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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 제13회 창비신인평론상 당선작
장자(長子)의 그림, 처남(妻男)들의 연주
문태준·황병승론
김종훈 金鍾勳
1972년 서울 출생. 고려대 대학원 국문과 박사과정 수료. splive@chol.com
1. 두 사내 이야기
나무에 둘러싸인 사람이 사내1이다. 사내1의 주위에는 가죽나무, 팽나무, 개복숭아나무, 아카시아나무, 배나무, 팥배나무, 탱자나무, 호두나무 등이 있다. 그곳은 삼림욕장이나 식물원이 아니기 때문에 숲이나 마을 어귀이며, 관람객이 지나치지 않기 때문에 보이는 사람들은 토착인이다. 토착인들이 살기 때문에 그곳은 도시가 아니고, 도시가 아니기 때문에 농촌이다. 농촌이 대개 그러하듯, 그들은 아마 사내1의 친족들일 것이다. 사내1의 친족들은, 그들이 함께 사는 농촌이 점차 사라져가고 있기 때문에 대개 사내1의 기억 속에 사는 과거의 사람들이다. 과거의 사람들 사이사이에 서 있는 나무들은 사람들이 마을을 떠나거나 삶을 떠나기 이전부터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현재의 나무들이다.
사내1에 1의 번호를 매긴 것은 사내2가 있기 때문이다. 사내2는 다카하시 미츠, 니노셋게르미타바샤 제르니고코티카, 여장남자 시코쿠, 주치의 h, 메어리, 앨리스 부인, 프랑스 이모, 고양이 짐보, 대야미의 소녀 등에게 말을 건넨다. 이들이 사는 곳은 현실이 아닌 듯하다. 사내2는 지금 이들이 등장하는 책이나 비디오를 보거나 음악을 듣는 것 같다.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이들과의 대화이기 때문에 그의 말은 독백이며, 독백이기 때문에 그는 골방에 있다. 그는 골방에 있기 때문에 자연을 호명하지 않고, 자연을 호명하지 않기 때문에 도시에 산다. 사실 그는 자신이 도시에 사는지 교외에 사는지 시골에 사는지 신경쓰지 않는다. 앨리스가 사는 이상한 나라에 있기 때문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는 친구가 없으며 가족이 없으며 과거가 없다. 그를 사내라고 불렀으나 사실 그의 성(性)은 확실치 않다. 친구에게, 누나라고 불러도 되냐고 물어보니까 사내라고 짐작해본다.
사내1과 사내2는 만날 수 없을 것 같다. 이들을 낳은 시인이 문태준(文泰俊)과 황병승(黃炳承)1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한명은 서정시의 중심에 서서 문단의 찬사를 한몸에 받고 있으며, 다른 한명은 서정시의 주변부에서 시의 전통에 무관심한 일군의 젊은 시인들과 함께 서 있다. 어쩌면, 사내1과 사내2의 대비는 문태준과 황병승의 대비를 넘어 전통시와 실험시의 대비로 보일 수도 있겠으나, 정작 이 글의 관심은 이들의 시가 지닌 힘과 그 힘에 내재하는 공통된 시의식에 있다.
2. 걱정 많은 장자와 불쌍한 처남들
문태준의 사내1은 장자로, 보인다. 사내1이 직접 이야기한 적은 없으나 그리 짐작해본다. 가족에 대한 장자의 책임감은 부모의 범위를 벗어나기 마련이며, 사내1의 책임감이 그와 같기 때문이다. 화령 고모(「화령 고모」), 외할머니(「옛 집터에서」 「맷돌」), 조모(「그믐이라 불리던 그녀」), 외할아버지(「사라진 뱀 이야기」), 큰아버지(「태화리에서 1」) 들을, 그는 시에 불러낸다. 또한 「가재미」에서 그는 산소마스크를 쓰고 암투병 중인 그녀가 큰어머니이기 때문에 병원을 찾는다.
