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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이동순 서사시 『홍범도』(전10권), 국학자료원 2003
민족독립운동사의 문학적 복원
김윤태 金允泰
한신대 강사, 문학평론가 windor2@hanmail.net
‘민족서사시’라는 접두어가 붙은, 이동순(李東洵) 시인의 『홍범도』가 나오기까지, 파인(巴人) 김동환(金東煥)의 장편서사시 『국경의 밤』(1925) 이래 약 80년의 세월이 흘렀다. 고은(高銀)의 서사시 『백두산』(1987~1994, 전7권)이 나온 지 약 10년 만에 만나는 대작이다.5부작 전10권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분량만으로도 『백두산』에 필적할 만큼, 이전에 나왔던 장시들을 압도한다. 열권 중 아홉권이 작품에 해당하는데, 각권마다 분량의 차이가 있지만 평균 175면 정도가 되어 총 1573면에 이른다. 아마도 3만행 정도는 될 성싶다. 마지막 10권은 홍범도 관련 사진과 용어해설, 참고문헌 등이 수록되어 있다. 실로 엄청난 역사(役事)이자 역사(歷史)라 아니할 수 없다.
애초 이 작품은 1980년 강제 폐간된 이후 5년 만에 무크 형태로 출간된 『창작과비평』 57호(1985)에 서사시 「홍범도」로 실린 바 있다. 계속 연재할 의도였을 것이나, 당시 『창작과비평』이 다시 정간되는 바람에 불발되었다. 총 46장 1641행으로 구성된 이 「홍범도」는 홍범도의 출생과 당시의 시대적 배경, 아버지를 따라 포수가 되어 오른 백두산의 풍광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부분이 작가가 구상한 방대한 작품 전체의 서두에 해당하는 아주 작은 일부일 것임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니까 1985년작 「홍범도」의 내용은,2003년작 『홍범도』에서는 제2권의 2/3 지점(제2부의 9)까지에 해당한다. 전체 분량에 비추어보면 1/6 정도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많은 첨삭과 퇴고를 거친 까닭에 그 부분의 분량만도 3배 가량은 늘어났다.
그리고 연재가 중단된 1985년 이후,2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났다. 시인이 스스로 밝힌 바에 의하면,1984년 점차 잊혀져가는 민족사의 영웅으로서 홍범도를 불러내어 그에 대해 집필을 시작하였고 1985년에 그 일부를 발표하였으나, 자료 부족과 건강악화 등의 사정으로 그후 오랫동안 자신의 의식 뒤란에 파묻혀 있다가 2000년경부터 다시 작업을 계속하여 마침내 17년에 걸친 대역사(大役事)의 종지부를 찍었다고 한다.
이동순의 서사시적 지향은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그는 1980년을 전후한 시기에 이미 「검정버선」(130여행) 「물의 노래」(400여행)라는 장시를 선보인 바 있다. 특히 1920년대 진주 형평사(衡平社) 운동을 다룬 「검정버선」(『창작과비평』 1979년 여름호)은 민족사의 문학적 복원이란 점에서 『홍범도』와 일맥상통해 보인다. 이런 선행작업의 바탕 위에서 시인은 “우리 민족사가 잃어버린 한 분의 위대한 민족영웅을 겨레에게 되찾아놓고자 하는”(「후기 1」, 제9권) 의도에서 이 대작을 준비하였던 것이다.
이 작품은 오롯이 의병장이자 무장독립운동가였던 홍범도(洪範圖,1868~1943) 장군에게 바쳐지고 있다. 최대한 허구적 요소를 배제하고 사실(史實)에 충실하게 홍범도의 생애를 좇아가고 있는데 대체적인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15세에 평양 신건친군영(新建親軍營)의 나팔수로 들어가 2년 후에 탈영하여 황해도 수안에서 제지공으로 일하다가 19세에 친일파 제지공장 주인을 살해하고 묘향산 보현사로 숨어들어 이듬해 금강산 신계사에서 승려가 된 홍범도는 이후 환속하여 함경도 북청에서 포수로 살아간다.1907년(40세) 그는 함경도 갑산 사포계 산포수를 중심으로 의병대를 조직하여 후치령과 갑산 일대에서 일본군과 싸운다. 특히 1920년 봉오동과 청산리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그의 무장독립운동은 일제의 간도학살로 인해 러시아 연해주 지역으로 이동해서도 지속된다.1922년에는 모스끄바에서 열린 피압박민족대회에 참석하였다가 레닌을 만나 레닌의 격려를 받기도 하였으나,1937년 스딸린 정권의 강제이주 정책에 의해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쫓겨가는 신세가 되었으며,1943년 조국해방을 두해 남겨둔 채 운명하고 만다. 이렇듯 시대의 격랑 속에서 풍운의 삶을 살았던 홍범도의 전생애가 이동순의 이 서사시편 속에 아로새겨져 있다.
