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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곡
지경화 池炅華
동국대 문예창작과 3. 1986년생. mills4@korea.com
내 동생의 머리를 누가 깎았나
등장인물
어미(43) 고이금(26) 고이손(17) 고이리(17)
무대
(객석과 가장 가까운 곳부터) 왼쪽으로 담장이 비죽 솟아 있다. 담장이 조금 무너진 곳에 작은 화분이 몇개 놓여 있다. 담장에 바로 맞닿아 있는 수돗가. 빨간 세숫대야가 보인다. 중앙에는 아담한 평상이 있다. 평상 위에 옷가지가 몇벌 얹어져 있다. 평상 뒤로 집이다. 길지 않은 마루가 있다. 열려 있는 방문이 보이고 그 옆에 작은 문이 하나 더 있다. 문이 열린 곳은 할아버지의 방이다. 발이 내려져 있다. 무너진 담으로부터 할아버지 방 문 옆까지 사선으로 빨랫줄이 길게 이어져 있다. 평상 곁에도 바지랑대가 몇개 세워져 있다. 줄기줄기 색바랜 빨래가 걸려 있다. 집 오른편에 파란 대문이 있다.
평상 옆에 가방이 놓여 있다. 이금이 평상에 앉아 수박을 먹고 있다. 게걸스럽게 먹고 있는 꼴이 애처롭다. 수박은 칼로 쪼갠 것이 아니라 박살나 있다.
개 여러마리가 짖는 소리 들린다. 어미가 이손을 앞세우고 들어온다. 이손은 어미에게 혼난 뒤라 풀이 죽었다. 어미는 미인이지만 개 키우는 사람 특유의 냄새와 억척스러움이 배어 있다. 이손은 이금과 눈이 마주치자 얼른 작은방으로 뛰어가버린다.
이금 저 왔어요.
(어미가 평상 옆에 있는 가방을 본다. 짐을 마구 쑤셔넣었는지 익은 무화과처럼 부풀어 있다. 어미가 가방을 열고 삐져나온 옷가지를 억지로 쑤셔넣는다. 한참을 애써도 들어가지 않자 포기하고, 좁은 틈으로 이금의 팔다리를 끄집어내듯이 짐을 모두 빼버린다. 속이 시원해진 어미는 벌떡 일어나 수돗가로 가 손을 씻는다. 걷어올린 팔에는 상처가 많다.)
이금 수박 먹어요. 목소리가 아버지 닮아서 속정에 한덩이 팔아줬어.
어미 흘리지 마라. 개미 꼬인다.
이금 엄청 단데, 씨가 많다.
어미 수박을 얼굴로 깼냐.
(이금, 웃으며 수박을 입에 물고 어미 입 쪽으로 내민다. 어미, 고개 돌린다.)
이금 대문 다 들어와서 떨쳤어요. 땅이 꺼졌는지 오는 내내 길이 잘 안 밟히는 거 있죠.
(어미, 칼과 쟁반을 가지러 부엌으로 가면서)
어미 얼굴이 왜 그래.
이금 아주 나왔어요.
(어미, 잠깐 걸음 멈춘다.)
어미 (기가 막혀) 허. (가면서 혼잣말하듯) 서방이 착하니까 알아서 등신짓이지.
이금 여자 있잖아요.
어미 (소리만) 알고 보니 여럿이데?
이금 아니. 나 하나, 거기 하나. 실속있게 두 살림이에요. 능력이 안되서 세개는 못 차리고.
(어미, 칼과 쟁반을 들고 나온다.)
어미 니 집 살림에 지장 없으면 그냥 두는 거야. 넌 애도 없는 게 왜 큰부인 행세야. 거기도 벌써 닳고닳아 길 난 집일 텐데. (잠시) 애가 있든?
이금 자꾸 집에 뭘 보내요. 건방지게 작은부인 행세야.
(어미, 이금이 들고 있던 수박을 뺏어 신경질적으로 입에 밀어넣는다. 이금, 칼로 수박을 자른다.)
이금 없어요. 없더라구. 가봤더니 집이 아담하고 이뻐. 싹싹하게 나와서 반색하는데, 세상에! (목소리가 커지며) 그 사람 얼굴이며 팔이며 온통 멍인 거 있죠? 그 짐승, 나한테 열받고 나가 그 사람한테 푸나봐요. 그 얼굴로 형님 하는데 정말 기분 더러워요. 두 여자가 바람멍 시퍼렇게 들어서 형님, 아우 하는 꼴이. 나야 가슴에 든 멍이니까 아닌 척하면 그만이지만 그 여자는 어떡해요?
어미 이뻐?
이금 나이가 어리다는데, 팍 삭아서…… 이제 보니 내가 여태 그 짐승 속이라고 싹싹 긁어놓은 게 다 그 여자 살이었나봐. 열받으면 날 팰 것이지. 엄마, 알아요? 내 앞에선 컵 한번 잘못 그르친 적이 없어요.
어미 패긴 누굴 팬다는 거야?
이금 그 집은 도마가 반토막이야. 그걸로 맞는대요. 다음날 된장국 끓이는데 우리 집 도마를 보니 열불이 나지 않겠어요? 그래서 도마에 칼 탁! 꽂고 그 길로 나와버렸어요.
어미 넌 왜 가만있는 벽에 시비야. 이마에 핏방울 봐라. 허구한 날 맨벽에 헤딩이냐? 성한 수박 집어놓고 씨 없으니 침이라도 뱉겠다는 거지. 너, 고약해. 심보가. (씨 뱉는다.)
