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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과 현장 | 국제심포지엄 발제문
한국에서의 ‘진보’와 동아시아 협력
이남주 李南周
성공회대 교수, 정치학. 『창작과비평』 편집위원. 주요 논문으로 「동아시아 협력론에 대한 비판적 검토」 「동북아시대 남북경협의 성격과 발전방향」 등이 있음. lee87@mail.skhu.ac.kr
1. 한국에서의 ‘진보’의 위기와 새로운 모색
최근 한국사회에는 ‘진보’가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1 이는 사회주의체제의 붕괴와 함께 냉전체제가 해체되면서 시작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한국에서 진보이념이 현실 사회주의체제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의식을 공유한다는 차원에서는 사회주의적 전통과 친화성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진보의 위기가 바로 표출되지는 않았다. 이념적으로는 위기의 조짐이 나타났지만 정치적으로는 진보세력이 영향력을 계속 증가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87년 직선제 개헌 도입으로 민주화가 시작된 이후 국민들은 대체로 기득권세력보다는 진보 혹은 개혁 진영을 지지하는 정치적 선택을 했다. 조금 단순화해서 말한다면, 일국적 차원에서든 지구적 차원에서든 자본주의체제가 가지고 있는 구조적 모순의 해결에 촛점을 맞추는 것을 진보적 경향으로, 자본주의체제의 정상적 운영, 특히 시민적 권리의 강화에 촛점을 맞추는 것을 개혁적 경향으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민주화과정에서는 이러한 차이점이 부각되기보다는 진보와 개혁이 기득권 구조의 타파와 정의롭고 공정한 사회 건설을 지향하는 단일한 흐름으로 인식되었다.
노무현(盧武鉉)정부의 성립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흐름의 영향력이 절정에 달했다. 노무현정부의 출범을 계기로 진보·개혁세력이 단순히 동원의 대상이 아니라 정치권력의 중심세력으로 등장했고, 2004년 탄핵사태를 거치면서 국회에서는 민주화운동의 맥을 계승하는 열린우리당이 다수를 점하게 되었다. 정치적 차원에서 보면 진보·개혁세력이 헤게모니를 잡았다고 평가할 수도 있다.
그런데 역설적이지만 이를 계기로 수면 아래에 있던 진보의 위기가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우선 진보·개혁세력은 정치적 승리에도 불구하고 진보적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체계적인 정책을 제시하지 못했고 과연 진보가 지향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확산시켰다. 여기에 노무현정부가 신자유주의에 투항적인 모습을 보이면서 진보적 정체성의 혼란이 가중됐다. 또한 정책적 혼란은 노무현정부에 대한 지지도 하락으로 이어졌고, 이 과정에서 진보·개혁세력이 과연 정책적 대안세력이 될 수 있을 것인지 회의도 증가했다. 정치적 승리는 이처럼 진보·개혁세력에 이념적 위기를 드러내는 계기로 작용한 것이다.
최근 이러한 위기의식을 공유한 진보진영은 여러 새로운 모색을 진행하고 있다. 한국사회에서 진보적 전통을 계승하고자 하는 다양한 싱크탱크(think tank)들이 조직되고 있는 것이 가장 중요한 변화의 하나이다. 그러나 이러한 조직적 기반의 구축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현재 상황을 정확하게 진단하고 실현가능한 진보적 전망을 제시할 수 있는 진보이념의 재구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다음 두 가지의 문제의식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남한사회 변혁운동의 민중민주주의적 전통을 계승하는 입장에서 현실의 위기를 진단하고 대안을 제시하려는 경향이며, 다른 하나는 세계체제 및 분단체제라는 거시적 차원의 변화와 연관해서 한국에서의 진보의 위기와 전망을 파악하려는 경향이다.
