歷史敎育」, 『中央公論』 1996년 9월 임시증간호 193면.↩
- 『新しい歷史敎科書』,扶桑社 2001,222면.↩
- 같은 책 277면.↩
- Kottak, Conrad P., “Disney Myth and Rituaal”, in Anthropology; The Exploration of Human Diversity, Sixth Edition, New York: MeGraw-Hill, 1974/1997, 472~476면. 저자는 이 책에서 디즈니랜드 기행을 ① ‘세속적 공간’으로 입장하여 ② 미키마우스, 동물인형 등을 만나는 ‘신화적 공간’ ③ 마침내 신데렐라 궁전에 이르는 ‘일탈의 공간’으로 설명하면서, 이때 관객은 일종의 ‘성지순례’(pilgrimage)를 체험하게 된다고 한다.↩
- 川村湊 「“模造”と“複製”の樓閣:獨立記念館をみて」, 『現代コリア』 1987년 11월호 55~56면. 나는 2001년에 와세다대학생 25명을 인솔하고 독립기념관에 가는 등, 외국인을 여러번 안내하여 독립기념관에서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 김구 「나의 소원」, 『백범일지』, 돌베개 2002년 개정판,42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