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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2007, 한국사회의 미래전략
한미FTA와 한국형 개방발전모델 모색
최태욱 崔兌旭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국제관계학과 교수. 저서로 『세계화시대의 국내정치와 국제정치경제』 『세계화와 한국의 개혁과제』(공저) 등이 있음. eacommunity@hallym.ac.kr
* 이 글은 필자의 편저 『한국형 개방전략: 한미FTA와 대안적 발전모델』(창비 2007)에서 주요 내용을 옮겨온 것이다. 공저자들의 글을 인용할 때는 해당 논문을 따로 밝혔으나, 필자 본인의 것일 경우에는 생략했다.
1. 한미FTA와 한국 자본주의의 미래
‘자본주의의 다양성’ 논의가 보여주듯 자본주의에는 여러 유형이 있다.1 예컨대 영미식이라 불리는 ‘자유시장경제’(liberal market economy) 체제와 흔히 유럽식이라 불리는 ‘조정시장경제’(coordinated market economy) 체제가 그것이다.2 영미식은 시장과 자본의 자유를 최우선시함으로써 경제의 효율성을 강조하는 반면, 유럽식은 국가나 사회에 의한 시장의 조정을 장려함으로써 사회공동체의 유지를 도모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간에 소위 ‘자본주의 표준경쟁’이 일고 있다는 점이다.
자신이 만들고 익숙해져 있는 기술, 규율, 제도, 체제 등이 전세계적으로 확산될 경우, 그리하여 그것이 ‘세계표준’(global standard)으로 자리잡을 경우, 그 창시자는 세계 어디에서나 편안한 환경과 유리한 지위를 누릴 수 있다. 이 때문에 주요 선진국간에는 다양한 영역에서 표준경쟁이 벌어진다. 자본주의체제도 마찬가지이다. 자국의 자본주의체제가 세계표준이 될 때 해당국은 세계 경제질서의 주도국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유럽이 주로 유럽연합(EU)의 확대와 다른 지역 및 국가 들과의 협력관계 구축 그리고 ‘유러피언 드림’ 같은 연성파워(soft power)의 투사 등을 통해 자신의 자본주의 영역을 점진적으로 넓혀간다면, 미국은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무역기구(WTO) 등을 앞세운 다자주의,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과 전미주자유무역협정(FTAA) 등의 체결을 통한 지역주의, 그리고 한미FTA 같은 양자주의적 경로 등을 통해 더 다양한 방식으로 더 급격하게 자기 영역을 확대해나가고 있다.
이 경쟁에서 미국이 유럽보다 훨씬 공세적이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유일한 경쟁상대인 유럽조차 수세에 몰리고 있는 상황에서 여타 지역이나 국가 들이 미국식 자본주의의 확산 혹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압력에 거의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1980년대의 중남미 그리고 1990년대의 동아시아 국가들이 미국 주도의 IMF 관리체제에 들어가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을 강요당한 것은 그 실상을 여실히 보여주는 예이다. 우리 역시 IMF 구조조정을 뼈아프게 경험했고 이제는 다시 FTA방식을 통한 미국의 압력에 직면해 있다.
미국은 FTA를 자국식 세계화를 추진하기 위한 정책수단으로 삼고 있다. 미국식 세계화란 금융자본주의와 시장만능주의를 요체로 하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를 의미한다. 미국은 FTA 체결시 상대국에 철저한 시장개방, 민영화, 정부개입 축소 등을 요구한다. 이는 경쟁력이 떨어지는 약소국에 불공정한 관계의 설정을 강요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미국식 FTA의 핵심문제는 그것이 ‘높은 수준의 포괄적 FTA’라는 데 있다.3 공산품뿐 아니라 농산품 및 써비스상품을 모두 교역 자유화 대상에 포함하며 그외에도 투자, 지적재산권, 경쟁정책, 노동, 환경 등 경제활동의 거의 모든 영역을 포괄하는 협정인 것이다. 결국 실제로는 자유무역협정이 아니라 경제통합협정에 해당한다.
미국과의 포괄적 FTA 체결로 한미 양국이 경제통합과정에 들어가게 되면 한국의 사회경제체제는 상당부분 미국식으로 바뀌어가게 될 것이다. 본디 상품, 써비스, 기술, 자본 등은 경제규모가 큰 나라에서 작은 나라로, 그리고 경제발전 정도가 높은 나라에서 낮은 나라로 흘러가기 마련이다. 경제통합협정은 당연히 이 흐름을 더욱 거세고 가파르게 그리고 일방적이게 한다. 흐름을 방해하는 각종 장벽들이 인위적 개입에 의해 비교적 단기에 제거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제거되는 장벽들에는 관세뿐 아니라 제도, 규범, 정책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사회 및 경제체제까지 포함된다. 만약 우리 스스로 가장 적합한 자본주의 유형을 선택하고 그 성취를 위해 필요한 효과적 기제와 유리한 환경을 적극적으로 만들어가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러한 노력 없이 미국식 FTA를 졸속으로 체결한다면, 우리는 결국 미국식 자본주의 속에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물론 미국화가 이로운 것이라면 반대할 일은 전혀 아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한국인들에게 미국화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 문제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특정한 자본주의 유형은 특정한 복지체제 혹은 민주주의형태와 친화적이다.4 조정시장경제를 택하고 있는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은 사회민주주의나 조합주의적 복지체제를 발전시키고 있다. 시장의 약자에 대한 사회적 배려가 보편주의적 복지정책으로 제도화되어 있는 것이다. 한편, 자유시장경제는 자유주의 복지체제와 연결되는 경향이 강하다. 복지의 질과 양조차 시장에서 결정되는 것이 원칙이므로, 있는자는 최상의 복지를 누릴 수 있으나 없는자는 누군가의 시혜를 바라야 하는 굴욕적 처지에 놓이게 된다. 전자의 민주주의가 참여적이고 포괄적이라면, 후자의 민주주의는 배타적이거나 제한적이기 마련이다. 노동자나 농민 혹은 중소상공인 같은 약자집단의 실질적 정치참여는 당연히 전자에서 제대로 보장된다.
