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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과 현장

 

지구온난화의 파국은 얼마나 가까이에?

 

 

빌 매키븐 Bill McKibben

환경문제 전문 저술가. 그의 저서 『자연의 종말』(The End of Nature)은 일반독자를 대상으로 지구온난화를 다룬 최초의 책이다. 본지 2005년 겨울호에 「카트리나 이후의 미국」을 기고한 바 있다. ⓒ Bill McKibben 2006 / 한국어판 ⓒ (주)창비 2006

* 이 글은 The New York Review of Books(2006.11.16)에 수록된 “How Close to Catastrophe?”를 번역한 것으로, 다음 책들에 관한 서평 형식의 글이다. James Lovelock, The Revenge of Gaia, Basic Books 2006; Kelly Sims Gallagher, China Shifts Gears, MIT Press 2006; Travis Bradford, Solar Revolution, MIT Press 2006; Alex Steffen ed., WorldChanging, Abrams 2006; Architecture for Humanity ed., Design Like You Give a Damn, Metropolis 2006—편집자.

 

 

임박한 대재난

 

제임스 러블록(James Lovelock)은 지구상에서 가장 흥미롭고 생산적인 과학자 중 하나다. 그가 소량의 화학물질까지 감지할 수 있는 전자포착장치를 고안해낸 덕에 과학자들은 DDT가 조류의 알껍질에 미치는 위험을 인식하고 염화불화탄소(CFC, 탄소·수소·염소·불소로 이루어진 유기화합물로 ‘프레온’이라는 상품명으로 알려져 있다—옮긴이)가 어떻게 오존층을 파괴하는지 알아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가 유명해진 것은 이 때문이 아니라 하나의 은유, 즉 지구를 스스로 안정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단일한 유기체—러블록은 여기에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대지의 여신 가이아(Gaia)의 이름을 붙였다—로 간주하는 것이 유용하리라는 발상을 내놓은 덕택이었다.

사실 그가 제안한 소위 가이아 가설은 처음에는 그다지 분명치 않았다. 그는 “그 개념이 나오고 처음 10년 동안은 가이아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나를 포함해 거의 없었던 듯하다”고 썼다. 그러나 이제 그 가설은 하나의 이론이 되었고, 다른 과학자들이 아직 완전히 받아들인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조롱거리가 되진 않는다. 그 이론에 따르면 지구는 “자기조절체계이며 유기체들, 지표면의 암석들, 대양, 대기가 하나의 진화하는 체계로서 긴밀하게 연관된 총체로 구성되어 있으며 언제나 현재의 생명체에 가능한 한 적합하도록 지표면의 상태를 조절하려고 한다.”

초기의 뉴에이지 가이아 추종자들이 애용한 지구의 의식과 의지의 문제는 일단 제쳐두고, 이 이론은 태양이 그 자체의 항성진화(恒星進化) 때문에 상당히 뜨거워졌는데도 어떻게 지구가 수십억년간 계속해서 생명체에 대해 쾌적한 상태를 유지해올 수 있었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빙하기, 해양조류, 암석풍화 등 일련의 과정을 통해 지구는 대기중에 열을 가두는 이산화탄소의 양을 상대적으로 안정된 수준으로 유지함으로써 기온 역시 상대적으로 안정된 수준으로 유지해왔다.

이런 항상성은 우리가 화석연료를 단기간에 흥청망청 써버려 대기중에 엄청난 양의 이산화탄소를 방출한 탓에 지금 교란되고 있다. 실제 러블록은 내가 아는 어떤 유능한 관측자보다도 더 암울한 예측을 내놓았다. 그는 우리가 이미 지구를 벼랑 너머로 밀어버렸고, 이제 곧 기온이 눈에 띄게 급속히 상승하여 현재 통용되는 컴퓨터 모델 대부분이 제시하는 음울한 예측 수준을 훌쩍 넘어설 것으로 보고 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지구가 스스로의 열을 내리려고 이미 애쓰는 단계이기 때문에 추가적인 열 증가는 특히 위험하다는 것이다. 그는 곧 다음과 같은 여러 현상들이 중첩되리라 예상한다. 계속 더워지는 바닷물에서 해양조류가 죽어감에 따라 이 작은 식물이 대기에서 탄소를 제거하는 비율이 감소할 것이다. 기온이 올라감에 따라 증발률이 커지면서 열대림이 사라질 것이다. 태양광선을 반사해 우주 밖으로 돌려보내는 백색의 얼음이 사라지고 푸른색의 바다 혹은 고위도상의 진녹색 아한대림이 태양광선을 흡수함으로써 지구의 ‘알베도’(albedo), 즉 반사율에 급격한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얼어붙은 북극이나 바다 밑 얼음결정체에 갇혀 있던 메탄이 상당량 방출될 텐데 메탄은 그 자체가 온실가스이다.

