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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과 현장
87년체제의 궤적과 진보논쟁
김종엽 金鍾曄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저서로 『웃음의 해석학』 『연대와 열광』 『시대유감』 『에밀 뒤르켐을 위하여』 등이 있음. jykim@h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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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 작가 황석영(黃晳暎)은 『경향신문』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옛날 얘기지만 80년 광주항쟁 이후 전국 민주화운동이 초토화됐다. 84년인가, 홍남순 변호사의 고희를 맞아 전국에서 숨죽이고 있던 재야 청년들이 우리 집에 다 모였다. 나는 신문연재 때문에 먹고살 만하다고. 160명이 몰려와 2층 계단, 화장실에까지 앉아 이틀간 맥주 80짝을 마셨다. 지금 4당으로 갈라진 정치인들이 여기 다 있었다. 나는 나이브한 문학예술가니까 지금 그 사람들 만나면 그때로 돌아가자, 87년체제 종언하고 다시 시작하자고 한다.‘어떻게 잃어버린 세월로 돌아갈 수 있느냐’고 하는데 그 근거는 남아 있다. 과거 잔재 속에서 임시변통, 가건물 식으로 생긴 현재 대선판도는 깨지게 마련이다. 이 판이 깨지기 전에 바깥에서 전국의 시민세력들, 양심적인 사람들, 온건한 사람들이 제3의 세력을 형성할 것으로 본다. 6월항쟁 직후의 초심으로 돌아가 정열을 갖고 나라를 위해 일해보자는 것이다.1
87년 6월항쟁의 자리로 되돌아갈 것을 제안하는 황석영은 지난 20년의 시간을 어디서부턴가 어긋나버린 행로로 인식하고 있다. 애도를 넘어 회귀를 천명하는 그의 몸짓 밑바닥에 있는 정서를 납득 못할 바 아니다. 또한 회귀가 전진을 위한 표어 구실을 하는 일이 역사 속에서 드문 것도 아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당면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87년 6월항쟁 직후의 세력연합 상태로 되돌아갈 근거가 남아 있다는 주장에 동의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7년의 자리에 서서 현재를 조망하는 것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된다. 87년의 경험은 그후 20년에 걸친 우리 사회의 궤적을 해명하고 현재에서 새롭게 출발하려 할 때 지침으로 삼아야 할 것을 정돈하는 인식론적 관제고지(管制高地) 구실은 충분히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적어도 내 자신의 경우 연전에 87년체제론을 제기했던 이유이기도 하다.2 물론 87년체제에 대한 여러 논의가 많은 공통분모를 가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87년체제라는 말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지난 몇년 동안 널리 쓰이게 된 밑바탕에는 87년이 우리의 현재를 인식하는 데 있어서 특권적 지점이라는 통찰이 자리잡고 있다.
나는 이런 통찰이 그르지 않다고 생각하는 데 반해, 이런 경향이 문제가 있을 뿐 아니라 위험하기까지 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예컨대 손호철(孫浩哲)은 87년체제론이 현재 우리 상황을 이해하고 더 나은 사회체제로 나아가는 데 어떤 인식론적 장애를 유발한다고 본다. 그는 우리 사회를 87년체제가 아니라 97년체제 혹은 신자유주의체제라는 관점에서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누구도 외환위기의 중요성을 부인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아가서 87년체제론에 일종의 단계론을 도입한다면 손호철의 주장과 87년체제론의 대립은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97년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기 위해 87년의 중요성을 평가절하하고, 87년에 대한 강조가 곧장 민주 대 반민주 전선의 강화 그리고 비판적 지지론의‘악몽’을 불러들일 것이라고 우려하는 손호철의 생각은 지적인 차원에서 그리고 정치적 전략의 차원에서 문제가 있다. 전략의 문제는 뒤에 다룰 것이므로 먼저 지적인 차원의 문제를 지적하고 싶다.3 그의 입장은 단적으로 말해 왜 우리가 97년 외환위기에 이르게 되었는가를 분석하기 어렵게 한다. 97년 외환위기가 구조적 변동을 야기했다는 사실 못지않게 중요한 점은 왜 우리가 그런 위기에 이르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고, 그 점을 살필 수 없다면 현재에서부터 재출발하기 위해 필요한 지적 토대가 허약해질 것이다. 나는 이 점과 관련해서 87년체제론이 강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 점은 87년체제론에 입각한 분석의 성과를 통해서 입증되어야 할 문제이며, 이 과정에서 87년체제론이 의미하는 바 또한 더 선명해져야 할 것이다. 사실 단순한 지칭 차원에서도 제법 널리 입에 올려진 87년체제라는 말에 대한 사람들의 오해는 적지 않다. 비근한 예로 최장집(崔章集)의 87년체제론에 대한 비판이 그렇다. 그는 87년체제론을 곧장 87년 헌정체제론으로 이해하고 87년체제론의 함의 또한 개헌을 통해 우리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입장으로 파악한다. 87년체제의 중요한 축이 87년 헌정체제인 것은 맞지만, 87년체제론이 87년 헌정체제를 배타적으로 강조하는 입장이라고 보는 것은 부당하다. 그는 최근에 87년체제를 지역당구조/지역당체제라고 보는 박상훈(朴常勳)의 시각의 한계를 비판하기도 했다.4 이런 비판은 87년체제를 매우 폭좁게 해석한 입장을 전거로 87년체제론을 비판하는 방식이다. 이런 방식은 부당한 것이거니와, 최장집 같은 대가에게 읽힐 만한 영광을 얻지 못한 몇몇 87년체제론자들이 명시적이든 묵시적이든 이런 식으로 87년체제를 정의했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중요한 점은 87년체제론이 현재 우리 사회의 상황, 그것이 신자유주의적 체제 재편이든, 민주주의의 위기이든, 6·15공동선언 이후 형성된 분단체제의 형태 변화든, 한미FTA든, 이런 상황을 체계적으로 조망할 능력을 입증하는 것일 터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 나는 87년체제의 궤적을 스케치해보고자 한다. 불가피하게 축약적일 이 논의가 자임한 과제를 감당하기는 역부족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통해 당면한 문제들, 특히 올봄 내내 진행된‘진보논쟁’에서 드러난 몇가지 편향에 대해 비판적 논평을 제시할 수는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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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6월항쟁은 우리 사회 전반에 걸친 구조적 전환점이었다. 87년을 전환점으로 권위주의 정치체제가 해체되고 형식적 민주주의가 제도화되었으며, 경제적으로는 박정희식 발전국가체제에서 벗어났다. 이전의 발전국가체제는 국가-은행-대자본의 연합과 민중부문 배제라는 두 측면이 결합되어 있었는데, 이런 체제의 종식으로 인해 노동뿐 아니라 독점자본 또한 국가에서 해방되었다. 하지만 구체제에서의 해방이 곧장 어떤 체제로의 진화를 의미하는지는 불분명했다.