이금 내 차 나갈 때까지 저 뒤에서 고개를 안 들잖아요. 엄마, 정말 그 사람이 무슨 죄예요?
어미 죽을 때까지 죄송하기만 하고, 죽어도 안 떨어지겠다는 거지.
이금 세상에! 엄마, 난 그런 사랑은 못해요.
어미 여기 온 거 이서방은 아니?
이금 이서방? 그 사람 개도매 하느라 바빠.
어미 먹거리?
이금 아니, 애완견이에요. 딱이지, 뭐. 없는 머리털 대신 개털도 올려놓을 만큼 개 좋아하던 사람인데. 근데 엄마도 참. 지금 살고 있는 사람 박서방이에요. 이서방 이름이 뭐였는지도 난 까먹었는데. 원래 이름이 서방이었나?
어미 하여간 딸년 돈 안 들여 치운다고 좋아하는 게 아니었어. 결혼까지 싸게 여러번 할 줄 내가 알았을까.
이금 도마 위에 결혼사진 놓고 칼 탁! 꽂는데, 왜 옛날 홍콩영화 마지막 같지 않아요? (웃음) 나오면서 생각해보니까 정말 그 사람하고 살았던 게 한편의 무협영화야. 캐스팅은 화려하지만 화질은 구려.
(이금이 입은 옷의 긴팔소매 끝이 수박물에 젖었다.)
어미 다 젖는다.
(어미는 이금의 팔을 끄집어 소매를 걷어주려다가 그냥 자신의 치마로 닦아주고 만다.)
어미 (할아버지 방 쪽 가리키며) 인사는?
이금 아니. 주무시는 것 같아서요.
어미 종일 저렇게 누워 계시다가도 숨소리 들으려고 귀를 가져다 대면, 콧김을 훅 부신다. 그 콧김이 얼마나 뜨거운지. 다 쇠한 몸 안에도 열이 그렇게 많이 남아 있다니 어쩐지 기분이 나빠져.
이금 거동은 좀 하세요?
어미 잠깐 앉으실 때는 있지. 그래도 정신은 꽉 붙잡고 계셔서 꼬박꼬박 날짜를 물어보신단다.
이금 날짜를요?
어미 그래. 몇년 몇월 며칠인지. 거기다 요일까지 분명히 말씀드려야 하구.
이금 (농담으로) 날짜라도 고르고 계신 건가?
어미 저승으로 장가가려면 좋은 날을 받아야지. (잠시 웃다가) 그래도 저 양반이 보통 양반이 아닌데……
이금 할아버지 호통 한번이면 온 개장이 다 조용해졌죠.
어미 개장 쪽에 가려면 오금이 오싹오싹해. 네 할아버지가 키우신 개들이라 얼마나 사나운지. 저 양반 정정하실 때는 순하던 녀석들도 지금은 살 떨리게 으르렁대.
이금 (개 짖는 소리 듣고) 개들이 난리네요.
어미 오늘따라 유난하구나. 원, 발정이 났나. (잠시) 네가 와서 그래. 냄새가 낯설어서.
이금 (걷어붙인 어미의 팔을 보며) 밥 주다가 이렇게 물려요?
어미 밥인지 손인지 저것들이 아나.
이금 자식이나 개나 똑같다. 그치?
어미 똑같지.
(두 모녀가 웃는다.)
이금 미안해요……
어미 (할아버지 방에 대고 길게 대답한다.) 예에.
이금 할아버지가 불러요?
어미 하루에도 몇번씩 부르고, 저렇게 대답만 듣는다.
이금 들어가봐.
어미 그냥 있는가 없는가 궁금해하시는 거야.
이금 엄만 참 귀도 밝다. 난 못 들었는데.
어미 그래. 너 오는 소리도 멀리서 들리더라. 가는 길마다 그렇게 비포장도로야?
이금 집에 오는 길은 좋아졌던데요. 포장도 쫘악 깔리고. (웃음) 가만 보면 이것도 남는 장사예요. 마침 박서방 승진했거든. 이번에 받으면, 우리 저 담장부터 고쳐요.
(어미, 이금을 가만 본다.)
이금 뭘 그렇게 봐요?
어미 둬. 크게 불편할 일 만들지 말고.
(이손이 나온다. 입고 있던 속옷과 면기저귀를 손에 들고 있다. 수돗가로 가 빨기 시작한다.)
이금 무너진 거라도 어떻게 해요. 보기 싫잖아.
어미 정 짧은 년. 넌 그게 문제야. 보기 싫다고 고쳐? 난 네 아버지가 던진 재떨이가 아직도 저 틈으로 날아다니는 것 같은데. 봐라. 에미 가슴 무너진 것도 보기 싫으냐? 내 맘이야. 냅둬.
이금 기운 좋은 미장이가 이렇게, 엄마 가슴에도 흙 발라줄지 알아?
(이금의 장난에 어미가 웃는다. 햇살에 익은 마루처럼 편안한 웃음이다.)
이금 정말이야. 미장이건 송장이건 좋으니까 불러다가 손 좀 보면, 작은 가게 하나 낼 구석은 나온다니까요.
어미 또 그래.
이금 (어미의 손을 잡으며) 손등에 이렇게 게딱지 앉히면서 살지 말라구요.
어미 나 할 줄 아는 거 개 키우는 거밖에 없어.
이금 저런 잡개들한테 정이 붙어요?
어미 내가 준 밥그릇은 싹싹 비우잖니.
이금 여자 혼자 할 일이 아니에요.
어미 나도 좋아서 키우는 거 아니야. 그래도 저기, 새끼 밴 암컷이 있다. 이제 낳을 때가 돼서 얼마나 예민한데. 어미 개 기분이 좀 이상하다 싶으면 다른 개들도 눈에 띄게 조용해져. 지들 새끼도 아닌데, 신기해.
