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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정찬 鄭贊
1953년 부산 출생. 1983년 『언어의 세계』로 등단. 소설집 『아늑한 길』 『베니스에서 죽다』 『희고 둥근 달』, 장편소설 『로뎀나무 아래서』 『광야』 『빌라도의 예수』 등이 있다. lodem53@hanmail.net
희생
1
우편함에서 연둣빛 편지봉투를 본 것은 해질 무렵이었다. 일몰의 잔광에 싸인 연둣빛은 창백했다. 푸른 잉크로 쓴 글씨가 연둣빛 속에서 가느다란 물줄기처럼 흘렀다. 낯익은 글씨였다. 눈을 감았다. 한 얼굴이 떠올랐다. 흐린 얼굴이었다. 너무나 흐려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았다. 편지를 들고 마당에 놓인 등나무 의자에 앉았다.
그리운 당신
놀라는 당신의 얼굴이 눈에 선하군요. 제가 당신에게 편지를 보냈다는 사실 자체가 당신을 놀라게 할 것임을 잘 알고 있어요. 더욱이 ‘그리운 당신’이라고 했으니. 하지만 사실이랍니다. 편지를 쓰기 위해 펜을 들면서 저는 당신의 이름을 나직이 불렀답니다. 강희우라는 한 여자가 박민우라는 한 남자의 이름을 불렀어요. 사무치는 그리움으로.
그녀 말대로 나는 놀라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20년 전 홀연히 사라져버린 후 어떤 소식도 없었던 그녀에게서 편지가 온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게다가 그리운 당신이라니……
당신을 향한 저의 그리움을 제발 비웃지 마세요. 당신이 비웃는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에여요. 저도 알고 있어요. 너무나 늦은 그리움임을. 마흔 여섯의 여자가 마흔여덟의 남자에게 품기에는 너무나 뜨거운 그리움인 것도 알고 있어요. 제가 염치없나요? 그럴지 몰라요. 당신을 버린 여자가 품기에는 너무나 염치없는 그리움일 거예요. 그럼에도 지금 저는 당신을 사무치게 그리워하고 있어요. 한때 당신이 저를 그리워했듯이, 저도 당신을 그리워하고 있어요. 당신, 지금 화를 내시나요? 화를 내셔요. 당신을 버린 여자가 그리움의 깊이를 어떻게 알겠어요. 그땐 몰랐어요. 당신이 얼마나 절 그리워했는가를. 젊은 당신의 그리움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전 까마득히 몰랐어요.
겨울바람 속에서 비스듬히 서 있는 한 사내의 모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그가 똑바로 서지 못하는 것은 몸의 절반이 텅 비어 있기 때문이었다. 그가 비스듬하게라도 설 수 있었던 것은 추억이라는 생명체 덕분이었다. 추억은 기묘한 생명체였다. 그 기묘한 생명체는 세계를 천천히, 그러나 쉼없이 안개 속으로 밀어넣었다. 안개에 휘감긴 세계는 불투명한 막에 싸인 것처럼 흐릿해져갔다. 그 잿빛 세계 속에서 시간은 거꾸로 흘렀다. 강물을 역류하는 물고기처럼. 그랬다. 거꾸로 흐르는 시간은 한마리 은빛 물고기였다. 모든 것이 흐릿한 잿빛 세계 속에서 오직 은빛 물고기만이 생동감있게 움직였다. 그 날렵한 물고기가 세계의 상류로 거슬러올라가면 아, 거기에는 추억이라는 새로운 생명의 세계가 펼쳐졌다. 그 눈부신 세계의 주인은 강희우, 그녀였다. 그녀가 눈을 감으면 세계는 어둠이었고, 그녀가 눈을 뜨면 세계는 희디흰 빛의 세계였다. 그녀가 입을 다물면 세계는 고요했고, 그녀가 입을 열면 세계는 아름다운 음악으로 가득 찼다. 그녀는 홀로 완전했다. 홀로 완전한 그녀 곁에 유령 같은 내가 있었다. 그녀에게 나는 유령이었다. 내가 다가가도 그녀는 나를 보지 못했다. 그녀의 손을 잡아도, 그녀의 몸을 어루만지고 그녀의 몸 안으로 스며들어도, 그녀는 나를 느끼지 못했다. 그녀에게 나는 없는 존재였다.
지금 제가 있는 곳은 정릉의 옛집이에요. 당신도 몇번 왔었죠. 어머닌 당신을 참 좋아하셨지요. 당신을 사윗감으로만 보시지 않았어요. 그 이상이었지요. 이제야 밝히지만 어머닌 당신에게서 아들을 느끼셨어요. 저에겐 당신이 모르는 오빠가 있었어요. 세상에 태어난 지 백일도 채 못돼 죽어버린. 어머닌 작년 사월에 돌아가셨어요. 일흔여섯이었으니, 빠른 죽음도 늦은 죽음도 아니었지요.
어머니의 빈소는 쓸쓸했어요. 생전에 어머닌 외로운 분이었지요. 삶이 쓸쓸했으니 죽음의 자리도 쓸쓸할 수밖에요. 저는 산자로서 죽어서 누운 어머니를 내려다보았어요. 산자가 아무리 몸을 낮추어도 죽은자와 나란히 할 수 없어요. 고백하자면 어머니의 죽음에 전 안도했어요. 슬픔이 왜 없었겠어요. 하지만 슬픔보다 안도감이 더 컸어요. 전 몹쓸 딸이었지요. 언제나 그랬어요. 어머닌 몹쓸 딸에게 커다란 선물을 남기셨더군요. 전 처음으로 눈물을 쏟았어요. 그 선물을 보기 전까지 제 눈은 바짝 말라 있었어요. 바짝 마른 눈에서 눈물이 쏟아지는데…… 제 몸 안에 그토록 많은 눈물이 고여 있는 줄 정말 몰랐어요. 어머니가 저에게 준 선물이 무언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저의 집에 오세요. 당신을 초대할게요. 제가 당신에게 드리는 선물도 준비되어 있어요. 전화번호를 편지 아래에 적어놓을게요. 전 지금 간절히 빌고 있어요. 저의 초대를 당신이 기쁜 마음으로 받아주시기를.
당신을 그리워하는 희우
2
내가 전화를 한 것은 편지를 받은 지 열흘 후였다. 열흘 동안 끊임없이 머뭇거렸다. 나는 내가 전화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잊지 않았다. 그녀를 잊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세월이 흘러 머리가 희끗희끗해졌지만 그녀 앞에서는 언제나 목마른 청년이었다. 목마른 청년에게 현실은 진실이 아니었다. 진실은 꿈 안에 있었다. 그녀는 꿈의 존재였다. 세월이 흘러도 청년의 모습은 변하지 않았다. 꿈의 존재도 변하지 않았다. 흐려졌을 뿐이다. 비와 바람에, 일상의 먼지에, 눈가의 주름살에, 허영심과 누추한 욕망에, 꽃들의 황혼에.
머리가 희끗희끗한 나는 청년을 통해 꿈의 존재를 엿보곤 했다. 그 순간 내 늙은 눈은 청년의 눈이 되었고, 내 늙은 뼈는 청년의 뼈가 되었고, 내 늙은 피는 청년의 피가 되었다. 술에 취해 청년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기도 했다. 그는 타인이면서 타인이 아니었다. 그는 나이면서 내가 아니었다.
전화 신호음이 아득했다. 나는 못 박힌 듯이 서서 아득한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것은 꿈의 존재를 향하는 소리였다. 현실의 소리가 꿈의 존재에 닿을 수 있는가. 터무니없는 일이었다. 꿈과 현실은 동시에 존재할 수가 없다. 내가 열흘 동안이나 머뭇거린 것은 꿈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여보세요.”
밝고 투명한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그녀의 목소리인지 다른 여자의 목소리인지 판단하려고 애를 썼다. 그녀의 목소리가 아닌 것 같았다. 목소리가 지나치게 밝았다. 그러면서도 그녀의 목소리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얼핏 든 것은 그녀의 흔적이 어렴풋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번호가 맞는지 모르겠군요.”
나는 거의 중얼거리듯 말했다.
“누굴 찾으세요?”
목소리가 상냥했고, 상대에 대한 호기심이 묻어 있었다. 희우가 아닌 것 같았다. 희우는 상냥한 여자가 아니었다.
“강희우씨와…… 통화하고 싶습니다.”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빠르게, 단숨에 말했다.
“박민우 선생님이세요?”
여자의 목소리가 조심스러웠다.
“그렇습니다만……”
“선생님 전화를 많이 기다렸어요. 전 강희우의 딸입니다. 이름은 강영서이구요.”
“아, 그렇군요. 반가워요.”
나는 당황했으나, 목소리에는 당황을 애써 감추었다.
“엄만 좀 먼 곳에 계세요. 어쩌면 먼 곳이 아닐지도 모르겠군요. 엄만 선생님을 특별한 방식으로 초대하고 싶어했어요. 그러니까 전 까마귀거나 까치지요.”
“무슨 뜻인지……”
“지금 엄만 은하수 서쪽에서 옷감을 짜고 있어요. 선생님은 은하수 동쪽에서 소를 키우고 계시구요. 문제는 은하수죠.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선생님이 은빛으로 빛나는 별들의 강을 건너시려면 제 도움을 받으셔야 해요. 제가 오작교이니까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묘한 울림이 있었다. 목소리가 그저 밝지만은 않았다. 밝은 목소리 안에 우수 같은 것이 은밀히 고여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에서 희우의 흔적을 느낀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몰랐다.
“엄마가 선생님을 초대한 곳은 정릉 집이에요.”
“희우씨가 어머님과 함께 살았던 집 말인가요?”
“맞아요. 엄만 선생님이 바쁘시지 않은 날에 오셨으면 해요.”