열거한 과정 중 일부만으로도 지구가 균형을 잃고 파괴적으로 뜨거워지기에 충분하며, 수십년 안에 우리가 사는 온대지역은 기온이 섭씨 8도가량 상승하면서 다시 그 열로 인해 수많은 지역에서 기존과 같은 삶은 불가능해질 것이라고 러블록은 추정하고 있다. 실제로 이 책(The Revenge of Gaia—옮긴이)의 화보란에 실린 붉은 사막 사진에는 “현재의 화성, 그리고 지구가 종국에 다다르게 될 모습”이라는 간단한 설명이 붙어 있다. 무모한 종인 인류가 완전히 멸종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저서 홍보여행 중 가진 인터뷰에서 러블록은 유능한 지도자가 현재의 북극 근처에 새로운 거주지를 마련해준다면 약 2백만명, 즉 현재 세계인구의 약 30분의 1은 생존하리라고 내다보았다. 이외에도 비록 해수면이 상승하면서 점점 더 군도(群島)에 가까워지긴 하겠지만 영국제도(the British Isles)처럼 생존가능한 지역들이 남을 수도 있다. 어쨌든 그는 “헤아릴 수도 없는 수십억의 사람들”이 사멸할 것이라고 예상한다.

 

 

너무 늦지 않았는가

 

여든이 넘은 러블록은 이같은 예측이 현재 활발하게 활동하는 기후학 전문가 집단에서 심층검토를 거쳐 내놓는 것보다 더 암울하며 어떤 의미로는 일종의 육감에서 나온 것임을 시인한다. 러블록 자신이 언제나 솔직히 인정하듯, 그는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실수를 저질러온 바 있으므로 그의 예측에는 다소 회의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비록 CFC의 위험을 인식하는 데 필요한 장치를 고안하긴 했지만, 동시에 그 위험이 심각한 피해를 주진 않는다면서 태평스레 그 문제를 무시해버리기도 했다. 미국의 화학자 셰리 롤런드(Sherry Rowland)와 마리오 몰리나(Mario Molina)는 안심해도 된다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 오존층 파괴에 대한 선구적인 연구를 수행하여 노벨상을 받았고, CFC 감소를 위한 국제적 합의를 이끌어냄으로써 오존층의 구멍이 너무 커져 자외선 방사능에 과다 노출된 상당수의 생명이 멸절되기 전에 지구가 복구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다. 러블록은 또한 기온상승을 유발하는 순환체계의 범위와 심각한 스트레스 탓에 평형을 잃을 지경에 이르렀다고 스스로 평가하는 지구의 취약성이 틀에 박힌 예측들에서는 대개 과소평가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기는 그들과는 다르다고 설명하면서도, 갑작스런 온난화에 대한 자신의 가설을 뒷받침할 분명한 메커니즘을 밝혀내는 데는 실패했다. 그리고 이 말도 덧붙여야겠는데, 그의 짧은 책을 읽다보면 엉뚱한 부분들도 눈에 띈다. 이를테면 음식물에 들어간 질산염의 안전성에 대한 얘기를 하며 곁길로 샌 부분들이 있는데 이는 전체적인 기획의도에 잘 부합하지 않을뿐더러 학문적 엄밀성에 대한 의구심만 불러일으킨다.

