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의 목소리
한미FTA, 어떻게 넘어설 것인가
● 우여곡절 끝에 한미FTA가 타결되었다. 이에 대해 한국경제가 급속도로 미국화되고 우리 사회의 양극화현상이 더욱 심화될 것이라고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미국경제의 활력을 우리 경제에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개방만이 살길이라고 찬성하는 사람들도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두갈래 길 앞에서 우왕좌왕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와중에 정부가 한미FTA협정문을 지극히 제한적으로, 그것도 영문으로 된 장문의 문서를 특정한 컴퓨터상에서만 공개하고 있다는 것은 정말 치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지금은 국민들의 지지도가 높다지만, 정부가 이런 태도로 일관한다면 그것은 결국 허황된 사상누각이 되고 말 것이다.
지난호에서 최태욱 교수의 「한미FTA를 넘어선 한국형 개방발전모델」을 의미있게 읽었다. 사회안전망 확충, 정치개혁, 그리고 특히 북한을 동아시아국가화하는 전략이 인상적이었다. 다만 이런 문제에 대한 공론화가 너무 늦은 게 아닐까 싶어 아쉽다. 아니 정부가 이런 중요한 문제를 너무 속전속결로 몰아쳐간 것이 본질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아직 시간이 남아 있다고 본다. 대선을 앞둔 앞으로의 정치일정에서 한미FTA는 뜨거운 감자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밖에 비록 지금 당장의 일은 아닐지라도 한반도에서 남과 북이 함께 모색해나가야 할 체제모델을 제시한 서동만 교수의 논문도 혜안이 넘치는 글이라고 본다. 북한의 개혁이 더디게 진행되는 점이 아쉬운 대로 말이다.
김기열 kimkiyol@gmail.com
합의에 임하는 우리의 자세
● 작년 11월 30일 서울대에서 있었던‘뉴라이트 교과서포럼’의 심포지엄 사건은 우리 현대사의 해석을 둘러싼 갈등이 이미 학문적 토론의 단계를 넘어버렸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였다.
지난호에 실린 김성보의 「갈등과 불신의 시대에 남북현대사를 다시 읽는다」, 하정일의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의 민족과 민족주의」를 잘 읽었다.‘열린’민족사학, 민족문학론에 입각하여 이른바 탈근대론과 뉴라이트의 역사인식을 비판하는 두 글은 그 논지의 찬반을 떠나서라도 최근의‘역사논쟁’이 주의주장을 넘어 구체와 실상에 입각한 토론이어야 함을 요청한다는 점에서 적실했다고 본다.
우리 사회에서 현대사의 해석을 둘러싼 문제가 본격적인 논쟁거리가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이다. 일본의 우경화와 역사교과서 왜곡을 걱정하긴 했어도 우리의 그것에는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이러한 현상의 바탕에는 우리가 겪었던 피식민 경험의 해석에 대한 암묵적인 합의가 존재해왔다. 우리는 지배당하고 수탈당했으며 정상적인 역사발전의 경험을 박탈당했다. 이것이 우리의 합의였고 이 합의에 대한 거부는 곧 역사에 대한 모독, 국가정통성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이는 불완전한 합의였다.
문제는 합의의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어느 사회나 자신의 현대사에 대한 일정한 합의 없이는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없다. 학문적 토론과 설득의 과정이 생략된 정치적 봉합은 결국 와해될 수밖에 없다. 지금 우리는 그 합의가 붕괴되는 것을 목도하고 있다. 그리고 그 진앙이 정치적 보수주의라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새로운 합의에 도달하려는 자세가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재인식』이 점화한 현대사논쟁을 우경화의 징후로서만 이해해서는 안된다. 현대사에 대한 우리의 합의가 얼마나 허약한 토대 위에 서 있었는지부터 진지하게 성찰할 필요가 있다. 앞으로 이 문제에 대해 학계와 시민사회의 성실한 논의가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서울대 서양사학과 박사과정 안민석 ahnms123@snu.ac.kr
한국 뮤지컬에 대한 애정어린 시각
● 지난 봄호에서는 박병성의 「이제는 창작 뮤지컬이다」가 신선했다. 뮤지컬에 대해서 알고 있는 거라곤 몇몇‘해외 라이썬스 뮤지컬’의 제목이 전부였는데, 한국에서 뮤지컬이 성공할 수 있었던 조건과 이유에 대해서 친절한 안내를 받을 수 있었다. 이 글은 한국 뮤지컬의 발전을 이끈 해외 뮤지컬의 공을 평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한계를 짚어내는 것도 잊지 않고 있다. 한국의 뮤지컬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전문적인 교육과 훈련을 받은 인력, 창작 뮤지컬이 제작되고 실연될 수 있는 환경, 그리고 한국산 대형 뮤지컬의 등장이라는 세가지 조건을 말하고 있는데, 실제 현장에서 나오는 고민과 고충을 다루고 있어서 한층 실감났다.