이금 여기서 낳게 할 거예요?
어미 나는 징그러워서 못 보겠더라.
이금 그러면서 무슨 개장사를 하겠대. 저거 다 팔면 물건 들여놓을 돈은 나오겠네.
어미 (잠시) 얘, 하루에도 개장 문을 활짝 열고 싶을 때가 한두번이 아니야.
이금 (놀라서) 큰일날 소리 말아요!
어미 그치? 그런데도 난 저것들만 보면 그렇게 그애 생각이 난다.
이금 이리가 개들을 얼마나 무서워했어요.
어미 그래. 그랬지. 근데 난 괜히 그런 생각이 들어. 혹시 그애가 이제 저렇게 사나워진 건 아닐까? 저 개들도 본디 얼마나 순했을 거야?
(어미, 일어나 빨랫줄에 걸린 빨래들을 뒤집는다. 평상 위에 있던 몇벌의 옷가지도 마저 넌다.)
어미 이리 옷에 곰팡이가 슬었더라. 너무 오래 들여다도 안 봤어.
(이금, 어미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이금 햇볕 나는 날 바짝 말리지. 오늘은 날씨가 별로예요.
어미 바람이라도 좀 쐬주는 거야.
이금 우리 엄만 아직도 엉덩이가 탱탱하네.
어미 재산이야. 요거 빼서 입술에도 넣구 볼에도 넣구 그럴 거다. (웃음)
이금 콧방귀 뀌지 말어, 당나귀같이.
어미 그래도 여기에 나만한 이 있어? 우리 집 대문 열리면 벌써 앞집 옆집 담장부터 낮아진다, 너. 울쑥불쑥 머리통 내밀고 인사들 하느라고 말야. 대문에 기름칠 좀 해야지. 열 때마다 얼마나 소리가 나는지, 온동네에 외출한다고 소문내는 것 같다니까. 누가 과붓집 아니랄까봐, 과부 가랑이마냥 삐걱삐걱……
(문이 바람에 아주 천천히 열리는 소리. 이금이 놀라 몸을 움츠린다. 어미와 이손이 대문 쪽을 한번 쳐다본다. 긴장이 감도는 정적.)
이금 (소리 죽여) 누구예요……
(이내 이손이 다시 빨랫물을 퍼 담는다. 그제야 이금이 긴장을 풀고 대문을 쳐다본다. 아무도 없다.)
이금 혹시, 박서방 오면 엄마, 나 무조건 없는 거예요. 여기 주소는 모르지만 그래도.
어미 (조용히) 어제 꿈에 니 동생이 나왔어.
이금 누구?
어미 이리 말이야.
(문 열린 방의 어둠 속에서 이리가 요강 위에 앉는 것이 보인다.)
어미 쉬가 마려운지 바지춤을 꽈악 움켜잡고 섰어. 마려우면 마렵다고 말을 하지. 뒷간에 가련? 아무리 물어도 고개만 젓는 거야.
이리 (머리를 쥐어뜯으며) 내 머리 좀 봐.
어미 머리가 파르라니 짧아. 얼굴은, (잠시) 가늠을 못하겠네. 그게 몇살 때 얼굴일까. 아무리 때리고 끌어도 안 움직이더니 결국 바지에 일을 저지르는 거 아니겠니.
이리 엄마, 내가 뭔 잘못이야?
어미 너 왜 그러니? 하지 마라. 하지 마.
이리 이 요강은 불량이야. 위는 막히고 밑이 뚫렸어.
어미 걔가 그런다. 뜨거워. 엄마, 뜨거워. (잠시) 지 소변이 너무 뜨거워 죽겠다는 거야. 온다리에 쇳물이 흐르는 것 같다고. 뱃속이 용광로처럼 식지를 않는다고. 못 참겠다고.
이리 내가 뭔 잘못이야?
(이리, 나간다. 이금, 일어나 조용히 대문을 닫고 온다. 이손은 기저귀와 속옷을 널기 시작한다.)
어미 내가 무슨 잘못이냐.
이금 엄마는 잘못 없지.
어미 (잠시) 대문 밖에 아무도 없니?
이금 응. 누가 오기로 했어?
어미 개를 보러 온댔는데…… 내일 비가 온다더라.
(이손이 재빨리 일어나 할아버지 방으로 간다. 할아버지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지만 간간이 기침소리가 들린다.)
이손 (소리만) 팔월 십구일이에요. 아니요. 토요일요.
이금 그래서요?
어미 뭐가?
이금 다른 말은 없었어요?
어미 응. 그냥 막 소리 지르고, 울고, 그러다 깼다.
이금 참 애태우네.
어미 꼭 짐승 같더라.
이금 그애 머리 깎일 때 모습이 남아서 그래요. 그게 마지막이었잖아요.
어미 오늘은 꼭 검실검실하게 머리 난 그애가 올 것만 같다.
이금 날이 흐려요. 정말 비가 내일 온대요?
어미 그래. 밥 다 됐겠다.
이금 나도 주세요.
어미 개밥을?
(어미가 웃으며 부엌으로 간다. 이손이 요강을 들고 방에서 나온다.)
어미 (이손에게) 왜?
(이손, 요강을 마루에 놓고 대꾸 없이 신을 신고 평상에 가 앉는다. 이금이 뒤돌아앉은 이손에게 장난을 친다.)
어미 밖에 두면 차가워지잖아. (다시 요강을 밀어넣으며) 여기까지 나오시지도 않을 거면서 꼭 그러셔, 정말.
