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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과 현장
북핵실험 이후, 6·15시대 담론과 분단체제 변혁론
박순성 朴淳成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 저서로 『북한 경제와 한반도 통일』 『아담 스미스와 자유주의』 『북한경제개혁연구』(공저) 등이 있음. sunsong@dongguk.edu
1. ‘흔들리는’ 6·15시대
사태의 진전이 이미 예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 핵실험은 사건 자체의 심각성으로 남한사회를 혼란에 빠뜨렸다. 미국의 대북압박정책에 대응하여 북한이 생존전략 차원에서 실시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북한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에 거리로 뛰쳐나온 사람들도 있었다. 북한의 변화를 기대하던 대북포용론자들은 좌절 속에서도 새로운 대화의 필요성을 찾아냈고, 안보전문가들은 예상을 벗어나지 않은 북핵실험에서 대북압박과 군비증강의 명분을 만들어냈다. 말 그대로 봇물 터진 듯이 기사를 쏟아낸 언론, 발언도 감정도 절제하지 못한 정치권은 우리 사회의 혼란을 가중시켰다.
외부로 눈을 돌려보면, 냉정하게 군사전략적 사고를 따르고 있는 북한의 선군(先軍)지도부와 미국의 네오콘, ‘보통국가’로 한걸음 더 나아갈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려는 일본의 보수집권세력, 끝까지 중재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음으로써 동북아에서 영향력을 유지하려는 중국의 공산당 지도부, 동북아에서 잃어버린 강대국의 자리를 되찾으려는 러시아의 권위주의적 집권층이 존재한다. 한편 한국의 정책결정자들은 사태가 발생한 직후에는 당황과 짜증이 뒤섞인 반응을 보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관련국들의 대응으로부터 교훈을 얻은 듯 침착해지기 시작했다.
핵실험 직전과 직후 세차례에 걸쳐 진행된 한·중·일 3개국 사이의 양국 정상외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대북제재 결의안 채택, 중국의 특사외교, 미국 국무장관의 동북아 3개국 순방, 북·중·미의 비공식 3자협의 등을 거치면서, 북핵위기는 6자회담 재개 합의로 일단 진정국면에 접어들었다. 관련국의 전략참모부는 지금까지의 손익계산서를 뽑아내고, 앞으로 전개될 사태에 대비한 행동계획을 짜고 있다. 관련국의 수가 많은 탓에 예측의 정확도는 떨어질 수밖에 없지만, 전문가들의 결론은 의외로 단순할 것이다. 북한과 미국이 위기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진지한 협상을 벌일 것인가 아니면 다시 한번 군사주의적 대결을 벌일 것인가에 따라, 한반도의 정세는 결정될 것이다. 평화냐 전쟁이냐. 분명 우리는 기로에 서 있다.
긴박한 한반도 정세는 그동안 우리 사회 내부에서 비교적 폭넓게 주목받아온 ‘6·15시대’ 담론을 흔들리게 하고 있다. 다소 애매하지만 6·15시대는 남북정상회담 이후 남북 당국과 주민이 협력하여 분단체제를 해체해나가는 과정, 다시 말해 ‘한반도 남북이 본격적으로 교류·협력을 통해 평화적 통일로 나아가는 시대’로 규정될 수 있다.1 이처럼 현재를 남북한이 주도하는 탈분단과정으로 규정하는 6·15시대 담론은 2002년 10월 시작된 2차 북핵위기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서 일정한 영향력을 유지해왔다. 하지만 이러한 시대규정은 북의 핵실험으로 정면 도전을 받게 되었다. 6·15시대 담론의 핵심요소인 ‘한반도 남북의 주도적 역할’과 ‘평화와 통일의 동시 진행’2은 북·미 양국의 군사주의적 대결에 따른 한반도 전쟁위기로 설득력을 잃어버릴 상황에 처한 것이다.
