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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전성태 全成太
1969년 전남 고흥 출생. 1994년 실천문학 신인상으로 등단. 소설집 『매향』 『국경을 넘는 일』, 장편 『여자 이발사』가 있음. jstroot@hanmail.net
목란식당
북쪽 아르항가이 초원에서 울란바토르로 돌아왔을 때는 시월도 다 저물어 있었다.
칭기즈칸 공항에서 여행객들을 배웅하고 나서 나는 평소와 달리 한동안 대합실에 앉아 있었다. 내 손에는 디자인이 똑같은 명함 열댓장이 들려 있었다. 외국계 보험회사의 점장들이 들려주고 간 명함들이었다. 그들은 올해 내가 맡은 마지막 여행객들이었다. 마치 나는 군에서 전역할 때와 흡사한 기분이었다. 나는 동기들과 헤어지고 나서 홀로 상봉터미널에 맥없이 앉아 있었다. 꼭 다시 만나야 하는 사람들처럼 서로 연락처를 주고받았으나 12년 동안 다시 만난 동기는 한명도 없었다.
나는 공항을 나서면서 배낭에서 휴대전화기를 꺼냈다. 삼촌은 지난주에 교민들과 어울려 러시아 바이칼호로 떠났는데 일정대로라면 지금쯤 돌아와 있을 거였다. 삼촌을 생각하자 허탈감이 마치 외로움에서 비롯된 양 다소 기운이 났다.
“아, 잘 다녀왔냐?”
삼촌이 휴대전화를 받았다. 바깥인지 차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삼촌, 내가 없는 동안 지구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건 아니죠?”
나는 짐짓 장난스런 목소리로 소리쳐 말했다. 삼촌은 잠시 대답이 없었다. 여행에서 돌아오면 나는 으레 삼촌에게 세상의 안부를 묻곤 했다. 다른 사람들도 그러는지 모르나 나에게는 여행에 대한 어떤 징크스가 있었다. 내가 여행하는 동안 세상에는 꼭 큰일이 한건씩 터졌다. 대학 3학년 여름방학 때 몽골로 어학연수를 왔는데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삼풍백화점이 무너졌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5년 전 가을 처음으로 가이드를 맡아 고비를 열흘간 돌아다니다가 오니 뉴욕 세계무역쎈터가 테러로 무너져 세상이 발칵 뒤집혀 있었다. 하다못해 지난해 연말에는 한국에 다녀온 사이 울란바토르의 범버거르 시장이 불타 사라지고 없었다. 그곳은 삼촌과 내가 평소 자주 이용하던 재래시장이었다. 내가 떠나 있는 동안 기다렸다는 듯 몽골 건국 이래 최대 화재사고가 발생한 거였다. 어찌 보면 내 신변과 상관없는 일들이라 내 여행이 사고를 불러온다기보다는 사고가 내 부재를 틈타 일어난다고 해야 옳았다. 그럴 때는 우주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우주인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삼촌은 그건 징크스가 아니라고 했다.
“네가 세상에 관심이 좀 많을 뿐이야. 세상은 한시도 조용한 날이 없거든.”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삼촌의 말처럼 내가 세상에 관심이 많다고는 할 수 없었다. 삼촌은 가끔 어느 나라에서 일어난 내전이나 쿠데타 소식을 알려오지만 그건 내게 연예인 아무개의 이혼이나 사망 소식만큼 감흥을 주지 못했다. 애초부터 삼촌과 내가 생각하는 세상은 다른지도 몰랐다. 한국 신문을 받는 날이면 나와 삼촌은 신문을 반으로 나누어서 읽는다. 정치면과 국제면은 삼촌의 차지이고 나는 연예면과 스포츠면을 본다. 간혹 사회면에 황당한 사건사고 소식이 있으면 삼촌이 발견해 알려주곤 했다. 오늘 삼촌은 틀림없이 북한이 지하 핵실험을 했다는 소식을 전해올 것이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도 CNN이나 교민신문을 통해 북한의 핵실험이 임박했다는 뉴스가 여러차례 나왔고, 핵실험 실시 소식은 보험회사를 통해 연수장소인 초원에 곧바로 전해졌다. 지난여름 여행 때는 북한이 미사일을 쏘았다고 삼촌이 심각하게 말했다. 삼촌이 거두절미하고 이야기해서 나는 실제로 깜짝 놀랐다. 보나마나 내 징크스가 들어맞았다는 예감으로 나는 “미사일을 쏴요? 어디, 서울로요?” 하고 호들갑을 떨었다. 어이가 없다는 듯 삼촌은 짧게 대답했다. “태평양으로.”
나는 오늘도 짐짓 놀란 척 반응해줄 요량이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냐고 말이다. 이윽고 수화기 너머로 삼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란에 옥류관 출신 요리사가 왔다는구나.”
“네? 목란식당이 어쨌다고요?”
나는 삼촌이 나름껏 농담을 하는 거라 생각했다.
“평양 옥류관에서 공훈 냉면요리사가 직접 나왔다지 뭐냐.”
삼촌이 심상하게 말을 이었다. 나도 덩달아 시들해졌다.
“지금 어디세요?”
“표구사에 가는 길이다. 피곤하지 않으면 목란으로 오렴. 함께 저녁이나 먹고 들어가자.”
