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특집 │ 2000년대 한국문학이 읽은 시대적 징후 2

 

통일시대를 위하여

2000년대 소설을 중심으로

 

 

유희석 柳熙錫

문학평론가, 전남대 교수. 주요 평론으로 「보들레르와 근대」 「최근 리얼리즘·모더니즘 논쟁에 관하여」 「시와 시대, 그리고 인간—『만인보』론」 등이 있음. jatw19@chonnam.ac.kr

 

 

글을 시작하며

 

‘통일시대’라는 말에 때로 작은따옴표가 필요한 것은 2006년의 한반도에도 분단시대가 엄존하기 때문이다. 이 글의 제목에서 따옴표를 걷어낸 것 자체는 분단을 온전히 극복한 미래에 대한 필자 나름의 확신과 희망을 표명한 셈이다. 그런 통일시대에 관한 한, 통일과 분단의 헛갈리는 상태가 하루아침에 명쾌하게 정리되기 힘들리라는—어떤 면에서는 그리 되어서도 안된다는—생각은 양식있는 시민들 사이에서 폭넓게 자리잡은 듯하다. 명쾌하지 못한 것은 문학분야도 다르지 않다. 2000년 6·15정상회담 이후 그야말로 요동치는 안팎의 파란 속에서도 남북·북남 문인들은 꾸준히 거리를 좁혀왔다.1 하지만 어렵사리 좁혀진 거리조차도 정세의 ‘변덕’에 좌우되는 형국이어서 우리 당대 윗녘주민들과의 만남을 본격적으로 다룬 작품은 요원한 것 같다. 지금까지는 보통사람들의 일상적 교류가 극도로 제약된 형편이니, 그런 작품이 나오지 않은 것도 당연하다. 일반시민의 쌍방향 접촉이 더 넓고 깊어지면 어떤 방식으로든 그 실감을 작품화하는 작가들이 등장하겠지만, 8·15해방 이후 심화되기 시작한 한반도 주민의 이질적인 근대경험을 무리없이 해체하는 동시에 포용하는 ‘고전’을 만나려면 우리는 아직도 더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할지 모른다.

그러나 만약 그런 작품이 씌어지기만 한다면, 그건 단순히 문학적 사건만은 아닐 것이다. 문학은 삶의 거울이기도 할진대, 남북한 주민들의 마음속에까지 상이한 형상으로 똬리를 튼 상극의 근대사가 되돌릴 수 없이 종식되고 있음을 강력히 시사하는 청신호가 작품으로 켜졌다고 할 수 있으니 말이다. 따라서 요즘 항간을 떠도는 ‘근대문학의 종언’이라는 언설에도 진지하게 대응해야 옳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남북 근대체험의 파괴적 이질성을 극복하는 문학의 꿈도 지금부터 시작이라는 사실이다. 한국동란은 문자 그대로 교과서에서 배운 역사요, 5·18 광주항쟁조차 유년시절에 풍문으로 접한 분단 2세대 작가들부터가 통일의 통념에서 벗어나 통일시대의 도래를 다양한 방식으로 예감하고 있다면 더욱이나 그렇다. 이산의 신고(辛苦)가 골수에 박힌 분단 1세대 작가들의 텍스트가 적잖이 축적된 상황에서 1.5 내지 2세대가 선배들의 작업을 이어받으며 앞시대와는 판이하게 달라진 2000년대 현실에 나름대로 진지하게 대응하고 있는 것이 오늘 우리 문단의 실상이기도 한 것이다.2

 

 

통일시대와 비평담론

 

민족이나 계급을 중심으로 사고하는 관성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분단 2세대의 작품들이 분단 1세대, 1.5세대의 것들과 더불어 통일시대를 징후적으로 드러낸다면, 그것은 어떤 양상인가. 이 물음에도 통일시대가 뭇사람들의 오고감으로 다져지는 과정으로서의 시간대라는 전제가 포함된다. 인간의 희망으로만 모든 것이 실현되지는 않는 현실에서는 파국으로서의 ‘비약’이라는 최악의 가능성도 물론 배제하기 어렵다. 그러나 일단 과정으로서의 통일을 상정한다면 그것은 (1세대의) 해원(解寃)과 (2세대의) 상생이 겹치는 시간대일 수밖에 없다. 해원과 상생은 ‘타자’로 규정된 모든 대상들에 대한 인식과 공감의 지평을 넓히는 노력을 요구하거니와, 요즘 평단에서 회자되는 월경(越境)의 상상력도 그런 지평의 확대인 셈이다.

그에 비하면 통일시대의 징후들을 예표(豫表)적으로 포착하는 비평은 전체적으로 창작자들의 활력에 충분히 부응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비평가들의 노력이 없었다는 말은 물론 아니다. 2005년에 열린 ‘6·15공동선언실천을 위한 민족작가대회’(남북작가대회) 자체가 ‘통일문학’을 향한 뜻깊은 전진이다. 이를 결산한 『실천문학』 2005년 가을호 특집 ‘다가오는 통일시대와 북한문학’도 남북 문인들의 상호이해에 반드시 필요한 정지작업에 해당한다. 또한 “소재주의적 관점을 넘어서 한국문학의 심층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6·15의 관점에서 되새겨보”면서 몇몇 비평가들의 입론을 비판한 한기욱이나, “‘통일’ 주제 소설쓰기는 통일보다 더 오래 지속”되리라는 믿음으로 ‘통일과정의 소설적 표현’을 점검한 황광수는 6·15시대를 맞는 2000년대 남측 작가들의 새로운 의식을 살핀 바 있다.3 거기서 방위(方位)를 좀더 확실하게 잡아 통일시대의 문학적 징후들을 모아들이면서 새로운 문학운동을 예감하려는 본고의 시도가 이런 선행작업들에 빚진 것임은 말할 나위 없다.