김천의료원 6인실 302호에 산소마스크를 쓰고 암투병 중인 그녀가 누워 있다
바닥에 바짝 엎드린 가재미처럼 그녀가 누워 있다
나는 그녀의 옆에 나란히 한 마리 가재미로 눕는다
가재미가 가재미에게 눈길을 건네자 그녀가 울컥 눈물을 쏟아낸다
한쪽 눈이 다른 한쪽 눈으로 옮아 붙은 야윈 그녀가 운다
그녀는 죽음만을 보고 있고 나는 그녀가 살아온 파랑 같은 날들을 보고 있다
좌우를 흔들며 살던 그녀의 물속 삶을 나는 떠올린다
그녀의 오솔길이며 그 길에 돋아나던 대낮의 뻐꾸기 소리며
가늘은 국수를 삶던 저녁이며 흙담조차 없었던 그녀 누대의 가계를 떠올린다
두 다리는 서서히 멀어져 가랑이지고
폭설을 견디지 못하는 나뭇가지처럼 등뼈가 구부정해지던 그 겨울 어느날을 생각한다
그녀의 숨소리가 느릅나무 껍질처럼 점점 거칠어진다
—「가재미」 부분
친척들은 장자를 존중한다. 사후에 그들은, 적어도 그들의 부모는, 장자에 의해 모셔진다. 자신의 뿌리가 보존되는 것을 확인하면서, 그들은 생물학적 죽음이 주는 당혹감에서 탈출한다. 자신의 피가 뿌리를 매개로 자신의 육체를 우회하여 다른 가지로 뻗어나가리라 추측하면서, 그들은 재생을 믿게 된다. 그들의 유일한 밑천인, 그러나 그들이 가지고 사라져야 하는 삶의 기억들도 보존되는 피에 얹혀 되살아나기 시작한다. 장자는 친척들에게 종교적 제사장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가재미」의 장자도 이러한 친척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그는 죽음이 임박한 그녀의 현재에, 그녀의 생생한 이력들을 끌어내어, 그녀의 과거와 지금 이 순간에 놀라운 활력을 부여한다. 죽음만을 보고 있는 그녀의 옆에 누워보는 행위는 위로이자 연민에서 비롯된 것이다. 비록 같은 자세를 취하더라도 죽음을 목전에 둔 이와 그것을 바라보는 이의 거리는 여전히 존재한다. 그는 누워 가자미가 되어보지만 곧 일어나 병실을 나갈 것이다. 그러나 죽음을 목전에 둔 그녀 앞에서 “그녀가 살아온 파랑 같은 날”의 이력을 이끌어내고, 그녀가 걸은 “오솔길”과, 그녀가 들었던 “뻐꾸기 소리”와, 그녀가 삶던 “가늘은 국수”를 떠올렸을 때 그녀의 과거는 장자의 입을 통해 다시 살아난다. 흡사 죽은 자의 목소리를 꺼내는 무당과도 같은 그에게 홀려, 그녀는 생물학적 죽음 앞에서 복원된다.
그런데, 그녀의 죽음 직전에 마지막 삶의 불꽃이 타올랐던 이유 한편에는 사내1이 자신을 직접 장자라고 말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있다. 장자라는 인식이 상징계에서 각인되기보다는 무의식의 차원에 놓여 있어서, 적어도 그에게는 의식적으로 장자가 지닌 일반적 상징을 전용할 의도가 없는 듯하다. 이러한 시의 화자처럼, 시의 대상들도 일반적이고 관습적 의미를 배제한 채 새로운 감각을 획득하려 한다. 가령 큰어머니는 대모신(大母神)이 아니라 “김천의료원 6인실 302호”에 누워 있는 환자이며, 그녀가 지닌 저 기억들도 시 밖에서 의미를 가져오지 않는다.
세상 한곳 한곳 하나 하나가 저녁에 대해 말하다
까마귀는 하늘이 길을 꾹꾹 눌러 대밭에 앉는다고 운다
노란 감꽃 핀 감잎은 등이 무거워졌다고 말한다
암내 난 들고양이는 우는 아가 소리를 업고 집채의 그들을 짚으며 돌아나간다
나는 대청에 소 눈망울만한 알전구를 켜 어둠의 귀를 터준다
들에서 돌아온 아버지는 찬물에 발을 씻으며 검게 입을 다물었다
—「저녁에 대해 여럿이 말하다」 전문
아버지가 찬물에 발을 씻고 있다. 아버지는 흔히 질서와 규율을 강요하고 쾌락본능을 억압하는 상징적 의미로 쓰이지만 여기에는 그러한 뜻이 배제되어 있다. 까마귀와 감잎과 들고양이와 나는 울고 말하고 돌아나가고 알전구를 켜며 어둠이 내려앉은 대상들을 낯설어하는데, 이러한 소란스러운 모습들 사이에서 아버지는 입을 다물어 어둠을 삼켜버린다. 나를 포함한 다른 이들이 저녁에 ‘대해’ 말하지만, 그는 말하지 않고 저녁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움직이고 말하는 대상들을 침묵으로써 감싸안는 아버지는 죽음의 세계를 입안에 담고 있다. 태초에 말이 있었으나, 그전에는 침묵이 검은빛을 띠고 있었다. 인간이 겪어야 하지만 체험할 수 없는 죽음의 세계는 아버지가 찬물에 발을 씻으면서 감각화된다. 물론 삶을 관장하는 생생한 죽음은 아버지의 상징적 의미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미 만들어진 도식의 상징이 아니라, 시가 지닌 의미들이 일궈낸 감각적 상징이다.