전자의 문제의식은 최장집(崔章集)에 의해 적극적으로 제기되었다.2 최장집은 참여정부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사회·노동정책에서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결과적으로 민주주의적 기반을 붕괴시켰다는 점을 들고 있다. 최장집의 이러한 비판은 단순히 사회·경제적 정책만을 문제삼는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적 정책이 공공성 담론의 약화나 정치의 역할 축소를 초래했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황해문화』 2005년 겨울호 특집 ‘민주화시대에 민주주의가 없다’에 게재된 글 대부분도“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가 문제라는 최장집의 주장과 맥을 같이하면서 현상황을 진단한 바 있다.
이들의 문제제기는 정치적 영역에서 절차적 민주화가 진행되었는데도 사회·경제적인 영역에서는 민주주의의 기초가 약화되고 있는 상황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최근 한국사회에서 양극화문제가 중요한 사회적 이슈로 부각된 데에는 이 담론이 커다란 역할을 했다. 그러나 ‘포스트민주화론’이 진보이념의 새로운 전망을 제시하는 데 얼마나 성공했는지는 의문이다.
최장집은 양극화문제와 민중적 문제의식을 강조하면서 이를 극복하기 위한 주요 고리로 정치적 영역, 특히 제도정치 내에서 민중주의적 시각이 실현될 수 있는 조건의 확보를 내세운다. 그리고 최장집 이외에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문제’라는 견지에서 한국사회를 진단하는 다양한 시각들도 제도정치 내에서 민주노동당 같은 진보적 정치세력의 강화를 현재 진보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주요 과제로 제시하고 있다. 최장집은 「해방 60년에 대한 하나의 해석: 민주주의자의 퍼스펙티브에서」라는 글에서 이념적 문제를 거론하며, NL과 PD의 이념에서 혁명적 급진성은 제거하고 현실에서 실현가능한 이념으로 재구성하는 것이 실질적인 민주화의 주요 고리라고 주장했는데, 앞의 맥락에서 보면 ‘현실에서 실현가능성’의 핵심적 부분은 진보세력이 운동에서 정치로 전환하는 것이다.
강력한 진보정당의 존재는 많은 진보적 구상이 정책화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일견 매력적이다. 그러나 생각해봐야 할 것은 진보정당에 대한 지지율이 그다지 높지 않은 현실이 단순히 지역감정 같은 요인 때문만이 아니라 국민들이 진보정당의 노선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 결과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특히 제도권 내의 개혁세력에 대한 비판이 왜 제도권 내의 진보세력에 대한 지지로 이어지지 않는가에 대한 더욱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 따라서 진보가 새로운 전망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방법론적인 차원에서 제도정치 내 진보세력을 강화하는 방향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도록 진보이념을 재구성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에 반해 후자의 문제의식하에 진보이념의 재구성이 일국적 시각을 넘어서는 인식의 지평을 필요로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 ‘변혁적 중도주의’이다. 변혁적 중도주의는 백낙청(白樂晴)에 의해 제시된 것인데 완전히 새로운 내용은 아니다.3 이는 그동안 주로 『창작과비평』을 통해 여러 논자들이 제시한 ‘분단체제론’ ‘87년체제론’ ‘동아시아론’등의 논리를 하나의 변혁적 지향을 표현하는 개념으로 통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변혁적 중도주의는 앞의 논의들에서 제기된 여러 현상적 문제들에 대한 지적에는 동의하지만 이 문제들이 출현한 원인을 단순히 노무현정부의 신자유주의적 정책에서 찾기보다 한국사회를 규정하는 복합적인 모순관계, 특히 자본주의 세계체제 및 분단체제와의 관계 속에서 찾을 때 해결의 전망을 제시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2. 변혁적 중도주의 구상과 동아시아적 함의
냉전시기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확장은 동북아시아에서 매우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 다만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한국을 끌어들이는 방식이 민족분단을 매개로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그 확장에도 일정한 제약이 존재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는 냉전시기 내내 세계체제 내의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에 매우 고정적인 균열이 존재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런데 주목해야 할 것은 이것이 지정학·이념·군사 모든 측면에서 매우 명확한 균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남북분단은 남과 북의 분리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긴밀한 상호관련성을 갖는 독특한 체제의 형성을 뜻하기도 한다는 점이다. 즉 분단체제는 서로 다른 두개의 체제로 분리되어 있다는 표면적 특징과 함께, 분열된 남과 북이 서로를 매개로 독특한 상호작용을 통해 자신의 체제를 재생산하는 메커니즘의 존재를 드러내는 개념이다. 따라서 분단체제가 계속되는 조건에서는 체제 내의 문제점들이 남과 북의 독자적 노력만으로 해결되기 어려우며, 진정한 진보는 분단체제의 극복 속에서 비로소 가능하게 된다.