“요즘은 바쁘지 않으니까 희우씨가 원하는 날짜에 가면 되겠군요.”
“이번주 금요일은 어떠세요? 모레 말이에요.”
“괜찮습니다. 몇시가 좋을까요?”
“해질 무렵에 오세요.”
“그때 갈게요.”
“빈손으로 오실 거예요?”
“빈손으로 가면 안될 것 같군요.”
“엄마가 정말 좋아할 선물을 알려드릴까요?”
“알려줘요.”
“선생님의 사진작품이에요.”
“내가 사진장이라는 걸 어떻게 알았어요?”
“작년 겨울 엄마랑 선생님 작품전시회에 갔는걸요.”
“희우씨가 전시회장에 왔었어요?”
가슴이 철렁했다.
“엄만 한번만 간 게 아니에요. 여러번 갔어요. 선생님 몰래.”
“희우씬 빠리에 있지 않아요?”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서울에 자주 왔어요. 그러다가 언젠가부터 한국으로 돌아올 생각을 했어요. 차근차근 돌아올 준비를 한 거예요. 엄마가 아주 돌아온 건 작년 구월이에요.”
“희우씬 빠리에서 무얼 했어요?”
“엄만 의사였어요.”
“뜻밖이군요.”
“왜 뜻밖이에요?”
“내가 아는 희우씬 불문학을 전공한 문학도였거든요.”
“아, 그래서 엄마가 글을 잘 쓰는군요.”
“글을…… 아주 잘 썼지요.”
나는 나지막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저, 이런 질문을 해도 될지 모르겠네요.”
“해요.”
“선생님은 결혼하셨어요?”
“했었지요. 지금은 혼자 살지만. 이혼했어요.”
“왜 이혼하셨어요?”
“내가 남자답지 못한 탓이었지요.”
“제가 괜한 질문을 했나봐요.”
“전혀 그렇지 않아요. 궁금한 게 있으면 더 물어봐요.”
“아녜요. 됐어요. 선생님의 전화, 무척 반가웠어요. 사실 전 은근히 불안했거든요. 전화가 오지 않으면 어떡하나, 하구요. 엄마가 기뻐할 거예요. 그럼 모레 뵐게요. 안녕히 계세요.”
머릿속이 몽롱했다. 희우 딸과의 통화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희우가 보낸 편지조차도 현실로 느껴지지 않았다. 소파에 누웠다. 눈이 스르르 감겼다. 강이 보였다. 작은 배도 보였다. 배 위에서 누군가가 노를 젓고 있었다. 노를 젓는 이가 나 같기도 했고, 희우 같기도 했다. 강은 진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진흙을 헤쳐나가는 배의 움직임은 느렸다. 낙타 한마리, 강변을 빠르게 지나고 있었다. 바람이 불고 물결이 일었다. 진흙의 물결이었다. 낙타의 걸음걸이가 달라지고 있었다. 앞발을 치켜든 낙타는 허공을 걷기 시작했다. 허공을 걷는 낙타의 걸음걸이는 경쾌했다. 바람이 멈추었다. 진흙의 물결이 고요해지고 있었다. 눈을 떴을 때 허공 속으로 사라져가는 낙타가 얼핏 보였다. 낙타의 등 위에는 눈썹 같은 달이 걸려 있었다.
3
어스름에 싸인 골목은 적막했다. 나뭇가지가 적막 속에서 소리없이 흔들렸다. 길이 꺾이는 곳에 녹색 화분 두개가 놓여 있었다. 목련나무가 보이는 집 앞에 섰다. 자주색 벽돌담은 변함이 없었다. 등나무 덩굴이 드리워진 창을 올려다보았다. 희우의 방이었다. 여기에 서서 희우의 창을 올려다보면 서리가 가슴에 쌓이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히곤 했다. 해가 지고 깜깜한 밤이 되면 주인 없는 방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나왔다. 부서진 꿈을 비추는 듯한 그 빛은 먼 별빛처럼 아득했다. 그 아득한 빛을 멍하니 보고 있으면 가느다란 현악기 소리가 들려왔다. 깊은 물속에서 흘러나오는 듯한 그 소리를 찾아 두리번거리면, 하늘에 가득한 별들이 눈에 박혔다.
흰색 나무문은 열려 있었다. 살며시 안으로 들어갔다. 나무와 꽃들이 어우러진 정원이 보였다. 감나무와 회양목, 목련과 붓꽃이 시선에 걸렸다. 회양목 아래에는 평상이 있었고, 평상 위에는 푸른빛이 도는 찻잔 하나가 놓여 있었다. 방금 누군가가 찻잔을 살며시 올려놓은 것 같았다.
“오셨어요.”
고개를 드니 검은색 투피스를 입고, 머리를 뒤로 빗어 단정히 묶은 젊은 여자가 서 있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키에, 몸은 약간 말라 보였다.
“강영서예요. 전화로 통화한.”
영서의 얼굴은 희우와 많이 달랐다. 희우가 눈이 길쭉한 데 비해 영서의 눈은 동그랬다. 희우보다 입이 컸고, 볼도 통통한 편이었다. 그러나 깊이 들어간 눈과 넓은 이마, 고집스러워 보이는 야윈 턱은 희우와 닮아 있었다.
“반가워요.”
나는 살짝 웃으며 말했다. 영서는 활짝 웃었는데, 희고 가지런한 치아가 예뻤다.
“안으로 들어오세요.”
영서를 따라 현관으로 들어섰다. 거실이 그전보다 넓어 보였다. 전에는 없었던 통유리 때문인 듯했다. 창 너머로 정원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것, 선물이에요?”
영서는 내가 들고 있는 것을 눈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가 좋아하겠어요.”
영서는 사진이 들어 있는 액자를 받아들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영서를 물끄러미 보았다. 이제는 희우가 나타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를 찾으세요?”
이상했다. 영서의 눈이 붉어지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고일 것 같았다.
“내가 아직 별들의 강을 건너지 못했나요?”
나는 애써 쾌활하게 말했다.
“엄만……”
목소리가 겨우 들렸다.
“돌아가셨어요.”
“……”
“선생님이 보신 편지는 엄마가 미리 써놓은 거예요.”
“왜 죽었어요?”
“암이었어요.”
“언제 죽었나요?”
“오늘이 십육일째예요. 편지는 제가 부쳤어요. 엄마의 부탁이었어요.”
“자기가 죽으면 부치라고 하던가요?”
영서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원의 꽃들이 흔들리고 있었다. 바람은 부는데 바람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받으세요. 이건 선생님이 오시면 드리라고 한 편지예요.”
영서는 연두색 봉투를 탁자에 놓고 조용히 방 안으로 들어갔다.
너무나 그리운 당신
마침내 당신이 희우 집에 왔군요. 제가 당신을 그리워하며 편지를 썼던 여기에 말이에요. 편지를 쓰다가 당신이 너무 그리워, 당신이 너무 보고 싶어 수화기를 들었다 놓은 적이 한두번이 아니어요. 언젠가는 마지막 번호까지 누른 적이 있었어요. 수화기에서 당신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제 귀는 당신의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답니다. 소리의 색채까지도) 전 그만 수화기를 내려놓았어요.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더군요.
어머니가 저에게 남긴 선물을 보기 전까지 저는 당신을 그리워하지 않았어요. 저에게 당신은 과거의 흐릿한 그림자에 불과했어요. 시간의 바람에 쓸려 어디론가 사라져버린다 해도 애틋할 것도 없는. 그러니까 어머니의 선물이 저를 통째로 흔들어놓은 거예요. 아, 이런 표현으로는 부족해요. 제가 받은 충격과 놀라움, 그 미칠 듯한 고통과 슬픔과 희열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당신은 무척 궁금하실 거예요. 어머니의 선물이 뭔지.
저는 한국을 떠나면서 제 안의 어떤 부분을 버렸어요. 버린다고 그냥 버려지는 것이 아니었지만, 아무튼 전 모질게 버렸어요. 어머니의 죽음이 없었다면 제가 이렇게 돌아올 수 있었을지, 지금도 모르겠어요. 아무튼 전 20년 만에 정릉 옛집으로 돌아왔어요. 자주색 벽돌담을 두른 낡은 양옥 말이에요. 20년 동안 어떻게 정릉 집을 한번도 찾지 않았느냐고 당신은 묻고 싶겠지요. 제가 프랑스로 떠나고 나서 얼마 후 어머닌 정릉 집을 팔고 충청도에 있는 작은 도시로 이사했어요. 이모가 있는 수녀원 근처 동네였어요. 제 이모가 수녀인 것, 당신 아시죠? 어머닌 13년을 거기서 살다가 2000년 봄에 정릉의 작은 빌라로 살림을 옮겼어요. 옛집과 그리 멀지 않은 곳이지요. 그러다가 2년 전 옛집 주인이 집을 내놓은 것을 알고 다시 샀던 거예요. 어머닌 옛집이 많이 그리웠던가 봐요.
