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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과 현장

 

친일문제에 접근하는 다른 길

용서를 위하여

 

 

최원식 崔元植

문학평론가, 인하대 동양어문학부 교수. 저서로 『문학의 귀환』 『생산적 대화를 위하여』 『민족문학의 논리』 『한국계몽주의문학사론』 등이 있음. ps919@hanmail.net

* 이 글은 중국 연변대에서 ‘만주국시기조선인작가연구’라는 주제로 열린 회의(2006.8.28〜29)에서 기조강연으로 발표한 글을 세교포럼(2006.10.20)을 거쳐 다시 수정한 것이다. 지정토론자 유재건 교수를 비롯한 세교연구소 회원 여러분의 논평에 깊이 감사한다.

 

 

1. 지연(遲延)의 의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약칭 반민규명위)의 출범(2005.5.31)을 전후하여 우리 사회를 달구었던 친일논쟁이 어느 틈에 잦아들었다. 냄비처럼 달아올랐다가는 싱겁게 식어버리곤 하는 한국식 토론(?)의 전철(前轍)을 이번에도 충실히 밟은 셈이다. 일변에서는 친일파 적발에 급급하고 또 일변에서는 염치없는 변호로 일관하는 이 쟁론에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얻었는가? 작은 문제일지라도 훌륭한 토론과정을 통과하면 그곳에서 고귀한 인간적 진실을 길어올릴 수도 있거니와, 친일론처럼 예민하고 복잡한 쟁점이란 잘 다루기만 하면 우리 사회의 성숙을 가져올 종요로운 계기로 될 터인데, 그저 편싸움에 그치고 만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흉작 속에서도 유종호(柳宗鎬)의 글 두편, 「안개 속의 길: 친일문제에 관한 소견」(『문학과사회』 2005년 겨울호)과 「친일시에 대한 소견」(『시인세계』 2006년 봄호)이 인상적이었다. 물론 나는, 임종국(林鍾國)의 『친일문학론』(1966)을 원류로 삼는 청산론이 마침내 반민규명위의 탄생으로 구현된 요즘의 흐름을 “역(逆)매카시즘”1으로 규정한 그의 지적에 유보적이다. 아서 밀러(Arthur Miller)의 『시련』(The Crucible, 1953)이 전율적으로 환기했듯이, 매카시즘은 혐의가 상상을 통해 무한증식하여 급기야는 용의자들의 육체와 영혼을 파괴하는 데 이르는 공포의 “빨갱이 청소”(red purge)였다. 과거에는 친일문제 자체가 공공적 의제로 상정되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았을 만큼, 그리고 반민규명위의 출범 후에는 청산론자들을 걸핏하면 홍위병으로 몰아갈 만큼, 아직도 한국사회에서 친일파는 힘이 세다. 혹 청산론이 체면불고(體面不顧)의 변호론에 대한 반동으로 사고의 단순화를 부추기는 역매카시즘적 유혹에 굴복할 기미가 보인다면 우리는 그것을 엄중히 비판해야 마땅하지만, 여전히 변호론이 강고한 한국에서 친일청산론이 역매카시즘으로 전환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판단된다. 그럼에도 그의 견해는 충분히 존중되어야 한다. 청산론의 역사적 의의를 긍정하되 그 문제점들을 지적함으로써 합리적 변호론의 한 모범을 보인 그의 토론을 실마리 삼아 이 중차대한 쟁점에 대한 토론을 이어가고 싶다.

