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회 백석문학상 발표
백석문학상의 제8회 수상자가 심사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다음과 같이 선정되었습니다. 백석문학상은 백석(白石) 선생의 뛰어난 시적 업적을 기리고 그 순정한 문학정신을 오늘에 이어받기 위해 故 자야(子夜, 본명 金英韓) 여사가 출연한 기금으로 1997년 10월에 제정되었으며, 상금은 1,000만원입니다. 시상식은 만해문학상·신동엽창작상·창비신인문학상 시상식과 함께 11월 29일(수) 오후 6시 30분 한국프레스쎈터 20층 국제회의장에서 열릴 예정입니다.
제8회 백석문학상 수상작
고형렬 시집 『밤 미시령』
심사위원
본심: 백낙청 황현산 이시영
예심: 유성호 김선우
2006년 10월
백석문학기념사업 운영위원회
심사경위
백석문학기념사업 운영위원회는 2006년 9월 4일 모임에서 제8회 백석문학상 예심위원으로 유성호·김선우 2인을, 본심위원으로 백낙청·황현산·이시영 3인을 위촉하였다. 최근 2년간 출간된 시집을 심사대상으로 하는 규정에 따라 예심위원 각자가 5권 안팎의 시집을 추천하도록 했는데, 예심위원 2인이 각기 4권과 6권의 시집을 추천했다. 여기서 한권이 중복추천되어 아래와 같이 총 9권의 시집이 본심 대상이 되었다.
고형렬 『밤 미시령』, 김사인 『가만히 좋아하는』, 김승희 『냄비는 둥둥』, 도종환 『해인으로 가는 길』, 문태준 『가재미』, 손택수 『목련 전차』, 이세기 『먹염바다』, 이정록 『의자』, 최정례 『레바논 감정』(가나다 순).
본심은 10월 13일 본심위원 전원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되었는데, 9권의 시집 모두 주목에 값하는 알찬 성과일 뿐 아니라 최근 우리 시단이 상당히 수준 높은 시집들을 생산하고 있다는 기쁨을 나누는 자리였다. 논의는 고형렬, 김사인, 김승희, 최정례 시집에 집중되었고, 한권 한권에 대한 심사위원 각자의 기탄없는 견해가 오가면서 최종적으로 고형렬 시집 『밤 미시령』을 수상작으로 결정했다.
『밤 미시령』은 오랜 세월 동안 사회적 관심을 저변으로 삼고 동시대의 규범적 시법(詩法)을 돌파하며 개척한 독창적 화법으로 세계와 자아에 대한 결코 간단치 않은 형이상적 탐구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간간이 비치는 회한의 정조가 시적 긴장을 덜어내는 약점을 훌쩍 넘어선 것으로 여겨져, 심사위원 전원의 흔쾌한 합의를 얻었다.
심사평
백낙청(白樂晴) 문학평론가
좋은 시집들을 오랜만에 잇달아 읽으면서 행복한 추석연휴를 보냈다. 연휴가 끝난 날 북의 핵실험 보도가 있었지만 시집 읽기를 계속했다. 예심을 거쳐 올라오지 못했어도 그들대로 충분히 훌륭한 시집들이 더 있을 것임을 감안할 때 지금 우리 시단은 꽤나 풍성한 상태라 생각된다.
그런데 이처럼 폭식하듯이 많은 시집들을 한꺼번에 몰아 읽는 것이 좋은 방법이 아닌 것도 분명하다. 당장에 고형렬의 『밤 미시령』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할 뻔했다. 뒤늦게 서둘러 읽으면서, 그의 시가 전에 비해 긴장이 풀어진 데가 있지 않은가 하는 가벼운 실망감을 느꼈던 것이다. 그랬다가 안 그럴 거라는 벗들의 귀띔을 듣고 새로 찬찬히 살펴보았다. 다시 읽어도 마음에 덜 드는 시들이 여전히 남기는 했지만, 쉬운 듯하면서도 결코 쉽지 않고 일상성에 빠진 듯하면서도 일상성을 교묘히 부수고 나오는 고형렬 시의 힘이 오히려 강화되고 있음을 수긍하게 되었다.