2. 6·15시대 담론의 분열
북핵실험 직후 한국정부는 대북포용정책의 기조를 그대로 유지할 수는 없지 않겠느냐고 발표했다. 대북정책의 기조를 재검토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 발표는 성급한 측면이 없지 않지만 정부가 처한 어려운 입지를 잘 보여준 사례다. 무엇보다도 북한이 대화의 가능성을 막아버리고 상황을 악화시키는 조치를 취한 상태에서 대북포용정책은 더이상 작동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국내외적으로도 설득력이 없다는 사실을 정부 차원에서 인정한 것이다.
대북포용정책의 지지자들은 이러한 한국정부의 태도를 두가지 방식으로 비판했다. 첫째, 노무현정권 등장 이후 대북포용정책은 실질적으로 충분하게 추진되지 않았다. 둘째, 대북포용정책과 북한 핵개발 사이의 ‘직접적 인과관계’를 찾아낼 수 없는 상황에서 북핵실험을 대북포용정책의 실패와 연결짓는 것은 논리적 비약이다. 전자가 한국정부가 최근 수년간 추진해온 대북포용정책의 불충분성에 촛점을 맞추고 있다면, 후자는 대북포용정책의 본질에 대한 오해를 지적하고 있다.
대북포용정책이라는 용어 자체, 특히 포용이라는 말의 적절성에 대한 북한당국의 이의제기와 남한사회 내부의 논란에도 불구하고, 현 남북관계에서 대북포용정책의 ‘현실적 힘’은 대북경제지원 및 남북경협의 확대가 북한 지도부의 인식 변화와 그에 따른 체제의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예상에 기초한다. 북한 지도부는 1990년대 초반 이후 경제위기로 체제유지에 어려움을 겪어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남한정부가 흡수통일을 부정하고 경제지원과 협력을 확대해나감으로써 북한체제에 정치·경제적 안정을 제공한다면, 북한 지도부는 남한정부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경제위기 극복과 경제성장을 위해 개혁개방에 적극 나설 것으로 예측되었다. 김대중정부는 1998년 2월 출범 이후 이러한 구상하에서 대북포용정책을 꾸준히 추진했으며, 그 결과 북한의 대유럽관계 개선, 남북정상회담, 북미관계 개선, 북한경제의 개혁개방, 북일 정상회담 같은 일련의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대북포용론자들의 첫째 비판에 따르면, 노무현정부는 김대중정부처럼 강력한 포용정책을 끈기있게 펴지 않았으며, 때로는 포용정책과 상호주의를 뒤섞기도 했다. 심지어 정경분리 원칙이나 인도주의 원칙을 포기하기도 했다. 자연히 북한 지도부는 노무현정부의 설득이나 요청을 쉽게 수용하지 않게 되었다. 물론 2005년 6월의 경험(정동영 장관의 방북과 남한정부의 중대제안)은 북한 지도부가 어려운 상황하에서는 남한정부의 제안을 6자회담 복귀의 계기로 활용할 수 있음을, 다시 말해 남북관계가 북한을 국제사회로 끌어들이는 매개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당시 중대제안의 실현과 관련한 구체적 논의는 6자회담의 협상과정에서 이루어지지 않았고, 남한정부는 중대제안에 버금가는 실질적인 경제지원이나 경협사업을 북한에 제공하지도 않았다. 이에 따라 한국정부의 대북포용정책에 대한 북한의 신뢰도 약화되었다.
미국의 대북압박이 강화되는 상황에서 현정부가 포용정책을 충분하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펴지 않음으로써 결국 북한 핵실험을 막지 못했다는 비판은 대북포용정책의 성공이 궁극적으로 남북관계뿐만 아니라 북미관계의 개선까지도 가져올 것이라는 믿음에 기초해 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대북포용정책과 6·15시대 담론은 동일한 실체의 두 측면을 보여준다. 남북이 주도하는 한반도 평화와 통일의 실현(6·15시대 담론)은 현단계에서 남한의 대북포용정책 형태로 진행될 수밖에 없으며(6·15시대 실천), 대북포용정책은 남북관계 개선을 통해 북미관계 개선을 끌어냄으로써 한반도 평화를 현실에서 실현하려고 한다. 이처럼 대북포용정책과 6·15시대 담론을 남북이 주도하는 평화·통일과정에 적극적으로 연결시키는 이해방식은 6·15시대에 대한 ‘강한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강한’ 6·15시대 담론은 남북이 주도하는 분단체제 해체론인 것이다.