이렇게 보면 한국의 진보는 일반적인 전망, 특히 일국적 시각에서 제시되는 것보다 어려울 수밖에 없다. 세계체제와 분단체제라는 일국적 범위를 넘어선 영역의 변화가 없는 상태에서 일국 내에서만 급진적 변혁을 추진하는 데는 명확한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사실 동아시아에서 진보운동이 정치적으로 성공했던 사례가 적지 않으나 현재 그 대부분이 신자유주의적 물결에 ‘자발적’으로 휩쓸려 들어가고 있는 상황이다. 이는 지난 시기 일국적 차원에서의 진보적 실천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일국적 차원의 변혁의 의미를 부정하고 세계체제의 변혁이라는 목표로 전진한다고 문제가 해결될 수는 없다.
진보·개혁세력의 지지를 받고 등장한 노무현정부가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것은 이러한 딜레마를 잘 보여준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긴장감을 상실한 노무현정부에 대해서는 비판이 필요하지만, 이를 특정 행위자의 잘못된 선택으로만 간주하고 더욱 진보적인 노선을 지향하는 행위자로 교체하면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판단이다. 현재 노무현정부가 보여주는 한계는 상당부분 자본주의 세계체제와 분단체제 등의 제약요인과 연관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비판은 필요하지만 이러한 체제적 제약요인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기초로 해야 한다. 하지만 세계체제나 분단체제라는 제약요인을 인식한다는 것이, 일국적 차원의 문제 해결이 세계체제나 분단체제의 변혁 이후에나 가능하다는 논리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인식이 강조하는 것은 일국적 차원의 변혁과, 세계 혹은 지역적 차원의 변혁을 연계시킬 수 있는 진보운동의 전략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또한 일국적 차원을 넘어서는 체제적 제약요인이 진보적 전망에 대한 부정적 결론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세계체제·분단체제는 단일한 지배원리가 아니라 여러 구성요소 사이의 균열과 마찰에 의한 모순들의 복합체라는 점에 변화의 열쇠가 있다. 이 모순들은 진보전략을 더욱 풍부하게 만드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표면적인 안정성과 달리 상당한 불안요인을 포함한다는 점은 이미 여러 사람들이 지적한 바 있으나 이러한 지적이 대부분 추상적이고 거시적인 차원에 머문 것도 사실이다. 한반도를 포함해 동아시아에서 진행되는 변화는 자본주의 세계체제 내의 균열요인을 더욱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냉전시기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확산을 저지했던 사회주의진영은 대부분 자본주의 세계체제 내로 편입되고 있는 상황이다. 그리고 북한의 경우도 자본주의 세계체제에 대한 저항의 근거지라기보다는 그에 대한 입장권을 얻지 못하고 있는 처지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즉 현상적으로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전일적 지배가 실현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적인 변화 이면에서 중국, 러시아, 미국, 일본, 한반도의 관계가 어떤 단일한 논리에 의해 통제되는 것은 아니다. 이들 국가의 경제·사회체제의 변화과정에서 신자유주의적 논리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긴 하지만 이에 반대하는 비판과 저항에 부딪쳐 신자유주의적 논리가 전면적으로 관철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정치·군사적 차원에서 미국의 일방주의가 실현되기 어렵다는 점은 더욱 분명하다. 1993년부터 본격화된 북핵문제가 이를 잘 보여준다. 