그러고 보니 지구상에는 지구가 하나의 전체로서 어떻게 작동하는가에 대해 러블록 같은 직감을 지닌 사람이 아주 극소수이거나 아예 없는 듯하다. 가이아에 관한 러블록의 번득이는 통찰은 많은 보통 과학자들이 애써 서서히 밝혀온 체계들 사이에 존재하는 상당수의 상호연관을 조명해준다. 더욱이 온실효과를 연구하는 과학이 출현한 지난 20년 동안 물질세계에 미친 온난화의 영향 대부분은 사실 처음 예견되었던 것보다 훨씬 무시무시하다. 『싸이언스』(Science)와 『네이처』(Nature)의 정기독자는 거의 매주 한짐의 종말론적인 정보를 접하게 되는데 실제로 이러한 정보들은 기후모델들이 예측한 범위의 최상단 끝에 이른, 혹은 그 범위들 전체를 한참 넘어선 결과를 보여준다. 몇년 전의 기존 모델과 비교하면 얼음은 더 빨리 녹고, 숲의 토양은 더워지면서 더 많은 탄소를 배출하며 폭풍은 그 수와 규모에 있어서 훨씬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컴퓨터 스크린 하단에는 새로운 연구결과를 전하는 뉴스가 지나간다. 시베리아의 영구동토층의 메탄이 예상보다 5배나 빠른 비율로 방출되고 있다는 것이다. 메탄은 이산화탄소보다 훨씬 강력한 온실가스이므로 애초의 예상만 해도 심각할 정도로 나쁜데 말이다.

이렇게 빠르게 변화하는 과학적 난제 속에서, 지난 10년간 세계의 소중한 길잡이 구실을 해온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위원회’(IPCC)는 이제 새로운 정보에 뒤처질 위험에 직면해 있다. 위원회는 지난 보고서 이후 기후학자들이 새롭게 발견한 사실들을 요약해 내년에 새 보고서를 발간할 예정이다. 그러나 다소 처리가 버거운 절차들 때문에 러블록이 느낀 것과 같은 두려움을 적절히 구체화하거나, 아니면 지구 최고의 기후학자인 나사(NASA)의 제임스 한쎈(James Hansen)이 지난 12개월 동안 내놓은 훨씬 더 주류적인 예측마저 충분히 검토해 넣는 일은 없을 것 같다.

한쎈은 러블록만큼 비관적이지는 않다. 비록 최근에 지구가 지난 1백만년을 통틀어 가장 뜨거운 상태에 근접해 있다는 견해를 표명하긴 했지만, 그는 우리가 경계를 넘어 ‘다른 지구’를 만들어내기 전에 2015년까지 대기에 유입되는 탄소의 흐름을 역전시키면 된다고 말한 바 있다. 한쎈이 작년 12월 이런 경고를 했을 때는 우리에게 그 과정을 변화시킬 여유가 10년 있었으나 이제 곧 9년밖에 남지 않게 되는데, 그사이 우리가 온실가스 방출을 줄이기 위한 전면적인 노력에 돌입한 증거는 아무것도 없으므로 한쎈과 러블록의 차이는 단지 이론적인 것일 뿐이다(아무튼 10년의 여유는 있다고 말해주는 친구를 응원하는 게 작은 위안이라면 위안이겠다).

놀라운 것은 심지어 앨 고어(Al Gore)의 섬세하지만 공포스러운 영화 「불편한 진실」(An Inconvenient Truth)조차 이제 이 문제에 관해 빠르게 변화하는 과학이 내놓는 최첨단 정보를 놓고 보면 뒤떨어져 있다는 점이다. 지구온난화가 정말 문제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세상이 천천히 깨어나고 입법부들(우리 미국의 입법부는 아니지만)이 조심스럽게 입질을 해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문명을 파괴할 만한 커다란 파도가 일어나고 있으며, 그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대체 무엇인지가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진짜 문제임을 가슴 깊이 이해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원자력발전이라는 대안?

 

결국 러블록은 지구온난화의 영향을 누그러뜨리기 위한 해결책의 문제로 향하는데, 많은 일을 하기에는 너무 늦었다고 다른 곳에서 주장한 것에 비춰보면 다소 뜻밖이다. 그의 처방은 단호하고 도발적이다. 그는 재생가능 에너지와 에너지절약은 그 피해를 막기에 너무 더디며 원자력발전소를 건설하는 대규모 계획만이 최상의, 그리고 정말이지 유일하고 진정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에너지를 집약적으로 소비하며 화석연료의 에너지를 기반으로 돌아가는 문명을 붕괴시키지 않으면서 에너지 공급을 끊기란 불가능하다. 에너지 공급을 어느정도 유지하면서 하강하는 연착륙이 필요하다”고 그는 적고 있다. 그런데 그 에너지를 풍력이나 태양에너지로는 금방 필요한 만큼 얻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 종말을 고하는 조종이 울리기 시작한 지금도 우리는 지속가능한 발전과 재생가능 에너지에 대해 떠들고 있다. 마치 가이아가 이 미약한 제물을 적절하고도 무리없는 희생으로 받아들여주기나 할 듯이 말이다.” 그 대신, “새로운 원자력발전소 건설이 즉시 착수되어야 한다.”

