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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고형렬 高炯烈
1954년 전남 해남 출생. 1979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대청봉 수박밭』 『사진리 대설』 『김포 운호가든집에서』 등이 있음. sipyung2000@hanmail.net
달려라, 호랑아
자화상 2
달려가는 호랑의 껍질은 아무것도 아니다
두 앞발 사이 깊숙한 가슴근육
덜겅거리는 심장, 출렁이는 간, 긴장하는 목뼈
헉헉대는, 터질 듯한 강한 폐근육
얼룩거리는 붉은 어깨와 엉치등뼈, 거기 붙은 살점들
얼마나 우스꽝스러운가 커다란 구슬 같다
마구 흔들리는 골은 산산조각 깨어질 듯
무거운 육신을 잔혹하게 흔들며 전속력으로 달려가는
모자이크 된 육체가 뛰어가는 정신
주먹같이 생긴 허연 뼈들, 링 같은 꽃의 구근
기둥 같은, 널빤지 같은 뼈들이 가득한 육체
먹이를 뒤쫓아 맹추격하는 호랑의 구조
그놈들 가끔 보며 세상을 농담한다 지오그래픽의
제작자를 탓하지 않지만 생식기를
혹주머니처럼 흔들며 뛰어가지 않으려는 그의
부끄러운 표정의 질주를 비웃는다 이것이 세계를 보는
나의 유일한 창구, 한없이 저놈은 비위사납다
이해하면서 더러운 자식! 더러운 자식! 하며
달려라 조금만 더, 뛰어라 호랑아
너를 끌고 달리게 하는 아 호랑아, 달려다오
솔봉아 가지 않는 산이다
영산 효림(靈山曉林) 수구암에 부치다
이 가을
당신들과 인사동에서나 머물 사람이 아니다
질끈 끈을 죄어 아기만한 짐을 차고 저 산으로 가지
이 불타는 가을은
인사동 골목에서
눈곱만한 가을에 기대 울 사나이가 아니다 나도
눈에 아이섀도우를 하고 남자나 기다릴 여자가 아니다
못난 척하면서 속으로 다 영글고
잘난 척하는 사람도 아니다
나는 이 가을
소주나 한잔 놓고 짜증내고, 상을 치며 소리치는 위인이 아니다
혼자 먼산 너머 산속으로 떠나보내지
그림자를 따라 뛰어가는 상수리나무 찬바람에
수십개 부채를 다 부쳐주어도 아니될
이 가을은
통곡이라도 하고 싶은 산이다 천길 청잣빛 하늘 아래
낙엽처럼 불과 함께 호올, 타버리고 싶은
짠한, 짠한 가을
연대를 표기하지 못한 국토에 넘쳐 너울대는 불길
내 몸속에 표지기 하나로 팔락이는
대간(大幹)길 어느 비알길에서는
불갈비처럼 타고 있는 저 산가을
고작 플라스틱 잠자리의 두 날개 위에서 말라 눈감는
이 석석한 가을
솔봉아 우리는 가지 않는 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