먼저 불우(不遇)를 면치 못한 청산론의 역사를 잠깐 살피자. 반민규명위의 정식 발족은 청산론사에서 한획을 긋기에 충분한 것이다. 이로써 1949년 10월 4일, 고작 1년도 채우지 못한 채 이승만(李承晩)정권(1948~60)에 의해 해체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약칭 반민특위)가 반세기 만에 부활한 폭이기 때문이다. 이 정권은 왜 반민특위를 파괴했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그 기반이 친일파들이기 때문이다. 운동방법에 대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우남(雩南) 이승만은 일생을 독립운동에 바친 드문 지사의 하나다. 아니 ‘그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좌우파 모두 받드는 ‘단 하나’의 인물이었다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이러한 위상이 어디에서 말미암은 것인지 불가사의한 일이지만, 그는 한국독립운동의 상징으로서 그 경력에 걸맞게 집권 이후 대일외교에서도 시종일관 강경한 입장을 견지했다. 그런데 국내적으로는 오히려 친일파들을 대폭 포용했다. 그들을 자기 권력 구축의 중심으로 삼는 동시에 대한민국 건국의 실질적 지주로 세우는 무서운 현실주의를 선택한 것이다. 이 현실주의는 소련군의 북한점령 및 김일성정권의 출현과 연계된다. 전민족적 열망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에는 1948년, 남의 대한민국과 북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두 나라가 차례로 건국되었다. 일찍이 냉전의 낌새를 눈치챈 이승만은 1946년 6월 단정론(單政論)을 과감하게 제기하여 북과의 체제경쟁을 선언했다. 국내 기반이 거의 없는 그에게 친미로 옷을 갈아입고 새 주인을 기다리는 친일파들이야말로 그 안성맞춤의 터전이었던 셈이다. 이들은 결코 일제의 잔재(찌꺼기)가 아니다. 더구나 친일파들이 다시 활개치는 남한에 실망한 지식인들이 대거 월북한 공백까지 겹쳐, 반공에 철저한 친일파들은 해방(1945) 후의 현실 속에서 안팎의 좌파와 대결할 물질적 힘과 근대제도의 운용력을 지닌 거의 유일한 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혁명의 성공은 남한 친일파들에게 결정적인 복음으로 되었다. 마오 쩌뚱(毛澤東)이 1949년 10월 1일, 톈안먼(天安門)광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출범을 30만 군중 앞에서 고지하며 오랜 반식민지상태의 종언을 세계를 향해 선언한 며칠 후, 남한에서 반민특위가 해체된 것은 통렬한 역사의 반어가 아닐 수 없다.2 쏘비에뜨연방, 중화인민공화국, 그리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북방 삼각구도의 정립 앞에서 미국은 서둘러 동아시아 정책의 보루를 중국 국민당(國民黨)에서 일본 우파로 바꾸었으니, 냉전의 진군이 남한 친일파 부활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3

이렇게 유보된 친일청산문제는 박정희(朴正熙)정권(1961~79) 때에 더욱 강력한 금기의 영역으로 이동한다. 미국은 북방삼각동맹(북한·중국·소련)에 대처할 남방삼각동맹(한국·일본·미국) 구축을 위한 포석으로 ‘만주’에서 근무한 일본 육군장교 출신 박정희를 하위파트너로 선택했다. 동아시아 반공포위망 정립에서 일본의 역할을 강조한 미국의 구도 아래 한일협정(1965)이 체결되면서 박정희정권에서 만주인맥은 중흥기를 맞이한다. 한일유착(癒着)이란 말에서 짐작되듯이 일본 자민당의 각별한 후원 속에 2차대전의 패배로 중단된 만주프로젝트가 새로운 층위에서 격렬한 기세로 추진되는 가운데 친일문제는 다시 침묵의 카르텔 속에 잠복한다. 박정희정권의 후계인 신군부시대는 물론이고, 남한 민주화가 새 단계로 진전되는 김영삼(金泳三)정부(1993~98)와 김대중(金大中)정부(1998~2003) 시대에도 이 문제에 관한 한, 큰 변화를 보이지 않는 점이 주목된다. 박정희 독재에 저항한 김영삼과 김대중의 뿌리, 한민당(韓民黨)도 친일인맥으로부터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한민당이 식민지시대의 지주와 관료 들을 바탕으로 창립되었다는 점을 상기할 때 두 야당지도자의 연속집권은 건국 이후부터 지연된 한민당의 때늦은 집권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참여정부에 이르러 우여곡절 끝일망정 반민규명위가 출범했다는 것은 노무현(盧武鉉)정부가 선행한 민주정부들과 연속적임에도 불구하고 또 그만큼 비연속적임을 웅변한다. 다시 말하면 노무현정부는 독재정권이건 민주정부건 남한 역대정권들이 그 덫에 치인 일본콤플렉스로부터 일정하게 자유롭다는 뜻이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게 되었을까? 첫째는 노무현정부의 출현이 야기한 세대교체의 효과를 들 수 있다. 이 정부 탄생에는 해방 전후에 태어난 세대의 보스들에 대한 반란이 저류에서 움직인다. 무쇠뚜껑이 열리면서 친일파문제라는 최후의 마지노선에도 마침내 균열이 발생한 것이다. 둘째는 탈냉전시대의 도래 속에서 분단체제가 드디어 요동을 시작했다는 점이다. 분단을 먹이로 성장했던 남한의 지배써클이 탈분단의 경향 속에서 그 강력한 현실성을 점차 상실해가는 도정에 들어선 것이다. 말하자면 천황제 군국주의와 그 변종으로 출현한 반공독재에 의거한 20세기형 한반도 발전기제가 이제 그 효율성을 거의 소진하면서 반민특위의 지연이 더이상 가능하지 않게 된 싯점에 우리 사회는 도달했다고 할까.