민주화는 사회가 무엇을 정치의 대상, 즉 자기결정의 대상으로 삼을 것인지, 그리고 그런 대상에 대해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를 제도화된 절차와 선거경쟁 속으로 밀어넣는다. 우리의 경우 그것은 권위주의적 발전국가체제 이후를 어떻게 설계할지가 정치적 과정에 맡겨졌음을 뜻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정치적 과정이라는 테이블 위에 모든 카드가 올라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회세력의 포진상태와 확립된 가치정향에 따라 어떤 카드가 올라올지는 미리 규정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87년체제는 이런 선택범위를 좁히지 못했다. 타협적 민주화였기 때문에 사회세력의 재편이 취약했고, 권위주의체제를 무너뜨리는 정치혁명이었지만 구체제의 가치와 문화적 에토스로부터의 방향전환을 이룩하는 문화혁명적 성격이 매우 빈약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의 한 결과로, 예컨대 우리 사회의 공론장은 지난 20년간 독재의 그늘을 벗어나 정화되기는커녕 거의 외설적인 수준으로 더러워지고 정파화되었으며, 제어되지 않은 공격성 표출의 장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이행의 향방을 규율할 헤게모니적 능력을 가진 프로젝트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명시적으로 주장되지는 않았지만 체제 진화과정에서 점점 더 분명한 형태로 정련된 두가지 프로젝트가 있었다. 그것은‘민주주의의 확장과 심화 프로젝트’와‘경제적 자유화 프로젝트’, 혹은‘신자유주의 프로젝트’라고 명명될 수 있다. 전자의 주도세력은 민중부문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 집단에 근대적 교육과 사회체제의 진화를 통해 민주적 신념을 획득한 젊은 신중간층, 민주화운동의 세례를 받은 청년층, 그리고 다양한 사회적 소수자집단이 더해질 수 있다. 이들이 추구한 것은 정치체제의 지속적 민주화, 발전국가체제를 통해 형성된 사회적 부의 재분배, 권위주의문화의 청산과 평등주의적 사회통합, 생태적 가치의 실현, 그리고 구권위주의체제의 근본 토대로 작용했던 냉전적 반공주의와 분단체제의 점진적 해체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프로젝트를 추진한 집단은 가치체계의 수준에서 별로 정합성을 갖추고 있지 않았으며, 사회적 과제의 선차성에 대한 평가의 차이로 인해 쉽게 정파적으로 분열되곤 했다. 뿐만 아니라 이 프로젝트는 담지자집단의 열망을 일관성있게 대변하고 실현할 정치세력을 갖지 못했다는 점에서도 한계가 있었다.
후자는 관치경제에서 탈피하여 경제를 자본 주도로 재편하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프로젝트는 이미 전두환정권기에 경제관료들에 의해 시도된 것이었으나 발전국가체제 관행의 존속 그리고 냉전적 독재정권의 존재로 인해 충분히 실현되지 않았다. 민주화 이행은 경제적 자유화 프로젝트가 작동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했다. 이 프로젝트는 1970년대 말부터 형성된 영국의 새처리즘과 미국의 레이거노믹스 그리고 중국의 경제개방과 사회주의권 해체로 인해 지구문화로 부상하고 있었던 신자유주의와 공명하는 것이었고, 그런만큼 신생 민주주의체제의 환경을 제약하는 세계체제의 진화방향과 유화적이었다. 세계체제로의 편입전략을 통해 경제성장을 이룩했고 불평등한 분배에도 불구하고 성장 자체가 복지였던 발전국가의 경험에 속박된 사회성원들에게, 개방과 경쟁 그리고 성장을 전면에 내건 이 프로젝트는 설득력이 있었다. 시장 개념이 가진 간명한 설득력도 강점이었다. 하비(D. Harvey)가 지적하듯이 신자유주의는 성장과 발전의 프로젝트라기보다는 보수적인 재분배 프로젝트의 성격이 더 강하다.5 하지만 적어도 민주화 프로젝트가 제대로 갖추지 못했던 경제발전에 대한 대안들을 지닌 것으로 대중을 호도할 능력은 가지고 있었다.6
하지만 이 프로젝트는 보수층의, 보수층을 위한 프로젝트였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었다. 보수층은 구체제의 수혜자들이었기 때문에 사회적 지지를 얻기가 쉽지 않았으며, 이 프로젝트가 요구하는 기업의 투명성 제고나 부패청산 같은 일정수준의 자기혁신마저 그들에게는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프로젝트는 그들을 대리한 다른 집단에 의해 수행될 때 더 쉽게 사회적 설득력을 얻을 수 있었으며, 실제로 87년체제의 헤게모니집단으로 부상한 개혁적 자유주의 분파와 경제관료 집단에 의해서 추동력을 획득했다.