표구사는 박씨라는 교민이 운영하는 갤러리였다. 그는 이민을 오기 전에 대전에서 표구사를 운영했고 삼촌과도 친분이 있었다. 그때는 삼촌이 한창 붓을 잡고 있을 때라 삼촌의 그림들은 주로 그가 표구했다. 몽골에 차린 갤러리는 의외로 잘되는 모양이었다. 생활고에 시달리는 몽골 화가들이 작품을 싼값에 많이 내놨고 그중에는 더러 사회주의 시절의 명작으로 꼽히는 그림들도 있었다. 여행객들도 모사품 가격으로 괜찮은 작품들을 구입해 갔다. 또한 평양식당 목란에 전시해놓고 파는 북한 그림들도 그가 도맡아서 표구해주고 있었다. 박씨는 특별한 그림이 들어오면 삼촌에게 감수를 부탁해 가격을 매겼다. 삼촌은 그 일을 썩 내켜하지 않았다. 한때 잘나가던 화가로서 왜 자격지심이 들지 않겠는가. 나나 박씨나 삼촌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했다. 박씨는 삼촌을 아끼는 사람이었다. 그는 어떤 식으로든 삼촌이 다시 붓을 잡도록 도와주고 싶어했다.
나는 삼촌이 정치적인 이유로 그림을 중단했다고 생각한다. 삼촌은 십여년 전 북에 다녀온 적이 있다. 아직 남북간에 민간교류가 본격화되기 전이었는데 서로 정치적으로 덜 민감한 부분을 미리 열어본 케이스였다. 삼촌에게는 특혜가 아닐 수 없었다. 제한적이나마 삼촌은 묘향산과 금강산의 절경을 스케치해다가 서울에서 전시회를 가졌다. 그런 이유로 전시회는 꽤나 세인들의 관심을 끌었다. 하지만 폭포와 계곡과 기암괴석을 담은 산수화들은 삼촌의 예전 작품들에 비해 새로울 게 없었다. 다만 그림 한점은 화단에 잔잔한 화제를 뿌렸다. 검은 치마에 흰 저고리를 입은 북녘 처녀가 만추의 황톳길을 걸어가는 ‘마식령 처녀’라는 제목의 그림이었다. 전시된 작품 중 유일하게 물상으로 사람이 들어간 그림이었고 해석의 여지도 풍부했다. 한 소설가는 그 그림에 스토리를 꾸며서 산문을 쓰기도 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시인 구상(具常) 선생이 젊은 시절 폐병에 걸려 그 마식령을 넘어 약수가 유명한 마전리로 요양을 떠났고, 혼담이 오가던 처녀가 그를 찾아 고갯길을 넘었다는 후일담이었다.
삼촌은 그 그림이 주목을 받자 내심 곤혹스러워했다. 나는 그 내막을 비교적 소상히 알고 있었다. 삼촌은 묘향산과 금강산 외에 다른 곳에서 목격한 사실을 그리면 안되었다. 입북에 앞서 남북 당국자가 합의하고 삼촌도 서약한 조건이었다. 따라서 삼촌은 반칙을 한 것이었다. 그 그림은 애초에 스케치북에 들어 있지도 않았다. 그러나 정작 삼촌이 화폭에 옮기고 싶은 풍경은 금강산 가는 길에 목격한 그 처녀였다. 화가의 자의식으로 삼촌은 매우 고통스러워했다.
“야야, 그 황톳길을 지프로 넘어가는데 검은 치마에 흰 저고리를 입은 처녀가 걸어가는 거야. 그 황톳길을 한 처녀가 넘고 있었다 이거야.”
주위에서 몇사람이 꼭 그려야 한다고 부추겼고, 나 역시 그중 하나였다. 나는 삼촌이 예술가로서 그 정도의 금기에는 저항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지고 보면 시범사업이라 남북 당국자들에게 다소간 정치적 부담은 되겠지만 그림이 딱히 정치적 메씨지를 담고 있지는 않았다. 이를 문제삼는다면 결국 문을 열지 않겠다는 꼬투리에 지나지 않을 거였다.
마침내 삼촌은 결심을 굳히고 붓을 쥐었다. 그래도 마음이 불편했던지 그림을 끝마치고 제목은 바꿔 달았다. 원래 삼촌이 지프에 실려 넘은 고갯길은 마식령이 아니었다. 그 근처의 울림령이라는 고갯길이었고 그 처녀를 목격한 곳은 어느 폭포로 가는 샛길에서였다. 어쨌든 전시회는 무난히 끝났고 어떤 문제도 발생하지 않았다. 삼사년 뒤에는 수순대로 금강산 관광길이 열렸다.
삼촌에게 뒤늦게, 그리고 예기치 않게 문제가 찾아왔다. 행사 목적으로 북에 다녀온 동료화가들이 삼촌의 그림 때문에 북녘사람 몇이 처벌받았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당시 삼촌과 동행한 그쪽 사람들은 기관원 둘과 운전사, 그리고 화가 한사람이었다. 삼촌은 자신의 그림 욕심으로 여러 사람이 다쳤다고 자책했다.
“야야, 그 화가 말이다, 나보다 나이는 서너살 밑이었다만 조선화를 그리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어.”
