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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평 │ 시
전통 미학과 교감하는 시인들
엄경희 嚴景熙
문학평론가. 저서로 『빙벽의 언어』 『未堂과 木月의 시적 상상력』 『질주와 산책』 『현대시의 발견과 성찰』 『저녁과 아침 사이 詩가 있었다』 등이 있음. namwoo@hanmail.net
1. 탈신비화된 세계
인간의 상상력이 발아되는 지점에는 발아를 가능케 하거나 방해하는 여러가지 요인이 혼재한다. 그 가운데 시간과 공간은 상상력의 활동에 통일성을 부여해주는 필연적 전제이며 조건이라 할 수 있다. 근대는 기존의 공간을 의도적으로 재편성함으로써 기능성을 최대화할 수 있는 도시 건설을 촉진해왔다. 근대의 도시들은 첨단 통신망을 통해 이질적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삶의 양태를 세계 곳곳에 전파한다. 이제 지구상에 인간에 의해 개척되지 않은 미지의 공간이란 남아 있지 않다. 아프리카의 쎄렌게티 초원이나 남극의 설원도 우리의 시야에서는 더이상 신비로운 미지라 할 수 없다. 이같은 탈신비화 과정으로서 공간의 재편성은 곧 일상적 시간의 재편성을 의미한다. 영원과 지속의 시간의식은 파열되고 불연속적으로 분절된 시간이 인간을 지배하기에 이른 것이다.
신비감이 사라진 세계, 영원한 것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 모든 것이 세속화되고 평균화되어버린 세계에서 시인들의 꿈과 사유를 매개하는 것은 무엇인가? 창조를 가능케 하는 동력은 무엇인가? 시적 상상력은 어떻게 확장될 수 있는가? 이같은 질문은 오늘날 시의 존재방식에 대한 사유가 불가피하다는 생각과 연관된다. 예술철학자 아서 단토(Arthur Danto)의 생각대로 과연 예술에 관한 19세기적 내러티브가 종말을 고하고 전혀 새로운 예술의 패러다임이 형성되고 있는 것인가? 이에 대한 답은 궁극적으로 낡은 것과 새것의 경계를 가름할 단서를 제공할 수 있겠지만, 아직 이에 대한 확실한 미학적 인식은 마련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새로운 미학적 패러다임에 대한 확실한 진단이 지연되는 데는 새로운 것과 낡은 것이 때로는 그 자리가 뒤바뀌어 경험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첨단의 도시적 감수성을 드러내는 시에 못지않게 간혹 전통적 문법을 변형·고수하는 시편들도 신선한 감동으로 경험되곤 하는 것이다. 이대흠(李戴欠)의 「바닥」 같은 작품을 예로 들어볼 수 있다.
외가가 있는 강진 미산마을 사람들은
바다와 뻘을 바닥이라고 한다
바닥에서 태어난 그곳 여자들은
널을 타고 바닥에 나가
조개를 캐고 굴을 따고 낙지를 잡는다
살아 바닥에서 널 타고 보내다
죽어 널 타고 바닥에 눕는다
바닥에서 태어난 어머니 시집올 때
질기고 끈끈한 그 바닥을 끄집고 왔다
구강포 너른 뻘밭
길게도 잡아당긴 탐진강 상류에서
당겨도 당겨도 무거워지기만 한 노동의 진창
어머니의 손을 거쳐간 바닥은 몇평쯤일까
발이 가고 손이 가고 마침내는
몸이 갈 바닥
오랜만에 찾아간 외가 마을 바닥
뻘밭에 꼼지락거리는 것은 죄다
어머니 전기문의 활자들 아니겠는가
저 낮은 곳에서 온갖 것 다 받아들였으니
어찌 바닷물이 짜지 않을 수 있겠는가
봄은 하늘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바닥에서 시작된다
—이대흠 「바닥」(『창작과비평』 2006년 가을호) 전문
