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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시베리아 원주민의 정체성과 문화
A. 레이드 『샤먼의 코트』, 미다스북스 2003
강정원 姜正遠
서울대 인류학과 교수. kangjw@snu.ac.kr
시베리아는 한국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지만 한국인들은 이를 잘 인식하지 못하며 또한 사람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지도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타문화에 대한 한국인들의 관심은 한국문화보다 소위 더 발달했다고 생각하는 문화에 쏠려 있다. 시베리아는 한국문화 원류와의 연관성이나 시베리아 횡단철도, 풍부한 자원 등을 통해서 그나마 사람들에게 소개되고 있다. 이때에도 이 지역에 살고 있는 원주민들의 삶에 대한 관심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런데도 시베리아 원주민들의 삶을 다룬 책이 번역되었고 이에 대해 촌평을 쓴다는 사실은, 이 지역 원주민인 사하 사람들에 대해 박사논문과 몇편의 논문을 썼고, 또한 대학에서 시베리아에 관한 수업을 하고 있는 나에게 고무적으로 다가왔다. 한국인들이 타문화를 보는 데에 균형을 잡아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러시아인들이 시베리아로 진출하기 전에 원주민들은 생태적 조건에 따라 유목이나 어로,수렵에 의존하여 생활했다. 상대적으로 인구가 많은 사하나 부랴뜨 사람들은 소나 말, 양을 키우는 유목생활을 하였고, 태평양 연안이나 아무르·오비·예니쎄이 강가의 여러 작은 민족들은 어로경제에 의존한 바가 컸다. 에벤끄나 에벤, 유까기르 사람들은 순록유목과 수렵을 통해 생계를 해결하였다. 시베리아의 여러 민족 중에는 전체 인구가 몇천명에 불과하여 큰 정치조직을 형성하지 못하고 씨족 단위로 생활한 에스키모나 니브흐 등이 있는가 하면, 뚜바나 부랴뜨, 사하처럼 국가단계까지 도달한 경우도 있었다. 정치나 경제 등에서는 이처럼 차이가 있었지만, 종교에서는 공통점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모든 사물에 신이 깃들 수 있다는 애니미즘(animism)과 항상 신의 뜻을 전달할 수 있는 성직자(샤먼)를 인정하는 샤머니즘은 시베리아 문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들이다.
안나 레이드(Anna Reid)는 『샤먼의 코트』(The Shaman’s Coat, 윤철희 옮김)에서 러시아인들이 소위 문명을 가지고 시베리아로 진출하면서 일어난 원주민 생활의 변화상을 애정을 가지고 그려나간다. 사회주의 붕괴 이후에 나타난 치안상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곳곳을 다니면서 직접 원주민들과 대화하고 생활상을 관찰한 결과를 역사적 사실과 연관해서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은 시베리아나 원주민에 대해 여러 지식을 주는 여행서임과 동시에 러시아인들이 시베리아를 정복하면서 원주민과 맺은 관계의 여러 측면을 각 민족별로 기술하면서 역사적인 시간의 흐름을 놓치지 않는 구성방식을 취한, 시베리아 민족문화사에 대한 체계적인 입문서의 성격도 가지고 있다.
시베리아 전역에서 일곱 군데의 원주민사회를 선택한 저자는 그 민족의 역사에서 특기할 만한 점과 현재 상황을 연결해서 재미있게 서술하고 있다. 모스끄바에 인접해 살고 있는 따따르인들에 대한 설명에서 러시아가 처음으로 시베리아에 진출하는 과정을 서술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칭송되는 예르마끄에 대한 서술은 역사적 사실이 신화화하는 것과 이 과정에서 드러나는 러시아인의 시베리아관을 잘 보여준다. 러시아인들에게 시베리아는 여전히 경영의 대상이며 원주민들은 수수께끼이고 이런 상황에서 원주민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오비강 유역에 거주하는 한뜨이 사람들에 대해 기술하면서 저자는 스뻬란스끼 총독의 실패한 시베리아 개혁을 떠올린다. 동시에 18세기부터 본격적으로 실시된 러시아정교로의 강제개종이 한뜨이 사회에 미친 영향과 그들의 저항의 역사를 실감나게 그리고 있다. 이어서 바이깔 호수 부근의 부랴뜨와 뚜바 사람들을 소개한다. 이들은 큰 사회규모를 자랑하지만, 이들도 러시아사회 내에서 원주민들이 가지는 열등감을 피할 수 없다. 스딸린으로 대표되는 소련사회에서 원주민의 전통문화는 철저하게 파괴되었고 이는 이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던 것이다.
레나강 유역의 사하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고립되었던 관계로 시베리아의 유대인이라는 별칭까지 얻으면서 원주민 중에서는 독자성을 누린 것으로 알려졌으나 안나 레이드는 그들마저도 러시아와 소련의 통치기간 동안에 많은 고초를 겪은 사실을 여러 증언과 역사문헌을 통해 밝혀내고 있다. 저자는 사할린과 추끄차 반도에서 생존이 너무나 힘겨운 아이누, 니브흐, 울따, 추끄차 사람들을 만난다. 이들의 상황을 너무나도 을씨년스럽게 묘사해서 유사한 상황들을 여러번 접한 나로서도 가슴이 또다시 답답해졌다. 사회주의의 멸망에도 불구하고 변한 것이 없는 관료제도, 오히려 나빠진 의료수준과 사회복지제도, 술에 취해가는 원주민들, 황폐해진 여러 도시들.
스딸린의 억압에도 샤먼의 코트를 샤먼이 한번도 벗은 적이 없다는 억지주장(?)까지 하면서 저자는 원주민들이 민족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공간이 현재의 러시아에서 만들어지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다. 이 책을 통해 러시아인들이 시베리아 소수민족의 인권에 좀더 눈뜨기를 기대하는 것으로도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저자의 희망이 채워지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어려울지 모른다. 시베리아 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샤먼의 코트’는 대부분 아직도 박물관에 걸려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베리아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영국의 한 학자가 원주민들에게 보여준 애정이 있는 이상 그들의 삶이 그렇게 절망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 이 책을 통해 아주 가까운 시베리아라는 땅에 사는 사람들의 삶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한국인이 있다면 오히려 희망적일 수도 있다. 또한 이 희망은 민족적 경계가 사라지는 것만이 현 세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거친 탈민족세계화론에서가 아니라, 저자나 나의 생각처럼 어떤 민족이 자신의 뿌리에 대한 자긍심을 가지고 당당하게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싹트게 될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반드시 지적해야 할 점이 사할린 원주민에 관한 6장의 제목이다. ‘근친상간이 허용된 땅’이라는 표현은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근친상간이 허용된 문화는 지구상에 없기 때문이다. 근친상간 금기는 어떤 형태로든 존재하며, 그 사회에서 허용된 성관계는 이미 근친상간에 포함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