오늘의 남북현실을 분단시대가 서서히 잠식되어가는 ‘통일시대’로 규정한다면, 그 근거가 되는 문학적 징후들은 다른 어디서보다 2000년 6월 이후 부쩍 늘어난 직간접적인 방북체험, 2006년 7월 기준으로 8,700여명을 헤아리는 일명 새터민인 탈북자나 남파간첩, 비전향 장기수 등의 문제를 다룬 분단 1세대, 1.5세대의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의 작품에 투영된 분단의 아픔과 통일을 향한 염원도 20세기의 마지막 30년간 무수한 가락으로 변주되어왔지만, 6·15 이후의 국면에서는 분명한 차별성을 띤다. 문제는 통일시대라는 제목으로 그러모은 작품들을 비평 본연의 자세로 얼마나 세심하고 공정하게 읽어낼 수 있는가이다. 그렇다면 “문학이 그 본연의 모습으로 꽃피는 것 자체”를4 이런저런 단서를 붙이지 않고 더 강조해야 하겠다. 또한 그런 꽃핌을 우리가 희구한다면, 통일시대라는 ‘간판’도 보는 이가 수긍할 수 있게 바르게 거는 노력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사회과학계에는 일체의 통일담론을 최소강령적 통일과 최대강령적 통일로 나누고 이를 한사코 평화담론과 배치되는 것으로 파악하는 논자들이 상당수 있다. “차이를 인정하고 공존하는 것을 통하여 평화를 실현하는 평화공존론적 접근”을 옹호한다면서도 모든 통일담론을 한반도 평화에 해로운 것으로 단정하기 일쑤인데,5 그런 완고함이 비평담론에도 존재하는 건 아닌지 생각해볼 일이다. 가령 ‘흔들리는 분단체제〓흔들리는 민족문학’이라는 등식을 이리저리 굴린 신승엽은 “백낙청이 주장하는 대로 분단체제 역시 흔들리고 있다면, ‘분단체제극복에 기여하는 문학론’ 역시 그 생명이 한시적일 수밖에 없을 터, ‘흔들리는 민족문학’을 넘어서는 새로운 문학이념의 모색에 다시 나설 때가 오리라 믿는다”는 말로 결론을 맺었다.6 그간 민족문학담론의 부진과 문제점을 꼼꼼히 적시하고 대안적 문학이념을 찾아나서는 열정에는 필자도 공감하는 바가 크다. 그러나 “‘흔들리는 민족문학’을 넘어서는 새로운 문학이념”을 대국적인 자세로 오늘 한반도 ‘통일시대’에서 모색하려는 노력은 너무 미약하지 않은가 한다.

다른 한편, 6·15통일시대에 창의적인 문학운동을 구상하는 쪽에서도 정세인식은 물론, 그것과 문학역량을 결집하려는 노력도 한층 조심스럽고 정교해야 한다고 본다. 6·15공동선언이 설령 “최대의 금기가 돌연 최고의 성취로 둔갑하는 사건”(한기욱, 앞의 글 211면)이라 하더라도, 이를 IMF사태와 비교우위의 차원에서 연관짓는 듯한 인상을 주는 논법은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칫하면 과거 민족해방(NL)과 민중민주(PD)의 반목을 2006년이라는 새로운 국면에서 낡은 방식으로 재연할 위험을 떠나서도, IMF위기를 맞아 통일운동의 새로운 계기를 찾아나선 분단체제론의 문제의식을 (본의 아니게) 흐릴 수 있기 때문이다.7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지구상에서 사라지지 않는 한, 그 특수한 하위체제로 규정된 한반도에도 그 경제논리가 관철되는 것은 불가피하다. 1997년 남한의 IMF 경제위기도 예외적 현상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경제적 역학상 남쪽의 위기도 북쪽과 어떤 식으로든 연동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특수한 사정이요 어려움이기도 하다. 성급히 체결되면 IMF위기의 폭발력의 몇배, 몇십배에 이르리라고 관측되는 작금의 한미FTA 국면도 마찬가지다. 남측 경제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칠 한미FTA의 향배가 남북공조와도 맞물려 들어가리라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미국 주도의 세계질서에 포박된 한반도 분단경제의 난관을 타개해가는 작업과 통일시대를 온전히 영접하는 일이 선후나 경중의 문제가 아님을 잊어서는 안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비평담론의 관건도 남북의 역량을 결집하는 통일시대의 다양한 문학적 징후들과 참다운 실험의식을 창의적으로 읽어내고 북돋는 데 있으며, 그러자면 6·15통일시대 담론이 우리 시민사회에서 아직 충분히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음도 솔직담대하게 인정하는 자세가 요구된다.