예컨대 「하류(下流)의 시」 같은 작품이 첫눈에도 강렬한 인상을 준 것은 분명하지만, “하류처럼 내 강의 정서는 나날이 말라갈 뿐이다”라는 마지막 한줄이 안이한 탄식처럼 들렸었다. 그런데 곰곰이 따져드니 이 한줄이 결코 간단치 않다. ‘하류’는 상류와 달리 쉽게 물이 마르는 곳도 아니려니와, ‘내 강의 정서’가 나날이 말라간다는 진술은 겉늙은 자의 넋두리가 아니라, ‘나의 시’에 절망하면서도 그에 ‘영영 의탁하려’는 다짐과 연결되어 있다. “겨울의 황금노을은 가슴에 날카로운 금을 남기고/조금 뒤 어둠의 연기만 남긴다 할지라도/고통은 그 속에 숨는 것일 뿐/잠드는 연기 끝에 남은 재를 뒤적이며 나는/또 어쩔 수 없이 나를 나의 시에 영영 의탁하려 한다”라는 제4연(끝에서 둘째 연)에 이르기까지 1, 2, 3연이 모두 빛나는 표현들로 가득했던 것은 그런 쉽지 않은 다짐의 결과였기 때문이리라.
『밤 미시령』에는 「달려라, 호랑아」 「4월」(“죽은 것들이 돌아오느라…”) 등 그 치열성이 처음부터 돋보이는 시들도 적지 않지만, 「청모의 노래」처럼 얼핏 예사로운 자연예찬으로 들리거나 「작고 시인」처럼 인생의 유한함에 대한 다소 뻔한 성찰에 머무는 듯하다가 문득 한마디 특이한 표현이나 뜻밖의 시각 변동으로 범상의 꺼풀을 벗어던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온갖 소재를 매만져 이렇게 시를 만들어내는 솜씨에는 단순한 솜씨 이상의 것, 시인으로서의 특별한 용기가 필요했지 싶다. 고형렬이 『밤 미시령』으로 드디어 백석상을 받게 된 것이 못내 기쁘다.
도종환의 『해인으로 가는 길』은 시인의 수행자적 용기와 치열성이 부각된 시집이다. 그런 것을 너무 ‘정색하고’ 드러낸 것이 시적 탐구의 한계라는 지적이 있었고, 몇몇 시편들을 보면 자신을 비우는 고행에서 나온 시들이 여전히 ‘서정적 자아’의 지배를 못 벗어난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이 시집에서 많은 작품을 나는 깊은 감동으로 읽었는데 이를 두고 독자가 예의 서정적 권위에 굴복한 결과라고 봐야 할 것인가? “산그늘 일찍 들고 겨울도 빨리 오는 이 골짝에/낮에도 찾는 이 없고 밤에도 산국화뿐이지만/매화나무도 나도 외롭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매화는 매화대로 나는 나대로 그냥 고요하였다”(「산가」 마지막 4행)—이렇게 아무 치장도 없고 거리낌도 없이 자기 생각을 진술한 시는 덜 모험적인 시일까? 감동과 더불어 숙제도 하나 받은 기분이다.
도종환과 달리 기법이 다양하고 감정의 폭이 넓으면서 각기 독특한 개성이 돋보인 시인으로 『가만히 좋아하는』의 김사인과 『냄비는 둥둥』의 김승희가 눈길을 끌었다. 문태준의 『가재미』가 훌륭한 시집이라는 데는 심사위원 모두가 같은 의견이었고 전작 『맨발』보다도 더 알차다는 평이었다. 동시에, 선배문인들의 과잉배려인지는 몰라도, 현재 충분한 각광에 노출된 이 시인이 앞으로 계속 정진해서 이 상을 받아갔으면 하는 마음 또한 쉽게 모아지는 것이었다.
황현산(黃鉉産) 문학평론가
예선을 거쳐온 아홉권의 시집이 모두 좋은 시를 읽는 즐거움에 밤 깊은 줄을 모르게 하였다. 그만큼 심사하는 일이 어렵고 조심스러웠다.