대북포용정책의 본질에 대한 오해라는 관점에서 현정부의 입장(또한 북핵실험을 대북포용정책의 실패로 규정하는 보수진영의 억지)을 파악하는 둘째 비판은 대북포용정책의 의미에 대한 제한적 해석을 보여준다. 제한적 해석에는 두가지가 있다.
우선, 한국정부는 미국 네오콘의 대북강경정책에 막혀 대북포용정책을 제대로 펼칠 수도 작동시킬 수도 없었다는 것이다. 논의의 명료화를 위해 다소 과장해본다면, 이러한 주장은 (6·15공동선언의 의미와 그후 남북관계 발전을 결코 과소평가하지는 않지만) 미국 네오콘이 주도하는 세계질서하에서 6·15시대 담론이 부딪힌 현실정치적 한계, 남북 주도의 한반도 평화와 통일이라는 관념이 극복해야 할 실천적 제약을 지적하고 있다. 이는 6·15시대 담론에 대한 현실주의적 비판이다. 6·15시대에 대한 ‘강한 해석’은 이론과 실천 양 측면에서 이러한 현실주의적 비판을 극복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3
다음으로, 경제지원을 핵심으로 하는 대북포용정책은 본질적으로 북한체제의 사활적 이해가 걸린 핵개발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남북관계를 경제영역에, 북미관계를 군사·안보영역에 연결시키면서, 남한정부의 대북포용정책이 본질적으로 군사·안보문제인 북한의 핵개발을 막는 데에는 역부족이라고 주장한다.4 이 해석도 미국과 북한 사이에서 현실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군사전략적 게임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현실주의적이다. 또한 이 해석은 ‘민족문제’와 ‘군사문제’를 분리하는 1970년대 중반 이후 북한 지도부의 입장(역설적으로 핵문제와 관련해서는 남한사회 보수진영과 닮아 있는)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준다. 결국 북한의 핵실험을 북미의 군사적 대결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하는 이러한 해석은 대북포용정책의 본질적 한계를 지적함으로써, 남북이 주도하는 6·15시대가 한반도 평화의 실현과 관련하여 일정한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드러낸다. 이같이 북핵실험과 한반도 평화문제에 대한 현실주의적이고 제한적인 이해방식은 통일문제(민족문제)와 평화문제(군사문제)를 분리하고 남북한의 역할을 제한적으로 이해하는, 따라서 남북 주도의 평화·통일을 내세우는 ‘강한’ 6·15시대 담론과 구분되는 ‘약한’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5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해보면, 북핵실험이 야기한 대북포용정책의 실패 또는 한계를 둘러싼 논의는 대북포용정책의 성과로 열린 6·15시대의 성격에 대한 논의로 연결된다. 어쩌면 이는 당연한 논리적 귀결인지도 모른다. 그동안 6·15시대 담론을 둘러싼 이해의 차이는 6·15시대의 의미가 모호하게 규정됨으로써 잘 드러나지 않았으나, 이제 북핵실험을 계기로 분명해졌다. 한가지 더 지적한다면, 6·15시대에 대한 이러한 이해의 차이는 6·15시대 담론의 현실적 제약 또는 실천방안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으며, 또한 우리 사회 내부에서 한반도 평화·통일 문제와 관련하여 대립해온 여러 전통적 관점들간의 차이를 큰 변화 없이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3. 6·15시대의 변혁운동론: 통일담론과 평화담론
북한 핵실험이 야기한 6·15시대에 대한 해석의 차이는 핵실험 자체와 남북한의 정책·행동에 대한 평가에서도 차이를 가져왔다. 다소 거칠게 정리해보면, 6·15시대 담론에 대한 현실주의적 비판은 핵실험 자체를 북한 핵문제의 본질이 드러난 것으로 해석하면서, 북핵실험을 남한의 대북포용정책의 실패보다는 좌절로 이해한다.6 6·15시대에 대한 ‘약한 해석’은 북한 핵실험의 근본원인을 미국의 군사패권주의와 대북압박정책에서 찾으며, 핵실험이 6·15선언을 ‘파기’하지 않았다고 평가한다.7 6·15시대에 대한 ‘강한 해석’은 미국의 대북압박정책 못지않게 남한정부의 불충분한 대북포용정책과 북한 지도부의 군사우선주의를 비판하면서, 6·15시대의 위기에 대해 우려한다.