가난 혹은 그와 결부된 어머니의 삶이라는 주제는 사랑만큼이나 오랫동안 반복돼온 시적 주제라 할 수 있다. 이 시에 나타난 가난은 경험적 사실을 바탕으로 얘기되었던 수많은 가난의 시편들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아울러 “저 낮은 곳에서 온갖 것 다 받아들”이며 생을 이끌고 가야 하는 하층민에 대한 옹호와 연민의 태도 또한 우리 시에서 자주 발견되는 시적 지향 가운데 하나이다. 그럼에도 이 시는 공감과 감동을 자아내는 힘을 지닌다. 그 힘은 새로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친숙함에 있다. 물론 이 시에는 친숙함이 진부함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하는 섬세한 시적 발상이 내재한다. 예를 들어 “발이 가고 손이 가고 마침내는/몸이 갈 바닥” 같은 구절에서 느껴지는 처연한 맛이나 “뻘밭에 꼼지락거리는 것은 죄다/어머니 전기문의 활자”에서 보이는 비유가 그것이다. 이같은 발상은 보편적 정감이라는 시의 전체적 국면에 용해되어 있다. 이때 보편성에 호소하는 친숙한 정감 또한 새로운 시도만큼이나 시의 긴장감을 생성해내는 중요한 가치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더불어 극단적으로 말해 어떤 전통은 보존되는 것만으로도 가치를 지닌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감동과 관련해서 한가지 더 부연할 것은, 새로운 예술적 시도가 언제나 감동과 등가적이지는 않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마릴린 먼로의 얼굴을 연속적으로 복제해놓은 앤디 워홀의 유명한 그림 「마릴린 두 폭」은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묻게 한다. 이러한 물음을 일으킨다는 것은 예술사에서 분명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그러나 또 하나 분명한 것은 「마릴린 두 폭」 자체에서 감동을 느끼기란 나로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감동 운운하는 나의 태도는 낡은 것인가? 이같은 고민 속에서 전통적 문법을 변형하면서 시적 상상력의 확장을 꾀하는 몇몇 시편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2. 고아한 아취미의 복원
지난해 출간된 장석남(張錫南) 시집 『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문학과지성사 2005)를 읽으면서 그의 시적 화자가 한마디로 설명할 수 없는 미묘한 품격을 지녔다는 생각을 거듭하곤 했다. 그 목소리와 어조에 때로 미당(未堂)과 김수영(金洙暎)의 엷은 흔적이 드리워지기도 하지만, 그것마저 포함해서 근래 마주치기 어려운 예스러운 맛과 멋을 풍겨내고 있는 것이다. 굳이 사물에 빗대어 말하자면 ‘무명’의 질박함보다는 ‘비단’의 우아함에 가까운 품격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목소리는 낡았다는 인상보다 아주 미묘하고 낯선 느낌으로 다가온다. 예를 들어 “어느 하느님이 온다는 것인가/무슨 젊음을 이제는 저토록 높고 소슬히 이겨냈다는 것인가/저 빈 겨울 감나무/아이들의 입으로도, 늙은이의 잇몸으로도 들어가고 남은 허공들에/그동안은 못 보던 하늘, 못 듣던 바람 소리 두루 맑게 갖추는, 그 아래에 나도/저녁을 부르며 섰다”(「겨울 저녁에」) 같은 구절에서 느껴지는 정신적 근기와 부드러운 어조의 담담함을, 그것들을 가능케 하는 장석남의 미의식을 김연수는 시집 해설 「‘새로 생긴 저녁’」에서 “예(禮)”라는 말로 설명한다. 이 ‘예’라는 말을 좀더 좁혀서 말한다면 고아미(高雅美)나 아취미(雅趣美)가 아닐까?