김사인 시집 『가만히 좋아하는』은 삶의 한 고비를 넘긴 시인의 안개처럼 낮고 너그럽게 풀리는 마음과 또다른 강도로 타오르는 갈증을 곡진하고 정감어린 말로 읊고 있다.
김승희 시집 『냄비는 둥둥』은 이 시대의 삶을 문명비평하는 지적 시선과 항상 정확한 표현을 찾아내는 깊은 감정들이 빠르고 효과 높은 선율을 타고 힘차게 어우러진다.
도종환 시집 『해인으로 가는 길』은 한 인간의 종교적 수행과 그가 몸담은 사회의 역사적·정치적 전망을 한줄기로 세워올리며 새로운 표현형식을 발견하고 있다.
문태준 시집 『가재미』에서는 잘 다루어진 말과 신선한 이미지 들이 깊고 알찬 사색의 흔적을 감싸고 있어, 이 젊은 시인이 짧은 시간에 여러 중요한 문학상을 수상하게 된 것이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님을 다시 확인하게 한다.
손택수 시집 『목련 전차』는 자연 속의 은밀한 풍경들과 삶의 후미진 세부를 찬찬한 시선으로 묘사하고 그것들을 연결하여 흥취 높은 우화를 엮어낸다.
이세기 시집 『먹염바다』에서 읽게 되는 단정한 말들은 순하고 수줍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늘 진실에 닿아 있어 의외의 힘을 얻어낸다. 시어가 순결하다는 것은 이런 시를 두고 일컫는 말일 것이다.
이정록 시집 『의자』는 어렵지도 길지도 않은 말끝에 날렵하게 회돌이를 치는 시법으로 여러 수준의 생각을 감쪽같이 압축한다. 한국의 일상적 농촌풍경을 이정록보다 더 아름답고 더 뜻깊게 표현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최정례 시집 『레바논 감정』은 기억 속에 응어리져 있는 슬픔과 삶에 대한 철학적인 성찰을 구어투로 장난스럽고 무람없이 말하면서도 자주 심금을 울리는 독자적인 표현법을 보여준다.
수상작으로 뽑힌 고형렬의 『밤 미시령』은 무엇보다도 그 비장한 감정과 씩씩한 말로 감동을 준다. 역사와 사회에 대한 깊은 관심의 끈을 내내 놓지 않으면서 자기발전을 위해 부단하게 노력해온 이 시인은, 자주 의식의 분열을 겪지만 그것을 새로운 전망의 동력으로 바꾸어내는 장점이 돋보인다. 고형렬 시인의 수상을 축하하며, 이 아름다운 시집들이 우리 사회의 깊은 정치적 갈등을 조정하고 해소하는 데 큰 힘이 될 것을 굳게 믿는다.
이시영(李時英) 시인
D. H. 로런스도 어느 글에서 말하고 있듯 “인간은 자신을 의식하게 되는 순간 자신이 되기를 그”치고 “자신이 아닌 현실을 창문으로 바라보는 자아”(정남영 미간행 강의원고 「비평이란 무엇인가?」에서 재인용), 즉 근대적 자아의 시선이 생긴다고 했는데, 고형렬의 『밤 미시령』에는 분열된 자아의 시선으로 세계의 복잡성을 노래한 시들이 의외로 많을 뿐만 아니라 이런 겹눈의 시선으로 창작된 시들, 혹은 상(像)을 만들면서 그 내부에서 끊임없이 상을 부수는 시들이 성공을 거두고 있다. 박형준도 분석한 바 있는 「달려라, 호랑아」(「젊은 시의 산문화에 대하여」, 『창비주간논평』 2006.5.9), 「천수(千手)」 「선상의 시」 같은 작품이 그렇다. 특히 「달려라, 호랑아」는 20행의 시가 묘사부와 진술부로 나누어지면서 호랑이에 자신을 투사하면서 또한 달리는 자신을 바라보는 제2의 자아를 등장시켜 어떤 “육화된 모호성”을 특이한 삶의 활력으로 상승시키는 시적 재능을 발휘하고 있다. 「천수」에서는 머리를 깎으러 찾아오는 ‘남자’와 방 안에서 독서를 하는 ‘남편’ 그리고 수많은 추억을 가진 남자의 머리를 “아껴가며 삭둑삭둑 자”르는 “은빗과 은가위를” 든 미장원의 ‘그’를 등장시켜 불가의 ‘연기론’을 연상시키는 급진적인 난해시를 형상하고 있다. 그것은 난해시처럼 꾸며 쓴 난해시가 아니라 어떤 궁극을 실행하려 하는 데서 오는 진짜 난해시인 것이다.
