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의 목소리
심재호 선생님께
저는 문학평론을 하는 염무웅입니다. 선생님의 글 「이름없는 우리들의 행진」을 이번호 『창작과비평』에서 읽고 너무나 깊이 감동했습니다.6·25전쟁 때 저는 초등학교 3학년이어서 선생님보다는 어렸지만, 그래도 여러가지 기억들이 있습니다. 그런 기억들을 떠올리며 재미삼아 읽다가 차츰 커다란 감동에 빠졌습니다. 그러고 보니 오래전 제가 창비의 편집자로 일할 때 심훈 선생에 관한 사학자 홍이섭 선생의 원고를 받아 검토했던 일도 새삼 생각났습니다. 목에 핏대를 세워 강경한 주장을 펴는 걸 듣거나 읽을 때의 공연한 거부감 없이 진솔하게 민족의 장래를 전망할 수 있게 한 것이야말로 선생님 글의 미덕입니다. 선생님 가족 여러 분의 건강과 행운을 빕니다.
2004. 2. 19. 경북 경산에서 염무웅 올림
(이 글은 지난 2월 전자우편으로 실제 부쳐진 것으로 편지를 보내고 받은 두 분의 양해를 받아 싣습니다.―편집자)
담론수준을 벗어나는 시민사회의 역할을 기대하며
지난호의 특집 ‘개혁문화, 이렇게 만들자’는 시민사회 영역에서 논의되고 있는 첨예한 쟁점들을 개혁문화의 형성 차원에서, 그리고 대안문화의 형성 차원에서 다룬 야심찬 기획이었다고 생각된다. 비영리 시민단체에서 일하며 밥을 벌어먹는 입장이어서 시민사회의 역량 강화를 목표로 하는 이 기획에 관심을 가졌다.
‘쟁점토론’을 읽으면서 아쉬웠던 점은, 생태계 문제해결과 주민자치라는 관점에서 중요하게 논의되어야 할 풀뿌리 주민운동이 지역을 기반으로 한 생활운동 차원으로만, 그리고 전국적 규모의 중앙운동과 대별되는 지점에서만 논의되었다는 점이다. 또 「여성운동의 세대갈등」에서 한쪽은 단체중심 여성운동의 현황과 지향성에 주시하고 있으나, 다른 한쪽은 여성주의적 시각 내에 존재하는 문화적 입장차이에 주목하고 있어서 논의의 관점이 약간 달랐다. 「민중운동과 여성운동」은 앞의 「여성운동의 세대갈등」에서 표현된 문제의식과 내용이 중복되기도 하고, 민중운동과 여성운동을 묶어서 논의하는 것 자체가 약간은 현장과 동떨어진다는 느낌을 갖게 했다.
기획논문 중 「한국 시민사회의 개념과 현실」은 지금의 정치와 삶을 바라보는 데에 많은 상상력을 주었다. 필자는 ‘사회운동의 스펙트럼을 봉사형과 권익형 사회운동으로 확산해’야 한다고 했는데 이 두 가지 스펙트럼만 가지고는 복잡한 현실을 포괄하기가 좀 부족하다는 생각도 해보았다. 필자가 봉사형과 권익형 내의 작은 가지들에 대해서는 거론하지 않았지만, 봉사형 안에는 종교조직을 포함시킬 수 있을 것 같다. 현재 북한선교에 있어서도 범종교단체들이 앞장서고 있는데, 이들과 연계하는 것도 기존의 훈련된 조직을 활용하는 방법이 될 것 같다. 또 민간연구소의 대안정책 마련을 위한 연구조사 활동도 아주 중요하다고 보며, 여성주의 문화운동 등과 같이 표현주의적이고 예술적인 방식의 사회운동의 흐름도 포괄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필자들이 지적한 대로 명망가 중심의, 중앙을 향한 시민사회 활동은 사회적 변화가 있을 때마다 내용적으로 큰 변화를 맞은 게 사실이다. 그러나 이번 17대 총선에서도 드러났듯이, 새로운 정치인력 풀(pool)의 수준이 기대했던 것보다 낮다면 시민운동 진영의 정치 진출 내지 정치세력화는 당위의 차원에서 논의할 문제는 아닌 것 같다.