6·15시대가 남북 정부와 민간이 함께 분단체제를 극복해가는 과정이라면, 북한 핵실험으로 야기된 6·15시대의 동요 또는 위기는 분단체제의 극복과정이 후퇴하거나 예상치 못한 파국으로 치달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하지만 핵실험 이후 전개되는 위기국면을 어떻게 타개할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정책대안이나 운동방안은 아직 제시되지 못하고 있다. 여기서는 6·15시대에 걸맞은 분단체제 변혁운동론을 검토하면서 구체적인 정책대안이나 운동방안의 모색에 도움이 되는 기조를 찾아보고자 한다.
6·15시대에 대한 ‘약한 해석’은 경제·사회 영역과 군사·안보 영역의 분리를, 북한의 공식담론은 민족문제와 군사문제의 분리를, 남한사회 내부의 현실주의적 안보이론은 남북교류협력문제와 국제문제로서의 북핵문제의 구분을 강조한다. 이러한 관점들은 일견 서로 다른 듯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동일한 문제의식에 기초해 있다. 한반도 분단체제의 근본문제가 민족통일의 문제와 평화체제의 문제라는 두가지로 분리되어 파악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궁극적으로는 평화와 통일을 함께 사고하는 6·15시대 담론에 어울리는 평화·통일론을 검토해보려고 한다.
우선 간단히 핵심내용을 제시한다면, 현재 우리 사회 내부의 평화와 통일에 대한 다양한 관점들은 두개의 축을 중심으로 분류해볼 수 있다. 하나는 안보담론과 평화담론을 대척점으로 하는 축이고, 다른 하나는 민족통일과 한미동맹을 대척점으로 하는 축이다.8
이러한 두 축을 좌표평면으로 하여 우리 사회 내부의 평화관·통일관을 분류해보면 몇가지 사실들을 지적할 수 있다. 먼저, 우리 사회의 극좌와 극우는 각각 민족통일과 한미동맹을 극단적으로 강조하면서도, 국가안보를 절대시한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다음으로, 이념적으로 중도로 올수록 평화를 강조하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며, 따라서 우리 사회의 이념지평은 옆으로 누운 포물선의 형태를 띤다. 끝으로, 전통적으로 분단체제하에서 국가안보를 강조하던 교육의 영향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아서, 이념지평 내부에 사회구성원들이 골고루 분포되어 있다. 우리 사회에서 여론의 중심 또는 이념적 중도는, 그림에서는 다소 한쪽으로 치우친 것으로 표시되어 있지만, 한미동맹과 안보를 강조하는 경향을 다소 띠는 위치(E)에 놓여 있다. 바로 이 평균점 또는 한국사회의 현실에서 출발하여 현단계 정책대안의 기조를 구상해볼 수 있다.