북핵문제와 관련해서 미국의 의도, 특히 부시행정부의 일방주의가 관철되지 못하고 있는 반면, 북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지속적으로 강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확장 속에서 이러한 균열요인들은 진보적 노력을 진전시킬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해준다. 진보의 전략도 이러한 균열요인들을 어떻게 적극적으로 활용할 것인가에 촛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한반도에서는 2000년의 6·15정상회담이 그 중요한 계기를 제공해주었다고 할 수 있다. 6·15정상회담 이후 남북의 화해와 협력이 진전되면서 분단체제의 동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고, 이는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동북아에서 작동하는 메커니즘에도 동요를 초래하고 있다. 분단체제의 동요와 극복은 진보적 측면에서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
첫째, 한반도에서 분단체제의 극복과 이를 계기로 촉진되는 동북아 국가들 사이의 협력은 자본주의 세계체제 내에서도 미국적 표준, 혹은 신자유주의의 전일적 지배가 아닌 더욱 인간적인 표준과 원리를 발전시킬 가능성을 제공할 것이다. 둘째, 한반도의 평화체제로의 전환은 동북아시아·동아시아가 특정 패권국가의 지배질서에 편제되지 않고 탈중심적인 협력으로 나아가게 만들 것이다. 셋째, 분단체제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진보적 문제의식의 발전을 가로막는 의식적이고 사회구조적인 장벽이 약화될 것이며, 이는 사회민주주의 등 더욱 진보적인 목표를 추구하는 다양한 노력들을 한층 촉진시킬 것이다.
여기서 중도주의적 이념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그동안 한국에서 진보이념은 급진주의적 이념과 등치되어왔으며 이러한 경향은 여전히 강한 편이다. 그렇기에 민중민주주의적 경향을 계승하는 속에서 서구의 사회민주주의 모델을 수용하여 진보이념의 ‘실현가능성’을 높이려는 흐름이 등장하고 있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사회민주주의의 발생지인 유럽에서도 ‘제3의 길’등 사회민주주의의 혁신을 위한 노력이 나타나고 있는 것은 전통적 사회민주주의로는 현재 진행되는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변화에 대응하기 어렵다는 현실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제야 비로소 내부의 자본축적 동력을 갖추기 시작한데다 분단이라는 가외의 부담까지 안고 있는 한국에서 사회민주주의 모델을 교조적으로 수용하기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따라서 한반도에서 진보이념은 사회민주주의적 기획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분단체제의 극복이라는 과제를 중심으로 시민민주주의적 기획을 포용할 필요가 있으며, 이 역시 충분히 진보적 의미를 갖는 것이다.
현상황에서 자본주의 세계체제를 대체할 수 있는 명확한 대안을 제시하기는 힘들 것이라는 판단이다. 이는 단순히 물리적 역량의 부족만이 아니라 상상력, 이념적 구성능력 등의 한계 또한 고려한 것이다. 다만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신자유주의나 미국의 일방주의적 질서로 전락하지 않고 그 안에서 정의·생태 등의 진보적 가치를 반영하는 다양한 변화의 계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면 이 역시 상당한 성공이며 충분한 진보적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특히 한국현대사를 보면 이념적 경향에서 커다란 차이가 없는 보수와 온건개혁 정당 사이의 정권교체만으로도 지배체제의 균열을 증가시키고 진보적 흐름을 강화할 수 있는 정치사회적 조건이 형성되었다는 점도 중도주의가 변혁적 동력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현재 한국사회는 정치적으로 커다란 변화가 진행중이다. 