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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과 현장

 

올해도 농사짓자

평택 대추리 현장탐방

 

 

박신규 朴信圭

본사 문학출판부 편집기자. muse@changbi.com

*취재에 많은 도움을 준 대추리 주민과 문만식·손대선 형께 감사드린다.

 

 

평택미군기지확장저지 4차범국민대회 현장

평택미군기지확장저지 4차범국민대회 현장

일제 말기 비행장 활주로를 건설하려는 일본군에게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구(舊) 대추리로 쫓겨난 사람들이 있었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가을, 그곳에 미군기지가 대규모로 들어서면서 단 한푼의 보상금도 받지 못하고 그들은 다시 쫓겨났다. 갈 곳을 잃고 마을 옆 야산에서 천막생활을 하며 당시만 해도 바닷물이 들어차던 갯벌을 손수 메워 농토를 확보했다. 헐벗고 굶주린 개간작업에서 부모와 자식을 잃기도 하며 지금의 마을을 만들었다. 그 땅이 평택 팽성읍 대추리와 도두리에 걸친 광활한 대지(황새울)이다. 결코 망각할 수 없는 역사와 한이 서린 땅에서 2006년 현재 그들은 또다시 미군기지 확장으로 마을이 언제 철거당할지 모르는 불안 속에서 살고 있다.

2006년 7월 22일 오후 2시 평택역 광장에서는‘평택미군기지확장저지 4차범국민대회’가 열렸다. 이날 행사에는‘평택미군기지확장저지 범국민대책위’와 대추리·도두리 주민들, 19일부터 군산 미군기지를 출발해 250km넘게 달려온‘자전거평화행진단’40여명을 비롯해 민주노총, 전농, 경기북부 및 광양 등 각 지역 미군기지 관련 대책위, 철거민연합회, 민주노동당 등 각종 단체와 대학생, 어린이를 대동한 가족들이 참가했다. ‘미군기지 확장반대’ ‘강제철거 중단’ ‘재협상 실시’ ‘구속자 석방’등을 외치며 수백명에서 시작한 행사는 3시 30분 범국민대회를 마칠 즈음에는 2천여명으로 늘었고, 주최측은 7월 8일 벌어진 안정리 상인들의 폭력을 상기시키며 반드시 평화적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재차 당부했다. 경찰은 군문교에서 길목을 봉쇄했고, 안성천변 농노를 따라 대추리를 향해 4km정도를 행진하던 시위대가 38번국도로 진입했을 때도 이미 도로를 가로막고 있었다. 대추리 진입에 실패한 시위대는 안성천1교 앞에서 경찰과 대치한 채 규탄대회를 열고 다시 한번 주민들의 요구와 한미FTA반대를 외쳤다. 그러는 내내 경찰은 해산경고 방송과 헬기의 저공비행을 통해 연설을 방해했고, 6시 10분쯤 시위대는 무력충돌을 피해 자진 해산했다.

 