정릉이 많이 변했더군요. 들쑥날쑥 솟아 있는 고층 아파트 때문에 동네가 많이 흉해졌어요. 그런 모습이 무척 낯설었어요. 하지만 집이 가까워지면서 낯익은 풍경이 보였어요. 우리 집으로 가는 길목에 경사가 급한 돌층계가 있었잖아요. 그것이 고스란히 있더라구요. 난간이 바뀌긴 했지만. 제가 정말로 놀란 건 집에 들어가서였어요. 제 방은 옛날 그대로였어요. 제가 쓰던 책상도, 붙박이장도, 벽 위에 걸린 시계도, 다락방으로 오르는 낡은 나무계단도 모두 그대로였어요. 어머니가 딸의 방을 복원시켜 놓은 거예요. 다락방에는 갖가지 물건들이 있었어요. 낡은 앨범들과 칠이 벗겨진 소반, 고장난 축음기와 녹슨 트럼펫, 노끈으로 묶어놓은 누런 책들과 다리 하나가 부러진 우단 의자. 모두가 낯익은 물건이었어요. 어머닌 오래된 물건에 대한 집착이 유난히 강했지요. 낯익은 물건들 속에 낯선 것이 하나 있었어요. 녹슨 트럼펫과 우단 의자 사이에 있는 그것은 부피가 제법 나가는 흰 종이상자였어요. 저는 호기심에 그 상자를 제 앞으로 끌어당겼어요. 무엇이 들었는지 모르지만 생각보다 무거웠어요. 풀어보니 편지봉투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어요. 당신이 저에게 보낸 편지였어요. 저는 한동안 넋을 놓고 있었어요. 누군가가 마법을 부린 것 같았어요. 맞아요. 그건 마법이었어요. 어머니가 저에게 남긴 마법의 선물이었지요. 이것을 설명하려면 20년 전으로 거슬러올라가야 해요. 그때 전 조용히, 소리없이 한국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어요. 알릴 수밖에 없는 몇몇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철저히 숨겼어요. 당신에게도 알리지 않았지요. 잠깐만요. 어떤 통증 때문에 생각의 흐름이 잠시 끊겼어요. 예리하고 깊은 이 육신의 통증은 저의 일부예요. 떼고 싶지만 뗄 수가 없는. 그러니 받아들일 수밖에요.
펜을 놓고 한동안 누워 있다 지금 책상에 앉았어요. 그때 제가 해야 할 일 가운데 하나가 물건 분류였어요. 세 종류로 분류했어요. 가져갈 물건과 버릴 물건, 가져갈 수는 없지만 버릴 수도 없는 물건으로요. 분류하는 과정에서 저의 마음을 착잡하게 한 물건이 있었어요. 당신이 저에게 보낸 편지였어요. 당신, 기억하세요? 당신이 저에게 얼마나 많은 편지를 보냈는가를. 우리들이 사랑하고 있었을 때는 물론, 당신이 감옥에 들어간 이후에도 당신은 끊임없이 편지를 보냈어요. 당신이 감옥에 들어간 이후에 전 모질게도 답장을 한번도 하지 않았지요. 언제부턴가는 당신의 편지를 읽지도 않았어요. 당신을 잊고 싶어했으니까요. 정확하게 말하자면, 제 안의 어떤 존재를 잊고 싶었어요. 그 어떤 존재 속에 당신이 깃들어 있었어요. 그러니 당신을 잊어야 했던 거예요.
저는 당신의 편지를 버리기로 했어요. 당신은 잊어야 할 사람이었으니, 당신의 편지도 버려야만 했지요. 저는 당신의 편지를 누런 종이로 만든 박스 안에 넣고는 버리는 물건들을 쌓아둔 곳에 놓았어요. 버려야 할 물건들이 참 많았어요. 제가 잊고자 한 제 안의 어떤 존재와 연관된 물건이 많았던 게지요. 그러고는 프랑스로 떠났어요. 하지만 전 당신을 쉽게 잊지 못했어요. 편지는 쉽게 버릴 수 있었지만 제 안에 깃든 당신의 존재는 쉽게 버려지지가 않았어요. 아무튼요, 당신의 편지를 다락방 안에서 보았을 때 그것이 저에게 얼마나 소중한 선물인지 몰랐어요. 단지 전 어머니가 당신을 좋아했기에 당신의 편지를 차마 버리지 못했구나, 생각했을 뿐이었어요. 그것을 다시 버리기에는 세월이 너무 지나 있었어요. 저에게는 버릴 힘이 없었어요. 20년 전에는 버릴 힘이 있었지요. 당신을 버린다는 것은 과거를, 추억을 버리는 것이에요. 그것을 감당할 만한 에너지 없이는 불가능한 행위지요. 그때 제가 간절히 원한 것은 예리한 칼이었어요. 과거를, 추억을 단숨에 끊어버리는 칼 말이에요.
저는 당신의 편지에 손도 대지 않았어요. 그것을 버릴 힘도 없었지만, 추억의 흔적을 다시 들여다보고 싶은 욕망도 없었어요. 제가 당신의 편지를 읽게 된 건 우연이었어요. 삼우제가 끝난 날이었어요. 몹시 피곤했어요. 누군가가 손으로 톡 건드리기만 해도 쓰러질 것 같았어요. 이불을 펴고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았어요. 다락방으로 올라갔어요. 작은 창으로 스며드는 햇살이 희미했어요. 희미한 햇살 위로 몸을 죽 펴고 누웠어요.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어머니가 떠올랐어요. 어머니가 저보다 먼저 죽으리라고는 생각 못했어요. 제가 먼저 죽을 줄 알았어요. 저의 죽음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어머니를 상상하곤 했어요. 기분이 묘했어요. 엉뚱한 상상이라구요? 그렇지 않아요.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전 난소암 말기 환자였어요. 난소암은 증상이 늦게 나타나 초기에 발견하기가 참 힘들어요. 암이 퍼져 있어 수술이 힘들다고 의사가 그랬어요. 항암치료를 먼저 받았어요. 경과가 좋아 수술을 했어요. 제 몸 안에 있는 난소와 자궁을 들어냈지요. 당신, 이상하지 않나요? 난소와 자궁이 없는 여자의 몸이. 제가 그래요. 당신의 희우가 말이에요. 이런 얘긴 그만 하고 다락방으로 돌아갈래요. 어슴푸레한 햇살 속에 누워 있는 제 몸으로요.
잠이 든 것 같았어요. 아주 얕은 잠이었나 봐요. 몸에 닿는 소리를 느꼈어요. 처음에는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었어요. 시간이 지나면서 소리가 점차 보이기 시작했어요. 이상한 표현이지만 정말이에요. 책장 넘기는 소리가 보였어요. 동전 구르는 소리도 보였어요. 소녀의 한숨소리가 보였고, 뭐라고 중얼거리는 소리도 보였어요. 현악기 소리가 보이는가 하면 바람소리도 보였어요. 빗물 떨어지는 소리도, 꽃이 지는 소리도 보였어요. 그런 소리들이 어슴푸레한 다락방을 떠돌고 있었어요. 그 소리에 싸인 저의 몸은 완전했어요. 훼손당한 몸이 아니었어요. 칼의 흔적도 없었고, 몸의 일부가 뜯겨지지도 않았어요. 눈부신 몸이었어요. 그 눈부신 몸으로 다가오는 이가 있었어요. 당신이었어요.
당신, 기억하시나요? 우리가 처음 키스한 곳이 어디였는지를. 다락방이었어요. 불빛이 희미하게 비치는 다락방에서 당신은 저에게 눈을 감아보라고 했어요. 전 눈을 감았지요. 당신의 입술이 제 이마에 닿았어요. 따스하고 부드러운 감촉이 온몸으로 퍼져나갔어요. 제가 눈을 떴을 때 당신은 눈을 감고 있었어요. 눈을 감고 있는 당신의 얼굴이 발갛게 부풀어 있었어요. 전 발갛게 부푼 당신의 볼에 제 입술을 대었어요. 그러곤 다시 눈을 감았지요. 눈을 감고 당신이 눈을 뜨기를 기다렸어요. 왜 당신이 눈을 뜨기를 기다린 줄 아세요? 키스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어요. 전 당신과 키스하는 것을 수없이 상상했어요. 당시 저에게 키스란 연인의 표징이었어요. 전 당신의 연인이 되고 싶었어요.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요? 당신의 입술이 제 입술에 닿았어요. 아주 살며시. 그 느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몸 안에 작은 등잔불이 켜진 느낌이었어요. 기다란 그림자를 만드는, 따뜻하면서도 어두운 빛 말이에요. 그날이 언제인지 당신도 기억하실 거예요. 그날 저녁 7시 45분경 키 작은 독재자 박정희가 피살되었지요. 어떻게 생각하면 세상의 모든 일들은 우연이에요. 제가 여자로 태어난 것이 필연인가요? 제 어머니가 절 낳은 것이 필연인가요? 당신을 만나 사랑하고 헤어진 것도 필연인가요? 제 딸이 당신을 맞이한 것도 필연인가요? 전 우연이라고 생각해요. 모든 것이 우연이라면 삶이 허망하겠지요. 사람들이 우연을 필연으로 만드는 까닭은 삶의 허망 속으로 빠져들지 않기 위함이라고 저는 생각해요. 키 작은 독재자의 몸이 피투성이가 되었을 때 우린 사랑을 나누고 있었어요. 훗날 저는 종종 상상해보곤 했어요. 독재자의 피투성이 몸과, 사랑으로 빛나던 우리의 눈부신 몸을. 또다른 상상도 했어요. 독재자의 죽음 앞에서 통곡하는 아낙네와, 감옥에 갇힌 우리 아들 이제는 만날 수 있다면서 덩실덩실 춤을 추는 아낙네를. 이 쓰디쓴 우연의 겹침을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아득한 날들의 이야기지요. 그 아득한 날들의 풍경이 저를 사로잡고 있었어요. 전 스르르 일어나 흰 상자로 다가갔어요. 그리고 당신의 편지를 읽기 시작했어요. 창으로 스며드는 희미한 햇살 속에서.
당신이 저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편지를 읽기 전에는 몰랐어요. 당신이 저를 얼마나 그리워했는지도 편지를 읽기 전에는 몰랐어요. 제가 당신을 사랑하고 있었을 때조차도 저를 향한 당신의 사랑과 그리움의 깊이를 알지 못했어요. 아, 그뿐이 아니에요. 당신의 사랑이 당신에게 요구했던 슬픔과 외로움을, 전 까맣게 몰랐어요. 당신의 사진전시회에 갔던 날의 기억이 아프게 떠오르네요. 당신의 사진 곳곳에 슬픔과 외로움이 묻어 있었어요. 전 생각했어요. 당신이 사랑하고 그리워한 희우는 어디로 갔을까, 하고. 당신이 그리워한 만큼 저도 ‘희우’가 그리워요. ‘희우’는 ‘내 안의 나’였어요. 제가 버리고 싶어했던. 그리고 버렸던. 그래요. 전 ‘희우’를 버렸어요. 제가 버린 ‘희우’가 얼마나 아름다운 존재였는지, 당신의 편지를 보고 알았어요. 그 아름다운 존재를 전 지금 사무치게 그리워하고 있는 거예요. 오래전 당신이 그랬듯이.