문태준의 장자가 친척들을 찾아가며 그들의 과거를 현재로 불러오는 반면에, 황병승의 사내2는 가족을 끊임없이 지운다. 이들은 시에서 지워지기 위해 등장한다. 이들은, 시인과 불화를 겪거나, 자신의 부재를 강조한다. 아버지는 가족에게 제삿날 향이나 피워올리게끔 이미 죽어 있고(「존재의 세 가지 얼룩말」) 머리맡에서 검정 쌀을 씻으며 소리없이 웃는 어머니도 사실 재작년에 돌아가셨다(「이파리의 저녁식사」). 지금 여기에 없는 이들은, 없기 때문에 스스로의 의미를 시 안에서 건져올리지 못한다.
전통적 관계의 가족을 부정하고 싶어하는 그는, 전통적 가족관계에서 이야기하자면, 여지없이 처남이다. 처남으로 보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말했기 때문에 처남이다. 그로 인해 처남이 가지는 정치적·상징적 의미가 적극적으로 활용되기 시작한다.
친구에게, 라고 적어봅니다
비 내리는 오후 유리창이 침을 흘려댑니다 배가 고파서
사실 가정을 갖는 일에는 늘 실패합니다
책임감은 언제나 그림자의 발뒤꿈치로 달아나고
하루는 그림자와 손을 맞대고 다짐합니다 서로에게 본보기가 되자고
찬 벽이 싫어서 얼른 손을 떼었지만
오늘 밤은 얼굴이 조금 가렵습니다
뭐랄까, 나는 낭만적인 사람에 가깝다고 해야 할까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사람들은 자신이 만든 음악에 취해 왕관을 꿈꾸고
새 옷과 구두를 장만하지요
나는 그렇게 하는 대신, 긴 그림자가 사라지는 먹구름의 오후
종이 위에 친구에게, 라고 적습니다
친구여 자네를 누나라 불러도 좋을까, 꾸욱 눌러쓰며 말이죠
매형, 세상에는 참 불쌍한 놈들이 많습니다.
—「불쌍한 처남들의 세계」 전문
사람들 앞에서 ‘나는 장자야’라고 말하기는 쉽지만 ‘나는 처남이야’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처남은 존재하면서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하면서 존재하는 대타적 호칭일 뿐이다. 장자는 의젓함이나 책임감 같은 권위를 인정받으며 관계를 넘어서 독립적으로 쓰일 수 있다. 반면에 처남이라고 하기 위해서는 그를 수식하는, 매형에 해당하는 누군가가 필요하다. 그러나 황병승은 매형에 해당하는 수식어 없이 처남을 시의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처남의 위치를 택하면서 사내2는 자유와 유희를 확보하고, 권위를 공격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권위를 포기하고 자유와 유희를 얻는다. 아내의 남동생인 처남은 나와 사돈관계이다. 아내의 오빠가 아니며 나와 피가 섞이지 않은 처남은, 오빠가 지닌 권위와 혈족 내에서 맺어지는 상속의 영역 바깥에 놓여 있다. 그는 자유롭다. 그런 처남이 “가정을 갖는 일에는 늘 실패”한다. 그러나 실패라는 말에서 절망감보다 무덤덤함이 더 느껴지는 이유는, 가장의 책임을 떠맡지 않아도 된다 싶은 안도감에서 비롯되었겠지만, 여기에 이어지는 본능에 충실한 발화도 한몫 거든다. 배가 고프다고, 얼굴이 조금 가렵다고 말하는 화자에게 슬픔은 표면으로 떠오르지 않는다. 만약 즉각적인 슬픔을 느낀다면, 자신의 쓸모없는 처지를 깨닫지 못하는 처남을 보면서 생겨나는 독자의 연민일 것이다. 어른보다는 아이의 마음을 가진 처남을 화자로 내세우면서 오빠와 혈족과 가장의 권위는 심드렁해진다.