필자는 집회의 구호보다는 마을주민의 실생활과 생각이 궁금했다. 전경들의 검문을 수차례 받은 뒤 미군기지 K—6(캠프 험프리스, 구 대추리를 포함한 151만평)의 철책을 끼고 돌면 나타나는 시골마을. 지난 7월 23일에 이어 25일에 방문한 대추리는 주말의 시위현장과는 달리 평온하기만 했다. 마을 입구에서부터 눈에 띄는, 고물상들이 대문과 창틀을 수거해간 빈집들과 설치미술로 탈바꿈한 계성초등학교 대추분교 철거잔해, 담벼락마다 새겨진 예술작품들은 여느 농촌마을과는 다른 풍경이었다. 이 마을 역시 주민 중 40대 이하는 드물고 대부분 50대 이상인 고령화 마을이었다. 한가롭게 평상이나 원두막에 앉아 부채를 부치며 한담을 나누는 풍경은 적막하기조차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마을 어귀에서 그 정적을 깨고 연기가 솟자 순식간에 20여명의 주민들이 골목에서 달려나왔다. 그들의 눈에는 좀전의 평화로움이라곤 온데간데없이 긴박감과 공포를 향한 긴장이 날서 있었다. 승합차의 엔진과열로 인한 단순화재로 밝혀지자 그들은일사천리로 진화한 뒤‘또 그놈들이 철거하러 들어온 줄 알았다’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들에게는 지난 5월 공권력에 의해 진행된 대추분교 철거작업과 농지를 둘러싼 철조망 설치에 대한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K—6기지와 50미터 정도 떨어진 대추분교는, 십리가량을 언 발로 등하교하는 자식들을 보다못해 주민들이 십시일반 쌀을 걷어 산 땅을 교육청에 기증해 생긴 학교였다. 1969년 개교 이래 부모와 자식이 2대에 걸쳐 이 학교를 졸업했고, 학생수가 감소해서 2000년 폐교되고‘평택두레풍물보존회’가 들어온 뒤에도 이곳은 아이들과 주민들이 놀던 동네의 앞마당이자 미군기지 확장을 반대하는 시위의 중심지였다. 이 학교를 교육청은 27억원에 국방부에 매각하고 임대계약기간이 남아 있는 두레풍물보존회에 퇴거명령을 내렸다. 급기야 지난 5월 4일 새벽‘여명의 황새울 작전’을 펼친 군경 1만 5천여명에 의해 행정대집행(강제철거)이 이뤄지면서 부상자가 속출하고 학교를 점거중인 주민과 시민단체 회원, 문화예술인 들이 연행되었다. 같은 날 마을 앞 들판에는 29km에 이르는 철조망이 쳐져 주민들의 농토 접근이 금지되었다. 주민들은 당시 유혈상황을 80년 광주나 한국전쟁에 비유했다. 수많은 역사와 기억이 저장된 학교가 무너지고 살붙이 같은 땅이‘군사시설 보호구역’으로 바뀌는 광경 앞에서 망연자실했다. 자식 같은 전경들의 앳되고 여린 눈동자가 방석모에 가려질 때, 일구던 농토에 철조망이 쳐질 때, 포클레인이 건물을 내려칠 때 주민들에게 평화가 공포로, 공포가 분노로 바뀌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들판에 철조망을 가설하고 있는 군병력

들판에 철조망을 가설하고 있는 군병력

마을에서 미군기지확장 반대운동의 구심점에 있는 팽성주민대책위원회 김지태 위원장(대추리 이장, 47세)은 부재중이다. 국방부가 대화를 제의하며 주민대표가 나올 것을 강조하던 때에 법원은 이미 체포영장을 발부한 상태였고, 정부와 대화를 위해 자진 출두한 그를 공무집행방해와 집시법 위반으로 구속시켜버린 것이다. 주민대표를 구속한 상태에서 대화를 하자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며 김택균 사무국장(43세)은 분통을 터뜨린다. 그는 대화 운운하기 전에 우선적으로 정부의 사과가 있어야 하며, 구속자를 석방하고 모든 사태를 5월 4일 행정대집행 이전으로 돌려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적잖은 질문으로 길어진 인터뷰에서 그는 담담하고 차분하게 그간의 답답함을 얘기했다.

2003년부터 2004년 사이 600여명의 주민들이 수차례 상경해서 대화를 요구했는데도 정부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정부는 한결같이 보상금 액수, 이주단지, 상가분양만 거론하다가 나중에는 철거하겠다고 협박한다. 대추리의 역사와 한이 무엇인지 알려 하지 않고, 주민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지금 이대로 농사지으며 자기집에서 사는 것이라는 호소는 듣지도 않는다. 140여 가구나 되는 대추리 주민의 절반 정도가 마을을 빠져나갔는데, 말이 좋아 협의매수지 많은 분들이 협박당하여 공포에 떨면서 떠난 것이다. 당국의 설득과 협상은 공권력이라는 호랑이를 뒤에 세운 여우의 말과도 같다. 떠난 분들 심정은 충분히 이해할뿐더러 비난할 생각도 없다. 그분들 상당수가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향수병에 시달리며 실업자로 지내거나 단순노동을 하고 있다. 만약 우리가 보상금 늘리기에 혈안이었다면 지금처럼 단결하지도 않았고 사태는 이미 오래전에 종결되었을 것이다. 재협상 요구는 미군기지 확장과 부지 선정에 대한 타당성을 토론해보자는 것이다. 단계적으로 주한미군을 감축하겠다는 상황에서 왜 그렇게 대규모로 기지를 확장하려는 것인지, 그곳이 왜 여기 주민들이 한사코 강제수용에 반대하는 대추리·도두리 땅 285만평이어야 하는지 납득할 수 없다. 언론은 안정리 상인들을 비롯해 많은 주민들이 찬성한다고 호도하면서 정작 농토를 강제수용당하는 주민들의 의사는 제대로 전달하지 않고 있다. 또한 동두천시의 경우만 봐도 미군부대 때문에 도시가 발전한다는 얘기는 믿을 수 없다. 이곳이 안되면 제2의 대추리가 생길 수도 있다고들 하는데, 그렇기 때문에라도 미군기지 확장·이전은 신중히 결정해야 하고 해당 주민들의 의사를 존중해야 한다. 환경을 오염시켜놓고도 책임지지 않으려 하는 미군의 기지를 왜 피땀으로 일궈온 옥토에 들여놓으려는 것인가. 민주주의라는 게 힘없는 농민은 무시해도 좋은 것인가 묻고 싶다. 노무현정권? 현정권보다 더 보수적인 정권이더라도 우리의 말에 귀를 기울여준다면 상관없다. 외부세력에 의한 세뇌? 이곳 주민들 대다수는 반미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미군이‘필요악’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기지 옆에서 수십년을 살아온 사람들이다. 이들은 고향에서 살고 싶어하는 순박한 농민들일 뿐이다.