어머니가 저에게 어떤 선물을 주셨는지 이제 아시겠지요. 어머니의 선물을 보여드렸으니 제가 준비한 선물을 보여줄 차례가 되었군요. 저의 선물은 맛있는 밥상이에요. 제가 직접 밥상을 차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저는 어디론가 떠나야 해요. 당신이 오기 전에. 그곳이 어디인지 저는 몰라요. 어디인지도 모르는 곳으로 가야 하는 전 두려워요.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당신이 그리워져요. 당신이 그리워한 ‘희우’도 그리워져요. 너무나 그리워 고통스러워요. 조금 쉬어야겠어요. 눈물이 편지지를 적셨어요. 지금 전 다락방에서 편지를 쓰고 있어요. 낮은 소반이 책상 역할을 해요. 작은 스탠드도 갖다 놓았어요.
잠시 누웠다 방금 일어났어요. 밥상 이야기를 하다가 감정이 복받쳤어요. 밥상은 당신이 먼저 차려주었지요. 1984년 시월 어느날에. 그때 당신은 인천의 한 공장에서 노동자 생활을 하고 있었어요. 당신이 그랬지요. 세계를 뒤집기 위해서는 세계의 끄트머리에 서야 한다고. 당신에게 노동자가 된다는 것은 세계의 끄트머리에 서는 행위였지요. 그날 전 당신이 사는 데를 처음 가보았어요. 대낮에도 불을 켜야만 하는 지하 쪽방이었지요. 화장실에 들어가는데, 맙소사! 허리를 절반으로 꺾지 않으면 들어갈 수가 없었어요. 냄새는 또 얼마나 지독하던지…… 그런 화장실을 여섯 세대가 같이 쓴다고 당신은 태연하게 말했지요. 제가 정말 놀란 건, 당신이 그런 쪽방에 산다는 걸 행복해하고 있다는 사실이었어요. 밤에 얼마나 잠이 잘 오는지 모른다고 말할 때 당신의 얼굴에는 행복이 가득했어요. 그 쪽방에서 당신은 저를 위해 밥상을 차렸어요. 그 밥상, 기억나세요? 김이 모락모락 나는 김치찌개가 먼저 눈에 들어와요. 참 이상해요. 여기 이 다락방에 앉아 있으면 기억이 아주 잘 나요.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들이 홀연히 떠올라요. 그리움이 기억을 끌어당기는 것 같아요. 김치찌개 다음으로 떠오르는 건 따뜻한 쌀밥이에요. 무김치와 멸치볶음도 떠오르네요. 전 밥을 맛있게 먹었어요. 반 그릇이나 더 먹었는걸요. 정말 맛있었어요. 전 당신에게 말했지요. 다음에는 제가 밥상을 차리겠노라고,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밥상을 차리겠노라고. 당신은 생각만 해도 침이 넘어간다고 했어요. 그때 전 까맣게 몰랐지요. 그것이 우리의 마지막 만남이라는 사실을.
많이 늦었지만 그 약속을 지키고 싶었어요.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밥상을 영서에게 부탁해놨어요. 당신이 반가워하리라 믿어요. 이제 편지를 끝낼게요. 저녁식사, 맛있게 하세요. 참, 깜박 잊을 뻔했네요. 당신 혼자 식사하지 마세요. 영서와 함께 하세요. 저를 보듯 영서를 보시면, 밥이 더 맛있을 거예요.
당신의 희우
4
밥상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따뜻한 쌀밥 두 그릇과 김치찌개, 멸치볶음과 무김치가 전부였다. 인천의 쪽방에서 내가 차린 밥상과 똑같았다.
“이 음식들은……”
마주앉은 영서가 눈을 내리깔며 나직이 말했다.
“엄마가 차린 거예요. 전 다만 엄마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에요.”
눈물이 핑 돌았다.
“이 밥상이 왜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밥상인지, 엄마가 얘기해주었어요.”
“수긍이 가던가요?”
“네.”
“희우씨가 무척 좋은 딸을 둔 것 같네요.”
“감사합니다.”
영서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선생님이 가져오신 사진, 참 좋았어요.”
“다행이네요.”
“엄만 더 좋아할 거예요. 그래서 얼른 엄마 책상에 올려놓았어요.”
“잘했군요.”
숟가락을 들어 김치찌개 국물을 떴다. 얼큰하고 칼칼한 맛이 입 안에 가득했다. 맛이 어때? 희우의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주 맛있어. 나는 소리없이 말했다.
5
희우의 방은 어스름했다. 해는 벌써 졌으나 잔광이 떠돌고 있었다. 책상 위에 놓인 연두색 편지봉투가 나뭇잎처럼 보였다. 내가 선물로 가져온 사진이 비스듬한 위치에서 연두색 편지봉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방에 다시 들어올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희우의 방은 과거의 공간이었다. 그녀가 어디론가 사라졌듯이 그녀의 방도 어디론가 사라진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 나는 어디에 있는가. 현실의 시간이 흐르지 않는,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가공의 세계에 들어와 있는 듯했다. 나 자신도 방금 만들어진 존재처럼 느껴졌다. 거울에 내 얼굴과 전혀 다른 얼굴이 비친다 해도 놀라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편지봉투를 집었다. 따뜻한 생명체의 촉감이 손바닥에 전해져왔다.
사랑하는 당신
식사, 맛있게 하셨나요? 남이 본다면 초라하고 단순한 밥상이겠지만 제게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밥상이에요. 희우와 당신의 추억이 서려 있으니까요. 희우는 당신을 사랑했어요. 당신이 없는 삶을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랑했어요. 그런 희우가 당신을 떠났어요. 감옥에 있는 당신을 두고 먼 곳으로 떠났어요. 당신에게 편지 한장을 남긴 채.
그랬다. 작별을 통고하는 편지의 내용은 짧고 건조했다. 그 짧고 건조한 편지가 나를 치명적 상태로 몰아넣었다. 먹는 즉시 토했다. 먹고 싶어도 먹을 수가 없었다. 교도관이 단식투쟁으로 오해할 정도였다. 수정(手錠)과 족쇄에 묶여 먹방에 갇혀 있을 때도 음식을 먹었다. 개처럼 엎드려 입으로 먹었다. 모순을 직시하는 희디흰 사상의 뼈가 먹으라고 속삭였다. 먹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개가 뼈를 핥듯, 사상의 흰 뼈를 핥았다. 힘겨운 수배생활과 무자비한 고문을 견딜 수 있었던 것도 사상의 희디흰 뼈가 칠흑 같은 어둠을 밝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짧은 편지는 그토록 견결한 뼈를 단숨에 꺾어버렸다. 허물어진 정신은 생명을 거부했다. 정신병동이 있는 교도소로 이감되었을 때 내 몸은 참혹하게 말라 있었다.
희우가 왜 사랑하는 당신을 떠났을까요? 떠나는 이유조차 밝히지 않고. 그땐 밝힐 수가 없었어요. 그것을 밝힌다는 건, 제겐 불가능했어요. 왜냐구요? 운명의 망치를 정통으로 맞았으니까요. 그것이 운명인 줄 모른 채 말이에요. 저는 운명의 모습이 장엄할 줄 알았어요. 장엄하지 않은 것이 어찌 운명이라 할 수 있겠어요. 젊음의 열정은 운명의 장엄함을 숭배하는 열정이라고 저는 생각했어요. 당신이 인천 쪽방에서 행복해했던 것은 운명의 장엄함을 숭배했기 때문이었어요. 그땐 당신의 희우도 젊었었어요. 운명의 장엄함 앞에서 기꺼이 무릎 꿇을 준비가 되어 있었어요. 하지만 저를 급습한 운명의 모습은 장엄하지 않았어요. 장엄하기는커녕 지독하게 통속적이었어요. 너무나 지독한 통속이었기에 그게 운명인 줄조차 몰랐던 거예요. 그러니 눈을 감을 수밖에요. 그 끔찍한 통속 앞에서.
제가 사복형사 두명에게 강제연행된 것은 당신을 만난 지 한달이 조금 지났을 무렵이었어요. 햇살이 기우는 늦은 오후였어요. 학교에서 나와 버스정류소로 가는데, 그들이 불쑥 나타났어요. 당신의 이름을 대면서 몇가지 물어볼 게 있다고 하더군요. 무뚝뚝하긴 했지만 위협적이거나 무례하지는 않았어요. 그래도 불안하기는 했어요. 그동안 우린 한번도 못 만났지요. 제가 당신이 일하는 공장으로 두차례 전화를 했으나 연결이 안되었어요. 당신에게서 전화도 없었구요. 그들은 대기시켜놓은 포니 자동차에 절 태웠어요. 경찰서에 도착하는 동안 그들은 쉴 새 없이 떠들었어요. 아들놈 성적이 떨어진다는 둥 중학생 딸년이 말을 안 듣는다는 둥 마누라 잔소리가 심해졌다는 둥 대부분 집안 이야기였어요.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불안이 많이 누그러졌어요. 지극히 일상적인 대화였으니까요. 그들은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었어요. 경찰서 건물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우중충했어요. 불안이 되살아나더군요. 그들은 조사실 의자에 저를 앉히고는 당신의 거처를 물었어요. 무슨 일인지는 알 수 없으나 당신을 숨겨야 한다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들었어요. 우리가 만났을 때만 해도 당신은 수배자가 아니었어요. 그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게 분명했어요. 전 모른다고 했어요. 연락이 끊어진 지가 오래되었다고 했지요. 그 순간 뺨에 불이 번쩍 했어요. 개쌍년이라는 욕설도 들렸어요. 워낙 순식간의 일이라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어요. 제가 당황한 목소리로 정말 모른다고 하자 한 형사가 제 머리채를 휘어잡더니 너 처녀야? 하고 물었어요. 전 격앙된 목소리로 그렇다고 했어요. 정말인지 확인해보자면서 옷을 벗으라고 하더군요. 제가 꼼짝도 하지 않자 그는 강제로 옷을 벗기기 시작했어요. 조금만 반항해도 주먹이 날아왔어요. 팬티만 입은 채 오들오들 떨고 있는데, 그가 동료에게 물었어요. 저것도 벗길까? 동료는 대답했어요. 조금 있다가. 그들은 저를 무릎 꿇게 한 다음 수갑을 뒤로 채웠어요. 제가 당신의 거처를 자백하기까지 겪은 모욕과 고통은 여기에 쓰고 싶지 않아요.