이 터무니없는 수사법으로 러블록이 우리에게 베푼 호의가 있기는 하다. 그것은 적어도 새로운 원자력발전소 못지않게 새로운 석탄발전소도 두려워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원자력발전소가 (러블록이 설득력있게 주장하듯 실제보다 우리 머릿속에서 더 크게 부각되어 보이는) 어떤 분명한 위험을 수반하기는 한다. 반면에 석탄발전소가 생기면 그 배출물이 지구의 물리적 체계의 안정을 흐트러뜨릴 것은 절대적으로 확실하다. 비탄소 에너지의 모든 잠재적 원천은 재난에 가까운 미래를 막는 데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공정하게 연구되어야 한다. 그러나 러블록은 또한 특별변론이나 다름없는 말로 자신의 주장을 허문다. 그 스스로 말했듯, 그는 자신이 사는 데본(Devon) 지방이 풍차로 넘쳐나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풍력발전에 적대적인데, 그는 낸터킷 싸운드 해안에 풍력발전소를 짓는 것에 저항하는 케이프코드 행락객이나(미국 동부해안의 풍력발전 프로젝트에 대해 경관파괴와 지역 자산가치 감소를 이유로 반대하는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옮긴이)자기 마을의 높은 능선에 커다란 터빈들이 점점이 박혀 있는 모습을 보고 싶어하지 않는 버몬트 주민들과 같은 부류이다. “내 뒷마당에는 안돼”(Not In My Back Yard)라는 구절의 약자를 지칭하며 “어쩌면 우리는 님비(NIMBY)인지도 모르겠다”고 그는 적고 있다.

“그러나 (풍력발전을 밀어붙이는) 그런 도시 정치가들은 마치 히포크라테스의 선서를 망각한 채, 치료될 희망은 없고 의료행위 자체가 삶의 마지막을 견딜 수 없게 만들 뿐인 쓸모없고 부적절한 요법으로 죽어가는 문명을 살리려 애쓰는 생각없는 의사들과 같다.”

이런 혐오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러블록이 인정하듯 이것은 미학 이상의 무엇인가에 기초해야 할 텐데 여기에 그 혐오의 근거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덴마크에서 풍력발전이 만병통치약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환멸을 느끼는 덴마크인 두어명을 인용한다. 그리고 영국이 자기 필요를 충족시키려면 5만 4천대의 거대한 풍력발전기가 필요할 것이라고 말한다. 마치 그 숫자만 대면 금방 논의가 마무리되기라도 할 것처럼 말이다(이 책에는 적절한 주가 달려 있지 않아 출처를 점검하는 일이 고역이다). 그러나 사실 독일은 매년 2천대를 추가해 이제 총 2만대에 육박하는 풍력발전기를 보유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시골 곳곳에 발전기가 서 있는 광경에 반대하지만 다른 사람은 매혹된다. 풍력에 대한 견해가 어떻든간에 원자력발전소를 건설한다는 단기속성 계획이 말이 되는지는 전혀 분명치 않다. 내가 보아온 경제모델링들은 대부분 원자로 건설예산을 (예컨대 동력사용 절감을 위해 공장을 개조하는 회사들에 보조금을 지원하는 것처럼) 적극적인 에너지절약 계획에 투자하면 탄소 배출을 줄인 데서 오는 이득이 훨씬 더 크리라는 점을 지적한다. 물론 이것으로 논쟁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분명 새로운 에너지자원을 필요로 하게 될 것이고 프랑스가 원자력을 통해 전기의 4분의 3을 성공적으로 생산해낸 예를 보면 이것이 여러 가능성들 중의 하나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는 한쎈이 최근 주장한 바이기도 하다. 그러나 풍력에 반대하는 러블록의 주장에서는 설득력을 찾기 힘들다.