삼촌은 지금도 술이 과해지면 푸념을 늘어놓았다. 어쨌든 삼촌은 그때의 충격으로 붓을 놓았다. 여러 경로로 조선화 화가의 소식을 수소문했지만 그는 8년째 어떤 활동도 하고 있지 않은 듯했다. 삼촌이 박씨 갤러리를 출입하는 목적도 모르긴 해도 그 화가의 그림을 혹시나 발견할 수 있을까 싶어서일 것이다. 목란 사람들에게 알아봐달라고 손을 놓아볼 수도 있겠지만 자칫 그에게 화가 뻗칠 수 있어 그도 못했다.
나는 삼촌의 입장을 이해하면서도 한편으로 자의식이 지나치지 않은가 짜증이 날 때가 많았다. 따져보면 문제는 그 정도도 포용하지 못한 북한당국에 있는 것이지 삼촌에게 있다고 보기 어려웠다. 더구나 그 일로 남북교류에 문제가 생긴 것도 아니었다. 보나마나 내부 단속용 본보기로 희생된 게 틀림없었다.
“삼촌, 어쨌든 정치적인 방북길 아니었어요? 결과도 정치적으로 풀렸을 뿐이에요.”
그 문제에 관한 한 삼촌은 한마디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
“너는 어떻게 한때 시인을 꿈꾼 놈이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냐.”
목란으로 차를 몰면서 나는 몹시 지쳐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애초에 일주일간의 해외연수라고 해서 내 딴에는 일반적인 몽골 관광상품으로 여행 일정을 짜서 권했다. 온천지의 캠프에 머무르며 초원과 고비를 적당히 체험하고 식단도 한국음식 위주에다가 한두 끼니를 양고기 요리 같은 전통음식으로 넣어볼 셈이었다. 보험회사 인사담당자는 프로그램을 조정해주길 원했다. 여름도 아니고 늦가을에 몽골로 연수장소를 선택한 이유가 관광은 아니지 않겠냐는 거였다. 맞는 말이었다. 시월 말이면 고비는 이미 겨울로 접어들어 모래바람이 몹시 심하고 밤기온은 영하로 떨어졌다. 인사담당자는 회사가 요구하는 연수프로그램을 군대의 생존훈련쯤으로 이해해주면 좋겠다고 했다. 그의 입에서 노마디즘 경영이니 개방적 네트워크니 하는 낯선 용어들이 흘러나왔을 때 나는 포기할 생각도 했다. 이미 일본 여행업계 쪽에서 그런 방식의 기업 연수프로그램이 시작되었다는 소리를 들은 적은 있었으나 나는 그쪽으로 어떤 지식이나 경험도 없었다.
그런데도 내가 거절 못한 데는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 우리 여행사를 추천한 사람이 그 회사 기획조정실 부사장이었다. 까맣게 잊은 사람이었는데 그는 이태 전에 내게 가이드를 받은 인연이 있다고 했다. 아마 나는 여행길 어디에선가 그에게 장차 몽골 현지에서 여행사를 해볼 뜻을 비쳤던 모양이다. 나는 올봄에야 우여곡절 끝에 작은 여행사를 차렸다. 기왕 여행사를 끼고 가이드를 하느니 회사를 직접 차려도 괜찮겠다 싶어서 아파트에 간판을 내걸었다. 최근 몇년 새 몽골이 한국에서 각광받는 해외여행지가 되었다 해도 여행업계 입장에서는 아직 선뜻 구미가 당기는 투자처는 아니었다. 6개월이나 되는 긴 겨울 비수기가 최대 장애였다. 반년 벌어 반년 까먹는 장사가 되기 십상이었다. 그래서 인사담당자가 이번 연수프로그램이 잘되면 앞으로도 지속할 수 있지 않겠냐는 암시를 해오는 데에는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정기적인 동절기 프로그램을 따올 수 있다면 나로서는 더 바랄 게 없었다. 아예 이번을 계기삼아 기업연수를 전문으로 맡는 여행사로 전환해볼 욕심도 생겼다. 나는 『CEO 칭기즈칸』이니 『몽골 초원의 말발굽소리』 따위의 자기계발서나 경영서를 구해다가 읽었다.
교육프로그램 설계와 진행은 일본 여행사에 의뢰하고, 나는 프로그램의 제반 지원업무를 맡았다. ‘칭기즈칸 군대와 세계경영’이라는 제목의 연수프로그램은 다양하게 이루어졌다. 한나절이나 소요되는 등반을 통한 체력훈련이나 바람 찬 계곡에서 노숙하는 극기훈련, 초원에 흩어져 명상을 하는 프로그램도 포함되었다. 그러나 교육의 절반은 일본인 전문강사가 진행하는 ‘노마디즘과 경영마인드’ 따위의 강좌였다. ‘경영 경량화와 효율성’이라는 강좌시간에는 연수생들이 직접 유목민의 전통가옥 게르를 설치하고 해체하는 훈련을 받았다. 나는 그 훈련이 보험회사와 어떤 직무적인 연관성이 있을까 의심스러웠다. 게르 설치는 현지 목자(牧者)의 가재도구까지 포함한 모든 살림살이를 옮겨놓고 실시되었다. 두시간 만에 게르가 설치되자 나무침대와 몇개의 트렁크가 자리를 잡았다. 젊은 일본인 강사는 유목민의 이동 위주 주거형태가 현대사회의 기업경영에 영감을 준다고 역설했다. 기업구조를 경량화해야만 경영의 효율성이 극대화된다는 요지였다.
