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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2007, 한국사회의 미래전략

 

애도의 수사학에서 기쁨의 정치학으로

새로운 젠더질서를 향하여

 

 

김현미 金賢美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저서로 『일상의 여성학』 『‘한류’와 아시아의 대중문화』 『처음 만나는 문화인류학』(이상 공저) 『낯선 곳에서 나를 만나다』(공편) 등이 있음. hmkim2@yonsei.ac.kr

 

 

1. 들어가는 말

 

요즘 여성들이

인권운동이다 뭐다 해서 차별당한다고 생각하는데

우리나라 같은 여성상위사회에

남성이 차별을 당하면 당했지

무슨 여성이 차별을 당한다고 그래요?

도무지 성차별다운 게 있어야지

안 그래요?

 

서태지의 7집 음반에 수록된 「Nothing」 전문이다.1 작년에 불거진 ‘된장녀’ 논쟁과 여성 연예인들을 겨냥한 악플의 홍수에 이어 새해 벽두부터 시작된 ‘여성부 폐지 10만 서명운동’까지, 인터넷 공간에서는 ‘성전쟁’(sex war)이 해를 넘겨 벌어지고 있다. ‘여성세력화’라는 사회적 흐름을 역차별·남성배제·남성차별로 곡해하는 일부 한국 남성들의 ‘반동’(backlash)이 거세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성차별을 논하는 일은 이제 식상할 뿐만 아니라 ‘위험’하다.

최근 한국사회에서 ‘성정치학’의 지형이 급격히 변화되고 있다. 저출산 위기를 야기하는 ‘아이를 낳지 않는 여성’, 이성애적 핵가족 제도의 존속을 위협하는 ‘결혼하지 않는 여성’, 결혼 여부와는 상관없이 ‘성적 욕망을 실천하는 여성’, 눈치없이 모든 분야에서 ‘남성보다 월등한 능력을 과시하는 여성’ 등 가부장제의 통제에서 벗어나려는 여성들이 급증하고 있다. 각종 고시의 합격자 중 여성의 비율이 급상승하고 있고, 여성 총리와 당대표가 탄생하고 있으며, 여기저기 성공한 커리어우먼의 신화들이 넘쳐난다. 그러나 2007년 새해를 맞이한 지금, 여성학자인 나는 여전히 한국사회 젠더질서의 재편성을 열망한다. 젠더질서란 여성, 남성 또는 여성성이나 남성성과 연관된 사회·문화·정치·경제·종교 등의 제 측면이 이분법적 우열의 관계로 구성되는 방식을 의미한다. 젠더질서의 재편성은 고정화되고 본질화된 기존의 남녀 권력관계를 해체하고 성별과 상관없이 좀더 유동적이며 개별화된 자아를 구성할 수 있는 일상적 환경을 만들어내는 것을 의미한다. 성이 한국사회를 구성하는 하나의 권력, 상징, 가치체계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한국사회의 젠더질서는 일관된 ‘진보’의 과정을 겪는다기보다는 한걸음의 진보와 한걸음의 후퇴 과정을 통해 매우 지난하게 변화하고 있는 듯하다. 우리는 호주제 폐지와 ‘젠더’의 정책적 중요성에 대한 인식의 출현, 다양한 삶의 방식을 만들어내고 있는 여성/남성들의 등장 등 진보적인 변화를 목격했다. 그러나 IMF사태 이후 여성 노동자의 비정규직화가 전면적으로 진행되면서 여성의 경제력은 영구적으로 무력화될 위기에 처해 있다. 소수 여성들의 성공신화가 대중매체를 장악하고 있는 지금, 성별에 따른 불평등한 자원 분배에 대한 항거의 목소리는 힘을 잃어간다. 오히려 ‘된장녀’ 같은 호명을 통해 허영심 많고 소비주의의 노예가 된 젊은 여성에 대한 집단적 미움이 설득력을 얻는 세상이 되고 있다. 여성, 남성 모두 의사소통적·동반자적 관계에 대한 열망은 높아지고 있으나, 여성을 쉽게 성적으로 대상화하는 관행들에 대해서는 여전히 관대하다.