 

 

태양에너지의 새로운 가능성

 

훨씬 심도깊은 연구를 거친 한층 희망찬 정보가 투자은행가 트래비스 브래드포드(Travis Bradford)에게서 나온다. MIT출판부에서 갓 출간된 그의 첫 저서 『태양의 혁명』(Solar Revolution)은 우리가 동력을 찾아 곧 태양전지판으로 향하리라는 주장을 꽤 길고 상세하게 서술한다. 이는 부분적으로는 환경상의 이유 때문이지만 더 크게는 여느 에너지자원보다 비싸지 않으면서 설치하기는 훨씬 쉽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전기의 원천으로서 비용대비 효과면에서 보자면 태양에너지가 풍력보다 10년 이상 뒤처진다는 게 환경론자들의 일반적인 견해인 상황에서 이것은 꽤 놀라운 주장이지만 그는 수긍이 가는 방식으로 자기의 주장을 펼친다.

‘세계감시연구소’(Worldwatch Institute)의 재닛 싸윈(Janet Sawin)에 따르면, 지난 10년 동안 일본은 주택 소유주가 지붕에 태양전지판을 구입하여 설치할 경우 거액의 보조금을 지급해왔다. 브래드포드가 제시하듯, 일본당국이 이러한 지원책을 시작한 것은 부분적으로는 지구온난화에 대한 쿄오또회의, 즉 자신의 땅에서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지만, 동시에 초기 투자로 장려되기만 한다면 이 산업에 성장가능성이 있음을 감지했기 때문이었다. 몇년 후 그 보조금은 기대한 효과를 낳았다. 수요가 늘어나면서 제조와 설치 모두 훨씬 능률화되어 가격이 떨어진 것이다. 오늘날 정부보조금은 거의 없어졌지만 수요는 계속 증가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제는 집주인이 국가의 대규모 공익사업체가 매기는 것과 같은 비용으로 자기가 필요한 전기를 생산해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 일본은 특별한 경우다. 국내에 에너지원이 거의 없는 탓에 전세계에서 가장 비싼 전기를 쓰게 된 것이 오히려 축복이 되어 태양전지판의 경쟁력이 높아진 것이다. 그렇다고 일본이 일조량이 많은 편도 아니다. 어쨌든 브래드포드에 따르면 일본의 태양에너지 수요(이제 독일에도 같은 종류의 대규모 프로그램이 있다)는 태양전지판의 생산비용을 꾸준히 하락시킬 것이다. 그가 애가 탈 정도로 가까이 와 있다고 말하는 커다란 기술적 발전 없이도 현재의 하드웨어는 앞으로 더 싸게 만들어질 수 있다. 브래드포드는 이 산업이 앞으로 40년간 매년 20〜30% 성장할 것으로 예상하는데 이는 씰리콘에 기반한 혁명, 즉 반도체산업에서 벌어졌던 현상과 유사하다. 누가 그 산업을 소유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있어서도 이변은 없다. 이제 태양전지 공장 대부분은 일본과 독일에 있다.

이런 변화의 징후는 벌써 감지되고 있다. 내가 올여름 티벳에 갔을 때, 세상에서 가장 먼 (그리고 높은) 계곡에서 살아가는 유목민 목동들의 야크가죽 텐트가 수시로 발끝에 채이다시피 했다. 그들은 야크의 배설물을 이용해 음식을 요리하고 텐트 안을 덥혔으며 또한 전구에 불을 켜거나 라디오를 켜는 것은 텐트 한쪽에 걸린 작은 태양전지판을 이용했다. 작은 마을일지라도 대략 양 한마리에 해당하는 가격으로 태양전지판을 파는 가게가 꼭 있었다. 태양에너지는 앞으로도 전선망이 들어올 것 같지 않은 이런 지역들에서 분명히 의미가 있다. 다른 한편 태양전기 기와 같은 새로운 기술 덕에 태양에너지 설비를 갖추는 비용이 감소하면서 교외지역 개발에서도 점차 설득력을 얻고 있다. 어쨌든 그런 기와의 가격은 정부보조를 받는 장기저리융자의 작은 부분일 것이다.