표면적으로는 보수세력의 헤게모니가 강화되는 조짐이 나타나고 있는데, 지난 5·31 지방선거나 7·26 재보궐선거의 결과 모두 이러한 경향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만약 앞으로 진보세력이 전통적 이념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이러한 경향은 더욱 강화될 것이다.4 그러나 분단체제의 동요를 초래하는 국내외 정세의 변화가 보수적 헤게모니만으로 대응하기 어렵다는 점을 고려하면 상황이 비관적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남북의 점진적 통합과 연계된 총체적 개혁”이라는 큰 흐름 속에서 진보와 온건개혁 세력이 보수헤게모니에서 벗어나 결합과 연대를 실현할 수 있는 조건이 과거보다 성숙되는 중이라고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한반도 분단체제의 극복은 동아시아의 새로운 질서 형성과 긴밀하게 맞물려 진행될 것이다. 즉 변혁적 중도주의는 한반도라는 지역적 범위를 넘어서 동아시아와 전지구적 차원에서 진보의 역동성을 강화하고 동아시아의 지역적 연대를 풍부하게 만들 수 있는 전망을 제시하고 있다. 이는 현재 한국, 그리고 한반도에서 미국의 전일적 지배의 확대냐 아니면 이를 극복할 새로운 협력질서의 형성이냐를 가름하는 힘겨운 씨름이 다른 어떤 지역보다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이미 냉전체제의 해체 이후 강상중(姜尙中), 와다 하루끼(和田春樹) 등이 ‘동북아 공동의 집’구상을 통해 한반도의 평화가 동북아시아·동아시아 평화의 핵심고리가 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 바 있다. 우리는 이보다 한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즉 한반도에서 분단체제의 극복은 단순히 군사·정치적 의미의 평화만이 아니라 사회·경제적 차원의 평화와도 연결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한반도 내에서 균형적이고 친환경적인 사회·경제체제를 건설하기 위한 노력도 필요하지만 동아시아 협력이라는 면에서도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
3. 동아시아 협력의 새로운 모색
현재 진행되고 있는 다양한 동아시아 협력은 냉전해체 이후 동아시아에서 새로운 평화질서를 구축하기 위한 움직임과 직·간접적으로 관련을 맺고 있다. 이미 한국에서는 1990년대에 일부 비판적 지식인들이 동아시아론의 구성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인 바 있다. 이는 냉전체제의 와해와 급격한 환경변화에 맞추어 새로운 이념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일국적 시각과 세계체제적 시각의 매개항으로, 특히 전지구적 자본의 획일화 논리에 저항하는 거점으로 동아시아를 주목하게 된 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이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지는 않으나 일본에서도 앞서 언급한 ‘동북아 공동의 집’구상 등 냉전질서를 대체할 새로운 지역질서 형성의 가능성을 모색해왔다.
그러다 1997년 금융위기를 계기로 동아시아에서는 ‘ASEAN+3’이라는 틀 속에서 본격적인 지역협력이 진행됨에 따라 동아시아론의 실천적 의미가 더해지기 시작했다. ‘ASEAN+3’에서는 동아시아 공동체 형성이라는 장기적 목표를 포함한 다양한 협력구상이 제출되었다. 특히 역내 국가들 사이에 FTA가 활발하게 체결되면서 협력의 제도적 기반이 더욱 강화되고 있다. 그런데 이처럼 시장과 개방이 지역협력을 촉진하는 식의 변화는 동아시아 협력이 기본적으로 자유주의·기능주의적 경로를 따라 진행됨을 보여준다.