이금 넌 여전히 생꽁생꽁이구나.
어미 언니가 와도 인사도 안하고, 저년.
(이손, 무시하려고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어미 (들어가려다) 저게, 또!
(이손이 노래 멈춘다. 잠깐 어미와 이손 사이에 신경전이 인다. 이내, 기가 꺾인 이손이 고개를 숙인다. 어미, 부엌으로 들어간다.)
이금 수박 좀 먹어봐. 엄청 달다.
어미 (소리만) 주지 말어. 또 오줌 싼다.
이금 싸는 거 무서우면 먹을 게 어디 있어요? 이손아, 자.
이손 언니, 언제 가?
이금 왜, 얼른 갔으면 좋겠어?
(이손은 다리를 세우고 앉아 치마를 펄럭인다.)
이손 땀띠 때문에 교복 입기 짜증나.
이금 겹겹이 껴입으니까 그렇지. 덥지도 않니?
이손 (바지랑대를 가리키며) 이건 또 무슨 청승이람.
이금 옷에 곰팡이가 슬었대.
(이손, 일어나 바지랑대에 걸린 옷가지를 몇벌 끌어내린다. 몸에 대본다.)
이손 에걔, 작아.
이금 많이 컸네.
이손 옛날엔 얘랑 옷 같이 입었는데.
이금 지금은 너보다 클걸. 남자니까.
이손 이건 좀 괜찮나?
이금 잘 보고 입어.
(이손, 옷을 걸쳐본다. 어미, 부엌에서 개먹이가 든 통을 가지고 나오다가 이손을 본다.)
이손 (어미에게) 엄마, 어때?
어미 이것 좀 들어라.
(이금이 일어나 도우러 간다. 이손이 다가가려 하자)
어미 묻어. 벗어놓고 와.
(이손은 옷을 벗어놓지만 도우러 가지는 않는다. 이금과 어미는 통을 평상 옆 바람이 잘 드는 곳으로 옮겨놓는다. 어미가 평상에 앉아 큰 막대기로 통 속을 휘젓는다.)
어미 뜨거워. 저리 앉아.
이금 (이손에게) 수박 먹었어?
이손 안 먹어.
이금 왜?
이손 할아버지 안 드셨지?
이금 (방을 보고) 응, 그러네.
어미 잘 씹지도 못하는 양반한테 뭐 하러. 탈난다.
이손 그럼 잘게 씹어드려야지.
어미 그래, 너 어릴 적엔 할아버지도 그러셨지. 어쨌든 할아버진 늙으셔서 음식을 가려 드셔야 해.
이손 할아버진 이제 눈도 잘 안 보이고 귀도 안 들려서 한참을 더듬어야 내가 누군지 알아. 입속에 뭐가 들어가는지도 모를걸?
이금 좀 갖다드릴래?
이손 엄마가 가.
(어미는 싫은 내색이다.)
이금 내가 가지 뭐.
이손 언니하고 있을래. 엄마가 가.
어미 싫다. 난 저 방엔 가고 싶지 않아.
이금 무슨 말이에요, 그게.
어미 될 수 있으면 마주하고 싶지 않다는 거야. 저 양반만 아니었으면 집에 이렇게 남자가 마르진 않았을 거다. 마르다 뿐이야? 이젠 원수 같지. 너무 큰 나무는 작은 묘목을 다 말라죽게 하는 법이야. 저 양반은 우리 집 마당에 어울리지 않아.
이금 이젠 많이 약해지셨어요.
어미 그렇다고 뭐가 달라지니?
이금 싫어한다고 그애가 돌아와요?
이손 걘 도망친 거야.
어미 도망친 게 아니다. 쫓겨난 거지.
이손 겁쟁이.
어미 그건 그애 잘못이 아니야.
이손 그럼 누구 잘못이지?
이금 그런 게 어딨어? 그만 해.
어미 (잠시) 어휴, 팔이야.
이금 내가 해요?
어미 됐어. 뜨거우니까 저리 가래도.
이금 우리 밥 짓는 정성도 이보단 덜하겠네.
어미 쪽수에 당할 사람 있어? 곧 또 몇식구 생기면 이건 몇배로 늘 텐데.
이금 내가 아는 사람한테 말해볼게요. 팔면 큰돈 될 거예요.
이손 팔아?
이금 이게 무슨 고생이야. 저따위 개들 때문에.
이손 저따위 개들이 아니야. 저 개들이 아니면 여자 둘이 사는 허술한 집을 누가 가만히 두겠어?
이금 우리에 갇힌 개를 누가 무서워나 하니?
이손 우리를 무서워하지. 나는 화가 나면 언제든지 그걸 열어버릴 수 있거든.
이금 넌 개들이 무섭지 않아?
이손 난 개들보단 (화분을 가리키며) 저런 것이 훨씬 무서워. 눈에 띄지도 않고 으르렁거리지도 않는 화분 같은 것 말야.
이금 우스운 소리구나.
이손 식물들도 공격한대. 알아?
이금 공격?
이손 제 터를 키우는 거지. 영역을 넓히는 거야. 천천히, 아주 느긋하게 말야. 우리는 아무도 눈치챌 수 없어. 하지만 어느날 녹색으로 둘러싸인 마당을 보게 되는 거야. 그걸 무시하면 안돼. 그건 식물들의 전쟁이야. 담쟁이 하나라도 그냥 자라게 두어선 안돼. 그럼 결국은 다 뺏기고 마는 거야.
이금 너 과민한 거 아니니?