 

 

2. 고통의 축제

 

반민규명위의 공식적 출범을 앞두고 과거사의 망령들이 사방에서 출몰한다. 친일논쟁이 재연(再燃)되면서 한국전쟁(1950~53) 때의 ‘부역(附逆)’행위에 대한 조사도 병행하자는 맞불이 붙는가 하면, 과거사 정리로 풍파가 일어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주장도 일어난다. 마침맞게 중국은 동북공정(東北工程)으로, 일본은 야스꾸니(靖國)와 역사교과서로 한국을 압박하는 외환(外患)상태를 상기하면, 북핵을 축으로, 그리고 과거로부터 이월된 쟁점들마저 가세하여 남남갈등을 증폭시키곤 하는 우리 안의 내전을 하루빨리 종식시켜야 한다는 주장에 일리가 없지는 않다. 그런데 과거사 정리는 오히려 위기의 시대를 돌파하려는 충정에서 기원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나 『삼국유사(三國遺事)』는 태평성대의 소산이 아니다. 고려가 직면한 안팎의 위기를 배경으로 이 역사서들이 출현했다는 점에 주목하자. 이런 고려의 역사의식이 계승되면서 조선왕조는 개국 초에 고려사 정리에 착수하여 『고려사(高麗史)』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를 편찬하였던 것이다. 이 점에서 건국 50년이 넘은 현재도 정사(正史)체제의 조선왕조사와 식민지시대사를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미 지적했듯이 그 지연의 주요 원인은 해방 이후 한반도가 분단된 데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분단이 해방을 자주적으로 이루지 못한 내부요인에도 말미암았다는 점에 착목하자. 일제의 장기간에 걸친 혹독한 지배 아래 민족해방을 위한 간난한 투쟁에도 불구하고 한반도는 결국 미소연합군에 의해 분단된 채 해방되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해방은 함석헌(咸錫憲)의 말대로 도둑처럼 찾아온 것이다. 광복군이 전혀 참여하지 못한 채 맞은 일제의 항복 소식에 김구(金九)가 통탄했다는 일화는 상징적이다. 분할점령의 조건을 창조적으로 극복한 통일국가 건설이 아니라 분단정권 수립으로 귀결된 것은 설상가상의 악재다. 이 분열 속에 남북의 체제경쟁이 가속화되었으니, 친일문제를 핵으로 하는 식민지시대사 정리가 흐지부지되고 말았던 것이다. 미소연합군에 의한 해방이라는 외삽성(外揷性)이 친일문제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게 된 근인(根因)이라는 점을 침통히 응시할 때 친일을 오로지 우리 바깥에 두려는 배제의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인데, 친일은 우리 안에도 엄연하다. 사실 조선왕조가 근대로 이행하는 데 성공했다면 친일파의 발생 또한 원천에서 봉쇄되었을 터다. 친일파 발생에서 드러난 내재성이 그 처리에서도 어김없이 복제된다. 처리는커녕 친일문제 자체를 괄호침으로써 정리조차 끊임없이 미끄러뜨리곤 했던 한반도 분단의 교묘함은 정말로 ‘역사의 간지(奸智)’를 실감케 하고도 남음이 있다.