아무튼 지난 20년간은 두 프로젝트의 경합과정이었으며, 사회적으로는 이를 각기 대변하는 세력이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교착국면의 긴 지속이었다고 할 수 있다. 두 세력 가운데 어느 쪽도 상대를 결정적으로 압도할 수 없었다.7 요약하자면, 지난 20년간 경제적 자유화는 꾸준히 진행되었고 그와 더불어 재벌은 거의 괴물 수준의 사회적 지배력을 확립해갔지만, 동시에 다양한 영역에서 민주화가 확장되었으며 무엇보다 집권세력은 계속해서 좀더 개혁적인 집단으로 교체되어왔다. 김대중정권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가 지난 20년간 목도했던 것은‘시장경제와 민주주의의 병행발전’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87년체제의 행로를 두 사회세력과 두 프로젝트의 대치국면이었을 뿐이라고 하는 것은 과도하게 단순화된 서술이다. 지난 20년은 훨씬 복잡한 지그재그 과정이었으며, 이런 지그재그 행로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체제 형성을 위한 결정의 공간으로 주어진 정치과정을 살펴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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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6월항쟁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구체제에 대한 도전세력의 한 분파가 권위주의체제하의 야당이었다는 점이다. 분단체제의 효과로 한국의 정당체제는 매우 보수편향적이었으며, 권위주의체제하의 야당 또한 그 기원에서 보수적이었다. 이 집단은 그런 성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지만 독재와의 오랜 투쟁을 통해서 개혁적 자유주의 성향을 획득해갔으며, 더불어 대중의 신뢰와 지지를 얻어나갔다. 이들은 87년 6월항쟁의 성과를 자기 것으로 흡수하면서 87년체제의 헤게모니적 집단으로 부상했으며, 이들의 행로가 향후 정치과정의 중심이 되었다.
이 개혁적 자유주의 분파는 정치집단으로서 항상 정치적 다수를 지향했는데, 이는 정치집단으로서는 당연한 속성이라고 할 수 있다.8 하지만 민주화 이행이 문화혁명적 성격을 별로 갖지 못했으며 큰 규모의 세력재편을 야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이 가진 사회적 기반은 충분히 넓지 못했다. 따라서 이들은 정치적 다수 형성을 위해서 구체제세력과 투쟁해야 하는 국면에서는 6월항쟁으로 형성된 민주화세력과의 연대를 유지했지만, 권력 획득에 유리하다면 구체제세력과의 타협 또한 마다하지 않았다. 이런 타협 가운데 가장 극적이고 중요한 것은 노태우정권기의 3당합당이라 할 수 있다. 집권을 위한 것이었고 또 그렇게 주장되었지만 자신의 대의에 대한 명백한 배신이었다고 할 수 있는 3당합당은 야당세력과 구체제세력 간의 분할선을 심각하게 흐려버렸으며, 그 효과는 지속적이고 구조적이어서 이후 정치집단 형성에도 계속 영향을 미쳤다. 정도가 덜하다고는 해도 이런 타협은DJP연합이나 노무현 대통령의 대연정 제안 그리고 최근 한미FTA추진과 더불어 나타난 한나라당과의 사실상의 연정에서도 확인된다.
개혁적 자유주의 분파는 민주화세력과의 연대 그리고 구체제세력과의 타협을 그때그때 활용하면서 정치적 다수를 형성할 수 있었지만, 타협의 후과는 작지 않았다. 타협으로 인해 그들이 가진 헤게모니능력은 지속적으로 침식됐으며, 그 때문에 민주화의 진전에도 불구하고 중간파의 입지가 점점 약화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앞서 우리 사회 공론장이 건강하지 못한 한 원인으로 87년항쟁의 문화혁명성 결여에 대해 지적했는데, 민주화의 진행이 공론장의 건강성 회복에 이르지 못한 것에는 이런 중간파의 입지 약화 또한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자신의 헤게모니능력을 침식하면서까지 진행된 자유주의 분파의 행보는 민주화세력에 곤혹스러운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런 상황은 비판적 지지론과 독자세력론이 동시에 제기되는 것을 불가피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민주진영 내 정치화된 분파들의 입장이 무엇이었든 대중적인 수준에서 설득력을 가진 것은 비판적 지지론이었다.9 개혁적 자유주의 세력이 정치적 다수가 되지 않는 한 그리고 그 다수화전략에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는 한, 민주파가 자신의 의지와 열망을 실현하는 길은 좁았으며 독자세력화도 그만큼 지연될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비판적 지지론은 덫이라기보다는 불가피하게 위험을 감수한 측면이 있었지만 합리적인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다.10
비판적 지지론을 선거국면의 투표행위에 한정하지 않고 좀더 폭넓게 파악한다면, 87년 이후 사회운동의 행로를 이런 견지에서 조망할 수 있다. 87년 이후 사회운동은‘민중운동’과‘시민운동’으로 분화되었는데, 이는 사회운동의 계층적 분화로 인한 것이었을 뿐 아니라 폭넓게 파악한다면 비판적 지지론과 독자세력화라는 노선 분화에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식으로든 민주화세력의 의지를 정치영역에 투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는 세력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시민사회를 동원함으로써 선거국면에서 압력정치를 수행하는 것이었는데, 이런 압력정치는 정당체제 자체의 변형보다는 정당정치를 민주화세력의 편으로 견인하려는 것이라는 점에서 비판적 지지론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물론 2000년 총선연대의 활동 같은 인상적인 예에서 보듯이, 비판적 지지론의 힘은 만만치 않은 것이었다. 기존 정당체제의 부패와 대의능력 부재로 인해 정치사회와 시민사회의 간극이 상당히 벌어진 상황이기는 했지만, 시민사회의 자기동원력은 매우 높은 수준이었으며 성과 또한 작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종 지적되듯이 그것이 선거국면을 넘어 일상적 국면에서도 힘을 갖기는 쉽지 않았다. 선거가 끝나고 일상적 현실로 되돌아오면 열정적 동원은 제도화된 보상으로 잘 돌아오지 않았다. 강렬한 동원이 이끌어낸 개혁의 분위기가 분위기의 개혁으로 퇴행하는 경우가 빈번했고, 이로 인해 민주화 이후 우리 사회는 낙차 큰 열망과 실망의 교대를 반복해서 경험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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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구체제세력과 타협하기를 마다하지 않았지만 동시에 구체제를 밀어내며 정치권력을 획득해간 개혁적 자유주의 분파는 어떤 프로젝트에 입각해서 우리 사회를 이끌어가려 했는가? 이 집단이 독자적인 개혁의 청사진을 가졌는지는 확실치 않다. 오히려 앞서 지적한 두가지 프로젝트, 즉‘민주주의의 확장과 심화 프로젝트’와‘경제적 자유화 프로젝트’를 모두 자기 것으로 받아들였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물론 프로젝트는 빌려올 수 있으며, 그 때문에 독자성이 부인되는 것은 아니다. 두 프로젝트를 조합하는 입장과 원칙의 수준에서 독자성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유주의 분파가 이런 조합을 수행했다고 보기 어렵다. 이들은 오히려 두 프로젝트를 합집합적으로 수용했으며, 이 때문에 자유주의 분파는 우리 사회에서 헤게모니적일 수 있었지만, 동시에 진정한 의미에서 헤게모니를 행사하지는 못했다.