미국식 자본주의로 갈 경우 우리 민주주의는 사회·경제적 약자들을 구조적으로 배제하고 소외시키는 절름발이 민주주의로 전락할 가능성이 크다. 사회안전망이나 복지체계 미비로 인해, 가뜩이나 심각한 사회양극화 현상은 현재의 미국이 그렇듯이 공공연한 현실로 고착될 것이다. 미국은 빈부격차가 세계 최고수준이다. 국가가 제공하는 복지는 고작해야 잔여적(residual)일 뿐이며, 따라서 막대한 규모의 빈곤계층은 거의 방치상태에 놓여 있다. 전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의료보험이 존재하지 않는 유일한 ‘선진국’이며, 인구 대비 세계 최고의 수감률을 기록하고 있는 불만 가득한 국가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가 유지되는 것은 미국이 지닌 특수한 조건 때문이다. 다양한 인종, 광활한 영토, 엄청난 내수시장, 세계 최강의 군사력, 그리고 세계 기축통화인 달러의 발행권 등 여러가지 격차 수용기제가 미국사회를 뒷받침하고 있다.
우리에겐 그러한 기제가 전혀 없다. 격차를 감당하기 힘든 사회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격차의 유지 혹은 확대를 당연시하는 미국식 ‘자유시장’경제로 갈 수 있겠는가? 더구나 평등과 공동체적 삶을 중시하는 우리의 전통과 문화나 사회적 가치를 생각하면 더욱 그러하다. 양극화를 해소하고 방지할 수 있는 획기적 방안이 마련되지 않는 한, 미국화로 귀결될 높은 수준의 포괄적 FTA를 체결하는 것은 무리다.
한미FTA 논쟁을 계기로 이제 우리에게 적합한 자본주의의 발전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어떤 유형의 자본주의이든 세계화나 개방 그 자체를 거부하지는 않는다. 정부와 시장 간의 역할분담 정도에 따라 세계화의 추진 방식이나 경로, 혹은 개방의 순서와 속도 등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 우리가 지향할 자본주의도 마찬가지이다. 세계화는 엄연한 현실이고, 우리의 발전을 위해서도 개방은 거부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활용해야 한다. 그렇다면 고민해야 할 것은 개방과 발전을 지속해가며 우리에게 맞는 ‘조정시장’경제를 어떻게 확립해가야 할지이다. 구체적이고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이 글에서는 지향해야 할 기본 원칙과 조건 등을 점검해보고자 한다.
2. 신산업전략 수립과 관리된 개방정책
노무현정부가 한미FTA 추진 이유로 내세우는 경제논리는 비교적 간단한다. 제조업의 경쟁력이 중국 등에 추격받는 상황에서 미래를 위해서는 신성장동력의 확보가 필요한데, 그것은 한미FTA를 통해 써비스산업의 경쟁력을 높임으로써 가능하리라는 것이다. 그 논리를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나 이러한 발전전략은 적어도 두가지 측면에서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하나는 그것이 결국 또 하나의 ‘불균형 압축성장론’이라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급격한 개방을 통한 충격요법이라는 점이다.
사실 한국의 제조업은 개발독재시대의 소위 ‘박정희모델’에 의해 빠르게 성장했다. 노동이나 중소기업 등을 배제하고 정부-재벌-은행이 삼자연대를 맺어 이들의 주도하에 압축적인 성장을 일구어낸 것이다. 소수 제조업과 대기업 그리고 전문인력은 국제경쟁력을 확보했지만 나머지 경제주체들은 전혀 그러지 못했다. 경제성장의 과실도 일부에 집중되었다. 이러한 폐해는 고스란히 축적돼왔고 그것이 1987년에 폭발했다. 이후 민주화시대에 들어 일정정도 형평성 제고를 위해 노력해왔으나, 1997년 외환위기와 그에 따른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으로 사회·경제적 불균형은 다시 심화되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또다시 10년이 지난 2007년 이 시점에서 현정부는 균형 회복을 위해 노력하기는커녕 한미FTA를 내세워, 이번에는 제조업이 아닌 써비스업을 중심으로 제2의 불균형 압축성장을 꾀하고 있다. 정부-재벌-초국적자본의 ‘신삼자연대’를 구축함으로써 이를 달성하려는 기세이다. 하지만 우리의 여건상 써비스산업 주도로 압축성장을 하기는 매우 어렵다.5 써비스산업은 본디 추격발전이 쉽지 않고 시장실패의 가능성이 높다. 더구나 정부가 강조하는 금융·법률·회계·보험·광고·컨설팅 등의 전문 써비스업은 상당한 수요가 지속적으로 창출되어야 성장하기 마련인데 그에 비해 국내 수요는 너무 적다. 그렇다고 당장 국제 수요를 감당할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다. 또한 주요 써비스산업에서의 국제분업은 일반적으로 영어사용국을 중심으로 형성된다. 일본도 이러한 한계에 직면하여 써비스산업 자체의 성장동력화를 추구하는 영미식 ‘써비스경제형’ 발전모델 대신에, 첨단제조업과 그와 연관된 생산자써비스를 동시에 육성하는 ‘정보산업형’ 발전모델을 택하고 있다.6 더 큰 문제는 설령 써비스경제형 압축성장이 가능하다 할지라도 그 과정에서 사회·경제적 불균형은 한층 심화되리라는 점이다. 국내 대기업과 초국적 거대자본이 협력하고 정부가 이를 전폭 지원할 경우 중소기업이나 노동이 설 자리는 더욱 축소될 것이기 때문이다. 써비스산업을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내세우면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해당 영역은 결국 국내의 소수 재벌기업들과 초국적자본이 차지하고 나머지 국내 경제주체들은 주변부로 밀려나 사회양극화가 가속될 것이다.