 

 

한반도에서의 해원과 상생

 

논의의 화두를 ‘통일시대’로 잡는다면, ‘해원과 상생’을 응당 소제목으로 내걸 법하다. 이 주제는 박경리, 이호철, 최인훈, 김원일, 황석영을 비롯한 1세대 분단문학의 단골 메뉴인데, 앞서 언급한 대로 그 양상은 6·15공동선언 이후 사뭇 달라지는 것으로 판단된다. 가령 윤흥길(1942년생)의 연작소설집 『소라단 가는 길』(창비 2003)만 해도 한국동란에 휩쓸린 인간들의 희비를 구성진 해학으로 걸러내면서 그 악몽의 기억들은 ‘역사의 박물관’으로 보내는 의식(儀式)으로서의 ‘작은 이야기들’이다. 아쉬움이 없지 않지만, 남파공작원의 남한사회 정착과정을 현실사회주의 붕괴를 배경으로 묘사한 조정래(1943년생)의 『인간 연습』(실천문학사 2006)도 21세기 남북관계의 새로운 화해무드에 호응한다. 남과 북 모두에서 사실상 버림받은 비전향수의 애환을 다룬 김하기(1958년생)의 「미귀」(『복사꽃 그 자리』, 문학동네 2002)나 석사논문의 주제로 비전향장기수인 작은할아버지의 생애를 선택한 한 젊은이의 이야기를 통해 한국근대사의 명암을 드러낸 김원일(1942년생)의 중편 「손풍금」(『물방울 하나 떨어지면』, 문이당 2004)은 6·15공동선언의 ‘효과’를 직접적으로 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압록강을 건너 북녘땅으로 들어가 지하교회를 개척하는 남한 출신 목사의 사연을 다룬, 김원일의 또다른 작품 「카타콤」(『문학과사회』 2006년 여름호)도 그러하다. 북한 청춘남녀의 ‘비극적인 사랑’을 밀도높게 형상화한 정도상(1960년생)의 「함흥·2001·안개」(『문학수첩』 2006년 여름호)는 ‘고난의 행군’(1994~97) 이후 작금의 북녘땅을 무대로 북녘인민을 등장시킨 (6·25 이후) 최초의 남한소설로 짐작된다. 특히 「소소, 눈사람이 되다」(『창작과비평』 2006년 봄호)의 전사(前史)에 해당하는 이 작품이 앞으로 어떤 연작형태로 진행될지 자못 궁금하다. 전성태(1969년생)의 단편 「강을 건너는 사람들」(『문학수첩』 2005년 가을호)도 ‘강’ 너머 중국으로 탈출하는 북한인민들의 절박한 실상을 포착한 바 있다.

반도 최남단의 섬 영도(影島)를 배경으로 “천길 우물 속의 어둠, 캄캄한 망각의 흙무덤을 들추고 한사코 기어나오는 저 끔찍한 지옥의” 4·3사건을 기억해내는 임철우(1954년생)의 『백년여관』(한겨레신문사 2004)을 포함한 이런 ‘기록들’이야말로 한반도에서 분단시대가 침식되고 있음을 말해주는 확실한 근거다. 21세기는 해원과 상생의 시대로 접어들어야 한다는 간곡한 창작의지가 거기에 각인되어 있는 것이다. 반면에 이 작품들은 한반도의 윗녘과 아랫녘에서 제각기 형성된 삶의 가치관들이 나름의 현실에 기반한 것임을 정당하게 작품화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일깨워주기도 한다. 이 이야기들을 북녘의 독자라면 과연 어떤 심정으로 받아들일 것이며, 우리는 어떻게 평가해야 할 것인가. 아직껏 성취가 중단편에 집중된 아쉬움이 있지만 필자로서는 이 작품들이 좀더 많은 독자와 만나기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일종의 표본성을 띠는 장편들을 논하는 것도 그런 뜻에서다.

우리 학계에는 독일재통일(1990.10.13)을 한반도 분단극복의 모델로 내세우는 논자들이 적지 않다. 먼저 재독(在獨)작가 강유일(1953년생)의 『피아노 소나타 1987』(민음사 2005)을 보자. 1987년 11월에 일어난 이른바 KAL기 납치폭파 사건을 다룬 이 작품이 바로 그 경우가 아닌가 싶기 때문이다. 현란한 비유적 문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면서 음악에서 해부학에 이르는 방대한 지식을 동원한 이 장편은 북한의 테러리스트 한세류와 남한의 피아니스트 안누항의 대립구도로 전개된다. 밑그림이 아주 분명한데, 유토피아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된 폭력을 예술로써 치유한다는 구상이다. 테러에 의한 이상세계 건설이 얼마나 허구적인가는 주로 한세류의 수사를 맡은 제승이라는 인물을 통해 드러나지만, 거의 모든 인물이 그것이 허구임을 직간접적으로 증언한다.

하지만 한세류의 테러를 유토피아 열망으로 등치한 것부터가 다분히 상투적인데, “동서독의 분단놀이는 끝났다”며 작품을 마무리하는 작가는 사실상 동독의 붕괴라는—그 나름으로 특수했던—역사적 현실을 남북관계에 고스란히 대입한다. 남한에 의한 흡수통일이라는 발상에 소설로 살을 입힌 형국이다. 북한 파국의 징조를 KAL기 테러를 통해 상상하는 경우라 하더라도, 그 상상이 ‘느껴지는 현실’이 되기 위해서는 가능한 모든 현실적 변수들에 대한 냉철한 사유가 필수적이다. 그같은 변수들이 제대로 고려되지 않는 유비구도에서 인물들이 개별적으로 살아 있기를 바라기는 어렵다. 한세류와 안누항을 비롯해 제승과 파스칼 등 주요인물들은 살아 있는 개성이라기보다 막후에 존재하는 작가의 확고한 관점을 이렇게 저렇게 대변하는 꼭두각시에 가깝다는 말이다. 이미 지적되었듯이(황광수, 앞의 글 239면) 이 문제는 작가 개인의 상상력을 고양하는 수사와 문체만으로는 해소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이 작품을 분단체제의 무반성적 내면화가 낳은 산물로 치부한다면 너무 혹독한 비판일 것이다. 다만 그런 체제가 남북한 사람들의 내면에 키워놓은 ‘괴물’을 포획하는 데는 그보다 훨씬 유연하면서도 정치한 상상력이 필요하다는 점만은 짚어두어야 하겠다.