두 프로젝트는 결국 개혁적 자유주의 분파에게는 그들이 임의로 꺼내 쓸 수 있는 두가지 카드 내지 정책레퍼토리로 수용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이 두 프로젝트의 대립과 갈등을 중재하기 위해 그들이 구사한 비교적 일관된 방법은 경제와 여타 사회영역에서 이 둘을 각각 분리된 형태로 적용하는 것이었다. 김대중정부의‘민주화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이라는 프로젝트나, 비록‘우스갯소리’였다고 변명하긴 했지만 노무현 대통령의‘좌파 신자유주의’운운하는 주장은 이런 발상을 잘 보여준다. 실제로 한미FTA를 타결하는 동시에 3불정책은 고수하려는 노대통령의 행보를‘자비의 원칙’(principle of charity) 아래 해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가 신자유주의적 프로젝트와 민주화 프로젝트를 분리된 영역에 각각 적용할 수 있고 그것을 최선으로 여기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렇게 두 프로젝트가 병립되고, 또 그것이 자유주의 분파에 의해 수행된 것은‘결과적으로’경제적 자유화 프로젝트를 잘 작동시킨 측면이 있다. 그렇기에 구체제에서 유래한 정당과 독점자본이 스스로 수행하기 어려웠던 개혁을 해낼 수 있었지만,11 손호철이 여러번 강조했듯이 이런‘개혁’이 저항의 전선을 흐린 점도 있음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나아가서 대중들이 신자유주의적 정책의 실패를 민주화의 실패로 보게 하는 착시효과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유주의 분파의 집권이 보수세력의 집권보다 더 나빴다고 말할 수는 없다.‘경제적 자유화 프로젝트’혹은 신자유주의 정책은 극히 수구적인 문화와 제도에서 상당히 높은 수준의 민주화에 이르기까지 정책적으로 혼융될 수 있다. 아마도 강하고 일관된 민주화의 추구만이‘경제적 자유화 프로젝트’와 일관되게 충돌할 것이다. 다양한 정책혼합의 가능성을 생각한다면, 자유주의 분파에 의한 민주화와 자유화의 동시추진이 최악은 아니었다.‘사회경제적 양극화’로 요약되는 우리 사회의 현안을 생각하면, 이런 진술이 어떤 이에게는 자유주의 분파에 대한 과도한 변론으로 읽힐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역으로 결과론적이고 기능주의적 시각에서 문제를 봄으로써 자유주의 분파의 집권이 차라리 보수파가 집권하는 것만 못했다는 식으로 해석한다면, 그것은 더 잘못된 사태파악이다.
더 나아가 최장집처럼 자유주의 분파와 구체제에 뿌리를 둔 보수파 간의 경제정책의 동조에만 중요성을 부여하고 여타 영역에서 두 집단의 차이를 희석하는 것도 문제를 야기한다. 그는 “한국 정당의 균열축은 민족문제를 둘러싼 한 수준에서는 분명한 차이를 갖지만, 사회경제적 정책이라는 다른 수준에서는 이렇다 할 차이를 갖지 않는 애매한 이중성이 중첩해 있다”12고 진단하는데, 경제정책은 그렇다 치더라도 사회정책에서도 이렇다 할 차이가 없었는지는 의문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민족문제를 둘러싼 분명한 차이가 최장집의 판단처럼 그렇게 덜 중요한 차이인가 하는 것이다. 그는 대체로 민족문제를 역사적 복원으로 이해하고 남북문제에 대한 정파 내지 정당 간의 갈등을 수사적인 것으로 파악하는데,13 이런 관점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개혁적 자유주의 분파, 특히 김대중정부 이래 민주정부가 이룩한 화해협력사업, 남북경협, 남북정상회담 등의 성과는 작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경제적 이익이나 평화무드의 정착에 더해 남북한 사람들의 상상력의 지평을 넓히고 사회체제의 변혁과 혁신의 지평을 한반도 수준으로 확대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그런데 그런 협력과 교류 그리고 그것이 열어주는 새로운 가능성들을 발전적으로 전유하는 일이 어떤 세력이 집권하느냐와 무관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보는 것은 근거없는 낙관론이다. 냉전적 담론이 설령 최장집의 생각처럼 정치적 수사일지라도 언어는 종종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 자신을 설득하며, 그 자신이 충분히 도구적으로 자신의 담론을 조직한다고 하더라도 그 담론이 소구대상으로 삼고 동원하는 사회세력조차 그렇게 만들 수는 없기 때문이다. 냉전적 담론을 조직하는 자의 집권은 냉전적 퇴행으로 댓가를 지불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확실히 최근의 여러 경향들은,‘민주주의의 확장과 심화 프로젝트’와‘경제적 자유화 프로젝트’의 병행추진이 장기적으로 병리적 결과를 산출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현재의 고통이나 위기의식에 유의한다고 해도 그것이 회고적으로 과거에 대한 인식을 조정하는 것은 경계할 필요가 있다. 공정하지 못한 역사적 평가를 유발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공정한 평가는 누구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87년 이후 두 프로젝트가 지금까지 동시적으로 추진되었고, 그런 동시추진이 사회적 설득력을 가졌으며, 그것이 심각한 한계 못지않게 상당한 성취를 이룩했다고 말하는 것이 “민주화 이후 한국의 민주주의가 질적으로 나빠졌다”는 최장집의 표현보다는 더 사실에 부합한다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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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의 변동과정에 대한 평가와 별도로, 현재 널리 퍼져 있는 민주주의의 위기에 대한 진단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의 병행발전이 한계에 직면해가고 있으며, 경제적 민주화의 진전 없는 민주주의의 진전은 절반의 민주화일 뿐 아니라 그로 인해 성취된 정치적·사회적 민주화조차 밑에서부터 잠식될 수 있음이 더욱 분명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정체적 평형체제인 87년체제의 재편 혹은 또다른 체제로의 전환을 향한 분기점에 접근하고 있다고 진단할 수 있다면, 그것은 다른 무엇보다 지금까지의 방식인 민주화와 자유화라는 두 프로젝트의 양립가능성이 소진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경제적 자유화 프로젝트가 민주화 프로젝트를 압도해가는 일이 벌어진 것은 외환위기에 연원이 있으며, 최근의 한미FTA타결은 그런 가능성을 가중시키고 있다. 특히 노무현정부에 의한 FTA협상 타결은 외환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던 김대중정부의 신자유주의적 정책의 실행과 달리 그를 지지했던 세력들에게 적잖은 당혹감마저 안겨주고 있다.