게다가 급속개방이라는 충격으로 압축성장을 노리는 요법은 기존의 박정희모델보다 더 위험하다. 정부는 한미FTA가 우리 써비스기업들에 세계 최고수준의 미국기업들과 ‘자유로이’ 경쟁할 수 있는 동기유발적 환경을 조성해주어 장기적으로 우리 써비스산업 수준이 몇단계 올라갈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메커니즘을 통해 가능하다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자세한 설명이 없다. 그냥 믿으라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볼 때 (그리고 경제학의 비교우위론을 적용해볼지라도) 한미FTA로 인해 한국의 써비스산업은 경쟁력이 제고되기는커녕 오히려 몰락할 확률이 더 높다. 한국 써비스기업들의 경쟁력이 미국과 비교도 안될 정도로 낮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업 인수합병(M&A) 등을 통해 미국기업들이 우리 시장을 장악할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그러한 일들은 다른 나라에서도 흔히 목격된다. 예컨대 1998년 법률시장을 전격 개방한 독일에서는 대형 법률회사들이 대부분 영미계 회사에 합병되어, 현재는 10대 법률회사 중 독일기업이 오직 두 곳에 불과하다.
현실이 이렇다면 우선 한국이 비교우위에 설 수 있는 정보기술(IT)이나 생명기술(BT) 산업 등 첨단 제조업을 먼저 키우고, 써비스업은 해당 제조업의 발전과 연관된 분야를 중심으로 장기적 계획 아래 점진적으로 육성해가는 편이 더 타당하다.7 말하자면 일본이 택한 정보산업형 발전모델이 우리에게 한결 적합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모델을 택할 경우 한미FTA는 우리의 발전경로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 FTA 체결로 양국간 교역이 증가하면 장차 우리 제조업의 구조를 고도화하기가 더 어려워진다. 교역 자유화가 이루어지면 비교우위부문이 특화되기 마련인데, 우리가 미국보다 우위에 있는 분야는 상대적으로 저부가가치 산업들이다.8 따라서 한미FTA로 인해 정밀화학이나 정밀기계 등 향후 성장 가능한 고부가가치 첨단산업의 발전잠재력이 훼손되고 저부가가치 산업에 역량이 쏠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일본이나 미국 같은 선진경제대국보다는 중국이나 ASEAN처럼 성장잠재력이 큰 후발산업국가들과의 FTA가 선행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은 이러한 맥락에서 나오는 것이다.9
첨단 제조업과 관련 써비스업의 동반성장을 핵심으로 하는 신산업전략에는 특히 다음의 두 과제가 포함되어야 한다. 하나는 중소기업 중심의 부품 및 소재산업 육성방안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써비스부문 강화대책이다. 부품 및 소재산업은 제조업의 허리에 해당하는데 우리는 이 분야가 특히 취약하다.10 한국은 그동안 부품, 중간재, 자본재 등을 주로 일본에서의 수입에 의존하는 대기업 중심의 대량생산 조립형 제조업으로 산업경쟁력을 유지해왔으나 이미 한계에 도달했다. 중국을 필두로 동아시아의 여러 신흥공업국들이 이 부문에서 이미 상당한 경쟁력을 확보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과거 일본이 그러했듯 우리가 부품·소재산업을 선도함으로써 여타 동아시아 국가들의 조립형 제조업 발전을 견인해야 한다. 그것이 동아시아의 국제분업구조에서 우리가 맡아야 할 역할이다. 그럼으로써 막대한 대일무역수지 적자를 줄이는 동시에 중국 및 동남아에 대한 수출동력도 유지할 수 있다.
부품·소재산업 및 첨단 제조업의 매력 중 하나는 중소기업이 약진하기에 수월한 분야라는 것이다. 이러한 전략산업들의 육성이 곧 우리 중소기업의 진흥으로 이어져 대기업 편중의 불균형 해소에 도움이 될 것임은 물론이다. 또한 그에 따른 고용창출효과 또한 상당할 것으로 기대된다. 게다가 첨단 중소기업의 발전은 지식기반 써비스산업의 성장에 필수적인 국내 사업써비스 수요의 창출로 이어질 수 있다. 한국의 정보산업형 발전에 기여하리라는 것이다.
사회써비스부문의 강화를 강조하는 것은 앞서 언급한 일본식에 북유럽식을 가미한 우리 나름의 정보산업형 발전모델을 수립할 필요가 있다는 의미이다. 스웨덴이나 핀란드 같은 북유럽 국가들은 제조업의 산업구조 고도화를 지속적으로 추진하는 한편, 그 기반 위에 사회써비스를 발전시킴으로써 성장과 안정을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11 그런데 우리의 사회써비스부문이 전체 산업규모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최하위에 속할 정도다. 교육·보건·보육·간병 등 공공부문의 사회써비스 확대는 그 자체가 막대한 고용을 창출한다. 따라서 이는 우리 제조업이 신산업전략에 따라 더욱 첨단기술 및 지식 집약적으로 변화할 경우 그와 더불어 심화될 ‘고용 없는 성장’의 문제, 즉 고용감소 문제의 해결책이기도 하다. 한편, 사회써비스의 발전은 여성과 실업자 그리고 중·고령자 들이 생산현장 진출을 수월케 함으로써 머지않아 심각해질 저출산·고령화시대의 핵심문제, 즉 양질의 노동력 부족현상 해소에도 기여할 수 있다. 결국 우리가 채택할 발전모델이 지속가능하기 위해서는 사회써비스부문의 강화가 필수적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 나름의 발전모델을 정립해가자는 주장이 개방을 거부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부품·소재 및 첨단 제조업 그리고 관련 써비스업의 발전을 위해서도 개방은 필요하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문제는 개방의 순서와 속도이다. 사실 ‘순서와 속도 맞추기’(sequencing and pacing)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개방정책이 성공하기 위한 절대원칙이다.12 우리의 수용 및 관리 능력에 맞춘 점진적이고 단계적인 개방만이 지속적인 경제성장에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렇지 않을 경우 과도한 조정비용 지출로 인해 개방은 오히려 파국으로 이어질 것이다. 국내적으로는 자체적인 산업발전전략에 의거한 체계적인 구조조정에 노력하는 한편, 사회안전망과 복지체계를 적정수준으로 확충해가야 한다. 개방의 폭과 속도는 그러한 내부개혁의 진척 정도에 맞추어 점차 증대시켜가야 한다. 이를 위해 대외적으로는 대상국 선정에서의 우선순위 부여가 중요하다. FTA 체결시에도 우리의 수준과 사정에 맞추어 상대국을 골라야 한다는 의미이다. 스스로의 관리능력이 제고됨에 따라 좀더 경쟁력있는 상대를 선택해가면 된다.
