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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2007, 한국사회의 미래전략

 

대한민국 ‘레짐 체인지’

현 정치질서의 특성과 향방

 

 

안병진 安秉鎭

창원대 국제관계학과 교수. 저서 『노무현과 클린턴의 탄핵 정치학』 『마이크로소프틱스』. nsfsr@hotmail.com

* 필자의 조야한 글에 대해 예리하고 따듯한 비평으로 수정에 도움을 주신 김윤재, 고원 박사님께 감사드린다.

 

 

1. ‘레짐 체인지’의 서막

 

2007년은 ‘레짐 체인지’(regime change) 시대의 서막을 열 해가 될 것 같다. 물론 이는 북한에 대한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 내부 정치지형에 대한 이야기이다. 일찍이 부시행정부가 북한의 레짐 체인지를 언급했을 때 많은 이들은 이를 ‘정권교체’로 번역한 바 있다. 하지만 박성래가 예리하게 지적했듯이, 여기서 레짐이란 단지 정권의 담지자가 누구인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에서 말하는 특정한 사회모델 전반을 가리킨다.1 미국의 정치학자 플롯케(David Plotke)는 비슷한 문제의식에서, 시대정신, 지배적 담론, 주요한 정치연합의 형태 등을 포괄적으로 나타내는 개념으로 ‘정치질서’(political order)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2 필자가 굳이 레짐이나 정치질서를 언급한 것은 2007년이 단순히 대한민국에서 정권의 담지자를 선출하는 시기가 아니라 정치체제까지 포함한 향후 사회모델이 달라질 수 있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해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레짐의 문제의식이 특별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바로 80년대 진보진영을 뜨겁게 달구었던 사회구성체논쟁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논쟁은 당시의 조야한 맑스주의 토대/상부구조론과 서구적 이론에 과도하게 의존했다는 점에서 많은 한계를 지닌다. 하지만 총체적인 사회경제체제, 북한과의 관계 및 지구적 질서, 각 정치세력의 역관계에 기초해 현실에서 과학적인 실천을 추구했던 문제의식은 미국 정치학계를 풍미한 ‘정치질서재편론’(realignment theory)보다 훨씬 풍부한 성과를 남기기도 했다.

하지만 흥미로운 것은 과거 운동진영의 일부 세력이 이제는 정권의 담지자 및 집권여당의 핵심으로 자리잡았음에도 정작 그들의 문제의식은 사회구성체론에서 이론적으로 발전하기는커녕 80년대 이전으로 크게 후퇴했다는 점이다. 이들은 단지 87년 시절부터 강박관념처럼 집착해온 정치개혁 아젠다나 정치공학적 판짜기에만 정통할 뿐, 급격히 변화하는 정치질서에 대한 총체적 문제의식을 견지하지 못했다. 더욱 놀라운 점은 노무현정부의 경우에 현단계 민심의 방향이나 각 정치세력간의 역학관계를 시종일관 철저하게 무시하며, 미래를 준비한다는 미명하에 대연정, 개헌 등의 공허한 주장을 남발해왔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렇듯 민심과 정치적 역관계를 무시하고 탈정치적인 미래에 집착하는 것을 ‘토플러주의 리더십’이라고 비유적으로 표현한 바 있다.3 송호근(宋虎根)도 필자처럼 이 퍼즐이 이해되지 않아서인지 노무현정부를 ‘정치학을 모르는 운동정권’이라 규정하기도 했다.4

이 글에서는 이러한 문제의식하에 단순히 정치공학적인 평론을 하기보다는 2007년 한해 동안 심도있게 검토해봐야 할 논점들이 무엇인지를 다방면에서 제기하고자 한다. 지면상 한계로 각 논점들을 자세히 다룰 수는 없지만 일종의 브레인스토밍이 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하고자 한다.

 

 

2. 현단계 정치질서의 성격과 관련된 논점들

 

정치담론이나 정계개편의 방향에 대해 논의하기 이전에 우선 현 레짐 혹은 정치질서의 성격이 어떠한지 전면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는 다음의 논점들로 집약될 수 있을 것이다.

 

절차적 민주주의 대 실질적 민주주의 이분법론의 한계5

많은 정치학자들은 노무현정부의 출범으로 절차적 민주주의는 일정정도 진전되었지만 이에 반해 사회경제적 측면의 실질적 민주주의는 퇴보했다고 진단해왔다. 이에 따르면 실천적으로는 실질적 민주주의의 심화라는 목표가 도출된다. 하지만 그간 노무현정부나 집권당이 실정을 거듭해온 역사를 돌이켜보면, 여기에는 절차적 또는 사회경제적 민주주의의 한계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핵심적인 오류가 존재한다. 바로 민주공화국이 꼭 갖춰야 할 자유주의적 정치문화의 결여라는 점이다. 하지만 현재 집권당이나 개혁파 지식인들은 이를 중시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로 인해 결국 차후의 어떠한 정계개편도 공허해질 위험이 있다.

선진국의 자유주의적 정치문화에서 주요한 개념 중 하나는 ‘민의의 위임’이다. 구소련이란 공룡을 붕괴시킨 자유주의정치의 탄력성은 바로 선거에서 확인된 민의를 치열하게 해석하고 이를 어떤 형태로든 반영하고자 하는 문화가 존재하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빈번하게 그리고 열정적으로 치러지는 선거는 탈정치론자들의 걱정과는 달리, 갈등을 긍정적으로 표출시켜 ‘갈등적 합의’(conflictual consensus)를 이끌어내는 매우 효율적인 정치기제가 아닐 수 없다.6 선진국의 자유주의적 정치는 많은 부작용을 낳는 첨단 여론조사기법을 진화시켜가면서까지 이러한 민의를 자신들의 헤게모니로 편입시키기 위한 일상화된 전쟁을 벌인다.