실제로 한 언론의 조사에 따르면 마을을 떠난 주민 중 다수가 새로운 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인터뷰에 응한 27가구의 가구주 직업을 보면 농축산업이 21명에서 4명으로 줄고 실업자는 8명이 늘었으며 날품팔이 3명이 생겨났다(「배신자 낙인찍히고, 정착은 막막」, 『한겨레』 2006.6.12). 대놓고 이야기하길 꺼리는 마을 주민들의 증언 속에도 참담한 경우가 많았다. 고향을 등질 수 없어서 가까운 곳에 농토를 사려 했던 사람들은 미군기지가 확장되는 덕분(?)에 평택 인근 토지의 가격까지 최대 7배나 상승해 곤욕을 치렀다. 더욱 기막힌 일은 2005년 초 국방부가 농민들에게 보낸 수용안내문에는 평당 공시지가가 6만 8천원이던 것이 협의매수 기간이 끝나가던 같은 해 8월 말에는 14만 8천원으로‘껑충’뛰어오른 것이다. 순순히 당국의 뜻에 따라 먼저 농지를 넘긴 농민 중에는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도 있었다. 국가가 저지른 공공연한 살인이었다.

주민들은 이곳에 상주하는 활동가들(지킴이, 30여명)에 대해 말한다. 봉사활동 해주고 한맺힌 이야기를 들어주고 우리의 요구를 누구보다 잘 이해해주며 이 땅과 마을을 함께 지켜줘서 고맙다고. 어떤 목적의식 없이, 특정 단체에 소속되지 않은 개인도 많이들 찾아오는데 그들은 한번 들어오면 떠나길 싫어한다고 활동가들은 말한다. 단순히 농촌사회의 정이나 잃어버린 공동체에 대한 향수 때문만은 아니라고,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힘이 이곳 마을과 주민들에게 있는데, 그 힘에 자연스럽게 세뇌되어간다고. 그것이 그들이 말하는 대추리병(病)이다. 활동가들 중에는 대추리로 주소지를 이전한 이들(10여명)도 있는데, 그들은 미군기지 관련 특별법이 일반법보다 우선하는 걸 감안하더라도, 주민들을 불법 점유상태로 몰아붙이는 당국이 주민등록상으로는 외부인의 주소지 이전을 허락하는 상황을 두고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라한다.

주한미군 대체부지 및 배치계획

주한미군 대체부지 및 배치계획

285만평 중 대추리·도두리 주민들이 실제 소유하고 있는 땅의 면적은 74~75만여평 정도로 강제수용에 반대하는 주민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공탁에 들어갔다. 땅의 소유비율을 미군기지 확장이전에 대한 찬반여론의 비율과 등치시키는 것에 주민들은 실소를 보낸다. 285만평의 절반 이상이 부재지주(그들 중에도 일부는 강제수용에 반대하고 있다)의 소유라고, 그들의 땅을 빌려 농사짓는 가난한 소작농들은 고향땅에 대해, 삶의 터전에 대해 아무런 발언권도 없는 것인지 되묻는 것이다.