이런 당혹감은 노무현정부에 대한 기대가 배반된 까닭일 텐데, 그 기대가 정당한 것이었음은 분명하지만 냉정하게 말하면 그 기대 자체가 오류를 내포하고 있었다고도 할 수 있다. 당연히 기대의 재조정이 있어야 할 것이며 올봄에 진행된‘진보논쟁’의 한 축은 이런 기대의 재조정과 관련된다. 하지만 그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그것의 뿌리를 캐묻는 작업이다. 사태를 노무현 대통령의 개성과 통상관료들의 한탕주의 같은 우연적 요소로 환원하지 않기 위해서는 87년체제론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이 필요하다.
87년 민주화 이후 우리 사회는 연성 권위주의체제라 할 수 있는 노태우정부를 거쳐 민주정부로 점차 이행해갔다. 대체로 이전 정부보다는 더 온건하고 개혁적인 정부가 계속해서 수립되었는데, 어느 정부든 자신의 성향과 지지기반에 입각해서 운동정치에 근거한 민주화 프로젝트를 통치 가능한 수준으로 제어하는 동시에, 재벌개혁과 경제씨스템 개량 같은 경제개혁을 추진하고자 했다. 하지만 발전국가체제가 허물어져감에 따라 풀려나온 사회세력은 민주화가 열어준 정치사회적 공간 속에서 자신의 진지를 구축했으며 국가권력에 의해서 쉽게 제어되지 않았다.
노태우정부는 물론이고 자유주의 분파가 집권했을 때조차 전체 사회를 규율하는 데 힘겨워했던 것은, 앞서 지적했듯이 한편으로는 문화혁명과 사회세력 재편이 결여된 87년 민주화 이행 때문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유주의 분파가 응집력있는 자신의 헤게모니 프로젝트를 갖지 못한 채 정치적 지분 유지를 위해 시민사회를 지역주의적으로 분할하는 데 구체제와 이해관계를 같이했고 정치적 다수 형성을 위해 구체제와 타협하고 섞여가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구체제세력과 자유주의 분파 간의 타협에 의해 제정된 87년헌법 또한 상황을 악화시켰다. 개헌에 참여한 두 세력은 어느 쪽 후보가 당선될지 불확실한 대통령의 권한은 약화시키고, 자신들이 일정한 지분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 의회권력은 강화했다. 민주화 이후 의회권력은 시민사회를 지역주의적으로 분할하는 데 성공하기만 하면 각 세력이 분점하는 것이 가능했다. 결과적으로 국가권력을 손에 쥔 집단은 언제나 규율하기 어려운 사회세력, 그리고 다루기 어렵거나 대통령의 권한을 상당정도 무력화할 수 있는 의회권력에 직면했다.
이런 상태에서 대통령은 자신의 주도권을 확립하기 위해 대외정책에 눈을 돌릴 개연성이 높았다. 실제로 민주화 이후 모든 정부는 내부개혁 혹은 내부세력의 순치를 위해서 대외정책을 가동했으며 그 핵심은 남북관계의 변형 아니면 금융 및 통상정책의 수정이었다. 민주화 이후 모든 정부가 이렇게 대외정책을 정부의 핵심프로젝트로 삼은 것은 국제환경이 급변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탈냉전과 신자유주의적 지구화로 요약될 수 있는 87년체제의 대외적 환경은 어떤 식으로든 우리 사회의 새로운 선택을 강요했다.
남북관계와 금융 및 통상 두 영역의 조정이 어떤 방향으로 이루어질지가 대통령의 의도에 전적으로 좌우되는 것은 아니었다. 대외정책의 향배를 규정하기 위해 국내세력들은 자신의 정치적 의지를 투입했으며, 그 결과 남북관계는 대체로 민주화 프로젝트에 의해서, 금융통상정책은 경제적 자유화 프로젝트에 의해 규정되었다. 혹자는 노태우정부의 91년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과 92년 남북기본관계합의서 채택 등은 민주화 프로젝트에 연원하는 것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역시 임수경(林琇卿)과 문익환(文益煥) 목사의 방북으로 대변되는 통일운동에 대응하기 위한 수동혁명적 성격을 지녔으며, 그렇기 때문에 정책방향은 민주화세력의 요구를 상당정도 수용하는 것이었다.14 이에 비해 경제적 자유화 프로젝트가 보수세력에 의해 견인되었음은 김영삼정부의 개방정책에서 잘 드러난다. 90년대 초반 역(逆)플라자합의에 의해 3저호황이 끝나자 보수세력의 경쟁력강화 담론이 경제민주화 담론을 압도해나갔고 경쟁력강화론은 급진적 대외개방정책을 유도했다.
그러나 이런 영역에서 대통령이 상당한 주도권을 가지고 있었음은 마찬가지로 강조되어야 한다. 방향설정을 제외하면 정보와 접근경로, 협상에서의 재량권과 의지, 관료의 동원 그리고 국내정치와 국제환경에 대한 정세판단에서 대통령은 상당한 자율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런 정책의 실현 여부를 규정하는 요인은 여러가지 정세적인 요소들이나 대외정책 대상이 되는 파트너의 의지와 요구에 있으며, 심지어 우연적인 요인들까지 개입한다. 예컨대 김영삼정부는 남북정상회담과 경제개방을 모두 시도했지만 김일성 주석의 사망으로 전자는 결실을 맺을 수 없었다.