강영숙(1966년생)의 『리나』(랜덤하우스코리아 2006)는 그런 의미에서도 여러모로 시사적이다. 탈북자로 짐작되는 리나(낫娜)라는 16세 소녀가 8년간 떠나온 여정은 지도로 정확히 그리는 것이 불가능하다. 살인, 강간, 수용소, 노동착취, 매춘, 마약, 인신매매 등이 서사의 마디를 형성한다고 해야 할 이 장편에는 거의 모든 시공간적 지명이 지워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게 지워지는 과정에 흥미롭게도 즉물적인 생동감이 담기기도 한다. 예컨대 ‘미친 나라’로 언급되는 리나의 ‘고국’과 “거품 위에 둥둥 떠 있는 나라”로 지목되는 (그녀의 지향점인 듯한) P국도 암시만 될 뿐이지만, 그 암시성으로 인해 적어도 한반도의 독자라면 리나의 여정에 때로는 구체적인 맥락을 부여하면서 읽어나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서사는, 해설자가 한껏 의미를 부풀려 평가해주었듯이, ‘포스트모던’하다. 동북아의 국경들을 무시로 넘어 이리저리 팔리고 떠돌다가 묵시록적 자유경제도시에서 여타 (외국인)노동자들과 짐승처럼 부대끼는 그녀의 일대기는 국경은 물론 성과 계급, 민족의 경계가 분명치 않은 오늘날 지구 남반부의 실태에 대한 ‘보고서’라 할 만하다. 이산(離散)소설의 한 전형이랄 수도 있을 이 장편은 지구화시대에 ‘경계’가 갖는 의미를 근본적으로 심문함으로써 ‘통일문학’, 나아가 통일시대라는 것 자체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망외의 소득도 거두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고 『리나』가 형식상으로 완전히 새롭다는 것은 아니다. 알다시피 서구문학에는 삐까로(picaro, 악당/방랑자)를 내세워 에피쏘드를 펼치면서 당대의 사회정치적 풍물을 세심하게 그려내는 전통이 존재한다. 강영숙의 서사도 그 범주에 넣고 생각해볼 수 있겠는데, 다른 한편 서사적 충동이 요즘 한국의 지식계에서 유행하는 ‘노마드’(탈주자)의 것임은 숙고해야 할 논점이다. 21세기에 가족의 해체야 새삼스러운 현상이 아니고, 삐와 리나의 관계가 예증하듯 무국적자들의 유대 가능성이 『리나』에 없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작품 전반에서 감지되는 느낌은, 그러한 유대를 향한 리나의 지난한 몸부림 못지않게 (어쩌면 그 이상으로) “모든 고정된 것이 연기처럼 사라”지는 근대 특유의 정서에 ‘서사의 몸’도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다.

‘탈주자들’의 국경을 초월한 유대를 시야에서 놓치지 않으면서 근대 특유의 유동성에도 적응해야 하는 우리로서는 작품의 그 양면 중에서 어느 하나에만 주목할 수는 없겠다. 다만 제3국인 ‘P국’이 단순히 표상된 관념 이상의 것임이 독자에게 실감되려면 탈주의 ‘무중력’에 탐닉하는 경향도 적절하게 제어되어야 한다는 점은 강조함직하다. 따라서 아직 단언하기는 어렵고 그런 탐닉에서조차 고전적인 발화(發話)가 나오지 말란 법도 없지만, 『리나』의 포스트모던적 의의를 사주는 경우라면 단서도 달아야 할 듯하다. 즉 국경과 민족 들 자체도 해체되고 다시 만들어진다는 역사적 인식을 깔고 정주와 탈주의 긴장으로 형성되는 지구적 현실을 치밀하게 탐사하는 단계는 아직 미답(未踏)으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한국동란 이후 한반도에 ‘하나의’ 분단체제가 성립되는 과정에서 희생된 수많은 생령들의 해원과 희망에 관한 한, 탈주와 정주의 상상력보다는 ‘있었던 사실 자체’의 지성스런 되살림이 더 앞서야 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와서 ‘다시, 문제는 리얼리즘이다’로 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다. 박정희 유신체제의 야수성에 대한 고발을 넘어서 민주주의와 평화통일을 열망한 각성한 개인들의 짓밟힌 꿈을 추적한 김원일의 연작소설 『푸른 혼』(이룸 2005) 같은 작품도 좋지만, 앞으로는 엄정한 사실인식을 활달한 상상력과 결합한 이야기들이 더 많이 나오기를 바랄 뿐이다. 어쨌든 소설 아닌 소설인 이 ‘인물평전’은 오늘날 참여정부에 이르는 남한의 험난한 민주화여정에 대한 지극한 헌사인 동시에 허리 잘린 한반도 남쪽의 ‘과거청산작업’에 비견할 만하다. 그렇다면 북한작가에 의한 북녘땅의 문학적 과거청산을 앞으로 기대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바람은 바람대로 남겨두고 우리네 창작계로 눈을 돌리면, 『푸른 혼』과 대칭적인 작품으로 정철훈(1959년생)의 『인간의 악보』(민음사 2006)가 떠오른다. 2005년 남북작가대회 남측 대표단의 일원으로 처음 북녘땅을 밟은 소회가 촉발시킨 이야기이다. 해방 이후 북쪽을 선택했으나 ‘금싸라기’ 신분으로 ‘조국’을 등지고 카자흐공화국 알마티로 흘러들어간 한 무국적자의 생애가 우리 앞에 펼쳐진다. 지금까지 진지한 ‘분단문학’에서 취급하기 꺼려한 주제인데, 그것은 김일성 유일체제에 대한 정면비판과 함께 간다. 한추민이라는 자의적·타의적 이산자를 통한 고발의 많은 부분은 전후 유일체제의 성립배경과 그 실상을 폭로하는 데 바쳐진다. 그렇다고 작가가 분단체제의 얽히고설킨 모순들에서 북한민중의 인권과 민주화 문제만 따로 떼어내 부각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한추민의 조카인 ‘나’의 “손목시계가 스르르 풀리면서 작은 수포를 만들며 검은 심연 속으로 가라앉”(296면)는 것으로 처리된 마지막 장면도 그렇지만, 고향을 상실한 한추민의 절절한 심경은 ‘반북의식’ 못지않게 해원의 염원을 곳곳에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염원을 작품 차원에서 되새김질한다면 5, 60년대 두개의 반쪽 국가·민족 가운데 어느 쪽이 더 민주적이었는가를 따지는 일도 부질없지 않을까. 150여 민족이 공생하는 카자흐공화국을 옹호하는 (한추민의 딸) 올가가 말해주듯이 작가의 지향점은 순수 단일민족국가와도 거리가 멀다. 그럼에도 작가 자신의 비극적 가족사가 얽혀들어간 인물들을 그릴 때의 절절함이 1950년대 당시 한반도 정세에 대해 얼마나 입체적인 분석을 낳았는가는 의문이다. 앞서 작가의 해원의지를 강조했는데, 전체적으로 본다면 1950년대 (소련과) 북한의 경직된 체제에 대한 작품의 비판은 한추민 개인의 비극을 통해 단순화된다는 것이 정확한 판단이지 싶다. 통일시대로 일컬어지는 바로 오늘의 한반도, 그중에서도 북한의 반인권적 상황을 겨냥하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라는 말이다. 중요한 것은 역시 한반도 현실을 다각적으로 그려내는 일 자체를 어느덧 분단체제의 관성에 따라 살고 있는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것과 일치시키는 창작이다. 북의 문제를 지적했으니 남의 어두운 과거도 꼬집었어야 한다는 투정을 부리고자 함은 아니다. 한추민이라는, 문자 그대로 존재증명이 불가능한 존재를 통해 1950년대 북한의 어떤 총체적 진실을 증언하려는 시도가 북에 대한 관념상(觀念象)에서 충분히 탈피하지 못했다면, 그것도 문학을 그 본연의 모습으로 꽃피우는 경지는 아닐 것이다.