대통령 탄핵사태 이후 촛불시위와 17대 총선 등 우리 사회의 드라마틱한 변화를 보면서, 한국 국민들은 어떡하든 민주주의는 꼭 이루고 말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우리 정치는 아직도 소유의 정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공공성과 합의도출을 위한 토론의 장이 부재하다는 면에서 대단한 불안감마저 갖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현실에서 건전하고 객관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NGO 세력들에 대한 기대를 갖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조효제 선생이 말한 대로 ‘공론장으로서의 시민사회의 역할 강화’가 담론 수준에서 벗어나 좀더 정치한 차원에서 이루어지길 바란다.
소설가 강영숙 bbum21@hanmail.net
김석준 교수의 글에 관한 문제제기
지난호의 김석준 교수의 ‘시민단체의 공익성과 이념’에 대한 발제에는 여러 문제점이 눈에 띈다고 생각하기에 몇자 적어보려 한다.
우선 그의 글에는 사실 관계가 부정확하여 독자로 하여금 오해를 불러일으킬 부분이 있다. 예컨대, 시민운동에 대한 ‘시민 없는 시민운동’ ‘백화점식 운동’ 등 여러 문제점을 지적한 부분은 그동안 논의가 있었기에 설혹 반론이 있다 하더라도 넘어갈 수 있을지 모르나 ‘지나친 연대활동’이라는 부분은 과연 무엇을 지적하는 것인지 모호하다. 그의 글 끝부분의 ‘연대화나 획일화로 개별 단체의 특성을 무시한 몰개성적인 범시민운동’이라는 표현을 보았을 때, 연대활동을 통해 시민단체의 전문성과 정체성을 잃게 된다고 그가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 연대활동이 얼마나 많이 있었는지―아마도 정부의 정책 반대에 대한 공동성명 정도가 연대의 대부분을 차지하지 않을까?―그리고 설혹 연대활동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그 단체들의 개성을 몰각할 정도의 활동이었는지 의문이 든다. 이 문제는 그가 분명한 근거를 대고 있지 않아서 발생한 것이기 때문에 만약 그가 이 글을 보게 된다면 어떤 단체를 두고 이러한 주장을 하는 것인지 밝힐 필요가 있을 것이다.
또한 사실 관계의 부정확한 점은 특히 ‘노사모’에 관한 부분에서 문제가 된다.(참고로 나는 노사모 회원이 아니다.) 첫째는 노사모가 촛불시위를 위시한 반미주의 운동을 조직화했다는 부분과 노사모가 ‘국민의 힘’으로 바뀌어 정치활동을 노골화했다는 부분이다. 그러나 과연 노사모가 반미운동을 주도했을까? 이는 터무니 없는 억측이다. 김교수가 이러한 노사모의 반미운동이 노무현 정부 출범을 전후해 나타났다고 한 점을 볼 때, 그가 아마도 효순·미선양 사건을 계기로 한 집회를 염두에 둔 것 같으나, 그 사건으로 촉발된 일련의 집회들은 범대위가 따로 꾸려 이루어진 것으로 알고 있고, 노사모 회원들이 설사 그러한 집회에 많이 참여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불공평한 SOFA에 대한 항의의 뜻일 뿐이지, 반미의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으로는 볼 수 없다. 이와 같은 사실은 정작 노무현 대통령 자신은 대통령 후보 시절부터 범국민대책위원회의 ‘부시의 직접 사과와 SOFA개정에 관한 서명서’에 서명하기를 거절한 것과 노사모가 이에 대해 특별히 이의제기나 여타의 행동을 하지 않은 것으로 알 수 있다. 과연 김교수가 무엇을 근거로 노사모를 반미운동의 중심으로 규정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둘째 노사모에서 ‘국민의 힘’이 떨어져나온 것은 맞지만, 현재 두 조직은 별개로 운영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2004년 4월 13일 현재 노사모의 회원수는 109,086명이고, 국민의 힘은 7,245명이다. 이는 노사모의 일부가 떨어져나와 새로운 운동을 펴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김교수는 그의 글에서 “노사모가 ‘국민의 힘’으로 바뀌어 정치활동을 노골화하면서”라고 표현하여 마치 노사모 회원 전체가 ‘국민의 힘’이라는 정치활동에 참여한다는 오해를 사게 한다.