젠더는 가족·연애·성 같은 지극히 사적인 영역에서부터 정치·경제·종교에 이르기까지 사회 전영역에 걸쳐 정체성을 구성해내는 주요한 기제이다. 사회문화적으로 구성된 젠더야말로 민족주의만큼이나 한국인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중요한 축이다. 그러므로 관습화된 젠더질서에 대한 ‘변화’의 조짐들이 심리적 불안을 수반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어떤 사람의 심리적 불안이나 불편이 다른 사람에게는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변화로 여겨질 때, 사회적 ‘타협’은 필수적일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 타협이 이루어지기에는 현재 한국의 여성과 남성이 서로에 대해 갖고 있는 분노의 수준이 너무 높다. 종신고용의 신화가 사라지고 생계부양자로서의 신분이 크게 위협받고 있는 현실에서 남성들은 당연하게 누려왔던 노동권을 박탈당하고 있다는 상실감으로 괴로워한다. 부인과의 친밀성을 구축할 여유도 없이 덩그러니 집으로 보내진 중년 남성들의 외로움은 사회적 연민을 얻기에 충분하다. 마찬가지로 ‘여풍’ 이미지 시대에 영구 실업자나 비정규직으로 자리매김된 보통 여성들은 가난, 불안, 모욕을 일상적으로 경험하고 있다. 아이를 낳고 기를 것인가와 직장을 다닐 것인가를 두고 벌이는 여성들의 갈등은 절박하고 끝이 없다. 근대적 성별분업체제가 그대로 남아 있는 현실에서 ‘출산파업’이 그나마 여성들이 할 수 있는 선택이다.

우리나라의 여성과 남성 모두는 나름의 이유로 현재의 젠더질서에 불만이 많다. 고착된 젠더질서를 기반으로 했던 한국사회의 전반적인 삶의 양식이 바뀌기 위해서는 법적·제도적 변화 못지않게 일상문화의 변화도 급한 일이다. 이 글에서는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의 성역할 이분법에 기반을 두었던 근대적 젠더질서에 균열이 발생하고 ‘개인성’에 대한 자각이 일어나고 있는 한국사회에서 진보적 삶이란 무엇인가를 가늠하고자 한다. 진보적 삶이란 개인의 삶을 왜곡하는 다층적인 권력관계를 통찰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기존의 삶을 ‘의미있고’‘즐거운’ 형태로 변화시키고자 하는 열정과 의지이다. 현재의 혼란과 변화 들을 거부하는 반동적인 흐름에 동참하기보다는 이를 더 나은 삶의 형태로 전환하려는 의지가 필요하다. 이 글은 기존의 젠더관계가 생산해온 삶의 왜곡과 무력감을 진단하고, 유연한 젠더관계를 만들어낼 수 있는 한국사회의 문화적 능력의 가능성과 한계를 진단하고자 한다.

 

 

2. 은퇴남편증후군

 

“남편이 집에 있다고 생각하니 온몸에 발진이 돋고 위통이 생겼어요.”

“우리 세대는 ‘감정’을 표현하는 것에 익숙하지 못합니다.”

 

2006년 11월 영국 BBC에서 방영한 다큐멘터리 「은퇴남편증후군」(Retired Husband Syndrome)에 나온 일본 여성과 남성의 대사이다.2 이 다큐멘터리는 최근 일본에서 화제가 된, 직장에서 은퇴를 앞두거나 은퇴한 남편을 둔 중년의 여성들이 앓고 있는 ‘병’을 다루고 있다. ‘은퇴남편증후군’(RHS)이라 불리는 이 병은 베이비붐 시대에 태어나 1950~60년대에 성장하고 결혼하여 현재 50~60대가 된 일본 여성들 중 약 60%가 시달리고 있다고 추정되는 ‘사회적 질병’이다. 이들의 결혼생활은 대부분 비슷했다. 부인은 마치 남편이 구매한 ‘상품’처럼 가사와 양육 등 돌봄노동만을 수행했다. “직장과 결혼한” 남편은 아침 일찍 출근하여 밤늦게 퇴근하는 생활을 반복했고, 집은 잠만 자는 곳이었다. 결국 부부는 같은 집에 거주해도 각자의 영역에서 분리된 삶을 오랫동안 지속해온 셈이다. 그러다가 남편이 60세가 되어 은퇴할 무렵에 부인은 ‘낯선 사람’이 갑자기 자기 영역으로 침범해 들어온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앞으로 이 낯선 사람과 한집에서 영원히 함께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더 심란해진다. 은퇴남편증후군은 주로 이런 여성들에게 나타나는 우울증과 피부발진, 위궤양, 천식, 고혈압 등의 신체적 고통이다. 어떤 여성은 이러한 질병에서 벗어나기 위해 곰인형 수집에 열을 올리고, 젊은 남성대중스타의 열성팬이 되기도 한다.