하지만 현 집권진영은 민의를 해석하는 행위나 그러려는 노력을 거의 방기한 채, 자신들이 집착하는 아젠다들을 실현하는 것에만 매몰돼 있다. 탄핵정국에서 보수야당의 의회민주주의 유린에 대한 민의의 심판을 자신들의 4대 개혁입법 지지로 자의적으로 연결시킨 것은 아직 자유주의적 위임의 개념이 형성되어 있지 못함을 단적으로 드러냈다. 이는 이후 대연정, 개헌, 한미FTA 등에서도 일관되게 나타났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러한 비자유주의적 행태는 노무현정부가 사실상 구시대의 막내로서, 질적으로 김영삼·김대중정부의 불철저한 자유주의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웅변한다. 그리고 구태에 대한 근본적인 혁신이 전제되지 않은 대통령중임제 등의 제도적 장치나 실질적 민주주의 과제들을 추구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실패를 반복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민의의 치열하고 정확한 해석 없이 사회경제적 아젠다를 추구하는 것은 애초부터 성공할 수 없는, 위로부터의 주관적인 기획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결국 2007년의 주요 과제 중 하나는 절차적 또는 실질적 민주주의 구현에만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정치문화를 질적으로 혁신하는 것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기업국가론의 정교화 필요성

비록 집권진영은 사회구성체의 문제의식을 잃어버렸지만 학계에서는 의미있는 연구들이 축적되어왔다. 특히 최근 김동춘(金東椿)은 현 대한민국을 기업헤게모니가 강한 미국식 기업국가라고 주장한다.7 사실 그의 말처럼 노무현정부는 초기부터 삼성 등의 강력한 자장 안에서 동북아중심국가론, 국민소득 2만불시대 등의 담론을 전개해왔다.

현단계 한국의 기업국가성은 내용적으로 두가지가 결합되어 있다. 하나는 재벌구조, 부동산투기 등으로 대표되는 천민자본주의적 특성이고 다른 하나는 포스트모던한 미국식 신자유주의이다. 천민자본주의적 소유구조와 조직문화를 가지고 디자인 중심이나 창조경영이라는 포스트모던한 화두를 던지는 삼성은 대한민국 모순의 소우주라고 할 수 있다.

앞에서 말한 절차적 민주주의의 한계가 질적으로 김대중정부까지 거슬러올라가듯이, 역사적으로 보면 기업국가적 성격도 과거의 민주정부에 맞닿아 있다. 예컨대 새로이 들어선 노무현정부의 경제정책을 제약한 김대중정부의 무원칙한 신용카드 남발과 이로 인한 신용불량자 양산은 전형적인 천민자본주의적 행태이다. 그리고 IMF위기 이후의 노동유연화는 근대적 평생고용체제를 넘은 포스트모던한 미국식 신자유주의적 실험이었다.

그런 점에서 현단계의 과제는 단순히 미국식 기업국가론과의 투쟁이 아니라 한국식 이중모순에 대한 투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즉 한편으로 재벌체제, 부동산투기 등의 천민자본주의를 건전한 자본주의로 발전시키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포스트모던한 신자유주의 기업국가론에 대항하여 시장의 역동성을 살리면서도 공공성이 강화되는 ‘역동적 공화국’(dynamic republic)을 창출하는 것이다.8 이러한 투쟁은 기업주의에 반대하는 단순한 반신자유주의 정치연합이나 반천민자본주의 연합의 이분법에 근거하지 않는다. 이중적 과제를 동시에 실현하기 위해서는 기존 정당의 틀을 뛰어넘는 좀더 복합적이고 유연한 연합이 필수적이다. 이 과정에서 정치세력들은 현재의 정신분열증적 구도를 벗어나 올바로 재정렬되어 나아갈 수 있다. 그리고 시민들은 누가 진정으로 대한민국 자본주의의 건전한 발전과 진보를 담지할 수 있는지 경험을 통해 인식할 수 있다.

 

좌우이동론의 일면성

2006년부터 개혁파 내부에서는 노무현정부 실패의 원인을 놓고 지나친 좌선회 또는 우선회 때문이라는 비생산적 논쟁이 전개되어왔다. 제기된 논점 자체는 중요한 실천적 함의를 갖는데도 불구하고 논쟁은 기존에 소속된 분파나 이념에 관성적으로 의존하면서 결국 비생산적인 공방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과연 현재의 정치질서가 좌우의 이분법적인 선회로 해결될 성질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왜냐하면 현정부의 실정이 단지 지나친 좌선회 혹은 우선회에 기인한다고 단순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현정부는 재벌체제, 부동산문제 등 사실상 천민자본주의의 개혁에 불철저한 태도를 취했으면서도, 통치방식의 미숙으로 세금폭탄론 등 수구의 공세에 밀리면서 좌파로 인식되었다. 또한 북한문제에서도 유화파와 강경파 사이에서 부단히 좌충우돌한 바 있다. 이 과정에서 진보적 지지기반과 중도적 지지기반 모두가 약화되었는데 이를 이분법적 접근으로 회복하려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다. 기업국가론의 극복을 천민자본주의 및 신자유주의 극복의 이중적 과제로서 좀더 복합적으로 인식해야 하는 것처럼, 좌우선회의 문제도 단순논법을 넘어서야 한다.