우리 제조업이 현재의 국제경쟁력을 얻기까지 정부는 대외적 보호주의정책과 대내적 산업정책을 꼼꼼하고 체계적으로 수행해왔다. 특히 개방은 산업경쟁력이 향상되는 정도에 따라 점진적·단계적으로 이루어졌다. 써비스산업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의 원칙이 지켜져야 한다.13 우리 써비스산업의 경쟁력 수준에 기초하여 개방에 대한 관리가 치밀하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우리 사정에 맞는 신산업전략의 수립이 필요하며, 개방은 그 산업전략과 연계하여, 즉 산업전략의 일환으로서 체계적으로 추진되어야 할 것이다.
3. 사회적 자본의 극대화
관리된 개방정책하에 신산업전략이 점진적·단계적으로 추진된다 할지라도, 그 과정에서 산업구조조정이 이루어지고 그에 따라 사회·경제적 피해집단이 발생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시장의 조정을 통해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은 가능하다. 우리는 어떠한 시장 조정기제를 어떻게 갖추어갈 것인가.
사실 구조조정이 효과적으로 진행되면, 국가경제의 효율성이 높아져 투자유치 및 기술혁신 그리고 생산성 향상 등이 빠르고 광범위하게 촉진된다. 그 결과 경제성장과 국가경쟁력 제고의 바탕이 되는 금융자본과 기술 그리고 여타 물적 자본이 활발하게 축적된다. 즉 전통적 자본의 확보라는 측면에서 보면, 효율적인 구조조정은 확실히 득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전통적 자본을 엇비슷하게 보유한 국가들 사이에도 경제성장이나 사회발전의 속도 및 안정성에서는 크게 차이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러한 차이를 발생시키는 중요한 변수 중 하나가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이다.14 사회적 자본이란 사회구성원들 사이에 존재하는 연대 혹은 공동체 의식에 기인한 일종의 집단 에너지로서, 이것이 형성되면 공동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함께 일할 수 있는 능력이 향상된다. 예컨대 한 국가의 생산능력은 부존자원이나 전통적 자본에 의해 결정된다고 하지만, 여기에 사회적 자본이 더해지면 그 국가의 능력은 정해진 것 이상으로 증대될 수 있다. 이러한 사회적 자본에는 신뢰, 도덕, 협력, 규범 및 질서의식 등이 포함된다.
사회적 자본이 이같이 경제성장과 사회발전의 중요한 결정요소라고 한다면, 전통적 자본의 축적만 강조할 것이 아니라 사회적 자본의 유지 혹은 극대화에도 마찬가지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만일 개방이나 구조조정으로 많은 사회경제적 약자들이 상당 기간에 상당한 피해를 입게 된다면, 그리하여 국가나 사회 그리고 이웃에 대한 그들의 신뢰가 붕괴된다면, 더 나아가 그들이 공동체 규범이나 질서를 무시하기까지 한다면, 구조조정을 통해 높이려 했던 국가경쟁력은 오히려 기대치 이하로 떨어질 수 있다. 더구나 경쟁국가들은 사회적 자본이 튼실하여 자신들이 가진 객관적 능력 이상을 발휘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우리의 상대적 경쟁력은 더더욱 약화될 것이다.
박정희정권 이래 권위주의적으로 강행되어온 급속한 경제개발은 한국의 사회적 자본을 이미 심하게 훼손해놓았다. 87년체제에서 약간 치유되는 듯했으나, IMF사태 이후 현재까지 이어진 97년체제하에서 사회적 자본은 다시 크게 손상된 상태다. 그런데 이제 한미FTA 등으로 다시금 급격한 개방과 구조조정을 강행한다면, 새롭게 생성해내고 회복시켜도 모자랄 한국의 사회적 자본은 더욱 움츠러들고 왜곡될 것이다. 이제부터라도 사회적 자본의 확충에 우리 사회의 역량을 집중해야 하며, 이를 위한 방안이 한국 발전모델 구상의 핵심에 위치해야 한다.
