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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류보선 평론집 『또다른 목소리들』, 소명출판 2006
모더니티와 ‘또다른 목소리들’
유희석 柳熙錫
문학평론가, 전남대 교수 jatw19@moiza.chonnam.ac.kr
류보선(柳潽善)의 『또다른 목소리들』 전체를 관통하는 기조(基調)는 매우 분명하다. “나는 그저 단 한번이라도 좋으니 저 위대한 작품에게서 뿜어져나오는 그 찰나적인 섬광을 있는 그대로 느낀 그대로 표현하고 싶었을 뿐”(4면)이라는 소망 그대로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광장』 『무진기행』 등 우리 현대문학의 귀중한 자산을 응시하는 저자의 시선이 그러하고, 김원일과 박경리 같은 우뚝한 작가들의 생애와 창작의 궤적을 더듬는 손길이 그러하다. 이론이라는 갑옷으로 무장하고 자기애로 벼려진 칼을 치켜든 비평가만큼 꼴불견이 있으랴. 이 글을 쓰는 평자도 작품 앞에서 가들막거린 적이 없는지 두려운 마음이다. 평단에서 그런 ‘화상들’을 적잖게 봐온 처지로서는, “더 읽자, 더 읽자꾸나. 그리고 더 귀기울여 거의 들리지 않는 자그마한 또다른 목소리들을 듣자꾸나”라는(5면) 다짐도 내 것으로 하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도 『또다른 목소리들』은 성실한 비평가의 성실한 평론집이다. 600면이 넘는 방대한 저작의 대부분은 김영하에서 박경리에 이르는 수많은 작가들의 작품론으로 채워져 있으며, 비판이든 옹호든 극단을 경계하는 저자의 건강한 균형감각이—1부에 딸린 「민족 이야기의 해체와 역사의 소멸」 같은 서평논문이 그러하듯이—잘 드러난다. 각각 김원일과 박경리의 작품세계를 두루 섭렵한 「어둠에서 제전으로, 비극에서 비극성으로」와 「비극성에서 한으로, 운명에서 역사로」는 세심한 분별이 엿보이는 논문들로서 정독에 값한다. 비록 안면은 없지만, 문학의 위상이 예전만 못한 우리 문학계에서 이 자강불식(自强不息)의 ‘동업자’를 만나는 기쁨은 크다.
그렇다고 20세기 한국의 고전적인 작품들에 저자가 바친 뜨거운 찬사를 평자가 모두 공감하는 것은 아니다. 비평가적 패기를 더 바라게 되는 대목도 없지는 않다. 하지만 패기란 자칫하면 오만이요 내강(內剛)의 구현도 저마다 다를 터이니, 그 점을 두고 시비를 가릴 수는 없다. 그보다는 이 육중한 논저를 꿰뚫는 핵심이라 할 ‘모더니티’개념이 단순한 데서 오는 문제와 작품읽기에서의 이견을 따져봐야 할 듯하다.
류보선이 전제하는—간혹 근대성으로도 번역되는(49, 111면 등)—모더니티는, 다양한 변주를 거치기는 해도, 기본적으로 자본주의의 부정적 현실을 통칭하는 개념이다. 책장을 무심히 펼쳐도 “인간을 절대고독의 감옥 속으로 밀어넣는 모더니티의 억압적인 힘”(64면) “주변부 모더니티의 지옥도”(163면) “한국적 모더니티의 가장 처절한 희생자”(474면) 등의 표현이 수시로 튀어나온다. 어떤 개념어를 채택해서 평문에 활용하는 것은 자유일지 모른다. 하지만 국내학계에서도 귀담아들을 만한 논의가 없지 않은 근대(성) 같은 개념이 좀더 엄밀히 구사되지 못한 점은 아쉽다. 자본주의의 추악한 현실(〓근대)이 덩그러니 놓여 있고 우리의 ‘위대한’작가들은 반대편에서 그런 현실에 맞서고 있다는 식의 논조가 이 책에서 심심찮게 감지되는데, 타율적으로 문호를 개방하면서 서양을 사실상 대리한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한 우리에게 근대 개념은 (서구 지식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속 편할 수 없다. 우리의 ‘주변부 모더니티’는 서구 모더니즘의 창의적 성취를 전유하면서도 그네들 특유의 허위의식을 내면화한 근대주의의 극복을 여전히 숙제로 안고 있는 것이다.