이같은 시각을 유지한다면, 자유주의 자장 안에서 나타나는 중도와 좌파의 차이는 매시기의 성격과 쟁점에 따라 얼마든지 유연하게 합의해나갈 수 있다. 이는 미국의 예가 증명한다. 미국 민주당내 자유주의 좌파와 자유주의 중도파는 내부적으로 치열하게 투쟁하면서도 큰 목표에는 합의한 상태에서 2008년 대선을 준비하고 있다. 거칠게 단순화하면, 경제이슈에서는 심각한 양극화를 고려하여 좀더 좌로 이동하고 사회적 가치이슈에서는 유권자의 중도성향을 고려하여 좀더 우로 이동하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는 그들이 정치질서의 성격과 민의를 실사구시적으로 고민하기에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한국 개혁진영은 그런 것들을 고려하기보다 자신들의 분파적·이념적 관성에 따라 움직이고 불필요한 갈등을 증폭시키는 경향이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과 달리 정치질서를 구체적으로 고민하는 송호근은 정치적으로는 보수주의자이면서 경제이슈에서는 ‘낮은 단계의 사민주의’를 주창하고 있다는 사실이다.9 향후 엄밀한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현재 정치질서의 성격을 고려할 때 한국의 개혁세력은 예컨대 부동산, 재벌개혁 등에서는 천민자본주의에 대해 매우 전투적인 태도를 취하고, 양극화에 대해서는 송호근의 지적처럼 사회적 자본주의의 성격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최근 다양한 여론조사에서 일관되게 드러나듯이, 양극화가 급격히 심화되고 시민들의 공공성에 대한 인식이 강화되면서 한나라당 지지층에서조차 절반 정도가 ‘진보적’ 성향의 후보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10 이 점에서 소위 중도적 자유주의자들은 관성적 시장주의를 버리고 좀더 진보적인 태도를 보일 필요가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분양가공개나 재벌규제에 대해 관성적 거부감을 표시하는 것이 시장을 이해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반대로 천민자본주의의 관성에 젖어 새로운 지형을 읽지 못한 데서 기인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반면 북한의 핵실험으로 정치지형이 크게 변화하고 시민들이 좀더 중도적 성향을 띠는 것을 고려한다면, 자유주의 좌파들은 북한문제나 미국문제에서 좀더 자유주의 중도파들에게 다가갈 필요가 있다. 말하자면 평화번영정책의 기조를 지키면서도 동시에 전체주의체제에 대한 낭만적 인식에 기반을 둔 체임벌린(A.N. Chamberlain)식 유화적 자유주의가 아니라 ‘단호한 자유주의’의 기조하에, 북한에 요구할 것을 분명히 요구해야 한다.

 

수구세력 집권저지론의 일면성

천민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 극복의 이중적인 과제를 생각할 때, 현재의 반수구론은 일면적인 문제의식이 아닐 수 없다. 그간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 등 개혁파의 대표적 정치인들은 한나라당의 집권이 불러올 개혁의 후퇴, 개혁진영 해체의 위협을 강조해왔다. 그러면서 70년대 재야운동의 관성에 기초해 ‘양심세력연합론’을 제안하고 있는데, 이는 그들이 과거의 시계(視界)에서 한치도 나아가지 못한 구시대 정치세력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줄 뿐이다.

문제는 이들의 주관적 의도와 달리 그것으로는 단기적으로 선거에 승리하기 어려울 뿐더러 나아가서는 장기적으로 보수주의시대에 무기력하게 대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단기적으로 봐도 개혁파가 집권 이후 지금까지 사회적으로 고립된 상황에서 한나라당 집권시의 위험을 강조하는 공포전략이 과거와 달리 당장의 선거에서 열정을 동원하기 어렵다. 심지어 그 전략은 고원(高源)의 지적처럼 모든 반대진영을 자신들의 과제에 패권주의적으로 복속시키는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사실 정치집단이든 기업이든 지지기반이 극도로 약화되었을 때 새롭게 혁신하려면, 우선 열정을 새로 결집해야 한다. 하지만 개혁파의 단순한 반한나라당론은 낡은 제품의 재출시에 불과하므로 열정을 이끌어내지 못한다. 또한 장기적으로 보면 단순한 반한나라당적 시각은 자유주의진영을 근본적으로 혁신하고 새로운 정치질서로 체제를 변화시켜나가기에 무리일 수밖에 없다. 오히려 개혁진영은 어떻게 하면 일단 선거에서 승리할 것인가를 정치공학적으로 따지기보다는 더 멀리 보면서 어떻게 하면 ‘대중적 보수주의시대’를 막고 신진보주의시대를 향후 10년간 만들어나갈 수 있을까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이번 선거가 어떠한 의미와 위치를 가지는지 물어야 한다. 전혀 다른 차원의 질문만이 다른 차원의 해답을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비교정치적으로 보자면, 현재 한국의 개혁파들은 비록 64년 대통령선거에서는 패배했지만 장기적으로 힘있는 보수주의시대를 연 골드워터(B. M. Goldwater) 공화당 후보의 경험에서 시사점을 얻어야 할 것이다. 물론 골드워터 진영도 처음부터 장기적 전략을 세운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들이 선거 참패에도 불구하고 닉슨 이후, 심지어 클린턴시대까지 이어지는 장기적인 ‘대중적 보수주의’(popular conservatism) 시대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은, 김윤재(金潤載)의 지적처럼 다음 세가지가 작용하였다. 첫째, 새로운 보수주의 정체성이 필요하다고 확신하는 진영이 보수주의 내부의 세력싸움에서 승리했고, 둘째, 대선 패배 후 광범위한 보수주의 연합체가 사회 전방위에서 치열한 실천을 전개했으며, 셋째, 민주당과 진보진영이 집권 후 사회적 가치 등에서 중간층과 유리되었다.