남편은 자신이 이 병의 주요 원인이라는 생각을 꿈에도 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 병을 치유해줄 수 있는 사람도 남편인데, 남편이 부인의 질병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이해하려 들지 않으면 상태가 더 악화된다고 한다. 남편은 남편대로 딱한 상황이다. 혼자 살아갈 능력이 없고 사회적으로도 위축된 상태에서 철석같이 믿던 부인이 자신을 ‘괴물’처럼 여긴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인생을 돌아봐도 직장에서 열심히 일한 것 외에는 딱히 부인에게 잘못한 일이 없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친밀감과 동반자적 연애감정을 되살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왜냐하면 그들 세대에겐 애정이나 신뢰의 감정을 표현할 필요가 없었고, 표현하는 것에 익숙지 않아도 결혼관계를 유지하는 데 별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결혼의 의미는 그저 남들처럼 각자 성역할을 ‘수행’하면 되는 것이었다.

이 이야기는 일본에서 은퇴한 남편을 땅에 딱 달라붙어 잘 떨어지지 않는 ‘젖은 낙엽’이라 부르며 농담의 대상으로 삼았던 몇년 전의 상황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그러나 새로운 것은 부인들이 겪는 심리적 불안과 육체적 고통을 사회적 질병으로 인정한다는 점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프로그램을 본 사람들이 그것은 일본에만 있는 병이 아니라며 자신들의 경험담을 털어놓는다는 것이다. 사실 남녀의 성역할을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으로 양분하여 자본주의 발전을 이룬 대부분의 나라에서 겪는 문제이기도 하다. 고령화사회로 이동중인 한국사회 장년층들의 사회심리적 상황도 이와 매우 유사하다. ‘이혼’이 수월하지 않던 세대의 여성들은 ‘몸’의 고통을 통해 자신의 무력감을 표현할 수밖에 없다.

현재 부부간의 ‘친밀성 위기’는 성역할 이분법을 고착시켜왔던 자본주의 근대성의 일반적인 ‘결과’이기도 하다. 유교주의와 근대화가 한층 강하게 결속했던 우리나라의 경우 ‘감정’과 ‘정서’의 영역은 더욱 심한 왜곡을 경험했다. 부계제(父系制)·부거제(父居制)·부명제(父名制)가 결합된 가부장적 질서에서는 연장자 남성을 중심으로 한 부권의 확보와 지속이 일차적인 과제였다. 이는 개별성을 근간으로 하는 근대의 원칙들을 압도하거나 그것과 묘하게 결탁했다. 이 과정에서 유교적 남성다움인 도덕성, 엄격함, 체면과 가정의 행복에 대한 책임감 같은 남성 가부장의 전통적 관념들 그리고 능력주의에 입각한 계층상승의 욕망이 근대화 프로젝트에 통합되었다. 지금까지 ‘결혼’이란 남성의 경제적 능력과 여성의 일차적 ‘가정주부’화에 대한 동의가 ‘교환’된 제도였다. 이는 남성에겐 근거없는 권력과 과도한 자기연민의 정서를, 여성에게는 여성성을 매매 가능한 상품으로 연출해내는 능력과 가정 내에서의 감정적 장악 욕구를 만들어냈다.