중요한 것은 이런 대외정책이 일단 현실화되면 대단히 비가역적인 방식으로 우리 사회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노태우정부의 남북기본합의서 체결이나 김영삼정부의 OECD가입과 급진적 개방정책 그리고 그 결과 밀어닥친 외환위기로 인해 수용했던 구조조정정책 및 추가적 개방이 그러하며, 민주화세력의 입장에서 보면 87년체제 최량의 성과 가운데 하나인 6·15정상회담 또한 마찬가지다. 여기에 노무현정부의 한미FTA타결을 추가할 수 있다. 한미FTA의 경우 아직 국회의 비준 동의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만일 그렇게 된다면 이 또한 우리 사회를 비가역적인 방식으로 변화시킬 것이다.
대외정책의 이런 비가역적인 효과 때문에 우리 사회를‘97년체제’라고 부르는 것이 가능하며, 마찬가지로‘6·15시대’로 규정하는 것 또한 가능하다. 정말로 우리는 97년체제와 6·15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이런 체제변동의 길을 연 것은 87년체제라고 해야 한다. 이것은 87년체제가 필연적으로 97년체제 혹은 6·15시대를 낳을 수밖에 없었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사태 전개는 전혀 필연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양자는 87년체제의 개연적인 산물에 포함되며, 개연적인 여러가지 중에 실현된 것들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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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언급했듯이 87년체제는 다른 체제로 이행하기 위한 분기점에 접근하고 있다. 민주화 프로젝트와 경제적 자유화 프로젝트 간의 병존이 한계에 달했으며, 비록 약한 수준이었지만 이 체제의 지속기간 내내 헤게모니적 세력이었던 개혁적 자유주의 분파의 외연과 힘은 확장되기는커녕 심각하게 해체되고 있기 때문이다. 길었던 교착상태가 어떻게 끝나고 어떤 새로운 프로젝트, 어떤 새로운 세력연합이 형성될지는 아직 예측하기 어렵지만, 사회가 완전히 새로운 것을 창출할 수는 없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자유주의세력의 분해과정에서 민주화 프로젝트와 신자유주의적 프로젝트가 더 정면으로 충돌할 가능성이 클 것이다. 민주화 프로젝트를 지향하는 집단에 이 상황은 당혹스러운 것이다. 왜냐하면 현상황은 자유주의 분파의 약화가 민주화세력의 일보전진으로 연계되기는커녕 민주화세력이 일보후퇴할 가능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아마도 올봄‘진보논쟁’이 제기된 밑바탕에는 바로 이 아포리아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나는 진보논쟁이 중요한 문제제기를 했지만 성과가 뚜렷하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진보논쟁은 진보 개념을 가다듬는 것과 현재의 민주주의 위기에 대한 대안 제시라는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 전자의 경우 진보 개념을 재정의하려는 시도에 집중하고 있는데, 아쉽게도 아직까지는 그런 논의가 규범 및 가치체계의 재구성과 정련(精鍊)을 향해 충분히 나아가지 못했다. 첫머리에서 인용한 글에서 황석영은 87년체체에서 연원하는 현재의 대선판도를 가건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는데, 내게는 그가 87년체제 자체를 가건물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87년체제가 정말‘가건물’에 불과한지는 논란거리일 수 있지만, 그 말의 뉘앙스에는 일말의 진실이 들어 있다. 87년체제는 우리 사회의 장기적 미래, 그러니까 우리가 어떤 사회에 살기를 원하며 그것은 어떤 가치체계에 의해서 규율되는 사회인가에 대해 충분히 논의되지 않은 체제였다. 내가 문화혁명의 결여라고 불렀던 87년체제의 결점을 넘어서기 위해서 진보논쟁은 규범과 가치체계의 정련과 더 나은 사회의 이미지에 대해 더 많이 더 깊게 논의해야 한다.
우리 사회가 또다른 체제로의 이행기에 있다면 이 점은 특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불확실성과 회의 그리고 두려움이 드리워진 이행의 골짜기를 통과하기 위해서는 규범과 가치체계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데까르뜨는 숲에서 벗어나려는 자는 방향을 정하고 그 길을 곧장 따라가야 한다고 했는데, 이 방향설정의 힘은 규범과 가치에서 온다. 그것은 적어도 성과가 불확실할 때조차 회의감을 막아주고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자긍심으로 우리를 이끌기 때문이다.
더 나은 체제로의 이행을 위해서는 계몽과 설득작업이 필요하며 자신이 가진 자원을 전략적으로 배분하는 작업이 요구되기도 한다. 민주주의의 퇴행을 막고 가능하면 일보전진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행동지침이 필요하다. 진보논쟁에서 세가지 제안을 발견할 수 있다. 최장집의 정당체제혁신론, 조희연(曺喜昖)의 사회운동활성화론, 손호철의 반신자유주의 연대가 그것이다. 이런 제안들은 김정훈(金正勳)이 지적하듯이 만족스러운 수준의 구체성과 실현방안에까지 이른 것은 아니다. 더러는 강조하고 싶은 것에 경사되어 균형감을 잃은 진술도 엿보인다. 하지만 대안모색에서 염두에 두어야 하고 논점으로 삼아야 할 것을 명료히하는 데는 기여한 점이 있다. 그렇게 보면 진보논쟁이 “아무 주장도 하지 않는 불임의 논쟁”이었다는 김정훈의 평가는 부러 까칠한 표현을 선택한 것이라도 해도 지나치게 가혹한 것이다.15
하지만 최장집과 손호철이 그들의 논의에서 정치적 다수화 전략을 절연시키고 있는 점은 문제적이라고 여겨진다. 반한나라당 전선을 구축하기 위한 노력이 “두려움의 동원”에 그치는 것은 확실히 우려할 만한 현상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부가 실패했다면 교체되는 게 당연”하다는 원론적 진술만 반복하는 것은 노무현정부에 참여한 세력 전체를 민주화세력에서 떼어놓는 전략적 자기축소의 위험이 크다.16
손호철은 한걸음 더 나아가 “한나라당 집권의 역설적 긍정성”을 말하며, 그로 인해 “한국정치는 단기적으로는 후퇴할지 몰라도 중장기적으로는 발전”할 수 있다고 한다.17 그는 나중에 다른 글에서 자신의 이런 주장이 한나라당의 집권을 당연시하는 패배주의는 아님을 주장했다. 하지만 그 변론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이런 진술은 문제적이다. 확실히 이보전진(중장기적 발전)을 위한 일보후퇴(단기적 후퇴)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며, 매우 높은 수준의 합리성의 실현일 수 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주체가 그것을 자임하고 디자인해야 한다. 자신이 설계하여 실행하지 않은 프로그램에 대해서 이보전진을 위한 일보후퇴를 말하는 것은 부작위를 작위로 가장하는 것일 뿐이다.