 

진보정당주도론의 비현실성과 민주노동당 레짐의 한계

반한나라당론이 수구적 과제 척결에 일면적으로 집착한다면, 반신자유주의론이나 이를 실천하기 위한 진보정당주도론은 또다른 의미에서 일면적이다. 특히 민주노동당은 집권 개혁파의 실패로 자유주의시대가 지나고 좌파가 주도하는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고 주관적으로 오판하지 말아야 한다. 이는 두가지 측면에서 생각할 수 있다. 첫째, 민주노동당이 아무리 차이점을 강조하더라도 집권개혁파의 실패는 시민 다수에게 진보진영 전체의 실패로 인식된다. 지금은 오히려 자유주의세력과 좌파, 심지어는 한나라당의 개혁파나 포퓰리스트들까지 함께 각자의 차이를 인정하는 가운데 구체적인 쟁점별 연합을 통해 헤게모니를 확대하고 어떻게 대중적 보수주의 경향을 최대한 억제할 것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실천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한나라당 내의 보수적 포퓰리스트들에 대해서도 단순한 분파주의적 비판을 넘어 건설적인 비판과 제휴를 수행해야 한다.

둘째, 진보정당주도론을 언급하기 이전에 현재의 민주노동당이 얼마만큼 진보적인 정당인가 하는 의문을 가질 필요가 있다. 예컨대 민주노동당은 자신들이 지향하는 사회주의가 과연 어떤 점에서 21세기적인가라는 질문에 구체적으로 답할 수 있어야 한다. 지난 서울시장선거에서 김종철(金鍾哲) 후보가 주장한 사회주의는 공허한 80년대식 낡은 이념일 뿐 매력적인 주장을 담고 있지 못했다. 하나의 예이지만, 프랑스에서는 21세기적인 사회주의자이자 세계적 석학으로 존경받는 아딸리(J. Attali)가 ‘인간적 사회주의’를 제시한 바 있다. 이에 상응하는 현대적 비전을 초보적으로라도 제시하지 못한 채 사회주의와 집권을 이야기하는 것은 무책임하기까지 하다.

더 치명적 문제는 민주노동당내 다수파가 여전히 봉건적 체제에다 실패한 국가인 북한에 온정주의적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과연 민주노동당 다수파가 한나라당내 개혁파보다 더 진보적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지 지극히 의심스럽다. 올해 2007년은 대한민국 레짐 체인지의 시기이다. 민주노동당 내에서 21세기적인 사회주의를 꿈꾸는 이들은 단기적 선거의 관성에 매몰되지 않고 80년대식 정파연합의 레짐을 현대적 좌파정당 레짐으로 질적으로 변모시키기 위한 도발적이고 분명한 이행전략을 마련해나가야 한다.

 

수구세력불변론의 한계

과거 80년대 사회구성체론의 결정적 약점으로는 첫째, 맑스주의적 경제주의 편향 때문에 대중심리의 영역이 과학적으로 분석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소련 붕괴 이후에는 진보학계에 포스트모더니즘 바람이 불어, 알뛰쎄르, 라깡, 지젝 등에 대한 풍성한 논의가 이어졌다. 하지만 이러한 흐름은 대개 한국사회의 구체적 이슈들을 실천적으로 해명하기보다는 이론주의적 경향을 띠었다.

이러한 정치심리학의 공백은 특히 한국의 보수주의 및 이에 대한 시민들의 태도를 이해하는 데서 난점으로 드러난다. 현 집권진영은 앞에서 언급한 레짐의 문제의식 결여와 함께 정치심리학적 접근에서도 많은 약점을 노출했다. 예를 들어 이들은 왜 현재 민심이 박정희씬드롬 등 대중적 보수주의 경향을 보이는가, 왜 자신들의 메씨지 대신에 ‘세금폭탄론’ 등 보수진영의 논리가 서민층에 수용되고 있는가에 대해 명확하게 답하지 못하고 있다.

그 결과 집권진영은 보수진영의 미묘한 변화과정을 민감하게 읽어내지 못하고 경직된 이해만 거듭하고 있다. 예컨대 일부 개혁적 지식인들은 수년간 ‘51 대 49 구도론’을 강변해왔다. 결국 선거철이 되면 진보와 보수가 서로 강하게 결집해 박빙의 승부가 된다는 가설이다. 하지만 과거 이회창 후보 시절의 보수와 2007년의 보수는 사뭇 다르다. 우선 이명박 전 시장, 박근혜 전 대표에 대한 지지를 단순히 과거 권위주의 시절에 대한 향수로 오해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최근 여론조사에서 시민들이 이명박을 진보적 후보로 인식하고 있는 현상은, 과거 이회창의 이미지가 특권계급의 대변자였던 것과 달리 이명박이 청계천 개발 등을 통해 시민들의 진보적 욕망을 헤게모니적으로 선취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둘째, 보수적 포퓰리즘의 잠재성에 대한 과소평가이다. 지난 2006년말 한 여론조사에서는 서민들이 가장 감동받은 정치인으로 열린우리당이나 민주노동당 의원이 아니라 한나라당 홍준표 의원을 꼽았다. 그의 보수적 포퓰리즘 활동이 한나라당의 체질을 부분적으로라도 혁신하는 데 기여하고 있는 점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또한 손학규 전 지사의 민심탐방은 아래로부터 서민들과 결합하는 포퓰리즘적 정치에서조차 열린우리당이 결코 경쟁상대가 되지 못함을 보여준다. 그리고 오세훈 서울시장은 분양가공개에 전향적 태도를 취함으로써 좌파인 우석훈(禹晳熏) 교수마저 공개적으로 칭찬한 바 있다. 이는 한국에서도 아직은 초보적이고 거친 형태이지만, 존 매케인(John McCain) 같은 성공한 보수적 포퓰리스트가 등장할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한다.