다음으로 진중권씨의 주장과 같이 그의 글에는 명확한 개념이 부재하다. 시민단체의 성격이 정치활동 즉 이념과 구분되는 공공선을 지향해야 한다는 진중권씨의 주장에 김교수는 원론적으로 동의하면서도 발제와 토론의 구체적 내용에서는 자신만의 특이한 견해를 편다. 즉 그 공공선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특정이념’을 전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헌법이 자유민주주의에 역점을 두고 있기는 하나, 해석상 사회민주주의를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헌법이 사회적 시장경제를 규정하고 있음에도 김교수가 구태여 자본주의 초기의 방임적 시장경제를 연상시키는 듯한 시장경제라는 용어를 쓰는 이유가 무언지 궁금하다. 그의 말처럼 21세기는 탈이데올로기의 시대 아닌가? 헌법을 그의 식대로 해석하는 것이 바로 이데올로기적 태도라 생각한다. 또한 반전평화가 인류보편의 공공선이라 하면서도 결과적으로는 정책적 판단에 따라서 파병에 찬성할 수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정치적·정책적 기준이지 그가 말하는 공공선의 기준은 아니다. 그가 말하는 공공선의 기준에 따라 시민단체를 규정한다면 인류 보편의 공공선인 ‘반전평화’의 논리에 따라 ‘바른사회를 위한 시민회의’는 이념단체인 것이다. 그리고 “북한 핵문제가 현안이 되면서 국제적인 ‘반전반핵 평화운동’이 국내에서 ‘정치적 이유’로 ‘반전평화운동’으로 탈바꿈한 것이 ‘시민단체들’의 전술적 결정의 결과가 아닌가?”라고 그는 말하는데, 이 또한 궤변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그의 말대로 그러한 결정이 정치적 이유로 이루어졌고, 그러한 주장을 ‘시민단체’가 아니라 ‘정치단체’가 했기 때문이다. 그는 어떤 단체를 두고 이러한 주장을 했는가? 한총련인가? 만약 그렇다면 ‘한총련’은 시민단체가 아니라 정치단체임이 분명하다고 지적하고 싶다. 비판을 하려면 진중권씨와 같이 실제 단체명을 거론하며 분명한 논리를 가지고 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의 글이 전체적으로 지니는 편파적인 시각에 대해 언급하려 한다. 첫번째로는 경실련의 합법운동과 참여연대·환경운동연합의 ‘악법은 지키지 않는다’라는 원칙의 대립인데, 이러한 대립은 김교수가 의도적으로 부풀린 것 아닌가 한다. 왜냐하면 악법의 거부는 필요한 최소한도의 범위에서 결정되고 실행되었기 때문이다. 김교수는 마치 참여연대와 같은 단체가 법을 의도적으로 어기면서 혼란을 일으키는 듯한 인상을 주는데, 실제로 필자가 알기에 그러한 불법행위는 총선과 관련된 경우로 한정된다. 또한 그는 1960〜87년의 주요 운동이 ‘불법반체제운동’이고 그후의 경실련의 운동은 합법운동이라면서 ‘악법도 법’인만큼 합법운동을 준수하는 후자를 높이 평가하는 듯한 태도를 취한다. 그러면 그에게 한번 물어보고 싶다. 과연 그는 60년부터 87년의 독재시대에 ‘합법운동’을 할 수 있었는가? 아마도 그와 같은 논지를 펼치는 것으로 보아 김교수는 야만의 시대에 ‘준법’정신이 투철한 ‘자유민주적’ 시민이었나보다.
두번째로 김대중 대통령의 ‘언론개혁촉구’ 발언과 참여연대의 개혁운동을 연결시키면서 그들의 유착을 암시하는 의도는 무엇인가? 참여연대가 이를 부인하고 경실련 경우처럼 유착의 ‘물증’이 분명하지 않음에도, 증명되지 않은 국민의 뜻에 비추어 그들을 이렇게 몰아붙이는 것은 나로 하여금 오히려 김교수가 ‘음모론’을 편다는 의문이 들게 한다.(이번 총선에 출마한 그는 홈페이지에 ‘행동하는 양심’이라고 홍보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추정이 그의 ‘학자적 양심’에 비추어보았을 때 객관적인지 의문이 든다.)