남성에게 모든 권력을 집중시켰던 가부장제는 ‘자궁가족’이라 불릴 만한 여성과 아이들 간의 감정적 집착관계를 만들어냈다. 부계가족 내에서의 공식적 ‘권력’의 부재를 만회하기 위해 여성들은 자신의 아이들에게 감정적인 의존과 집착을 드러냈다. 이것이 과도한 교육열을 낳거나 어머니를 떠나 감정적으로 자립할 수 없는 의존적 자식, 특히 아들들을 양산했다. 어머니와 자녀의 감정적 결속이 배타적으로 이뤄지면서 남성은 가부장적 권력을 행사하지만 친밀성의 영역에서는 부재했다. 감정을 기반으로 한 관계맺기는 ‘여성’의 역할이나 영역으로 자리잡았고, 남성들은 ‘아내’를 통해서만 자녀와 연결될 수 있었다. 실제로 가부장제의 공적 질서가 아닌 여성을 통한 ‘정서적 관계망’이 일상문화를 조직하는 원칙이 되고 있다. 그 예로 남편은 처가와, 자녀들은 외가 친족들과 정서적으로 더 가까운 관계를 맺는 현상이 급증하고 있다. 또한 여성들의 경제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육아나 가사 등을 ‘여성’쪽 친척들의 도움에 의존하는 경향이 늘어나고, 여성들이 스스로 획득한 경제적 자원을 사용하는 방식 또한 ‘모계’중심으로 변화되고 있다. 고착화된 부계중심의 젠더질서는 남녀 ‘개인’의 다양한 욕망과 변화된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기 때문에 늘 반작용을 일으키고 교란되어왔다.

한국의 부부 중에서 오랫동안 잠자리를 갖지 않는 쎅스리스(sexless) 커플이 많은 것은 쎅슈얼리티 또한 공사 영역의 이분법적 구도 내에서 그 의미가 형성되어왔음을 잘 보여준다. 성은 재생산과 친밀성, 쾌락과 관련된 영역이지만, 일부 남성들은 성이 여전히 결혼 영역에서 출산과 관련된 목적에 행사되었을 때 가장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집 밖에서는 동료 남성들과 연대를 구축하기 위한 의례적 행위나 쾌락을 위한 것으로 성을 이해하면서, 상업화된 성에서 훨씬 자유로움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자신들이 생계부양자 역할을 수행하는 한, 파트너에 대한 성적 친밀성 표현의 부재나 성매매는 결혼의 지속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성적 써비스를 구매하는 것이 사회생활을 잘 수행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하므로 ‘정당’하다고 여긴다. 동반자적 관계에 필수적인 윤리의식의 부재가 남성의 ‘상식’이 된 셈이다. 그러나 피임기술의 발달로 재생산에 대한 통제능력을 갖게 된 여성들은 반대로 성은 재생산과 상관없는 친밀성이나 욕망의 표현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파트너가 매우 피상적이고 일방적인 방식으로 성관계에 임할 때, 성은 친밀성의 표현이라기보다는 자아존중감이 훼손되는 경험일 수 있다. 성과 관련된 부부간 의사소통 ‘불능’의 골은 깊다. 소위 ‘혼외 성관계’를 경험한 여성들이 “다시 여자로 존중받은 느낌이었다”고 고백하는 사례는 현대 한국사회의 부부관계가 공사 영역의 이분법에 의해 얼마나 왜곡되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

성과 사랑을 추구하는 젊은 세대는 강압적 ‘역할놀이’인 결혼에 저항하지만 그들에게도 대안의 폭은 넓지 않다. 공사 영역의 성별 이분법이 해체되지 않는 한, 모든 가능한 선택은 지극히 개인적 차원일 수밖에 없다. 개인적 차원에서 갈등을 해소하는 방식으로 선택된 비혼(非婚), 동거, 이혼, 출산중지, 혼외관계 등은 갈등을 잠시 유예하는 효과는 있지만 여전히 고통과 희생을 요구한다. 남녀관계의 급진적인 ‘질적 변화’ 없이는 관계의 불안정성이 증가할 수밖에 없다.

현재 한국사회는 기존의 젠더관계는 흔들리지만 새로운 젠더질서는 구축되고 있지 않은 상황이다. 스티븐스는 성별 불안정성이란 개념을 통해 이러한 과정을 잘 설명한다.3 경제적 풍요 속에 등장한 아시아의 신중산층은 다양한 이미지와 상품 들을 ‘소비’하면서 새로운 근대성들을 체험한다. 이 과정에서 아시아적 가족주의의 기반이 되었던 사적/공적 영역의 이분법과 여성/남성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들이 회의되면서 여성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성찰하는 주체로 부상한다. 소위 사적인 영역으로 취급되어 충분히 정치화되지 않았던 주제들인 친밀성, 쎅슈얼리티 등의 문제를 공적인 아젠다로 만들어내고자 하는 ‘욕망들’도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즉 전형적인 여성성과 남성성에 대한 믿음에 기반을 둔 젠더관계들에 다양한 균열이 생기면서 성별 불안정성이 강화되고 있는 것이다. 친밀성, 쎅슈얼리티 등의 문제는 자아의식과 깊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감정적인 파장을 일으킨다.