프로그램을 준비한 한달 반 정도가 고달팠지 일주일에 걸친 일정은 대체로 편안했다. 한곳에 붙박여 지낸데다가 연수생들도 일반 관광객들과 달리 통제에 잘 따라주었다. 그런데도 나는 내가 연수를 받는 것처럼 피곤했다. 나는 교육기간 동안 문득문득 박탈감을 느꼈는데 그것은 비정한 세계로부터 탈락한 느낌에서 비롯되었다. 나는 어떤 경쟁에서 지레 겁을 먹고 밀려나 이 초원으로 도망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마치 새로운 문명으로 무장하고 초원에 진출한 낯설고 두려운 세력처럼 여겨졌다. 앞으로 그들이 세계를 주름잡고 호령할 게 뻔히 보이는 듯했다. 왠지 기업이 국가를 능가하는 이념체제로 바뀌고 있다는 인상, 글로벌 경영이라는 개념이 막연한 구호가 아니라 자본의 의지에 의해 낡은 구조를 깨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럼에도 나는 이 캠프가 주는 두려움의 정체를 완전히 납득할 수는 없었다. 끝없이 무력감만이 증폭되었다.
연수생 중에 부산에서 왔다는 점장이 명상을 끝내고 소감을 밝히는 자리에서 말했다. 그는 설사를 한다며 서너차례나 나에게 약을 타간 사내였다.
“보소, 이 대지는 우리 같은 건 안중에도 없습니다. 인간이 다 뭡니까, 나무며 풀 같은 생명성이란 건 애초부터 안중에도 없어요. 그저 저 혼자 오만하게 존재할 뿐이라예. 우리는 겨우 붙어 있을 뿐입니더.”
그가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사투리가 밀려나오는 거친 말투는 간증처럼 절실해 보였다. 말뜻을 다 헤아릴 수는 없어도 나는 그가 너무 힘에 부친다고 항변하는 소리로 들렸다. 캠프장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나는 곧 그가 낙오하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비로소 나는 캠프장이 내내 어떤 종교적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고개를 들어 잿빛으로 마른 초원을 바라보았다. 그의 말이 사실인 양 대지가 낯설어 보였고 나는 까닭없이 고독해졌다.
바론두룬잠 거리에 들어섰을 때는 정면에서 해가 졌다. 목란식당이 든 건물 창가로 두개의 현수막이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조선의 넘버원, 경력 30년의 공훈랭면료리사 드디어 몽골 상륙!’
‘새롭고 귀여운 접대원 처녀들의 최상의 써비스!’
그건 몇달 전부터 교민신문에 난 광고문구이기도 했다. 비수기를 맞아 교민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목란 나름의 고육지책인 것 같았다. 처음 교민신문에 목란의 광고가 실렸을 때 나는 촌스러운 느낌에 한참 웃었다. 삼촌은 꽤 감격스러운 눈치였다. 교민신문에 북한식당의 광고가 나왔다는 사실 자체가 신선하다고 했다.
“얼마나 보기 좋냐? 이런 데 나란히 실리니까 한 동포라는 게 실감나지 않니?”
“식당은 식당이지, 뭘.”
남쪽 사람들에게 목란이 단지 식당일 수만은 없다는 사실을 나도 잘 알았다. 이것도 일종의 분단장사인 셈이었다. 미국의 맥도널드처럼 목란은 북을 대표하는 식당이었다. 평양과 금강산에도 있고, 중국 북경과 천진에도 같은 이름의 직영식당이 있었다. 남쪽 사람들이 많이 찾거나 거주하는 지역에 북한식당이 서서히 들어서고 있었다. 이곳 목란식당은 2년 전에 개업했고 개업 전부터 교민들 사이에 화제가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음식맛보다 북녘 동포들을 만날 수 있으리라는 호기심으로 발걸음을 했다. 처음 목란을 찾는 사람들은 대부분 마치 맞선을 보러 가는 양 긴장했다.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썬글라스를 벗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
그래서 나 역시 관광객들을 위한 시내투어 코스에 목란을 꼭 집어넣었다. 관광객들도 반응이 좋은 편이었다. 대중식당 규모지만 손님을 맞는 처녀들이 감색 조끼 유니폼이나 한복을 차려입고, 주방 일꾼들도 조리복을 말끔하게 갖추어서 고급식당 분위기를 자아냈다. 홀에서는 이십대 초반의 평양 처녀 세명과 현지에서 고용한 몽골인 처녀 하나가 함께 일했다. 저녁시간에는 삼십분 정도 접대원 처녀들이 반주기에 맞춰 노래공연을 했다. 삼촌은 손님 접대하랴 노래 부르랴 바쁜 처녀들을 안쓰러워했다. 그래도 나는 단체손님을 데려갈 때면 꼭 노래를 청해 들었다.
가이드 일이 아니더라도 삼촌과 나는 목란식당을 자주 이용했다. 아파트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었고 음식이 정갈하고 입에도 닿았다. 평양냉면과 생선초밥이 목란의 주메뉴였다. 옥수수국수나 단고기 같은 전형적인 이북요리에다가 된장찌개나 삼치구이 같은 일반적인 한식도 메뉴에 올라 있었다. 육회와 불고기는 초밥과 더불어 목란이 자랑하는 특별요리였다. 그러나 아무래도 사람들은 평양냉면을 많이 찾았다. 나는 된장찌개나 김치찌개를 즐겨 먹었다. 냉면은 기대만큼 맛있지 않았다. 삼촌은 내 입맛을 이해 못하겠다는 반응이었다.