흔히 2차대전 후 나찌부역자들을 엄격하게 처리한 프랑스의 예를 들어 친일파들을 제대로 숙정하지 못한 한국과 비교하곤 한다. 그런데 프랑스와 같은 층위에서 논의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나찌의 프랑스 점령(1940〜44)은 고작 4년인데 더구나 남부프랑스는 비록 괴뢰정권일망정 비시(Vichy)정부(1940〜42)가 관할하였다.4 더욱이 드골(De Gaulle)의 자유프랑스군이 군색할망정 연합군의 일원으로서, 그리고 국내의 레지스땅스운동과 연합하여 빠리를 해방한 점이 결정적 차이다. 바로 이 해방세력들이 전후에 프랑스공화국을 재건하는 과정에서 나찌부역자들에 대한 처리가 신속하고 단호하게 이루어졌으니, 36년에 걸친 길고도 엄혹한 식민지배 끝에 도둑처럼 내습한 해방을 맞이한 한반도와는 차원을 달리한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프랑스의 경우도 그 안을 살피면 간단치가 않다. 빠리해방 후 나찌부역자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진 모리아끄(F. Mauriac)와 까뮈(A. Camus)의 논쟁은 이 문제를 해결하는 일의 어려움을 잘 보여준다. 엄격한 처벌을 주장했던 모리아끄는 약식처형과 여론재판이 횡행하는 현실 속에서 “사이비종교가 득세할 때는 온힘을 다해 그것을 부정해야 하겠지만, 그것의 패배가 임박했을 때라면 그 종교를 믿던 이교도들의 용서를 심각하게 고려해야 한다”는 장 뽈랑(Jean Paulhan)의 조언에 따라 “죽음의 쳇바퀴를 돌리는 대신 그리스도의 자비를 베풀자”며 관용론으로 선회한다. “청산작업에 실패한 나라는 결국 스스로의 쇄신에 실패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모리아끄를 비판한 까뮈는 불관용의 청산론을 강력히 제기했다. 그러나 강경파를 대변했던 까뮈도 현실로 나타난 부역자 재판에 제기되는 형평성의 불균형 앞에서 모리아끄가 옳았다고 고백함으로써 논쟁은 용두사미로 종결된다.5 청산론의 현실태(現實態)에 대한 실망으로 관용론이 대세로 되는 형국에서 프랑스정부는 1951년 나찌부역자에 대한 대사면을 서둘러 단행한다. 사면을 통해 실현되는 화해조치란 항상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기는 하지만, 프랑스는 왜 이처럼 총총히 판을 종결한 것인가? 공산주의의 위협이란 긴급한 사태 앞에서 모든 반공투사들을 민족공동체 안에 결집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부역문제를 중동무이하고 말았던 터다.6 초기의 초법적 단계에서 사법적 계단으로 급기야 반공을 내세운 대사면으로 귀결된 프랑스의 경우도 나찌부역 문제에 대한 성숙한 처리에 성공적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유재건(柳在建)이 토론에서 제기했듯이, 그 처리의 불철저성이 식민지문제에 대한 자가당착적 강경책으로 나타난바, 프랑스 식민주의는 디엔비엔푸의 패배(1954)에 이어 알제리민족해방전쟁(1954~62)에서도 치욕적으로 패퇴하였던 것이다. 진정한 청산에 실패한 프랑스의 과거처리 방식도 타산지석이지 우리가 따를 만한 본은 아니다.

프랑스도 이러했거늘, 뒤늦게 이 일에 착수한 한국에서 그 작업이 더욱 지난할 것은 불을 보듯 환하다. 36년이란 시간이 무섭다. 자유로운 조건에서도 시간은 인간적 삶의 의미를 단숨에 삭탈하려는 음흉한 음모꾼이 되기 쉬운 터인데, 집단적 부자유가 일상으로 된 식민지체제 아래에서 시간이란 순식간에 사람을 갉아먹는 황폐한 기계일 수 있다. 이 때문에 해방운동에 투신한 많은 이들이 시간의 덫에 걸려 메피스토텔레스와 계약했다. 때로는 역의 과정을 밟은 이들도 없지 않다. 또 어떤 이들은 양극 사이를 왕복하기도 했다. 나는 먼저 친일문제에 자기를 치는 심정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목숨 가진 것들에 대한 근원적인 연민으로부터 가까운 미래, 그 터널 끝의 빛을 찾는 간절한 기구(祈求)의 마음자리에서 친일의 망령들을 탈영토화하고, 기구한 우리 역사 속에 재영토화하는 훈련을 시작하자. 20세기 한반도사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우리의 다짐과 21세기로 가는 출구를 창조적으로 모색하려는 우리의 정성이야말로 그 악몽에서 솟아난 역사의 망령들을 천도(薦度)하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과거사 정리는 과거를 터는 과정을 거쳐 이루어진 대통합의 힘으로 미래로 함께 나아가기 위한 고통의 축제이기 때문이다.7