그러나 고형렬 시의 활력은 다른 곳에서도 넘쳐난다. 「조태 칼국수」 「명태여, 이 시만 남았다」 「흰 모래의 잠」 「발바닥은 모시조개밭」 같은 그의 생장지인 영북 체험을 그린 시들이 그러한데, 다음과 같은 묘사는 오로지 시에 자신의 전부를 “의탁”해온(「하류(下流)의 시」) 시인의 고독한 정진과 탁마를 느끼게 해준다.
치앗빛 조개들은 뽀얗고 굵어 납 든 듯 단단하다 어떤 놈은 살랑 물결 속으로 운 좋게 미끄러져 나가지만 백회색 조개들은 이마에 파란 파래 풀잎 하나씩은 꼭 물고 있다//당신 추억에, 때로는 서산으로 해가 기울어, 세월은 아들의 어린 나이보다 슬펐겠지만,//조개를 물 밖으로 던질 때처럼 당신이 내 이름을 크게 불러준 적은 없다 컴컴한 물속으로 펼쳐진 은모래밭이랑 오돌토돌한 백조개들, 터질 듯 살을 물고 줄 서 있는 망망 동해 속초 앞바다
—「발바닥은 모시조개밭」 부분
리듬과 의미가 한몸으로 미끄러지면서 강렬한 육체성을 얻은 김승희의 『냄비는 둥둥』도 수상후보로 거론되었으나 편차가 심한 작품들의 혼재가, 도종환의 『해인으로 가는 길』은 치열한 시적 인식에 비해 반복되는 형식의 단조로움이 단점으로 지적되었으며, 문태준의 『가재미』는 근래 우리 시단이 낳은 고르고 뛰어난 시집임엔 틀림없으나 잦은 수상이 그의 시를 위해 오히려 바람직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다소 ‘행복한 우려’가 제기되어 제외되었다.
시란 척도 너머를 꿈꾸는 그 무엇이다. 그리고 좋은 시인은 아름다워야 할 때 아슬히 아름다울 줄 알며 만감이 흘러넘쳐야 할 땐 둑 밖으로 콸콸 넘쳐흐를 줄 알고 비정할 땐 하늘을 때리는 눈발처럼 안으로 매섭게 비정할 줄 안다. 『성에꽃 눈부처』(1998) 이래 동시대의 상투적·규범적 문법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독특한 시적 화법을 지속적으로 탐구하고 갱신해온 고형렬에게, 그리하여 살아있는 삶의 표현에 가장 근접한 시들을 생산한 그의 시집 『밤 미시령』에 백석문학상을 수여해야 하는 소이(所以)이다.
수상소감
이 땅에 핀 ‘백석’이란 꽃 한송이를 受賞하며
고형렬 高炯烈
1954년 강원도 속초에서 태어났다. 1979년 『현대문학』에 「장자」 등이 추천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대청봉 수박밭』 『해청』 『사진리 대설』 『성에꽃 눈부처』 『김포 운호가든집에서』 『리틀보이』 등이 있다. 일연문학상, 대한민국문화예술상 등을 수상했다.
서울 『현대문학』에서 날아온 봉투를 뜯던 때가 어제 같다. 삼사십대의 막막한 세월을 보내면서 나는 상(賞)에 연연하지 않기로 했다. 그후 나는 ‘시를 쓴다’는 사실에서 내가 행운이 있는 사람임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으로 살 만했고 나는 시를 발견하고 언어를 모으는 작업에 즐거움을 느꼈다.
문학 자체는 형식적 보상을 받는 것이 아니다. 보상은 늘 고독 속에 스스로 존속하기 마련이다. 마음의 언어는 잘 판독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자체로 보상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시인은 죽어서 ‘시인’이 된다는 논리를 믿는다. 이 불가해한 나라 혹은 육도(六道)에서 보상을 넘어 사랑이 된 시인이 백기행(白夔行)이다.