“네가 그 담담한 맛을 제대로 못 느껴서 그러는 거야.”
“삼촌, 이효석이라는 소설가를 아나요?”
“그 사람이 왜?”
“그이가 죽기 전 몇해 동안 평양에서 지냈어요. 그이는 오히려 평양에 와서 냉면을 끊고 온면을 즐겼대요.”
“사실이냐?”
“그럼요. 그런 산문이 있어요.”
“흥, 그 사람이 진미를 맛볼 줄 몰랐던 게로군.”
“삼촌, 평양에서 맛본 냉면하고 맛이 똑같나요?”
삼촌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냉면 사리를 몇가닥 감아서 후루룩 넘겼으나 역시 별로였다. 차라리 양념 진한 청수냉면이 그리웠다. 삼촌의 말마따나 조리 솜씨보다는 내 무딘 입맛 탓인지도 몰랐다. 어려서부터 길들어야만 진미를 알 수 있는 음식이 더러 있다는데 내게는 평양냉면이 그런 것 같았다. 그러나 냉면을 놓고 말없이 앉아 있는 삼촌을 나는 의심스럽게 바라보았다. 어쩌면 삼촌은 추억과 감상으로 냉면을 대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조금 이른 시간인데도 식당 입구에서부터 노래반주기 소리가 들려왔다. 남쪽 노래 「아침이슬」이었다. 목란 된장찌개를 떠올리자 식욕이 돌았고 나는 그간 묵은 기름기나 씻어내자는 생각으로 식당으로 들어섰다.
“어서 오십시오!”
춘심이라는 막내 접대원 처녀가 조금은 쌀쌀맞은 이북 억양으로 맞았는데 표정이 굳어 있었다. 평소 나와 삼촌이 즐겨 앉는 서쪽 창가 테이블은 이미 낯선 사내 둘이 차지하고 있었다. 점심 반주가 술자리로 이어졌는지 테이블 위에는 들쭉술병과 맥주병이 늘어서 있었다. 사십대의 두 한국인 사내는 이미 술이 거나하게 취해서 얼굴이 벌겠다. 명화와 복순 처녀가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부르고 있었는데 노래가 끝나자 두 사내가 앵콜을 청했다.
안쪽 홀은 단체손님이라도 예약된 듯 테이블 네개를 붙여서 쎄팅해놓고 있었다.
“삼촌은 아직 안 오셨어요?”
나는 엽차를 갖다놓는 춘심 처녀에게 물었다.
“금방 다시 오실 겁니다. 평양에서 그림이 새로 들어와서 화방 박선생님하고 옮기고 있습네다. 조금 기다리시라요.”
그러고 보니 새로운 그림들이 빈 벽을 채우고 있었다. 나는 의자에 외투를 벗어 걸쳐놓고 그림들을 둘러보았다. 주체탑과 평양 시가지를 후경으로 한 양화 「대동강」은 벽면 하나를 다 차지하고 오래전부터 걸려 있던 그림이었다. 그건 판매용이라기보다 장식용이었다. 전형적인 북한 수예품 「칠성문의 봄」 「묘향산의 가을」 「기녀 계월향」 「선녀도」 따위가 다른쪽 벽을 메우고 있었다. 수예품들은 그 섬세한 공력에 비해 어떤 예술적 감흥도 주지 않았다. 마치 이발소 그림 같았다. 그래서 나는 기회가 닿으면 관리인 부부에게 이런 수예품들은 남쪽 사람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충고해주고 싶었다. 서쪽 벽으로도 새 그림들이 눈에 띄어 나는 그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이봐, 그 노래 다시 한번만 더 들읍시다!”
사내 하나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홀을 향해 소리쳤다.
“이를 어드렇게 합니까. 벌써 세번이나 불렀시요.”
맏언니 명화 처녀가 마이크를 가슴에 안고 냉랭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마지막으로 딱 한번만 더!”
사내가 손가락을 세우며 간청하듯이 했다. 어쩔 수 없이 두 처녀가 다시 노래를 시작했다. 춘심 처녀가 사내들이 앉은 테이블로 다가갔다.
“죄송합니다. 곧 단체손님이 오실 텐데 그만 자리를 정리해주십시오.”
“오, 접대원 동무! 이리 좀 앉으라우. 우리가 말야 팔십년대에 저 노래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아?”
사내들은 끌끌거리고 웃었다. 사내가 춘심 처녀의 소매를 잡아끌자 그녀는 뿌리치고 한발 물러났다.
“그냥 말씀하십시오.”
“북한 동포들은 말야…… 아참, 북측이라고 해야 한다지?”
사내가 담배에 불을 붙여 들고 말했다. 나는 슬그머니 자리로 돌아와 의자에 앉았다. 가끔 목란을 찾는 손님들 중에 제 감회를 못 견뎌 추태를 부리는 손님들이 있었다. 이 집 고객으로 드나드는 교민 중에 불광동 양씨라는 사람이 그런 경우였다. 들리는 말로는 몽골 처녀에게 새장가를 들었다가 재산을 다 털려먹고 정신을 놓아서 교민식당을 떠돌며 연명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아무튼 그는 목란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면서도 걸핏하면 목란을 트집잡고 들었다. 몇주 전에는 냉면을 맛나게 먹고 나더니 난데없이 접대원 처녀들을 향해 소리치는 거였다.