 

 

3. 용서로 가는 길

 

해방 직후 또는 건국 직후에 이루어졌어야 마땅한 친일문제의 처리를 지금 다시 거론할 때 유의점은 무엇인가? 최소의 배제를 통한 최대의 통합 즉 사회대통합에 목적을 둔다는 인식을 우리 모두 확인하고 공유하는 것이 핵심이다. 우선 강조하고 싶은 것은 반민특위의 형식을 반복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점이다. 이미 시시비비의 당사자들이 거의 사망했기 때문에 그들을 현실의 법정은 물론이고 역사의 법정에 세우는 것도 어렵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그렇다고 그 자손들을 호출할까? 모든 연좌제는 악이라는 점에서 이 역시 아니다.

그렇다고 친일행적에 대한 조사마저 그만두자는 얘기는 아니다. 조사는 철저히 이루어져야 한다.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정밀하게 거둬서 완벽한 목록을 만드는 집합적 노력이 요구된다. 문제는 그 목록작성 이후의 판정과정이다. 민족문학작가회의는 2002년 8월 14일 친일문인 42인의 명단을 발표했다. 중일전쟁(1937) 이후 해방까지, ‘내선일체의 황국신민화론’과 ‘대동아공영권의 전쟁동원론’을 주장한 글들을 친일문학으로 규정한 이 발표는 선정기준을 명백히 밝힘으로써 기존의 논의를 한걸음 진전시킨 것인데, 월북문인도 검토대상으로 삼은 점이 우선 주목된다. 이로써 우파문인들에게만 친일의 낙인을 찍는다는 일각의 비난을 회피할 수 있게 되었다. “일본어로 작품활동을 했거나 친일단체 참여, 창씨개명을 했다는 것 등은 친일 여부를 판단함에 있어 참고만 하였다”는 언술도 이 발표의 신뢰도를 높이는 데 적절히 기여하였다. 설령 일본어로 창작되어 ‘국책’매체에 발표되었다고 할지라도 그 글의 실상에 접근해 판정하려는 성실성으로 일부 작품 또는 문인 들이 친일의 굴레로부터 구원되었다.8 ‘암흑기의 문학’이란 모호한 용어로 친일문학의 존재 자체를 은폐하거나, 그러한 기도에 맞서 그 존재를 드러냄으로써 고발하거나 하는 과거와 달리, 그를 하나의 분석단위로 삼아 실상에 직핍하려는 최근의 논의는 그 동안 유기되었던 친일문학을 한국문학으로 영토화하는 고통의 입사식인지도 모른다. 이 지점에서 친일문학도 한국문학이라는 인식을 확인하고 싶다. 친일문학도 우리 문학의 어두운 얼굴의 하나라는 점에 유의하면서 쯔루미 슌스께(鶴見俊輔)의 말을 음미하자. “만일 우리들이 1931년에서 45년에 일본에서 일어난 전향 현상 전체에 배반이라는 호칭을 붙여서 악으로 간주해버린다면, 우리들은 오류 속에 있는 진리를 떠올릴 수 있는 기회를 잃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제가 전향 연구에 가치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 속에 포함되어 있는 진실이, 진실 속에 포함되어 있는 진실보다 우리들에게 소중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입니다.”9 글쓰는 일의 엄중함에 누구보다 예민한 식민지시대의 지식인 또는 문인 들이 집단적 주박(呪縛)상태에 지핀 그 참담한 진실의 내면을 천착함으로써 오늘의 나를 성찰하는 것은 친일문학 연구 최고의 보람이 아닐까?