형사들이 다시 들이닥친 건 자백한 지 네시간이 지나서였어요. 그땐 두 사람이 아니었어요. 다섯 사람이 들이닥쳤어요. 그들은 화가 나 있었어요. 한 사람은 쇠로 만든 야구방망이를 들고 있었어요. 전 스르르 주저앉았어요. 숨을 쉴 수가 없었어요. 그년 가랑이에 가시방망이를 쑤셔 박아.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두 사람이 덤벼들었어요. 저는 순식간에 발가벗겨졌어요. 팬티조차 없었어요. 야구방망이가 제 몸을 쿡쿡 찔렀어요. 가슴을 가리면 음부를 찌르고, 음부를 가리면 가슴을 찔렀어요. 제가 구토를 시작한 것은 제 몸이 뜯기고 있다는 느낌 때문이었어요. 몸이 뜯기면서 흘러나오는 비린내를 견딜 수가 없었어요. 그것은 낯선 공포였어요. 무엇에 의해서도 훼손될 수 없는 어떤 본질이 훼손당하고 있다는 느낌에서 솟아오르는. 어떤 생명도 파멸시킬 수 있는 그 공포 앞에서 저는 당신에 관해 있는 말 없는 말 다했어요. 그들에게 말한 것이 아니었어요. 공포에게 말했어요.
저는 한없이 울었어요. 눈물은 마르지 않고 흘러내렸어요. 눈물과 함께 몸 안에서 무언가가 쉼없이 빠져나갔어요.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것 대신 채워지는 게 있었어요. 수치심이었어요. 텅 비어가는 몸 안을 수치심이 채우고 있었어요. 몸이 떨리기 시작했어요. 텅 빈 몸 안으로 흘러들어오는 수치심이 절 춥게 만들고 있었어요. 너무나 추워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어요. 물 위에 떠 있는 죽은 물고기가 보였어요. 야윈 새의 그림자도 보였고, 아이의 파리한 얼굴도 보였어요. 은화처럼 반짝이는 달이 보였고, 보랏빛 광선에 싸인 나비도 보였어요. 그것을 보면서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어요. 너무나 날카로운 고통이라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어요. 벌어진 입에서 꺼멓게 탄 신음소리가 간신히 새어나왔어요.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가 없었어요. 추위에 떨다가 잠이 들었는지도 몰라요. 뭔가 이상했어요. 누군가가 제 몸을 마구 헤집는 것 같았어요. 눈을 뜨기가 힘들었어요. 눈꺼풀이 천근처럼 무거웠어요. 겨우 눈을 떴어요. 시커먼 것이 보였어요. 사람이었어요. 사람만이 그 짓을 할 수가 있으니까요. 몸은 몽둥이에 후려 맞은 것처럼 늘어져 있는데, 두 손은 묶여 있었고, 그는 엄청난 힘으로 절 짓누르고 있었어요. 저항이 불가능했어요. 이런 고백, 정말 힘들어요. 펜을 몇번이나 놓았어요. 그 사람이 누구인지 지금도 몰라요. 다음날 오전 그들은 절 풀어주었어요. 어떻게 집으로 갔는지 모르겠어요. 어머니가 아무리 물어도 대답을 못했어요. 할 수가 없었어요. 말로는 표현되지 않는 것들을 묻고 있었으니까요.
창가로 갔다. 밖은 어두웠다. 어둡고 적막한 길 위에서 갈 곳을 찾지 못해 서성거리는 한 청년이 떠올랐다. 지도부가 나에게 피신과 비밀활동을 지시한 것은 희우를 만난 지 닷새 후였다. 그 전날 동지 한 사람이 체포되었다. 그의 체포는 그와 연결된 수많은 동지의 이름들이 정보경찰의 수중으로 들어갈 수 있음을 의미했다. 나는 즉각 짐을 쌌다. 수배생활에 들어간다는 것은 자신의 이름을 버리는 행위다. 이름을 버림으로써 이름과 연관된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가 단절된다. 단절된 사람들 안에 희우가 있었다. 희우는 그들 안에서 스스로, 홀로 빛났다. 스스로, 홀로 빛나는 희우는 사무치게 아름다웠다. 철저한 고립 속에서도 비애와 분노에 사로잡히지 않았던 것은, 무서운 꿈과 절망에 함몰되지 않았던 것은 사무치게 아름다운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집에 들어와 제가 맨 처음 한 일은 목욕이었어요. 살갗에 피가 나도록 문질렀어요. 비누칠은 또 얼마나 했는지 몰라요. 눈물을 흘리며 몸을 씻고 또 씻었어요. 아무리 씻어도 더럽혀진 느낌이 사라지지 않았어요. 영원히 더럽혀진 느낌이었어요. 그것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당신은 모르실 거예요. 저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요. 영원히 더럽혀진 존재를 위해 무엇을 할 수가 있겠어요? 음식조차 못 삼켰어요. 하루 종일 먹지 않아도 배가 안 고팠어요. 먹는 것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어요. 어머니가 음식을 먹이려 하면 분노가 치밀어올랐어요. 마지못해 먹게 되면 어머니 몰래 토해버렸어요. 희망이 없었어요. 그토록 눈부셨던 희망의 성채는 깡그리 파괴되어버렸어요. 저는 겨우 숨을 쉬고 있을 뿐이었어요. 그래도 시간은 흘러가더군요. 지옥 같은 하루들이 쌓여 일주일이 되고, 한달이 되고……
그러던 어느날이었어요. 정원 곁에 있는 의자에 앉아 있었어요. 하늘에는 구름 한점 없었어요. 햇살은 마당에 물처럼 고여 있었고요. 벌들이 노랗게 핀 산국 주위를 맴돌며 윙윙거렸어요. 바람이 뺨을 살짝 스치며 지나갔어요. 산국의 노란 잎사귀가 느리게 흔들렸어요. 현기증이 났어요. 세상이 멀어지고 있었어요. 멀어져가는 세상이 한폭의 풍경처럼 보였어요. 맞아요. 그건 어슴푸레 빛나고 있는 한폭의 풍경이었어요. 풍경과 저 사이에는 아득한 허공이 가로놓여 있었어요. 아득한 허공은 풍경을 비현실적으로 보이게 했어요. 꿈속의 풍경처럼 말이에요. 어쩌면 풍경이 꿈을 꾸고 있었는지도 몰라요. 제 말, 이상하게 들려요? 풍경이 꿈속에서 저를 보고 있을 수도 있지 않나요? 제가 누군가를 꿈꾼다면, 누군가는 저를 꿈꿀 수 있지 않을까요? 서로에 대해 꿈을 꿀 수 없다면 그건 정말 아무런 관계가 아닌 거예요. 그런 점에서 장자의 말은 의미심장해요. 우리가 나비를 꿈꾸었다면, 나비도 우리를 꿈꿀 수 있는 거예요. 나비를 신(神)으로 바꾸어보세요. 우리는 신을 꿈꾸는데, 신이 우리를 꿈꾸지 않는다면 우리와 신은 무엇으로 연결되어 있을까요?
말이 빗나갔네요. 다시 돌아갈게요. 저는 허공 너머에서 어슴푸레 빛나고 있는 풍경을 우두커니 보고 있었어요. 이상했어요. 가슴 속에서 알 수 없는 기쁨이 차오르기 시작했어요. 제가 기뻐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어요. 그럼에도 기쁨이 맑은 이슬처럼 차올랐어요. 어슴푸레 빛나는 풍경은 아름다웠고, 기쁨에 넘친 저는 황홀에 잠겨 있었어요. 저는 저를 잊어버렸어요. 제가 누구인지 알 수도 없거니와, 알아야 할 이유가 전혀 없었어요. 저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어요. 그러면서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어떤 존재였어요. 씨앗과 같은. 그랬어요. 전 하나의 씨앗이었어요.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있는 씨앗이 되어 어슴푸레 빛나는 풍경을 보고 있었어요.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어요. 몸 안에서 무언가가 느껴졌어요. 몸의 가장 깊은 곳, 어둡고 어둔 그곳에서. 저는 꼼짝을 하지 않았어요. 숨조차 쉬지 않았어요. 어슴푸레 빛나는 풍경은 사라졌어요. 기쁨도 사라지고, 씨앗 같은 존재도 사라졌어요. 내 몸이 덜덜 떨고 있었어요. 언제부터 떨었는지 알 수가 없었어요. 전 겁에 질려 있었어요. 일어날 수도 없고 앉아 있을 수도 없었어요. 소리를 지를 수도 없고 침묵할 수도 없었어요. 울 수도 없고 울지 않을 수도 없었어요. 바람이 다시 불기 시작했어요. 산국이 흔들렸어요. 물매화도 흔들렸어요. 수레국화도 흔들렸어요. 누리장나무도, 고추나무도, 백당나무도, 패랭이꽃도 흔들렸어요. 나는 벌떡 일어났어요. 몸이 휘청, 했어요. 뜰을 향해 똑바로 걸어갔어요. 꽃들을 뜯었어요. 가지들을 꺾었어요. 닥치는 대로 뜯고, 닥치는 대로 꺾었어요. 가시에 살이 긁혀도 동작을 멈추지 않았어요.