이손 어떤 식물들은 자기 영역에 들어온 생물은 반드시 쫓아내버린대. 심지어 같은 식물끼리는 뿌리를 비틀어 죽이기도 해.
어미 (웃음) 저 애는 몇년새 저렇게 똑똑해졌단다.
이손 할아버지와 꼭 닮았다고?
어미 늙은이가 애를 망쳐놨어.
이금 나는 잘 모르겠다.
어미 밥을 안 먹어도 제 배가 부를 줄 안다니까. 넌 그렇게 잘나지 않았어.
이손 나는 엄마한테 풀리지 않는 숙제 같은 거야. 너무 어렵지.
어미 할아버지가 널 붙잡고 얘기할 때, 내가 너한테 개밥을 젓는 거라든지 속옷을 빠는 일을 더 시켰어야 했어. 그랬다면 자기 처지를 더 잘 알았을 텐데. 그러니까 어서 저기 걸린 네 동생 옷을 좀 뒤집어라.
이손 저 옷들은 너무 작아요. 나한테도 맞는 게 하나도 없어.
어미 쓸 만한 건 네가 다 입어버렸잖아. 저기 걸린 것들은 옛날보다 더 옛날에 산 옷들뿐이지. 넌 쓸 만한 옷 하나도 동생을 위해 남겨놓지 않았어.
이손 걔가 돌아와도 입지도 못해.
어미 그래도 자기가 입던 옷에 곰팡이가 핀 걸 보면 속상해하지 않겠니?
이손 엄마가 말한 것처럼, 자기 처지를 알게 되겠지.
이금 (조금 화가 나서) 우린 그앨 한순간도 잊은 적 없어.
이손 그래. 잊지 않았지. 그래도 그것보단 사는 게 중요하지 않아?
어미 또 시작이군.
이손 그앨 위해서 이따위 옷들을 말리는 것보다 중요한 건 없는 거야?
이금 언제 널 소홀하게 대한 적 있니?
이손 나는 그 겁쟁이가 도망가는 바람에 이 끔찍한 마을에서 한순간도 벗어날 수 없게 됐어.
이금 넌 언제든 벗어날 수 있어.
이손 기다려야 하잖아. 그앨 기다려야 한다구.
이금 그건 너한테도 도움이 될 거야.
(이손, 일어나 이리의 옷을 뒤집는다.)
이손 언니, 말해줘. 그건 내 잘못이 아니었다고.
이금 그래. (더욱 긍정해주며) 그래, 네 잘못이 아니지.
어미 그애는 고통받고 있을 거야. 그걸 생각하면 나는 잠을 이룰 수가 없어.
이손 (더욱 밝게) 나 이제 감기도 잘 안 걸리고 밤을 새워 책을 봐도 열이 나지 않아. 그래서 나, 그 일에 감사하기로 했어. 언니, 기억하지? 내가 얼마나 자주 아팠는지. 그때도, 내가 앓고 있으니까 할아버지가 그앨 아주 많이 때렸지. 그러니까 나는 열도 내리고 앓던 속도 괜찮아졌잖아.
어미 다른 사람의 고통을 보고 웃지 마라. 그건 네가 겁을 먹었다는 뜻이야.
이손 그애 머리가 빡빡 깎일 땐 정말 통쾌했어. 내가 왜 겁을 내겠어?
어미 (조금 흥분해서) 그애에게 상처를 주었잖아.
이손 내가? 나는 아무도 상처줄 수 없어. 나는 당한 거야. 내 등을 자꾸 찌르던 작은 돌멩이, 어떤 나무, 멀리서 들리던 개소리까지. 날 함부로 넘봤던 거라구. 나는 매일 돌멩이가, 개들이, 이 곰팡이 핀 빨래들이 나를 강간하는 꿈을 꿔. 아무거나 다 내 가랑이 사이로 들어왔다가 나가지만 난 겁내지 않아. 적어도 난 그것들을 겁내지는 않는단 말이야.
어미 (마음이 좀 누그러져) 네 쌍둥이 동생은 그냥 아무것도 몰랐을 뿐이야. 그앤 본래 겁이 많았어.
이손 걔는 적어도 도망가지는 말았어야 했어.
어미 할아버지가 개장 문을 열어버리겠다고 이리에게 고함을 치셨어.
이손 개장에 가둬버리겠다고 했어도 난 도망가지 않았을 거야!
어미 네가 그애를 멀리 데리고 나갔잖아?
이손 어린애들이 밖에 나가 노는 게 잘못이라는 거야?
이금 엄마, 이리가 도망간 것도 이손이 탓은 아니에요.
어미 그럼 그게 그애 탓이니? 제 쌍둥이 누나를 내버려뒀다고?
이금 누구 탓도 아니에요. 그냥 그렇게 된 것뿐이야. 아무도 그애에게 멀리 도망가라고 말하지는 않았잖아요. 아무도 돌아오지 말라고 한 적은 없어요.
어미 너무 불공평하지 않니? 아무도 잘못하지 않았는데 왜 그애만 이렇게 고통받고 있는 거지?
이금 개들 때문이에요. 저 개들이 아니었으면 그렇게 멀리 도망가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이들이 두려워하는 건 서로에게 슬픔이나 공포가 전염되는 것이다. 그것이 이 집에서 얼마나 치명적으로 기생하고 번지는지 모두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미는 힘을 내 울음을 삼킨다. 어미가 울음을 삼킬 때까지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것은 어미의 몫이다. 적막 속에서 이손이 웃기 시작한다. 아이들의 웃음이 그렇듯, 딱히 대상도 이유도 없는 그저 웃기 위한 웃음이다. 어미는 그것이 싫다.)
이손 언니, 들었지?