6·15시대에 대한 ‘강한 해석’이 남북이 주도하는 평화적 통일 또는 평화와 통일의 동시 진행을 강조한다면, 이러한 관점에서 생각할 수 있는 평화통일로 가는 최상의 경로는 한국사회의 평균점(E)에서 하나된 평화국가의 상태(UP)로 곧바로 가는 최단경로인 ‘경로 1’일 것이다. 하지만 최단경로가 반드시 현실적인 노선은 아니다. 6·15시대에 대한 ‘강한 해석’을 지지하는 입장에서도 평화·통일에 이르는 경로는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 담론에서 실천으로 내려오는 과정에서, 분단체제를 변혁하려는 사람들은 현실의 복잡성에 다양한 방식으로 반응한다.
논의의 편의를 위해 평화와 통일이라는 두개의 목표 중 한쪽에 치우쳐 있는 노선을 생각해보자. 하나는 민족통일을 우선시하는 노선이다. 그림의 평균점(E)에서 바로 민족통일의 상태(NU)로 가는 경로이다. 하지만 이러한 노선은 결코 평화를 무시해서는 안된다. 이런 점에서 언제나 평화는 민족통일을 우선시하는 노선의 편향성을 교정하는 주요한 기준이 된다. 다른 하나는 평화를 우선시하는 노선(E에서 P로 가는 경로)이다. 이 노선에 대한 논의는 민족통일을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노선의 경우를 뒤집어서 적용하면 된다.
결국 평화와 통일의 동시 진행은 E—NU 경로와 E—P 경로의 내부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이런 점에서 두 노선은 6·15시대 담론이 벗어나서는 안되는 좌우 경계선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두 노선이 현실에서 6·15시대를 실천해나갈 변혁운동으로서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통일을 강조하는 노선(통일담론)은 ‘경로2’의 형태를, 평화를 강조하는 노선(평화담론)은 ‘경로3’의 형태를 띠어야 할 것이다. 거칠게 말한다면, 통일담론은 내부에 평화론을, 평화담론은 통일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처럼 통일담론을 평화론에, 평화담론을 통일론에 연결시켜주는 것이 분단체제론이다. 분단체제론은 분단된 남북이 적대(적 의존)관계에 놓여 있음을 강조함으로써 (통일의 관점에서도) 평화가 중요함을, 군사주의에 바탕을 둔 신자유주의적 세계질서의 근본모순이 한반도에서 분단질서를 매개로 하여 작동하고 있음을 강조함으로써 (평화의 관점에서도) 통일이 중요함을 깨우쳐주고 있다.9
여기에서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6·15시대에 대한 ‘약한 해석’은 좌경계선을 넘지 않았는지, 6·15시대 담론에 대한 현실주의적 비판은 좌우 경계선 내부에 들어 있는지 하는 것이다. 질문에 대한 답변은 정책기조의 차원에서보다는 구체적인 정책대안에서 결정될 가능성이 높지만, 간단하게 두가지만 지적하고자 한다. 먼저 ‘약한’ 6·15시대 담론이 원칙의 관점에서 북한 핵실험을 군사주의적 행동으로 비판하지 않을 때, ‘약한 해석’은 좌경계선을 넘을 가능성이 크다. 다음으로 현실주의적 비판이 남북 주도의 평화·통일 가능성을 지나치게 제한적으로 해석할 때, 현실주의는 자칫 패배주의로 전락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약한 해석’과 현실주의적 비판은 스스로 분단체제의 작동원리 또는 현실에 갇혀 있지 않은지 끊임없이 돌아보아야 한다.
4. 분단체제론을 다시 생각한다
최근 6·15시대에 대한 ‘강한 해석’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해석될 수 있는 통일담론과 평화담론은 ‘한반도식 통일론’(백낙청)과 ‘평화국가론’(참여연대 평화군축쎈터)으로 우리 사회에 모습을 드러냈다. 두 담론이 겉으로 드러내는 차이(통일의 강조와 평화의 강조, 근대국가론과 ‘시민국가’론, 점진적 접근과 급진적 접근)에도 불구하고, 이들 담론은 남북정상회담 이후 새로이 맞게 된 남북의 화해와 협력이라는 정세하에서 평화와 통일을 화두로 삼고 등장한 변혁운동론이라고 할 수 있다.10 이런 점에서 두 담론은 한반도의 남북을 동시에 사유하려고 한 분단체제론의 문제의식을 발전된 형태로 이어받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울러 분단체제론이 평화국가론에 문제의식을 제공하고 있다는 사실은 분단체제론의 변화·발전과 관련해서도 의미있는 일이라 하겠다.