퇴계 이황은 「도산십이곡」 발문에서 시의 품격으로서 온유돈후(溫柔敦厚)의 미의식을 언급했는데, 이는 부드럽고 넉넉하며 일정한 거리의 형성, 넘치거나 격정적이지 않으면서 절도에 맞는 시적 경계를 의미한다. 즉 온유돈후의 시정(詩情)은 감정에 휩싸여 지나치게 각박하거나 기괴하지 않은 고아함이나 아취미 따위를 말한다. 근대 시민사회가 도래한 이후 다채로운 개성과 개인의 자유가 전폭적으로 옹호된 반면 선비적 고아함을 지닌 전통적 품격의 가치는 격하된 것이 사실이다. 청빈, 고문(古文), 섭정(攝政) 등의 시어를 절묘하게 사용하는 장석남의 화자가 낯설게 느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장석남의 고아한 시적 화자가 고루하거나 시대착오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사물의 아름다움을 꿰뚫는 그 특유의 수사적 언변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평준화되고 세속화된 세계의 비천함을 물리치려 하는 반근대적 지향 때문이다. 그는 시 「방을 깨다」에서 “날이 맑다/어떤 맑음은/비참을 낳는다”라고 말한다. 높고 맑고 소슬한 것들 앞에서 그는 밝게 드러나는 자신의 속물근성과 세상의 악취를 더 강하게 감지하는 비참을 맛본다. 그리고 그는 맑음과 비참의 긴장된 대립을 품격을 잃지 않은 채 깊이 음미하면서 도원(桃源)의 아름다움을 비원(悲願)으로 지닌다. 최근시 「복사꽃 피다—안견의 「夢遊桃源圖」를 펴놓고」(『작가들』 2006년 가을호)에서 그의 이러한 지향을 다시 읽게 된다.
급기야 복사꽃 만발한 꿈이
사월 복판을 마구 달려서 왔으니
匪懈堂1은 그 꿈 놓칠 수 없었으리
(그 친구 참 사귀어볼 만한 친구였을 거야)
비단 마르고 꿈 곁에 또 꿈 이야기 적을 때에
주인 몰래 이야기 밖까지 날리는 꽃잎들
—여기서는 뵈는군.
낮잠 든 개의 까만 코에도,
칼에도,
약사발에도 앉는,
시디신 신발에도……
꿈엔 신, 숙주나 팽년 들과 놀았으나 그림엔 왜 한 사람도 없을까?
可度2가 권한 적막일까?
분홍빛들이 난감해하네
陶潛3 선생 꿈의 〈體驗手記〉가 하필
上監의 꿈이 되었으니
너무 낮은 꿈이 되었지?
내 자는 방 축대 밑 개똥밭에 심은 복숭아 한 주
꽃 피어
꿈 풀고, 묶고 하던 청년들
어른대네
이 시는 비해당 안평대군의 꿈 얘기를 듣고 안견이 사흘 만에 완성했다는 「몽유도원도」를 소재로 삼고 있다. 잘 알려진 대로 「몽유도원도」는 험준한 산들과 평화로운 도원이 서로 대립적으로 어우러진 풍경화다. 시인은 이를 칼, 약사발, 시디신 신발 등과 복사꽃 만발한 꿈을 대립시킴으로써 풀어낸다. 현실의 냉혹함과 아름다운 도원을 함께 음미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월 복판을 마구 달려서” 온 꽃빛에는 서러움이 묻어 있다. 시인은 이를 “분홍빛들이 난감해하네”라고 표현한다. 피비린내 나는 정쟁(政爭)과 도원의 꿈이 삶의 유기적 양면이듯 “꿈 풀고, 묶고 하던 청년들”의 인생여정 또한 이러한 난감함을 거느린다는 사실을 시인은 보고 있다. “—여기서는 뵈는군”이라고 그는 말한다. 복사꽃과 칼을, 풀고 묶고 하는 인생사 모두를 그는 아주 담담한 시선으로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그의 담담한 시선에는 격정을 다스리는 고아한 절도와 품격이 스며 있다. 이같은 장석남의 시적 태도는 세속적 편안함에 길든 우리에게 인간의 고귀함이란 무엇인가를 묻게 한다.