셋째, 뉴라이트운동의 잠재성을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물론 한국의 뉴라이트운동은 미국의 대니얼 벨(Daniel Bell)이나 어빙 크리스톨(Irving Cristol)처럼 새로운 시대에 대한 사회구성체론에 근거하기보다는 그들을 전술적으로 조야하게 모방하는 데 그치고 있다. 하지만 과거 민주화운동을 통해 치열하게 단련된 그들의 전투성과 조직력, 강한 권력의지는 옛 기득권에 안주하는 한나라당의 체질개선에 기여할 수 있다. 물론 두차례의 정권교체 실패를 제외하고는 아직 본격적인 위기를 겪지 않은 한나라당이 스스로 자신의 체질을 근본적으로 바꾸리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부분적으로라도 변화하고 있는 한국 수구의 모습을 과소평가하는 것도 안이한 시각이라 할 수 있다.

 

 

3. 정치담론의 세가지 쟁점

 

장기적 미래비전의 충돌: 공동체주의 대 공화주의

2002년 대선이 지역주의적 차별 대 반지역주의적 공정성 간의 충돌 성격이 강했다면, 2007년 대선에서는 향후 대한민국의 전반적 모델을 두고 공동체주의와 공화주의 간의 거대한 패러다임 충돌이 예상된다. 여기서 공동체주의는 기본적으로 신자유주의적 기업국가체제를 구축하면서도 그에 따른 양극화, 사회해체의 부작용을 기업·교회·가족 등 시민사회조직을 통해 사후적으로 보완해나가는 모델을 말한다. 반면에 한국의 공화주의는 우리 헌법의 ‘민주공화국’‘사회적 자본주의’ 등이 의미하는 바처럼 국가의 공공성과 사회적 연대감의 강화를 지향하는 모델을 말한다.11 민주주의라는 측면에서 전자는 사회를 지배해왔던 전통적 가치에 무조건 순응하는 방식으로 국민통합을 이루고자 하는 정태적 관점이라면, 후자는 민주적 토론을 통해 부단히 다양한 가치를 합의해나가는 역동적 관점이다.

물론 한국의 공동체주의진영에는 다양한 이념적 색채가 혼재한다. 가장 우파적인 공동체주의 흐름은 서구 선진국의 공동체 자유주의와는 질적으로 다른 파시즘적 공동체주의와 흡사하며, 한나라당의 수구파가 이에 가깝다. 아직 한나라당에서 전면적으로 수용되지 않은 박세일(朴世逸)의 공동체 자유주의나 현 노무현정부가 사실상 채택하고 있는 공동체주의는 이보다 더 중도적 성향을 띤다.12 아직까지 한국에서 공동체주의 좌파를 본격적으로 지향하는 집단은 보이지 않는다. 송호근의 ‘낮은 단계의 사민주의’와 사회통합적 국가는 다소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각각의 이념적 스펙트럼 중 어떤 흐름이 주도권을 쥘지는 반대진영과의 투쟁과정에서 그리고 대선에서 누가 당선되는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하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2002년 대선과 달리 양극화의 심화와 보수세력의 위기의식 고조로 이같은 공동체주의적 주장이 단순히 달콤한 수사(修辭)로만 작용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현재의 ‘위스타트’(We Start)운동처럼 향후에 얼마든지 강력한 대중적 보수주의운동으로 성장할 수 있다.

반면에 한국의 공화주의진영 또한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이고 있다. 현재 개혁진영 내에서 이론적으로 주목할 만한 흐름은 두가지이다. 하나는 사민주의적 경향을 띠는 롤스(J. Rawls)의 철학을 바탕으로 공공성을 지향하는 흐름이다. 물론 롤스는 공화주의자라기보다는 재분배적 자유주의자이지만 공화주의적 문제의식을 수렴했다는 점에서 크게 보면 공화주의적 흐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는 임채원이 주도하는 ‘포스트서울포럼’과 약간 더 중도적인 ‘사회디자인연구소’가 있다.13 이들은 시오노야 유우이찌(塩野谷祐一)의 지적대로 향후 롤스의 정의론을 넘어 효율과 삶의 질(저자의 표현으로는 탁월성)의 관점에서 발전된 대안을 만들어내야 한다.14 왜냐하면 이 두가지 측면을 개선하지 않고서는 분배정의가 사회 전체를 풍요롭게 하지는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또다른 흐름으로 공화주의에 대한 자유주의 좌파적 해석이 있는데, 이병천(李炳天), 홍윤기(洪潤基) 등이 이를 선구적으로 이론화하고 있다. 하지만 이 관점은 공화주의적 민주주의론의 한국적 적용에는 성공하고 있지만, 경제·사회를 포괄하기 위해서는 아직 갈 길이 멀다.

앞으로 이 흐름들은 더 본격적인 이론적 논쟁과 공동실천을 통해 한단계 발전된 전망을 만들어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여기에 생태주의, 여성주의, 동양학의 다양한 흐름들이 함께 어우러져 21세기에 조응하는 현대적 공화주의의 이론적·실천적 토대가 마련될 필요가 있다.