수식 없는 ‘처남’의 독립적 활용이 일상적 지각의 문법적 층위를 건드린다면, 처남이 지닌 이데올로기는 시의 장르적 권위를 흔든다. 처남이 시에서 놓인 위치가 화자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1인칭의 힘이 강력한 시 장르에 처남이라는 가장 약한 호칭이 바로 그 1인칭이 되면서, 1인칭 권위자는 묘하게도 소수자의 위치에 서게 된다. 여기에는 ‘처남’이 아니라 ‘처남들’이라는 제목도 한몫 거든다. 1인칭의 권위가 처남의 세계로 떨어지고, 그 떨어진 권위는 접미사 ‘들’에 의해 분산되기까지 한다. 황병승의 화자는 한 목소리를 내는 것이 아니라 여러 목소리로 시 한편에서도 교차한다. 황병승은 권위의 가장 밑부분에서 자신의 느낌을, 설파하지 않고 즐긴다. 그는 일반상식을 흔들기 적합한 권위없는 자들의 유희의 목소리를 지녔다.
웃으면 좋다는 거고 인상 쓰면 싫다는 거지 어렵게 생각하는 습관을 버려
문어는 만화에서처럼 코가 달렸고 먹물을 발사하지
언젠가 나는 소문이 싫어 고양이 수염을 잠깐 달았지만
그림자에 지나지 않았어 아직은 별명을 쓰는 친구들이야 모두들 체스를 좋아해
앞치마 두른 동물들은 모두 일하러 가고 이렇게 큰 풀밭은 처음 봐
나른한 텐트 속에 버려진 네 두 다리는 꼭 투명한 푸딩 같구나
언젠가 너도 꼬리를 감추고 잠깐, 흔들린 적 있겠지
늙은 마초(macho)들! 앞에서 멍청하고 냄새나는 여자애들과
시키면 시키는 대로 손잡고 노래 부르던 시절
그땐 얼마나 얼굴이 화끈거리던지 그림자에 지나지 않았어
—「핑크트라이앵글배(盃) 소년부 체스 경기 입문(入門)」 부분
“어렵게 생각하는 습관을 버려”의 어조는 심각하지 않다. 엄숙함을 배제하는 처남의 목소리는 문어의 모습을 희화화하는 것으로 이어지는데, 이때 짓는 그의 웃음은 자못 의미심장하다. 현실의 모습을 바탕으로 문어의 모습을 재현하는 것이 기존의 글쓰기 방식이라면, 이 시에서는 현실의 문어가 만화를 바탕으로 “코가 달렸고 먹물을 발사”한다. 또한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표정을 짓는 것이 아니라, 표정에 마음이 담겨 있다고 말한다. “웃으면 좋다는 거고 인상 쓰면 싫다”는 것이다. 이면의 생각을 추적하는 행위는 처남의 세계에서는 쓸데없는 짓이다. 엄숙함과 진중함은 “어렵게 생각하는 습관”일 뿐이다.
만화적 상상으로 현실을 구성하는 처남의 웃음은 전쟁게임인 체스보다는 실제 전쟁을, 꼬리가 아닌 머리를, 풀밭이 아닌 일터를, 동성애자가 아닌 마초를 공격한다. 그의 아군은 자신을 옥죄는 실명을 버리고 아직도 별명을 쓰는 친구들이다. 어쩌면 그의 가족은 “동성애 운동과 게이 프라이드의 상징 마크”인 핑크트라이앵글을 가슴에 혹은 모자에 새긴 친구들일지도 모르겠다. 사심없이 대화하고 서로에게 안녕과 평화를 기원하는 존재를 가족이라고 일컫는다면 말이다. 지금 이들은 소수자가 되기 위해, 혹은 소수자가 만든 게임의 장에서 놀고 있다.
3. 처남들의 밴드, 그들이 연주하는 실험음악
처남은 지금 ‘이상한’ 나라에 살고 있다.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등장하는 체셔고양이가 있기 때문에, 앨리스가 있기 때문에, ‘정상적’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처남들의 세계를 ‘이상한’ 나라라고 한다(「Cheshire Cat’s Psycho Boots_7th sauce—여왕의 오럴 섹스 취미」 「Cheshire Cat’s Psycho Boots_8th sauce—앨리스 부인의 증세」 「앨리스 맵(map)으로 읽는 고양이좌(座)」). 그들이 자진해서 그곳으로 갔는지, 아니면 끌려갔는지 추측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목소리를 높이건 입을 다물건, 낯선 곳에 모여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들은 정상적 세계를 향해 발언하는 것이 된다. 그 내용이 세계의 다양성과 인간의 본능인 쾌락의 인정이라고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들은 이 세계에 발을 딛기 위해서, “누군가 내 필통에 빨간 글씨로 똥이라고”(「여장남자 시코쿠」) 쓰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낯선 곳을 만들었다. 발은 낯선 세계에 있어도 눈은 이 세계를 향해 있는 그들의 시는, 문제적이며 정치적이다.