이금 엄마, 할아버지께 잘해드리세요.
어미 말 말어. 나도 안다.
이금 알면서 왜 그래요.
어미 저렇게 죽을 똥 살 똥 하시는 게 몇년인 줄 아니.
이손 (웃음을 멈추고) 엄마, 할아버지 똥 싼다.
이금 뭐?
이손 들어봐. (할아버지의 힘없는 신음소리) 죽을 똥, 살 똥.
어미 너 또 뭘 드렸어? 아직 시간이 안됐는데.
이손 내가 뭘?
(어미가 수돗가에 있는 고무장갑을 들고 할아버지 방으로 들어간다. 이손이 이금 곁에 다가와 수박을 한입 베어문다. 이금은 이 모든 상황이 낯설다.)
이금 들어가면 안되는 거 아니야?
이손 할아버지가 지금 죽을 똥 살 똥 하시거든.
이금 무슨 말이야?
이손 할아버지는 너무 늙어서 이젠 똥 밀어낼 힘도 없단 말이야. 그래서 엄마가 도와주러 가는 거야.
이금 엄마가 직접? 손으로?
이손 엄마는 정말 웃겨. 할아버지가 싫다면서 매일 뒤를 봐주느라 정신이 없단 말이야.
(이손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웃는다. 이 생경한 감정을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이금은 잠시 어안이 벙벙하다. 따라 웃는다. 어미가 요강을 들고 나온다. 수돗가로 가 요강을 씻는다.)
어미 (지쳐서) 가게를 내면 네 할아버지와 한방을 쓰란 말이냐. 양쪽 방을 다 허물고 다시 지을 순 없으니까 말야. 너야 멀리 사니까 아무래도 무슨 상관이냐. 하지만 나는 그게 아니야. 날이 갈수록 영악해지는 늙은이를 돌보는 게 쉬운 줄 알아? 싸지도 않을 거면서 끙끙 앓는 소리 하는 거 봐라.
이손 언니, 가게를 내기로 했어?
이금 나 살림에 자신이 없어요. 세번이나 해봤지만 조금도 늘지 않더라구요. 그냥 작은 가게 하나 내서 우리끼리 살면 안돼요?
어미 너는 금세 떠날 거다. 젊고 예쁘니까 곧 남자가 생길 거고, 그게 아니면 이 조용한 곳이 싫어질 거야.
이금 난 이곳이 좋아요.
이손 미쳤어, 언니는. 왜 자꾸 돌아오는 거야? 나 같으면 두번 다시 안 올 텐데.
이금 뭐래도 집이 제일인 거야.
이손 그래도 우리 집보다는 남의 집이 낫지.
이금 결혼 내내 남의 집에 사는 것 같아 내가 얼마나 불편했는지 아니?
이손 (새삼스러운 듯) 언니 정말 바보구나?
어미 할 일 없니?
이금 뭐 도와드려요?
(어미는 말없이 요강만 씻는다. 이금은 아까 어미가 내놓은 자신의 옷을 개킨다. 이손은 이금의 가방을 열어 구경한다. 화장품을 꺼내 얼굴에 발라본다.)
이손 언니는 언제 처음으로 화장했어?
이금 열여덟살인가. 회사에 들어가면서부터일걸, 아마.
이손 나도 내년이면 열여덟이야. 열여덟이면 화장할 수 있는 나이지. 그렇지?
이금 (웃음. 이손의 얼굴에 난 여드름을 가리키며) 이 여드름이 없어져야지. 그래야 정말 어른이 되는 거야.
이손 이건 영영 사라지지 않을 건가봐. 정말 꼴 보기 싫어.
어미 쓸데없는 소린 그치고 이제 뭔가를 좀 해.
이손 엄마는 뭘 자꾸 하라는 거야? 내가 지금 해야 할 일은 이 여드름을 남김없이 없앨 방법을 궁리하는 거야. 내가 뭘 해야 할지 엄만 알아?
어미 하지 말아야 할 것이 뭔지는 잘 알고 있지. 넌 절대로 변하지 않을 것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안돼. 이를테면 네 피부 같은 것 말이다. 그러니까 그 거울 좀 치워버릴 수 없겠니? 나는 이제 네가 철들 때가 됐다고 생각한다.
이손 (비꼬듯) 난 철들 필요가 없어. 학교에 가면 선생들은 날 좋아해. 애들은 나한테 말도 못 붙이지. 난 선생들이 나한테 불여우라고 말하는 게 좋아. 엄마, 알아? 그래서 나는 거울을 보는 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
어미 가끔 널 보면 일부러 날 화나게 만드는 것 같구나.
이손 이만하면 잘 자란 딸이라는 거예요. 엄마가 모르는 척하고 있는 것뿐이야. 그러니까 나한테 철들란 소리는 그만하세요. 날 조심시킬 때 엄마가 말하는 것처럼 난 이제 다 큰 처녀잖아요?
어미 그 사람들은 네가 아직도 어린애처럼 기저귀를 차고 다닌다는 걸 알고 있니?
이금 엄마!
어미 그 나이 먹도록 네가 소변도 못 가린다는 걸 알고 있냔 말야!
(어미는 엉망인 기분을 어찌할 수가 없다. 고무장갑을 뒤집어 물기를 털듯 바닥에 몇번 내리친다.)
이손 엄마는 병에 걸렸어.
이금 너도 그러는 거 아니야. 왜 그렇게 버릇이 없어?
어미 저 애 버릇이 나쁜 건 당연해. 배운 게 없으니 그럴 수밖에. 올해도 고등학교는 못 간단다.