바람은 멈추었고, 사방이 고요했어요. 말간 햇살 속에서 정원은 흉측하게 변해 있었어요. 당신도 알지요. 어머니가 정원에 얼마나 정성을 기울이는지. 꽃에 대한 어머니의 몰두와 애정은 유별났지요. 날씨가 변덕스런 봄이면 자신이 심은 어린 식물이 죽을까봐 근심어린 얼굴로 들여다보는 어머니의 모습을 자주 보았어요. 사나운 비바람에 꺾인 푸른빛 수레국화 앞에서 오랫동안 꼼짝도 않고 앉아 있는 모습도 보았어요. 삼십대 젊은 나이에 이혼녀가 된 어머닌 평생 혼자 살았어요. 어머니의 삶은 상상력이 결핍된 화가의 단조로운 그림과 흡사했어요. 하지만 예외가 있었어요. 정원이었어요. 정원에서는 어머니의 얼굴이 광채에 싸여요. 정원에서는 어머니의 얼굴이 꿈을 꾸는 듯한 표정을 지어요. 정원에서는 어머니의 얼굴이 애처로워져요. 정원에서는 어머니의 얼굴이 고요해져요. 정원에서는 어머니의 얼굴이 아득해져요. 아득한 어머니의 얼굴이 지금도 눈에 선해요. 늦가을이었어요. 해가 지고 있었어요. 정원에 서 있는 어머니를 우연히 보게 되었어요. 어머니의 얼굴은 아득했어요. 그것은 일상의 아득함이 아니었어요. 어떤 아득함이었을까요. 어쩌면 어머닌 생명과 생명 사이의 아득함을 느끼고 있었는지도 몰라요. 생명과 죽음 사이의 아득함을 느꼈을 수도 있지요. 아니면 별과 별 사이의 아득함이었을까요. 어머니에게 정원은 그토록 특별한 공간이었어요. 그 특별한 공간을 제가 흉측하게 만들어놓은 거예요.
당신은 이런 사실을 알고 계시나요? 임신능력이 있는 강간희생자 가운데 5%가 임신을 한다는 사실을 말이에요. 그 5% 안에 제가 들어간 것은 우연이었지요. 당신의 희우가 가혹한 우연의 우물 속에 빠져버린 거예요. 다음날 의사로부터 임신 사실을 확인했을 때 저는 놀라지 않았어요. 전 이미 알고 있었어요. 어머니의 정원 앞에서.
병원에서 나와 버스를 탔어요. 제가 내린 곳은 시외버스 터미널이었어요. 전 매표소 앞에 섰어요. 제가 가고자 했던 곳은 강이었어요. 왜 강으로 가려고 했을까요? 처음에는 저도 몰랐어요. 흐르는 강물이 그냥 떠올랐을 뿐이에요. 버스를 탄 지 한시간 반이 넘어서자 강이 보였어요. 버스에서 내렸어요. 가파른 언덕 아래 강이 있었어요. 강물 흐르는 소리가 나직이 들렸어요. 주위에는 집도 사람도 보이지 않았어요. 가파른 언덕을 조심조심 내려갔어요. 군데군데 커다란 돌이 박혀 있어 내려가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어요. 강가에 있는 평평한 바위에 앉아 강을 내려다보았어요. 햇살이 사금파리처럼 반짝였어요. 은색의 강물이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오기 시작했어요.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와 몸 안을 돌아다녔어요. 몸 안에서 찰랑거리는 소리가 났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어요. 강에 온 까닭은 몸을 깨끗이 씻기 위함이었음을 비로소 깨달은 거예요. 그랬어요. 전 흐르는 강물에 몸을 깨끗이 씻고 싶었어요. 몸이 깨끗해지려면 오래오래 씻어야 해요. 영원히 더럽혀진 몸이니 영원히 씻어야 해요. 강물 밑으로 가라앉는 몸이 보였어요. 죽음은 그토록 갑자기 제게로 왔어요. 저는 놀라지 않았어요. 그 낯선 손님은 저를 놀라게 할 만큼 흉측하지 않았어요. 흉측한 것은 어머니의 정원이었어요. 강물 속으로 들어갔어요. 물이 차가웠으나 견딜 만했어요. 차갑던 물이 점차 따뜻해지고 있었어요. 다리를 휘감는 물의 감촉이 부드러웠어요. 한발 한발 속으로 들어갔어요. 두렵지 않았어요. 두렵기는커녕 어떤 설렘 같은 것이 있었어요. 사라짐에 대한 설렘이었어요. 물이 가슴으로 차오르고 있을 때 시선이 느껴졌어요. 누군가가 저를 보고 있었어요. 저는 그가 누구인지 본능적으로 알았어요. 아이였어요. 제 몸 안에 있는 아이 말이에요. 그 아이에 대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제 안에 있으면서 바깥에 있었어요. 아무것도 모르면서 모든 것을 알고 있었어요. 생명 이전의 존재이면서 생명을 넘어서는 존재였어요. 그 아이가 절 내려다보고 있었어요. 아이의 얼굴은 슬퍼 보였어요. 눈에서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았어요. 몸이 균형을 잃으면서 물살 속으로 휩쓸려들어갔어요. 죽음의 조건은 충분했어요. 그런데 왜 죽지 않았을까요? 아이는 강물에 떠내려가는 저를 보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어요. 아이가 왜 눈물을 흘리는지 저는 궁금했어요. 너무나도 궁금했어요. 아이의 눈물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았다면 전 죽었을 거예요. 눈을 뜨니 병원이었어요. 어머니가 수심어린 얼굴로 절 내려다보고 있었어요.
다음날 저는 어머니와 함께 병원을 나왔어요. 가벼운 찰과상이 몇군데 있을 뿐 몸이 너무 멀쩡했어요. 어머닌 저를 조심스럽게 대했어요. 딸의 침묵을 억지로 깨뜨리려 하지 않았어요. 어머니는 저의 임신을 알고 있었어요. 의사에게 들었던 거예요. 그동안 숨겼던 일들을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충격에 사로잡힌 어머니의 얼굴, 지금도 또렷이 떠올라요. 안색이 창백했고, 무릎 위에 올려진 손이 덜덜 떨고 있었어요. 어머닌 낙태를 원했어요. 강하게 원했어요. 하지만 전 낙태를 할 수가 없었어요. 낙태를 할 수 없었던 이유를 당신은 아실 거예요. 그 아이가 영서예요. 영서와 함께 살아가려면 희우를 제 안에서 떼어내야만 했어요. 희우를 떼어내지 않으면 희우가 나를 죽이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희우를 떼어내려면 희우가 사랑하는 당신을 먼저 떼어내야만 했어요. 저는 살고 싶었어요. 징그럽게도 제 안에서는 생에 대한 욕망이 뱀처럼 꿈틀거리고 있었어요. 당신에게 이별의 편지를 쓸 수밖에 없었어요.
당신, 많이 놀랐을 거예요. 당신에게 이런 고백을 한다는 사실이 슬프기도 하고 기쁘기도 해요. 저는 지금 한없는 슬픔과 한없는 기쁨 속에서 편지를 쓰고 있어요. 당신이 없는 제 삶을 상상할 수 없듯이, 영서가 없는 제 삶 역시 상상할 수 없어요. 지독한 모순이지요. 삶이라는 것이.
나는 꼼짝도 하지 않고 편지를 응시했다. 무언가를 생각하려고 애를 썼으나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갑자기 다른 시간 속으로 떨어진 것 같았다. 누군가에 의해 내팽개쳐진 것 같기도 했다. 처음 듣는 얘기였다. 꿈에서조차도 생각한 적이 없는 얘기였다. 그녀가 연행되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아무도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희우도, 희우 어머니도 완벽하게 입을 닫았다. 내 존재가 그녀들의 침묵에 의해 지워진 느낌이었다.
제가 서울을 떠난 것은 1986년 11월이었어요. 그때의 서울 풍경, 당신도 잘 아실 거예요. 저항과 탄압이 난폭하게 충돌하는 치열한 전쟁터였지요. 그 전쟁터를 전 빠져나갔답니다. 영서는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고아원에 맡겼어요. 이모가 있는 데라 마음이 많이 놓였지요. 어머닌 핏줄을 외면하지 못했어요. 어머니가 정릉 집을 판 것은 영서 때문이었어요. 어머닌 어린 영서를 많이 예뻐했어요. 여느 할머니와 다름이 없었지요. 하지만 간혹 얼굴에 나타나는 슬픔과 회한은 어쩔 수가 없었겠지요. 영서를 프랑스로 데려간 건, 영서 나이 열두살 때였어요. 제가 정식으로 의사가 된 해였지요. 영서가 어머니와 작별할 때 모두 참 많이도 울었어요. 어머닌 영서를 프랑스로 보낸 후에도 일년 넘게 거기서 살았어요. 영서와 함께 한 동네에 정이 들었던가 봐요.
영서는 아버지를 알고 싶어했어요. 영서에게는 당연한 권리이자 자연스러운 욕망이었지요. 저는 영서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어요. 하지만 어떻게 진실을 말해요? 진실의 끔찍함이 그 아이에게 어떤 독이 될지 모르는데.