3. 싱싱한 역린의 상상력
『목련 전차』(창비 2006)는 리얼리즘의 전통과 서정시의 전통이 교직되어 있는 손택수(孫宅洙)의 두번째 시집이다. 시에 대한 탈근대성이 끊임없이 운운되는 가운데 그의 이러한 시도가 독자를 사로잡을 수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그의 시가 뿌리내리고 있는 농경문화의 관성적 친근성 때문만은 아니다. 『목련 전차』에 실린 시편들은 과거 리얼리즘 시가 지닌 두드러진 성향 즉 현실의 억압에 의한 좌절, 우울 일색의 분위기를 쇄신한다. 더불어 기존의 서정시가 지닌 여성편향적 부드러움이나 비애, 그리움(사랑)에 호소하는 감상적 태도 또한 벗어난다. 물론 이 시집에는 「살가죽구두」 「길바닥에 손바닥을 부딪쳐」 「벚나무 실업률」 「닭발」처럼 다소 진부한 내용의 시편들이 함께 실려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이 시집은 궁핍한 현실에 함몰되지 않는 젊고 싱싱한 에너지를 발산함으로써 독자를 압도한다.
절벽 끝에 물수리가 떴다
동력을 꺼버린 목선처럼 꼼짝 않고 물속 동정을 살피고 있는 수리,
안으로 움츠린 발톱이 근지러울 것이다 저 발톱 끝이 구름 속의 번개처럼 좌악 펴지는 순간
후려랏! 어로장의 깃발이 올라가리라 신호기와 함께 수면이 팟 팟 깨어지면서 그물망 위로 파다다닥 은비린내가 온통 봄하늘을 물들이리라
그러나 지금은 숨소리 하나도 가만히 눌러 죽여야 할 시간, 일필휘지 허공을 단숨에 그어내리기 위하여
망루에 오른 어로장은 벌써 몇시간째 꿈쩍을 않는다
—「가덕도 숭어잡이」 전문
동력을 꺼버린 목선처럼 몇시간째 꿈쩍도 않는 삶의 시간을 견디는 일은 얼마나 힘겨운가. 이때 손택수의 상상력은 그 힘겨움을 비탄하거나 고통스러워하지 않는다. “구름 속의 번개처럼 좌악 펴지는 순간” “수면이 팟 팟 깨어지”는 순간이 가져올 생생한 생의 기쁨과 보람을 그는 강조한다. “숨소리 하나도 가만히 눌러 죽여야 할 시간”에 짓눌리지 않은 채 꿈쩍 않는 시간을 거뜬히 끌고 가는 것이 그의 시의 매력인 것이다. 그렇다고 그가 삶의 애환과 처연함을 그냥 지나치는 것은 아니다. 「강이 날아오른다」 「추석달」 「매제의 구두」 같은 작품을 보면 그의 시선이 눈물겨운 삶에 얼마나 깊숙이 닿아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그의 시적 상상력은 “근육 속의 고단함을 축복”(「별빛보호지구」)하면서 삶의 “뒷굽을 치며 갈기를 휘날린다”(「구두 밑에서 말발굽소리가 난다」).
이같은 그의 내적 힘이 “유영의 반대쪽을 향하여 날을 세우는”(「거꾸로 박힌 비늘 하나」) 역린(逆鱗)의 생리를 닮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손택수는 구석 끝으로 몰리는 나날을 지날 때 구석의 뾰족한 각(角)을 감옥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방구석을 찌르고 있는 꼭짓점이/지친 몸을 받아준다”(「뿔잠」)고 말한다. 더불어 인간의 마음속에 박힌 못을 그는 상처로 기억하지 않는다. 시인은 “못이 없는 자리는 십중팔구가 허방/못 박힌 곳이 너를 지켜줄 것이다”(「비 새는 집—1979」)라고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현실에 대한 막연한 낙관이 아닌 현실을 돌파하고자 하는 힘을 읽게 된다. 이것이 곧 그의 역린의 상상력이다. 「강철나비」 「가시잎은 시들지 않는다」 「習作」 또한 동일한 상상적 기반을 보이는 예다.