적어도 그런 관념상에 관한 한, 윤후명(1946년생)의 『삼국유사 읽는 호텔』(랜덤하우스중앙 2005)은 더 담백하고 어떤 면에서 더 정직하다. 남녘생활의 관성에 물든 사람의 시선으로 북녘현실을 다룰 때 생기는 곤경을 드러낸다는 점에서도 더 징후적이다. 북한 방문중 평양 양각도 호텔에 투숙하면서 북녘땅을 둘러본 나흘간을 날짜별로 마치 일기를 적듯이 기록한 이 이야기는 M이라는 여성과 함께 한 여정의 기억도 편지 형식으로 애틋하게 되살리지만, 내용의 대부분은 제목 그대로 『삼국유사』를 읽는 것으로 채워져 있다.

『삼국유사』의 독자인 ‘나’는 이를테면 ‘반북’과 ‘친북’의 어떤 회색지대에 놓인 인물이다. 전자로 기울기에는 동포적 애증이 너무 복잡하게 얽혀 있고, 그렇다고 후자, 즉 친북의 입장에 서기에도 남한체제의 우월성을 은연중 확신하는 인물이다. 그러면서도 남한에 대해 “이른바 민주화는 어느정도 이룩되었다고는 하지만, 나라 돌아가는 꼴은 뒤죽박죽”(206면)이라고 개탄하기도 한다. 그런데 좀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북한체제의 기사회생보다는 붕괴에 더 신빙성을 둔다고 해야 정확할 듯하다. 이를테면 “호텔 의자에 앉아 한 나라의 멸망에 대해 읽고 있자니 못된 짓을 하는 것만 같다”(217면)고 느끼는 독자다. 그러나 그때조차 그는 6·25의 참화를 상기하면서 바로 그런 ‘못된 짓’에 일말의 죄의식을 느끼는 시민이다. 게다가 양각도 호텔을 절해의 고도, 아니 ‘수용소’처럼 생각하는 그의 무의식 저편에는 억압된 개인사가 숨겨져 있다. “군용담요로 바지를 만들어 입고 탄약상자의 앉은뱅이책상에 엎드려 ‘우리는 대한민국의 아들딸, 죽음으로써 나라를 지키자’”(24면)라는 교과서의 한 대목을 읽던 ‘나’가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그 ‘나’가 ‘죽이는 시간’이 『삼국유사』 읽기로 채워지는 것은 의아스런 일이 아니다. 게다가 자유로운 시내관광은 고사하고 정해진 공식 일정조차 체제선전으로 일관하는 여정이 아닌가. 북녘의 현실에 도저히 마음으로 가닿을 수 없는 96시간의 여행에서 화자는 『삼국유사』라는 ‘상상의 세계’에 빠져든다. 그렇다고 작가가 북의 현실에 눈감는다고 비판한다면(황광수, 앞의 글 230면) 너무 단순한 해석일 것이다. 그의 ‘『삼국유사』 읽기’는 화자의 표현 그대로 “막힌 통로 속에서의 몸짓, 그것”(68면)이라고 평가할 만하다. 그것은 작가가 “소년궁전에서 어린 소녀가 언제까지나 변함없는 미소를 지으며 똑같은 몸짓을 반복, 반복, 반복, 반복하는 모양을 보았을 때의 절망감을 어떻게 말해야 좋을까”(229면)를 묻고 고민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필자는 이 고민에 대해 우리에게도 화려한 백화점 엘리베이터걸의 미소짓는 반복, 반복, 반복은 있지 않은가 반문하고픈 심정이지만, 어쨌든 작가는 그런 물음에 대한 하나의 답을 『삼국유사』의 세계에서 ‘우연히’ 찾은 셈이다.