분단체제론에 무게중심을 두고 논의를 전개해보면, 양분된 한반도의 남북에서 억압받는 민중·민족의 관점에서 민주화와 통일을 동시에 사고하기 위해 제시된 분단체제론은 남한사회에서 민주화가 달성된 후, 그리고 6·15시대가 시작됨에 따라, 세가지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우선 남한사회 내부의 민주화 과제가 상당정도 실현됨에 따라 분단체제론의 문제의식이 통일로 집중되는 경향이 생겨났다. 이러한 경향 때문에 분단체제론은 통일론의 하나로 ‘폄하’되거나, 심지어 NL계열의 입론에 근접한 통일론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이러한 비판을 극복하기 위해서, 분단체제론은 한편으로는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이 남한사회에서 민주주의 기반을 잠식하는 현상을 분석해낼 수 있는 이론적 도구를 흡수해야 한다. 다른 한편, 과거 민주화 이전의 남한사회에서 민주화와 통일을 동시에 사고하였듯이 북한사회에서 민주화와 통일이 어떻게 동시에 이루어질 수 있을지 고민을 심화해야 한다.
다음으로 6·15정상회담 이후 남한사회 내부에서 안보중심의 사고가 약화되고 평화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였는데, 분단체제론은 이러한 평화에 대한 관심을 끌어안아야만 한다. 한국전쟁의 참상에도 불구하고 분단체제하에서 국가안보제일주의가 작동함에 따라, 한국사회에서 평화는 반세기에 걸쳐 반체제이념의 하나로 취급되었다. 1972년 7·4공동성명 이후 평화는 3대 통일원칙의 하나로 언급되지만, 실질적으로는 언제나 국가안보의 뒷전으로 밀려나 있었다. 하지만 6·15시대와 함께 평화는 한국사회의 진보진영에서 확실한 시민권을 갖기 시작했다. 따라서 분단체제론은 평화라는 가치를 어떻게 자신의 이론틀 속으로 불러들일 것인가 하는 과제를 안게 되었다. 평화국가론은 바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의 하나이다.
끝으로 6·15시대가 남북정상회담에 기반한다는 점에서 분단체제론은 분단체제 변혁운동의 주체와 관련하여 새로운 전망을 제시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도 정부와 민간 사이의 협력에 대한 고민이 생겨났으며, 북한의 ‘민간’을 어떻게 규정할지 어려움이 존재한다. 나아가 전통적으로 분단체제론의 근간을 이루던 ‘억압받는 민중·민족’ 대 ‘공생하는 집권세력’의 대립이라는 개념도 다시 정의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남한사회에서 민주화운동의 성과로 수립된 김대중정부의 대북포용정책으로 6·15시대가 열렸다고 본다면, 6·15시대는 분단체제 변혁운동의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이제 분단체제론은 이러한 성과를 반영하여 변혁운동의 주체와 운동방식에 대한 새로운 이론을 내놓아야 할 과제에 직면한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도 ‘시민국가’와 국제적 시민연대를 주장하는 평화국가론은 분단체제론의 문제의식을 민주화 이후의 시대에 맞추어 한단계 발전시킨 변혁운동론이라고 할 수 있다.