때만 되면 옷을 갈아입고 등장하는 근대주의를 극복하는 데 종요로운 ‘타자의 육성’이 저자가 의도한 만큼 명확하게 들리지 않는 것도 그런 지적 작업에 대한 분명치 않은 인식에 기인하는 듯하다. ‘작품 사랑’이 모자라서가 아니다. 텍스트에 해석자가 충분히 비판적으로 개입하지 못한 결과, 전반적으로 ‘또다른 목소리들’이라기보다는 저자 자신의 동질적인 목소리가 상대적으로 우세한데, 그같은 단조로움도 근대에 관한 단선적인 구도를 은연중 설정하는 데서 연유한다고 봐야 할 게다.
유감스럽게도 그에 대한 논거들을 곡진하게 댈 형편은 아니다. 『또다른 목소리들』의 미덕조차 제대로 논하지 못한 미안함을 안은 채, 부득이 ‘모더니티’에 대한 평면적인 이해가 작품해석에 일정한 한계로 작용한 사례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겠다. 가령 황석영의 『심청』(문학동네 2003)을 다룬 「모성의 시간」이 그러하다. 저자는 “전지구적 자본주의 씨스템이 인간사회 전반에 가져온 살풍경과 아이러니에 대한 가히 놀라운 통찰(163면)”이라며 예찬으로 일관한다. 그러나 작가의 작품세계 전반에서 『심청』이 차지하는 (그다지 높지 않을) 위상은 그만두더라도, 그 정도의 비평적 찬사라면 과공(過恭)에 해당한다. 기왕지사 찬사를 할 양이면, 한수산이나 조헌용 등의 소설에 대해서 유지한 냉정함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작품의 어느순간 작가 황석영이 바로 그 심청으로 둔갑한 결과 “전지구적 자본주의 씨스템이 인간사회 전반에 가져온 살풍경과 아이러니”를 지루한 산문성으로 되풀이하는 면도 따끔하게 지적해야 비례(非禮)를 면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한마디만 더 보태자면, 저자의 작품 사랑에는—미운 자식 떡 하나 더 주는 것과는 다른—편애도 있지 않나 싶다. 가령 김영하 은희경 신경숙 등에 대해 저자가 지면에서 두는 거리는 가히 육친적이라 할 만큼 가깝다. 작가의, 아니 텍스트의 박속같은 ‘속살’을 드러내는 것도 비평가가 해야 할 일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평필(評筆)의 공명정대가 아닐까? 판관(判官)이 되어 작품 위에 군림하라는 뜻이 아니다. 다만 우리 당대의 작가들과 함께 호흡하는 비평가의 겸손도 찬사에만 있는 것은 아님을 서로 새겨두자는 것이다.
근래 일본의 한 철학자이자 비평가가 퍼뜨린 ‘근대문학의 종언’이라는—엄밀한 논증보다는 주장이 앞선—언설이 이곳에서도 세간의 주목을 받았지만, 근대의 난숙(爛熟)이 문자 중심의 문학에 결코 유리하지 않다는 것은 이제 상식이다. 그럴수록 문학이 인간사유의 고유한 한 형식임을 다른 예술장르와의 연관성 속에서 적극적으로 성찰하되, 근대의 이해도 더 복합적이어야 할 것이다. 이런 작업은 저자가 듣기를 열망한 ‘또다른 목소리들’에 귀기울이는 비평을 당연히 요구한다. 그러나 작품을 존중하는 마음과 비평가로서의 자존심 모두를 지키면서 근대의 극복을 지향하는 분투가 오늘날 우리 평단에서 절실히 요구된다면, 『또다른 목소리들』에 좀더 많은 절제와 좀더 비판적인 애정을 동시에 바라는 것이 든든한 동업자에 대한 지나친 요구는 아니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