 

지구적 전망의 충돌: 한반도사회론 대 미국적 질서론

비록 이번 대선에서 주요한 쟁점은 경제와 관련되겠지만, 국제적 이슈 또한 미래 한국의 레짐, 나아가 동북아의 레짐을 급격히 바꿀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 점에서 최근 ‘한반도사회경제연구회’가 내놓은 ‘한반도경제론’이나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이 제출한 ‘통일경제모델’은 뜻깊은 문제제기가 아닐 수 없다.15 예컨대 한반도경제론은 비단 북한과의 관계뿐 아니라 한미FTA에 대한 태도, 동북아 정치·경제공동체에 대한 비전, 한미관계의 미래 등과도 관련된 총체적인 패러다임을 지향한다. 하지만 아직 구체적 경제모델 설계 면에서 빈약할 뿐 아니라 기본적으로 지향하는 철학에서도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앞에서 제기한 공화주의는 비단 국내노선뿐 아니라 지구적 철학의 방향에 대해서도 중요한 이론적 실마리를 던져줄 수 있다. 예컨대 슬로터(S. Slaughter) 등의 ‘지구적 시민공화주의론’이 그중 하나이다.16 이 관점은 국내적으로 기업국가론에 대한 공화주의적 반격과 마찬가지로, 지구적인 신자유주의 거버넌스체제에 맞서 각 국가의 공적 역할을 강화하고 견제와 균형이 생동하는 공화주의적 네트워크를 구축하고자 한다.

이는 미국중심의 질서나 북한붕괴론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하는 수구적 진영이나 신자유주의적인 미국의 질서를 수용하는 현정부의 세계인식과 정면으로 대립된다. 박세일의 공동체주의나 현정부의 공동체주의는 크게 보면 미국 보수주의 논객 에치오니(A. Etzioni)의 국제적 공동체주의운동의 문제의식과 맞닿아 있다.17 이는 미국 네오콘 등이 거칠고 일방적인 미국적 가치를 주입하는 것과 달리, 미국적 가치와 동양적 가치를 결합한 새로운 보편주의를 창출하려는 융합의 관점에 기초해 지구적 공동체를 부드럽게 통치하고자 하는 제국의 헤게모니적 거버넌스전략이다.18 하지만 소위 불량국가들을 좀더 유연하게 바라보며 동북아 등을 제국적 질서에 안정적으로 편입하려는 에치오니의 시각과 달리, 한국의 박세일이나 뉴라이트진영은 추상적 차원에서는 에치오니의 문제의식에 수렴되지만 북한에 대한 구체적 태도에서는 여전히 수구적 관성들을 유지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아직 한국 보수주의의 혁신은 멀기만 하다.

 

CEO대통령론 재평가의 필요성: CEO대통령론 대 사회적 기업가론

2007년 대선에서는 CEO대통령론이 지배적 담론으로 작동하고 있다. 이는 보수주의 시각에서 자유주의 정치계급의 무능·비효율·정치주의와 대비되는 기업의 유능·효율·경제주의를 강조하는 것으로서, 기업국가의 강력한 지배이데올로기이다. 따라서 지금까지 진보적 정치학계에서는 이러한 CEO대통령론에 매우 비판적인 태도를 취해왔다. 하지만 CEO대통령론을 단순히 부정하고 정치적 갈등의 긍정적 측면만을 강조하는 것이 의미있는 담론전략인지는 다소 회의적이다. 왜냐하면 CEO대통령론에서는 김윤재의 지적처럼 그간 삶이 어려워진 서민의 좌절감과 이에 대비하지도, 이를 반영하지도 못한 ‘여의도 정치계급’에 대한 그들의 분노를 왜곡된 형태로라도 포섭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21세기 CEO들의 존재형태, 활동방식도 크게 변화하고 있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21세기에는 사회성격의 급진적 변화로 인해 한국 같은 천민자본주의적 형태 외에도 사회적 기업 같은 진보적 기업모델이 생겨나고 있다. 사실 오늘날에는 더이상 국가, 기업, NGO 간에 절대적 경계를 긋기가 어렵다. 오히려 기업의 혁신적 동력을 활용하면서도 이를 공공성 강화의 관점에서 배치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사실상 전근대적 재벌체제를 옹호하는 CEO리더십 대 21세기적인 사회적 기업 리더십의 양자대결 구도가 형성될 필요가 있다.

사회적 기업 리더십론은 CEO대통령론처럼 비단 기업가들만이 국가를 이끌 수 있다는 편협하고 구시대적인 관점과 다르다. 예컨대 전세계 빈민들에 대한 소액대출사업을 벌이는 마이크로크레디트운동의 창시자 아딸리는 기업인인가, NGO운동가인가, 아니면 정치인인가? 향후 국내외의 다양한 사회적 기업에서 훌륭한 성과를 거둔 리더들이 대통령이나 광역단체장 등에 도전하며 정치적 리더십의 전면에 나선다면, 한국정치는 더욱 풍요로워질 수 있다.

 

 

4. 세가지 쟁점의 귀착점으로서의 개헌

 

앞의 세가지 쟁점은 결국 우리 사회가 어떠한 헌법을 지향하는가의 논쟁으로 귀결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도 2007년 대선은 단지 누가 정권을 잡느냐를 넘어 레짐의 방향을 규정하는 중요한 선거이다. 따라서 노무현 대통령이 연임 및 선거주기 일치를 내세워 개헌론을 제기한 것은 레짐의 성격을 둘러싼 투쟁을 몇가지 정치제도적 틀로 희석해버린 매우 부적절한 시각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이 ‘원포인트 개헌’(조항 하나만 바꾸는 개헌)을 개혁파 일부가 수용한 것은, 만약 보수주의정권이 성립한다면 그들이 개헌을 하기에 매우 유리한 상황을 조성해준 셈이다. ‘원포인트 개헌’의 결과 선거주기 일치로 국회 다수당에서 재선에 성공한 대통령이 나온다면, 그는 민의의 견제를 받지 않고 현재의 위임민주주의적 경향을 더 악화시킬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향후 ‘쏘프트 파시즘’이란 의도하지 않은 괴물까지 등장할지도 모른다.