이와 관련해서 가장 시급히 추진해야 할 것은 개방에 따른 성장이익을 균형있게 분배할 수 있도록 ‘적하(滴下)효과’(trickle-down effect)의 보장책을 갖추는 일이다. 다시 말하면, 개방으로 인한 추가이익을 일차적으로 획득한 부문이 자신의 잉여이익을 여타 부문으로 ‘흘러내려가게’ 하는 제도적 기제를 마련해야 한다. 그 예로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상생구조 구축, 교역부문과 비교역부문 간의 동반성장 관계 강화, 조세 및 사회복지제도를 통한 소득재분배 효과 제고 등을 꼽을 수 있다. 물론 기업과 산업 그리고 조세와 복지 정책 등에서 광범위한 개혁이 필요하므로 쉽지 않은 작업이다. 하지만 이를 통해 상당한 적하효과가 보장된다면 개방과 구조조정 정책에 대한 사회경제적 약자들의 반발을 완화(나아가 협력을 확보)할 수 있고 사회적 자본의 유지나 확충을 기대할 수 있다. 반면 적하효과가 보장되지 않은 상태에서 우선 국가 전체의 ‘파이’를 키우자는 주장은 약자들에 대한 기만일 수 있다. 파이를 키워봤자 그들에게 돌아갈 몫은 과거와 큰 차이가 없는데다가 오히려 상위계층과의 격차만 더 벌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복지체계와 사회안전망 강화는 개방이나 구조조정으로 비롯된 개별적 위험을 ‘사회화’함으로써 개인들의 사회적 신뢰를 증진시킨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예컨대 정보산업형 발전모델에서도 노동시장의 유연성 증대는 불가피하다. 변화하는 개방경제환경하에서는 혁신을 위한 대내조직의 유연화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해도 위험의 사회화 기제가 잘 마련되어 있다면, 단순한 유연성이 아닌 ‘유연안정성’이 높아진다.15 즉 유연성은 오직 안정성의 기초 위에서 증대되는 것이다. 유연안정성 확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적극적 노동시장정책’이나 공적 평생교육제도 등으로 사회 전체의 고용안정성을 높이는 것이 중요하다.16 앞서 말한 사회써비스부문의 강화 역시 복지 및 고용창출을 통해 유연안정성의 증대에 기여한다. 잘 갖추어진 사회안전망과 복지체계가 개방경제하의 산업구조조정을 순조롭게 한다는 것은 이미 이론과 경험에 의해 검증된 사실이다.17 그러한 제도와 정책이 시장개방에 따른 구조조정의 부작용을 내부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사회통합기제로서 기능하기 때문이다.
결국 적하효과 보장기제를 강화하고 사회안전망 및 복지체계를 확충함으로써 사회적 자본이 극대화될 수 있는 개방발전모델을 수립해가야 한다. 다시 말해 우리의 정보산업형 발전모델은 사회통합형 혹은 사회적 자본에 기초한 형태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 바탕 위에서 우리의 시장경제 혹은 자본주의는 사회정책에 의해 조정되는 조정시장자본주의의 한 유형으로 발전해갈 것이다.18
4. 정치구조 및 경제외교의 정합성 확보
마지막으로 한국형 자본주의 혹은 발전모델 정립에 필요한 국내정치 및 대외경제 조건을 간략하게 짚어보고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19 사회적 자본에 기반한 정보산업형 발전모델이 우리에게 바람직하다는 것과 그것의 실현가능성은 별개의 문제이다. 실현이 가능하려면 무엇보다 정치의 역할과 능력이 관건이다. 시장조정기제로서 제대로 작동할 수 있는 사회정책의 수립과 집행은 결국 정치 혹은 정부의 몫이기 때문이다. 과연 한국의 정치가 사회통합형 개방발전모델을 운영해갈 수 있겠는가? 아니라면 어떻게 그 운영능력을 제고할 수 있겠는가?
유럽의 조정시장자본주의 국가들이 대부분 사회민주주의나 조합주의적 복지체계를 갖추고 있다는 사실은 앞서 말한 대로이다. 정치구조적 측면에서도 ‘정당의 구조화’를 이루어 이념이나 정책 중심의 정당정치를 펼치고 있다.20 이는 복지국가의 성공적 운영에는 일정한 정치구조적 여건이 형성되어야 함을 시사한다. 한국정치의 운영능력 제고는 이를 충족할 때만이 가능할 것이다.
개방과 성장을 지속하는 동시에 사회안전망 및 복지체계를 확충해가는 일에 총론적으로는 누구나 찬성하지만, 각론에 들어가면 노동과 자본, 중소기업과 대기업, 약자와 강자, 그리고 빈자와 부자 등의 사이에 대립이 야기된다. 경제주체들의 선택과 행위는 대체로 장기가 아니라 단기적 이해득실에 의해 지배되기 때문이다.
조세개혁 문제만 해도 그러하다. 우리에게 조세개혁은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이다. 사회안전망이나 복지체계의 수준을 높이기 위해 필요한 재원은 궁극적으로 증세를 통해 마련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의 소득 대비 세부담률은 세계 최저수준이다.21 그러나 납세자들은 누구나 증세에 반대한다. 일반 근로자들은 고소득 전문직의 세금이나 기업 법인세를 올리라고 할 뿐, 자신들의 소득세 인상에는 한사코 저항한다. 고소득자나 기업들이 이를 순순히 받아들일 리도 만무하다. 결국 정부는 직접세 대신 오히려 소득재분배구조를 왜곡하거나 양극화를 심화시킬 간접세를 올리곤 한다.22 사회통합의 유지가 지속가능한 경제성장의 전제조건임을 알면서도 그를 위한 비용 부담은 모두 꺼리기 때문이다. 유연안정성 문제 역시 마찬가지이다. 노동과 자본은 공히 유연안정성의 확보가 장기적으로 자신들에게 이익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단기적으로 유연성의 제고는 노동의 희생, 안정성의 제고는 자본의 비용 증가를 불러온다는 이유로 그 둘은 타협이 아닌 갈등을 택한다. 그 결과 장기적으로 모두가 바라는 유연안정성의 증대는 실현되지 않는다. 비슷한 상황은 거의 모든 사회·경제정책의 추진과정에서 발생한다.
정부의 존재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이러한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함이다. 민주정부가 취할 수 있는 가장 바람직한 해법은 사회적 대화와 타협의 장을 마련하고 대립하는 이익집단들 사이에서 합의점을 도출하며 그에 기초한 사회·경제정책을 수립하는 것이다.23 그러나 이 해법의 성공 여부는 상당부분 정당체계의 구조화 정도에 달려 있다.