누가 영서의 아버지죠? 남성이에요. 단순하고 막연한 대답이라고 생각하시겠지만 저에겐 단순하지도 않고 막연하지도 않아요. 생명의 문제에서 여성은 가해자가 될 수 없어요. 신은 여성에게 남성의 발기된 성기와 같은 폭력의 무기를 주지 않았어요. 이런 점에서 여성은 숙명적으로 희생자예요. 저는 영서가 여성이었음을 알았을 때 기쁨과 슬픔을 동시에 느꼈어요. 기쁨의 이유는 가해자적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 때문이며, 슬픔의 이유는 희생자적 존재라는 사실 때문이었어요. 모든 남성이 가해자라는 뜻은 아니에요. 가해자가 될 가능성을 갖고 있다는 뜻이죠. 마찬가지로 모든 여성이 희생자가 될 가능성을 갖고 있지요. 저는 어떤 집단이나 사회를 평가할 때 이 가능성을 기준으로 삼아요. 나쁜 집단, 나쁜 사회는 가능성을 방치해요. 더 나쁜 집단, 더 나쁜 사회는 가능성을 확장시키죠. 불행히도 우리들의 청춘은 지독히 나쁜 집단과 사회의 폭력에 노출되어 있었어요. 수많은 청춘들이 희생당했어요. 당신의 희우는 그 희생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놀랍지 않으세요? 희생의 결과물이 영서라는 사실이. 제가 희생자가 되지 않았다면 영서는 태어나지 않았을 거예요. 삶이 달라졌겠죠. 달라진 삶을 생각한다는 건 의미가 없어요. 경험되지 않은 삶은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것은 삶의 실체예요. 영서는 제 삶 속으로 깊숙이 파고들어온 실체적 존재예요. 제 삶에서 영서를 분리한다는 것은 불가능해요. 영서는 고통의 존재였어요. 저는 까맣게 몰랐어요. 고통의 존재가 축복의 존재로 변화하리라는 것을. 이 생명의 신비 앞에서 저는 오랫동안 서성거렸어요. 신비는 질문을 유발해요. 저는 끊임없이 질문했어요. 생명의 신비에 대해. 제가 왜 산부인과 의사가 된 줄 아세요?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세상의 모든 어머니는 아이를 둥근 형상으로 품어요. 형상 가운데 가장 완전한 형상이 둥근 형상이에요. 둥근 형상은 기하학자들이 꿈꾸는 가장 아름다운 형상이에요. 당신, 난자가 어떤 형상인지 아세요? 둥근 형상이에요. 그것은 태양처럼 둥글어요. 태양처럼 둥근 형상 안으로 정자가 들어와요. 어머니는 아이를 완전한 형상으로 품고 있는 거예요. 그것은 모든 연인의 꿈이에요. 사랑하는 사람을 둥근 형상으로 품는 것 말이에요. 아시겠어요? 둥근 형상 안에 존재하는 아이는 어머니의 완전한 연인이에요. 비록 원치 않는 아이였다 하더라도 어머니는 그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어요. 세계가 완전한 사랑으로 둘러싸여 있다면 그건 낙원이에요. 우리가 태아시절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낙원의 시간이기 때문일 거예요. 하지만 낙원의 시간은 한정되어 있어요. 주어진 시간이 지나면 둥근 형상에서 빠져나와야 해요. 빠져나오지 못하면 죽어요. 둥근 형상에서 빠져나오는 순간 완전한 합일이 깨어져요. 그전과는 전혀 다른 관계, 새로운 관계가 시작되는 것이지요. 인간의 근원적 슬픔은 여기에서 비롯되는 것 같아요.
당신,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어요? 전 수없이 보았답니다. 눈은 꾹 감겨 있어요. 눈썹은 일그러져 있고요. 두 손은 누군가에게 간절히 애원하듯 내밀어져 있어요. 때때로 얼굴을 가리기도 해요. 두 발은 무언가를 쉼없이 걷어차다가도 몸을 동그랗게 말듯이 움츠려요. 입은 울부짖고, 머리는 격렬히 흔들리고 있어요. 아이의 작은 몸은 공포에 사로잡혀 오들오들 떨고 있어요. 울음소리는 또 얼마나 절망적인데요. 아이는 왜 그토록 괴로워하는 걸까요?
어머니의 몸 안은 어둡고 따뜻하고 고요해요. 어둡고 따뜻하고 고요한 물속의 세계에 잠겨 있던 아이가 바깥세계로 나오는 순간 폭력에 에워싸여요. 허파로 들어가는 공기가 불처럼 뜨거워요. 몹시 뜨거운 것을 삼킨 사람을 상상해보세요. 그 사람의 고통보다 아이의 고통이 더 클지도 몰라요. 투명하고 얇은 눈꺼풀 속으로 파고드는 빛 역시 불처럼 뜨겁기는 마찬가지예요. 소리의 고통도 엄청나요. 아이는 어머니의 몸 안에서 소리를 들어요. 하지만 양수 속에서 듣는 소리는 세상의 소리와는 근원적으로 달라요. 낙원의 소리니까요. 그런 아이의 귓속으로 벼락같은 소리가, 무언가를 찢어발기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가, 소름 끼치는 조악한 소리가 쏟아져들어와요. 피부감각은 어떨까요? 아이의 살은 외피가 거의 없어요. 자궁의 부드럽고 얇은 막의 보호를 받던 그 섬세한 피부에서 보호막이 갑자기 사라지는 거예요. 아이는 살이 뎄을 때와 흡사한 고통을 느껴요. 아이에게 바깥세계는 가차없는 폭력의 세계예요. 이제 막 태어난 생명이 세계의 근원적 폭력에 유린되는 모습은 차마 볼 수가 없어요. 근원적 폭력에 맞서 아이는 온몸으로 저항해요. 이런 아이의 모습이 저에게 무엇을 가르쳐주었는지 아세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근원이 폭력이라는 가혹한 진실이에요. 우리가 청춘이었을 때 당신과 저는 세계의 근원적 폭력에 휩쓸렸던 거예요. 지금 제가 한 말에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해요.
아이가 태어나면서 겪는 끔찍한 고통은 어디로 갈까요? 시간이 흐르면서 소멸될까요? 고통은 소멸될지 모르지만 고통의 기억은 소멸되지 않아요. 고통의 기억은 몸의 어디엔가 숨어 있어요. 고통에 대한 원한 역시 숨어 있어요. 그 원한이 바깥으로 분출될 때 폭력이 발생하는 거예요. 폭력적 인간이란 고통에 대한 원한이 쉽게 노출되는 인간이에요. 야만적 사회는 고통의 기억을 자극해요. 폭력이 필요하기 때문이지요. 나찌가 그랬고, 스딸린 체제가 그랬어요. 우리의 청춘이 통과했던 80년대의 한국사회도 그랬어요. 수많은 청춘들이 폭력의 희생자가 되었어요.
저는 당신에게 여성이 숙명적 희생자라고 말했어요. 저도 숙명적 희생자였지만 당신도 숙명적 희생자였어요. 그러니까 당신은 여성적 존재예요. 이상하게 들려요? 조금도 이상하지 않아요. 제가 말하는 여성이란 실체적 존재이면서 상징이에요. 여성의 개념이 깊어진 것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폭력의 희생자는 모두 여성적 존재예요. 어머니의 자궁에서 나오는 아이처럼, 근원적 폭력을 통과함으로써 여성적 존재라는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는 거예요. 저는 여성의 본질이 슬픔이라고 생각해요. 희생자의 본질은 슬픔이에요. 슬픔은 고통과, 고통이 불러일으키는 원한을 정화해요. 그렇다고 해서 슬픔이 폭력에 대한 분노를 지운다고 생각하면 안돼요. 분노와 원한은 달라요. 폭력에는 분노해야 해요. 폭력에 분노하지 않는다는 것은 폭력을 인정하는 행위나 마찬가지예요. 그 분노를 껴안으면서, 분노를 넘어서는 감정이 슬픔이에요. 분노가 또다른 폭력으로 치닫지 않게 하는 고귀한 감정이지요. 세상은 폭력으로 가득 차 있지만 그럼에도 세상이 아름다운 것은 슬픔에 감싸여 있기 때문이에요. 예수를 보세요. 예수가 가시면류관을 쓴 순간 그는 여성적 존재로 변화했어요.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순간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성적 존재로 변화했어요. 그 여성적 존재에게서 흘러나오는 슬픔의 눈물이 세상을 적셨어요. 그러니 세상이 아름다울 수밖에요.
제가 당신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여러가지 이유 가운데 하나는 당신에게서 슬픔을 발견했기 때문이에요. 물론 전 당신을 보지 못했어요. 지난 20년 동안 우린 한번도 만나지 않았어요. 하지만 전 당신의 사진을 보았답니다. 당신의 사진 속에는 슬픔이 흐르고 있었어요. 희생자라고 해서 슬픔을 다 간직하는 건 아니에요. 슬픔을 상실하는 순간 희생자는 여성적 본질을 잃게 되요. 당신은 참으로 아름다운 여성이었어요. 당신, 아세요? 당신의 사진을 보면서 제가 얼마나 황홀해했는가를.
책상에 놓인 사진을 물끄러미 보았다. 폐사지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거기에 폐사지가 있는 줄은 몰랐었다. 낙엽이 흩날리는 늦가을이었다. 길은 안개 낀 들판 사이로 구불거리며 이어지고 있었다. 둥그런 무덤 하나가 안개 사이를 떠다녔다. 꽃들이 느리게 흔들렸고, 새들은 허공을 비껴 날았다. 탑이 보인 것은 느티나무를 지날 때였다. 군데군데 깨진 남루한 탑이었다. 거뭇한 돌 위에 파인 시간의 주름은 깊었다. 비천(飛天)이 새겨진 불상 조각은 쓸쓸했고, 허물어진 주춧돌은 애잔했다. 흙과 나무, 바람과 안개, 돌과 하늘, 나뭇잎 소리와 새의 울음 사이에서 오랫동안 서성거렸다. 텅 비었는데도 꽉 차 있었다. 한없이 낮은데도 한없이 높았다. 사방이 틔었는데도 은산철벽이었다. 무릎이 꺾였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영원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위는 무릎을 꿇는 일이었다. 사진은 하늘을 배경으로 탑을 찍은 것이었다. 희디흰 햇살 때문이었을까? 무릎을 꿇고 있었을 때 탑이 꽃처럼 보였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눈부신 꽃이었다.