특히 창작 뮤지컬에 관한 평가를 읽으면서 현재 한국 창작 뮤지컬이 이 정도까지 발전했다고 말하고 싶은 글쓴이의 애정을 느낄 수가 있었다. 이러한 소규모 창작 뮤지컬의 성과들 위에서 한국산 대형 뮤지컬의 성공 가능성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올해 선보이게 되는 「대장금」 「댄싱 섀도우」 두 대형 뮤지컬이‘따지 않은 샴페인’이 아니라‘자축의 샴페인’처럼‘펑’터지기를 글쓴이와 함께 바라고 싶다.
김기태 gitikim@gmail.com
2000년대 한국문학에 대한 논쟁을 읽고
● 봄호 고봉준의 평론 「문제는 실감이다」를 읽고 작년 겨울호에 실린 임규찬의 「비판의 윤리성과 최근의 비평」을 다시 읽어보았다. 고봉준은 임규찬이 이광호에게서 문제삼았던‘네거티브 전략’이 오히려 이광호를 비판하는 데 사용됨으로써 창비 비평의 현실을 정당화한다고 말한다. 즉‘해석의 과잉’에 대해‘해석의 부족’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부정함으로써 자신의 담론의 정당성을 찾으려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민족문학론·리얼리즘론의 당위성에 개인적으로는 동의하지만, 아직도 유효한가라고 묻는다면 부정적인 견해이다. 왜냐하면 첫째,‘시간의 간극’이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개별 문학작품에 대한 해석을 바탕으로 하는 문학담론은 창작이 부진할 때는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민족문학 진영의 작가들은 80년대 이후 지금까지 담론에 대한 의지는 확고해져갔지만 당대성을 재현하는 작품을 생산하고자 하는 열정은 사그라져갔다. 80년대의 민족문학론·리얼리즘론은 아직도 그 시대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다. 다만 오늘날 그것이 내뿜는 아우라의 광달거리가 멀어진 것이다. 둘째, 당대의 사회적 환경이 너무나 개별화·전문화·세계화되면서 우리 생활이 많이 변화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현재 싫든 좋든 자본주의체제에 살고 있다. 또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본주의체제 내에서 자신의 꿈과 행복을 실현하려고 한다. 따라서 개별 작품도 이러한 상황을 반영해야 한다. 그것을 외면한다면 민족문학의 입지를 스스로 좁히는 셈이 된다. 그렇다고 자본주의와 적당히 타협하라는 말은 결코 아니다.
따라서 고봉준의 “2000년대 한국문학의‘징후’를 포착하기 위해서는 담론과 조건이 아니라 작품의 실상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말에 적극 공감한다. 민족문학도 문학이론의 건재냐 퇴행이냐 하는 논쟁보다는 “한국사회의 변화된 현실을 강조하고 한국문학의 시야를 한반도적 시각으로 넓히려는” 작품들을 구상하거나 그런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고 본다. 또한 “최근의 젊은 작가들의 미학적 새로움을 21세기 한국문학의 경향성”으로 볼 것인지에 대한 진지한 토론이 개별 작품을 통해 충분히 논의될 때 한국문학의 진정한 발전이 있을 것이다.
이정훈 que-sais-je@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