물론 작가는 『삼국유사』에 상당한 조예가 있으며, 그 우연도 오래 준비된 것이다. 그가 두서없이 들려주는 듯한 삼국 관련 유사(遺事)가 때로 주도면밀한 복선을 까는 것도 그 때문이다. 가령 첫날 구지가(龜旨歌)의 한 구절을 살짝 틀어서 화자가 잠자리에서 던지는 “정의여, 진실이여, 머리를 내미소서”라는 기원(祈願)만 해도 그렇다. 그것은 북녘땅에서 갈피를 못 잡고 헤매는 자신을 향한 것이지만, 다른 한편 허리 잘린 한반도 근대의 정의와 진실을 갈구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외세에 기대 삼국을 통합한 신라의 결코 간단치 않았던 통일과정을 반추하는 데서도 그런 갈구는 확인된다. 한반도를 중심으로 명멸했던 나라들의 존재를 통해, 그 나라들의 문화를 꽃피운 고승의 일화를 통해, 우리 산하의 꽃과 나무를 통해, 구지가 같은 옛노래를 통해 작가는 ‘역사교육’으로 돌아간다.

그 역사교육은 나름으로 해원을 지향하는 『피아노 소나타 1987』 및 『인간의 악보』의 결말과 일면 상통하면서도 사뭇 다른 여운을 남긴다. 『삼국유사』의 인용문들로 작품의 절반 이상을 채우다시피 한 『삼국유사 읽는 호텔』의 대미가 ‘어제의 노래’가 아닌 오늘의 ‘연가’ 한 수로 끝나는 것이다.8 그러나 연가의 울림에 뜨거운 마음으로 귀기울이는 순간에도 그것이 「둔황의 사랑」(『둔황의 사랑』, 문학과지성사 1983) 이후 작가가 줄곧 견지해온 어떤 도식의 답습에서 나온다는 사실은 적시하지 않을 수 없다. 관념의 광휘로 둘러싸인 ‘고고학적 과거’ 대 ‘비루한 현재’의 대립이 반복되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북녘의 현실과 마주한 화자가 불러내는 만파식적(萬波息笛)의 꿈이나 원효의 “다툼없는 어우러짐〔和諍〕”의 이상도 완전히 새로운 것이 아님을 꼬집을 필요가 있을지 모른다. 개개의 창작자 쪽에서도 뭔가 허물벗는 혁신을 작품으로 감행하지 않는 한 남녘의 마음과 북녘의 마음을 넉넉하게 트는 것도 힘들리라는 것이다.

여하한 섣부른 모험주의나 이상주의를 허용치 않는 것이 오늘날 한반도의 엄연한 현실이다. 이런 때 창작의 성취가 기도로서의 꿈과 이상으로 드러날 수 있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일 것이다. 물론 삶에 꿈과 이상만 있는 것이 아님은 두말할 것 없다. 아니 ‘통일시대’의 실상인즉 더할 수 없이 아찔하고도 지리멸렬한바, 그 진실을 숨김없이 증언하는 작업도 창작계가 반드시 수행해야 할 과제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영하(1968년생)의 『빛의 제국』(문학동네 2006)은 지나칠 수 없겠다.

2005년 어느날 불시에 24시간 내 귀환명령을 받은 남파간첩 김기영을 꼭짓점으로 아내와 딸의 하루를 시간대별로 묘파한 『빛의 제국』은 작가의 이야기꾼으로서의 솜씨가 한껏 발휘된 ‘수공품’이다. “제아무리 대단한 상상력도 누군가의 피로 씌어진 단 한줄의 일차자료에서 출발한다”(「작가의 말」 『검은 꽃』, 문학동네 2003)며, ‘묵서가’(墨西哥, 멕시코)로 흘러들어간 ‘애니깽들’의 사연을 상상한 전작보다 어떤 면에서는 더 잘 빠졌다. 형식에서 새롭달 것은 없는 반면, 『피아노 소나타 1987』과 『인간의 악보』가 상이한 태도로 드러낸 경직된 정세인식도 보이지 않는다. 어두운 가족사를 뒤로하고 남으로 내려와 남한 현실에 21년간 완전히 적응하여 영화수입업자가 된 김기영과 그와 같은 대학에서 한때 주체사상을 학습한 과거가 있지만 지금은 잘나가는 외제차 딜러로 변신한 장마리, 중학생 딸 현미로 구성된 3인 가족은 서울 중산층의 한 전형이라 할 만하다. 한가족이지만 전혀 다른 생활궤도에 놓인 각 인물들의 동선은 일정한 극적 개연성도 확보하는바, 이들의 하루 행보는 독자의 시선을 단숨에 장악한다.