이 글을 쓰면서 김석준 교수가 이번 총선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또한 그가 최근의 ‘비전@한국’과 ‘바른사회를 위한 시민회의’말고도 몇년 전, 경실련에서 정책위원회 부위원장과 조직위원장, 집행위원회 부위원장을 맡는 등 ‘시민단체’에서 활동했음도 알게 되었다. 그가 1992년 1월부터 2002년 3월까지 경실련에 몸담았음에도 불구하고, 경실련이 정권이나 자본과 유착한 점에 대해 제3자적 입장에서 평가를 할 수 있는지 궁금하다. 그는 책임을 느끼지 않는가? 왜 ‘비전@한국’과 ‘바른사회를 위한 시민회의’의 구성원임을 밝히고 활동방향에 대해 설명하면서 경실련에서의 활동경력은 그의 글에 전혀 언급되지 않았을까? 진중권씨는 그의 글에서 시민단체 활동가들이 정치활동에 뛰어들었을 때의 문제점에 대해 언급했다. 그렇다면 그는 이와 같은 문제점에 대해 도덕적으로 답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본다.
고려대 대학원 법학과 노진석 jinsok9359@hanmail.net
싱싱하고 따끈따끈한 시의 뷔페, 골라먹는 재미
그 계절의 계간지에 실린 시들은 언제나 싱싱하고 따끈따끈해서 좋다. 나는 그것들을 마구 째려보다가 야금야금 읽곤 한다. 째려보기는 순전히 질투심 때문이다.(한때 격렬하게 타올랐던 시인의 꿈이여!) 어쨌든 나처럼 질투심이 강한 영혼의 소유자들에게 시는 특히 밤참으로 좋다.‘믿거나 말거나’ 그것은 사실이다. 이번 창비 봄호에 실린 시들도 나에게는 아주 훌륭한 밤참이 돼주었다. 왠지 열에 들뜨고, 허기진 봄밤을 견디기에 ‘딱’이었다. 그 밤에 때로는 낄낄거렸고, 때로는 뭉클했고, 때로는 싱숭생숭해졌다.
① 낄낄거림: 「두고 온 것들」을 비롯한 황지우의 시를 읽을 때 나타난 증상. 여전히 나와 같은 부류의 졸렬과 허약과 소시민적 습성을 적나라하게 떠올리게 했기 때문에.
② 뭉클: 나희덕의 한마디에 나는 거의 울 뻔했다.“그들을 돌아오게 하는 힘은/바로 파도 위 북극성처럼 빛나는 저 분뇨자국이다.” 가슴 뭉클, 콧날 시큰해짐이라니!
③ 싱숭생숭: 「아라리」라는 시의 ‘아라리’ 때문. 도대체 ‘아라리’가 뭐야! 그래서 나는 나름대로 멋을 부려 그것을 ‘슬픔의 응어리’로 명명했는데, 그 후 이 증상이 나타남.
그러니까, 나는 9명의 시인이 차린 시의 뷔페상(?) 앞에서 입맛대로 골라 봄밤의 허기를 채웠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중에 몇몇은 아주 질겼다.(시란 원래 그런 것인지, 거두절미하고 한순간에 콱! 박혀 두고두고 사람을 불편하게 한다.) 그 몇몇의 정체를 밝히면,
① 오규원의 시들: 이전의 그의 시가 그렇듯 인간의 냄새가 나지 않음. 사물은 모두 그 사물 하나하나가 중심! 그러니 인간도 그중의 하나일 뿐. 나를 나에게서 빼내어 저 세계에, 꼭 그만큼의 자리에 넣고, 자유롭게 감상하시라. 단, 눈을 똑바로 뜨고 골똘히 바라보라! 그는 그렇게 말하고 있는 듯하다. 그의 언어는 지독하게 경쾌했다.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쏜다. 그것의 결정체! 그의 시 속의 모든 사물은 다른 모든 사물과 만나 분열, 합체, 통일된다. 그래서 내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듯 무미건조해 보이던 세계가 그의 시로 들어가면 그야말로 다이나믹하게 요동친다. 새는 하늘의 두께가 되고, 허공은 구멍이 되고, 강과 둑 사이는 수만 수천의 사이로 넓혀진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아주 작은 점에서 시작된다. 아마도 시인이, 세계의 한점, 한순간을 집요하게 응시하고 있기 때문일 터. 그 응시는 곧 자연발화! 응시만으로도 발화할 수 있다면, 유리겔라가 숟가락을 굽히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좀 심각하게 말하자면, 나는 그의 언어의 경쾌함이 무섭다. 절절한 고백도 반성도 분노도 타락도 없는데, 그는 늘 내가 속한 세계를 샅샅이 까발리니까.