그런데 문제는 계량적 판정이다. 친일문인 여부를 3편 이상의 발표글을 기준으로 삼았는데, 모든 계량화가 그렇듯 피상적이기 쉽다. 작가적 양심에 괴로워하면서 그럼에도 그런 종류의 글을 발표하지 않을 수 없는 곤경에 대한 연민으로부터 되도록 옹호적으로 독해하는 자세가 절실하다.10 물론 내적 곤경이 결여된 글까지 그리하자는 것은 아니다. 특히 친일파들이 해방후 자신 또는 조상을 항일로 변조하는 경우는 용서하기 어렵다.11 그런데 이런 예들 때문에 친일파 또는 친일문인 들의 목록을 확장하려는 유혹에 빠지는 것은 친일문제를 모더니티 일반으로 해소함으로써12 면죄부를 발행하는 것으로 귀결되는 탈민족주의적 경향만큼이나 위험할 수 있다.

요컨대 친일문인 42인의 명단은 재검토에 붙이는 것이 좋겠다. 친일에 나선 행위나 글의 수량보다는 신념 여부 또는 그 질이 친일문인 판정에 더욱 중요할 것인데, 명단 가운데는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경우가 적지 않다. 채만식(蔡萬植)은 대표적일 것이다. 그는 분명 일제말 친일행각에 글과 강연으로 가담했다. 이에 대해 김재용은 중국에서 왕 징웨이(汪精衛) 친일정권이 출범한 1940년 이후 채만식의 사상적 전환이 발생했다고 지적했고,13 한수영은 ‘신체제’의 진군 앞에서 맑스주의와의 “등가교환”이 이루어짐으로써, “어떤 주저와 동요도 없이 일관된 협력과 동의의 태도를 유지한다”고 분석한다.14 친일현상을 내재적으로 파악해 들어가는 이 새로운 접근으로 당대 식민지 지식인들이 겪은 내적 혼란의 실상이 드러난 점은 주목할 일이다. 생활세계의 혁명적 재편 속에 지식인들을 압도한 ‘신체제’의 현전에 무감각하다면 그 또한 일종의 직무유기라는 점에서 동요 자체를 비판할 필요는 없다. 사실 옥중에서 끝까지 전향을 거부한 공산주의자들보다 파시즘과 타협하면서 다른 길을 모색한 근대초극론자들이 지금 더 유효할 수 있다는 점을 상기하기 바란다. 그런데 과연 채만식에게 내면적 전향이 일어났을까? 그가 맑스주의를 절대적 진리의 위상에 두었다는 한수영의 지적을 나는 의심한다. 『태평천하』(1938)의 결말이 보여주듯이, 맑스주의자 종학은 오로지 풍문으로만 존재한다. 그는 말하자면 유령이다. 드디어 「치숙(痴叔)」(1938)에 살아있는 육체로 드러난 공산주의자는 얼마나 철부지인가? 맑스주의든 ‘신체제’든 소설가적 의심을 과도히 타고난 그에게 종교는 없다. 이러니 전자에서 후자로 개종하는 일도 없다. 그가 남긴 친일 글들을 읽어보면 ‘신체제’에 대한 전면적 수용이라는 지적에 일견 수긍하게 된다. 그런데 바로 이 점이 전향의 무발생을 반증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의 글에서 ‘신체제’는 어디까지나 외재적이다. 우리는 그가 ‘신체제’와 대결하는 내적 고투에까지 이르지 못했다고 비판할 수는 있어도, 그에 온몸으로 투항했다고 비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더구나 그는 해방 직후, 유일하게 자신의 친일을 고백함으로써 친일문제를 공론에 붙였다. 「역로(歷路)」(1946)와 「민족의 죄인」(1948)에서 거듭 제기했으나, 좌익도 우익도 중도파도 모두 묵살했다. 후자는 이 문제에 관한 가장 중요한 텍스트지만,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문제, 즉 “소위 군소급의 죄인들”15이란 명제가 제출된 전자도 못지 않다. 도마에 오른 ‘괴수’들의 구명행태도 희극적이거니와, 어제의 ‘협력’을 우정 망각한 채 건국운동에 더욱 매진하는 군소급 인사들의 변신을 유야무야 덮어두는 사회심리의 형성을 그는 충심으로 우려한다. ‘괴수’들에게 전가하려는 정치적 무의식의 자욱한 안개 속에서 그는 “일정한 형식을 통해서 공공연하게 작죄의 경위를 밝히구 죄에 상당한 증계를 받구 그래야만 떳떳하구 속두 후련한 법”(277면), 다시 말하면 청산의 절차가 자기구원이기도 하다는 점을 정확히 지적한 것이다. 이 관점에 서면 반민특위의 해체를 이승만정권 탓으로만 돌릴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묵은 상처를 덧내고 싶지 않은 광범한 군소급의 암묵이 해체를 소리없이 받치고 있었던 것이다.