황병승의 시에서 매력적인 부분을 말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속한 소수자들의 시에 관한 일반적인 이야기가 필요할 것 같다. 어른에 대한 아이, 남성에 대한 여성, 백인에 대한 황인과 흑인, 이성애자에 대한 동성애자 등이 주인공인 소수자들의 시는 자신이 설 자리를 만들기 위해 기존의 권위를 흔드는 전략을 세운다. 압축에 저항하여 확산과 요설이, 상징계에 저항하여 상상계와 환상이, 1인칭 권위자에 저항하여 복수 화자와 시점이 마련된다. 그들의 무기는 기존의 시들에서 반복되어 나타나는 엄숙함과 지겨움을 겨냥한다.
그러나 지겨움을 없애기 위해 만들어낸 그들의 시가 오히려 지겨워지기 쉽다는 것이 문제이다. 이 세계를 떠난 외계의 언어들은 이 세계와 소통하기를 갈망함으로써, 이 세계에 할 말이 있게 되고, 이 세계를 다시 찾는다. “지상에서 멀어질수록 달고 맛있는 건 참 많구나, 나는 이름들을 기억하느라 머리가 아팠죠(1987—) 오늘 밤은, 두통 속에서 어느덧 지구를 한바퀴 빙 돌아 처음으로, 텅 빈 집터로 다시 돌아왔습니다(1994~) 스물다섯, 눈을 조금 떴고 귀가 먹었죠,”(「어린이_행진곡」)
그들의 귀환은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닌, 할 말들의 수단이 되는 시어들을 들여온다. 이 과정에서 환상은 너무도 빨리 합리적 세계의 우의(寓意)로 수렴되고, 상상은 정신분석에서 흔히 사용하는 총—남성의 성기, 서랍—여성의 자궁 같은 도식적 상징의 결말로 향한다. 복수 화자와 요설은 중심 없는 파편들로 흩어진다. 뻔한 것들로 가득 찬 시는 결국, 낯익은 일상지각을 확장하려는 시의 근원적인 의도를 배반하게 된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길은 시의 1인칭 권위자를 인정하지 않고 산문의 영역으로 건너가거나, 1인칭 권위자를 인정하며 그 권위가 고착되지 않도록 경계하는 것이다. 시인인 황병승은, 또 그의 처남들은 물론 후자의 길에서 음악을 연주하려 한다.
우리는 똥이 막 나오려고 하는 순간의 감정, 이 세상에서 가장 부끄러운 감정으로 음악을 만들었네 사라지려는 힘과 드러내려는 힘의 긴장 속에서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불렀지 우리가 생각하는, 우리들만의 익스페리멘틀(experimental)이라고, 라고나 할까
—「밍따오 익스프레스 C코스 밴드의 변」 부분
그들은 “사라지려는 힘과 드러내려는 힘의 긴장”을 느끼며 확산과 응집 중 어느 한쪽만을 좇지 않는다. 음악을 만드는 순간이 ‘똥누기’에 비유되면서, 창조의 순간은 배설의 순간이 된다. 창조가 응집이라면 배설은 확산이고, 창조가 권위를 가진 말이라면 배설은 그 권위를 깎아내리는 시도이다. 여기까지는 그들이 음악이나 시의 창조행위를 야유하고 조롱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들은 배설하면서 “부끄러운 감정”을 느낀다. 조심스럽게 배설하기 때문에 권위는 무시되는 것이 아니라 조심스러움의 형식으로 존중된다. 그들의 “익스페리멘틀”은 시의 권위자인 1인칭에게서 벗어나려는 시도가 아니라, 1인칭을 존중하되 유연하게 하려는 실험인 것이다.
요설 사이에 감정을 집약하는 진술을 삽입하고, 수단으로 기능하기 쉬운 말들을 물질화하며 그들의 실험은 이어진다. 화자의 전언에 종속되지 않는 구절들은 독자적인 생명력을 가지게 되면서, 황병승의 시는 처남들이 속한 세계의 시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을 비켜간다. 가령 “사라지려는 힘과 드러내려는 힘의 긴장”이라는 말이 “똥이 막 나오려고 하는 순간의 감정”의 수식을 받지 않는다면, 이 말은 그들의 미학을 전달하기 위해 쓰인 하나의 도구에 지나지 않게 된다. 그러나 이 독특하고도 적확한 수식이 있기 때문에 “긴장”은 발화되자마자 공허하게 사라지는 관념어가 되지 않고 구체적인 물질이 된다. 우리는 그 긴장의 모습을 연상하고 웃을 수 있으며 구절들을 발화한 1인칭 주체도 굳은 표정을 풀고 다양한 표정을 지을 수 있다.