이번 대선의 이같은 중요한 성격을 인지하고 있기에, 개혁파 일각에서 한나라당의 집권 저지에 총력을 기울이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왜냐하면 이번 대선과 총선에서 한나라당이 압승하여 보수적 개헌을 추진하기 쉬운 정치지형이 조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헌법이란 결국 각 정치세력의 역학관계가 집약된 것일 수밖에 없다. 만약 보수적 정치세력이 선거를 통해 자신들의 헌법적 지향성을 민의 속에서 확인하고 이후 이를 민주적인 절차로 개헌하는 데 성공한다면, 이는 자연스러운 정치과정일 뿐이다. 그리고 장래에 개혁파가 다시 정치세력을 결집하고 시민들에게 자신들의 헌법적 지향성을 인정받아 개헌할 수도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자유주의적 정치는 발전한다. 자유주의정치의 건강성은 바로 이러한 헤게모니투쟁 과정에서 다수 세력이 지속적 재구성되는 것이다. 이러한 구성적 정치의 자연스러운 과정을 무시하고 인위적으로 정치환경을 조성하려는 시도는 결국 의도하지 않은 뒤틀린 정치구도를 만들어내거나 민의의 외면을 받을 수밖에 없다.

 

 

 

5. 다시 리눅스정치의 시대로

 

그간 ‘여의도 정치계급’의 근본적 한계가 분명해지면서 ‘창조한국 미래구상’처럼 시민사회 차원에서 새로운 정치세력화를 모색하는 움직임이 전개되고 있다. 과연 이 운동이 얼마나 새로운지, 기존 시민운동의 동력을 발전시킬지 아니면 고갈시킬지 등에 대해 다양한 논란이 존재한다. 이 운동이 한국정치의 레짐을 선진적 정치구도로 혁신하는 데 기여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몇가지 방향을 일관되게 견지할 필요가 있다.

 

리눅스정치의 전형 창출

과거 필자는 2002년 대선국면을 예상하며 ‘리눅스(Linux)정치’의 패러다임을 제기한 바 있다.19 리눅스정치란 비유적인 표현으로서 마이크로쏘프트의 엘리뜨주의적 폐쇄 공동체와 대비되는 개념이다. 이는 리처드 스톨먼(Richard Stallman)의 리눅스운동처럼 다수 시민들로 구성되는 집단지성의 참여 속에서 부단히 혁신되는 아래로부터의 정치방식을 가리킨다. 과거 2002년 선거운동 중 노무현 후보가 어느 기자회견장에서 ‘리눅스정치’를 하겠다고 선언하는 것을 보면서 필자는 ‘참여정부’의 출범에 대해 다소 희망을 품기도 했다. 하지만 ‘참여정부’가 이해한 ‘리눅스정치’란 ‘인터넷 장관추천제’라는 우스꽝스러운 이벤트로 그쳤고, 오히려 경제정책 등에서는 사실상 삼성 및 기득권 구조를 엘리뜨주의적으로 고착화했다.

5년이 지나 다시 대선을 맞이하면서 리눅스 패러다임을 반복해서 제안해야 하는 현실이 씁쓸하기만 하다. 하지만 2002년에 비해 한국의 시민사회는 멈춰 있지만은 않았다. 아래로부터 시민들의 창조적 구상들을 실험하고자 한 박원순(朴元淳) 변호사 주도의 희망제작소는 리눅스적 정치 구현의 긍정적 싹이다. 비록 개별 기업에 국한되지만 다수 직원들의 창조적 발상을 수렴하면서 기업을 부단히 혁신해온 문국현(文國現) 유한킴벌리 사장의 관점도 넓게 보면 리눅스적 패러다임에 근접한다. 또한 최근에는 리눅스운동의 정신을 구현한 UCC(User Created Contents)가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시민운동은 2007년에 이러한 조그마한 토대를 발전시키고 그간 일부 시민운동에서 나타난 명망가중심의 엘리뜨주의적 오류를 넘어서서 리눅스적 정치의 소중한 전형을 만들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생성된 정책과 정체성이야말로 한국의 새로운 개혁과 진보정치의 건강한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정당과 사회운동의 선순환모델 창출

물론 이러한 정치세력화에 실패할 경우 시민운동의 기반이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 또한 존재한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정치에서 정당을 완전히 대체하는 모델이 나타나지 않은 상황이므로, 새로운 자유주의정당의 건설에 시민운동이 역량을 투입하는 것은 바람직한 시도이다. 그런 점에서 최장집(崔章集)이 수년째 제대로 된 정당대표체계 건설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것은 한국정치 발전을 위한 핵심을 짚은 것이다. 관건은 정당건설이냐 아니면 사회운동이냐 하는 이분법을 넘어서는 것이다. 한국은 지나치게 엘리뜨주의적인 자유주의정당 중심의 미국과 달리 시민사회의 역동성이 살아 있다. 따라서 새로운 정치세력화는 자살, 우울증, 교육문제 등 아래로부터의 다양한 사회운동의 문제제기와 결합하면서도 이를 제도권내 아젠다로 발전시키는 창조적 활동의 전형을 창출해야 한다. 그리고 열린우리당 일각에서 제기하는 오픈 프라이머리(open primary)는 향후 인기투표를 넘어 집단지성의 창조적 정책아이디어나 정체성을 결집하는 장치가 되어야 한다.