대의제 민주정치에서 사회·경제집단들의 이익은 기본적으로 정당을 통하여 집약·표출된다. 정책결정이나 입법 과정에서 이익집단들의 정책선호를 합헌적으로 대리할 수 있는 핵심주체는 정당이다. 따라서 정당에 의해 대리되지 못하는 이익집단 그리고 그들의 정책선호는 이 과정에서 밀려나기 십상이다. 당연히 이러한 집단들에는 정부가 주도하는 사회적 타협에 참여할 인쎈티브가 별로 존재하지 않는다. 참여한들 (양보한 만큼 양보받겠다는) 자신들의 요구가 정책이나 입법에 반영되리라는 보장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중소상공인단체나 노동조합 등 주요 이익집단이 여기에 속할 경우 사회적 타협의 가능성은 한층 낮아진다. 주요 이익집단의 참여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그들의 정치적 요구에 개별적으로 부응할 수 있는, 즉 각 정당이 특정 이익집단의 정치적 대리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정당체계가 형성될 필요가 있다. 이는 정당체계가 정책 혹은 이념 중심으로 구성될 때 가능하다.
한국에서는 이같은 정당의 구조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군소정당에 불과한 민주노동당을 빼고는 대개 인물 혹은 지역 중심 정당이다. 이러한 체계에서는 사회·경제적 이익집단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대리인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가 어렵다. 정당의 주요 결정이 특정인 혹은 카리스마있는 소수에 좌우되므로 정책기조가 불확실하거나 가변적일뿐더러, 정당간 이합집산이 심해 정당의 정체성과 안정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한국에서 사회적 타협에 기초한 사회·경제정책의 성공을 기대하기 어려운 이유이다. 우리가 사회·경제정책을 통해 시장조정이 가능한 조정시장자본주의나 사회통합형 개방발전모델을 꿈꾼다면, 정당체계의 개혁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 무엇보다 사회경제적 약자집단의 이익을 효과적으로 대변해줄 유력한 정책정당이 필요하다.
사실 정당개혁이 꼭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은 아니다. 예컨대 선거제도 개혁은 정당체계의 변화를 촉진한다. 이는 한국 헌정사상 최초로 2004년 총선에서 극히 부분적으로 도입된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 덕분에 이념정당인 민주노동당이 10석을 얻어 국회에 진출한 예를 보아도 알 수 있다. 만약 비례대표의석을 전체의 50% 이상으로 유의미하게 확대하거나 전면 비례대표제로의 개혁을 단행한다면 정당의 구조화는 훨씬 앞당겨질 것이다.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에서는 인물이 아닌 정당에 대하여 투표가 행해지므로 각 당은 이념이나 정책기조로 승부를 걸어야 한다. 따라서 특정 지역이나 인물에 의지해온 구태정당보다는 보편적 이념이나 참신한 정책을 강조하는 개혁정당들에 유리한 환경이 조성된다. 또한 의석이 각 당의 득표율에 비례하여 배분되기 때문에 이념 및 정책 정당들은 적은 득표율로도 (현행 소선거구제처럼 지역구에서 반드시 1위를 하지 못해도) 그에 비례하여 의석을 차지할 수 있다. 이것은 신생 개혁정당들이 쉽게 진입할 수 있게 하여 정당체계에 근본적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이렇게 될 경우 조속한 정당개혁은 가능하다. 길이 없지는 않다는 것이다. 문제는 정치권의 의지일 뿐이다.24
경제외교의 기조도 한국형 개방발전모델과 잘 부합하도록 정립되어야 한다. 핵심기조는 동아시아지역주의의 발전을 도모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 이유는 소극적인 것과 적극적인 것으로 나눌 수 있다. 소극적으로는 미국이 주도하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압력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동아시아의 연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유럽이 미국화의 압력에서 자유로울 뿐 아니라 심지어 미국의 대안세력으로까지 발전하게 된 데는 무엇보다 그들간의 강력한 연대가 있기 때문이다. EU는 그들의 공동체적 연대가 제도화된 결정체이다. 최근에는 중남미 국가들도 과거의 무방비상태에서 벗어나고자 중남미연합을 추진하고 있다. 그들은 일국경제나 일국민주주의로는 미국화의 압력을 떨쳐내기 어렵다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25 동아시아 국가들 역시 1990년대말 외환위기를 겪으며 공세적 세계화 압력에 대한 지역주의적 공동대응의 필요성을 절감한 바 있다. 그것이 ASEAN+3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공동체 형성 논의의 핵심 배경이다. 그리고 그 논의 전개의 선두에는 한국의 김대중정부가 있었다.
그런데 최근 몇년 사이 동아시아연대론은 동력을 상당히 잃었다. 한국은 안보중심 담론인 동북아시대구상에 매몰됐고, 일본은 미국과의 일체화 노선을 택해 중국과의 대립이 심화되었다. 그렇다고 ASEAN이 자체적인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미국화의 압력에 직면한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의 미래를 위하여 이제 한국이 다시 나서야 할 때이다. 중-일 및 동북아-동남아를 잇는 교량국가로서의 역할을 강화하여 역내 국가들의 협력을 끌어냄으로써 동아시아의 정서와 사정에 맞는 시장조정기제를 마련해야 하며 또 그에 합당한 민주주의를 발전시켜가야 한다. 동아시아 나름의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표준을 설정해가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의 사회통합형 발전모델이 동아시아 표준 설정의 기초가 될 수 있다면 더욱 바람직하다.
동아시아지역주의의 발전에 힘써야 하는 좀더 적극적인 이유는 정보산업형 발전모델의 동력을 확보하기 위함이다. 앞서 말한 대로 산업구조의 고도화를 위해서는 중국이나 ASEAN 국가들과 교역 자유화를 선행하는 것이 유리하다. 고부가가치 첨단산업의 발전을 (그 부문에서 우리보다 비교열위에 있는) 그들과 교역을 확대함으로써, 즉 그들의 첨단제품 수요를 우리가 공급함으로써 도모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의 산업화에 필요한 부품·소재 및 설비투자에 대한 수출을 늘리면서 해당 국내산업의 육성도 꾀할 수 있다. 사실 동아시아는 인구나 성장잠재력 등을 감안할 때 조만간 세계 최대의 구매력을 보유한 지역이 된다. 이 시장만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다면 우리는 어떤 산업도 크게 키울 수 있다. 동아시아 정도의 시장규모라면 IT나 BT 등 첨단산업부문에서의 지역표준이 형성될 수 있으며, 그것이 세계표준이 될 공산도 크다. 이것이 중국 및 동남아 국가들과 먼저 FTA를 체결해야 할 이유이며, 나아가 동아시아지역주의의 제도화 혹은 동아시아공동체의 형성이 필요한 까닭이다.