인터넷이나 글로벌 네트워크를 통한 이미지의 소비가 강화되고 있는 현재 한국의 젊은 세대들은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을 상상하고 실천하려는 강한 욕망을 갖는다. 일본의 중년층에서 ‘욘사마’가 새로운 남성성의 전형으로 등장하여 남편과의 친밀성 결핍을 ‘보충’해준 것처럼, 전지구적으로 유통되는 대중문화는 새로운 상상력을 제공하고 있다. 자신이 속한 사회가 충족시켜줄 수 없는 문화적 상상력의 결핍을 다양한 이미지들을 통해 보충하고 욕망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물론 이미지의 소비가 현실로 이어지지 않고, 현실에서 대안들이 부재한 경우 불만과 갈등 또한 증폭된다.

한때 미국 드라마 「쎅스앤더씨티」(Sex and the City)가 한국 여성들에게 인기를 얻었다. 뉴욕에 거주하는 전문직 여성들의 사랑, 성, 소비의 풍속을 소위 ‘쿨’하고 유쾌하게 그려낸 것으로 유명한 드라마다. 이 드라마에서 보이는 다양하고 솔직한 성적 실천들이나 남녀간의 소통방식, 도시적 일상, 의상, 음식 등은 젊은 여성들의 상상력을 ‘탈영토화’하는 데 기여했다. 드라마를 통해 적지않은 여성들이 자유로움과 유쾌한 감정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드라마를 본 20대의 남성 대학생 중 몇명은 토론수업 때 “한국 여성들이 이 드라마를 통해 ‘오염’되고 ‘타락’할까봐 걱정된다”는 표현을 써서 여성들의 ‘분노’를 샀다. 이들은 이 드라마에 나오는 여성들과 관계맺고, 소통하고, 투쟁하는 남성들의 능력을 눈여겨보지 않았다. 단지 한국 여성들이 생각없이 그들을 모방하면서 가부장적 통제를 벗어나게 될 것 같은 두려움을 ‘여성혐오적’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아버지세대의 남성과 자신을 구별지으면서 ‘신남성’(new man)을 선포하는 한국 남성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변화를 견디지 못하는 남성들의 ‘반격’ 또한 거세지고 있다. 여성들이 젠더질서를 변화시키려는 ‘주체’로 등장하지만, 그들과 동시대에 살고 있는 남성들이 가부장적 고착과 퇴행의 상황을 반복한다면 공존을 위한 타협은 더욱 힘들어진다. 남녀 모두 자기연민에서 벗어나 익숙하지 않은 관계를 맺기 위한 윤리적 사유를 해야 할 시기인 듯하다.

 

 

3. 포스트-호주제시대의 공사 영역 재편성

 

2005년 2월 3일 헌법재판소가 호주제의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최초의 여성 변호사이자 인권운동가였던 이태영(李兌榮) 박사가 호주제 폐지운동을 시작한 지 50년 만에 이뤄진 일이다. 호주제가 상징했던 문화질서는 한국인들의 젠더 정체성을 강하게 규정해왔다. 호주제는 법적 강제성과 함께 문화적 상징성이 뚜렷하게 표현된 제도였다. 한 가족의 대표를 남성으로 정한다는 것은 ‘가족’이라는 사적 영역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정치·경제·문화·국방 등 한국사회의 공적 영역에 깊이 침투해 있는 남성 대표자 대 여성 의존자라는 문화적 논리를 만들어냈다. 여성운동은 호주제 폐지가 남녀평등을 가져올 뿐 아니라, 가부장으로서 막중한 책임을 진 남성들의 부담도 덜어줌으로써 남성의 인권도 보호될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실제로 호주제 폐지 찬반논란이 일던 시점에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20, 30대 남성의 80% 이상이 호주제 폐지에 찬성했다. 호주제 폐지 이후 한국사회에서는 젠더와 상관없이 ‘개별성’에 대한 존중이 확산되고, 자율의지에 의한 선택과 책임감이 중요해지고 있다. 또한 가족의 의미를 새롭게 규정하고자 하는 ‘사회적 열망’이 커진 것도 사실이다. 포스트-호주제시대의 삶의 질을 상상하고 구체적인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이야말로 새로운 젠더질서의 구축을 위해 필수적인 과정이다.