“너희들 여기서 일하면 안되는 거 나 다 알고 있어. 취업비자가 아니잖아. 내가 다 알아봤다고. 이런 일 하면 큰일 나. 나, 똑똑히 기억해두라고. 불광동 양씨야.”
제 딴에는 냉면을 공으로 먹으려는 수작이었다. 어차피 목란뿐 아니라 어느 식당에서도 밥값을 안 받았다. 그래도 다른 교민식당에서는 조용한 양반이 유독 목란에서만은 큰소리를 치고 당당히 나간다는 거였다. 목란 여사장이 하루는 하도 속이 상해 사연을 털어놓으며,
“참, 내 살다가 저렇게 뻔뻔한 동포는 첨 봤습네다.”
하고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그 사람에 비하면 지금의 취객들은 제정신 가진 놈들이라 더 악질로 보였다.
“북측 동포들은 우리를 너무 몰라. 우리가 세금을 얼마나 많이 바쳐서 북으로 보내는 줄 모를 거야. 동포들을 위해서 군소리 없이 보낸단 말이야. 근데 당신들은 그걸 모르는 것 같애. 아, 속상해요.”
“고만 일어나시디요.”
춘심 처녀가 간청하듯 손을 뻗으며 말했다. 사내는 손사래를 쳤다.
“아니, 아니. 왜 자꾸 내몰려고 그래? 여기 식당 아니야?”
맞은편에 앉았던 사내가 벌떡 일어났다.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타오르고……”
사내는 비척거리는 걸음으로 반주기 앞으로 다가갔다. 명화 처녀가 마이크를 안기듯 넘겨주고 주방 쪽으로 사라졌다. 테이블에 앉은 사내가 박수를 치며 춘심 처녀를 향해 말을 이었다.
“접대원 동무! 이리 좀 앉아보시라요. 누가 잡아먹습네까?”
사내가 다시 손을 뻗었다.
“서 있는 게 더 편합니다. 그냥 말씀하십시오.”
마침내 주방 쪽에서 삼십대의 관리인 여자가 나왔다. 우리는 그녀를 ‘사장님’이라고 불렀는데 그녀는 단체손님 맞을 준비로 평소답지 않게 조리복을 입고 있었다. 여사장은 웃는 낯으로 테이블로 다가와 춘심 처녀를 주방으로 보냈다.
“이제 그만 일어나시디요. 술이 과했습니다.”
“어? 당신은 누구요? 정치보위부에서 나왔습네까? 김신조 알아요? 실미도는요? 아, 속상해요.”
“자, 이제 그만 하시라요. 곧 손님들이 올 시간입네다. 얘 명화야, 여기 손님들 계산 좀 해다오.”
“어라? 여기 식당 아닙니까?”
때마침 박사장과 삼촌이 그림을 들고 식당으로 들어왔다. 모두가 그쪽으로 시선을 옮기자 사내들도 입을 다물고 물러날 낌새를 보였다. 내가 밖으로 나가 그림액자를 들고 왔을 때 사내가 카운터 앞에 기대어 서서 계산을 하고 있었다. 노래를 부르던 사내였다. 말 많은 사내는 화장실에라도 간 모양이었다. 명화 처녀가 잔돈으로 1달러짜리 몇장을 내밀자 사내가 되돌려주며 말했다.
“팁이요.”
명화 처녀가 다시 지폐를 밀어냈다.
“우리는 그런 거 않음매다.”
“허허, 고마워서 그럽니다. 받아두세요.”
잠시 지폐를 두고 작은 실랑이가 벌어졌다. 명화 처녀가 난처한 얼굴로 옆에 선 여사장을 바라보았다. 여사장이 받으라고 눈짓을 해 보였다.
“고맙습네다. 안녕히 가십시오.”
명화 처녀가 깍듯이 인사했다. 화장실에 간 사내가 나오자 두 취객은 식당을 걸어 나갔다. 여사장이 출입문까지 따라 나서며 배웅했다.
“내일 다시 오시라요. 내 시원한 해장국을 끓여드리겠습네다.”
주정이 심한 사내가 손사래를 쳤다.
“내일은 못 옵니다. 골프 치러 갑니다.”
사내의 끝인사는 부러 들으라고 하는 소리 같았다. 두 사내는 느릿느릿 사라졌다. 그제야 접대원 처녀들이 하나둘씩 홀로 나왔다. 우리가 있어서 그런지 접대원 처녀 누구도 방금 손님들을 두고 한마디 불평을 늘어놓지 않았다. 식당으로 옮겨놓은 그림은 모두 다섯점이었다. 식당 사람들은 모두 단체손님 맞을 준비로 주방으로 물러갔다.
그림 하나를 앞에 두고 삼촌이 나를 조용히 불렀다.
“좋은 그림을 발견했어요?”
나는 허리 굽혀 그림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폭포를 중간에서 뚝 잘라 그린 120호쯤 되는 조선화였다. 묵필의 농담만으로 표현했는데도 두 줄기 폭포수가 섬세하고 힘차서 금방이라도 식당 바닥에 물 듣는 소리가 들릴 것 같았다. 그러나 화폭에 담은 풍경이 평범해서 삼촌이 높이 살 만한 그림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포장지에서 제목을 더듬어 살펴보니 ‘두 줄기 울림폭포’였다.
“여기를 봐라.”