한편 손택수의 역린의 상상력은 시적 시공(時空)을 시원스럽게 개방함으로써 자칫 옹색해질 수 있는 우리의 삶에 활기를 불어넣곤 한다. 즉 그는 이지러진 삶을 통과하면서도 “숨구멍이란 숨구멍을 모두 확 열어젖히”(「放心」)는 삶의 공간을 생성해낸다. 시공을 개방시키는 그의 상상력은 “달과 토성이 서로 정반대의 위치에 서서/흙들이 마구 부풀어오르는 날”(「달과 토성의 파종법」) 파종을 하던 과거의 지혜를 새로운 우주적 교감으로 받아들이는 데서 절정을 이룬다. 근대의 과학적 합리주의를 벗어난 과거 농경의 신비를 현재화하는 그의 상상력에 탈근대의 정신이 담겨 있는 것은 아닐까. 과거의 것을 낡은 것으로만 인식하지 않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그의 태도는 새로움에만 경도되곤 하는 가벼운 세태에 추를 달아놓는다. 삶의 모진 국면들을 받아내면서 결코 시의 건강성을 잃지 않는 그의 활달한 상상력이 우리 시에 결핍되어 있는 긍정과 긍지의 지평을 확장해줄 것으로 기대한다.
4. 아름다운 수사(修辭)의 장벽
문태준(文泰俊) 시의 미덕은 고요한 정감을 불러일으키는 아름다운 말의 파급력에 있다. 다시 말해 그의 시에서 격랑이나 도발, 광기, 추악함 따위는 발견되지 않는다. 번잡하고 소란스러운 일상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문태준의 시가 환기하는 맑고 차분한 정감은 잃어버린 내적 고요를 되찾게 해주는 힘을 갖는다. 그 고요한 정감의 세계가 따분함으로 떨어지지 않은 채 긴장감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주로 자연물에서 취해온 아름다운 비유들이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기 때문이다. 시적 대상이나 비유를 자연물에서 취해오는 것이야말로 우리 전통 서정시의 가장 큰 특질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전통적 특질은 그 친근성으로 말미암아 신속하게 독자의 정서를 파고들 가능성을 지닌다. 얼마 전 출간된 그의 세번째 시집 『가재미』(문학과지성사 2006)에 실린 시편들을 살펴보면, “피로처럼 피로처럼 꽃잎 지는 나” “눈보라조차 메밀꽃처럼 따뜻한 그녀의 방” “암컷이다 알을 많이 낳아 뒤가//청동 주발 같다” “버들치 몇마리/벗은 발로/불은 쌀 같은 살찐/그림자 끌고” “소리의 두 오두막” “참새떼는 나의 한장의 白紙에 깨알 같은 울음을 쏟아놓고” 등 참신한 비유를 수없이 발견할 수 있다. 이같은 문태준의 비유들은 인식의 갱신보다는 주로 사물의 묘사와 시적 정황을 구체화하는 데 기여한다.
아름다운 비유를 창조해내는 것은 분명 무시할 수 없는 문태준의 역량이라 할 수 있다. 아름다움의 창조는 비단 문태준만이 아니라 모든 시인의 궁극적 지향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나는 그가 늘 시를 예쁘게만 쓰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곤 한다. 그의 시에서는 슬픔도 가난도 늙음도 죽음도 모두가 아름답기만 하다. 이 아름다운 둔갑 앞에서 나는 환(幻)을 경험하는 듯하다. 왜냐하면 그의 아름다운 수사가 인간적 고뇌와 갈등을 사장하기 때문이다.