최근 젠더갈등 해소를 중요한 사회적 목표로 설정한 나라들은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의 이분법을 해체하는 정책적 대안들을 내놓고 있다. 일본의 경우에도 ‘일터와 가정의 균형 잡기’(work-home balance)가 정책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다. 유교자본주의의 상징인 싱가포르도 ‘가족은 팀워크’(family as a teamwork)라는 정책을 집행하고 있다. 여기서 핵심은 가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여성에게 전통적 가치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남편, 아이, 노인 등 가족구성원 각각이 팀원처럼 가족내 일을 분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한 ‘물적 근거’를 마련하는 것이 정부의 역할이다. 지역마다 커뮤니티쎈터를 설치해서 가족 내에서 공평하게 가사를 분담하기 위한 훈련프로그램 등을 제공한다고 한다. 예컨대 잘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가사와 육아를 회피했던 남성들을 위해 설거지, 기저귀 갈기, 잔디 깎기 등 가사노동의 기술을 훈련시키는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집에서 며느리나 딸의 관심과 돌봄을 당연하게 여기던 노인들을 커뮤니티쎈터로 오게 해서 약간의 일을 시키고 돈을 지급함으로써 ‘집밖’으로 나오게 한다든가 하는 것들이다. 물론 보육시설을 확대해서 아이를 낳고 기르는 여성의 부담을 덜어주는 것도 포함돼 있다.

‘가족은 팀워크’라는 정책이 시행된 것은 물론 국가적 위기감 때문이다.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싱가포르에서는 일을 위해 결혼을 하지 않거나, 하더라도 아이를 낳지 않는 여성들이 증가했다. 포르노그래피 등 성적 오락물을 엄격히 관리했던 싱가포르 정부가 최근 그 규제를 완화한 것 또한, 우습지만 ‘욕망’의 생성을 통한 출산력의 증가를 기대했기 때문이다. 싱가포르처럼 화교를 중심으로 한 유교적 가족주의가 강한 나라에서 여성들의 비혼과 출산거부는 곧 가족해체의 위기로 받아들여졌고, 이성애적 핵가족을 유지해야 한다는 절박감이 확대되었다. 이 정책은 여성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가족유지를 위한 성격이 강하지만, 동기가 어떠하든, 왜 여성들이 결혼과 출산을 거부하거나 남성으로부터 독립하고자 하는가를 이해했다는 점은 긍정적이다. 가족은 이질적인 존재들이 모여 노력하면서 만들어가는 공동체이지, 여성들의 일방적인 희생과 노동으로 유지될 수 있는 공간이 아니다. 급격한 사회적 변화로 인해 남성 1인이 부양하는 모델을 강요할 수 없는 상황에서 여성의 경제적 역할은 필수적이다. 이를 위해 여성이 전담했던 가사와 육아의 부담을 덜어내는 것이 나중에 오는 갈등 처리비용을 최소화할 수 있는 대안이라는 점을 인지한 것이다. 자녀 출산시 몇십만원의 보조금 지급이란 어처구니없는 정책으로 저출산 위기를 해결하려 했던 한국정부의 졸속행정과는 비교가 되는 부분이다.