그가 이런 주장을 하는 이유는 보수파의 집권이 계몽적 효과를 가져다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인데, 그런 계몽적 효과가 얼마나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이 민중의 각성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보는 것은 민중에 대한 과도한 신뢰일 수 있다. 외환위기 이후 신자유주의 정책의 작동은 우리 사회 성원을 보수화했다. 그런데 이런 보수화가 전적으로 신자유주의 정책이 민주정부에 의해서 수행되었기 때문에 생긴 것일까? 오히려 사람들은 신자유주의 체제 속에서 신자유주의적으로 행동하도록 강요받으며, 그렇게 행동함으로써 그것에 적응된 선호를 발전시켰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말한 계몽적 효과는 가능한 씨나리오이지만 그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할 근거가 박약하다. 여전히 필요한 것은 정치적 다수화 전략이며, 중요한 것은 그것이 지금까지 우리가 보아왔던 개혁적 자유주의 분파의 선거전술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내용과 가치체계에 입각한 것이어야 한다는 점이다.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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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체제가 일종의 가건물이라면 우리는 새 집을 지어야 하며, 그럴 때가 다가오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가건물 또한 우리가 비를 피하고 몸을 의탁해 살았던 집이었다. 그래서 그만큼 존중받을 만한 체제이며, 거기에 더해 존경받을 만한 면모 또한 가지고 있다. 다시 황석영의 말을 빌려보자.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대등한 가치평가는 과연 가능한가? 그것이 어떻게 대등할 수 있는가? 민주주의가 가치일 수는 있어도 산업화는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나는 형식적 민주주의가 이루어지기 전에 행사장에서 애국가나 국기에 대한 예를 표한 적이 없다. 유명한 얘기로 5공시절 광화문의 그 살벌하던 국기하강식 시간에 행인들이 모두 얼어붙어 중앙청의 태극기를 향하여 서 있던 때에 나는 시인 김지하, 김정환과 셋이서 만취하여 얼어붙은 사람들 사이를 유유히 걸어갔다. 그것은 민주주의만이 존엄을 가지고 국기와 애국가에 대한 예의를 표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19
오늘날 보수언론은 틈만 나면 남한체제의 우위를 이야기한다. 그런 체제우위론에는 남한이 북한보다 잘 먹고 잘 사는 것도 들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부차적이다. 부자가 가난한 사람보다 존엄한 것은 아니듯이 남한이 잘 먹고 잘 입는다고 북한보다 더 존경받을 만한 나라인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수언론은 북한이 열등한 체제인 이유를 정치적 독재와 참혹한 인권 상황에서 찾는다. 보수언론의 이런 주장은 그르지 않다. 민주주의와 인권이 없는 나라는 마땅히 존경받을 수 없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부터 북한과 달리 민주주의와 인권이 살아 있는 나라가 되었고, 작가 황석영에게 존중받을 만한 나라가 되었는가? 87년 민주화 이행 이후부터이다. 87년 이전 독재로 민주주의와 인권이 유린될 때 그런 일 없다고 잡아떼던 보수언론이 지금 우리 체제가 북한보다 우월함을 격조있게 지적할 수 있게 된 것 또한 87년 민주화 이행 덕인 것이다. 87년체제에 대한 존경심을 잃지 않는 것, 그것이 우리가 박정희와 전두환정권 시절 가졌던 자기 나라에 대한 도덕적 수치감에서 벗어나게 해준 체제이며 우리가 그것을 건축했다는 사실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는 것, 이것들이야말로 새 집을 짓기 위해 길을 나서는 마음가짐이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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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석영 “새 정치질서 만들기 총대 멜 생각 있다”」, 『경향신문』 2007년 1월 23일.↩
- 졸고 「노동운동의 성숙을 위해」, 『창작과비평』 2004년 가을호; 「분단체제와 87년체제」, 『창작과비평』 2005년 겨울호.↩
- 손호철 「몇가지 오해와 몇가지 반론: 〔조희연교수 비판〕 반신자유주의와 반수구, 무엇이 패배주의인가」, 『레디앙』(www.redian.org) 2007년 2월 12일.↩
- 최장집 「정치적 민주화: 한국 민주주의, 무엇이 문제인가」, 『비평』 2007년 봄호, 15면.↩
- David Harvey, A Brief History of Neo liberalism, Oxford University Press 2005, 16면.↩
- 민주화 프로젝트가 생산에 대한 대안을 예비하지 못한 것은 그것이 박정희체제에 대한 안티테제로서 구성되었기 때문인 측면이 있다. 민주화 프로젝트는 억압적 국가에서 사회를 해방시키려는 충동에 경사되어 있었으며, 박정희체제의 긍정적 유산과 부정적 유산을 신중하게 분별하기에는 박정희체제에 대한 거부감이 강했다. 따라서 신중한 재평가에 존재하는 어느정도의 역사적 거리는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으며, 최근 들어 이런 논의는 활발해졌다. 이와 관련해서 주목할 만한 글로, 백낙청 「박정희시대를 어떻게 생각할까」, 『창작과비평』 2005년 여름호 참조. 더불어 조형제 외 「신진보주의 발전모델과 민주적 발전국가의 모색」, 『동향과전망』 2006년 여름호 참조. 이 글의 필자들은 신자유주의에 대안적인 발전모델과 관련하여 국가의 역할을 정의하기 위해 “민주적 발전국가론”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런 논의는 명시적으로 박정희체제를 거론하고 있지 않지만 명백히 박정희체제의 유산에 대한 재검토를 함축하고 있다.↩