이손 그래! 가게를 내, 언니. 이 집에 있는 것을 남김없이 줘버리는 거야. 돈은 필요 없어. 물건을 팔자. 뭣이든 다른 걸로 여길 채우는 거야.
어미 (말을 끊으며) 정말이지, 학교를 다니지 않을 생각이라면 무슨 일이든 구해야 할 거다.
이손 만약 내가 학교를 가지 않는다면, 엄만 날 팔아치우기 위해서라도 가게를 내야 할 거야.
이금 이손아!
(이손은 이금을 끌고 어미에게서 멀어진다.)
이손 언니, 뭔가 이상하지?
이금 너, 왜 이렇게 비뚤어졌어, 대체?
이손 꼭 만둣국을 끓이는 것 같아. 다 익은 만두가 하나둘 떠오르는 것처럼 매일 안 좋은 기억이 새롭게 떠오르는 거야.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할 수 없이 또 일을 저질러. 그건 내 힘으로 어쩔 수가 없어. 나는 그냥 싸질러버리는 거야. 나는 어제 또 새로운 일이 생각났어. 그때 내 머리카락에 붙어 있던 껌 말이야. 그게 그 더러운 녀석들의 입에서 뱉어졌다는 걸 기억해냈다구. 이제야 다 익은 만두처럼 떠오르다니. 언니, 아직 덜 익은 만두가 있을까, 없을까? 도대체 뭐가 더 남은 걸까?
어미 저 애는 클수록 의심하는 병만 깊어지네. 니 동생이 문제인 게 하루이틀이냐?
이손 봐. 들었지? 내가 조금쯤 이상해져도 문제될 것 하나 없어. 언니, 정말 이상해.
이금 그러지 마. 생각하지 마. 너한테 좋을 거 뭐 있니. 학교도 빠지지 말고.
이손 (말을 끊으며) 제발 나를 데리고 가, 언니.
이금 나는 그럴 처지가 못 돼.
이손 (화가 나서) 돈 많은 형부들과 세번이나 이혼하고도, 언니는 가난한 거야? 응?
이금 그건…… 내 처지와는 상관없어.
이손 언니, 난 여기서 영원히 속옷이나 적시며 살게 될 거야!
(이금이 이손을 안아주려 한다. 이손이 이금의 포옹을 거세게라기보단 급하게 뿌리친다. 이금은 두 팔의 무색함조차 느끼지 못한다.)
이손 (잠시) 그래. 걱정 마, 언니. 다 잘될 거야.
(이금은 이손의 이토록 능숙한 위로가 안쓰럽다. 점점 자신이 이방인같이 느껴진다. 멀리서 개들 짖는 소리. 싸움이라도 벌어진 듯 불안하다. 그러다 갑자기 조용해지고 개 몇마리의 신음소리만 들리다 사라진다.)
이금 그래. (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보며) 그래.
어미 이 사람들은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야.
(이손은 어미가 씻어놓은 요강을 들고 할아버지 방 안으로 들어간다. 어미는 어깨를 좀 두드린다.)
어미 (통을 가리키며) 네가 그것 좀 갖다줘라. 배들이 고픈 모양이야.
이금 그냥 부어주기만 하면 돼요?
어미 (장갑을 벗어주며) 고루고루 나눠. 그냥 막 퍼주다간 마지막 우리에서 모자랄 수도 있어.
(이금, 통을 손수레에 싣고 나간다. 어미가 수돗가에서 허리를 펴자 담장 위의 화분이 보인다. 화분을 물에 적셔 다시 올려놓으려는데, 담장이 무너진 틈으로 지나가는 누군가와 눈이 마주친다. 눈인사를 나눈 뒤 천천히 화분을 올려놓는다. 이금의 짐과 가방을 챙겨 작은방 쪽 마루에 얹어놓는다. 수박껍질과 쟁반도 함께 갖다놓는다. 바람이 불어 옷들이 흔들린다. 그러자 대문 너머에 누군가 있는 것이 얼핏 보인다. 비가 한두방울 떨어진다. )
어미 기어이 비가 먼저 오는구나.
(널어놓은 옷을 걷기 시작한다.)
어미 괜히 꺼냈다. 정말, 괜히 꺼냈어.
(마음이 분주하다. 서둘러 빨래를 걷고 있을 때 방에서 이손이 요강을 그대로 든 채 나온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이손은 요강을 들고 어미를 본다. 어미와 눈이 마주친다.)
어미 (이손에게) 얼른 걷어. 응? 비 온다.
(부산한 어미의 뒤로 마루에 요강을 놓고 앉는 이손이 보인다. 이손은 마루 위에 놓인 할아버지의 고무신에 먼지가 앉은 것을 보고 천천히 먼지를 불어 털어낸다. 그리고 가지런히 마루 밑에 놓는다. 어미는 그제야 할아버지의 죽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잠시 그쪽을 보다가 비가 더 쏟아질까봐 옷을 마저 걷는다. 이손은 요강을 수돗가로 가져간다. 오래오래 깨끗이 씻는다. 몇번 눈물을 훔치기도 한다. 어미가 마지막 남은 옷을 걷어냈을 때, 대문이 완전히 드러난다. 개밥을 온통 뒤집어쓴 이리가 이금의 입을 손으로 막고 서 있다. 이리의 머리가 짧다. 울고 있다. 멀리서 개들의 신음소리.)
이리 나에겐 총이 있어.
(이손은 누군가 왔음을 알고 뒤돌아본다.)
이리 우리 안의 개들은 이제 엄마가 해준 밥을 못 먹을 거야.