황홀한 당신에게 제 자랑을 조금 할게요. 전 오래전부터 긴급구호단체의 일원으로 난민 돌보는 일을 해왔어요. 난민은 비참한 희생자들이에요. 제가 난민구호에 뛰어든 것은 희생자의 슬픔이 얼마나 고귀한지 알기 때문이에요. 어머니가 이승에서의 마지막 숨을 힘겹게 쉬고 있을 때 저는 아프리카에서 흑인 소녀의 출산을 돕고 있었어요. 난소암 환자가 어떻게 아프리카까지 갔느냐구요? 긴급구호의 일은 저에게 큰 기쁨이었어요. 기쁨 없는 휴식보다 기쁨 있는 노동이 병자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아세요? 한 생명을 받기 위해 피투성이가 된 손을 놀리고 있을 때 어머니의 영혼은 어디론가 떠났어요. 새 생명 앞에서 흑인 소녀가 흘린 눈물이 차가워져가는 어머니의 몸을 따뜻하게 적셨는지도 몰라요. 그때 당신은 무얼 하셨어요? 당신의 슬픔과 닮은 풍경을 찾고 계셨나요?
감옥을 나오자마자 희우의 집을 찾았다. 희우의 집에는 희우가 없었다. 희우가 있다는 곳은 내가 갈 수 없는 곳이었다. 홀로 집을 지키고 있는 희우 어머니가 밥상을 차려주었다. 희우가 없어도 먹고 가라고 했다. 꾸역꾸역 밥을 먹고 나왔다. 희우 어머니는 내 손을 잡으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잘 가라고 했다. 석달 후 나는 다시 수배자가 되었다. 수배가 해제된 것은 1988년 12월이었다. 그사이 6월항쟁의 감격이 있었고, 대통령선거의 절망적 패배가 있었다. 수배가 해제된 지 한달이 채 지나기도 전에 객혈을 했다. 의사에게서 결핵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안도했다. 이제는 정말 쉴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나를 평온하게 감쌌다.
요양소는 바닷가 근처에 있었다. 몸을 눕히니 몸속에 있는 상처가 느껴졌다. 상처는 깊었다. 깊은 상처가 몸속에서 생명체처럼 숨쉬고 있었다. 내가 상처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동안 세계는 급변했다. 1989년 8월 폴란드가 공산당 일당독재를 종식시켰다. 두달 후 헝가리도 폴란드의 뒤를 따랐다. 11월 9일에는 냉전의 상징인 베를린 장벽이 허물어졌다. 러시아의 혁명시인 마야꼬프스끼가 “언젠가 고요한 정박소에서 우리를 부드럽게 흔들었던 우연의 물마루와 같다”고 황홀해했던 공산주의가 거대한 굉음과 함께 무너진 것이었다. 그 폐허의 세계를 나는 젖은 눈으로 보았다.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핵심은 인간의 본질을 이기심으로 파악한 데 있다. 물질에 대한 인간의 이기심을 정교하게 조직한 자본가들은 세계를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돌이켜보면 인간세계는 언제나 아수라장이었다. 유토피아는 아수라장에서 잉태되는 꿈의 세계였다. 그런데 맑스는 꿈만 꾸지 않았다. 꿈의 세계를 지상에 세우려 했다. 그는 인간에게 이기심의 기쁨 대신 공동체의 기쁨을 요구했다. 인간에게 그토록 엄격한 도덕을 요구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불행하게도 인간은 엄격한 도덕을 견디지 못했다. 프롤레타리아독재는 타락했고, 타락한 독재는 국가를 거대한 병영으로 만들었다. 맑스가 저지른 치명적 오류는 인간의 도덕성을 너무 높이 평가한 데 있었다.
나는 폐허의 세계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내 시선이 향한 곳은 풍경이었다. 내 몸은 풍경을 찾아 떠돌았다. 언제부터였을까?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시간이 풍경 속으로 스며들기 시작한 것은. 풍경의 내부는 깊고 아늑했다. 깊고 아늑한 풍경의 내부에서 상처의 시간은 풍경의 시간과 뒤섞이면서 풍경의 일부가 되어갔다. 내가 카메라를 든 것은 풍경 속에서 풍경의 일부가 되어가는 상처의 형상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영서도 당신의 사진을 좋아해요. 영서가 당신의 사진을 좋아하는 것은 영서에게도 깊은 슬픔이 있기 때문일 거예요. 영서는 제 아버지의 정체를 알고 있어요. 제가 이야기했어요. 영서가 열여덟살이 되던 생일날이었어요. 가혹한 생일선물이었지요. 영서는 잘 견뎠어요. 어느날 영서가 물었어요. 엄만 아버지를 지금도 미워하냐고. 전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어요. 틀림없이 슬픈 미소였을 거예요.
영서가 어떻게 성장했는지 궁금하시면 영서에게 물어보세요. 그 아인 아마도 자신의 슬픔과 기쁨을 당신에게는 보여줄 거예요. 제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잘 아니까요.
지금 저는 마흔여섯이에요. 당신의 희우가 이렇게 늙었어요. 당신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게 한없이 슬프지만 하지 않을 수 없어요. 제 삶은 마흔여섯으로 끝날 거예요. 막연한 느낌으로 하는 말이 아니에요. 전 의사거든요. 46년이란 세월은 긴 생애일 수도 있고, 짧은 생애일 수도 있어요. 저에겐 한없이 길게 느껴지면서도 한편으로는 짧은 꿈을 꾼 것 같은 기분도 들어요. 이제 당신과 작별해야 해요. 슬퍼하는 당신이 보여요. 제가 가야 하는 데가 얼마나 먼지는 알 수 없으나 새처럼 날아가고 싶어요. 서러워하지 않고, 애틋해하지 않고, 머뭇거리지 않고, 긴 날개를 너울거리며. 그렇게 날다 보면 당신이 잊혀지겠지요. 어젯밤에도 새의 꿈을 꾸었어요. 눈처럼 흰 새가 은빛으로 빛나는 별들의 강을 건너고 있었어요. 당신, 제게로 다가와 제 숨소리를 들어보세요. 새의 숨소리로 바뀌고 있어요. 제 몸을 보세요. 어깨에서 날개가 돋아오르고, 뼈 안이 텅 비어가고 있잖아요. 그러니 부디 슬퍼하지 마세요.
당신의 희우
6
빛들이 바람에 쓸리고 있다. 바람에 쓸리는 빛들은 안개를 걷어내면서 탑의 적막과 뒤섞인다. 빛과 뒤섞이는 탑의 적막이 투명하다.
“저 탑이 정말 꽃으로 보였어요?”
탑을 뚫어지게 보던 영서가 나를 보며 묻는다.
“응.”
영서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탑을 본다.
“그러니까 선생님은 탑을 찍으신 게 아니라 꽃을 찍으신 거네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영서는 생각에 잠긴다.
“탑이 어떻게 꽃으로 변하죠?”
“내 짐작으론……”
나는 잠시 머뭇거린다.
“꽃이 나를 꿈꾸었기 때문이 아닐까 해.”
“무슨 뜻이에요?”
“어떤 사람이 누군가를 깊이 꿈꾸면, 누군가는 그 사람을 꿈꾸게 되지 않을까.”
“말이 아름다워요.”
“누가 가르쳐주었어.”
“누군데요?”
“강희우.”
“엄만……”
영서의 목소리가 잠겨든다.
“정말 간절히 선생님을 꿈꾸었어요. 제가 선생님을 만나라고 엄마에게 여러번 권했어요. 엄만 쓸쓸히 웃으며 말했어요. 꿈꾸는 게 좋다고.”
들판에서 연기가 피어오른다. 짚을 태우는 모양이다.
“여긴 꿈꾸기가 좋아. 텅 비어 있으니까.”
“여기서 무슨 꿈을 꾸고 싶으세요?”
“새. 눈처럼 흰.”
“왜 눈처럼 흰 새예요?”
“그 새가 나를 꿈꾸어야 하니까.”
“그러면 저 탑이 눈처럼 흰 새로 변하겠네요.”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 사진, 저한테 보내주실래요? 보고 싶어요.”
“영서가 보고 싶다면 보내주어야지.”
“감사합니다.”
“탑 곁에 서봐.”
“왜요?”
“사진 찍어줄게.”
“정말요?”
“빨리 가. 마음 변하기 전에.”
영서가 재빨리 탑으로 간다. 파인더를 들여다본다. 바람에 쓸리는 빛 속에 얼굴이 있다.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얼굴이다.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얼굴이 눈부시다. 내 사진이 향한 곳은 풍경이었다. 언제나 그랬다. 파인더는 인간을 거부했다. 인간의 그림자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저 눈부신 얼굴이 파인더를 끌어당긴다. 파인더가 눈부신 얼굴을 통해 숨을 쉰다. 시간이 멈춘다. 시간이 멈춘 공간에서 사물과 생명체가 경계를 잃고 뒤섞인다. 사물이 생명체 속으로 파고들고 생명체가 사물 속으로 파고든다. 눈부신 얼굴과 적막한 탑이 불가해한 물결에 뒤섞인다. 수많은 빛들의 겹침 속에서 물결은 미지의 형상을 향해 나아간다. 그 형상이 눈처럼 흰 새인지, 어떤 캄캄한 생명인지, 한번도 본 적이 없는 풍경인지 알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