맹꽁이가 운다
비를 두 손으로 받아 모으는 늦여름 밤
맹꽁이는 울음주머니에서 물을 퍼내는 밑이 불룩한 바가지를 가졌다
나는 내가 간직한 황홀한 폐허를 생각한다
젖었다 마른 벽처럼 마르는
흉측한 웅덩이
가슴속에 저런 슬픈 샘이 하나 있다
—「슬픈 샘이 하나 있다」 전문
독자를 견인하는 이 시의 힘은 “물을 퍼내는 밑이 불룩한 바가지”라는 재미난 표현에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내가 간직한 황홀한 폐허”와 이를 비유하는 “흉측한 웅덩이” “슬픈 샘”에 있을 것이다. 이러한 표현들이 상처로 마음이 긁힌 사람들의 보편적 정서를 휘감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태준의 시들을 자세히 읽어보면 그에게 ‘황홀한 폐허’ 혹은 ‘흉측한 웅덩이’라고 말할 만한 상처의 실체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여기서 시인이 말하는 자기 내부의 ‘슬픈 샘’과 관련있을 듯한 「가재미」에 대해 얘기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가재미」는 죽음 쪽으로만 눈이 쏠려 있는 ‘그녀’를 미동도 않고 바닥에 엎드려 있는 가재미로 비유하고 ‘그녀’에 대한 화자의 아픔과 사랑을 “나는 그녀의 옆에 나란히 한 마리 가재미로 눕는다”로 표현한 시이다. 형태적 유사성으로부터 착안된 ‘가재미’의 비유는 시의 의미를 쉽게 독해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눈물에 호소하는 이 시는 그녀와 화자의 동일성의 세계를 구축함으로써 따뜻한 정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같은 발상이 독보적이라 여겨지지는 않는다. 이 시에서 화자의 애틋한 심정의 깊이를 굳이 찾자면 “그녀는 죽음만을 보고 있고 나는 그녀가 살아온 파랑 같은 날들을 보고 있다” 정도일 것이다.
시집 『가재미』에서 문태준 시의 가치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시편은 「가재미」가 아니라 「극빈」 「가재미 3—아궁이의 재를 끌어내다」 「강대나무를 노래함」 「빛깔에 놀라다」 같은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들 시는 아름다운 수사가 불러오는 정감 이상의 주제의식을 가지고 있는 작품이다. 그 가운데 한편을 읽어보자.
열무를 심어놓고 게을러
뿌리를 놓치고 줄기를 놓치고
가까스로 꽃을 얻었다 공중에
흰 열무꽃이 파다하다
채소밭에 꽃밭을 가꾸었느냐
사람들은 묻고 나는 망설이는데
그 문답 끝에 나비 하나가
나비가 데려온 또 하나의 나비가
흰 열무꽃잎 같은 나비떼가
흰 열무꽃에 내려앉는 것이었다
가녀린 발을 딛고
3초씩 5초씩 짧게짧게 혹은
그네들에겐 보다 느슨한 시간 동안
날개를 접고 바람을 잠재우고
편편하게 앉아 있는 것이었다
설핏설핏 선잠이 드는 것만 같았다
발 딛고 쉬라고 내줄 곳이
선잠 들라고 내준 무릎이
살아오는 동안 나에겐 없었다
내 열무밭은 꽃밭이지만
나는 비로소 나비에게 꽃마저 잃었다
—「극빈」 전문
이광호는 『가재미』의 해설 「극빈의 미학, 수평의 힘」에서 이 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채소를 잃어버린 가난이 현실의 가난이라면, 꽃을 잃는 가난은 심미적인 가난이다. ‘극빈’은 아마도 현실의 가난 너머에서 남아 있는 아름다움마저도 비우는 가난의 경지일 것이다. 그래서 ‘극빈’은 아름다움을 향한 허영과 욕망마저도 비워버리는 지독한 가난이다.”(124면) 더불어 이광호는 문태준의 “서정시의 심미적 권위마저 비워버리는”(132면) 극빈의 시학이 사물과 인간의 ‘수평적’ 관계에 대한 사유와 만나 “시적 주체의 권위를 보존하려는 서정시의 재래적인 미학”(132~33면)을 비켜 간다고 평한다. 이는 문태준의 시가 모든 세속적 욕망을 벗어남으로써 서정적 주체의 권위를 비켜간 새로운 면모를 보인다는 긍정적 평가로 읽을 수 있다. 그런데 이광호는 문태준을 시인이 아니라 도인으로 착각하는 것이 아닐까? 아름다움을 향한 욕망마저도 비워버리고 시 창작이 가능한가? 나는 그런 예술적 경지를 아직 알지 못한다.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이 세속의 마지막 욕망일지라도 시인은 그것을 붙들고 가야 하는 존재가 아닌가? 만일 그의 말대로 문태준이 아름다움을 향한 욕망마저 비워버렸다면 문태준은 침묵에 들 것이다. 과도한 해석이 아닐 수 없다.