저녁 7시 반 평화공원에 모인 대추리·도두리 주민과 활동가 등 50여명은 촛불을 켜들었다(2004년 9월 1일에 시작한 촛불집회는 8월 1일로 700일째를 맞는다). 이날 낮에 축사의 소똥을 치우고 농협창고를 청소해준 대학생 고등학생 등 자원봉사자들을 소개한 뒤 노래자랑, 공연이 이어졌다. 마지막으로는 구 대추리에서 태어나 마을의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왔다는 홍민의(48세)씨가 앵커로 나선‘황새울방송국 들소리’가 방영되었다. 마을의 일상과 집회소식을 전하는 어눌한 진행은 그 자체로 정겨웠고 웃음을 자아냈다. 주민들의 촛불집회는 여느 집회나 시위와 달리 주민과 활동가가 서로의 불안한 마음을 달래주는 축제에 가까웠다.

촛불집회가 끝난 뒤 빈집 중 한곳에 자리잡은 ‘들사람들’(cafe.daum.net/hwangsaewool)의 집을 방문했다. 들사람들은 문인 230여명과 미술인 410여명을 비롯해 900명에 가까운 문화예술인들이 참여하는 모임이다. 마을 초입에 붙은‘평화예술마을’이라는 간판이 불필요할 만큼 골목 곳곳에서 접할 수 있는 벽시, 판화, 그림, 설치미술 들은 모두 이들의 작품이다. 농협창고에도 90명의 화가가 90명의 주민초상을 모판에 그려 전시하고 있다.“벽시 중에는 제 작품도 있었는데 집이 헐리면서 함께 사라졌어요. 대작이었는데 말이죠”하며 웃는 류외향(시인, 33세)씨는 남아 있는 많은 선배 시인들의 작품이 강제 철거될까봐 걱정이다. 갑자기 장대비가 내리고 어둠이 깊어지자 주민과 활동가 들이 제각기 먹을거리를 하나씩 들고 마실을 왔다. 술이 한순배 돌자 불안한 마을의 미래에 대한 걱정과 분노를 터뜨리기도 하고, 도두리 주민들과의 협력에 대해 토론하기도 하면서 밤이 깊어가는 줄을 몰랐다.

현재 주민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 가설한 철조망과 물웅덩이 너머 황새울엔 볍씨가 자라고 있다. 수로를 차단하고 농사를 방해하는 경찰에 맞서 주민들이 지난 3, 4월 건답직파(乾畓直播)로 뿌려놓은 것인데, 반 이상을 차지하는 피와 함께 방치되어 있다. 대문마다 벽마다 새겨진‘올해도 농사짓자’는 구호는 주민들의 간절한 소망을 담고 있다. 경찰은 마을 입구를 막고 들판을 막고, 도두리로 가는 길을 막으면서 평화행진단과 각목을 휘두르는 안정리 상인들과의 유혈충돌(7. 8)은 막지 않았다. 마을회관에서 평택 범대위 기자회견이 있던 날(5. 6)은 김지태 위원장의 축사에 원인 모를 불이 났는데도(주민들 대다수는 경찰측의 고의적인 방화로 믿고 있다) 불을 끄기 위해 가는 주민들을 막았다. 김지태 위원장의 모친 황필순 할머니(76세)는 지금도 축사만 보면 아들 생각에 눈물이 난다.“다 필요없고 내 아들 석방하고 내 집에서 살며 농사짓게 해줘.”

이곳의 풍경 중 특이한 것은 원두막이 늘어가고 있는 것이다. 주민들은 벌써 세채째 원두막을 지었다. 원두막을 짓거나 평화공원에서 잡초를 뽑을 때 한사람이 시작하면 점점 사람이 늘어나 순식간에 일이 끝난다. 이 협동심이 서글프게 다가오는 것은 이들의 일상이 비정상적이기 때문이다. 꼭두새벽에 일어나도 들판에 나가 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한해 농사지은 것에서 그해 농협대출금을 갚고 남은 돈으로 다음해 생활비를 쓰는 농민들로서는 올해 상황이 막막하기만 하다. 실제로 농협은 대출금을 회수하기 위해서 일부 농민들의 공탁금을 가압류해놓은 상태라고 한다.

