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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리재현 『조선력대미술가편람』(증보판), 문학예술종합출판사 1999
또하나의 우리 미술사 자료집
홍선표 洪善杓
이화여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교수 Hong1204@ewha.ac.kr
서양의 근대 미술사학이 바싸리(G.Vasari)의 『미술가 열전』(1550)에 기원을 두고 있듯이 우리도 오세창의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1928)이 그 초석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미술가 열전』이 서구 중세 미술가의 익명성 극복의 산물이었다면, 『근역서화징』은 고대 이래 우리 서화가의 혈통과 자취를 찾아보고, 이를 내세워 그 맥을 이어가게 하기 위한 족보의식의 소산이란 점에서 다르다. 전자가 근대적 미술가의 탄생을 의도했다면, 후자는 민족미술의 결속과 번성을 염원하며 찬술(纂述)한 차이가 있는 것이다.
1994년도 발간본을 크게 보충한 리재현의 『조선력대미술가편람』 증보판은 이러한 『근역서화징』의 전통을 계승했다는 의의를 지닌다. 사전식이 아닌 출생 순위에 따른 편년식 열람체제를 비롯해, 미술가의 경력과 창작활동에 관한 자료를 민족의 재보로서 수집, 정리하여 계열을 세우고 널리 선양하면서 주체성과 정체성을 강화해가고자 한 것이 그러하다. 다른 점은 순 한글로 기술한 것과 자료의 집성뿐 아니라 해석 및 평가와 함께 20세기에 활동한 근·현대 미술가의 비중을 높여 800면이 넘는 규모로 발행한 것 등이다. 아마도 이러한 경향은 ‘공화국 북반부의 올바른 문예정책과 고마운 인덕정치 덕분에 배출된 많은 예술가들을 내세워주고, 그들의 창조적 재능을 마음껏 꽃필 수 있게 해준 구체적인 자료를 보여주기 위해 힘을 넣었기’ 때문일 것이다(서문). 그리고 저자 자신이 미술사가이기보다는 평양미술대학 미술이론과 출신의 미술평론가이며 예술경영가인 점도 이 편람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조선력대미술가편람』 증보판에는 5세기의 백제 출신 화가 인사라아에서부터 1964년생인 조각가 곽태영에 이르기까지 모두 987명의 미술가들을 수록했다. 장승업(張承業,1843~97) 이전의 미술가로는 『근역서화징』의 절반 정도인 512명이 실려 있다. 전하는 작품이 없더라도 미술가로서 명백한 인물이면 역대미술가 계열에 세워 소개한다고 서문에서 말한 것과는 달리, 오세창이 편술한 『화사양가보록(畵寫兩家譜錄)』은 물론 『근역서화징』에 기재된 서화가들도 상당수 빠져 있다. 특히 조선시대 서화사 전개에 일정한 역할을 했던 유자미를 비롯해, 이항복·이사호·윤신지·오달진·이건·이요·이하곤·김광수·김희겸·박사해·조윤형·유한준·이덕무·송상래·마군후·변지순·유최진·이조묵·김영면·권용정·엄치욱 등이 누락된 것은 잘 납득되지 않는 부분이다.
그리고 수록된 전통 서화가에 관한 자료도 그동안 남한에서의 연구성과들을 반영하지 못했으며, 주로 일본을 통해 일부 참고했기 때문에 미진하고 잘못 기재된 사항이 적지 않게 눈에 띈다. 구체적인 근거 없이 안견·(이)수문·김명국·신윤복의 생년과, 이징 김홍도의 졸년(卒年)을 적어넣었는가 하면, 이함과 이정(탄은), 황기로·유덕장·윤두서·윤덕희·허필·최북·강희언·정충엽(‘협’으로 오기)·유재소·안건영을 비롯해 남한 미술사학계에서 새롭게 밝혀낸 저명한 서화가들의 생졸년과 문헌기록 등은 상당수 수록되어 있지 않다. 자세하게 검토해보진 못했지만,1980년대 중반 이후의 성과들은 거의 반영하지 못한 것 같다. 전통 조각가와 공예가의 경우는 더욱 심해 백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왕비의 팔찌를 만든 다리(多利)와 왕건 사묘의 도자기를 제조한 최길회를 비롯해 문헌과 작품 등을 통해 발굴된 수많은 자료들이 대부분 누락되어 있다.
그렇지만 이 편람에는 분단 이후 북한에서 발견된 것과 일본에서 유입된 작품들이 적지 않게 소개되어 있어 관심을 끈다. 새로 발굴된 작품을 통해 조선 중기에 활동한 것으로 보이는 김경복과 유은을 비롯해,1742년에 4m에 가까운 긴 권축(卷軸)의 「금강전도」를 그린 관허자와 서양화법을 구사한 18세기의 최새(명암법으로 그려진 「정성공발령의모도」에 쓴 박제가의 화기에 적힌 ‘최씨’의 오기가 아닌가 싶다),이지호·경일·이희웅·서정·주재계·우진호·신헌식·최여조 등의 이름이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조선미술박물관의 수장품을 비롯해 북한 각지에서 전하는 전통 서화가들의 작품량과 내역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이들 작품 중 일부는 북한에서 출간한 도록 등을 통해 소개되어 있고,또 위작일 가능성이 높은 것도 적지 않다고 들은 바 있지만, 최북의 경우조선미술박물관에만 60여점이 소장되어 있고, 그중에는 그의 마지막 기년작(記年作)으로 알려진 1765년의 「송음관폭도」보다 뒤에 그려진 1779년 작 「금강산전경」과 1781년 작 「사계절」이 포함되어 있는 등, 중요한 자료들이 상당수 있는 것 같다.
이 편람에는 장승업 이후의 근현대 미술가로 475명이 수록되어 있다. 그중에는 해방 후 북한에서 자라나 활동하고 있는 300여명에 대한 상세한 정보가 실려 있어 중요한 자료적 구실을 한다. 북한의 현대 미술가에 대한 소개가 만수대창작사에서 제작한 해외용 리플릿 정도로 저작물이 거의 없었던 실정을 생각하면 그 가치는 더욱 크다고 본다.
그러나 이 편람의 자료집으로서의 의의를 더 높여주는 것은 근대미술가에 관한 정보들이다. 고희동·나혜석·이종우·박수근·이중섭·이상범·변관식 등은 배제되어 있지만, 월북하거나 북한에서 체류했던 미술가에 대해서는 매우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어 이들에 대한 그동안의 자료적 공백을 상당부분 해소시켜준다. 현재 남한의 연구자들이 알고 있는 월북 미술가는 대략 70여명이다. 그런데 이 편람에는 30명 정도가 더 수록되어 있을 뿐 아니라, 초판에서 배제했던 이건영·이쾌대·이팔찬·이해성·임홍은·문석오·윤자선·정온녀 등이 김정일의 교시로 복권되어 실려 있다. 이여성은 이 증보판에서도 빠져 있는 것으로 보아 아직 복권되지 못한 것 같다.
리재현의 『조선력대미술가편람』에 실린 전통미술 분야에서 조선미술박물관 등의 소장품에 대한 정보도 요긴하지만, 무엇보다 북한에서 활동했거나 활동중인 근현대 작가들에 대한 자료는 매우 중요하다. 특히 근대미술사 연구에서 없어서는 안될 필독의 자료집으로서 의의가 크며, 통일 후의 우리 현대미술사를 구성할 또하나의 부분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도 각별하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