(잠시 여기저기를 기웃거리고는)
이리 그리고 마지막 한마리는 여기, 우리 밖으로 나와버렸어요. 엄마.
(그제야 자신의 모든 예감이 맞았음을 확인한 어미가 울음을 터뜨린다.)
막.
심사평
총 65편의 응모작 중에 심사위원들은 일단 6편의 작품을 추려보았다. 「매트릭스 리플레이」(권준걸, 명지대) 「무인도 이야기」(박상훈, 서울예대) 「아름다운 집」(정선아, 동국대) 「트럭」(구성미, 동국대) 「그녀의 손가락」(이주영, 동국대) 「내 동생의 머리를 누가 깎았나」 등 6편 모두 뛰어난 창작능력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우리는 결정을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숙고 끝에 그중에서 「내 동생의 머리를 누가 깎았나」와 「아름다운 집」을 최종 후보작으로 선정하였다.
「매트릭스 리플레이」는 작가가 연극을 잘 알고 있는 듯 느껴졌으며, 읽는 희곡이 아닌 공연을 전제로 하는 희곡으로서 연극적 장치를 잘 살린 작품이었다. 기존 작품의 얼개를 이용하였는데 그것을 해체하여 자신의 것을 두드러져 보이게 하는 데에는 약간 미흡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무인도 이야기」 역시 특이한 발상으로 접근하여 읽는이의 흥미를 불러일으켰으나 이야기 구조가 단순하여 차기작을 기대하기로 하였다. 「트럭」은 일단 문장력이 뛰어나고 2인극의 어려움을 잘 극복한 수작이었으나, 기성작가들이 이미 보여준 경향들과 차별되는 면모가 약한 듯했다. 「그녀의 손가락」 또한 연극의 묘를 잘 살린 작품이라고 본다. 마치 아라발(A. Arrabal)의 작품을 읽는 듯한 감흥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역시 좀더 자기화를 하는 과정이 필요할 것 같았다.
최종 후보로 남은 「내 동생의 머리를 누가 깎았나」와 「아름다운 집」은 분위기가 묘하게도 닮은 작품이다. 뛰어난 문장구사력, 시종일관 놓치지 않는 연극적 긴장감, 그리고 그러한 긴장감이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자극에 의해서가 아니라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생성되도록 만드는 범상치 않은 능력도 비슷하다. 또한 전체적인 분위기나 극적 구성에 있어서도 기성작가의 여러 경향들을 자신의 것으로 체화하고자 노력한 흔적이 느껴진다. 수작들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고민 끝에 「내 동생의 머리를 누가 깎았나」를 선택하였다. 이 작품이 좀더 과거의 밀도를 심도있게 표현했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행간에 누적된 과거와 세상을 바라보는 작가의 비극적 시선이 잘 어우러져 깊은 감동을 자연스럽게 전해주었다. 대학생으로서 세상을 대하는 시각이 이 정도에 이르니 대견하다.
많은 작품이 거론되지 못한 탓에 낙담할 응모자들을 생각하니 심사한 사람으로서 괜히 미안한 마음이다. 그러나 응모된 대다수 작품들이 나름의 잠재적 가능성을 지니고 있었음을 분명히 전하고 싶다. 좀더 참신하고 개성있는 창작을 위한 갈고닦음과 세상을 깊이 보는 훈련만 한다면 부족함이 없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또 하나 인상 깊었던 점은 반전 부분에 들인 공력이다. 마치 작품공모에 내려면 그래야 되는 것처럼, 좀더 인상적이며 특별한, 충격적인 반전들을 설정하고 표현하였다. 그 장면만을 잘라내서 보면 무척 흥미로우며 연극적인 맛이 난다. 그러나 그러한 장면설정은 그 시점까지의 구축과정과 잘 어울렸을 때 감동을 자아낼 수 있다. 반전 장면은 좋은데 구축되어온 과정이 약하면 설득력이 떨어지고 여운을 주지 못한다. 마지막 부분이기에 작품 전체의 성패를 가름할 수도 있으므로 더욱 신경을 써야 할 것이다.
│채승훈 박근형│
당선소감
내 가난한 밑천을 드러내야겠다.
시간이라는 잔파도로 끊임없이 제 발을 적셔주시는 희곡분과 선배님들, 눈 떠보면 하나둘 정박해 있는 고요하고 단단한 나의 후배님들에게 더운 포옹을 꼭 한번 전하고 싶다.
언젠가 문을 만들고 그 문을 열어주셨던 이종대 선생님, 가시송곳을 건네주시던 박노현 선생님과 오늘도 내 안의 햄릿을 두드려 깨우시는 이만희 선생님께 진심으로 고개 숙여 감사드린다.
글을 쓰는 동안,
유리가 놓인 책상에 두 팔을 얹어두는 것이 싫었다.
손이 차가워져 자꾸만 오타가 났다.
두 팔을 얹어놓고 나는 한동안 개였고, 사나웠다.
내 안의 그릇이 비어 있었지만 너무나 작은 종지라 아무것도 담을 수 없었다.
나중엔 엎어놓고 깡깡 생떼를 썼다.
그때 나는 글 쓴다는 말이 정말 싫었다.
손끝이 맵지 못해 민숭민숭 덜 여물었을 게 분명한 제 글을 읽어주신 채승훈, 박근형 선생님. 여기 글로 다 못 남길 마음을 전합니다. 지금이 저에게 너무나 좋은 순간이고 빛나는 한때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열심히 붙잡아서 마침내 다 지워진 빈손만을 갖겠습니다.
착한 가족을 가져서 행복하다. 사는 게 너무 좋다. 소영아, 네 말대로 정말 재밌다. 그치?
│지경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