해방 직후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무엇보다 먼저 우리가 그 혹독한 시대에 부재했다는 자각을 엄중히 가다듬을 필요가 있다. 시험받지 않은 몸으로 식민지시대를 통과한 누더기 몸들을 판단한다는 실존적 감각을 끊임없이 일깨움으로써 자기를 통과한 진실로 만드는 진정성이 요체다. 이 마음자리에 선다면 친일파의 불필요한 확장은 발생하지 않을 터인데, 나는 특히 ‘온건친일파’의 존재를 드러내고 싶다. 식민지 지배체제와 일정하게 타협하면서 식민지 민중 또는 시민의 이익을 그 한계 안에서나마 확보하려고 애쓴 「몽조(夢潮)」(1907)의 작가 반아(槃阿) 석진형(石鎭衡)은 대표적이다.16 반아보다 더 적극적이고 따라서 더욱 논쟁적인 예는 고우(古友) 최린(崔麟)일 것이다. 3·1운동(1919) 후 천도교 신파의 수령으로서 일제와의 비타협을 견지한 구파와 달리, 총독부와의 타협 아래 국내운동을 발전시킨 그는 결국 반민특위에 호출될 정도로 친일파로 낙인찍혔다. 일제에 대한 비타협을 관철한 구파의 수령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은 대단하다. 그런데 천도교 신파가 맑스주의와 함께 가장 탄탄한 운동조직을 마련한 바탕이 그 수령 고우의 친일행위라는 방패였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위창은 절(節)을 지켰으나 운동을 상실했고 고우는 훼절의 오명을 뒤집어썼으나 운동을 살렸다. 난문(難問)이다.

이 점에서도 친일문제를 개인별 적발 위주로 이끄는 것보다는 구조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합리적일 듯싶다. 이 문제를 개인적 차원으로만 환원하려는 욕망에서 일단 자유로워질 필요가 절실하다. 우리 근대성이 처한 곤경이라는 큰 문맥 안에서 ‘민족’의 무게를 감량하는 훈련을 통해 친일문제를 다시 파악함으로써 개별적 접근과 함께 기관들의 참회운동을 일으키는 것이 대안일 수 있다. 각 종교교단, 언론기관, 문인단체를 비롯한 각계각층에서 친일을 고백함으로써 용서로 가는 길을 예비하자는 것이다. 백낙청(白樂晴)이 토론에서 제기했듯이, 기관참회가 일종의 수사(修辭)로 떨어질 염려가 없지 않다. 그럼에도 친일을 완강히 부인하거나 또는 그 문제를 아예 괄호쳐버리는 기관들이 이 문제에 대해 공개적 사과를 표명하는 것은 그 진정성 여부를 떠나서 일단 큰 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추궁하는 측도 자세를 가다듬을 필요가 긴절하다. 일부를 들어 한 인간 또는 그 기관 전체를 친일로 몰규정하려는 유혹으로부터 놓여나 백지 반장의 차이도 분간하려는 미시적 자세가 요구된다. 우리가 이 문제에 대해 신중에 신중을 거듭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사실 더 근본적인 곳에 있다. “만약 누군가 용서할 권한이 있다면 그것은 피해자지, 제3의 기관이 아니다.”17 그런데 그 피해자는 십중팔구 이승에 없기 십상이다. 용서의 진정한 주체가 부재한다는 부조리한 상황에서 대리의 위기가 발생한다. 순수한 용서의 원천적 불가능성과 정치적 타협의 산물로서 주어지는 화해의 현실태 사이의 그 무시무시한 간극을 묵상하는 윤리적 주저 없는 청산론과 변호론의 대립이란 어쩌면 헛것인지도 모른다.