② 손택수의 시들: 얼마 전에 읽었던 그의 『호랑이 발자국』이라는 시집이 생각난다.(정말 오랜만에 기분 좋게 읽은 시집!) 역시 이번 시들도 그 특유의 건강함, 싱싱함, 푸근함, 그런 미덕이 느껴져서 좋았다. 뭐랄까, 그의 시를 읽으면 가슴이 ‘찡’한데, 그게 또 담백하다.(이러기 쉽지 않다.) 「추석달」만 해도 그렇다. 어찌 보면 구질구질하고, 남루해질 법한 얘긴데 그는 그것을 훈훈하게 보듬어, 담백하게 만들 줄 안다. 그래서 안마시술소 김양 누나의 얼굴은 추석달이 되어도 하등 이의가 없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는 자연을 역동적으로 해석하는 탁월한 능력의 소유자처럼 보인다. 게다가 그의 역동성에는 발랄함과 따뜻함이 있어 즐겁다.“꽃향기는 수평선 너머로도 가고 심해로도 가서/낚시바늘처럼 단숨에 아가미를 꿰뚫는다” 동의한다! 숲은, 꽃향기로도 물고기를 낚고도 남는다.
이상이 질긴 몇몇의 정체였다. 이제 봄은 갔다.여름호에는 어떤 시의 뷔페가 기다릴지……
소정은 twins-so11@hanmail.net
愚問의 창 너머로 비추이는 삶의 진실: 「네게 강같은 평화」
반성문, 전향서…… 도대체 얼마나 더 많은 사람들이 반성문을 쓰고,전향서를 써야 진정한 통일국가의 길이 보이는 것일까? 분단 반세기가 흘렀건만,21세기에도 그 위세가 여전한 냉전 수구논리 앞에서 나오는 것은 한숨뿐이다. 정권이 바뀌고 또 바뀌어도 이념 시비와 보혁갈등은 계속되고 그 와중에서 일어나는 국론의 분열과 사회적 혼란 또한 끝이 없으니……
반성문과 전향서만 썼더라면 ‘여의도’에 갈 수 있었을,“망할 놈의 이념에, 잘 나갈 수 있는 인생을 망쳐버린” 수명은, 어찌보면 세상 물정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이다. 그러나 그가 ‘무언가에 목숨을 건 사람’으로서 가난 속에서, 친구와 동료들의 잊혀짐 속에서 끊임없이 갈등하고 절망하면서도 끝내 놓지 않는, 자신의 선택과 삶에 대한 신념의 끈을 붙잡고 있는 한 그는 분명 행복한 사람일 게다.“밥상 하나와 모나미 볼펜, 그리고 이불 한채가 그가 가진 것의 전부였던” 궁벽한 산골 성당의 종지기 시인에게 “왜 종을 치며 사시나요?” 라고 묻는 것이 어리석은 것처럼, 우리 중에 누구도,20년 동안 고국에 돌아오지 못한 채 베를린, 그 침울한 하늘 밑을 오늘도 떠돌고 있는 수명에게 물어볼 수 없을 것이다.“왜 그렇게 사느냐”고.