흰색—검은색—초록으로 가는 은밀한 순서 울게 만드는 것을 나는 증명할 것이다
—「원 볼 낫싱」 부분
안녕 파티에 올 거니 눈이 크구나 짧고 분명하게 종이인형처럼 말하는 여자친구 하나 갖고 싶은 계절이에요
—「이파리의 저녁식사」 부분
열매들이 떨어질 땐 너희들이 먹어도 좋다는 게 아니고 우리들이 또 한번 포기했다는 뜻이다, 가을
—「에로틱파괴어린빌리지의 겨울」 부분
그것으로 좋았네 내 손으로 처음 사과를 깎아 먹었을 때처럼, 나는 겸손해졌죠
—「대야미의 소녀_황야의 트랜스젠더」 부분
우리는 이상하게 예쁘게 지구에 남아
밤 풍경을 바라보는 쓸쓸한 궤도에서
마치 마치 마치, 하며 구르는 주사위……
—「앨리스 맵(map)으로 읽는 고양이좌(座)」 부분
인생의 뻔한 비유처럼 읽힐 저 일생의 은밀한 순서는 제목 “원 볼 낫싱”의 도움을 받아, 야구장 전광판에 스트라이크—볼—아웃 카운터가 천천히 늘어났다 지워지는 순서의 구체성을 얻는다. ‘짧고 분명하게 말하는 여자친구’로 끝났다면 이 구절은 화자의 바람을 그대로 전하는 수단에 머물렀을 것이다. 그러나 “짧고 분명하게 종이인형처럼 말하는 여자친구”로 진술되면서, 종이인형이 가지는 속성에 의해 “짧고 분명하게”는 결단력과 동시에 서늘함의 의미를 거느리게 된다. 세번째 시에서는 에로스와 타나토스가 결합한 이탤릭체 제목 “에로틱파괴어린”의 모호한 의미가 나무들의 열매에서 얻은 결실과 포기의 의미에 의해 분명해지고 있다. “겸손”이라는 막연한 관념은 “내 손으로 처음 사과를 깎아 먹었을 때처럼”에 의해 분명한 감각으로 인지되며, 각진 주사위의 구르는 모습에 “마치”라는 부사가 들어앉으면서 무심코 바라보았던 현상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이제 처남들이 구성원인 밍따오 익스프레스 C코스 밴드의 연주가 어떤 장르인지, 추측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들은 헤비메탈같이 내지르는 창법을 구사하거나 블루스같이 자신의 감정을 밑바닥까지 드러내지 않으며, 절정부를 위해서 도입부를 희생하지도 않을 것 같다. 이들이 연주하는 장르는 차라리 내지르면서도 삼키고, 도입부와 절정부의 위계가 없는, 그렇기 때문에 다소 지루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긴장을 놓지 않는 프로그레씨브, 또는 인디밴드의 유쾌한 음악이다.
4. 붓을 든 장자, 독립된 묘사들
장자는 지금, 자신의 권위가 굳어버릴까 걱정이다. 권위자가 내놓을 수 있는 교훈을 노골적으로 설파하거나, 깨달음 속에 선생의 태도를 교묘하게 숨기거나, 쉽게 수정될 거짓 반성을 늘어놓는 일 등을 그는 선택할 수 있다. 그러나 타인의 기억을 현재에 끌어올려 지금 이 순간의 질을 높이고자 했던 그의 초심도 이같은 방법을 취하는 순간 사라질 것이다. 교훈과 깨달음과 거짓 반성은 자기과시에 머물 뿐 타인에 대한 배려까지 나아가지 못한다. 그는 선생이 되기를 싫어하며, 장자의 운명을 거역해 처남이 될 수도 없다. 그 자리에서 자신의 고착을 막는 방법 이외에 그가 택할 수 있는 길은 없다. 장자는 1인칭 화자의 권위를 지키면서, 인식대상의 권위 또한 높이는 방법을 택한다.