북한 핵실험으로 탈분단의 6·15시대는 흔들리고 있다. 이러한 때에 6·15시대 담론의 의미를 다시 살펴보고 한반도 평화와 통일의 경로를 재점검하는 일은 매우 큰 의의를 갖는다. 한국 시민사회가 분단체제론에 바탕을 둔 통일담론과 평화담론을 균형있게 발전시키면서도 실천의 영역에서 통합함으로써 현재의 위기를 극복하고 6·15시대를 한단계 더 전진시키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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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15시대’에 대한 필자의 거친 개념 규정은 『창작과비평』 2006년 봄호에 실린 서동만 「6·15시대의 남북관계와 한반도 발전구상」과 유재건 「역사적 실험으로서의 6·15시대」에 의존하였다.↩
- 평화와 통일의 동시 진행 또는 ‘과정으로서의 평화’와 ‘과정으로서의 통일’의 중첩성에 대해서는 서동만(앞의 글 224~25면)이 특히 강조하고 있다.↩
- ‘강한’ 6·15시대 담론이 현실주의적 비판을 극복해야 한다고 해서, 그것이 비현실적이거나 이상주의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다른 모든 체제변혁론과 마찬가지로 분단체제 해체/변혁을 주장하는 ‘강한’ 6·15시대 담론은 현실정치의 벽을 뛰어넘어야만 하는 것이다.↩
- “논리상으로도 포용정책은 남북간의 화해를 바탕으로 주로 경제·사회부문의 교류협력을 통해 ‘사실상 통일’의 기반을 마련하는 정책”이지만 “경제·사회부문의 교류협력만으로 군사·안보 문제까지 해결하기는 어렵다.” ‘핵실험은 포용정책의 결과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임원혁의 답변. 「포용정책이 아니라 포용정책의 ‘부재’가 문제—기획특집 ‘한반도브리핑’ 필자 5인이 말하는 전망과 대책 2」, 『프레시안』 2006.10.13 참조.↩
- 6·15시대에 대한 강한 해석과 약한 해석은 6·15시대에 대한 북한당국의 해석과 비교해볼 수도 있다. 때로 북한당국의 대남강경발언에서 6·15시대 담론은 민족공조를 통한 반미통일론으로 요약된다. 이러한 북한의 교조적 해석 또는 통일전선적 반미통일론의 핵심은 민족해방전쟁론이라고 할 수 있다. 교조적 해석에 따르면, 평화는 민족의 생존과 통일의 이름하에 군사주의에 자리를 내주고, 민족은 반미주의 또는 반제국주의의 형태로만 존재한다.↩
- 대표적으로 강태호 「변화하는 한미관계와 노무현 독트린의 운명」, 『창작과비평』 2006년 가을호 및 「한반도 ‘핵위기’ 격랑 속으로」, 『한겨레』 2006.10.10 참조.↩
- 대북포용정책의 해석에서 6·15시대에 대한 ‘약한 해석’에 친화성을 보여주는 임원혁은 북핵실험과 관련한 남북한의 정책·행동에 대한 평가에서는 ‘강한 해석’에 가까운 견해를 보여준다. 한편 6·15시대에 대한 북한의 교조적 해석은 핵실험을 정당화하면서, 오히려 남한정부에 미국의 군사주의적 압박정책에 편승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 이 좌표평면은 처음에는 한국사회 내부의 대북관과 통일관을 구분하는 사분면을 구성하기 위해 만들었으나(『한겨레』 2006.3.28 참조), 조성렬과 서동만의 논의에 도움을 받아 평화·통일관을 보여주는 형태로 발전시켰다.↩
- 이와 관련해서는 유재건의 앞의 글과 백낙청의 발언(「도전인터뷰: 무엇이 한국문학의 보람인가」, 『창작과비평』 2006년 봄호)을 참조할 것.↩
-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이 글은 두 담론이 6·15시대에 대한 ‘강한 해석’의 틀 내에서 해석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다. 여기서 한가지 언급해두자면, 참여연대 평화군축쎈터에서 평화국가론을 주도하는 이대훈, 구갑우, 이경주, 이태호 그리고 필자 사이에도 차이는 존재한다. 이 글에서 평화국가론을 6·15시대 담론에 연결시켜 논의하는 필자의 문제의식은 아직 내부토론을 거치지 않은 것임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