이런 씨스템은 대개 기존의 전력계통망에 연결된다. 해가 날 때면 버몬트의 우리 집 지붕꼭대기는 작은 발전소로 기능하면서 전선으로 전력을 흘려보낸다. 밤에는 나 역시 다른 이들처럼 전기를 사서 쓴다. 연중 해가 많이 나는 달에는 집에서 사용하는 전력과 발전해내는 전력의 양이 거의 같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이를테면 값싼 석탄을 땜으로써 발생하는 환경파괴 비용이 그 결과물인 전기의 가격에 반영된다면, 경제적으로 더 의미있을 것이다. 부시(George W. Bush)가 대통령자리에서 물러나고 나면 그렇게 될 것이 거의 확실해 보인다. 양당의 그럴듯한 대통령후보 모두 석탄 사용에 일정한 한계를 부과하는 데 찬성하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다른 선진국에서는 이미 법규화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러블록, 한쎈을 비롯한 여타 과학조직의 증언이 분명히 하듯 태양에너지로 신속히 전환하기 위해 대규모 정부자금을 사용하는 것이 현명한 투자, 정말이지 가능한 가장 현명한 투자일 것이다. 그 자금은 어디서 와야 하는가? 유력한 후보 가운데 하나는 지금 기후변화보다 훨씬 덜 위협적인 위험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는 데 쓰이는 국방부 예산이다.

 

 

우리의 일상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그러나 태양에너지가 광범하게 도입된다 해도 지구온난화의 위협을 없애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가 처한 곤경에서 헤어나오려면 그보다 더 광범위하고 고통스러운 경제적 전환이 필요하다. 일부 과학자들의 예측에 따르면 현재처럼 행성이 녹아내리는 지경에서는 기후변화를 안정시키는 데만도 화석연료 사용의 70%를 즉각 줄이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절박한 현시점에서 이러한 절감 노력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것은 중국과 인도가 경제적으로 성장하면서 엄청난 양의 화석연료를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물론 이 두 나라의 소비량은 인구 한명당 에너지소비량이 중국인의 평균 8배에 달하는 미국에는 못 미치지만 그럼에도 상대적으로 심각한 정도라고 할 수 있다.

기후정책에 가장 정통한 분석가 중 하나인 켈리 씸즈 갤러거(Kelly Sims Gallagher)는 지난 수년간 중국의 에너지전환을 연구해왔다. 현재 하바드대 케네디스쿨의 ‘에너지기술 혁신계획’의 관리자인 그녀는 얼마 전 중국 자동차산업의 성장을 설명하는 아주 흥미로운 책(China Shifts Gears—옮긴이)을 출간했다. 그녀의 연구가 분명히 보여주듯 미국의 산업계와 정부 모두 연료를 많이 잡아먹는 기술에 중독된 우리에게서 중국의 눈을 돌려놓으려 한 적이 거의 없다. 실제로 디트로이트(그리고 유럽과 일본의 경우는 조금 덜하지만)에서는 아무런 불만 없이 수십년 된 설비와 공정들을 쓰고 있다. 그녀는 “심지어 더 깨끗한 대안기술이 미국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더러운 자동차기술이 중국에 이전되었다”고 쓰고 있다. 그 결과의 하나는 중국의 도시를 질식시키는 스모그이며 또다른 결과는 눈에 보이지는 않으나 날로 증가하는 온실가스 구름인데, 이것은 자동차의 배기통에서도 나오지만 중국 전역에 솟아난 석탄 연소설비에서 훨씬 더 많이 나온다. 훗날 역사가들이 내릴 법한 결론은 부시행정부의 가장 큰 환경적 실패는 미국에서 화석연료 사용을 줄이기 위해 한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아니라, 중국 경제구조의 변화를 위해 지원하거나 압력을 가하는 일이 결정적이었을 때 한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점일 것이다.