한편 여기서 이광호가 말한 ‘재래적인 미학’과 관련해 몇몇 질문을 떠올리게 된다. 새로운 서정 운운하면서 요즘 간혹 문제가 되는 것이 객관적 세계를 주관화하는 ‘서정시의 절대적 주체’라 할 수 있다. 중심의 해체와 더불어 타자, 혹은 주변에 대한 인정과 배려가 강조되는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권위적 주체에 대한 반감은 자연스러운 현상일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마치 서정시의 절대적 주체가 구시대의 권위적 유물인 것처럼 취급되는 현상에 대해 회의감을 갖는다. 주체의 주관적 시선이 배제된 상호주관성의 세계가 실제 가능한가? 상호주관성을 가능케 하는 매개는 무엇인가? 사물을 주관적 서정으로 물들이는 것이 재래적 미학이라면 탈재래적 서정미학은 어떤 것인가? 서정시에서 발견되는 서정적 주체와 사물(타자)과의 동일화는 독선이나 권위라기보다 사랑이나 교감이 아닌가? 예술세계에서 주체의 해체가 근본적으로 가능한가, 그리고 그것은 온당한 것인가? 서정시의 주체문제와 관련한 이러한 질문은 지면을 달리해서 좀더 심도있게 거론될 필요가 있을 듯하다.
다시 「극빈」에 대한 얘기로 돌아가면 이 시의 가치는 채소밭을 꽃밭으로 가꾸어놓은 화자의 행위를 통해 시인이 실용성 없는 유미적 세계의 가치를 부각시킨다는 데 있으며, 현실적으로 쓸모없는 세계가 다른 누구에게는 편편하게 앉아 선잠 드는 ‘무릎’일 수 있다는 인식을 보여준다는 데 있다. “선잠 들라고 내준 무릎이/살아오는 동안 나에겐 없었다”고 고백하는 자가 비로소 이 무용한 꽃밭에서 타자에게 내줄 ‘무릎’의 의미를 깨닫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비로소 나비에게 꽃마저 잃었다”는 마지막 구절에서 뿌리도 줄기도 꽃도 자기의 것일 수 없다는 무소유의 정신을 읽게 된다. 이 시에서 보이는 가치의 전도와 타자에 대한 이해, 무소유의 정신 등은 수사를 넘어선 관념 형성의 가능성을 암시한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다. 시인은 시 「강대나무를 노래함」에서 “마음에 벼린 절벽을 세워두듯 강대나무를 생각하면 가난한 생활이 비로소 견디어진다” “나는 초혼처럼 강대나무를 소리내어 떠올려 내 누추한 생활의 무릎으로 삼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대나무가 열매를 맺지 않듯 마음이란 그냥 풍경을 들어앉히는 착한 사진사 같은 것”(「빈집의 약속」)이라고 고백하기에 앞서 선 채로 말라죽은 나무를 절벽처럼 의식에 세우는 과정이 그에게 좀더 오래 지속되길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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