광주광역시 남구 봉선2동 라인아파트 102-803 전상훈 griun21@hanmail.net
‘제2회 대산대학문학상 수상작품집’을 읽고
지난호 별책부록 ‘제2회 대산대학문학상 수상작품집’을 관심있게 읽었다. 그중 소설 당선작인 고은주의 「피어씽」과 이인실의 「난봉일기」를 읽은 느낌을 적어본다. 두 작품 모두 기성작가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만큼 만만찮은 내구력을 갖고 있다. 이들의 그간의 수련이 결코 미약하지 않았음을 증거하는 산물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럼에도 이들 작품을 읽고 마냥 흐뭇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
우선 「피어씽」은 최근의 여성작가들의 소설에서 손쉽게 발견되는 ‘음식’과 ‘성’이라는 코드를 제재만 달리한 채 고스란히 답습하고 있다. 육식성과 공격성을 지닌 아내에게서 수세에 몰려 자기만의 세계에 칩거하는 화자(작품에서는 합의 이혼이라는 형태로 합리화된다)와, 화자의 내밀한 욕망과 빈틈을 메워주는 J간의 역학구도는 그 안정되고 정통적인 단편소설문법에 충실한 미덕을 갖추고는 있다 하더라도 너무나 낯익은 설정 때문에 오히려 신선하지가 않다. 즉 이 말은 작가의 개성이 아직 표면에 부상하지 않았다는 것과 동일하다. 이런 이유로 세부묘사의 밀도에 비해 플롯의 성급한 쇠락(결말부분의 반전)이 놀라움이 아니라 허망함으로 다가오게 하는 서술상의 구멍이 엿보인다.
「난봉일기」는 여러모로 「피어씽」과 대조적인 작품이다. 농촌이라는 배경과 인물들의 투박함 그리고 사건진행의 속도감 등이 특히 그러하다. 신인임에도 불구하고 농촌사람 특유의 골계미와 거침없는 입담을 구사하는 서술화자의 말재간에 읽는 내내 웃음을 띠게 하는 작품이다. 김유정으로부터 시작해서 성석제 김종광 등의 소설에서 면면히 이어져내려오는 이런 전통을 「난봉일기」에서 확인하는 반가움을 느꼈다. 하지만 대개 이런 유의 소설은 재미 못지않게 약점 또한 엄존하는 것이 사실이다. 즉 ‘문제적 개인’의 실종이 그것인데 이 작품도 등장인물의 이름을 바꿔치기해도 아무런 이상함을 느끼지 않을 만큼 모두가 김팔봉씨의 분신이기도 하다. 물론 농촌소설이라는 유형이 부지불식간에 ‘더하고 빼더라도 손해볼 것 없는’ 인물창조에 일조했다 하더라도 최소한 주제의식을 지탱해나갈 요소(그것이 인물이든 배경이든 심리든)는 필요한 것이다. 이 말은 리얼리즘적 요구가 아니라 ‘왜’라는 자각의 주문일 수도 있겠다. 아무쪼록 두 신인의 정진을 기대해본다.
부산시 북구 덕천1동 도개공아파트 109-205 정훈 bluejh337@hanmail.net
‘창비’에 바랍니다
지난호 중 제일 재미있게 읽은 건 「이름없는 우리들의 행진」이었습니다. 시는 황지우와 나희덕 시인의 것이 인상에 남았고 신인들의 것은 좀 들쭉날쭉한 것이 그저 그랬던 것 같고요. 강계숙씨의 박형준론은 그런대로 섬세한 비평이었는데, 장석남 시인의 촌평은 역시 시인의 시답게 모호했어요.‘탈수’라는 키워드가 도대체 무엇인지? 촌평은 이것이면 이것이고 저것이면 저것인, 좀 불꽃튀는 촌철살인의 글맛이 나야 하는데 너무 점잖아요. 그리고 상대의 눈치를 보는 것 같고요.
전체적으로는 ‘창비’가 고상한 고품격의 담론지가 되어가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특히 최근 앞의 특집들이 그래요. 문학이 받쳐주질 못해서 그런지, 아니면 아예 문학을 포기해버린 것인지 그 옛날의 생생한 숨결이 느껴지질 않아요. 그리고 내게서마저 멀게 느껴지고……‘창비’는 고상하고 고품격 담론 생산지가 아니라 독자들과 함께, 아니 우리 문학의 중심과 함께 가슴속에 살아 있는 잡지여야 합니다. 이건 나 개인만의 생각이 아니라는 점을 밝힙니다.
서울에서 장진영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