‘세상바꾸기’(WorldChanging)라는 웹싸이트의 활기찬 주인들이 새로 펴낸 동명의 책에서 집중적으로 검토하는 것이 바로 이런 문제, 즉 우리의 일상적인 삶을 어떻게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들의 웹싸이트(www.worldchanging.com)는 상당히 전문적이고 흥미로우며 환경론자들을 위해 새로운 기술이나 기법을 거의 매일 소개하고 있으니 웹브라우저에 즐겨찾기를 해두면 좋을 것이다. 지난 수년간에 걸친 작업을 축적한 그들의 책은 히피의 성서였던 『지구백과』(The Whole Earth Catalog)를 ‘아이팟’(iPod, 최신 mp3플레이어—옮긴이) 세대를 위해 재정비한 것이나 다름없다. 수천개의 신선한 아이디어를 엿볼 수 있는 볼거리들을 짧게 열거하자면, 슬로우푸드(slow food, 패스트푸드에 반대되는 음식—옮긴이), 도시농업, 수소자동차, 트럭 방수천을 재생하여 만든 가방, 순간분해 휴대전화(제품의 원활한 재활용을 위해 분해에 걸리는 시간을 단축한 휴대전화—옮긴이), ‘플라이부’(plyboo) 즉 빨리 자라는 대나무로 만든 합판 등이 있다. 다음과 같은 수백가지의 ‘○○하는 법’이라는 길잡이도 있다. 자신의 컴퓨터 회로기판에 식각(蝕刻)하는 법(산으로 부식시켜 만드는 기존의 회로기판 제작보다 쓰레기를 줄이는 방법—옮긴이), 연비를 극대화하기 위해 하이브리드 차(전기모터와 휘발유 엔진을 함께 사용하는 차—옮긴이)를 길들이는 법, 공공장소에서 낯선 사람들이 잠깐 모이는 스마트몹(Smart mob)을 조직하는 법 등등.

‘세상바꾸기’는 국제부채탕감을 지지하기 위해 누구에게 문자메씨지를 보내야 할지, 또 구취제거제 용기로 아이팟 스피커를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알려준다. 이 책에는 젊은 세대의 환경운동가들이 갖추어야 할 모든 것의 일람표로서 창조성, 디지털 민첩성, 네트워크 구축능력, 미래에 대한 인터넷시대의 낙관주의, 환경문제뿐만 아니라 인권, 빈곤, 사회정의와 연관된 문제들에 대한 깊은 관심이 실려 있다. 이 책의 실용주의는 상큼하다. “우리는 할 수 있다”가 지속적인 메씨지이며, 불확실한 미래로 가면서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결코 명민함이 아님을 의심의 여지없이 보여주는 예들이 충분히 있다. “앞으로 25년 내에 우리는 이전에 결코 이루어진 바 없는 무엇인가를 해야 할 것이다. 우리 문명의 전체적인 물적 토대를 의식적으로 재구상할 필요가 있다”고 알렉스 스테핀(Alex Steffen)은 편집자 서문에 적고 있다.

“우리가 전례없는 지구의 위기를 마주하고 있다면, 동시에 우리 자신이 종전과는 다른 혁신의 순간에 놓여 있음도 알고 있다. (…) 우리는 세상을 개선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의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 말이 맞다.

‘세상바꾸기’의 방법론에 한가지 흠이 있다면, 그것은 정부가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전반적으로 불신하는 점이 아닌가 싶다. ‘세상바꾸기’ 기획에는 어딘지 씰리콘밸리의 분위기가 난다. 그들은 여러해에 걸쳐 『와이어드』(Wired)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왔는데, 이 잡지는 ‘디지털 엘리뜨’(digerati)의 성경이자 『월스트리트저널』처럼 정부의 간섭과 규제에 대해 편집증적인 반응을 보이는 출판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인터넷 사업가들처럼 그들은 정부의 의도와 능력을 불신한다. 관료라는 사람들이 혁신할 만큼 대담하지도 똑똑하지도 않은 부류에서 배출되는 경향이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또한 그들에게선 자유주의자적인 기질이 넘친다. “옳은 일을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방식으로 우리의 개인적 삶을 재구상할 때, 녹색은 빛날 수 있으며 세상바꾸기는 삶바꾸기일 수 있다는 신념을 우리는 한몸이 되어 발산하게 된다”고 스테핀은 적고 있다. 나는 이러한 생각에 공감한다. 그런 한편 미래에 강력하고 생존가능한 공동체를 건설하려면 우리에게는 더 지역적이고 더 재치있는 의사결정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좋은 아이디어가 넘쳐나도 정부의 지원과 투자를 장려하는 체계가 없을 경우 실현되지 못할 가능성이 큰 이런 지면들을 읽다보면, 생각만큼 낙관적이 되기가 힘들어지는 것도 사실이다.