- 상징적 사건으로 표현한다면, 민주화세력은 국가보안법을 폐지할 정도의 능력이 없었으며, 구체제세력은 민주적으로 선출된 대통령을 탄핵할 만큼의 능력이 없었다.↩
- 민주화세력에 속하지만 정당체제에 편입된 집단을 따로‘개혁적 자유주의 분파’라고 부르는 것은 장점 못지않게 단점도 있다. 자칫하면 마치 민주화세력과 이 집단이 전혀 별개인 것처럼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점이 더 많다는 생각에서 여기서는 구별해서 사용했다. 그 장점은 우선 민주화세력 가운데 이들은 민주노동당의 의회진출 이전에는 독점적으로 정치사회에 진출해 있었으며, 민노당과 달리 정치사회 내에서 상당한 지분을 가진 집단이었다. 따라서 시민사회에 존재하는 민주화세력은 그냥 민주화세력이라고 하고, 이들을 구별해 부르는 것이 좋다고 여겨졌다. 또한 시민사회의 민주화세력은 자유주의적 성향의 집단에서부터 진보적인 분파, 더 나아가 극좌적인 분파도 포함하는 넓은 스펙트럼을 보이지만, 이들 가운데 정치사회에 속한 이 분파는 이데올로기적으로 그렇게 넓은 스펙트럼을 가지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이 집단은 적어도 개혁적 자유주의적 성향을 드러내고 그렇게 응집할 때만 시민사회의 민주화세력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따라서 다소 특정화해서 표현하는 것이 이들의 성향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끝으로 이 집단의 핵심은 구체제하의 야당에서 유래하지만 지난 20년 동안 여야의 분할선을 넘나드는 이합집산이 이루어졌고 이 집단이 집권세력이 되기도 했으므로‘여·야’같은 지칭으로 구별하기 어렵고 별도의 용어가 필요하다고 느껴졌다.↩
- 비판적 지지론은 87년대선에서 양김씨의 출마를 앞두고 제기된 것이다. 먼저 후보단일화론이 있었고, 그것이 실패하자 상대적으로 더 진보적이라고 여겨지는 김대중 후보에 대한 비판적 지지론이 제기되었으며, 그것에 대한 불만으로 독자후보론이 제기되었다. 이런 발생의 맥락을 고려한다면, 비판적 지지론의 개념을 확장해서 이해하려는 나의 입장은 혼동을 일으키는 면이 있다. 하지만 나는 이후의 사태를 고찰하기 위해서는 비판적 지지론의 구조적인 측면을 고려해서 확장된 개념으로 사용하는 것이 유용하다고 생각한다. 만일 87년 당시에 양김씨가 후보단일화에 이르렀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보수적 정당체제 내의 정치지도자이며 그들이 추구하는 민주화가 일정한 제약을 내포했기 때문에, 민주화세력의 단일화된 후보에 대한 지지는 비판적인 지지라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 더 일반화하면, 대중의 열망과 그것을 대의하는 정당이나 지도자 간의 관계에는 언제나 어긋남이 존재한다. 따라서 모든 종류의 투표행위 혹은 정당선호란 비판적 지지의 성격을 가진다. 오늘날 민주노동당에 표를 던지는 유권자는 민주노동당을 선호하고 그 선호를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사람들로만 이루어져 있을까? 예를 들어 선거에서 개혁적 자유주의의 승리가 확실한 경우라면 민주노동당의 정강과 정치적·정책적 능력에 대해 회의적이라 할지라도 민주노동당의 성장이 전체 정치발전에 도움이 된다는 판단 아래 민주노동당에 투표하는 유권자가 존재할 수 있다. 또한 개혁적 자유주의 분파의 우경화에 대해 경고하는 의미에서 민주노동당에 표를 던지는 유권자도 있을 것이다. 유권자 선호가 직접적으로 표현될 가능성이 높은 정당체제가 더 나은 체제이고 이를 추구하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정당과 투표자의 선호 일치는 언제나 상대적으로 규정되는 것이다.↩
- 신자유주의가 가진 일정한 개혁성 때문에 자유주의 분파는 그것을 구체제세력과 투쟁하는 데 활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런 활용은 비단 자유주의 분파만 시도한 것은 아니었다. 민주화세력 또한 구체제세력 척결에 신자유주의적 요소들을 활용했다. 하지만 이런 과정을 두고, 맑스주의 국가론에서 흔히 발견되듯이 보수세력이 개혁세력의 손을‘빌려’자신을 개혁했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곤란하다. 종종 사람들은 자신이 활용하고자 한 어떤 것에 대해 순수하게 도구적인 자세를 견지하기보다는 그것에 대한 내적 신념을 형성하기도 한다. 이렇게 유발된 신념이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헤게모니를 행사하게 되는 경로일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결과에 비추어서 보수세력과 자유주의 분파 간에 동맹이 존재한다고 말해서는 곤란하다. 그런 의미에서 노무현정부와 보수세력의‘신자유주의 성장동맹’같은 최장집의 말이 수사적인 수준을 넘어서는 것이라면 과도한 표현이다. 최장집 『민주주의의 민주화』, 후마니타스 2006, 21면 참조.↩
- 최장집 「정치적 자유화」, 20면.↩
- 최장집 『민주주의의 민주화』, 280~82면.↩
- 백낙청 「남북 합의서 이후의 통일운동」, 『분단체제 변혁의 공부길』, 창작과비평사 1994 참조.↩
- 김정훈 「아무 주장도 하지 않는 불임의 논쟁」, 『레디앙』 2007년 4월 18일.↩
- 최장집 인터뷰 「〔1987년 그뒤, 20년〕 민주개혁세력 어디로」, 『한겨레』 2007년 1월 22일.↩
- 손호철 「‘두려움의 동원정치’를 넘어서자」, 『레디앙』 2007년 1월 31일.↩
- 백낙청은 최근에‘변혁적 중도주의’를 제창했는데, 나는 이 주장이 아직 구체성을 덜 가지고 있긴 해도 현재 남한 민주주의의 위기 극복과 분단체제 극복을 위해서 필요한 정치적 다수화에 대한 고민을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중도의‘중(中)’이 과녁의 한가운데를 꿰뚫는 것을 뜻함을 염두에 둔다면, 중도란 그저 좌우파의 가운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의 핵심을 관통하고자 한다는 적극적 의미를 내포한다. 그 적극적 의미가‘변혁적’이라는 수식어 안에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 황석영 「‘개똥폼’잡지 말고 현실의 저잣거리로 내려오라!」, 『오마이뉴스』 2007년 2월 5일.↩