백담사 뜰 앞에 팥배나무 한 그루 서 있었네
쌀 끝보다 작아진 팥배들이 나무에 맺혀 있었네
햇살에 그을리고 바람에 씻겨 쪼글쪼글해진 열매들
제 몸으로 빚은 열매가 파리하게 말라가는 걸 지켜보았을 나무
언젠가 나를 저리 그윽한 눈빛으로 아프게 바라보던 이 있었을까
팥배나무에 어룽거리며 지나가는 서러운 얼굴이 있었네
—「팥배나무」 전문
「팥배나무」에서 장자는 열매를 위해 진혼곡을 부르는 데 공을 들이고 있다. 그는 열매들이 “쪼글쪼글해지는” 현상의 원인을 “바람에 씻겨”에 둔다. 열매들이 시간의 저편으로 사라지고 있으나, 장자는 사라짐의 과정에 씻김의 의미를 덧씌워 저편의 시간을 이쪽에서 예비해야 할 것으로 만든다. 씻김의 행위는, 없음을 전제로 버려지기보다는 있음을 전제로 한 준비하기다. 이것은 장자가 열매에게 하는 풍장(風葬)이며, “서러운 얼굴”을 그리워하는 자신에게 하는 위로이기도 하다. 그는 시에서 1인칭 권위자로서 얻은 자신의 권능을 깨달음과 반성에 부리는 대신, 사라져가는 열매를 되살리는 데 쓰고 있다. 이러한 위로는 친척들에게도 했던 방식 그대로이다. 문태준은 장자의 범위를 이웃과 자연물에게로 확장한다. 장자는 이제 이웃의 장자이면서 자연의 장자이다. 물론 대상의 범위를 확장하는 일은 화자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화자를 긴장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문장도 물음의 형식인 “있었을까”로 닫고 있다. 화자의 판단과 규정은 지연되며, 나무와 열매가 주체인 문장들의 의미는 화자의 감정이 드러난 문장으로 수렴되지 않고 확산한다. 그는 같은 목적으로 주체를 가장 느슨하게 규정하는 술어 “있었네”를 반복하기도 한다. “팥배나무”를 곧바로 자신의 판단영역으로 옮겨 심지 않는 그는, 그저 잎을 떨구고 있는 나무를 무연히 쳐다보고 있을 뿐이다. 같은 서술어의 반복은 문장 각각의 위계를 형식적으로 없앤다. 중요한 문장과 중요하지 않은 문장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낱낱의 문장이 모두 다 중요한 위치에 서게 된다. 인과관계로 엮이지 않는 문장은 모두 원인이며 결과인 독립적 구문이다. 독립적 의미를 지향하는 문장들의 긴장이 같은 형태의 서술어 반복으로 이루어지는 현상을 문태준의 시에서는 종종 찾을 수 있다. 「꽃과 사랑」에서는 큰 꽃이 작은 꽃에게 나누어주는 햇빛과 아들의 식사를 쳐다보는 아버지의 사랑이 ‘있었다’의 반복으로 연결된다. 아버지가 지고 갔던 똥장군의 냄새를 현재에 되살리는 「배꽃 고운 길」에서는 ‘것이었다’가 변주되고, 외할머니가 돌리는 맷돌을 묘사하는 「맷돌」에서는 ‘같다’가 반복된다.
큰비 지나간 개천은 가리워진 곳 없어서 마름풀들은 얽히었다
작은 소에서 놀던 물고기들은 소식 없이 흩어졌다
들길에는 띠풀이 다보록해졌다
무너진 고랑에서 일하는 사람들 이맛살에 주름이 들었다
젖은 집으로 어물어물 돌아가는 저녁 거위들이 있었다
사람들은 큰물이 나가셨다, 했다
—「큰물이 나가셨다」 전문
목소리 내는 것을 자제하며 장자는 이번에는 붓을 들었다. 마지막 연에서 장자는 인용의 형식을 도입하며 “했다”에만 발화의 직접적인 책임을 진다. 시를 열었기 때문에 닫아야 하는 것도 자신의 몫이다. 그는 자신의 권위를 최대한 억제하며, 시를 닫기 위한 형식적인 장치만을 담당한다. 장자는 풍문의 발화자인 일반인일 수도 있고 이맛살에 주름이 든 풍경 속 인물일 수도 있는 “사람들”에게 판단의 몫을 위임한다. 섣부른 화자의 감정이 노출되는 자리를 간접인용으로 폐쇄하며 그는 시 안에 펼쳐진 풍경들의 모습을 포착하는데, 여기에는 같은 서술어의 반복이 드러나지 않는 대신, 낱개의 장면들이 여전히 같은 위계를 지니며 중첩된 풍경을 이룬다.