삼촌이 그림 왼쪽 하단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나직한 목소리가 확연하게 들떠 있었다. 나는 그림에서 ‘송우식’이라는 이름을 찾아냈다. 곧바로 드는 직감이 있어 나는 삼촌을 올려다보았다.
“그 사람이에요?”
삼촌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삼촌 눈에 설핏 눈물이 어리는 걸 보고 나도 모르게 가슴이 먹먹해졌다. 나는 조용히 삼촌의 손을 맞잡았다.
저녁식사 자리에는 박사장까지 합석했다. 두 사람은 냉면을 주문했고 나는 된장찌개를 주문했다.
“오늘 같은 날 냉면 맛을 봐야 되지 않니?”
삼촌이 조금은 상기된 얼굴로 물었다.
“평양냉면은 내 체질이 아니라니까요.”
“그래도 30년 경력의 공훈 냉면요리사가 만드는 냉면이야.”
“그럼 이따가 삼촌 것 나오면 한 젓가락만 맛볼게요.”
나는 평양소주를 주문했다. 삼촌과 나는 자연 축하주를 마시는 꼴이 되었다. 냉면이 나왔다. 평소처럼 맑은 육수에 편육과 양념장이 오르고 배와 오이와 잣이 곁들여 있었다. 두 사람은 역시 맛이 다르다고 감탄을 연발했다. 중간에 여사장이 가자미식해 한접시를 내왔다.
“이 귀한 게 어디서 났습니까?”
박사장이 물었다.
“교민 한분이 서울에 나갔다가 오면서 가자미 한 상자를 가져왔지 뭡네까. 식해를 담가줬더니 반은 당신이 가져가고 반은 남겨두고 가셨습니다. 오늘 단체손님이 두 팀이나 돼서리 접대가 영 시원찮습니다.”
“냉면을 이렇게 만나게 먹었으면 되었지 뭘 더 바라겠습니까.”
박사장이 빈 그릇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사장이 돌아가자 우리는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술잔을 나눴다. 가자미식해는 고기를 너무 굵게 썰어서 나는 잘 안 넘어갔는데 박사장과 삼촌에게는 좋은 안줏감이 된 듯했다.
여섯시가 넘으면서 단체손님이 들이닥쳤다. 울란바토르 시내에서 식당을 하는 교민들이었다. 가이드 일을 하자니 모두 안면이 있는 사람들이라 나는 뭘 훔쳐먹다가 들킨 사람처럼 당황스러웠다. 눈길이 닿는 대로 인사를 나누었는데 웬만한 교민식당 주인들이 다 모인 듯했다. 그들은 여사장과 인사를 나눈 뒤 목란에서 유일한 룸으로 들어갔다. 그러자니 나도 그 공훈 냉면요리사가 만든 냉면을 한그릇 맛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연이어 홀 쪽에 예약한 손님들도 들이닥쳤다. 목란 직원들이 모두 줄지어 서서 손님들을 맞이했다. 남녀노소 이십여명쯤 되는 단체손님은 무슨 선교회에서 온 여행객들 같았다. 머리가 희끗한 초로의 노인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게 그 노인이 목회자인 듯했다. 외투를 벗자 모두들 노란 조끼로 맞춰 입은 모습이 드러났다. 등에 흰 글자로 ‘구국을 위한 고난의 십자가’라고 씌어 있었다. 그들은 조용히 식당을 둘러보고 엽차를 나르는 접대원 처녀들을 관찰했다. 표정들이 워낙 비장해서 식사하러 온 사람들 같지 않았다.
머잖아 냉면이 배달되고 여주인이 손님들 앞에 섰다.
“여러분들을 환영합니다. 이렇게 어려운 시국에 우리 목란을 특별히 찾아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우리는 그저 흔들림 없이 최상의 맛과 써비스로 조국의 요리를 선사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맛있게 드시라요.”
좌중에서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그중 크게 헛기침을 놓고 목사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쉰 듯 가라앉아 있었다.
“환영해줘서 고맙소. 당신이 주인이오?”
“네, 그렇습니다.”
“마침 주인이 나왔으니 내 한가지 물으리다.”
그는 물잔을 들어 입을 축인 후 좌중을 죽 훑어보았다.
“식사를 하기 전에 한가지 확인해둘 게 있소. 불쾌히 여기지 마오. 우리가 지불한 돈이 북으로 갑니까?”
“네?”
여사장이 고개를 내밀며 물었다. 나도 혹시 잘못 들었나 싶어 삼촌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삼촌의 눈이 동그래져 있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음식을 먹고 내는 달러가 당신네 장군님한테 가냐 이겁니다.”
잠시 여사장이 당황해서 입을 다물지 못하고 서 있었다.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접대원 처녀들도 하던 일을 멈추고 초조한 눈길로 여사장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여사장이 침을 넘기며 말했다.
“그런 일 없습니다. 우리래 아직 수익이 발생하지 않아 이 식당에 투자하고 있습니다. 한푼도 평양에 가지 않습니다.”
목사의 얼굴에 실망한 기색이 언뜻 스쳤다. 나는 순간적으로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헷갈렸다.
“솔직한 얘기인지 모르겠소만 하여튼 답변 고맙소.”