여기서 유의할 것은 북한의 참여가 동아시아지역주의 발전의 화룡점정에 해당한다는 사실이다. 북한의 협력이 없다면 한국과 동북아는 물론 동아시아 전체의 평화와 공동번영은 불가능하다. 한반도의 반쪽만이 참여한 지역공동체란 어차피 안정적일 수 없기 때문이다. 중국, 일본, ASEAN 등 역내 국가들에도 이 사실을 명확히 인식시킴으로써 이들이 북한의 개혁개방을 적극 지원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즉 개혁개방을 통한 북한의 연착륙은 한국만이 아닌 동아시아의 공동과제임을 분명히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남북경협의 심화·확대나 한반도경제공동체의 구축도 남북한만의 사업이 아니라 처음부터 동아시아경제공동체 형성 작업의 일환으로 진행시켜야 한다. 예컨대 개성공단에도 우리만이 아니라 동아시아 기업이라면 누구라도 입주할 수 있는 길을 터주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밖에 투자, 철도, 물류, IT, 에너지협력 등 남북간에 추진 가능한 영역별 경협과제를 되도록 많이 발굴하여, 이를 ASEAN+3의 틀 안에서 동아시아 경협과제에 포함시킴으로써 지역 차원의 사업으로 확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요컨대 동아시아지역주의의 발전과정에 북한을 참여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같은 ‘북한의 동아시아국가화’는 CLMV 사례를 원용하여 추진하는 것이 필요하다. CLMV란 캄보디아, 라오스, 미얀마, 베트남의 영문 이니셜을 모은 것으로 ASEAN의 후발 4개국을 통칭한다. 이들을 뒤늦게 ASEAN 회원국으로 받아들일 때 선발국가들은 이들의 특수성을 감안하여 다양한 특혜를 제공했다. 경제통합작업에 신규 참여시 각종 예외조항과 유예기간을 두어 배려했고 이들의 경제개발 지원을 위한 역내 기금도 모았다. ASEAN의 CLMV 정책은 동아시아식 경제통합방식에서 하나의 표준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중국이 ASEAN과 FTA를 체결하면서 CLMV 국가들에 대한 특별 배려안을 마련한 것도 이 표준을 따른 것이다. 말하자면 동아시아의 경제통합은 역내 국가들의 특수사정이 최대한 반영되는 ‘맞춤형’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북한의 참여도 같은 방식에 의해 촉진돼야 한다. 북한의 사회경제체제와 국제경쟁력 등을 감안한 점진적·단계적 참여조건의 제시가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한국의 개방발전모델과 동아시아공동체구상은 유럽과의 연계 속에서 더욱 성공적으로 실현될 수 있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기본적으로 한국에 적합한 자본주의 유형이나 발전모델은 유럽식 조정시장경제체제에 가까우며 그것은 동아시아 차원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우리를 포함한 동아시아 국가들이 유럽식 자본주의국가들과의 교류를 심화·확대하는 것은 동아시아 나름의 사회통합형 자본주의의 발전에 매우 유익한 환경을 조성해가는 일이다. 한-EU간 FTA의 체결 등을 통해 동아시아 국가들이 유럽과의 경제통합을 각국의 사정에 맞추어 점진적으로 추진하는 것도 권장할 만하다. 그러나 더욱 바람직한 것은 동아시아지역주의가 상당 수준으로 발전하여 동아시아 전체가 단일행위자로서 다른 행위자인 EU와의 교류를 제도화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동아시아와 유럽 간의 ‘지역간협력체제’(inter-regional cooperation system)를 구축하는 일이다. 이는 기존의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를 활용하여 그 틀 내에서 우선 동아시아 국가들이 ASEAN+3의 제도화 수준을 끌어올리고 그에 기반하여 다시 EU와의 협력체제를 제도화할 때 가능할 것이다.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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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본주의의 유형에 대해서는 Peter Hall and David Soskice, eds., Varieties of Capitalism: The Institutional Foundations of Comparative Advantage, Oxford Univ. Press 2001 참조.↩
- David Soskice, “Divergent Production Regimes: Coordinated and Uncoordinated Market Economies in the 1980s and 1990s,” Herbert Kitschelt, Peter Lange, Gary Marks, and John D. Stephens, eds., Continuity and Change in Contemporary Capitalism, Cambridge Univ. Press 2001 참조.↩
- 세계은행은 FTA의 유형으로 미국식, EU식, 그리고 남-남식(개도국식) 등을 제시하고 있는데, 여기서도 미국식은 다른 것들에 비해 신자유주의적 성격이 뚜렷하다. 특히 써비스, 투자, 지적재산권 등 소위 ‘신통상영역’에서의 자유화를 유난히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 World Bank, Global Economic Prospects 2005: Trade, Regionalism and Development. 좀더 상세한 설명은 김양희 「FTA의 다양성과 우리의 선택」, 최태욱 편, 앞의 책 참조.↩
- 자본주의 혹은 생산레짐과 복지체제 간의 친화성 논의에 대해서는 Michael Shalev, “The Politics of Elective Affinities,” Bernhard Ebbinghaus and Philip Manow, eds., Comparing Welfare Capitalism, Routledge 2001; 안재흥 「생산레짐과 복지국가체제 상호연계의 정치」, 『한국정치학회보』 38집 5호, 2004; 신동면 「세계화시대 사회정책의 변화」, 『정부학연구』 11권 1호, 2005 참조.↩