 

 

생태재앙에 맞서는 공동체적 노력들

 

이런 헛된 노력의 일단을 ‘인간을 위한 건축’(Architecture for Humanity)이라는 비영리단체에서 새로 펴낸 『내키는 대로 디자인하라』(Design Like You Give a Damn)를 통해 자세히 볼 수 있다. 이 책은 모든 의미에서 멋지다. 이 단체는 새로운 피난처를 찾아나선 난민들을 후원하면서 출범했는데, 텐트 대신 사람들이 생각해낸 일련의 대체물들을 보면 지금 얼마나 많은 재능이 ‘맥맨션’(McMansion, 1980년대부터 널리 지어진 규격화된 저택을 가리키는 속어적 표현. 천편일률적인 구조와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맥도널드와 유사하다는 의미에서 붙은 이름—옮긴이)을 디자인하느라 낭비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대마로 만든 풍선식 돔형 건물, 판지로 만든 별채,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고 가장 큰 재난에 대비하는 다수의 디자인과 견본 들을 볼 수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단체는 동력을 자체생산하는 건강진료소, 공동체에서 충분히 세울 수 있을 정도로 저렴한 학교 등과 같이 전세계에 있는 매력적인 건물들의 사진과 계획 들도 수집했다. 하지만 전체 계획을 살펴볼 때 서글픈 것은 그 건축가들이 정치에 어둡고 영향력도 부족하여 구호기관이나 정부로 하여금 자신들의 계획을 채택토록 하지 못한 탓에 대부분이 결코 실행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재난이 생기면 구호기관들은 아직도 텐트를 꺼내 운반한다.

여기에 무엇이 빠져 있는지 또다른 방식으로 말해보자. 우리에게 더 나은 미래를 가져다주리라 생각되는 발상들 대부분은 화석연료의 가격이 더 높다면 훨씬 쉽게 이뤄질 것이다. 탄소방출에 일종의 세금을 부과해 석탄, 석유, 가스의 가격이 환경비용을 온전히 반영하도록 만든다면 말이다(고어는 지난달 뉴욕대학에서 행한 중요한 연설에서 모든 근로소득세를 해체하고 그 대신 탄소에 세금을 부과하자고 제안했다). 만일 그날이 온다면, 적어도 그날은 쿄오또의정서 등에서 제시된 그런 날일 텐데, 태양전지판에서 풍차, 안전한 원자력발전소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훨씬 더 쉽게 퍼져나갈 것이고 보이지 않는 손은 현재 성취하고 있는 것보다도 더 흥미로운 작업에 자유로이 나설 것이다. 그러면 아마도 그것은 러블록의 악몽을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속도로 작용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오직 각 지역과 국가, 그리고 국제기구를 대표하는 사람들이 이를 실현하기 위해 한자리에 모이고, 또 이것이 다시 정치적 실천에 대한 요구로 이어질 때만이 이뤄질 수 있다.

캘리포니아 주지사 아놀드 슈워제네거가 최근 선거에 쫓겨 환경변화에 대한 일련의 광범한 조치들을 수용하기로 결정한 사실은 그같은 정치적 실천이 가능함을 알려준다. 대륙의 다른 쪽에서는 버몬트를 가로질러간 노동절 행진이 가장 우파적인 주의 연방후보자들마저 설득해 지구온난화에 대항하는 야심찬 계획을 승인하도록 하는 데 기여했다. 그 행진의 최종집회에는 고작 천명이 모였는데 아마도 미국 역사상 지구온난화에 저항하는 시위 중 가장 큰 규모였을 것이다. 딱한 일이지만, 그래도 진정한 변화를 향한 노력을 시작하는 데 실제로 필요한 사람은 얼마나 적은지를 보여준다.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기술은 공동체의 기술, 즉 어떤 일을 해내기 위해 어떻게 협력해야 하는지 아는 것이다. 우리의 공동체의식은 지금 황폐해져 있다. 이제야 깨닫는 것이지만, 이것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값싼 화석연료에서 흘러나온 번영 때문에, 진정 파우스트적인 거래를 재현하는 방식으로 우리 모두가 매우 극단적으로 개인화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미국인들은 중요한 무엇 때문에 이웃을 필요로 해본 적이 없고 그래서 이웃의 정, 즉 지역적인 유대가 사라졌다. 지금 문제는, 만일 우리가 최악의 생태학적 악몽을 진지하게 막으려 한다면, 충분히 심도깊고 신속한 변화를 만들기 위해 정치적 협동에 나서는 것 외에 달리 나아갈 길이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 탄소세는 좋은 출발점이 될 것이다.

ㅣ신현욱(방송대 교수) 옮김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