 

이미 공공연하게 알려진 대로 남한의 군사력은 질적으로 북한보다 우위거나 적어도 남침억제력을 확보한 상태이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의 해외주둔 미군재배치계획(GPR)이나 전략적 유연성의 요체는 한국에 대북한 방어를 넘기고, 미2사단을 한강 이남(평택)에 재배치해 유사시엔 북한의 장거리포 사정권에서 벗어나 미군 인계철선의 위험을 줄이는 것이다. 동시에 미군이 방어적 역할에서 벗어나 북한에 대해, 나아가 한반도를 뛰어넘어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에서 공세적 작전을 펼치려는 의도를 내포하고 있다. 만약 이런 가능성이 현실화될 경우 우리로서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할 수도 있다. 즉 한국이 국제분쟁의 전초기지이자 선제공격자가 되는 것이고 그 한복판에 평택이, 대추리가 놓일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정부가 누차 강조하는 국익과도 역행하는 것으로, 장기적으로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주변국과의 관계에도 악영향을 끼칠 것은 자명한 일이다.

대추리에 머문 사흘 내내 필자의 귀를 괴롭혀 하늘을 올려다보게 했던 K—6기지 헬기와 비행기 들의 이착륙하는 굉음은 새삼 이 땅에 외국군대가 끊임없이 주둔해온 우울한 역사를 상기시켰다. 수십년 동안 마을주민들이 이 소음에 익숙해진 것처럼 미군주둔도 그렇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하지만 끊임없이 발생하는 미군범죄와 주둔군지위협정(SOFA)의 불합리성이 제기되는 현실은 무엇인가. 대추리의 현상황은 난제 중의 난제이다. 현실적으로 한미동맹의 존재를 받아들여야 하고 기지이전에 관한 미국과의 합의 역시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주민들은 장기적으로는 미군 없는 나라를 꿈꾸지만 당장은 미군기지 확장반대(철수가 아니다)를 외치며 생존권을 호소하고 있다. 여기에 접점의 여지는 없는 것일까. 당국과 주민 모두 기존 입장 외에는 한치도 물러설 곳이 없다고 주장한다면 결말은 예측할 필요도 없다. 더 늦기 전에 진지하고 제대로 된 대화를 시작해야 할 것이다. 당국은 주민 요구를 모두 수용할 수는 없을지라도 기지이전 계획에 대한 수정 가능성을 열어놓아야 한다. 절차상의 문제를 들어 반대 목소리를 묵살한다면, 한미FTA협상과정에서도 드러났듯 현정권의‘참여’는 과거 유신정권과 군사정권의‘밀어붙이기’의 다른 이름이 될 것이며, 그야말로 텅 빈 레토릭에 불과해질 것이다. 참여의 실현 없이는 절차의 정당성도 없다는 것을 굳이 언급해야 할까.

주민과 활동가 들이 예측하는 최악의 씨나리오는 오는 10월 마을에 대한 전면적인 철거이다. 그렇다면 갯벌을 시난고난 개간한 땅에 늘 대풍년이 들어서‘大秋里’라 불렸던 마을은 올가을 영영 사라지게 된다. 농사짓는 일상이 이상(理想)이 되고, 원래 살던 마을의 모습이 주민들에겐 유토피아가 되어버린 것이 이곳의 현실이다. 유토피아가‘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곳’이 될지 아니면‘예전 일상이 회복되는 곳’이 될지는 이제 현정권의 결단에 달려 있다. 대추리를 빠져나오며 계속해서 떠오르는 시 한편, 이 시의 소박하고 아름다운 풍경도 그토록 실현하기 어려운 이상향인지, 퇴임 후에는 농사지으며 살고 싶다는‘대통령의 직함을 가진 신사’에게 들려주며 묻고 싶다.

 

애당초 어느쪽 패거리에도 총쏘는 야만엔 가담치 않기로 작정한 그 知性 그래서 어린이들은 사람 죽이는 시늉을 아니하고도 아름다운 놀이 꽃동산처럼 풍요로운 나라, 억만금을 준대도 싫었다 자기네 포도밭은 사람 상처내는 미사일기지도 땡크기지도 들어올 수 없소 끝끝내 사나이나라 배짱 지킨 국민들, 반도의 달밤 무너진 성터가의 입맞춤이며 푸짐한 타작소리 춤 思索뿐 하늘로 가는 길가엔 황토빛 노을 물든 석양 大統領이라고 하는 직함을 가진 신사가 자전거 꽁무니에 막걸리병을 싣고 삼십리 시골길 시인의 집을 놀러 가더란다.

—신동엽 「散文詩 1」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