- 이에 대해서는 이병천·정준호 「양극화 함정의 산업경제와 선진화의 방향」,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회 지방순회토론회 ‘양극화 해소를 위한 사회·경제적 과제와 정책’ 자료집, 2006 참조.↩
- 이일영·정준호 「한국형 발전모델의 모색: 점진적 개방·협력과 산업혁신」, 최태욱 편, 앞의 책.↩
- 첨단 제조업의 발전과 깊이 연관된 지식기반 써비스산업에는 플랜트 관련 엔지니어링이나 쏘프트웨어, 컴퓨터써비스, 웹디자인, 인터넷 관련 써비스, 통신써비스 등이 있다.↩
- 미국국제무역위원회(USITC)의 2001년 보고서에 의하면, 한국의 대미 비교우위품목은 의류, 액서서리, 철강, 금속제품, 고무제품, 섬유제품, 여행용구 등 주로 저부가가치 상품들이다. United States International Trade Commission, U.S.-Korea FTA: The Economic Impact of Establishing a FTA between the United States and the Republic of Korea (Washington DC: USITC 2001).↩
- FTA 체결시 어떤 국가에 우선순위를 둘지에 관해서는 졸고 「한국정부의 FTA 추진전략과 문제점」, 한국EU학회·한국유럽학회 공동쎄미나(2006. 8. 25) 발표논문.↩
- 박번순·김영한 「한국 제조업의 과제와 한미FTA의 효과」, 최태욱 편, 앞의 책.↩
- 이일영·정준호, 앞의 글.↩
- Joseph Stiglitz, Globalization and Its Discontents, W.W. Norton & Company 2002(조지프 스티글리츠 『세계화와 그 불만』, 송철복 옮김, 세종연구원 2002).↩
- 현재의 비교우위산업에 전념하기보다 앞으로의 비교우위, 즉 동태적 비교우위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산업정책을 통한 일정정도의 보호·육성책이 필요하다. 김종걸·정하용 「한미FTA와 동아시아 경제협력」, 최태욱 편, 앞의 책 참조.↩
- 사회적 자본에 관한 초기 논의에 대해서는 Francis Fukuyama, Trust: The Social Virtues and the Creation of Prosperity, Free Press 1995; Robert D. Putnam, “Bowling Alone: America’s Declining Social Capital,” Journal of Democracy 6, 1995 참조.↩
- 전병유 「한국에서의 개방과 사회정책」, 최태욱 편, 앞의 책.↩
- 적극적 노동시장정책은 생산성이 낮은 기업과 사양산업의 노동자들이 생산성이 높은 기업과 산업으로 이동할 수 있도록, 단기적으로는 실업 관련 보조금을 지급하면서 장기적으로는 직업재훈련, 업무재배치 훈련, 구직과 전직 정보 등의 인프라 제공을 통해 노동자들의 완전고용을 지원하는 정책을 의미한다. Henry Milner, Sweden: Social Democracy in Practice, Oxford Univ. Press 1990.↩
- Dani Rodrik, “Sense and Nonsense in the Globalization Debate,” Foreign Policy 107, Summer 1997; Elmar Rieger and Stephan Leibfried, Limits to Globalization: Welfare States and the World Economy, Polity Press 2003.↩
- 신정완이 제안한 한국의 발전모델은 최근 성장과 분배, 효율과 형평, 유연성과 안정성 등 모든 면에서 좋은 성과를 거둔 북유럽 모델을 중심에 두고, 거기에 혁신과 창업 그리고 고용창출에 유리한 미국식 모델의 일부 요소를 결합한 것이다. 이 글에서 제시하는 사회적 자본에 기반한 정보산업형 발전모델과의 차이점은 추후의 논의를 통해 정리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신정완 「한국경제의 대안적 발전모델을 찾아서」, 최태욱 편, 앞의 책 참조.↩
- 지면 제약으로 여기서는 간단하게 언급하는 정도로 그치지만, 한국형 개방발전모델의 성공을 위해서 반드시 갖추어야 할 정치 및 대외경제 조건들이 매우 많다. 상세한 논의는 후속논문에서 진행하기로 한다.↩
- 정당체계가 이념이나 정책 중심 정당들에 의해 구성되고 이들이 상당한 정체성과 영속성을 유지할 경우, 그 나라의 정당체계는 ‘구조화’가 잘되어 있다고 말한다.↩
- 2005년 한국 도시근로자의 소득 대비 세부담률은 고작 3.8%이다. 소득의 20~30%를 세금으로 내는 선진국에 비하면 지나치게 낮은 편이다. GDP 대비 조세부담률도 19.5%에 불과해 OECD 평균치인 26.5%를 크게 밑돌고 있다.↩
- 양극화 해소를 강조했던 노무현정부도 세수 부족 때문에 소주나 담배 등에 붙는 간접세를 올리는 모순된 정책을 시행했다.↩
- 유럽의 많은 국가들이 상시 운영하고 있는 각종 사회적 협의체는 이러한 해법이 제도화된 경우이다. 김대중정부 당시 출범한 노사정위원회도 이를 시도한 사례로 볼 수 있다.↩
- 한국 정치개혁의 실현방안과 수순, 문제점 등에 대해서는 졸고 「세계화와 한국의 정치개혁」, 윤영관·이근 편 『세계화와 한국의 개혁과제』, 한울 2003 참조.↩
- 미국의 세계화 압력은 기본적으로 일국에 개별적으로 가해진다. IMF를 앞세울 경우에도 소위 ‘창구일원화’ 원칙에 따라 IMF와 해당국이 양자교섭을 하게 하며, FTA협상 역시 양자주의가 원칙이다. 미국은 복수주의나 다자주의 환경에서 상대국들이 집합적 행동을 할 경우 압력효과가 감소할 것임을 알기 때문에 양자주의를 선호한다. 이는 개별대응의 취약성과 집단대응의 유효성을 동시에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 1996년에 출범한 ASEM의 유럽측 회원국은 EU 국가들, 그리고 동아시아측 회원국은 정확히 ASEAN+3 국가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