24시간 이내 귀환하라는 명령을 받은 김기영은 그 시간 안에 지금까지 42년의 생을 ‘총정리’해야 한다. 장마리는 대학생 애인이 끈질기게 요구해온 쓰리썸(threesome) 쎅스 제안을 수락하고 난생처음으로 난교(亂交)에 나선다. 이들의 딸 현미는 (나중에 알아차리게 되지만) 다중인격을 가진 남자아이의 생일파티에 간다. 이 세가닥 서사에 ‘주변인물들’을 사이사이 배치해 깔끔하게 엮어낸 『빛의 제국』은 누가 뭐래도 빨리, 재미있게 읽히는—동시에 소비되는—텍스트다. 북의 주체사상으로 무장하고 1980년대 남한 학생운동, 그중에서도 주사파에 침투해 ‘교리’를 학습하게 되는 김기영의 기막힌 아이러니와 부유한 지방 주류도매업자의 막내딸로서 학생운동을 맛보고 안온한 중산층으로 자리잡은 장마리의 성적 일탈이 한가닥으로 묶인다면 ‘재미’가 배가될 것은 분명한 일이다.9

이 두 인물의 행보를 『검은 꽃』과 연관짓는다면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즉 일포드 호에서 벌어지는 요시다와 이정의 동성애, 이정과 이연수의 이성애를 장마리를 통해 좀더 일탈적 코드로 바꿔 구사하면서 김기영 같은 인물의 의식에 잠복한 분단현실이라는 뇌관의 폭발성을 자본주의의 ‘보편적 일상’으로 희석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희석과정에서 장마리라는 생생한 인물도 태어난다. 남한에 정착한 기영의 궤적에는 작가의 세계관이라고 할 만한 것이 교묘하게 흩뿌려져 있지만, 그 진짜 생활감각은 장마리가 대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권 만료로 인해 제3국으로 도피할 수 없게 된 김기영이 아내 장마리를 찾아가 형기를 치르고 “누구보다 성실한 남편으로, 아빠로 최선을 다”하겠다고 호소하는 멜로드라마가 김빠지게 느껴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한마디로 「손풍금」의 인민 박광수가 풍기는 존재감 같은 것이 김기영에게는 실리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실물처럼 만들어졌다 하더라도 그는 기본적으로 서울의 중산층 남자라는 주형(鑄型)에 간첩에 따라붙는 이미지들을 녹여 만든 주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두 남자와 동시에 쎅스하면서 느끼게 되는 장마리의 씁쓸한 환멸이나 자수하여 광명 찾겠다는 기영의 애원을 뿌리치고 냉정하게 북으로 가라는 그녀의—분명히 더 앙칼졌음직한—생존본능은 여실한 편이다. 작가는 이 두 인물의 (엇갈릴 수밖에 없는) 행로에 어떤 결말을 제시하는가?

그 결말은 안보불안을 안고 사는 한국의 (중산층) 시민들도 안심하고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적어도 플롯상으로는 모든 상황을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아주 깔끔하게 정리한 것이다. 서사의 거의 모든 상황은 국정원의 관리하에서 통제·조정된 것으로 사후 해명된다. 그런 서사가 북녘의 현실을 괄호로 묶어버리는 동시에 김기영의 가족도 그 계급적 질서에 온존시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당연하다. 비로소 대한민국의 품으로 돌아온 그는 아마도 평생 위치추적 장치가 내장된 시계를 차야 하겠지만 말이다. 이런 결말에 대고 6·15공동선언 이후에도 지리멸렬하면서도 때로는 첨예하게 전개되는 남북의 위기현실이 작품에서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고 투덜거리고 싶지는 않다. 작가 자신도 이 작품은 남북문제에 관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거니와, 문제는 그런 현실이 느껴지느냐 마느냐의 차원이 아니다.

오히려 소설이 다루는 인간의식의 ‘기본’이 쟁점이다. 무엇보다 북에서 태어나고 자란 기영의 21년 세월이 남의 현실에 적응한 21년이라는 시간에 별다른 외상(外傷) 없이 흡수·중화될 수 있을까? 한 개인의 무의식에 반평생 억압되어 있던 ‘그것’이 한순간에 해제된다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천천히 복기(復棋)해보면, 사건의 전조로 제시되는 기영의 두통부터가 대국의 맥이라기보다는 속수(俗手)에 가까운 것이다. 이 경우 탈북하여 어느날 서울 한복판에서 김기영과 마주친 첫사랑 정희의 소스라치는 반응을 떠올려볼 수도 있겠는데, 그렇다고 그 양상이 어떠하리라고 단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다만 김기영의 선택이 연출하는 멜로드라마는 북도 남도 선택할 수 없게 된 한 인물의 고통스런 진실을 직시하기보다는 계산된 위안을 주기 위한 서사적 요식에 가깝다는 점만은 확언할 수 있다.

물론 “새로운 날의 시작이었다”로 끝나는 결말이 주는 여운에도 어떤 불편함이 없달 수는 없고, 적어도 그런 의미에서는 그것도 단순히 독자의 마음을 풀어주는 ‘오픈 엔딩’만은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현미에게 ‘내일’을 약속하고 그로써 이 부부의 앞날에도 희미한 서광을 비춘 그 결말이 분단시대를 절망과 희망으로 잠식하는 ‘통일시대’의 착잡한 진실을 일깨운다고 평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대체 어디까지 가야 그런 일깨움에 도달할 수 있으며, 어떤 작품이라야 거추장스러운 작은따옴표를 걷어낸 통일시대의 징후가 아닌 도래를 증언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빛의 제국』은 “분단 이후 심화된 한반도 주민의 이질적인 근대경험을 무리없이 해체하는 동시에 포용하는 ‘고전’”을 목말라하는 우리의 갈증이 단숨에 가시기 어려움을 다시 한번 확인해준다.