하고 말해놓고 목사는 좌중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자, 성도 여러분도 들으셨지요? 우리가 먹는 음식은 핵무기를 만드는 데 사용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우리는 조국과 민족이 처한 난국을 위해 이렇게 먼 길을 달려왔습니다. 니느웨 백성이 베옷을 입고 금식을 하자 하나님은 사십일 뒤에 내리실 재앙을 거두셨습니다. 우리는 내일부터 구국을 위한 고난의 금식기도회를 시작합니다. 자, 들었다시피 정갈한 음식입니다. 오늘은 조국의 안보를 생각하면서 만찬을 즐깁시다.”
목사가 말을 마치자 좌중이 기도 준비를 하느라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나는 고개를 빼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왠지 진지한 코미디를 보는 느낌이었다. 초원의 며칠간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세상이 왠지 신들린 듯 전혀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국가의 흥망성쇠를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시여! 이 죄 많은 민족에게 오늘도 어김없이 일용할 양식을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저 북녘 감옥에는 이천삼백만이라는 기아에 허덕이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있습니다. 그들을 구원하소서……”
기도가 끝날 무렵 룸에 든 교민 한사람이 술 한잔 받으라며 나를 청했다. 방에는 여사장도 와 앉아 있었다. 나는 평양소주 두잔을 연거푸 받아 비웠다. 이야기를 듣자니 교민사회에서 북한식당 이용을 금하자는 의견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것을 막기 위해서 식당주인들이 모였다고 했다. 여사장이 고마움을 표했다. 나를 방으로 불러들인 교민 사장이 입을 열었다.
“어쨌든 우리가 이만큼 가까워진 것도 쉽지 않았어요. 지금 당장 마음들이 불편하다고 해서 옛날로 돌아갈 수는 없지 않습니까? 식당은 정치적으로 휘둘려선 안됩니다. 식당은 식당입니다. 그저 우리는 열심히 우리의 음식을 만들어서 손님들에게 팔면 됩니다. 자, 우리 몇사람이라도 한인음식업계의 발전을 위해서 건배합시다.”
나도 엉겁결에 잔을 들었다.
밖이 소란해서 나와봤더니 어느새 불광동 양씨가 나타나 접대원 처녀들에게 삿대질을 하며 소리치고 있었다.
“흥, 내가 모를 줄 알아. 냉면요리사는 안 왔어!”
교인들은 기도를 하다 말고 고개를 들었는지 모두 두 손을 모으고 있었다. 박사장과 삼촌은 어리둥절해서 서로 얼굴을 바라보았다. 여사장이 놀라서 뛰어나왔다. 우리는 여사장이 무슨 변명을 해주리라 싶어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마중을 나갔드랬는데 국제열차에서 내리지 않았습네다. 무슨 사정인지 전통도 없습네다. 우리 바깥양반이 알아보려고 대사관으로 갔습네다. 솔직히 말씀 못 드려 정말 죄송합니다.”
그때 의자를 밀어내는 소리를 내며 목사가 일어났다.
“오, 주여! 이게 저들의 방식입니다.”
교인들이 일제히 일어났다. 방에서도 교민 몇사람이 신발을 끌고 나왔다. 보다 못한 삼촌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외람되지만 여러분이 드신 냉면은 평양 옥류관 냉면과 하등 차이가 없습니다. 제가 거기에서 먹어봐서 보장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오늘 정말 최고의 냉면을 맛보신 겁니다. 아무튼……”
그래놓고 삼촌은 더 말을 잇지 못했다. 박사장이 거들었다.
“그래요. 저 사람이 말하기 전까지 우리는 맛있게 먹지 않았습니까?”
그러자 목사가 외쳤다.
“사실을 호도하는 자나 거짓을 두둔하는 자나 다 민족 앞에 죄인입니다. 오늘날 이런 사태가 벌어진 것은 바로 저런 사악한 사탄의 마음 때문입니다.”
“허허, 여긴 그저 밥 먹는 식당입니다.”
삼촌이 두 손을 들어 다독이는 몸짓을 했다.
“식당이니까 내 하는 말이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늘 불경한 음식을 먹고 말았습니다. 모두 나갑시다.”
교인들이 목사를 따라 우르르 몰려나갔다.
박사장이 몰려나가는 교인들을 향해 한발짝 나서며 소리쳤다.
“여보시오! 그것도 말이라고 나불댑니까? 냉면 하나 가지고 우리가 왜 사탄이 돼야 한단 말이오?”
그러나 그들은 기척도 없이 문 밖으로 사라졌다.
여사장이 울상이 되어 허리를 굽실거렸다.
“정말 죄송합네다. 우리는 그저 흔들림 없이 최상의 맛과 써비스로 조국의 요리를 선사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아, 그 앵무새 같은 소리 좀 그만둬요!”
박사장이 의자 등받이에서 외투를 낚아채서 식당을 빠져나갔다. 삼촌과 나도 주섬주섬 옷을 챙기고 달러를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똑바로들 해야지. 여기 냉면 가져와!”
양씨가 자리를 꿰차고 앉으며 소리쳤다.
박사장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삼촌과 나는 바람 찬 마당에서 쫓겨난 사람처럼 엉거주춤 서 있었다.
“아이고, 시국이 어수선하니 냉면 한그릇 먹기도 고되네.”
삼촌이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글쎄 말이에요. 목란은 그냥 식당인데……”
나는 바람에 펄럭이는 현수막을 올려다보았다. 공훈 냉면요리사가 오지 않아서 이 모든 분란이 일어난 것처럼 불현듯 나는 그가 원망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