유럽의 대표적 복지국가 노르웨이는 ‘노동자-돌봄자(worker-carer) 모델’을 통해 새로운 젠더질서를 만들어내려고 노력중이다. 이 모델은 전형적인 성역할 이분법과는 상관없이 여성이든 남성이든 한 개인은 생계노동과 돌봄노동을 둘 다 수행해야 하고, 그런 잠재력과 능력을 가진 존재로 상정한다. 남성은 각종 휴가제도를 활용하여 아이와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고, 가사를 통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여성도 생애주기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역할 요구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남녀 모두에게 인생의 한 국면에서 생계를 위해 임금노동을 하거나 정서적인 돌봄노동을 할 수 있도록 기회를 확대해주는 정책이다. 이 정책이 진보적인 것은 법적 결혼 여부와는 상관없이 모든 커플에게 적용된다는 점이다. 이 정책은 정부·기업·시민사회의 ‘합의’에 의해 물적 근거를 확보함으로써 현실화될 수 있었다. 이 정책이 시행된 후 일터에서 남녀 모두 생산성이 향상되었고, 인생의 행복감이 증진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사회의 일터에서는 ‘자발적 노예’처럼 노동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증가하고 있으며, 기업들은 글로벌사회에서의 경쟁과 능력주의를 앞세우며 삶의 질의 변화에 대한 요구들을 외면하고 있다. 고용주는 결혼이나 육아, 간병 등 인간생활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돌봄’에 대한 요구들이 남녀 노동자 모두에게 존재한다는 사실을 무시해왔다. 그리고 이런 요구들과 상관없이 노동자의 생산성에만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에 현재의 사회적 불행을 만들어내는 데 기여했다. 한국사회에서 일터의 윤리가 변화되지 않고는, ‘가치’의 변화 없이는 현재의 젠더갈등이 해소되지 않을뿐더러 사람들의 불만과 좌절이 확산될 것은 당연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사회에서 ‘삶의 질’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람들의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일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여성학자들을 중심으로 공사 영역의 균형을 이루고 ‘돌봄’의 윤리를 확장하려는 노력이 진행되고 있다.4 물론 여기에서 사회적 돌봄이란 여성의 감정노동을 가중시키는 것은 아니다. 경쟁이나 분리, 강압 등의 원리로 일관된 한국의 근대화과정에서 잃어버린 ‘돌봄의 윤리’를 복원해내는 것이다. 또한 후기근대사회에서 더 심화되는 인간의 고립감, 외로움, 사회적 무력감은 인간관계가 더욱 피상적인 것이 되고 물질에 의해 매개되는 현실과 관계가 있다. 사실 모든 인간은 타자에게서 정서적 지원을 얻고 싶어하고, 인생의 특정시기에 남의 도움을 받아야 할 상황에 놓이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삶의 행복감을 얻기 위해서는 타자의 행복을 기원하는 윤리의식을 가져야 한다. 한국사회의 돌봄에 대한 논의는 남녀를 막론하고 모든 사회구성원들이 겪는 다양한 고립과 무기력을 돌보려는 사회적 의지를 만들어내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성역할 이분법에 의해 인간이 가진 다양한 잠재력과 가능성을 박탈당한 여성과 남성 들의 역사적 손실을 보상해주려는 의지가 그것이다.

 

 

4. ‘애도의 수사학’에서 ‘기쁨의 정치학’으로

 

베티 리어든(Betty Reardon)은 좀더 평등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관습적으로 익숙한 ‘윤리적 배제’의 상황으로부터 ‘윤리적 용인’으로 가치전환이 필요함을 강조한다.5 윤리적 배제란 정의와 평등한 대우의 범주 밖에 일부 사람들을 밀어두는 것, 그들을 향한 멸시를 모른 척하고 심지어 허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성차별, 인종차별, 종교적 편견 등이 윤리적 배제의 예들이다. 이런 점에서 한국의 가부장제는 역사적으로 여성이나 약자를 윤리적으로 배제하며 구축돼왔다. 오랫동안 남성질서 내에서 타자로 존재했던 여성들이 개별성을 인식하면서 다양한 욕망을 갖기 시작할 때 이 질서는 교란될 수밖에 없다. 현재의 성별 불안정성은 남녀 모두에게 복합적이며 대안적인 삶의 가능성을 식별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는 전환의 계기일 수 있다. 그러나 감정적으로는 ‘혼란’의 상황이기도 하다. 기득권을 가진 남성들조차 자신들이 패배자가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자원의 분배면에서 구조적으로 크게 나아진 것 없는 여성들은 자신들이 이전세대 여성과 전혀 다른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착각’을 경험하기도 한다. 법적 측면에서나 일상적 문화에서나 여성들의 ‘기’는 날로 세지고, ‘위기의 남성들’에 대한 자기연민과 사회적 연민은 그칠 줄 모른다.