동아시아지역에서 역사·문화·군사적 요인에 따른 불신과 갈등이 여전히 심각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러한 경로를 통해 협력의 기초가 강화되는 것은 나름의 긍정적인 의미가 있다. 특히 동아시아 협력이 아직 초기 단계인 상황에서 경제협력이나 기능적 협력같이 지역통합을 촉진시킬 요인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은 중요하다. 한국과 일본의 적잖은 비판적 지식인들의 동북아시아·동아시아 협력구상에서 역내 FTA등 경제협력이 강조되는 것도 이러한 까닭이다.5 이는 동아시아 협력에서도 중도주의적 접근이 필요함을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중도주의적 접근은 자본주의 세계체제 내에서 다양한 실험과 진화의 가능성을 열 수 있다는 점에서 변혁적인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시장과 개방이 협력의 물적 토대를 강화하는 동시에 적잖은 부작용을 발생시킨다는 점을 고려하면 자유주의와 기능주의에 대한 맹목적 추종은 피해야 한다. 이미 지구화는 많은 국가에서 소득분배 구조를 악화시키고 있다. 「인류발전보고서 2005」(Human Development Report 2005)는 최근 20여년 동안 조사 가능한 73개국 중 53개국(세계인구의 80%)에서 소득격차가 확대되었으며 9개국(세계인구의 4%)에서만 소득격차가 줄어들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특히 유럽과 달리 국가간 경제발전 단계의 차이가 크고, 각국 내에서 시장의 실패를 보완할 수단이 취약한 동아시아의 상황을 고려하면 시장과 개방이라는 동력에만 의존하는 지역통합이 성공을 거두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동아시아에서는 개발도상국뿐 아니라 한국과 일본 등 비교적 발전된 국가에서도 양극화가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으며 대부분의 국가들이 사회안전망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태이다. 중국의 예를 들면 공공지출, 특히 의료와 교육 부문의 지출은 1인당 기준으로 유럽의 1/40, 1/50에 불과하다는 추정도 있다.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의 경우에도 커다란 차이가 없다.
따라서 지구화라는 객관적 추세를 전면적으로 부정할 수는 없지만 이를 관리하기 위한 지역적 차원의 노력이 필요하다. 스티글리츠(J. Stiglitz)는 지구화 및 개방과 관련하여 ‘급진적 자유화+긴축재정’으로 요약되는 워싱턴 컨쎈써스(Washington Consensus)의 정책패키지에 반대하고 각국의 경제수준 차이를 고려한 단계적 자유화, 빈곤문제에 대한 적극적 대응의 필요성을 주장한 바 있다.6 그리고 헬드(D. Held)는 다차원적으로 정의된 인류사회의 보편적 가치(지구적 차원에서의 사회정의, 인권, 민주주의적 거버넌스, 환경)의 실현과 연계될 수 있는 지구화 전략, 즉 사회민주주의적 지구화 기획의 필요성을 제시한 바 있다.7 이러한 구상들은 진보적 지구화 혹은 진보적 개방의 추구를 목표로 하는 것이다. 동아시아 협력에서도 이같은 문제의식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시장과 개방을 관리하기 위한 지역협력을 강화해야 한다. 특히 시장과 개방 속에서 공공성을 어떻게 강화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문제는 지금처럼 국가 차원만으로는 이러한 지향들이 지역협력에 적극적으로 반영되기 어렵다는 점이다. 현재 동아시아 대부분의 나라는 국가를 기본단위로 하는 개발주의적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FTA같은 지역경제통합의 발전도 패권적 질서를 극복하기 위한 다자주의적 질서에 대한 모색과 지역적 연대감이 아니라 개발주의적 경쟁에 의해 추동되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권위주의 체제하에서 발전이란 전체 국민의 복지 증진보다는 특정 기득권층의 이익 증가를, 친환경적인 발전보다는 환경에 대한 위협을 증대시키는 개발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개별 국가 차원은 물론이고 동아시아의 지역협력에도 생태·복지 등의 진보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민간 차원의 노력과 협력이 절실하게 요구된다. 현재 동아시아에서는 경제적 협력의 진전에 비해 상호신뢰를 증진시킬 사회·문화적 차원의 민간교류가 크게 뒤처져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여러 의제들이 민족적·국가적 프리즘에 의해 왜곡되어 해결이 어려워지기 마련이다. 따라서 동아시아에서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에 의해 지체된 민족국가들 사이의 정상적 관계를 발전시키는 것이 여전히 중요한 과제로 남아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이러한 민족주의적 과제의 해결도 탈민족주의적 상상력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다는 점이 점점 분명해지고 있다. 지구화와 지역협력의 진전이라는 객관적 상황을 고려할 때 지역적 연대감을 증가시키고 지역협력이 보편적 의미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민간 차원의 초국가적 협력이 필요하다. 즉 동아시아 지역통합을 위해서는 복합적이고 다원적인 접근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서 시민사회가 주도하는 초국가적 협력의 역할이 더욱 강화되어야 한다.