이 짧은 지면 안에 이 방대한 양의 이야기를 그 서사적 흐름을 좇아 세세히 분석하기란 도무지 불가능한 일이다. 비교적 가까운 시기의 역사에 실재했던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은 것이기에 역사적 사실에 대한 충실한 고증을 통해 창작의 기초를 마련하였으리라 생각되며, 별도의 화자를 설정하지 않고서 실제 정황을 서술하듯이 써내려감으로써 마치 한편의 대하실록을 보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구성은 시간적 순차에 의해 배열되었으나, 전체를 5부로 나눈 것이 발단-전개-위기-절정-파국의 소설적 구성과 흡사하다. 이같이 역사적 사건 위주의 비허구적 발화와 비교적 단순한 구성의 시를 읽어가노라면 자칫 지루해지기 쉬운데, 사건이나 정황 사이사이에 당시에 불렸던 민요, 의병가사, 군가, 전설이나 민담 등을 적절히 삽입해 단조로움을 피하려는 창작의 묘는 눈여겨볼 만하다. 또 판소리의 가락을 도입해보고자 한 시인의 창작적 고투 역시 상찬되어야 할 것이다.
한편, 서사시로서 장르 문제가 있다. 기왕에 파인 김동환의 『국경의 밤』을 놓고 서사시냐 아니냐에 대해 장르론적 해명이 분분했던 바 있는데(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염무웅 「서사시의 가능성과 문제점」, 『한국문학의 현단계』, 창작과비평사 1982 참조), 근대 이후의 서사시라고 하는 것들은 여전히 이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고대 그리스적인 의미에서의 서사시(epos)는 근대 이후 소설에 자리를 내준 채 사라진 지 오래고, 근대 이후에 나온 서사시라는 이름은 주로 역사적 서사 내지 서술적(narrative)인 내용을 포괄함으로써, 대체로 장르적인 의미보다는 양식적인 의미가 강하기 때문이다.
시인은 장르에 대해 ‘민족서사시’라고 규정하고 있는데, 민족서사시라고 하니 고려 때 이규보가 지은 『동명왕편』이 떠오른다. 고구려 건국신화에 바탕을 둔 이 작품은 흔히 몽골의 침략이라는 국가적 위기의 소산으로 해석된다. 『홍범도』의 경우, 구한말에서 일제 치하의 막바지에 이르는 민족사의 현장 한가운데에서 포수에서 의병장으로, 다시 항일독립군 대장으로 이어지는 파란만장한 인생역정을 살아온 영웅적인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고 있으며, 운문으로 씌어졌다는 점에서 서사시로서의 최소요건을 갖추고 있다. 이 점은 평범한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국경의 밤』이나 신동엽(申東曄)의 『금강』과는 차이가 있다.
서사시란 것이 본래 민족영웅의 호명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는 것이지만, 오늘의 싯점에서 그 호명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요즘 ‘일제 강점하 친일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의 국회 통과가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과, 모 인터넷신문사에서 실시한 친일인명사전 모금운동이 많은 국민들의 열화 같은 성원 속에 진행된 일들을 생각하면, 이 작품을 읽는 동안 내내 마음이 착잡했다. 시인이 서사시 『홍범도』에서 의도한 민족사의 문학적 복원은 이같은 작금의 현실에 비추어볼 때 일견 의미심장하다. 역사의 격랑 속에서 소용돌이쳤던 한 비극적 영웅의 생애가 단순히 역사교육의 한 페이지일 수만은 없음을 생각함에 마음이 무겁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올해로 러일전쟁이 발발한 지 100년이 되는데, 오늘날 한반도를 둘러싸고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국제정세 변화는 100년 전의 상황과 방불하다고 한다. 최근 중국의 고구려사 편입 문제와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 몇년 전부터 우리를 위협하는 북핵문제와 북폭 위기, 이라크 파병에 대한 논란 등은 민족문제에 대한 재검토를 더욱 절실케 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한편 매몰된 역사에서 민족영웅 홍범도를 호출해낸 이 서사담론이 부정적인 의미에서의 민족주의와 결부되는 것은 경계되어야 할 것이다. 고구려사-독도-친일 논란으로 이어지는 근자의 여론 속에서 젊은이들이 극우적 민족주의의 성향을 점점 띠어간다는 소문은 우려할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한가지 필자에게 흥미로웠던 것은, 홍범도가 홍경래의 난 때 봉기군의 무장이었던 홍총각의 증손자라는 점이다. 시인이 철저한 고증을 거쳐 밝혀낸 것이겠지만, 신돌석과 더불어 평민 출신 의병장으로서의 홍범도가 의병운동의 한계를 넘어 민중해방을 지향하는 무장독립혁명가로서 나아간 사실이 이로써 예사롭지 않게 느껴졌다. 굳이 피의 격세유전 같은 걸 염두에 두고 싶지는 않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