사회가 점점 복잡해지고 미디어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사람들은 이미지를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 현실을 알고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미지는 어떤 사실을 과장하거나 단순화함으로써 그 이면에 실재하는 중층적이고 모순적인 스토리들을 지워버린다. 여성, 남성 모두 자신들이 직면하고 싶지 않은 ‘모욕’이나 ‘소외’의 현실을 외면하기 위해, 점점 더 이미지에 의존하거나 ‘약한 적’을 공격하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풀기 때문이다. 혐오에 바탕을 둔 ‘마초’나 ‘된장녀’라는 호명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여성과 남성 모두의 관계맺고 소통하려는 의지를 좌절시킨다.

냉소주의나 회의주의가 강해지는 이 시점에서 여성주의 철학자 로지 브라이도띠의 ‘노마드(nomad)적 욕망’을 생각해본다.6 노마드적 욕망은 특정 맥락에서 젠더, 계급, 인종 등 다양한 권력관계를 사고할 수 있는 유동적이고 타협적인 성격을 지니며, 남성이나 백인, 이성애자 등 권력을 가진 집단이 습관적으로 행사하는 도덕적 보편주의에서 벗어나, 주변부에 존재해왔던 타자들의 가치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욕구이다. 현재 신자유주의적 경쟁논리, 기독교와 이슬람세계에서 보이는 종교적 극단주의와 보수주의로의 회귀, 환경과 생태계의 파괴 등으로 전세계는 일상적 삶이 위협받는 상황에 놓여 있다. 브라이도띠는 이런 상황에서 전세계에 퍼져 있는 무력한 우울의 정서가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못하기 때문에 ‘비윤리적’이라고 주장한다. 고통의 언어에 함몰되어 있거나 지식인들에게 친숙한 ‘애도의 수사학’은 운동으로 이어질 수 없으며 우울한 심리로 회귀하려는 개별화된 욕망을 더욱더 강화한다. 이에 반해 노마드적 욕망은 긍정의 윤리에 기반을 두고 희망과 기쁨의 정치학을 수행하는 것이다. 브라이도띠는 이것이 여성주의운동의 대안적 방향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현재 한국의 젠더 불안정성의 상황에서 이런 문제의식은 큰 의미를 지닌다. 이제 새로운 젠더질서를 욕망하는 여성과 남성 들은 무기력과 자기연민, 증오에서 벗어나 기쁨의 정치학을 수행해야 한다. 그럴 때만이 자신의 삶에서 결핍된 것을 복원하려는 욕구가 결국 타자의 삶에서 결핍된 것이 무엇인가를 알고자 하는 노력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여성성과 남성성에 대한 습관화된 생각과 관념에서 벗어나 각자 ‘타자’의 권리를 생각해볼 때, 서로를 같은 시대 같은 공간에 존재하는 사람으로 바라볼 때, 우리는 타자의 삶의 경험과 자원 들을 ‘해석’할 수 있는 눈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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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태지는 다음곡 「Victim」에서 ‘여자’란 이유로 태어나기도 전에 낙태당하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고발한다. 이를 통해 한국사회에 떠도는 ‘여성세력화’라는 이미지 이면에 여아 낙태, 여성 몸에 대한 폭력 등 성별화된 폭력이 만연하는 부조리를 비판하고 있다.
  2. 좀더 자세한 내용은 http://news.bbc.co.uk/1/hi/programmes/this_world/6143010.stm 참조.
  3. Maila Stivens, “Theorizing Gender, Power and Modernity in Affluent Asia,” Krishna Sen and Maila Stivens, eds., Gender and Power in Affluent Asia, Routledge 1998.
  4. 조한혜정 외 『가족에서 학교로 학교에서 마을로』, 또하나의문화 2006.
  5. 베티 리어든, 이윤진·곽숙희 옮김 「양성평등과 정의실현의 교육」, 유네스코 아시아·태평양 국제이해교육원 엮음 『세계화시대의 국제이해교육』, 한울아카데미 2003.
  6. Rosi Braidotti, Transpositions: On Nomadic Ethics, Polity Press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