 

일관된 정체성 구축

새로운 정치세력의 구축은 과거의 주류모델과 단절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실천한다는 점에서 상당히 힘든 실험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애덤 모건(Adam Morgan)이 지적하듯이 일관되게 강렬한 빛을 비추는 등대처럼 자신들이 지향하는 가치, 정체성, 정책 등을 일관성있게 구성해야 한다. 특히 새로운 정치세력은 모건이 지적한 네가지 요소인 자신의 독특한 정체성, 감성적 설득력, 열정적 강렬함, 현저성 등을 분명히 드러내야만 성공할 수 있다.20 이에 대한 치열한 고민 없이 과거 시민운동의 관성으로 활동한다면 한국정치의 새로운 단계를 만들기보다는 구시대의 막내가 되기 쉽다. 따라서 네가지 요소에 단순히 관심을 가지는 것뿐만 아니라 이를 제도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창조적 조직모델과 문화를 실험해야 한다. 모건은 ‘창조적 디렉터’(creative director)의 선임이나 한 프로젝트에 문화권과 시각이 다른 두 인사의 결합으로 부단히 새로운 관점을 유도함으로써 이를 돌파하고자 하는데, 참고할 만한 주장이다.

 

긍정적 권력의지와 적극적 헌신

정치컨설턴트 박성민이 정치에서 권력의지의 중요성을 강조했듯이,21 과연 시민운동진영이 한국사회의 미래를 책임지겠다는 강력한 권력의지를 가지고 있는지 또한 매우 중요하다. 규범적 판단을 떠나 정치능력이 뛰어나다고 평가받는 김대중 전 대통령, 영국의 블레어 총리나 미국의 클린턴 전 대통령 등은 수십년간 치열한 권력의지를 보여왔다. 각 정치세력의 이해관계와 욕구가 가장 첨예하게 부딪치는 제도권 정치영역에서 이러한 권력의지는 매우 중요하다. 권력의지는 그 자체로서 무조건 배타시할 필요는 없다. 권력의지는 자기를 중심으로 상대를 통제하는 ‘조작적 리더십’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함께 성장해가는 ‘긍정적 리더십’으로 발현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긍정적 권력의지의 강한 에너지는 모건의 지적처럼 시민들의 감동을 만들어내는 적극적인 헌신과 희생으로 외화된다.22 지난 서울시장선거에서 아마추어적인 선거운동을 펼친 강금실(康錦實) 후보가 완전한 추락을 면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선거 막바지에 헌신성을 보였기 때문이다. 반면에 열린우리당이 무수히 노력했음에도 지지율을 높이는 데 실패한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이러한 적극적인 헌신과 희생이 없었던 것이었다. 앞으로 시도되는 정치운동 또한 적극적인 헌신과 희생 없이는 결코 새로운 시대를 열어젖히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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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박성래 『레오 스트라우스』, 김영사 2005.
  2. David Plotke, Building a Democratic Political Order: Reshaping American Liberalism in the 1930s and 1940s, Cambridge Univ. Press 1996.
  3. 졸고 「노무현 대통령의 리더십 특성: 토플러주의와 포퓰리즘의 모순적 공존」, 한국정치학회·관훈클럽 공동주최 ‘한국 대통령 리더십 학술회의’(2007. 1. 29).
  4. 송호근 「송호근 교수의 노무현정권 입체 대분석」, 『신동아』 2007년 2월호.
  5. 이 부분은 특히 미국식 위임(mandate)의 의미에 대해 필자와 문제의식을 같이하는 김윤재 박사와의 토론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6. 졸고 「탈정치론의 시대: 참여정부와 뉴라이트의 탈정치론과 공화주의적 대안 모색」, 『동향과전망』 2006년 여름호.
  7. 김동춘 『1997년 이후 한국사회의 성찰』, 길 2006.
  8. 졸고 「신진보주의 정치모델」, 『한반도경제론』, 창비 2007.
  9. 송호근, 같은 글.
  10. 강원택 「한국 역대 대통령 평가: 박정희 신드롬과 새로운 리더십의 방향」, ‘한국 대통령 리더십 학술회의’ 2007.
  11.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졸고 「탈정치론의 시대」.
  12. 졸고 「노무현 대통령의 리더십 특성」.
  13. 임채원 『신자유주의를 넘어 사회투자국가로』, 한울 2006.
  14. 이는 이병천 교수님과의 대화에서 얻은 아이디어임을 밝힌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시오노야 유우이찌 『경제와 윤리』, 필맥 2006 참조.
  15. 한반도사회경제연구회 『한반도경제론』, 창비 2007; 박세길 외 『새로운 사회를 여는 상상력』, 시대의 창 2006.
  16. Steven Slaughter, Liberty beyond Neo-Liberalism, Palgrave 2005.
  17. Amitai Etzioni, From Empire to Community, Palgrave 2004.
  18. 졸고 「노무현 대통령의 리더십 특성」.
  19. 졸저 『마이크로소프틱스』, 동방미디어 2001.
  20. 애덤 모건 『큰 물고기를 잡아라』, 김앤김북스 2006.
  21. 박성민 『강한 것이 옳은 것을 이긴다』, 웅진지식하우스 2006.
  22.  애덤 모건, 앞의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