초등학교 4학년 때 해남의 선부(先父) 장서에서 백석을 만났다. 아련한 근원에 닿은, 그러나 다 닿지 않은 정서의 나머지 질감이 만져졌다. 나라가 불행하면 집안이 불행하고 그러면 모든 소년들이 불행해진다. 가계의 불행은 페르쏘나의 탈출충동을 유인하기 마련이고, 그래서 수많은 시간들이 서로의 주변과 지명을 찾아 떠돌다 사라졌다. 이것이 우리 문학의 신기루이자 호명이다.
백석의 시간 역시 불행한 생애의 흔적을 남겼다. 지난 100년의 파고(波高)는 우리 모두가 겪은 보편적 사건이지 누구만의 선택적 불행이 아니다. 이 역사는 우리 삶의 콤플렉스이고 공기이고 문학의 조건이자 차꼬이다. 그런데 이 불행의 그림자가 우리 문학의 무늬를 아름답게 수놓았음을 부정할 수 없다. 다행스럽게 식민지시대의 변방에 한글의 시적 형식을 형상화한 소월과 백석이 있었다. 백석은 소월을 흠모했고, 나는 백석 언어의 질서를 사랑한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결행하지 못하고 늘 곁에 고달픈 그림자와 너울을 데리고 다닌 기막힌 언어를 살다 간 한 시인의 모습을 나는 혼자 오래 추억하게 된다. 버려져서 높고 쓸쓸해진 것은 늘 그렇게 다가왔다.
한 사회에서 문학은 독특한 위계와 기능을 가진다. 문단은 휴식할 만한 곳이며 두렵고 복잡하고 아름다운 곳이다. 동시에 갈등의 실체에 근접하는 그림자의 공간이다. 한국시는 너무 자주 만났고, 그래서 좀 지쳤는지 모른다. 이찬형(李燦亨)처럼 텅 빈 굴속에 들어가 면벽해야 하는 강박을 느낀 때가 있었지만, 그리워지는 것은 오리가 날아가는 지붕 위의 낮아진 하늘을 쳐다보는 백석의 일상적 문학성이다.
시를 시작한 1974년 화진포 이후 지금까지 많은 사건이 있었다. 나는 고향‘말’을 지키려고 분투했지만 시인은 누구나 백석처럼 출생지를 향해가며 혼곤한 몸을 누이고 갈매를 보고 화로를 “다가 껴”게 된다. 그래서 나도 물화된 세계 속에서 언어의 뺨을 흙살에 대보거나 미시령을 넘으며 눈과 건태(乾太)와 허공에게 말을 걸게 된다. 동일성에 가닿을 수 없는 불가역성과 결국 쓸쓸한 객창감만 남았다 할지라도 시는 나의 가장 큰 위안이다. 말없는 것들에게 지면을 할애하는 것은 그곳이 나의 언어가 태어난 가족의 공간이며 돌아갈 집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저 수많은 망아적 실존의 소리를 다 들을 수 있겠는지.
진지하고 은인자중하고 위대했던, 작고문인들의 손과 얼굴을 생각하면서 나는 간곡한 마음을 지니려 한다. ‘선배’들처럼 언어를 만지다가 언어 속에서 죽는 것이 내 소망이다. 그래서 문인제단(文人祭壇) 한쪽에 숨게 되길 바란다. 소란과 고요 속에서 정혜(定慧)하고 놀면서, 근면을 배우는 한 범부의 시인이 되는 것이 시의 초심이 아니었던가.
문학이 휴식과 여유를 가지면서 깊어지길 바란다. 해체와 탈중심 시대 속에서 나의 시는 어디를 떠돌고 있는 한조각의 고졸한 꿈이며 잎일까. 앞으로도 나는 감히 눈앞의 한 허공에서 일편 시가 떨어지기를 고대한다.
평생 무상(無償) 시인이 되지 못하고 이 상을 받는다. 모든 시인들에게 고개 숙인다. 행복하지 못했던 백석 이름으로 고형렬이 아닌 시집 『밤 미시령』에 이 상을 주는 창비와 심사위원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