 

 

글을 맺으며

 

지금까지 한반도의 분단시대가 서서히 잠식되어간다는 전제하에 그 징후를 드러낸다고 판단되는 작품들을 살펴보았는데, 목마름만 더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또한 분단체제가 뿌리를 내린 남북의 사회적 현실이 어떤 개념으로도 포괄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미묘하다는 사실이 특히 창작자들에게 부담스럽게 확인된 바 없지 않을 듯하다. 그러나 다 따라 읽기가 힘들 정도로 왕성한 생산력을 (여전히) 자랑하는 우리의 소설문단 자체가 ‘오아시스’일 수는 없을 것인가. ‘소설보다 기이한 삶’을 다루는 소설가들에게 롤러코스터처럼 요동치는 ‘통일시대’야말로 창작의 신바람나는 현장일 수 있지 않은가. 어떤 경우든 2006년 국면에서 분단시대를 침식해들어가는 ‘통일시대’의 전체상을 파악하려는 노력을 포기할 수는 없다. 온갖 난관들을 헤치며 시민들의 일상에 진입하기 시작한 통일시대의 들목에서 북녘의 삶과 만나는 일도 점차 일상화되리라 본다. 그런만큼 남한국민이라는 반(半)국가의 국민의식에서 탈피하는 상상력은 비평과 창작 분야 모두에서 반드시 요구된다. 그런 상상력을 실현하는 일도 문학이 그 본연의 모습으로 꽃피는 것과 무관할 수 없을 터, 그 성취를 뭐라고 부를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남한의 ‘민족문학’이 북녘의 현실과 만나 창조적인 문학으로 진화하는 과정에서 통일시대도 앞당겨질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__

  1.  이 글을 마무리하는 사이 남북 문인들이 10월 30일 금강산에 모여 ‘6·15민족문학인협회’를 마침내 발족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해방후 민간단체가 주축이 된 남북한 단일 문인조직이 처음 탄생한 셈이다.
  2. 분단의 ‘기원’을 외세 개입을 불러온 1945년 민족해방으로 잡으면 45년 전후 태생이 분단 1세대가 된다. 한 세대를 대개 30년으로 치니, 분단 2세대는 1975년 전후에, 1.5세대는 50년대 후반에서 60년대 중반에 태어난 사람들을 가리킬 것이다. 이들 세대간 감수성의 편차가 크리라는 점은 더 말할 필요가 없을 텐데, 1세대는 한국동란과 4·19가, 2세대는 1988년 서울올림픽과 IMF사태가, 1.5세대는 1980년 광주항쟁과 1987년 6·10항쟁이 ‘공적 감수성’을 형성한 결정적 사건이 될 듯하다.
  3. 한기욱 「한국문학의 새로운 현실 읽기」; 황광수 「거미의 집짓기와 소화법: 통일과정의 소설적 표현」, 『창작과비평』 2006년 여름호 참조.
  4. 백낙청 『통일시대 한국문학의 보람』, 창비 2006, 15면. 해당 문장은 이러하다. “특히 창작현장에서는 ‘역사적 임무’를 의식 않는 것이 도리어 ‘문학 나름’의 더 큰 이바지를 가능케 한다는 명제도 가벼이 넘길 일이 아니다. 실제로 분단체제의 극복은 어떤 식으로든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만 이룩하면 된다는 단순논리가 아니라 분단체제 아래서의 삶보다 한결 낫고 멋진 삶이 가능해진 사회를 한반도에 건설한다는 뜻이니만큼, 문학이 그 본연의 모습으로 꽃피는 것 자체가 분단체제극복에 기여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5. 최장집 『민주주의의 민주화』, 박상훈 엮음, 후마니타스 2006, 특히 8~9장 참조.
  6. 신승엽 「흔들리는 민족문학」, 『창작과비평』 2006년 여름호 참조.
  7. 이에 대해서는 특히 백낙청 『흔들리는 분단체제』, 창작과비평사 1998, 1부 참조.
  8. “몇천 줄기 강물에 두루 비친 달과 해/하나의 이슬방울에 비치어/저 하늘이 이슬처럼 영롱하리/바라보는 임이여/남녘에도, 북녘에도/그리운 임 있으니/달님과 해님이 어우러져 비치오리/임이여, 내 우러러 그대 모습에/한누리 이슬 올리오니/맑고 고우시라/이 땅, 이 하늘에/내 그리운 남님, 북님이여.” 이 연가는 『문예중앙』 연재 당시(2003년 겨울~2004년 가을)에는 없었던 것이다.
  9. 이 작품은 『문학동네』에 연재하다가(2004년 가을~2005년 가을) 중단한 것을 전면 개작한 결과물이다. 연재분과 완성본을 비교해보면 김영하가 얼마나 순발력있는 작가인가를 단박에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런 민첩한 순발력도 서사적 사건의 예측된 ‘효과’에 맞춰 발휘된다는 느낌이다. 단순히 연재물에 짙게 배어 있는 80년대 남한의 복잡하게 꼬인 정치현실을 희석하는 쪽으로 개작이 진행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작가로서 걷잡을 수 없이 번지는 서사에 ‘질서’를 부여하려는 노력은 당연한 일이다. 다만 연재 4회의 마지막 대목에서 불현듯 던져진, “김기영, 너는 누구이며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물음이 온갖 방식으로 불러일으킬 법한 ‘상상의 현실’에 작가가 전력 투구하기보다는 상대적으로 쉽게 소비되는 방향으로 서사적 긴장을 해소해버렸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