악령처럼 따라붙는 친일귀신으로부터 놓여나는 근본적 길은, 용서와 화해를 바탕으로 동아시아와 함께 21세기를 여는 그 근사한 작업에 한국이 동참하는 데 있을 터인데, 판정 또는 해결을 서두르지 말고 진실의 다른 측면을 사유함으로써 인간과 문학에 대한 더욱 깊은 이해로 인도하는 연옥(煉獄)의 토론이 당분간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 토론과정의 어느 순간에 매듭의 때는 찾아올 것이다. 끝없는 유예 속에 친일의 멍에로부터 놓여나지 못하는 고통의 무한지속에 한계를 짓는다는 점에서도 매듭짓기는 용서의 다른 이름일 수 있을 것인데, 지리한 지연을 오히려 우리 사회를 새롭게 갱신할 성숙한 매듭의 계기로 삼는다면 더없이 좋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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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유종호 「안개 속의 길」, 『문학과사회』 2005년 겨울호, 348면.
  2. 유재건은 포럼의 토론에서 반민특위의 해체를 중화인민공화국의 출현과 관련짓는 데 대해 의문을 표명하면서 1949년 6월 6일, 경찰의 습격으로 이미 반민특위가 기능을 상실했음을 지적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특위의 공식해체에는 중국혁명의 성공이라는 외재적 요인이 가세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실제로 이승만은 마오의 승리에 큰 충격을 받아 반공통일전선을 겨냥한 태평양동맹의 결성을 다시 추진한바, 이 구도 속에서 1950년 2월 16일 일본을 방문하면서 기존의 대일 강경자세를 누그러뜨리고 한일간 과거사문제의 전향적 해결이라는 올리브가지를 쳐들었던 것이다(이에 대해서는 박진희 「이승만의 대일인식과 태평양동맹 구상」, 『역사비평』 2006년 가을호, 102~5면).
  3. 반공을 내세운 남한 역대 독재정권들이 바로 그 ‘공산정권들’과 상호의존적이라는 점은 매우 시사적이다. 이 적대적 공존은 부활한 남한 친일파와 북방에 출현한 사회주의정권들 사이에서도 성립한다.
  4. 나찌의 프랑스 점령이 나찌가 통할한 직접 지배지역과 비시정권이 관할한 간접 지배지역으로 분할되어 있었다는 점은 저항운동의 가능성을 그만큼 증대시키는 요인이다. 괴뢰내각일망정 토착정권이 존재했던 통감부시대(1905~10)에 합법적·비합법적 국권회복운동이 고조되었던 것과는 달리, 이완용 정권마저 붕괴한 총독부시대, 특히 초기의 무단통치시대에 국내운동은 일단 거의 절멸하게 된다는 점을 상기하기 바란다.
  5. 유진현 「프랑스의 과거사 청산과 모리악—카뮈 논쟁」, 『본질과현상』 2006년 봄호, 158~61면.
  6. Jacques Derrida, On Cosmopolitanism and Forgiveness, trans. by Mark Dooley and Michael Hughes, Routledge 2001, 40면.
  7. 졸고 「‘국민통합’이 목적이다」, 『동아일보』 월요포럼 2004.8.30.
  8. 이 작업을 주도한 김재용(金在湧)의 『협력과 저항: 일제말 사회와 문학』(소명출판 2004)은 그 대표적 업적이다.
  9. 쯔루미 슌스께 『전향』(논형 2005), 최영호 옮김, 35면.
  10. 유종호는 친일시로 분류된 정지용의 「異土」(1942)와 이용악의 「길」(1942)을 곤경에 유의해 옹호적으로 독해하면서 친일문학 판정에서 경직성의 회피를 제기한다. 「친일시에 대한 소견」, 『시인세계』2006년 봄호, 28~34면.
  11. 졸고 「한국문학의 근대성을 다시 생각한다」(1994), 『생산적 대화를 위하여』(창작과비평사 1997), 29~31면.
  12. 한수영 『친일문학의 재인식』(소명 2005), 7~8면.
  13. 김재용, 앞의 책 99~114면.
  14. 한수영, 앞의 책 55~76면.
  15. 『채만식전집 8』(창작과비평사 1989), 275면.
  16. 졸고 「반아 석진형의 몽조」(1997), 『한국계몽주의문학사론』(소명 2002), 295면.
  17. J. Derrida, 앞의 책 4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