마름풀, 흩어진 물고기, 주름, 거위들에서 움직임을 느끼기는 어렵다. 거위만 하더라도, 그들은 ‘저녁 거위들이 돌아간다’가 아니라, “돌아가는 저녁 거위들이 있었다”로 진술되며 정지한 모습으로 그려진다. 역동성보다는 고요함을 택한 장자의 그림 그리기는 수묵화를 닮았다. 원근법을 사용하여 풍경의 위계를 작성하는 대신, 이 수묵화에는 대상들이 곳곳에 그윽하게 자리잡아, 그 그윽함으로써 한편의 그림을 연출한다. 그런데 장자가 수묵화의 붓을 들 수밖에 없는 이유는 “큰물” 때문이다. 생기가 넘쳐났을 앞의 대상들은 큰물이 한번 지나가자 모두 쇠잔해져 있다. 자신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사건을 치르면서 피곤해져 있는 그들에게 그는 다시 생기를 얻을 수 있는 색을 칠해준다. ‘있다’의 느슨한 서술어가 밑그림이라면, “얽히었다” “흩어졌다” “다보록해졌다” “들었다”는 장자가 입힌 이들의 고유한 색이다. 그의 권위는 대상들을 일으키는 데서 발휘된다. 억지로 대상들을 움직이게 하기보다는 그들의 모습을 빛나게 하는 장자의 배려로써, 큰물이 지나가며 피곤해진 이들은 회복할 수 있는 기운을 받는다.
5. 장자와 처남들의 만남
점보다 작은 수묵화를 본 적이 없으며 0초짜리 인디밴드 혹은 프로그레씨브 밴드의 연주를 들은 적 없다. 그림은 최소한의 공간을 확보하여 점·선·면을 배치하며, 음악은 최소한의 시간을 확보하여 음표들을 배열한다. 기본요소들이 같다는 점에서 장르의 공통된 특성이 나타나며, 그것들의 관계가 다양하게 엮인다는 점에서 개별 작품의 고유한 미가 탄생한다. 장자와 처남들의 만남은 악기로 그림을 그리거나 붓으로 음악을 연주하는 것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장자는 붓을 들었기 때문에 정지된 순간의 묘사를 기본으로 하고, 처남들은 악기를 들었기 때문에 긴장과 이완의 연주를 기본으로 한다. 그들이 소통하는 지점은 재료를 맞바꾸는 것이 아니라, 재료가 배치되고 배열되는 관습들을 깨뜨리는 데에 있을 것이다.
장자와 처남들은 우연찮게도, 만난다. 오래되었건 새롭건 그들은 자신을 둘러싼 벽을 허물어, 만난다. 아니, 허무는 것으로써 그들은 만난다. 장자를 두른 벽은 전통시가 지닌 동어반복의 위험성이며, 처남들을 두른 벽은 실험시가 가지고 있는 낯익은 상징의 활용과 시어의 남용이다. 전통시의 시어들은 선생의 태도를 밑에다 깔고 곧 잊을 깨달음과 반성을 나타내기 쉬우며, 실험시의 시어들은 환유의 정치성 때문에 존재가 아닌 수단의 시어로 전락하기 쉽다. 문태준과 황병승은 손쉬운 방법을 거절하려는 의식과 나름의 형식으로써 고착된 시 안에 내재한 고정관념을 흔들어 깨운다.
그들이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또한 경계의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시대에 자연이나 소수자의 세계는 자본주의 사회의 중심에서 밀려나 있다. 시대와 관계없이 소수자들은 애초에 경계인이었으나 자연은 사정이 다르다. 자연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점점 입지를 잃어가며 주류의 세계에서 이탈했으며 다시 그 자리를 회복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밀려나 있는 자와 밀려난 자의 화법은 다르기 마련이다. 밀려나 있는 자인 처남들이 자신들의 존재근거를 당위의 형식 또는 유희의 형식으로 드러내고자 한다면, 밀려난 자인 장남은 향수의 형식으로 잃어버린 세계를 회복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들은 이제 모두 ‘밀려나 있는 것’으로 그들을 밀어낸 사회와 문학의 경직성을 흔든다. 경계에 서 있기 때문에 그들은 이곳과 저곳을 동시에 볼 수 있으며, 이때와 저때를 동시에 말할 수 있다. 이 자리가 위태롭다고 해서, 장자가 지닌 위로의 붓이 통 속에 놓이거나 처남들이 연주하는 유쾌한 음악이 그치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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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에서 다루는 텍스트는 문태준 시집 『수런거리는 뒤란』(창비 2000) 『맨발』(창비 2004) 『가재미』(문학과지성사 2006), 황병승 시집 『여장남자 시코쿠』(랜덤하우스중앙 2005)이다. 작품을 인용할 때는 작품명만 표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