여기서 지식인들의 노력이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우리가 현재 유럽통합에서 배워야 할 교훈은 자유주의·기능주의적 방법론만이 아니라 통합의 지적인 토대, 즉 인식공동체(epistemic community)를 형성하기 위한 지식인들의 적극적 노력이다. 유럽의 경우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 대한 반성이 이러한 노력을 촉진했지만 동아시아의 지식인들은 또다른 실패가 가져다줄 교훈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역사에 대한 통찰과 미래에 대한 비전의 공유를 통해 동아시아 협력의 새로운 단계를 열어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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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 진보(progress)는 역사의 변화를 과거보다 나은 미래로의 전진이라는 낙관적이고 단선적인 발전관에 입각하여 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비판적 접근과 모순의 극복을 통해 더 높은 차원의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의식적 노력을 말한다. 진보의 구체적인 내용과 강조점은 나라마다 차이가 있는데, 현재 한국에서는 정치적·절차적 민주주의뿐만 아니라 실질적·사회경제적 민주주의(분배·복지)를 지향하며, 개발주의에서 벗어나 생태적 가치를 중시하고, 냉전에 의해 강요당한 분단체제를 극복하며 평화적 남북통합이 진행되는 사회를 지향하는 다양한 흐름을 포괄한다. 이러한 여러 가치가 서로 어떻게 관련되며 어떤 것이 중심과제가 되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적지 않은 이견이 존재한다.↩
- 최장집의 최근 논의는 2005년 10월 참여사회연구소 해방 60주년 기념 심포지엄의 발표문 「해방 60년에 대한 하나의 해석: 민주주의자의 퍼스펙티브에서」와 2006년 1월 12일 성공회대 사회문화연구소가 주최한 토론회의 발표문 「한국 민주주의의 변형과 헤게모니」를 참고. 남한사회에서 민중민주주의적 전통을 계승하는 이념적 경향이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최장집의 논의에 촛점을 맞춘 것은 비판담론에 머무르고 있는 다른 주장들과는 달리 진보이념의 재구성에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실현가능성’문제를 적극적으로 제기했기 때문이다.↩
- 변혁적 중도주의의 개념은 2006년 디지털창비(www.changbi.com)의 백낙청 신년사 「6·15시대의 대한민국」(2006.1.1)에서 처음 사용되었으며, 2006년 5월 창비에서 출간한 사회비평서 『한반도식 통일, 현재진행형』에 실린 「변혁적 중도주의와 한국 민주주의」(2006.3)에서 더 자세히 설명되었다.↩
- 진보진영 내에는 선거에서 진보세력과 온건개혁세력의 관계를 제로썸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하지만 최근의 선거결과는 반대의 경향을 보여준다. 온건개혁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열린우리당의 지지율이 2004년 이후 하락하고 있으나 이것이 진보정당의 지지율로 이어지지 않고 동반하락하고 있는 것이다. 2004년 이전에는 양 정당의 지지율이 동시에 상승하는 현상이 나타난 바 있다.↩
- 강상중이나 와다도 FTA를 지역통합의 중요한 구성요소로 본다. 한국의 진보진영은 현재 진행중인 한미FTA협상에 대해 공통적으로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지만, 그 안에서는 FTA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쪽과 추진방향과 방식에 비판의 촛점을 맞추는 쪽으로 나뉜다.↩
- Joseph E. Stiglitz, Globalization and Its Discontents, W. W. Norton & Company Inc. 2002.↩
- David Held, Global Covenant: The Social Democratic Alternative to the Washington Consensus, Polity Press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